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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 세 가지 유형의 성화관과 십자가 전후의 연속, 불연속 ] 2000.10.07 - 2001.03.30묻고답하기[신학]

[ 세 가지 유형의 성화관과 십자가 전후의 연속, 불연속 ] 2000.10.07 - 2001.03.30

이름 : 관리자(IP:122.47.55.30)

[ 세 가지 유형의 성화관과 십자가 전후의 연속, 불연속 ]
2000,10,7 박병규

성화론을 몇 가지 유형으로 분류해 보면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방목형, 개 줄형, 고무줄형이 그것입니다. 방목형이란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선택한 자에 대해서 풀어놓고 점점 괜찮은 사람으로 만들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개 줄형은 사람들이 조금씩 변해서 하나님의 뜻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하나님께서 개 줄로 묶듯이 해서 끌고 가신다는 것입니다. 고무줄형은 방목형과 개 줄형을 적당히 썩어놓은 것입니다. 방목형은 점진적인 성도의 영적 성장을 전제한 것이고 개 줄형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볼 때는 방목형보다는 개 줄형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됩니다. 만약 방목형이라면 역사의 흐름에 따라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보다 조금씩 더 하나님 앞에서 나은 민족으로 변화되어야 하겠지만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역사가 진행됨에 따라 더욱 악해져 갔다는 것입니다.
이후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전후로 나눠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성령강림 전이었으므로 그랬고 성령 강림 이후에는 점진적인 인간성의 발전이 가능하다는 견해와 이후에도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와 동일하게 그러한 발전이란 있을 수 없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즉 십자가 전과 후를 동일하게 보는 견해와 다르게 보는 견해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십자가 전과 후가 동일하다고 봅니다.
십자가 사건 이후에도 구약의 이스라엘의 모습과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것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그 어떤 것도 우리의 것이라고 내 세울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성품이나 사람됨조차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사람됨이 그것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언제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거두어 가시면 그 순간 우리의 것인 줄 알았던 것이 모두 사라지는 것입니다.

[ 세 가지 유형의 성화관과 십자가 전후의 연속, 불연속에 대해 ]
2000,12,7 송원식

박병규님의 재미있으면서도 유익한 구분 잘 읽었습니다. 님의 의견에 동의를 하면서 사족을 달려고 합니다. 님은 주로 성화의 방법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는데 저는 성화라는 개념 자체가 비 성경적인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성화라는 개념이 제게는 인간의 신화(deification)로 여겨집니다. 방목을 하든 개 줄을 하든지 결국 개가 인간이 된다든지, 아니면 좀 더 우수한 품종의 개가 만들어져 가는 것을 성화라고 하는 것 같다라는 것입니다. 신학자들이 성화의 시점을 놓고 즉각적이냐 점진적이냐를 구분하지만 그 근본 마음은 인간을 도덕의 완성과 궁극적 선의 실체인 철학적 신과 일치시키려는 몸부림인 것으로 여겨집니다. 시간에 대한 견해의 차이는 있지만 도덕을 기준으로 인간이 신이 된다는 것을 확증하는 것이 성화론이 아닌가 싶습니다. 성화론을 풀어쓰면 뱀이 하와에게 한 말과 같아질 것 같습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 그러므로 성화론은 인간이 신이 되고 싶은 욕망을 보증하고 표출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 목사님, 질문이 있습니다 ]
2000,12,2 김경원

이근호 목사님, 질문이 있습니다.

1. "성경의 말씀은 우리의 입술로 증거되는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해서 증거되어지는 것이다"
2. "우리의 삶은 말씀을 증거하는 도구이다"

위의 두 문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목사님의 글이나 테이프를 듣다가 이해가 되지 않아서요. 참, 그리구요, 말씀과 삶이 따로 따로 일 수 있나요? 아니면, 말씀과 삶은 언제나 같아야 하나요? 말씀과 삶에 대한 관계를 설명 좀 해주세요. 목사님의 글은 너무 어려워서 그러는데요, 좀 쉽게 설명 부탁드립니다.

[ '목사님, 질문이 있습니다'에 대해서 ]
2000,12,2 이근호

우리의 삶 속에는 생각과 사상 같은 것도 포함됩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행함'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행함으로 (혹은 우리의 삶으로) 예수님을 증거한다는 것은 자신의 자랑거리를 드러내라는 말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절망감과 죄성을 자백하고 거기에 대한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와 은혜를 증거하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자신의 삶이 이제 건전하고 경건해졌다는 것' 자체를 증거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내뱉는 죄는 항상 자기 위주에 바탕을 두고 터져 나오기 때문에 하나밖에 없는 주님의 의를 증거하지 않고 '자신의 의'라는 이름의 죄를 증거할 가능성이 다분히 있기 때문이죠. 여전히 자기 자신에게 절망하지 않고 기대를 거는 자에게는, 이렇게 말이 어려운 말이지만 진정으로 자신에게 실망한 자에게는 이 말이 기쁨의 말이요 희망의 말이 될 것입니다.

[ 자기 부인이 없는 믿음과 몸의 기상변화 ]
2000,12,2 정철민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화목제물 되심으로 하나님과 화평케 된 사실로써 주어진 참된 평강을 모르는 자는 언제나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두고 평강을 얻으려고 한다. 자신의 몸의 기상변화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된다. 그래서 예수를 믿더라도 병든 자는 병든 것이 평강이 아니라 여기고, 돈이 없는 자는 돈이 없는 것이 평강이 아니라고 여긴다. 이들은 마귀가 주는 평강을 참된 평강이라 생각한다. 창세기4장에 등장하는 가인과 그 후손들의 모습은 자신이 무언가 소유함으로, 가짐으로, 하나님보다 더 높은 위치에 섬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진노의 불안을 해소해 버린다.
참으로 멋진 모습이다. 물론 이 불안의 대상이 이미 변질되어 버린 것은 분명하다. 자신이 소유하지 않으면 그렇게 불안한가? 믿음이란 이런 죄인을 여지없이 밝혀낸다. 자신의 몸에 무엇인가 있지 않으면, 그것이 건강이든, 돈이든, 목사이든, 강도사든, 전도사든.
이렇게 말하면 나는 그것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라고 하면서 자신이 하는 일 자체를 통해 의미를 가지려고 하는 자들, 이런 자들은 왜 창세기 4장이 기록되었는지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왜 창세기 1장부터 시작하는 지도 알지 못하는 자이다. 그래서 이들은 요한복음 1장 1절부터 시작하지 않고 3장 16절부터 시작하는가 보다.
참 재미있는 현상은 결코 자신들은 가인의 후손이 아니라 믿음의 계통이라고 주장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면서 하는 행동은 믿음의 계통들이 증거하는 예수님이 아니라 자신의 몸에 의미를 두는 가인의 행동을 해댄다는 것이다.
이들의 특징들을 보면 겉으로 '말씀, 말씀' 하지만 실제 말씀을 말하면 힘과 무식함으로 밀어붙인다. 아볼로에게 게임도 안 되는 유대인들. 아볼로가 무엇을 증거했는지를 생각해 보라. 예수님 앞에서 꼼짝 못하는 유대인들. 죽이자. 그래서 죽여버렸다. 신경질 난다는 것이다.
이곳에서도 그러한 일들이 동일하게 일어난다. 주님을 증거하면 항상 사람을 이야기한다. 예수님을 믿자고 하면, 그러면 우리는 뭐냐는 것이다. 예수님의 주되심을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이들은 인간100%, 하나님100%를 너무나도 충실히 배웠다. 이들의 주장은 참으로 재미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살았다 라는 것도 믿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새 생명의 삶을 살자는 것이다.
한번 생각해 보자. 우리 죄의 몸이 죽은 것이 정말 실제로 일어났는가? 그러면 살았다는 것도 역시 믿음이어야 하지 않는가? 죽을 때는 몸의 행위가 없었는데 살았을 때에는 몸의 행위가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인가?
자, 그 다음을 보자. 살았으니 이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다고 한다. 믿음, 믿음으로 해놓고 이제 자기 행위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이다.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아니 새로 산 나의 삶은 주님이 사시는 삶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그런 믿음을 말해야지, 주님이 하심을 말해야지, 왜 자기의 행위를 논하는가 말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의 강조점은, 새로운 생명을 받은 자기에 있음이 분명하다.
이런 사람은 아무리 믿음을 이야기해도 알아듣지 못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나 우상을 섬기는 자들이나 무엇이 다른가? 결국 자신의 행위의 열매로 먹고사는 자들인데. 아마 이런 식으로 목회를 하면 잘 될까? 사람들에게 감동도 끼치고 사랑 많은 우리 목사님이라는 대우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말만 잘하는 목사가 아니라 말이다. 그래서 그런 교회는 사랑이 넘치는 교회가 될 것이라....
지식과 삶이 조화를 이루는 목사, 참으로 훌륭한 목사이다. 이것이 초대교회 모습이란다. 그래서 김광윤 목사님의 '한 발자욱'이라는 말이 얼마나 중요한 말인가? 결국 사람이 기뻐하는 것으로, 처음 출발점과 동일하게 간다. 실상 누구에게든지 참으로 예수님만 믿는구나.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구나. 예수님밖에 모르는 구나 라는 칭찬을 들어야 할 터인데. 저주가 있을 칭찬을 들으면서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목회자 상이라고 우긴다.
그래서 이곳에서 글을 읽고 배우는 사람들이여. 목회를 잘하려면 이근호에게 배우고, 이근호가 비판하는 목사들과 같은 모양으로 목회를 하라. 그러면 사람들이 환영을 할 것이다. 우리 목사는 똑똑하고, 유도리도 있고, 사랑도 있고.
주님 되신 예수님 한 분만이 증거되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었든가? 성령 받으니 주님 전하지 않고, 주님 전하는 자신도 함께 전하다. 자신도 이제 새롭다는 것이다. 믿는다는 것은 반드시 자신이 부인되지 않고는 나오지 않는 말인데. 이젠 믿음에서는 졸업을 했는가보다. 결국은 자기 행위의 열매를 먹고사는 자들은 예수님을 죽인다. 그것도 모르고 성경에 있다고 하면서 우긴다. 그래 우길 자는 계속 우기는 것이 원리이다. 그렇게 우기지 않으면 기적이다.

[ 질문합니다 ]
2000,12,11

이 목사님, 질문이 있습니다. '본회퍼'라는 신학자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고 싶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자인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목사님의 답변을 듣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 '질문합니다'에 대해서 ]
2000,12,12, 이근호

본 회퍼의 일대기라든지 신학에 대해서는 시중에 많은 책이 나와 있기에 상세한 것은 서점에 가서 잠시 시간을 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본 회퍼의 책을 대한 사람들의 평이 구구 각색인 것이 재미있는 현상입니다. 제 의견을 잠시 말씀 드리자면 이렇습니다.
본 회퍼에게는 보수주의면과 자유주의적 신학의 면 두 가지가 공존합니다. 어떤 점이 보수주의적이냐 하면 교회주의를 철저히 배격한다는 것입니다. 즉 집단적으로 한 통속이 되어 움직이는 신앙을 일체 인정하지 않는다 것입니다. 오직 말씀이 그 사람에게 역사하고 능력 있게 움직이게 하는 것만이 신앙이지 다른 사람의 지시나 통제에 따라 다니는 그런 행정적, 제도적에 따라가는 신앙을 신앙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보수주의적입니다.
반면에 자유주의적인 요소는 무엇인고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과 고난을 사회적으로 혹은 정치적인 억압으로 풀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하나님 말씀과 대조한 상태에서 거기서 발견되는 자신의 무서운 죄 때문에 고통 하는 고통이 아니라 이 사회가 타인을 학대하고 억누르고 이용하는 그런 죄악에 대해서 단호하게 대처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도 이런 본 회퍼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야고보서 5장, 에베소서 6장, 디모데전후서). 그러나 이런 성경 말씀에서도 그 사회적 죄악을 대처하는 인간 또한 자신의 욕망과 죄를 발생됩니다. 즉 본 회퍼처럼 현 세상일에 민감하게 대처하는 그 대처 방식 속에 바로 본 회퍼의 숨어있는 근원적 죄가 또 튀어나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보기에는 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언약적 관점에서 예정론에 입각한 해석에 주력해서 이것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려는 분이 아니라 사회에 대한 소위 자칭 그리스도인이라는 자들의 책임성을 촉구하는 쪽으로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 분이라고 사료됩니다(물론 본 회퍼 개인적으로 십자가의 은총을 부인하고 있다는 증거가 있다는 이야기는 부분에 대해서는 함부로 이야기하면 곤란할 것 같습니다).

[ 비판을 잘하네 ! ]
2000,12,18 나그네
어떤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교회에 대해 너무나 부정적이었습니다. 이유는 교회가 너무 잘 사는 자들의 모임이 되어가고, 진정 사랑을 실천하는 그러한 모습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하는 자를 만났습니다. 그 증인은 복음을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오늘날 교회가 복음을 떠나 있음을 지적했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자들의 모임이 되었고, 자신의 이름을 남기기 위한 모임이 되었고, 자신의 소신을 마음껏(회사에선 기죽어 살다가) 펼치는 모임이 되었습니다. 복을 받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들이 모입니다. 또한 심심한 자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강단에서의 설교는 이들을 끌어안기 바쁜 그러한 설교를 하며, 장로들은 그것을 아주 좋아합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니까? 실상 사람들이 그 곳에 가는 이유는 마땅히 이곳에서 다른 사람들을 만날 모임이 없기 때문인데...
이렇게 저렇게 교회를 비판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실상 이 비판은 그 사람들을 향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사람들을 향한 것이라면 그 설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설교를 듣지 못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실상은 설교를 듣는 자들을 향한 것입니다. 회개할 마음은 없고,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욕심을 챙기는 자들이 자신들임을 알기를 바라며, 오직 그분의 긍휼과 은혜만을 바라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설교를 합니다. 교회란 주님만을 사랑하는 자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주님만이 아니라 다른 곳에 관심을 두면 교회는 분열이 일어나고, 이미 그것은 하나됨이 없는 교회이며, 그 교회는 주님과 무관한 자들의 모임이 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함께 성경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열심히 참석하고 즐거워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렇게 욕하고 싶은 자들을 사역자가 마음껏 욕해주니 말입니다. 그러나 점점 시간이 흐르면서 그 욕이 자신에게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이 말씀에 대해 질문할 때, 모든 것이 자신의 욕심을 위해 말씀을 보고 있음이 여지없이 드러납니다. 그러자 그는 떠났습니다. 다시 옛날 자신이 그렇게 욕하던 교회, 싫어하던 교회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새로운 삶을 찾았습니다. 그곳에서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봉사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잠시 떠나갔을 때 가르쳐준 그 사람을 욕합니다. "나는 그 사람을 잘 안다. 말씀은 그런 데로 가르치지만 너무 교회 욕을 많이 한다"
참으로 자신을 가리는 모습이 별납니다. 이런 사람을 자주는 만나지 않지만 가끔 만납니다. 주님을 믿자는 데 욕하는 것을 즐기고, 남을 내리깔고 비판하는 것을 즐기는 자의 결말 중의 한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금 이곳에서도 이러한 일이 그곳과 동일하게 일어남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을(우상) 섬긴다는 말씀대로 임을 봅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짐을 감사할 뿐입니다. 증인은 이러한 자, 즉, 남을 욕하면서 자신은 괜찮은 자인 체 하는 자를 교회에 발 딛지 못하게 예수님만을 증거하며, 그 외에 것은 다 우상임을 여지없이 증거하는 자입니다.

[ 궁예의 몸부림과 목사의 몸부림 ]
2000,12,8 강만호

* 닮았다 - 아니 같다 - 아니 아니 정말 똑 같다 - 그러치 않아여 *

연화 : 금강산에서 온 설부라는 도인이 폐하를 살리셨사옵니다.
그 도인을 찾아 후한 상급이라도 내려야 할 것으로 아옵니다.
궁예 : 그자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소이다. 그냥 놓아두시구료.
진정으로 도를 아는 자들은 속세의 상급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법이외다.
연화 : 하지만.......
궁예 : 그것보다도 이보시오, 황후.
연화 : 예, 폐하.
궁예 : 내가 만약에 죽었더라면, 황후는 어찌하려고 했소?
연화 : ..... 그게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궁예 : 허허, 그냥 해본 소리오. (한숨을 지으며) 나는 말이오.
지난 번 내원 에게도 이야기를 하였소이다만 한참 동안 저승을 헤매고 다녀온 사람이오.
죽었다가 깨어나 보니, 정말로 세상이 달리 보입디다.
연화 : 어떻게....... 말이옵니까?
궁예 : 모두가 사악한 것들 투성이오.
나는 저들에게 많은 것을 주었는데, 저들은 그것을 잊고 있어요.
나는 은혜로써 저들을 대했는데, 저들은 악으로써 나를 대하더라 이 말이오.
연화 : .........?
궁예 : 나는 저 끝없는 북방의 대륙의 제국을 꿈꾸고 있는데,
이 소인배들은 작은 땅덩어리 안에서 서로 헐뜯고 자신들의 밥그릇만 찾을 생각을 하더라
이 말이오. 무슨 말씀이신지 아시오이까?
연화 : 이해가..... 갈 것 같사옵니다.
궁예 : 이래가지고는 아무 것도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소이다.
나는 뼈저리게 느꼈소이다. 그리고, 너무도 무섭고 공포스럽다는 것을 알았소이다.
연화 : 무엇이 말이옵니까, 폐하?
궁예 : 죽음 말이오, 죽음을 경험하고 보니 세상이 너무 짧고 허망하다는 것을 느꼈소이다.
이 세상에 나왔으면, 그 허망함을 깨고 진정한 삶 의 이유를 찾아야 하는 것이 인간이오.
나는 그것을 이루고자 몸부림치는데 저들이 따르지를 않고 있어요.
이제 그것을 보여주려하오.
연화 : 어떻게 말이옵니까?
궁예 : 세월이 가게 되면서 아시게 될 것이오.
사람들은 금방 나의 뜻을 알고 따르게 될 것이오. 길은 그것 밖에 없어... 그것 밖에...
연화 : .........?

(중략)

궁예 : 나는 미륵이다. 나의 관심법으로 보면, 누구도 내 앞에서 거짓말을 하지 못하느니.
자, 내가 입정에 들 터이니 대답할 준비를 하거라. 내가 너희들 마음을 곧 보겠노라.

(중략)

해설 : 철원환도. 궁예가 나라 이름을 마진으로 바꾸고 연호를 무태라고 한 지 일년 만인
서기 905년, 단기로는 3238년인 그 해 7월, 궁예는 드디어 철원의 축성을 끝내고
거국적인 환도 길에 올랐다. 그리고, 이후, 숨어 있던 그의 야심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의 야심..... 그랬다. 그것은 야심이 아니라, 삼한의 통일과 대륙의
꿈을 향한 궁예의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때부터
궁예의 폭정이 기록에 서서히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 KBS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 76회 대본 중에서 )

[ 목사님은 구원받았습니까? ]
2000,12,23 공혁

목사님, '목사도 구원받아야한다'는 글 잘 읽어보았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글에서 의문이 생기더군요. 어떻게 목사님의 생각의 기준에서 다른 목사님들에게 구원이 없다고 결론하셨는지요. 죽고 사는 문제는 하나님께서 결정하시는 것 아닌가요. 목사님의 말이 옳다면 대한민국은 사탄의 소굴입니다. 그렇다면 목사님은 구원받았습니까? 글에 성격을 보아서는 목사님에게서만이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말하는 것 같은데 아닌지요.

[ '목사님은 구원받았습니까?'에 대해서 ]
2000,12,24 이근호

누가 구원을 받고 안 받고 하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 복음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택한 자를 건지신다는 데 있습니다. 구원을 가지고 타인과 경쟁하는 게 아닙니다. 제 글은 취지는 이러합니다. 저라고 할지라도 관심사가 "누가 구원되었지? 누가 탈락되었지?" 라는 데 정신을 쏟게 되면 결코 제대로 복음을 이해한 자라고 볼 수 없다는데 있습니다. 즉 저라고 할지라도 "나만 구원받았고 다른 목사들은 다 지옥 간다" 라는 데 정신 쏟고 있으면 구원받았다고 장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 자존심을 더욱 공고히 하고 예수님까지 동원해서 자기 만족거리를 기어이 챙기려는 그런 관심에 빠져 있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제 글은, 엉뚱한 자기를 고발하는 글입니다. 본 글은 온통 관심사를 남과 자기를 비교하는 것에다 복음을 이용하는 자를 가려내는데 도움이 되고자 쓴 글입니다.

[ 'PD수첩'을 보고 ]
2000,12,20 송원식
PD수첩을 보고 두서없이 적어 봅니다. 정리되지 않은 생각이라 죄송하지만 발제 라고 생각을 하시고 좋은 의견을 기대합니다.
이번에 방영된 PD수첩은 이례적으로 한국의 대형교회의 세습화와 그에 따른 갈등과 문제를 다루었다. 이것이 이례적인 것은 할렐루야 기도원이나 만민 중앙 교회의 문제와는 다르게 고발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를 하고 요구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누구나 공감하는 사회적인 불법을 자행하지 않을 때는 감히 다루지 못하는 성역의 특혜를 교회와 종교계는 누리고 있다. 특별히 환자라는 전통적인 꼬리표가 붙은 광신자가 많은 기독교에 대한 문제를 다루는 것은 벌집을 쑤시는 행위라는 것을 이 방송국은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불법도 없고 그러기에 자칫 잘못 다루면 심각한 저항에 부딪히게 되는 교회내의 문제를 다루었을까? 마치면서 교회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언급하고 이어서 맹인 공동체를 보여준 제작자의 의도는 무엇인가? 이러한 것으로 추정해 보면 "제대로 좀 해라"는 것이다. 왜 남의 문제에 간섭하느냐고 교회가 묻는다면 교회도 이 사회의 일원으로 이 사회 전체가 제공하는 혜택을 같이 받고 있고 교회도 이 사회에 어떤 영향력을 주고 있는 사회의 내적 구성체이기 때문이라고 답할 것이다. 이 다원화된 사회의 일원으로 제 기능과 역할을 잘해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예로써 맹인 공동체와 자신들이 생각하는 건전하고 바람직한 교회와 목회자를 제시해본 것이다.
이런 것을 통해 과연 이 사회가 원하는 교회 상은 무엇이며 이 사회가 교회를 통해 기대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본다.
다원화되고 기능을 중심으로 분화된 사회에서 교회도 일종의 기능 집단으로 분류된다. 그러므로 교회가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그 자리 매김을 하려면 무엇인가 그 사회에 기여하는 기능이 있어야만 한다. 그것은 소극적이고 개인적인 면과 적극적이고 사회적인 면으로 구분할 수가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가 안고 있는 과도한 경쟁심과 패배에 대한 불안으로 말미암은 스트레스, 심화되고 극대화되는 빈부의 격차 및 소외된 집단의 잠정적인 사회 불안 요소, 기능 사회가 안고 있는 사람의 각종 소외와 무의미성 등등에 대해 종교의 분야에서 제공해야하는 기능을 이 사회는 요청하고 있다. 각종 종교 단체의 사기성과 파렴치함을 이 사회가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사회나 정부가 그 자체의 성격과 재정적인 문제로 감당하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하는 데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종교가 제격이라는 것을 사회는 알고 있다. 술집과 창녀촌 그리고 도박장 등의 폐해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 사회가 이런 것들을 허락하는 것은 그들이 담당하고 있는 기능 때문이다. 사회는 그 자체의 통합과 생존을 지향하는 데에 유익한 것은 무엇이나 선한 것으로 본다. 이 사회는 궁극적인 것과 본질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 그저 기능이 있을 뿐이다. 자체로 선한 것을 규정하거나 인정하지 않는다. 역할과 기능에 따라서 나오는 실질적인 효능에 따라 그 실재를 평한다. 아무리 술을 많이 먹고 일탈행위를 하더라도 그 다음날 출근을 하여 다시 생산을 기쁜 마음으로 하면 술집은 제 역할을 충분히 감당한 것으로 영구히 이 사회에 존속할 가치를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각종 스트레스에 찌들려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여 새 힘을 불어넣어 주고 정신적, 육체적, 경제적 박탈감과 소외를 해소시키고, 경쟁 사회에 적합한 가치관과 윤리를 종교의 차원에서 마련하여 가치갈등이나 아노미 현상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과 과중한 세금 부과로 오는 저항이 없는 자발적인(?)헌금으로 쌓인 돈을 정부나 사회가 원하는 곳에 쓰기를 원한다. 집단 내의 자체 모순이나 부패는 이러한 대(代) 사회적인 기능을 통해 인격이 되고 더 나아가 자신의 존립과 영광만을 추구하는 신이 된 정부나 사회로부터 면죄부를 선사 받는 것이다. 사회가 바라보는 견지에서는 이러한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교회가 부패하고 타락한 교회일 뿐이다. 참으로 이 사회가 원하는 교회상은 술집작부나 창녀 그리고 문화센터나 복지센터이다. 이러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교회는 이 사회에서 퇴출되어야 하고 기능적 대체물로 반드시 대체되고 말 것이다. 이러한 기능적 대체물은 지금 교회와 경쟁관계에 이미 놓여 있다. 민간 단체, 문화 단체, 취미 생활 단체, 전문적인 상담가와 각종 오락 및 유흥 시설과 도구들이 교회의 기능을 떠맡음으로써 무기능적인 교회의 퇴출을 기다리고 있다.
이러한 사회의 요구와 자체 성장을 위해 교회는 우리 사회에서 대체로 그 역할을 잘하였다고 평가를 받았다. 물론 진보적인 쪽에서는 이 말에 상당한 불만을 표시하겠지만. 사실 진보적인 교회가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관심을 가졌다는 것은 보수의 개인화 되고, 교회주의화 되고, 영성화 되어 가는 것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자리를 매김하고 영역을 확보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모두 이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의 치유자와 위로자로 자처하면서 그것을 수단으로 교세를 확장해 왔다. 그 기능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가 아니라 신이 된 이 사회와 정부로부터 그리고 민중들로부터 은혜를 풍성히 받아 누렸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기능적 대체물이 많이 생긴 가운데 과연 교회가 그 은혜(각종 세제 혜택과 행정상의 편의 등등)에 비해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평이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 PD수첩은 친절하게 교회성장연구소(방영된 교회 중 하나의 부설 기관 중 하나)에서 할 리포트를 대신해 주면서 이 사회의 전도사이고 선지자로서 영적 각성(?)을 불러일으키는 신의 의지와 말씀을 전한 것이다. 이 말을 신의 말로 듣고 그대로 실천하는 목사와 교회는 성장할찌니!!
이러한 사회의 말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드리면서 성장을 꿈꾸는 소위 보수 쪽의 진실하고 열심 있고 똑똑하고 더구나 하나님으로부터 보냄 받았다는 목회자는 치유와 위로의 목회 혹은 윤리 운동으로, 좀 더 진보적인 목회자는 문화센터화한 교회나 법 퍼주는 복지 시설로 교회를 정의하면서 이 사회의 요청에 응답하려고 한다.
그러나 과연 교회가 무엇을 주면서 그 존재를 확인하고 존속되는 것인가? 교회는 받는 존재이고 증언하는 공동체가 아닌가? 교회는 인간적인 것을 나누는 곳인가 아니면 인간에게 없는 것을 고발하며 자복하며 참으로 줄 수 있는 분을 고대하는 사람들인가? 더구나 교회는 구원하는 존재인가 아니면 구원을 받는 존재에 머무는가? 교회는 하나님의 일의 업적으로 말미암은 것을 받고 누리는 존재인가 아니면 예수님의 못다 한 것을 오시기 전까지 해놓아야 하는 막중한 숙제를 하는 존재인가? 교회는 죄인이었다가 의인된 사람들의 재활 모임인가 아니며 여전히 주님 되신 예수님만을 그리고 그의 은혜만을 끝까지 죄인으로서 간청하는 자들인가? 우리는 가진 것이 없기에 줄 수 없으며, 볼 수 없는 자이기에 인도할 수가 없으며 들을 수 없기에 전할 수가 없는 존재이며 그러하기에 오직 참으로 보며 줄 수가 있으며 전할 수 있는 주님 예수의 행위에 기대를 거는 존재가 아닌가? 주님께 붙은 지체로서 다른 지체를 사랑하지만 그 지체를 참으로 유지하고 보존하는 것은 머리되신 주님 예수만이 하실 수 있고 하는 일임을 고백하는 존재가 아닌가? 주님을 따라가다 보니 생기는 고난과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여 배척받는 것은 무슨 차이가 있는가?
이미 창녀로서 줄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교회는 그 인간적인 것을 주어라!! 참으로 창녀다워라!! 그러나 우리는 철저히 이 사회의 무용지물이 되리라! 우리는 이 사회의 구성원이 아니고 지나가는 과객이리라! 진정으로 성령을 받은 자는 예수님과 사랑을 속삭이기에 너무 시간이 부족하고 딴 데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다. 하나님이 하시고 이루신 일에 감탄하기에 여념이 없다. 참으로 교회가 줄 수 있는 것은 예수를 싫어하고 죽이는 이 사회에서 미움받고 죽임을 당하여서 심판의 근거가 되는 것이리라. 무엇을 보려고 나왔느냐고 책망하며 자신의 메시야 됨을 거부하는 세례 요한과는 대조적으로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를 물으며 구원자임을 자청하는 교회는 분명히 적그리스도이리라 !!

[ 믿음의 행위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
2001,1,6 공혁

'새 생명의 삶의 주장이라는 허구성' 이라는 글을 읽어보았습니다. 목사님 언약적인 관계라는 말이 적절한 것 같은데 어째든 언약적인 관계라는 큰 덩어리를 놓고 볼때 분명히 율법과 믿음이라는 두 가지를 놓고 비교하여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에서 오늘날 분명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은 믿음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우리가 율법과 믿음의 관계에서만 한정하여 이야기하여야 할까요. 이제는 율법 안에 있는 믿음과 믿음 안에 있는 율법을 발견해야 하지 안나 생각합니다.
구약의 율법 안에는 분명 믿음 되시는 예수님이 숨겨져 있음을 알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마음에 새기지를 못하였습니다 믿음이 없었기에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죠. 율법의 행위에는 분명히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구약성경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율법에 대하여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나는 율법을 페하려 온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목사님, 어느 누구도 감히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폐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마저도 율법을 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율법과 믿음은 땔래야 땔 수 없는 것이며 따로 각기 구별 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이제 우리는 완성된 율법에 대하여서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 정말이지 '새 생명의 삶'은 행함이 아니라 끝까지 예수만을 믿음 그 자체이다" 라는 말에서, 저는 목사님의 글을 읽고 목사님은 믿음의 행위를 부정하는 것으로 받아드려 졌습니다. 목사님은 믿음에는 행위가 없다고 말씀하신 것인가요? 믿음의 행위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 '믿음의 행위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에 대해서 ]
2001,1,6 이근호

"이제는 율법 안에 있는 믿음과 믿음 안에 있는 율법을 발견해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믿음이 없었기에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죠."
"예수님께서 율법에 대하여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나는 율법을 페하려 온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시키기 위한 것이라고요"
"어느 누구도 감히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폐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마저도 율법을 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믿음의 행위를 부정하는 것으로 받아드려 졌습니다. 목사님은 믿음에는 행위가 없다고 말씀하신 것인가요?"

라고 하는 귀하의 글을 주의 깊게 음미했습니다. 예수님의 의를 증거하자는 사명 때문에 태어난 자들이 성도입니다. 자신이 구원받기 위하여 태어난 자들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행함이 바로 율법의 완성입니다. 저는 예수님의 사랑이 곧 율법의 완성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랑의 결과로 성도에게 믿음이 생긴 것도 율법의 완성의 일환으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가 추가적으로 또 달성해야 될 율법적 요소는 남아 있지 않다고 봅니다. 특히 '율법 안의 믿음과 믿음 안에 율법'이라는 표현은 좀 황당해 보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표현을 사도 바울이 사용한 적이 없고 또한 성령께서 이런 신학으로 살라고 성도에게 부탁한 적이 없기 때문이죠.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만을 증거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존재의 이유입니다.
또 귀하께서는 '믿음의 행위는 없다는 말씀인가요?" 하셨는데 이 말씀 자체에 어폐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행동이란 믿는 바대로 움직이고 생각하기 때문에 믿는 것 따로 행동 따로가 도저히 될 수 없지요. 따라서 그 사람의 행동, 혹은 행위의 질을 규정하는 것은 그 사람이 무엇을 믿느냐 입니다. 자신의 행위를 믿고 증거하려는 자는 성도라고 볼 수 없습니다. 정신과 관심사가 엉뚱한데 가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 믿음에 따라 사는 자는 성도입니다. 갈라디아서 갈 2:20의 사도 바울의 신앙 고백을 다시금 음미해 보시기 바랍니다.

[ 과연 그럴까요? ]
2001,1,6 공혁

답변 잘 읽어보았습니다. 율법 안의 믿음과 믿음 안에 율법'이라는 표현은 좀 황당해 보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표현을 사도 바울이 사용한 적이 없고 또한 성령께서 이런 신학으로 살라고 성도에게 부탁한 적이 없기 때문이죠. 라고 답변하셨는데
목사님 정말로 율법 안에 있는 믿음을 찾아볼 수 없을까요? 구약에 율법을 지켜 행하기 위하여 양을 잡고 소를 잡을 때 관연 백성들은 그냥 계명을 지키기 위한 행위적인 것으로만 끝날까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그토록 진노하지는 않았을 텐 데요. 이들이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지켜 짐승을 잡았을 때 구원을 이루고자하는 소망이 담긴 것 아닌가요. 이들이 피 흘려 죽어 가는 짐승을 바라보며 이 짐승은 우리의 죄를 전가 받아 대속 제물로 십자가에 돌아가실 예수님이시다 하는 믿음이 담겨져 있는 것 아닙니까?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사 1:11-14] "
목사님 믿음 안에 율법을 발견할 수 없다고요 사도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 말씀하셨습니다. 행함이란 행위로 율법이라 생각하는데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부활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율법을 지켜 행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믿음과 행위(율법)는 사랑이라는 것을 낳았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믿음은 그의 행함(율법)과 함께 일하고 행함(율법)으로 믿음이 더욱 온전케 됨을 알 수가 있습니다.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약 2:20-22]"
목사님 우리가 보통 말하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깨달음이라 생각하면 어떻습니까? 많은 성도들이 이 복된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종교쟁들 또한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을 엿볼 수 있는 증거는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그냥 그저 그렇게 믿음이라는 단어에 집착하며 나는 구원받았다하는 식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하나님과 예수님은 분명히 우리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완성된 율법은 사랑이다. 그리고 그것을 지켜 행하라 명하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구약에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고 지키지 아니하면 너희에게는 구원이 없다 하신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분명히 사랑은 계명이며 율법입니다. 율법은 말이나 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행위가 있어야 지만 의롭다 칭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구원이 없다 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비로소 믿음으로 나는 사랑으로 하나님의 뜻이며 율법의 요구인 거룩함을 우리로 하여금 이룰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것이며 사랑은 믿음으로 나는 것입니다. 이 깨달은 믿음이라는 하나님의 은혜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명하신 새 율법 된 사랑이라는 계명을 지켜 행한다면 우리의 믿음은 더욱 온전하여지며 반석과 같이 되지 않겠습니까? 행위가 없는 믿음은 분명 죽은 믿음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요1 3:11-12]"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요1 5:2-3]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요1 3:21-24]"

[ 공혁님의 의견이 맞네요. ]
2001,1,6 박홍섭

공혁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율법의 완성자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했으니까 이제 성도에게 율법을 따르는 것이 필요 없다고 말하는 이근호 님의 말은 모순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이루는 삶을 살아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고 하셨는데 그런 요구가 얼마나 성경에 많은데요...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이것은 단순히 구별되라는 요구가 아니라 정말 거룩하게 살려고 시도하라는 것입니다. 또 내가 온전하니 너희도 온전하라....
이런 성경의 요구를 단순히 구약적인 요구라고 말한다면 정말 곤란합니다. 더군다나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시고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하신 것은 우리를 율법과 상관없게 살게 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구원받은 감사로 다시 거룩한 율법의 정신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율법주의가 아니라 구원받은 성도들의 삶의 표준인 율법으로 말입니다.
마치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을 나와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고 그 율법을 가지고 가나안으로 들어가기를 요구받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이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왜 율법을 주셨습니까? 구원을 위한 수단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의 율법을 가지고 가나안땅에 들어가서 이방인과 다르게 율법의 정신대로 사는 열국의 제사장 나라로 살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구원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거룩한 삶으로 부름 받은 초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근호 님의 주장처럼 율법과 믿음을 나누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사실 율법 안에 이미 믿음의 요소가 있는 것입니다. 율법을 표준 그대로 살려놓고 애를 쓰면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에 대해서 절망하게 되고 반드시 그리스도를 찾게 되어 있습니다. 살려주세요 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도와주세요 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래서 바울은 율법을 그리스도에게 이끄는 몽학 선생이라 했죠. 그렇다고 율법이 이제 그리스도가 왔으니 폐지된 것이냐 하면 그렇지 않다고 분명히 예수님이 말씀해주셨지 않습니까?
율법이 나쁜 것이 아니라 율법주의가 나쁜 것이죠.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인간이 지킬 수 있는 것으로 표준을 낮추어서 많이 지키면 스스로 의롭다 생각했고 자기보다 못 지키는 사람을 정죄한 것, 이것이 율법주의이죠...(원래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정신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와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는...다 하는 것입니다. 다...다...한가지만 걸려도 다에 걸려 버리는...그러니 이 율법의 표준을 그대로 살려놓고 율법을 행하면 반드시 자신의 약함을 고백하고 가난한 마음과 애통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붙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구원을 받았다는 사람들이 거룩하게 살려고 행함을 시도도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은혜만 기다리고 있다면 그들이 얼마만큼 십자가를 붙들고 살고 예수님의 힘을 빌어서 살겠습니까? 사도바울도 있는 힘을 다해 수고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모든 수고와 행함을 하나님의 은혜로 돌렸습니다.
거룩한 행함은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내가 온전한 것처럼 너희도 온전하라... 성령님은 우리에게 그런 욕구를 주십니다. 마음의 소원을 주십니다. 그 소원대로 살려고 행하려고 노력해야 우리 자신 안에 있는 무능함과 부패함을 날마다 인식하게 되고 십자가를 붙들고 주님의 은혜를 의지하게 되는 것이죠..그렇게 살려고 행하지도 않고 미리 앉아서 하나님의 은혜만 구하고 있는 것은 정말 모순이죠.
[ '공혁님의 의견이 맞네요'에 대해서 ]
2001,1,6 이근호

제가 말씀 하고자 하는 바는, 성경에 나오는 모든 말씀을 못들은 걸로 아예 무시하자가 아니라 성경에 나오는 모든 말씀은 인간의 힘으로 이룰 수 없고 십자가 속죄 사역에 근거한 하나님의 은혜로만 된다는 사실을 우리가 믿고 그것을 증거할 수 있어 있어야 신자라는 말입니다. 즉 신자는 말씀을 대하는 그 순간 수간을 통해서 십자가의 속죄 은혜 제공에 의해서 살아가고 또 구원받게 되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이룰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신자가 아니라 유대교 신자의 의식과 동일합니다.
(마치 성경의 모든 말씀 중 '믿자' 라는 것만 믿고 '행하라'라는 말은 안 행하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제가 말했다고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저는 '믿음'을 깨달음 현상으로 규정짓지 않고 십자가 공로를 가지고 성령께서 성도에게 적용시켜 주시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믿음이 생겨질 수 있다는 차원에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모든 것을 자기 행위의 의를 부인하게 되고 그리스도의 행위로만 소급해서 영광 돌리게 마련입니다. )

[ 믿음은 성령의 지혜로 깨닫습니다 ]
2001,1,7 공혁

목사님께서는 "저는 '믿음'을 깨달음 현상으로 규정짓지 않고 십자가 공로를 가지고 성령께서 성도에게 적용시켜 주시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믿음이 생겨질 수 있다는 차원에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믿음을 깨달음이라 말한 것은 성령의 지혜를 통해 얻는 깨 닫음을 말한 것입니다. 믿음을 아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성령의 지혜로 깨닫는 것이고 두 번째는 세상의 지혜, 곧 육의 지혜로 깨닫는 것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알고있습니다. 특히 종교학자들은 더욱더 잘 알고 있습니다. 이들의 이론과 철학으로 믿음을 논하라 하면 엄청난 지식이 폭주할 것이며 우리는 이들을 당해낼 재간이 없을 정도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이들이 구원을 받았다고 인정하는 것 아니지 않습니까?
믿음에는 진정 행위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행위가 없다면 세상의 지혜로 깨달은 이들과 다를 바가 뭐 있습니까? 진정 성령의 지혜로 믿음을 깨달았다면 그의 증거가 있어야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스스로도 이 깨달음이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온 것인지 악한 영으로부터 온 것인지 구별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께 나의 믿음을 증명해 보일 수 있는 것이며 구원의 확신이 되는 소중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증거해 보이라 요구하시며 우리는 믿음을 증거해 보일 수 있다 사도 야고보는 증거하고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특별히 주장하시는 십자가는 예수님의 믿음의 행위를 증거할 수 있는 율법적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말과 혀로 하지 아니하시고 그의 행위의 증거로 십자가를 선택하셨습니다. 이렇게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전가 받아 죄인 모습으로 돌아가셨다는 율법적인 증거물로 놋뱀과 같이 영원한 상징이 되었습니다.
분명히 목사님의 말씀대로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며, 믿음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아는 것만으로는 만족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분명히 율법이며 예수님의 믿음의 행위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의 행위, 곧 피 흘려 하나님의 율법을 지켰을 때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합니다. 목사님께서 특별히 주장하시는 십자가, 곧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릴 수 있었던 힘과 능력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힘과 능력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나무에 매달기까지 하신 사람 사랑하시는 사랑이며 죄인 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또한 앞서 말한 것같이 십자가의 죽음에서 부활하여 영생으로 구원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입니다. 이렇게 믿음과 사랑은 서로 맞물려 있습니다. 거짓이 없는 믿음이 없었다면 예수님은 십자가의 행위로 사랑을 낳을 수 없었으며, 사람에 대한 사랑이 없었다면 십자가에서 승리할 믿음 또한 없었을 것입니다.

[딤전1:5]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
[갈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목사님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십자가는 완성된 율법의 상징으로 믿음의 행위 된 사랑입니다. 세상 모든 자들이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믿음의 행위 된 사랑을 낳아야합니다. 아무리 십자가를 짊어졌다고 해도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여 열매가 없는 자, 곧 증거함이 없는 자는 결단코 구원받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채소를 먹는 자 곧 초보적인 신앙인에게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말할 수 있지만 단단한 열매를 먹을 수 있는 자는 믿음의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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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660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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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