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기적의 효과
Re..마 9:18-26 (기적의 효과)
이름 : 이근호(IP:)
예수님의 기적의 효과
2003년 7월 13일
본문말씀: 마태복음 9:18-26
9:1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직원이 와서 절하고 가로되 내딸이 방장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으소서 그러면 살겠나이다 하니
9:19 예수께서 일어나 따라 가시매 제자들도 가더니
9:20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가를 만지니
9:21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9:22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가라사대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
9:23 예수께서 그 직원의 집에 가사 피리 부는 자들과 훤화하는 무리를 보시고
9:24 가라사대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들이 비웃더라
9:25 무리를 내어 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
9:26 그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더라
어떤 분이 묻습니다. "목사님 하나님께서 확실히 계시다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저는 다음과 같이 답변했습니다. "사람이 원치도 않는데도 모두들 죽어가고 있는 운명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일부로 사람을 죽이십니다. 다 죽이십니다. 잘났든 못났든 다 죽이십니다.
그런데 이런 면이 하나님의 전부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시는 분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또다른 면을 보면서 우리는 즐겁습니다. 오늘 본문 24절에 보면, "가라사대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들이 비웃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관점을 하나님께서 찾으십니다. 문구점을 아버지와 아들이 같이 동업을 해도 마음이 맞아야 합니다. 아버지 마음 따로 아들 마음 따로가 되면 사업이 안됩니다. 이와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안다고 큰 소리나 치지 마시고, 죽은 소녀를 보고 "잔다"고 보시는 그 예수님의 관점과 같은 관점으로 볼 수 있어야지만 그 하나님의 그 자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 행여 교인들이 지레 겁을 집어 먹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습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오늘 본문을 보고서는, "아, 이와같은 놀라운 기적 체험을 하지 아니하면 신자가 아니라고 판정받아서 지옥가는구나"라는 겁을 먹을까 해서입니다. 물론 그러합니다. 성경에 나와있는 기적이 없이는 어느 누구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큰 오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컴퓨터 신 모델을 사게 되면 구형 컴퓨터는 소용없는 법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을 살리려는 생각을 가지진 예수님께서 최종적으로 어떤 모델의 기적을 우리에게 보이시는가 하는 점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악한 세대에 보여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 이외에는 다른 표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요나의 표적이란 다름 아닌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시는 기적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에 있어 최종적 모델에 속합니다.
여러분들은 베드로처럼 물 위를 걸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물론 물 위를 걷는 것도 놀라운 기적입니다. 그리고 12년 동안이 낫지 않는 하혈하는 병이 단번에 나은 것도 놀라운 기적입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크고 최종적인 기적은 예수님의 부할 기적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모두 이 최종적 기적의 혜택을 입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12년 동안 피흘린 여인도 결국 죽습니다. 그리고 죽었다가 살아난 이 소녀도 결국 몇 십년 살다가 죽었을 것입니다. 이런 구형 기적을 덮고 남는 최종 기적은 부활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왜 이런 구형 기적에 아직도 주눅이 들고 기죽어 합니까?
왜 흔히들 말하는, "초대교회의 기적의 현장을 재현시키자" 운동 앞에서 자신들이 믿음없는 것처럼 느껴져서 맥을 추지 못하는 겁니까? 그것은 관심사가 엉뚱한 데 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저는 바른 관심사가 어떤 것인지를 누가복음 16장을 통해서 보여주고 싶습니다.
27-31절에 보면,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찌니라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찌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지금 이 대목은 이미 지옥에 가 있는 자와 천국에 있는 아브라함과의 대화입니다. 그런데 지옥에 가 있는 자의 관심사가 오직 하나로 뚜렷이 표현되고 있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그는 아직도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습니다. 지옥에 간 부자는 나름대로 기적을 베풀어 달라는 겁니다. 무슨 기적을요? 죽은 거짓 나사로가 다시 되살아나면 부자의 형제들이 이 놀라운 기적을 보고서 아마 회개할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그런 제안에 대해서 아브라함은 단호히 거부합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찌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하십니다. 이것은 모세와 선지자의 모든 말씀의 완성태로서 오신 분, 즉 예수님을 못 알아보는 자는 아무리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다 할지라도 회개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님 본래의 역할을 제대로 알아 듣는 자는 이미 회개한 자에 속한다는 것도 됩니다. 기적이란 기적을 베푸는 분의 속성이 기적에 담겨 밖으로 표출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지옥에서 요구되는 그 기적의 내용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가지 기적을 통해서 소개된 것입니다. 저는 오늘날 자본주의 하에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싶습니다. "피곤한 가운데 지내는 권태로운 생활'이라고 말입니다. 따라서 이 지루한 권태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꾸만 신나는 일, 자극적인 일을 찾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관심사는 예수님이 갖기를 원하는 자녀의 심정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23:26-30에 보면, "저희가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로서 오는 것을 잡아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좇게 하더라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 오는지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루셀렘의 여인들은, 자기들 처지보다 예수님의 처지가 더 안스럽고 망가졌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점은 그게 아닙니다. 그들에 닥칠 혹독한 미래현실은 얼마나 지독한지, 차라리 젖을 못먹어 일찍 죽은 자식이나 아에 태에서 유산된 자신이 더 행복할 지경이라는 겁니다.
지금 우리들은 너무나도 자기 위주로만 살기 때문에 자기 잘난 맛을 인생의 보람으로 삼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관점으로 예수님을 찾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을 우상으로 잡는 작업일 뿐입니다. 십계명에 보면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가 두지 말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왜 그냥 여호와 하나님이나 잘믿으라 하지 않고 왜 이 같이 언급하시는 겁니까? 그것은 이미 "너는 네 사람으로 낙인 찍혔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미 주인이 되어버린 여호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구태여 네가 새삼스럽게 선택할 여지가 없다"는 겁니다. 구약에서 '여호와'라는 신과의 관계라는 것은 '나'의 모든 것을 압수해 가는 관계입니다.
바로 부활이란 이런 예수님의 관점을 지닌 자로서의 부활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죽은 소녀를 보고서 '잔다'라는 인식을 가진 자의 부활입니다. 세상에서 흔히 이야기하기를, '병은 의사에게, 구원은 목사에게'라는 표어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즉 인간이 해낼 수 있는 것은 인간이 담당하고, 인간들이 하다하다 안될 때는 그 때, 예수님을 부르자 하는 식입니다. 그러나 기적이란 궁극적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소유된 자로 만드는데 있습니다. 자신의 건강 유무와 상관없이 말입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이 쳐했는냐 아니면 풍족하냐와 상관없이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기적 베픔의 대상자는 실은 우리 자신의 실상을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환자나 죽은 자나 지금 살아있다고 당당하게 큰 소리치는 우리들이나 모두, 하나님의 소유된 자가 아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모두들 악마에 속에 있어 율법에서 내리치는 저주의 대상일 뿐입니다.
비록 아직 몸이 안아프고, 비록 자기 목숨이 덜 끊어져 있다 할지라도 이미 사망한 자와 자신과 동일시하는 관점을 갖는 것이 예수님을 아는데 매우 중요한 시선입니다. 왜냐하면 몸 튼튼, 마음 튼튼, 양심 튼튼한 상태에서 예수님을 이해하게 되면 전혀 다른 예수님으로 받아드릴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이 잘 되고, 잘 풀리고, 만사가 자기 뜻대로 원활하게 돌아갈 때면 예수님의 존재가 오히려 귀찮아지고, 거추장스러워 질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기 입장에서 세상을 보지 말고 예수님 입장에서 다시 세상을 보고, 자기 자신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마음을 지옥까지, 그리고 지옥에서도 최말단까지 낮춥시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참으로 귀한 기적을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을 우리가 알게 될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분주하게 살아가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복음 안에서 복음의 사람으로만 살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