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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 바울 공동체와 요한 공동체의 차이점 ] - 2001,6,11 이근호묻고답하기-

=================================================================================================================== * 질문 - 안녕하십니까? 주안에서 문안드립니다. 공부를 하다가 바울공동체와 요한공동체에 대한 궁금한 점이 있어서 이렇게 여쭈어봅니다. 성경에서의 바울 공동체와 요한공동체의 차이점이 무엇이며, 이를 적용한 현대 바울공동체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또 요한공동체가 문제점이 무엇인지, 또 현대시점에서 무너지는 공동체 속에 그 대안점이 무엇인지 의견을 듣고싶습니다. (정천호) ===================================================================================================================

《 사도직을 제외하면 예수님에 의해서 교회에 부여한 직제란 없었다. 따라서 공동체가 자체적으로 직제를 장만하기 위해 하나님의 특별지시를 찾으면 안 된다. 따라서 사도가 사라진 공동체는 우선적으로 사도들이 전해준 그 사도성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가에 신경을 써야 했다. 사도성이 빠진 공동체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도들과 가까운 시대에 있었던 신앙 공동체라고 해서 더 사도성 갖추기에 유리하지는 않다. 교회가 교회답게 되는 것은 시대적인 근접이 아니라 '예수 추종'이라는 그리스도교의 실천이기 때문이다. 신약 성경에 충실한 교회란 곧 '예수 추종'을 여전히 보여주고 있다는 이 조건에만 국한 될 뿐이다. 이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 채 아무리 교회 역사와 전통을 2000년 동안 고스란히 유지해 왔다고 해도 그 직제는 공동체와 상관없다. 공동체들이 여기 저기 생겨나면서 사도성을 유지와 그 정신을 천명하는데 앞장 선 사람들은 '예수의 복음전도자들'이었다.
지역 공동체의 지도자들은 사도 바울을 가리켜 '동료' 혹은 '주님의 일꾼'으로 불렀고 사도 바울 또한 그 당시의 12사도와 여타의 예언자들에 의해 창설된 지역 공동체 지도자들에 순종하라고 성도들에게 당부하고 있다. 그러나 '훈계자' 혹은 '일꾼'이라고 표현된다고 해서 교회 내에 어떤 직책으로 고정된 것이 있다는 말은 아니다. 아직까지 가르치는 은사는 사도의 사도성 위에 그 기초가 있었기에 사도에 의한 최고감독권 범주를 벗어날 수 없었다. 사도 직책의 연속성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가르침의 내용이 중요했다. 그러나 사도들도 일생을 마칠 때가 왔다. 사후대비책으로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자기 계승자로서 빌립보 교회를 돌보도록 당부한다. 디모데가 받은 사명과 권위는 현지 지도자들의 권위보다 우월하다. 물론 장로라는 이름의 지도자들이 있지만 그들에게 사도 후의 교회 공동체를 정식으로 맡는 책임자로서 간주하지는 않았다.
아직 복음전도자들과 예언자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각 지역 공동체에 전달하는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고 소위 장로나 감독들은 이 전달된 복음을 공동체 안에서 잘 보전되도록 봉사하는데 열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봉사적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사도 바울계에 속하는 교회에서 제도적으로 보장된 직무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특정한 교인이 기존 장로들(지역지도자들)에 의해서 임직되며 장로단의 안수와 예언자의 말씀을 통해서 사도 직무의 잇기 위한 은사적 기능을 인정했다. 그래서 공동체에 있어 직제란 그 자체가 필히 있어야만 교회가 된다는 정해놓은 규범이 아니라 사도에게만 맡겨진 그 유산을 공동체가 대물림한다는 취지에서 생겨난 직제이다. 따라서 직제 그 자체가 유산의 구체적 내용이 아니라 사도들이 해석한 복음을 두고 말한다.
이 해석된 복음을 목회 서신에서는 '가르침'이라고 부른다. 이런 취지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을 교사라고 소개한다. 사도는 일찍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들어 보지도 못한 분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말씀을 전해 주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믿겠습니까?(롬 10:14). 즉 감독이나 장로가 없이 무슨 교회가 되겠느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봉사자에게 안수하는 것은 직권을 전수하기 위한 원리가 아니라 사도적 복음을 생생하게 선포하기에 합당한 능력을 얻도록 성령의 은사를 전해준다는데 있다. 이 직능에는 보수를 받는 권리로 따랐는데 이것은 물론 신약 성경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기본 원칙이다. 베드로의 첫째 편지에 보면, 교회가 심한 박해를 받을 것을 예상하여 엄격한 장로직제를 도입하게 된다. 이제 사도후의 교회는 카리스마적인 지도자와 직제를 고수하는 자 사이에서 갈등의 소지가 일어나게 된다.
사도 바울계의 교회와는 달리 마태계의 교회에서는 공동체 안에서는 그 누구도 지도자나 아비로 자처해서는 안 된다. 비록 교역자들이 있다 할지라도 교회 직제가 세속의 모델에 따라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의미에서 '영도자' 구조로 파악될 수 없다. 거짓 예언자와 거짓 스승들의 속성을 잘 드러내서 준엄하게 그들을 경고하고 반박하는 '작은 이들의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다. 왜냐하면 공동체는 늘 완전하거나 완벽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 최후 심판은 오지 않았다. 그래서 가라지는 있게 마련이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들'이 병존하고 있는 교회상을 말씀하고 있다. 이런 공동체 내에서 유일한 스승은 오직 예수님뿐이다. 누가 그 예수님처럼 십자가 지고 가느냐가 관권일 뿐이다.
사도 요한계의 편지를 보면 이미 장로제가 확립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떠한 권위의 주장도 없는 그런 직무이다. 다른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의 경우와는 대조적으로 처음부터 요한계 사상은 목회자의 본격적인 직권인 교도권과 징계권까지도 부인한다. 각자가 직접 예수와 맺는 관계야말로 교회에 관한 가르침의 결정적 요소로 본다. 보혜사만이 유일한 스승으로 통한다. 예수님의 제자들마저 오로지 이 보혜사에 의해 해석되는 전통의 증인일 따름이다. 각자의 마음속에 계시는 보혜사만이 친히 가르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보혜사 원리에서 이탈하여 신자 위에 군림하려는 자들이 있는데 이들이 바로 적그리스도들이다. 자신의 해석을 최고권위로 삼아 '우두머리'를 자처하고 있는 자들이다. 이들을 견지한다는 의미에서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목회권의 권위를 인정하는 경향을 보인다. 단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 사랑의 유대를 기초하고 있다는 조건 아래서만 그러하다.
요한계시록 사상은 모든 지나친 법제화된 에대한 성서적 경고를 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요한계 공동체들은 2세기 이후 자취를 감추었는데 사도적인 대(大)교회로 올라섰거나 아니면 영지주의 교파들로 내려가 버렸다. 이 '大교회'에서는 인간들의 교회직제 권위가 하나님 권위의 표식으로 변했다.

[ 성경적인 평가 ]

사람들이 교회를 필요로 해서 - 달리 말해, 구원을 위한 전문 기관 설립을 원해서 - 성경에 나오는 조직체의 형식을 따오는 것은 그 어떤 경우라도 정당화 될 수 없다. 예수님이 생각하신 교회란 사람들의 구원욕구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세계를 심판하기 위한 언약의 토대로서 말세에 등장된 것이다. 따라서 저자처럼 단순하게 '예수 추종'이라는 종교적 품성만을 공동체의 본질로 내세울 것이 아니다. '예수 추종'를 근거로 삼아 '자기 교회 추종'를 외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어떤 형태로든 자기 구원시켜 주는 기관을 필연적 요청하게끔 되어 있는 인간들의 보편적 죄악성을 고발하는 센타 구실로서의 교회의 속성을 거론해야만 옳다.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는, 숫자적으로 여러 교회를 동시에 인정해주는 '교회들'이라는 개념을 철저하게 배격하고 정죄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세상을 심판하는 기준은 오직 십자가 사건이라는 단일 사건에 있을 따름이지 결코 교회 모델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차원에서 교회 성장이니 교회 부흥이라는 의식도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

이상의 글은 '철학과 신학의 허상'이라는 글 속에 들어 있는 [교회직무론](분도출판사)에 대해 서평한 대목의 일부입니다. 그리고 다음은 [메시야 왕국](한국신학연구소)을 서평한 글의 일부입니다.

《 기독교를 축으로 해서 영향을 주고받고 이어져 온 게 서구 역사이다. 이 서구 역사는, 하나님을 의식하며 사는 인간들의 반항과 요구 사항과 굴복 같은 것들이 결집되어 있다. 하나님이라는 존재와 인간 자신들의 고통을 직접 연관시킬 때 신은 어떤 식으로 응답을 하는지 인간들은 늘 궁금해했다. 인간들은 현실의 불충분함을 메시야니즘 속으로 승화하려는 본능이 있다. 하나님 또한 메시야의 나라를 약속했었다. 이상세계를 향한 인간의 욕구와 하나님의 약속이 같은 맥락에서 서로 연결되리라 인간들은 기대했다. 그 기대를 현실화시키기 위해 전 생애를 바친 자칭 지도자들이 빈번하게 등장된다. 그들의 몸부림을 저자는 투명하게 나열한다. 모든 기독교 색채의 공동체 운동들, 그 공동체 운동의 생성과 소멸을 탐색하면서, 인간의 구원에 대한 염원은 필히 사회 변화의 형태 속에서 포착됨을 확인할 수 있다. 종교운동은 어떤 식으로도 비사회적이지 않다. 현실 도피적인 교리를 지닌 단체라 할지라도 그 과정은 엄연히 사회 운동적이다. 종교개혁 시기부터 본격화된 급진적 종교운동은, 기존의 시민 사회와 교회를 동일시하는 것을 거부했다.
교회란, 대립의 모습으로 사회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기존 교회는 개혁의 대상이 아니라 변혁의 대상이다. 참된 교회는 늘 전투하는 혁명의 투사로서 사회에게 할 일이 있다는 것이다. 최후의 그리스도에 의한 변혁을 두고 자신들이 현재 벌리고 있는 혁명적 활동의 연장으로 해석한다. 종교개혁의 들뜬 분위기를 타고 급진적 선동가들은, 자기 자신을 너무 빨리 불태우고 말았다. 계몽 사상으로 인해 모든 게 해체되던 시기에, 지성인들은 아예 종교 규범을 버렸다. 그 대신 과학과 경험을 신의 계시로 삼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 마음속에 있는 메시야니즘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들은 인류 진보론으로 이성적인 국가와 사회를 건설하려 했다. 성경이란, 무식한 인간들의 방탕에 위협 주기 위한 책일 따름이지 유식한 자기네들에게 해당되지 않는 내용이라고 여겼다. 구원이란, 역사로부터 이탈되는 게 아니라 인류 역사 자체를 멋지고 성스러운 환경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남자나 여자나 할 것 없이 모두 대등한 권리와 자유를 확보할 수 있는 세상, 그 영광의 세상은 인간의 성실과 지혜에 달렸다고 보았다. 보다 완전한 이상적 국가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일반 의지를 확산시켜야 한다고 여겼다. 민주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서 민중의 의지를 중요시하기 시작한다. 한 덩어리 된 민중의 의지는 욕심도 한 덩어리이다. 다른 국가와의 병합을 시도한다.
인류의 진보는 곧 하나님 의지의 실현으로 보았다. 이 무궁한 진보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서는 내부의 모순점은 해소되어야만 했다. 국가 내부의 갈등을 원활하게 처리할 수 있는 정밀한 사회 시스템이 요구된다. 이상적 모델들이 여기 저기서 실험적으로 선보인다. 어떤 이들은 농촌에다 목가적 공동체를 운영해 본다. 그러나 기술 산업화 시대에 들어선 입장에서 봐서는 시대 착오적이다. 보다 큰 문제 거리는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서 발생된다. 두 계층 사이의 대립을 어떻게 하면 원만하게 해결하느냐 하는 것이다. 고전적 신앙심은 전혀 도움이 안 된다고 보았다. 사회 구원은 인간이 기선을 잡는데서 오는 것이지,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고 단정했다. 공산주의를 건설하면 어떠냐는 의견이 등장한다. 노동에 직접 참여 하는 자를 주체로 하여 서로의 노동을 가치 있게 인정해주는 공동체로 나아가자는 주장이다. 인간은 노동에서 보람과 영광을 획득하고자 한다. 따라서 자기가 한 노동에 대해 최대한도로 만족감을 얻도록 보장해 주는 사회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사회라는 것이다. 그러나 구성원간의 욕망의 충돌을 막을 대책은 서지 않았다. 서구 산업화는 그 자체가 국가간의 욕망이 폭발하여 그 팽창력에 의존해서 얻어진 결과이다 .이제 와서 거꾸로 되돌아 갈 수는 없는 일이다. 욕망의 경쟁을 저지할 수 있는 세력은 그 또한 황제가 되어 비평등사회가 된다. 이기적인 개인 경쟁이 인간을 지치게 한다. 그래서 후기산업사회에서의 구원의 의미는 형제애를 회복하는 일이다.
여기에 성령의 신학이 도입된다. 기존의 제도 교회가 독점해 온 은총을 교회 밖으로 확산시키는 것이 시급하다. 성과 속 사이에 칸막이를 차지 않는 일이다. 선교의 의미가 새롭게 추가된다. 신의 존재가 지정된 곳에 특수하게 있음으로 해서 사회는 늘 두 패로 나뉠 가능성이 있었다. 서로들 자기네 쪽이 성스럽다는 것이다. 이래서는 공동의 형제애가 구현되지 않는다. 초월적 신보다 이 인간 사회에 내재하는 신을 섬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 신은 어두운 곳에 더욱 더 관심이 계시다. 억압을 당해서 신음 소리가 새어 나오는 곳에 귀를 가져가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자기가 계시하는 장소에서만 존재한다. 인간의 겉치레 종교성은, 이런 하나님의 현존을 추방하기 십상이다. 인간화된 하나님을 따라 우리도 같이 전보다 더욱 더 인간다움에 집착해야 한다.하지만 현실에 대해 고민하는 것만이 하나님의 전부가 아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소망을 또한 성취해 나가시는 하나님이시다. 저자는, 인류가 역사 속에서 현재와 미래, 이 둘 중에 어느 한쪽에 극단으로 치우치는 것을 안타까와한다. 참된 투쟁은 바로 이런 극단을 역사에서 추방하는 시도이다. 이것만이 참된 변혁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 성경적인 평가 ]

그러나 저자는 교회를 사회학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지 성경에서 확인해 보았어야 했다. 성경은 성령께서 저자가 된다. 그래서 성령이 역사에 대해서 고발하듯이 성경도 그 고발감을 가지고 인간에게 다가온다. 교회나 복음 운동을 역사라는 바구니 안에 담아 놓고 보면 현재, 미래의 틈바구니 사이에서 항상 미완성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그렇지 않다. 교회는 과거든, 현재든, 미래든 항상 완벽하다. 그 이유는, 머리되시는 그리스도께서 늘 완전하시기 때문이다. 교회의 임무는 교회 자체의 무결점을 증언하는데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의 완전성을 전파하는데 있다. 교회 자체되는 인간들의 유동성을 근거로 해서 교회의 불 충분성을 들고 나와서는 안 된다. 교회 요건의 불충분성은, 오직 그리스도의 완전함에 불신을 갖는 경우뿐이다. 바로 죄악된 인간 성품이 인간들로 하여금 항상 눈에 보이는 교회로 만족하고 싶어하는 성향을 심었다. 이런 비 복음적인 발상이 성경의 고발감이다. 교회를 인간적인 차원에서 사회적으로 접근하고자 하는 그 안목이 성령의 뜻에 부합되지 않는다. 교회 등록된 자들이 모두 다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니다. 다 구원받는 경우에만 완전이 아니다. 교회는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늘 유동적이기 때문이다. 유동성이 있다고 해서 미완성적이라고 간주하는 것은 비 성경적이다. 무너질 교회는 무너지고 없어질 교회는 없애 버리는 그 예수님의 사역이 완전하기 때문에 교회는 항상 빈틈없이 완벽하다. 그리스도만 여전히 살아있다면 과거든 현재든 미래든 상관없이 교회는 늘 완성하다. 》

이제 공동체 운동에 대해서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문제는 돈입니다. 돈을 선뜩 갹출할 수 있어야 공동체를 하든 무엇을 하든 가능합니다. 그러면 돈은 어디서 나오는가? 돈은 즐거움의 대가로 들어오게 되어있습니다. 공동체의 생활이 회원들이 기대치를 충족하는 조건 하에서 기부금과 유지비는 쏟아져 들어올 것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회원들이 다른 더 큰 즐거움을 발견하는 날에는 지금까지 끌고 왔던 공동체가 하루만에 와르르 무너집니다. 그래서 공동체의 대전제는, 이 공동체 자체의 즐거움보다 더 큰 즐거움은 없음을 철저하게 차단하도록 반복적으로 교육해서 세뇌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공동체가 바로 북한 인민 공화국입니다. 이 폐쇄 집단의 이것입니다. "이 이상 부러울 것이 없어라!" 단지 존재하고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 존재해야만 한다는 공동체 생리가 바로 공동체를 우상 노름으로 전락하게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참된 교회는 다음과 같은 절대적 공동체가 됩니다. "예수님만 있으면 더 이상 부러울 게 없어라!" 여기에 비해 가짜 교회, 이단적인 공동체는 다음과 같은 구호를 외치는 곳입니다. "이 교회(공동체)가 존재하고 성장, 부흥하는 한 부러울 게 없어라!" 예수님 의지하며 살 생각해야지 공동체 운동을 할 생각은 아예 먹지 않는 것이 주님 심판 날 신상에 좋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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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665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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