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 강의(07. 2. 23) 두번째 시간 녹취록자유게시판레위기

광주 강의(07. 2. 23) 두번째 시간 녹취록

이름 : 서경수(IP:122.36.190.5)

광주 강의(07. 2. 23) 23-2

두 번째 시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십자가 이후에 주님께서는 뭘 하나 만들었어요. 이것은 십자가 이전까지는 인간의 육을 드러내는 식으로 그들을 공박하지요. 그 공박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려야 될 그 피에 대해서, 로마서에 가면 이 피가 흘러야 화목제물이 되거든요. 하나님이 받으시는.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만 받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화목제물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영광에 이르지 못했는데 하나님은 자기 아들의 피를 좋아합니다. 그 피 안에는 모든 말씀을 다 이루었다는 것이 포함되었기 때문에 그 피만 받습니다. 그래서 이 거룩한 피와 다른 피를 구별하기 위해서 레위기가 있습니다.

레위기는 피 뿌림이 어떻게 거룩으로 이어지느냐 하는 것을 증명하는 책입니다. 출애굽기도 마찬가지고. 피를 뿌렸더니만 더러운 인간이 남긴 지문조차도, 다른 것은 안 돼요. 물로 씻어도 안 되고, 제단에서 죽은 제물의 피만 뿌리면(물리적으로 깨끗지 않다 하더라도) 거룩해서 하나님이 거기에 상주할 수 있어요. 임재할 수가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임재하면 하나님이 임재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안 계시는 다른 나라를 충분하게 이기지요. 이기는 정도가 아닙니다. 아예 다른 나라를 끌고와서 바위돌 같은 이스라엘에 부딪혀서 제풀에 넘어지게 하지요. 이것을 붙여주는 전쟁. 획 달려와서 제풀에 깨어지게 되어 있지요. 무슨 말인가 하면, 거대한 두꺼운 유리창이 있는데 유리창 안에는 이스라엘이 있고 밖에는 적들이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일부러 이스라엘 속에서 보이지 않게 동행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들로 하여금 전 속력으로 이스라엘을 쳐들어오게 합니다. 그러면 누가 놀라겠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놀래겠지요? ‘이제 우리는 다 죽었다. 하나님이고 뭐고 다 끝났다.’ 그런데 오자마자 그들은 어디에 부딪쳐요? 투명한 유리벽에 부닥쳐서 스스로 몰살하지요. 때로는 해충, 때로는 유황불, 어떤 때는 서로 서로 죽이는 방법.

어쨌든 제풀에 넘어지게 해서 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우리 힘으로 이겼다.’는 소리를 못하게 만들지요. 누가 이겼습니까? 이스라엘은 벌벌 떨고 있었고, 실제로는 누가 이겼어요? 누가 용사입니까? 이스라엘이 용사가 아니고 그들과 함께 있는 ‘주의 이름’, ‘하나님의 이름’이 용사가 되셔서 ‘보이지 않는 분이 보이는 대군을 무찔렀구나.’ 라고 깨닫게 하는 겁니다.

저의 [예수님의 재림과 성도의 삶]이라는 글에 보면 나와 있어요. 광야에 들어서자 비로소 안식의 의미가 다가와요. 광야에 안 들어서면 안식이 뭔지 몰라요. 광야에 들어서야 안식의 의미가 비로소 나타납니다. 몸이 아파 수술을 해 봐야 평소에 못 느꼈던 건강의 의미가 다가오지요. 건강, 아름다운 목소리. ‘아, 이렇게 내 음성이 꾀꼬리 같은 소리였구나.’ 하는 것을 알지요.

광야에 들어서게 하셔서 안식에 의미가 다가오게 하시는 겁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은 이 방법을 지금 그대로 쓰시는데 우리로 하여금 온갖 무서운 말씀으로 집중 공격해서 우리가 육일 수밖에 없음을 폭로하고, 육인 우리를 위하여 주께서 피를 주셔서, 피와 육이 결합해서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제물 되게 하는, 더러운 인간에게 피 뿌리면 제물 되잖아요. 더러운 우리 육이 하나님의 제물 되는 이 방식, 이 유리관 안쪽을 가지고 요한복음에서는 ‘처소’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3장을 잠시 보겠습니다. 37절에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이렇게 되어 있지요.

베드로가 목숨까지 담보로 내놓고 주님과 합세하려고 할 때에 주님께서는 그것이 가당치도 않다고 본 겁니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내 놓는 그 목숨은 영입니까, 육입니까? 육이지요. 베드로가 순교해봐야 그것은 영적인 것이 아닙니다. 육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은 예수님 밖에 없어요.

천국을 만들어도 예수님이 만들고, 처소를 만들어도 예수님이 만들고, 천국의 있을 자리를 만드는 것도 예수님 혼자 만들지 제자들의 협조를 받아서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천국을 만드실 때 누구 협조 받아서 합니까? 일체 협조를 안 받지요? 다만 자기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더 육 되게 하셔서, 만약 어떤 사람이 설교를 듣고 구원 받았다면 목사가 설교를 잘 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누구의 덕이다? 유리관 안의 보이지 않는 성령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나를 사용해서 그 사람들을 구원하신 거죠.

그래서 주의 일을 하는 사람은 항상 주의 일을 하는 동안에 자기가 육임을 더욱더 알고 깨어지는 그러한 방식으로 주의 일을 하게 되지요. ‘내가 못났구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구나. 나는 있으나마나한 존재구나.’라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는 방식으로 계속 그 사람을 가지고 일 하시는 겁니다.

‘나는 못났지만 이 못난 나도 얼마나 가치가 있을까?’ 이런 사람과는 같이 일 안해요. 못났으니까 못났다고 가치 있다는 이런 논리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냥 주께서 일방적으로 일 하실 뿐이죠. 나는 저 사람 구원 받는데 전혀 보탬이 되지 못했다는 것을 느끼면서.

만약에 어떤 성도가 비율이 아주 센 경찰대학 혹은 서울 법대에 들어갔다고 합시다. 다른 사람들은 ‘아이쿠 장하다. 훌륭하다.’고 하는데, 성도는 ‘나는 서울 법대생이 되어 내 죄가 얼마나 많은가 드러내시겠구나.’ 이렇게 마음 준비 하시면 됩니다.

어떤 사람이 갑자기 60억이 생겼다고 하면, 60억 없을 때보다 ‘60억 가지고 내 죄가 얼마나 악질적인지 알아가 봐’ 그런 마음으로 가지고 가시면 그것이 바로 주님의 일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어때요? 60억 가지고 그런 일 한 번 해봐도 괜찮겠지요? 내가 얼마나 죄인이며 돈밖에 모르는 인간인가를 60억을 가지고 아는 겁니다.

주의 일이라는 것은 항상 이렇습니다. 구약성경에 하나님이 적들을 계속 공격하는 것은 여기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자력으로 그들을 대처하려는 그 자체가 같이 계신 주님을 모독하는 육적인 본성을 적을 통해서 노출하는 식으로 하는 거예요. 광야 길을 가면서 여러 가지, 힘도 없고 병력도 없고 무기도 없는 상태에서 광야에서 적들을 만나 전쟁을 벌이시는 이유가,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천국이라는 것은 나로 하여금 더욱더 육 됨을 드러내고 주님의 영광만 드러내는 그 세계가 바로 주께서 원래 진작부터 생각했던 천국이고 그 외 다른 것은 천국이 아님을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십자가 이후에는 이것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피로 얻었던 이 화목제물 이것을 처소로 만들어요. 이것은 베드로가 목숨 바쳐도 들어가지를 못하는 겁니다.

요한복음 14장을 보겠습니다. 2절에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다 같이 읽어보세요.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네게로 영접하여” 그렇지요.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거예요.

이것은 처소로 만드는 것도 주님이 일방적으로 만들고, 그 처소 안에 넣어주는 것도 인간이 안달이 나서 손들도 데모한다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다시 오지 아니하면 그 천국 구경도 못합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제가 첫째시간에 했는데, 인간이 만든 신 개념에는 이런 것이 없지요. 인간의 신 개념은 ‘자기의 착한 부분이 많으면 점점 천국에 가깝고 악한 부분이 많으면 지옥에 가깝다.’ 그 뿐이지요. 그러니 어찌하든 마일리지를 쌓아야지요. 선행의 마일리지. 착함의 마일리지. 그래야 이 땅에서도 복을 받고 죽어서 천당 가고. ‘부모한테 효도하면 죽어서 좋은데 간다.’ 이거 불교 아닙니까? 이건 불교예요.

지난 수요일도 그런 이야기 했는데, 제 아내 친구 이야긴데요, 듣고 제가 깜짝 놀랐어요. 무슨 이야기냐 하면, 지금 황금돼지의 해에 닭띠와 소띠, 뱀띠 이 세 띠는 3재가 겹친다는 겁니다. 그래서 절에서는 이렇게 한답니다. 절에서 얼마나 사람들을 심리적으로 잘 다루는가 한 번 보세요. 나쁘다는 액운을 주고, 그것을 절에다 시주하고 기도하고 하면 3재가 해소가 된다는 거지요. 사람의 심리가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도 나쁜 것이 있다 하고 그것을 속 시원하게 해결하면 뭔가 펑 뚫린 것처럼 기분이 좋아요.

그런데 따져보니 우리 집안 진주하고 나하고 셋이 다 3재 하나씩 골라잡았어요. 그래서 우리 집에서 세 개를 다 모아서 마징가 제트처럼 모아서 변신 ---.

이게 무슨 심리냐 하면 나를 때려달라는 겁니다. 못된 나를 때려주면 내가 시원하겠다는 거예요. 얻어맞는데서 쾌감을 느끼는 거죠. 목사가 “여러분, 복음은 자유롭습니다. 뭘 해도 구원 받습니다.” 이것보다도 그냥 회초리로 때려주면 그 때리는 그 맛에 교회 다닙니다. 이것만 알면 목회 성공합니다. 때려주는 쾌감을 제공하는 목사. “그렇게 하면 벌 받습니다. 헌금하시면 그 벌이 복으로 됩니다.” 그럴 때 뭔가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처럼 교인들은 느낍니다. 기독교 케이블 TV 켜보세요. 모두 그런 식입니다. 화(禍)주고 거기다가 해결책 제시하고.

예수님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너희들이 오고 싶어도 못 오고, 가만히 있어도 못 오고, 이래도 못 오고, 저래도 못 오는 나라가 천국. 그런데 어떻게 하면 가는가? 예수님이 다시 와서 그들을 데려가야 비로소 가는 나라, 그것이 천국입니다.

도대체 이런 이야기가 인간의 기본적인 양심과 자존심을 얼마나 모독하는 것이겠습니까? ‘나도 착할 수 있는데. 나도 주의 말씀 지킬 수 있는데.’라고 버티고 있는 사람들에게, ‘철야기도 해도 안 되고, 집구석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안 되고,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고. 끝.’ 이게 얼마나 인간을 낙담케 하겠습니까? 이런 교회 절대로 돈 안 냅니다. 그러니 돈도 안 나오고, 사람도 안 모이고. 결국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듣고 ‘어렵도다.’ 하고 떠나지요.

주님께서는 그걸 원합니다. 제발 내 앞에 얼씬거리지 말고 다 떠나라. 떠나고 난 뒤에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만 내가 기어이 찾아가는데, 어느 정도로 찾아가는가 하면 구약의 아가서를 보면 됩니다. 아가서에 보면 어떻게 찾아가지요? 세상에는 이렇게 지독한 사랑은 없습니다. 여자가 도망가고 남자는 따라가고, 문 안 열어주겠다고 우기는 걸 기어이 문 열게 해서 선물 주고.

아가서의 내용이 뭡니까? 여자는 멍청한데 남자는 그 멍청한 여자, 새까만 여자를 보고 싶고, 잊을 수 없어서 잠을 못잘 정도에요. “보고 싶다. 보고 싶다.” 이승철이 부른 노래있지요? 김범수가 부른 노래입니까?

아가서의 주제가 뭐냐? “보고 싶다”입니다. 만나기 전에 집에 앉아 있으면서도 보고 싶어서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 일을 못해요. 너무 보고 싶어서. 남의 여자보고 ‘내 누이’라 하고, 일방적으로 그렇게 결정해 놓았어요. 아가서 끝에 봐도 여자가 동의 했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냥 스토커처럼 끈질기게 찾아가서 ‘너는 내 여자’라고 그렇게 이야기하고, 그래서 오죽했으면 ‘병이 났다’고 하지요. 이것을 무슨 병이라고 합니까? 상사병. 보고 싶어 병이 날정도, 이것이 아가서입니다.

요즘 여자들은 그런 남자가 나타나기를 원하지요. 그런 사람 기다리다가 나이 30을 훌쩍 넘기고. 30이 넘어가면 이제 자가가 보고 싶은 남자를 찾습니다. 그러다가 40을 훨쩍 넘기지요.

자기가 보고 싶어 환장해서, 자기를 위해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그런 남자. 이것을 아가서에서는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의 특징은 한편이 일방적이라는 사실. 양쪽이 교류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은 한쪽 사랑만 있어도 넉넉하고 충분하다는 겁니다. 둘 다 미쳐서 사랑하면 이것은 문제가 일어나요. 집안 난리 납니다. 한쪽만 사랑해도 그 사랑에 모자람이 없는, 한쪽은 그냥 사랑 받기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1서 4장은 뭐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라고 했지요. 요한복음 14장 3절에 보면, “내가 다시 와서” 그 오신 게 뭐냐? 성령 안에서 오시거든요. 성령 안에서 와서 처소를 만들고, 성령이 오게 되고, 그 다음 요한1서에서는 “사랑은 여기 있나니” 그러면 그 사랑과 성령이 만나면 성령 안에 사랑만 가득하기 때문에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은 다시는 두려움이 없고, 심판이 있지 않지요. 왜냐하면, 주님은 나를 심판할 분이 아니고 미치도록 사랑해 주실 분으로 만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자는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서 다시는 “심판이 이르지 아니하나니”(요5:24) 라는 말이 나옵니다. 성경에 분명히 이런 말씀이 있는데 왜 교회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안 합니까? 왜 안 하는가 하면 교인이 육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그것 말고 ‘바쳐야 복을 받는다.’ 이런 대목만 골라서 이야기하고 돈만 챙기면 되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를 할 때 영적인 성도들은 “주님 감사합니다.”라는 소리가 나올 거예요. 그런데 이상하게 육적인 사람들이 이 소리를 들으면 그 반응이 아주 미미해요. 굉장히 좋은데 억지로 억눌러요. 왜냐하면, 지금까지 알았던 것이 다 사기였던 것이 드러나기 때문에. 자존심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구원은, 천국은, 처소는 우리가 목숨 바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목숨 내 놓는다고 해서 그것 안 받습니다. 주님은 우리하고 상대 안 해요. 우리 주위를 동그랗게 파서 삽으로 떠버리면 흙과 더불어 그 안에 우리가 담겨 오겠지요. 우리를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위를 흙은 떠서 처소를 만들어버리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그 안에서 주의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물론 그런 행위 자체가 사랑의 능력으로 오지만.

누가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이 지워질 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을 했는데, 생명책에 기록되었다가 지워지는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는 차치하고, 제가 아는 주님은 생명책에 있는 이름도 자기 마음대로 지울 수 있는 분입니다. 그걸 믿는 자가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지지 않는 사람입니다.

왜 설명을 그렇게 복잡하게 했는가 하면, 사람들은 육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이야기하면 그것을 주님께서 행하신다고 생각하지 않고 내가 그것을 조정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자칭 구원 받았고 생명책에 기록되었다고 하는 사람도 가차 없이 지워버린다는 겁니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면, ‘주님은 천국으로 천국을 부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라는 것도 같은 말이에요. ‘천국을 부순다면 그것은 주님이 아니잖아요?’ 라고 할 수 있겠는데, 제 답변은 ‘천국을 부술 수 있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천국을 못 믿잖아요?’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우리가 천국을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믿어야지요.

천국을 믿기 때문에 ‘천국 가기 위해서 뭘 이용할까’ 하다가 ‘예수 믿어야지.’ 이런 사람은 천국 못 갑니다. 그런데 천국은 예초에 포기해버리고 ‘천국 갈 사람이 아니구나.’ 여겼는데 예수의 능력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된 사람은 천국 갑니다. 똑같은 이야기지요. 아까 생명책 이야기와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내 중심은 포기하세요. ‘나’가 자아아닙니까? 자아는 틀림없이 일방적으로 내가 내 자아를 만들었어요. 그래놓고 나를 구원해 달라고 우겨대니 이게 주님 보시기에는 가당치도 않는 이야기죠.

‘네가 뭔데 엉터리 같은 자아를 가지고 그 자아 살려내라고, 영혼불멸 상태로 만들어 달라는 소리를 해. 원래부터 너는 너의 것이 아니고 나(주님)의 것인데. 구원해도 내가 구원하고, 지옥 보내도 내가 지옥 보내는데 네가 뭔데 날 구원해 달라고,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었습니까, 안 되었습니까? 어디 그런 소리를 해.’

그런 것도 주님께 맡기란 말이지요.

주님께서는 처소를 만들어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이것을 ‘성령 세례’라고 합니다.

성령 세례가 어떤 것인지 요한복음 14장을 통해 살펴봅시다.

여러분이 조금 피곤한 눈치를 보이시는데, 저도 눈치 빠릅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구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기도는 백발백중이죠.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이 진리의 영은 어떤 특징이 있느냐 하면, 철저하게 세상에 속한 사람과 주님께 속한 사람을 구분하는데 귀재예요. 누가? 성령께서.

성령은 지옥 갈 사람들에게 절대로 오지를 않습니다. 철두철미하게 사람 파악하는 데는 귀신입니다. 창세전부터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에 선택한 자만 골라서 차질 없이 주시는 분이 성령입니다. 그래서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은 창세전에 선택되었기 때문에 구원 받았지 내가 구원 받으려고 애써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이상한 이야기가 있어요. ‘그들이 세례요한의 세례를 알고 있어도 성령세례는 모르고 있더라.’ 라고 되어 있고, ‘사도 바울이 안수를 하니까 성령세례 받더라.’ 그 대목이 나오지요.

여러분, 성령 받은 상태에서 예수 믿는 것과 성령 안 받고 예수 믿는 것이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이게 오늘 문제예요. 이건 첫 번째 강의 들은 사람은 압니다. 그런데 문제 내놓고 2초도 안 돼서 정답을 이야기하는 것이 이상하지요.

처음 공생애 때 예수님은 뭘 인정했다고 했습니까? 하나의 주체로 인정하지요. 한시적으로 인정해서 명령을 하지요. 그 때는 아직 십자가 지기 전이라서 예수님이 승천하셔야 성령세례가 오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지 않으면 성령세례는 오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세례는 ‘다 이루었다’고 할 때만 오기 때문에 그래요.

그럴 때는 예수 믿는 것이 누구의 의지로 된다고 생각합니까? 인간의 의지로 되는 것처럼 여기지요. 그걸 보여주는 때에요. 왜냐? 예수님이 “나를 믿으라.”고 했으니까. ‘알겠습니다. 제가 믿겠나이다.’ 내가 믿음으로 예수를 믿게 된다는 이런 공식이 아직도 유지되는 곳이에요. 성령이 개입할 필요가 없어요. 예수님 계시고, 내가 믿고 그것만 있으면 돼요. ‘이것으로 처소든 천국이든 성사된다.’ 라고 착각했던 그런 시절입니다.

성령 없을 때는 ‘내가 예수 믿으서’ 이것이 성령 받지 못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내가 어떻게 했더니만 예수 믿게 되었어. 내가 기도했더니만 믿음이 왔어. 내가 간절히 천국을 사모했더니만 꿈에서 예수님이 나타나서 믿게 되었어.’ 믿음의 주체가 ‘나’임을 포기 못하는 거죠. 그리고 성령 받지 못한 상태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믿음의 주체가 만약 내가 아니라면, 나 말고 다른 사람이 구원 받는다면 내가 얼마나 속상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믿었기에, 내가 믿었다는 공로로 내가 구원 받는 것이 당연하지, 믿기는 내가 믿었는데 믿지도 않은 다른 놈이 나대신 천당 간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이 안 되겠지요. 왜?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만 천국 데려가야 하나님답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뭔가 한 게 있어야 구원 받는다는 말입니다. 아무 한 것도 없이 구원 받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내가 믿는다는 고백을 누가 했어요? 내가 했지요. ‘내가 했기에 그걸 근거로 해서 그 공로로, 그 덕분에 다른 사람이 아니고 고백을 한 내가 구원 받게 된다.’ 이것이 성령 안 받은 사람들의 논리지요.

내가 아무리 ‘믿습니다. 믿습니다.’ 해도 그것은 전혀 믿음이 아니었고, 육에서 나오는, 나를 천국에 집어넣으려는 몸부림입니다. ‘믿습니다.’가 아니고 ‘믿을 테니까 천국 넣어주세요.’라고 자기의 미래 희망사항을 표출한 것에 불과하단 말이지요.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니까 ‘주여, 나는 개뿔도 구원 받을 자격도 없는 죄인 중의 괴수였군요. 그런데 내가 구원 받는 것은 내가 구원 받고자 하는 열망과 상관없이 이미 창세전에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시는 예수님의 공로에 의해서, 주께서 우리에게 오니까 그 덕분으로 제가 구원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 면류관도 주님이 써셔야 합당합니다.’ 하고 내놓는 이것이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성령 받게 되면, ‘내가 믿습니다.’가 깨져요. 그러니 손무성 목사의 질문이 잘못된 거죠. “목사님은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습니까?” 라는 질문 자체가 잘못된 거죠. “주께서 믿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정답이죠. 성령을 안 받았기 때문에 성령이 주체가 되는 것을 인정 못하지요. 왜냐? 성령이 주체가 되면 나는 성령 앞에서 죽어야 되니까. ‘나’라는 것을 따로 정립하지 않으면,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 믿는 나를 믿지 아니하면 달리 믿을 길이 없는 거예요. 예수 믿는 나를 안 믿고서는 내가 구원 받을 길이 없다는 거예요.

이게 자의식으로 뭐든지 전개해도 모든 행동은 다시 나에게로 귀속되고 나에게로 되돌아온다는 피히테의 자의식입니다. 이게 내일 강의에 나옵니다. 무슨 짓을 해도 내가 한 짓이기 때문에 결국 그 보답은 나에게로 쏟아지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이게 성령 받지 않은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자, 이런 사람의 두려움이 뭘까요? 10년 동안 예수 잘 믿다가 11년째 믿음이 없다고 여길 때, 그 사람은 두렵겠습니까, 안 두렵겠습니까? 13년째 잘 믿어도 소용없어요. 왜? 12년째 겨울에 예수님 재림하면 끝나잖아요. 지금 한창 믿음이 떨어질 때 예수님 재림하시면 나는 구원 못 받잖아요? 그러니까 항상 두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요한1서에 보니까 ‘사랑(성령) 안에 있는 자는 두려움이 없다.’고 했어요. 왜냐하면,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자가 있기 때문에. 아가서에 보세요. 나는 멀뚱하게 있는데 저쪽에서 열을 내며 사랑한다고 고함을 치고 찾아오신 분이 계세요.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분이 누굽니까? 예수님 아닙니까.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분이 있기 때문에 내가 행동을 주의할 필요가 없어요. 내가 일부러 착한 일을 만들 필요가 없어요. 우리가 착한 일을 만들지 않더라도 주님은 사랑으로 충만하기에 내가 그 주님의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만 알면 그만이지, 내 쪽에서 착한 행동해서 주님의 사랑 안에서 따로 내가 주님 사랑하는 처소를 만든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존심 챙기겠다는 것 밖에 안 됩니다.

그래서 저는 과감하게 이야기합니다. “헌금하기 싫거든 하지마라. 단지 얻어맞거든 헌금해라.” 주님이 하신 일은 늘 우리를 깨지게 합니다. ‘내가 생색내는구나. 이것 없어도 사랑인데, 왜 나는 이걸 함으로써 주님의 사랑에 어느 정도 보답했다.’고 생각하는 그런 망상. 또 나의 자의식에 가치를 두는 시도. 만약 이것이 버릇이 되면 우리에게는 두려움이 찾아와요. 불안과 초조와 두려움이 자꾸 찾아와요. ‘이 꼴이 내가 신앙생활 한다고 할 수 있는가? 겨우 몇 명 모이는 이것도 교회인가?’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성경에 나오는 “내가 찾아갈게”라는 말도 안 들리고, 아가서에 “주님이 끝까지 사랑한다.”는 말도 안 들리고, “너희들이 날 사랑한 것이 아니고 내가 너희를 사랑했다.”는 그 소리도 안 들리고, 그저 불안하고 초조해서 벌벌 떨면서 ‘내가 어떤 조치를 하면 옛날 믿음을 회복할 수 있을까?’ 하면서 자기 챙기는 일에 급급한 이것이 우리의 일상적인 육적 흔적으로 남아 있지요.

이런 육적인 흔적이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죽을 때까지 계속됩니다. 왜? 우리는 예수님 처소 안에서 계속 그리스도의 피만이 화목제물인 것을 확인하는 방법이 그 방법 외에는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를 불안케 하는 그 적들이 유리창 밖에서 막 달려듭니다. 우리는 겁나서 눈을 감고 “엄마야!” 하고 있는데, 보니까 적들이 유리창 밖에서 쓰러져 있어요. 주께서 적들을 다 처치했어요. 이것도 모르고 우리는 적들을 보고 얼마나 겁을 먹었는지 ‘아이쿠 죽었구나.’ 했었는데, 주께서 막아주셨어요.

요한복음 14장 18절에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이 말을 왜 하십니까? 지금 제자들 입장에서 예수님이 ‘내 갈 길 간다.’고 하시니까 졸지에 그들은 아비 없는 고아가 돼버려요. 왜냐하면, 3년 동안 그들이 원해서 주님을 따른 것이 아닙니다. 12제자 뽑을 때 주님이 뽑으셨어요. 주님 따르는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12명을 따로 뽑았습니다.

그들에 대해서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는다고 할 때, 그들은 생각하기를 ‘주님이 다시 온다.’ 자, 여러분들이 장차 올 십자가를 모른다고 치고, 제자들의 입장으로 돌아가 봅시다. ‘주께서 다시 오신다.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겠다.’ 이 두 가지의 이야기를 가지고 어떤 시나리오를 짤 수 있습니까? ‘주님께서 잠시 은퇴했다가 옛날 주님 방식 그대로 샌들신고 --’ 이렇게 생각할 것이 뻔하지요. 이게 바로 착각입니다.

여러분은 생각하기를 ‘예수님 제자들은 좋겠다.’ 왜? 예수님을 직접 봤으니까. 몸으로 만졌으니까. 그런데 예수님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거기에 봤던 주님은 전에 있던 방식대로 같이 동거하는 방식대로 시간이 지나니까 허용이 안 됐어요. 부활하신 주님이 늘 나타나신 것이 아닙니다. 그냥 본인이 원할 때 불쑥 나타났다가 붙잡아도 바람같이 떠나버려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애간장이 다 타게 만들어요. 옛날처럼 같이 보면서 지내면 좋겠는데, 예수님은 한 번 하신 방식대로 다시 하시지 않거든요. ‘새로운 보혜사 보내 줄게.’ 그것이 뭐냐? 성령이 온다는 겁니다.

여기서 제자들은 미치고 환장합니다. 옛날에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는 누가 뭐라 해도 “봐라, 예수님 옆에 있잖아!” 라고 이야기하면서 우줄 댈 수 있는데, 성령님이 오시게 되면 “봐라, 성령님이 함께 있잖아!” 할 수가 없지요.

그런데 사도 바울이나 제자들은 이상스럽게 옛날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보다 더 확실하게 의심이 없는, 확신 중에서 죽기까지 복종할 정도로, 진짜 주님이 딱 붙어 있어서 늘 상 같이 있다는, 이제 완성된 상태에서 함께 있다는 것을 더 즐겁게, ‘내가 주 안에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우왕좌왕이 아닙니다. 그 증거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께서 함께하실 때 그 흔적이 뭐냐? 반드시 십자가의 피로 다 이루었다는 그런 방식으로 오시는 것. “갈라디아 사람들아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그러니까 “나는 너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 못 박힌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 이게 무슨 뜻이에요? 항상 성령이 나타날 때는 뭘 느끼게 한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을, 그 피의 사랑을 더욱 더 알게 하는 거죠. “너희가 날 사랑한 것이 아니고 내가 너희를 사랑했다.” 증거가 뭐냐? 피다. ‘내가 피 흘려 죽었잖아. 이 보다 더 큰 사랑 있으면 내 놔봐? 없잖아.’ 이런 피의 사랑으로 다가올 때, 이것이 바로 성령께서 우리를 고아 같이 버려두지 않고 떠나지 않는다는 확실한 증거라는 겁니다.

옛날 같으면, 예수님과 같이 잠을 자도 잠시 화장실에 가시면 제자들 곁에 없는 게 돼요.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이미 벌어진 십자가 사건, 그 십자가 사건 하나만 있어도 그 십자가 사건을 항상 일깨워주시는 분이 바로 지금 함께 하신단 말이지요. 이것을 십자가 사건이라고 했지만, 요한 1서에서는 이것을 ‘화목제물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요한1서 1장 7절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빛 가운데 행한 증거가 뭐냐?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것이 어제나 오늘이나 한결같이, 의심되지 아니하고 이것이 인정되고, 동의 되면서 ‘아하, 내가 잘나서 구원된 것이 아니고 내 못난 것 뻔히 아시고 피 뿌림으로 이미 영생을 얻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이고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모이는 것은 돈에 의해 모이는 것이 아니고 피 묻은 사람끼리 모이는 겁니다. 그 피가 있는 사람들을 교회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하면 처소가 되지요.

자, 그러면 요한복음을 다시 봅시다.

아까 정 목사님과 같이 이야기를 하면서 제가 가슴이 아팠어요. 우리교회 오랜만에 오셨는데, 우리교회가 정이 메말라서 세상교회처럼 잘 안 받들어서, 냉담해서 다시 오기 싫다는 그 이야기를 듣고.

설교나 복음에서 피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결국 발견하는 게 뭐냐? 교회라는 보험회사 하나 발견하는 겁니다. 아무 의미 없는 겁니다. 어느 교회에 가든 피 없는 교회는 절이나 마찬가지지요. 집사는 보살이 되고, 목사는 주지스님이 되는 겁니다. ‘할렐루야!’ 라는 것이 뭡니까?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과 똑같은 거예요.

피 없어도 정이 많다. 그러면 갓바위가 되는 겁니다. 왜 피냐? 육은 일체 못 들어오도록. 만약 육이 영속에 들어와 버리면 무엇이 모독 받는가 하면, 예수님과 하나님만 알던 그 리스트, 명단 책이 모독 받지요. 무슨 뜻인지 이해되십니까? 하나님이 만든 처소는 예수님이 일부러 먼저 방문해서 불러줘야 갈 수 있는데, 끄집어낼 때는 그냥 하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만, 생명 책 명단 보고 끄집어낸다고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명단에 포함되지도 않았는데,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방문하지도 않았는데 자기가 알아서 육에서 영으로 와버리면 명단에 없는 사람이 천국에 포함 되잖아요. 그러면 뭐가 모독됩니까? 예수님과 하나님이 의논한 것이 완전히 모독 받지요. ‘아, 우리가 괜찮은 인간 있는데 몰라보고 이름을 뺏네.’ 하나님이 치매 현상이 있습니까?

생명 책 명단에 없는 인간이 천국에 끼어드는 그런 경우가 있겠어요? 없잖아요. 명단대로 하려면 철저하게 예수님이 찾아가지 않고서는 절대 못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는 그들로 하여금 철저하게 예수님 하는 것이, 육을 육 되게 하는 방법 밖에는 없어요. ‘너는 백날 기도해도 육이다.’ 라는 소리를 해야 그 가운데 진짜 성도는 ‘맞습니다. 맞고요. 진짜 나는 예수님 피 때문에 구원 받았지 제 힘으로 구원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 인간들이 가끔 한 톨, 두 톨 나오게 하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밀어붙이는 방법 밖에는 없어요. ‘너는 육이다 오지마라.’

(2007. 3. 7. 09:57 녹취 마침)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8,422건 중 331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172 자유게시판 부흥을 갈망하며.. 시편 최고관리자 07-03-24
171 자유게시판 **[관계적이고 서술적인 구원론]**특급공개 히브리서 최고관리자 07-03-23
170 자유게시판 우리는 십자가 외에 다른 것을 원하는 자들이다 - 최고관리자 07-03-23
169 자유게시판 십자가의 능력 - 최고관리자 07-03-22
168 자유게시판 짧은 신앙의 글(구원에 이르는 힘) - 최고관리자 07-03-21
167 자유게시판 십자가마을.. - 최고관리자 07-03-19
166 자유게시판 **[도올의 언약사상에 쇄기를 박는다]**(최초공개) [신학] 최고관리자 07-03-19
165 자유게시판 녹취록은 이렇게 올려 주십시요 [신학] 최고관리자 07-03-18
164 자유게시판 단순함의 능력... - 최고관리자 07-03-18
163 자유게시판 에덴동산 중앙에는 두 그루의 나무가 있었습니다. - 최고관리자 07-03-18
162 자유게시판 20070306b 부산강의 : 조지 래드 [신약신학]-하나님나라의 윤리(2) 녹취 히브리서 최고관리자 07-03-17
161 자유게시판 20070306a 부산강의 : 조지 래드 [신약신학]-하나님나라의 윤리(1) 녹취 데살로니가전서 최고관리자 07-03-17
160 자유게시판 내가 믿느냐, 성령이 믿게 하시느냐? 디모데후서 최고관리자 07-03-15
159 자유게시판 **[복음서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신학] 최고관리자 07-03-14
158 자유게시판 예수님과 나 로마서 최고관리자 07-03-11
157 자유게시판 20070302b 울산강의-창세기 9~12장 녹취 창세기 최고관리자 07-03-10
156 자유게시판 20070302a 울산강의-창세기 9장 녹취 창세기 최고관리자 07-03-10
155 자유게시판 요한 계시록과 다니엘서에 대하여. . . 역대하 최고관리자 07-03-09
154 자유게시판 광주 강의(07. 2. 23) 세번째 시간 녹취록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07-03-08
153 자유게시판 영화평 [바벨] - 최고관리자 07-03-07
열람 ➜ 자유게시판 광주 강의(07. 2. 23) 두번째 시간 녹취록 레위기 최고관리자 07-03-07
151 자유게시판 광주 강의(07. 2. 23) 1번 녹취록 올립니다.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07-03-03
150 자유게시판 큰 사기 [신학] 최고관리자 07-03-02
149 자유게시판 봄이 오는 길목에서.... - 최고관리자 07-03-01
148 자유게시판 20070202b 울산강의-창세기 6~9장 녹취 창세기 최고관리자 07-02-27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