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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07년 2월 24일 인간 구원을 위한 신학 구조강의[신학]

2007년 2월 24일 인간 구원을 위한 신학 구조

이름 : 우리교회(IP:220.81.176.160)

http://222.231.1.74/~woorich/성경신학/성경신학의세계1/인간구원을위한신학의구조.hwp

우리교회(IP:220.♡.176.168)

07-06-06 16:19

woorich070224a-인간구원을 위한 신학구조(1)
(강의:이근호 목사)

교재가 없기 때문에 인간구원의 구조의 순서가 일 번은 결국 자기에게로 귀환된다. 시작했습니까? 자기로 귀환돼요. 결국 자기에게로 돌아온다. 두 번째, 무한을 향한 인간들의 자기 확장에서 무한이 유한자에게 이르는 과정, 무한이 유한자에게 머무르는 양상, 유한자에서 방출되는 무한. 이걸 한번 글로 써보면, 결국은 나에게 돌아오는, 나에게 귀환되는 어떤 생각을 하든 어떤 사유를 하던신학을 하던 결국은 나에게로 회수되는 식으로 하죠.

두 번째가 뭐냐 하면, 무한과 유한에서 무한이 인간에게 오고, 그 다음에 두 번째가 그 무한이 인간에게 머물고, 세 번째가 그 인간에게 머무는 그 무한이 인간을 통해서 방출하고. 이 세 가지 논리를 하면서 결국은 나라는 것, 인간, 나, 이거는 여기서 중요한 입장을 갖고 있겠지요. 하나님이 나에게 찾아오고 하나님이 (작게) 나에게 찾아오고, 그 다음에 하나님이 나에게 머물고,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하나님 됨을 드러나고.

그러니까 이거는 어떤 경우에요? 결국 나 없이는 하나님도 일 못한다. 라는 식이 인간구원을 위한 신학의 구조가 되는 겁니다. 전체적인 맥락에서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세요. 왜 나는 죽어서는 안 되는가?

자장면 배달 왔는데 가 보세요. 배달이 왔어요. 잡숫고 오세요. 누구 시킨 사람. 누가 이야기 해보세요. 누가 시켰어요? 빨리빨리 잡숫고 오세요. 갖고 여기서 잡숫고.

그런데 사람이 왜 다른 사람은 죽어도 나는 안 죽어야 된다는 그런 어떤 논리의 정당성이 있습니까? 얼마 전에 산에 보면 산불 나서 엉망진창이에요. 산불 낸 애가, 애가 누가 냈는데, 그 애가 왜 냈느냐? 엄마 귀추한다고 저쪽에 닭도리탕인가 그 집에 있다가 엄마 개초할 사이 애들 마당에서 닭 잡는다고 불 던지다 불냈단 말이죠. 그래서 엄마 가서 엄마 식구들 엄마들 한 수천만 원씩 다 물어줬어요.

하필이면 왜 내가 개초한 날 바람이 불어야 되는가? 그 말은 뭐냐 하면, 왜 나는 안 죽어야 되는가에 대해서 어떤 당연한 이유가 있습니까? 이걸 좀 더 확대하면, 왜 나는 구원을 받아야 돼요. 이건 말이 안 되잖아요.

하나님은 전체를 보는데 우리는 자기를 거기다 포함시키려고 우기는 거예요. 하나님 날 빼놓으면 안 됩니데이. 하나님 날 죽이면 안 됩니데이. 날 망하게 하면 안 됩니데이. 전 실패하면 안 됩니데이. 라고 말도 안 되는 압력을 넣는데 그게 과연 전체를 다루시는 하나님 입장에서는 옳지 않지요. 영 옳지 않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에 나와 있는 이야기에요. 하나님께서 토기를 만드시는데 귀한 그릇을 만드니까 천한 것도 만들려고 하니까 천한 그릇이 왜 나를 천한 그릇으로 만들어야 됩니까? 라고 우기는 것 같다 이 말이죠. 이것은 니는 니 입장만 생각하느냐? 나는, 하나님은 너 입장 옹호하려고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이 말이죠.

근데 사람들은 무조건 자기는 살아남아야 되고, 자기는 어쨌든 간에 천국에 가야 될 리스트에 포함이 돼야 되고, 나는 안 망해야 되고, 나는 지옥 가서는 안 되고, 이걸 말도 안 되게 그걸 전제 조건으로 깔아놓고 하나님이 어떠니 신학이 어떠니 뭐, 개혁주의가 어떠니 그런 이야기하더라 이 말이죠.

그래서 이제는 그러한 반칙은 지겨워요. 이제는 너무 지겨워요. 그거 반칙 아닙니까. 나는 지옥 가서는 안 된다. 이거 말이 안 되거든요. 이게. 어데 성경에 여러분 이름이 어디 나옵니까? 안 나오잖아요. 말이 안 된다고. 이런 제발 말도 안 되는 이런 자기중심의 신학은 이제는 거덜 나야 됩니다. 거덜 내기 위해서는 내 중심으로 신학을 구축하면 이렇게 됩니다. 라는 것을 보이는 강의가 오늘 강의에요.

나는 무조건 천국 가야 되고, 그러니까 나를 지옥 보내는 신학을 왜 우리는 공부 안 하느냐 이 말이죠. 말 되죠. 나를 지옥 보내시는 신학을 왜 우리는, 왜 나를 천국 보내는 신학만 딱 골라잡아서 하고, 나를 지옥 보내는 신학은 안 하려고 하는 그런 반칙을 범하느냐 이 말이죠. 나를 저주하는 신학은 왜 공부 안 하냐 이 말이죠.

그게 너무 일방적인 선택 아닙니까? 말로는 진리 자체가 궁급합니다. 진리 자체를 우리는 저는 요구합니다. 믿고자 합니다. 말은 그럴싸하면서 실제로 딱 들여다보면, 그래도 나는 천국으로 빼주세요. 그것을 내용을 함유한 그런 신학을 전개하다 보니까 사람한테는 통할지 모르지만 하나님한테는 안 통합니다. 그건 니가 만든 거예요. 니가 니 중심으로 만든 거기 때문에 그거는 옳은 신학이 될 수 없는 거예요.

바로 이렇게 조금만 생각해도 아는 거, 왜 나는 망해서는 안 되는가, 왜 나는 인생 거덜 나서는 안 되는가, 그런 생각은 안 하고 나는 왜 지옥 가서는 안 되는가, 그런 생각 안 하고 천국가기 위한 나를 천국보내기 위한 그런 신학만 해놓고 이것이 바른 신학이라고 주장하는 조금만 생각해도 그것이 얼마나 참, 자기 입장만 생각하고 남의 입장은 생각 안 하고 말이죠. 하나님 입장 생각 안 하는 그러한 신학을 무려 이천년 동안 해왔는데 이제 그거 버립시다. 그거 버려야 돼요.

사람을 좋게 하는 것은 결국 사람의 계명으로 전락되고 맙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예수님 중심이라고 그렇게 누누이 말씀 드렸건만 받는 사람은 예수님 중심이 아니고 내 중심, 내 구원 중심으로 받아들이니 이걸 뭐, 때려 부수든지 깨듣지 뭐 조치를 해야 되지 일방적인 자기변명에 지나지 않는 그런 신학은 청산돼야 됩니다.

그렇다면 청산하기 위해서는 나를 위한 구원, 나를 위한 구원의 신학이 도대체 어떤 거냐 알아야 될 것 아닙니까? 사도 바울이 난 예수님을 알고 모든 것을 배설물로 알고 버렸다 하는데, 버릴 때 버리더라도 뭔가 알고 버려야 될 거 아닙니까?

근데 요즘 목회자들이나 교인들 보면 버릴 게 없어요. 왜? 아예 알려고도 생각한 적이 없기 때문에. 뭔가 알아야 버리는데 이걸 전혀 생각도 않는 거예요. 자기 자신한테 관심도 없는 거예요. 내가 어떤 본성으로 되어 있고 내가 어떤 인간이냐 그런 관심도 없어요. 그저 보험 들어 놓듯이 교회 와서 보험 들면 되는 줄 알고 있는데.

사도 바울은 나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로 모든 것을 배설물로 버린다 할 때는 이게 왜 예수님 때문에 버려져야 되는 그런 내용물을 담고 있느냐를 내용물을 알고 버려야 됩니다. 만약에 이런 철학공부를 하지 않고 나는 뭐, 성경에 보니까 모든 걸 배설물로 여긴다 하니까 애초부터 나는 버릴 것은 공부도 안 한다.

이래 돼버리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느냐 하면, 자기는 버릴 것만 버리고 진짜 복음만 챙겼다고 딱 챙겨놨는데 들여다보면 철학이야. 철학을 공부 안했기 때문에 자기가 있는 것이 자기는 기껏 복음이라고 우기는데, 철학을 공부한 사람이 보니까 전부다 이거는 복음이 아니고 전부다 철학이에요. 철학을 공부 안 했기 때문에 버릴 것을 버리지 못하는 겁니다.

제가 지난 수요일 날 그런 이야기했지요. 굴뚝에 들어갔는데 두 사람이 굴뚝 청소하고 나오더란 말이죠. 한 사람은 얼굴 하야지고 나오고 한 사람은 시커매져서 나올 때 둘 중에 얼굴 씻는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사모님, 누구겠어요? 누가 얼굴 씻겠습니까? 두 사람이 하나는 얼굴이 시커멓고 하나는 허열 것 같으면 시커먼 사람이 얼굴 씻겠습니까, 하얀 사람이 얼굴 씻겠습니까? 하얀 사람이죠. 왜? 상대방 보니까 시커머니까 거울이 없으니까 아하, 저 사람이 시커머니까 씻을 거고, 시커먼 사람은 상대방은 허여니까 집에 가서 씻지, 뭐. 지금은 말짱하다. 이래 생각한다 말이죠.

버려야 할 것은, 사도 바울이 철학을 배설물로 버린다 할 때는 그 뭐 때문에 버리느냐를 알아야 하는데, 아예 자기 혼자 스스로 이불 속에서 생각해서 나는 내 알아서 다 버렸다. 쥐어 준 것도 없이 버렸다 해 놓으니까 정작 자기가 버려야 될 대상인 것을 정작 앞에서는 보질 못하기 때문에 자기 혼자 나는 버렸다. 아마 버렸을 걸. 아마 다 버렸을 거야. 혼자 상상하다가 하나도 버리지 않고, 설교 들으면 전부 철학으로 돼 있다 이 말이죠.

그래서 제가 전에 이야기했지만 신학을 해야 됩니다. 어떤 분은 개혁노회에 대해서 목사님, 기존 신학교에 아예 입학도 안 하고 그냥 복음만 알면 되지 않겠습니까? 저는 양쪽 다 하시기 바랍니다. 기존의 신학을 해서 왜 이 신학이 한국교회를 이렇게 더럽게 만들어 놨느냐 그 이유를 알아야 돼요.

제가 지금 구상하는 신학교는 어떤 신학교냐 하면, 혼자 상상합니다. 저도. 한 4년제로 해서 1학년 때는 신학 예비학교로 모집해서 거기에는 스님도 강사로 초빙하고, 천주교 신부도 초빙하고, 피종진 목사도 초빙하고, 오지도 않겠지만 부흥사도 초빙하고 그리고 밥 퍼주는 목사도 오게 하고, 온갖 오게 해서 제발 너거 양들 좀 가가라. 그 강사들 와서 이야기해 보고 나는 저, 십자가 보다 저게 낫다는 사람들 아예 초반부터 좀 가져가라 이 말이죠.

기독교 하다가 스님한테 기독교 들어보면 역시 기독교나 불교나 불교가 더 세다. 하는 사람은 불교 쪽으로 가도록 하고, 그야말로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은 제발 신학교 오지 말고 걸러내는 필터작업을 1년간 해서 보내야지, 그렇지 않고 만약에 본과에 들어가서 복음을 배우게 되면, 복음은 껍데기 각질층처럼 자꾸 껍데기로 쌓이고 속에 내부에는 불교도 들어있고 천주교도 들어있고 밥 퍼주는 사랑도 들어있고 선교사 보내자도 들어있고 교회부흥도 들어있고 온갖 게 다 들어있다 이 말이죠.

아무리 위에서 껍데기를 포장해 봐야 안 쪽에는 변화가 없거든요. 왜냐하면 성령을 본색이 변화가 되지 않으니까. 그래서 차라리 거른다고 또 다 걸러지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진짜 또 복음을 아는 사람은 그런 신학교를 통해서 아, 진짜 불교 스님이 이야기하는 불교가 진짜배기 불교가 저런 거구나. 하는 경험도 얻게 되고.

뭐, 천주교가 이단이니 교황이 이단이라 하지만 진짜 천주교에 속한 신부, 공부한 신부의 말 들어보면, 야, 이런 개신교보다 더 개신교고 오직 행함으로 구원받는다 해다보니 나중에 들어보니까 천주교가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고 마리아 숭배하지 않고 마리아는 그냥 신앙의 모델이고 진짜 예수만 믿는다. 이런 소리가 거기서 나온다 이 말이죠.
신부 중에도 공부한 신부도 초빙해야 되고, 실제로 목회하는 신부도 해서 역시 또 마리아가 있어야 되지 그런 소리도 들어보고. 이렇게 해 볼 때 목회라는 게 아니라 아하, 인생이라 하는 것은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일을 하시는구나. 진리를 알지요. 진리에 손을 댈 수 있는 겁니다.

그런 작업을 지금 꿈에서나 하고 그 하기 전에 오늘 이 시간, 네 시간, 다섯 시간 동안 그 작업을 예비학교 작업을 미리 다 해버리자 말이죠. 여기 다 나오니까. 불교든 천주교든 유교든 다 나오니까 해보는 겁니다.

이 교재 저 혼자 갖고 있는데, [인간은 스스로 자기를 지킨다.] 맞는 말 아닙니까? 인간은 스스로 자기를 지킨다. [자기 존재에 대한 포기란 없다. 자기가 자기를 살려내기 위해서 성경을 본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제가 오늘 처음 강의할 때 이게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말이죠. 하나님께서는 저 사람, 이 사람 하나님 뜻대로 구원하는데 우리는 그런 것은 영 귀담아 듣지 않고 무조건 내가 날 살려내기 위해서 성경을 보고, 하나님을 찾고 하는 거다 말이죠.

그렇게 되니까 여기서 나오는 것이 나를 살리기 위해서 한다. 그러면 지금 나는 나, 일 번과 두 번째 나, 이 번 살려내면 다 이 번. 그러니까 나 이 번은 누가 상상해 내느냐 하면, 나, 일에서 나 이를 상상한 목표가 되는 거죠.

여기서 '목적'과 '목표'가 다릅니다. 목표라 하는 것은 결국은 그걸 쟁취해야 될 그 최종지점을 목표라 하고, 목적은 그 목표를 향하여 모든 과정이 목적적 성향을 띤다 할 때 목적이란 말을 씁니다. 방향지시를 이야기할 때는 목적이라는 게 포함되고 방향지시가 없고 딱 완료된 상태를 가지고 목표라 하는 거예요.

사람이라 하는 것은 어느 인간이든 목적 없는 행동은 없어요. 어느 존재건 목적이나 목표가 없는 목표를 향한 목적적 지향성, 바라보는 게 없는 그런 나는 없다 이 말이죠. 그 말은 뭔 뜻이냐 하면, 나 원과 나 투 사이에는 끊어짐이 없다 이 말입니다. 뭔가 항상 연결되어 있어요.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그 시작이 뭐냐? 나부터 시작해서 나 원에서 시작해서 나 투로 갈 수밖에 없는 이런 구조에 있습니다.

여기다가 신학을 집어넣고 무슨 복음을 십자가를 집어넣어도 이것은 결국은 나 원에서 집어넣으면 이 통로를 통해서 나 투로 가는 거예요. 쿠알라룸푸르에 유명한 삼성건설이 참여한 쌍둥이 빌딩이 있잖아요. 팔십 몇 층인가. 그 빌딩 사이에 뭐가 있느냐 하면, 빌딩이 이렇게 생겼는데 멋있어요. 그 사이에 다리가 있다는 거예요.

이게 나 원에서 나 투로 본다면, 나 원에서 모든 걸 집어넣는 그것은 그냥 집어넣는 게 아니고, 목표를 향한 목적 성향이 있기 때문에 집어넣어요. 인간의 행동은 목적 없는 행동이 없기 때문에. 집어넣는 것이 이걸 통해서 어디로 가게 하느냐 하면, 나 투로 되기 위한 그런 목적 성향을 가지고 나 원에다 모든 투자를 한다 말이죠.

그런데 다시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처음부터 하나님 뜻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겁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하나님 뜻하고 아무 상관이 없는 거예요. 그저 죽지 못해 내가 살아있기 때문에 그냥 이런 행동들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살아 있기 때문에 살아있다는 이유 때문에 그런 목적이 나올 수밖에 없고, 그런 목표를 가지고 지향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 인간은 나 원에서 나오는 지향성에 의해서 나 투에 도움 되는 방향으로 이렇게 방향을 다리가 여러 개 있더라도 다리 하나를 골라서 간다는 이것을 가지고 철학에서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현상학'이라 합니다. 현상학이란 뭐냐 하면, 이것이 무엇이냐를 묻지를 말라는 겁니다. 어떻게 그것이 형성되는가를 물어라.

이것이 무엇이냐? 내가 누구, 그러니까 현상학은 뭐냐? 내가 누구냐를 묻지 마라. 예수가 누구시냐를 묻지 마라. 현상학은 내가 예수를 내가 묻는 과정이 어떤 과정이냐? 그것만 찾아내자. 내가 예수님을 할 때 예수라는 개념을 형성할 때 어떤 절차를 따라서 예수라는 개념을 믿는 형식으로 향하냐. 그게 현상학이라고 합니다.

이 현상학은 뭐에 대해서 반발하느냐 하면, 인간은 모든 것이 나 중심이라는 것이 반발하고 싶어서 그런 겁니다. 내가 나 중심이라는 그 생각은 어디서 나왔느냐 이 말입니다. 내가 나 중심이라는 생각은 어디서 나왔느냐? 모든 것이 내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숨길 수 없는 본성 이 자체는 어디서 나왔느냐 이 말입니다. 어떤 절차를 밟았느냐?

어디서 나왔느냐는 말은 어디 있다는 말이 아니고, 그 뒤에 있는 것도 무효로 되니까 어떤 과정을 거쳐서 그러한 느낌이 오느냐? 그거는 하나님이 그렇게 했다 하면 하나님 자체를 괄호 치는 거예요. 일단 하나님이라 하고, 하나님 자리에 또 뭐가 들어갈지 모르니까. 그 다음 차례 일단 유보시킵니다. 보크라 하지요.

그 정도로 아주 철저하게 흔히 말하는 배설물로 여기는 배설물로 여길 수밖에 없는 철학은 철저하게 정말 배설물로 여기기 힘들 정도로 빼내기 힘들 정도로 철저하게 우리와 이미 하나가 되어 있습니다.

현상학자가 훗설이 현상학 있다 할 때 이게 이야기할 때 이게 남의 이야기인 줄 알지요. 들어보면 내가 미처 나도 발견치 못한 것을 그 사람이 도와준 셈이죠. 마르크스 이야기가 남의 마르크스 이야기인 줄 아십니까? 내 속에 이미 한 아담 안에 들어있는 것을 마르크스가 내가 바빠서 못한 것은 덜 바쁜 그분이 연구해서 끄집어 낸 거예요.

사람은 자기의 노동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해서 사는 재미로 산다. 마르크스가 그렇게 이야기했거든요. 한번 적어 볼까요. 사람이라 하는 것은 사람이 사는 재미가 뭐냐 하면, 자신의 유용가치, 가치죠. 중요합니다. 자신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여 그걸 가치를 모으는 재미로 살아간다.

자본주의에서 이것보다 더 큰 진리는 없어요. 딩동댕. 이거 퀴즈 나오면 합격입니다. 1억 타요. 마지막에 돈, 더 이상 없어요. 이것 밖에 없어요. 자기 유용가치를 돈으로 환산해서 바꾸는 축적하는 그 재미. 자기 가치를 더욱더 축적하는 돈으로 환산돼야 돼요. 왜냐? 모든 살 수 있는 거니까. 돈으로 환산하는 그 재미로 사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를 스스로 상품화 하고 싶어서 환장한 거예요. 나, 가치 있다. 나 이만한 가치가 있다. 자기를 상품화하고 싶어 환장하는 그런 경쟁체제에 놓여 있을 때 이걸 자본주의사회라고 합니다. 가치 없는 것은 나가 죽어라 이 말이죠. 그러면 이 마르크스 이야기 들을 때 성령 받은 스데반 집사님 어떻게 생각하게요? 이래 생각할 거예요. 그래 나가 죽을게. 간단한 문제지요. 왜? 이걸 배설물로 여겼으니까.

사도 바울이 배설물로 여긴다는 말은 떨어질 때 내가 임의로 만든 자아도 배설물과 섞여서 함께 배설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예요. 자기를 살리기 위해서 철학은 가위로 끊어버리고 복음으로 무장해서 날 살려 달라. 그거는 그 자체가 배설물이에요. 예수님이 성령으로 만든 자아 따로 있고, 우리가 육으로 만든 자아 따로 있습니다. 어제 광주강의를 그러했기 때문에, 광주강의 올려놨습니까? 들으시고 참고하시면 됩니다.

참석 안하신 분을 위해서 다시 한번 정리해 드리면, 성령 없이 예수 믿는 것과 성령 있고 예수 믿는 것과의 차이점이 있어요. 사도행전에 보면, 그들이 세례 요한의 세례는 알고 있어도 성령세례는 알지 못했다는 그 대목이 나오거든요. 뭐냐 하면, 예수님이 여기 있고 자아가 여기 있다면 예수님 여기 있다면, 성령 없이 예수 믿게 되면 뭐냐 하면, 내가 예수를 믿는 당사자 내가 구원받아요. 다른 중간은 없기 때문에. 예수님은 나를 믿어라. 나는, 제가 믿겠나이다. 니가 믿었으니까 니는 구원받아. 이것이 성령 없이 믿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경우에는 어떤 경우에도 포기 못하느냐 하면, 예수 믿는 나를 어떤 경우에도 포기 못해요. 왜냐하면 예수 믿는 나를 포기해 버리면 예수 믿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요 구조에서 예수 믿는 사람 없잖아요. 요 구조에서 예수님 계시고 나 있으니까 예수 믿는 사람은 누구 밖에 없습니까? 나 밖에 없잖아요. 나 밖에 없으니까 구원받으려면 나만 구원되지요.

그런데 이거는 성령이 안 왔을 때 경우에 이런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성령이 안 왔을 경우에. 이런 성령이 안 왔을 경우에는 질문이 뭐냐 하면, 당신은 예수 믿습니까? 하는 질문이 성립되죠. 누가 유명한 말 했잖아요. 당신은 예수 믿습니까? 하는. 성령이 안 왔을 경우에 이런 구조가 성립되죠.

그런데 성령이 와버리면 성령세례가 와버리면, 성령께서는 예수님과 자기가 택한 백성, 이 구조 전체를 이 자아를 대체해 집어넣어 버립니다. 집어넣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 믿게 되어 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믿음이라 하는 것은 이 구조가 이 성령에 의해서 이 구조가 인정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앞에서 우리는 뭐냐 하면, 내 믿음으로 구원되지 못함이 확인되는 그게 증명되는 내 믿음으로 구원받지 못하고, 주의 주신 선물로 말미암아 주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믿게 된다는 확인되는 그런 믿음이 새로 발생되지요.

이게 성령세례 받고 난 뒤에는 특징이 뭐냐? 믿는 것도 선물입니다. 나 안에선 나라는 육적인 존재에선 절대로 믿음이 나올 수 없습니다. 하는 것을 고백하게 되는 거예요. 이게 성령을 받으면 고백케 되죠. 당신은 예수 믿습니까? 성령께서 주신 믿음으로 주께서 하신 것으로 인하여 믿게 됩니다. 이렇게 믿음의 주체를 예수님께 돌려버리지요.

이게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이고, 성령이 없는 사람은 내가 그때 기도해서 믿었다. 내가 은혜 받아서 내가 믿었다. 이러니까 자꾸 자기 자신이 여기서 자기를 아주 포기를 못하는 셈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것이 결국은 철학에서 드러나는 이것이 바로 철학의 일종이 되는 겁니다. 배설물에 해당되는 거죠.

여기 2번에 [무한을 향한 인간의 자기 확장]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걸 앞으로 쭉 하게 되는데 하기 전에 이해가 너무 어렵기 때문에 뭐부터 하느냐 하면, 교재 여기 보면 언약에 의한 신학이 뭐냐, 언약에 의한 신학이 어떻게 되는 가부터 먼저 이야기하고, 언약에 의한 신학부터 먼저, 인간을 위한 신학의 한계에서 죽음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법이라는 그 대목을 하게 되면, 언약에 의해서 발생되는 그 신학과 지금 그것 먼저 말씀드리고, 그 다음에 제가 이야기하는 무한을 향한 인간의 자유함, 아까 순서 있지요.

무한이 우리에게 이르는 과정, 무한이 유한자에게 이르는 과정, 그 다음에 그 무한이 유한자와 결합되는 양상, 세 번째 무한자가 그 유한자를 향한 방출되는 양상. 그걸 제가 이야기할 텐데 그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언약에 의해서 신학은 어떻게 정립되느냐 그것부터 알아야 돼요.

왜냐하면, 제가 언약에 의한 신학을 먼저 이야기하지 않으면 강의 듣는 사람, 여러분 절망합니다. 야, 결국은 내가 진짜 믿은 게 철학이었구나. 다 들통 나기 때문에. 이거는 빼도 박도 못하고 철학 그 자체 내라고 아마 느껴질 겁니다.

신이 와서 나한테 임해서 그래서 나는 신과 하나가 되었고,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신이 일을 하신다. 이건 누가 봐도 복음적이고 성경적인데 이것이 철학이었구나. 하는 것을 드러날 때 아마 첫 째 시간 마치고 다 집에 갈까 싶어 겁을 내기 때문에 말리기 위해서 먼저 언약에 의한 신학의 체계를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언약에 의한 체계에 보면 언약은 뭐냐 하면, 언약 완성을 지향합니다. 언약이라 할 때는 언약만 덜렁 주고 지키라 이게 아니라 언약 자체는 언약 완성을 바라보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언약에 의한 신학이란 것은 다른 말로 해서 언약이 완성되는 최종상태를 말합니다. 언약이 완성된 상태. 그 언약이 완성된 상태가 뭐냐 하면, 바로 주의 이름이 온 우주에 퍼지는 일, 주의 이름만이 온 우주에 장악되는 그것이 언약 완성의 신학입니다.

그것을 바라보기 위해서 구약에서는 뭐냐 하면, 이 언약 위력을 보여주기 위해서 언약궤가 있어요. 언약궤 위에 하나님 이름이 머무는 곳이 있어요. 그게 언약궤입니다. 하나님 이름이 머무는 곳. 그 언약궤가 이동하면서 모든 인간의 이름과 전쟁을 벌입니다. 어제 광주강의에서도 했는데 이걸 생각해 보니까 좀 쉽게 풀어냈다 싶어서 다시 한번 합니다. 광주 사람들 괜찮지요. 다시 해도 괜찮지요. 벌써 다 잊어버렸다고요?

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 완성을 언약을 설명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이스라엘 집단이 가장 무서워하는 식으로 적들이 쳐들어오게 했습니다. 구약에. 쉽게 말해서 여기에 뭐가 있느냐 하면, 투명한 유리벽이 있어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리벽이 있는지도 몰라요.

저 이스라엘 적들이 막강한 적들이 막 달려와요. 달려와서 엄마야, 죽었다 하고 쭈그리고 잇는데 이들이 꽝하고 유리벽에 부딪쳐서 다 몰살하거든요. 자기는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살았어요. 이 유리벽이 뭐냐? 이게 언약 벽입니다. 언약 벽을 누가 보호하느냐? 이것이 바로 주의 이름입니다.

이게 무슨 전쟁이냐? 이게 바로 붙이심의 전쟁이죠. 하여튼 우리가 겁낼 만한 것은 다 달려오게 해요. 그것도 시속 320키로. 달려와서 야, 이젠 죽었다. 하는데 이 적들은 유황불에 떨어져서 죽고, 갑자기 전염병에 죽고, 갑자기 자기들끼리 칼싸움해서 죽고. 아이씨, 이거는 손도 안 댔는데 저희들끼리 죽고 몰살당해요.

나중에 보니까 이스라엘 속에 누가 있느냐 하면 용사가 있어요. 용사가 누구냐 하면, 주의 이름이 여호와께서 용사가 되셔서 여기는 쭈그리고 앉아서 겁만 덜덜 떨고 있었는데 모든 일은 누가 했습니까? 주의 용사께서 저 적들을 쳐부순 거예요.

그때 적들은 뭐냐 하면, 주의 이름이 없어요. 주의 이름이 없는 곳이고, 요 이스라엘 나라한테는 주의 이름이 계셔요. 주의 이름이 있는 곳에는 주의 이름으로 보호를 받고 용서를 받고, 주의 이름이 없는 곳에는 반드시 저주받게 돼있다. 라는 이 전체, 양쪽 다 전체가 다 드러나는 식으로 할 때 이게 뭐냐? 언약의 완성입니다.

그래서 지옥이 있어야 돼요. 지옥이 있어야 되는 이유는 주의 이름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의 이름이 갖고 있는 저주성, 그 저주성도 완성돼야 됩니다. 축복성도 완성돼야 되지만 이 저주성도 완성돼야 돼요. 언약을 완성하기 위해서 붙이심의 부셔지는 적도 있어야 되고 어떤 역할을 해야 되느냐 하면, 공짜로 구원받는 역할 하는 쪽도 있어야 돼요. 여기는 천국인데 여기는 자기의 면류관까지 반납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쪽은 뭐냐? 이쪽은 주님의 언약에 의해서 이렇게 조종 받는 사실조차도 인정하지 않고 이쪽은 뭐만 생각하느냐 하면, 주의 이름은 없고 사람은 내 하기 나름이다. 라는 게 나중에 나옵니다만 내 하기 나름이다 하는 게 있어요.

이쪽에 적들도 그럼 신이 없습니까? 신이 있어요, 없겠어요, 적들도? 있지요. 그 신이 바로 아담 속성이 낼 수 있는 모든 다양한 신들이 전부 다 들어있다 이 말이죠. 소위 예수 이름으로 삼위일체 이름으로 만들어낸 모든 자기보호를 위한 신이다 말이죠.

그런데 여기 언약속의 이스라엘은 자길 위한 언약이 아니지요. 자기 이름을 위한 언약이 아니고, 누구를 위한 언약입니까? 주의 이름에 대한 언약 아닙니까? 그런데 인간은 으앵 애기로 태어날 때부터 누구 밖에 몰라요? 자기가 자길 지키는 자기 밖에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독특성은 뭐냐? 이스라엘도 이방인처럼 자기 밖에 몰랐어야 되는데 이게 웬 사태인지, 자기가 난데없이 주의 이름에 안에 복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식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거예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내 구원함을 위함이 아니고, 주께서 자기 언약을 완성하기 위해서 나를 축복 편에다 이렇게 가입을 시켰다는 것이 그게 나중에 알게 되죠.

이것이 뭐냐? 우리 위주의 신학이 아니고, 주의 이름을 위한 신학이죠. 이해되십니까? 미리 이걸 이야기 해놔야지 그렇지 않으면 앞에 것 하고 이거 이야기 안하면, 낙담해서 슬픔에 잠겨서 제가 위로 할 것이 없게 됩니다.

그래서 그러면 구약 때는 유리벽에 붙이시는 전쟁을 하는데, 신약 때는 전쟁을 안 합니까? 왜 전쟁을 안 할까요. 교재에 나와 있는데, [언약을 인도하는 언약궤는 인간의 이름으로 억울하게 죽은 하나님의 이름만이 담긴다.] 희생당한 하나님의 이름으로서 언약궤에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주의 이름이 가는 곳마다 인간의 이름들은 죽어야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에 의해서 억울하게 죽은 주의 이름이 있기 때문에.

이것이 그대로 그 다음에 신약에 오게 되면, 아담 안에 속한 적이 없는 아담 안 말고 새로운 아담, 마지막 아담이 등장해서 그 마지막 아담으로 하나님께서 새로운 아담이 등장해서 기존의 아담 안에 속한 사람한테 죽임을 당하게 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어떤 인간도 메시야로부터 공격받지 않을 인간은 하나도 없게 만들어요.

이거는 유대인이 예수님을 죽인 게 아니고, 유대인이 대표가 되는 기존의 모든 아담에 속한 것과 예수님 혼자와의 싸움입니다. 누구의 이름과 이름의 부딪침이죠. 부딪침인데 결국은 예수님이 주장하는 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이 이런 이야기해요. 이 세상 모든 것은 예수님, 내 이름,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한 것이다. 라는 쪽은 예수님 주장이고, 우리 쪽은 신이 있고 메시야가 오는 것은 다 누구를 위함이다? 나를 구원하기 위함이다. 라는 이쪽 주장이 있고.

이 두 개의 주장이 서로 어디서 딱 이렇게 부딪치느냐 하면, 십자가를 통해서 서로 다른 속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 확연하게 드러나고 만 겁니다. 예수님을 위한 우리냐, 아니면 우릴 위한 예수님이냐의 싸움입니다. 그것이 바리새인들한테 굉장히 걸림돌이 됐습니다.

오랜만에 성경 한번 찾아봅시다. 요한복음 10장. 요한복음 5장부터. 요한복음 5장 18절.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상당히 여러분 이 말보니까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자기를 친 아버지라 하여서, 우리 보고 그 밑에 뒷글을 쓰라면 이렇게 돼요.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서 자기를 2급 하나님 또는 차등 지는 하나님, 하나님보다 한 단계 낮은 하나님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래 돼야 되는데 뭐라고 되어 있어요? "하나님을 자기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뭐하게? "동등 되게 삼으시니라"

뭔가 우리의 생각과 다르지요.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이런 대목 나옵니다. 요한복음 10장 30절에 보면, 29절부터 봅시다. "왜 동등이냐 보세요.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나이다.

이것은 예수님은 아주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인간이 만날 수 있는 유일한 하나님이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왜 아들이라 하느냐? 하나님이 인정하신 아들은 예수님 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정하신 아들은 예수님 밖에 없어요.

적어도 예수님 한 천국에서는 아들이 되면 아버지가 동등 돼야 아들이에요. 동등 안 되면 아들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럼 나머지는 뭐냐? 그냥 피조물인 거예요. 이것은 아들이란 말은 아버지가 하는 일에 같이 참여되고 합치되고 의논 상대자가 되고, 이런 거고. 만약에 피조물이 돼버리면 거기서 배제되고 그러면 아버지와 아들의 의논된 것에 대해서 그냥 적용이 되는 피조물에 불과한 거예요. 다른 모든 인간들은.

아버지하고 아들이 의논하고 있는데 점원이 왔어요. 종이 왔습니다. 종이 있다가 저, 주인님, 아드님, 나도 같이 좀 끼어듭시다. 안돼! 왜? 아들이 아니니까. 여기 아들이 아니란 말은, 너는 우리가 결정한 대로 적용받을 뿐이죠.

성경 전체는 처음부터 아버지와 아들 간의 의논해서 생긴 것이 성경책인데, 아들이 될 수 없는 하나님 뜻을 모르는 인간이 자기 위주로 이 성경을 해석했다는 말은 결국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아들 됨을 거부하고, 그 자리에 마치 자기가 하나님 아들 자리에 들어가 있는 양 그렇게 건방떨면서 행세한 게 됩니다.

이거는 자리에 대한 탈취죠. 교만인 겁니다. 본래의 자리가 아니고, 마치 하나님 아들 자리에 덜컥 들어선 게 돼요.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자기 자리를 되찾고자 하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자리에서 추방돼야 되는 겁니다.

다시 하면, 추방되면서 우리는 이래 해야 돼요. 주여, 저는 하나님 뜻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하고 추방돼야 돼요. 안다 하면 안 돼요. 아는 것은 예수님만 알고 있지, 우리는 몰라야 돼요. 그리고 우리는 몰라도 괜찮아요. 왜냐하면 예수님에 의해서 적용받기만 하면 그만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하신 일에 적용받기만 하면 그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자리를 그렇게 아들의 자리를 탈취하고 자기 있을 자리가 아닐 때 신의 자리에 앉아 그게 마귀가 한 거예요. 니가 선악과 따먹으면 신처럼 된다는 말이, 신이 된다는 말이 아니고 바로 예수님 자리에 니가 들어간다는 뜻이거든요.

니가 그렇게 행세할 수 있다 하는 것은, 극구 이름 싸움에서 주의 이름이 우주의 주인이냐, 아니면 인간의 이름이 우주의 주인이냐를 놓고 쟁탈전을 벌이는 겁니다. 그 전쟁에서 언약대로 우리 주님이 승리를 하셔야 돼요. 그 승리했다는 말은 우리는 패배당해야 된다 이 말입니다.

결국은 주의 이름의 신학을 한 마디로 하면, 인간은 당연히 뭐 해야 됩니까? 패배당해야 합니다. 이게 언약적인 신학의 특징이에요. 패배당해야 돼요. 우리는 저주 받아야 합당합니다. 망해야 합당합니다. 옛 아담에 속한 사람은 다 죽어야 마땅합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죄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 가운데 죽어야 합당하다는 그것을 우리가 수용할 수 있어야 그것이 주님의 이름에 의한 신학에 합당한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제가 이제부터 강의해야 될 걸 이렇게 운 떼어놓고 강의합니다. 강의해야 될 게 뭐냐 하면, 무한이 유한에게 오고, 유한이 무한과 결합되고, 그 유한에서 무한이 방출된다는 이런 아이디어는 다 거짓말입니다. 다 거짓말인 거예요.

예수님의 영을 받지 않기 때문에 생긴 인간의 자기 구원을 위한 하나의 모색, 반칙을 한 겁니다. 허구적 신학을 만든 겁니다. 결국 인간은 현재 이 자리를 포기 못 하겠다는 겁니다. 자기를 불멸의 존재로 만들어요. 불멸의 이순신 나오죠. 자기를 불멸의 존재로 될 때 자기는 만족하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신학이 기존 이천년 교회,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천년 교회사를 통해서 그 신학이 정교하게 그야말로 반박이 안 될 정도로 너무 멋있게 합당하게 그 신학체계가 성립되어 왔습니다. 그 신학계에 성립되어 있는 그 방식이 어떤 방식인가 그것을 지금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서론 끝나고 본론 들어갑니다. 시간 맞춰났으니까 너무 힘들어하지 마세요. 딱 50분 되면 마치겠습니다.

첫 번째, 무한이 유한에 이르는 과정. 이게 뭐냐 하면, 세상에 있는 것은 전부다 물, 공기, 불, 흙. 이게 세상에 네 가지 기본 조건인데, 이런 모든 기본조건들로 통해서 물질이 만들어집니다. 지금 제가 하는 일은 인간을 위한 신학이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서 여러분 듣기만 들으세요. 반박이 거의 되질 않아요. 다 옳은 이야기니까. 이 세상에는 물질로 되어 있다. 여러분들이 철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에 제가 쉽게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세상은 물질로 되어 있다. 물질로 되어 있다는 것은 변화한다. 왜냐? 없어지니까. 물질로 된 것은 없어져요. 없어지니까 이거는 비정신적이죠. 영원한 것이 아니죠. 물질된 것이 변화되고 없어진다. 없어진다는 것은 현재 물질을 있게 했다는 그것을 같이 없애는 식이 돼버려요.

뭔가 없다는 말은 나타났다가 없다는 말은 처음부터 이 물질이 어디서 생겼느냐 하는 그 이야기, 도대체 이 물질, 없어질 이것은 처음부터 어디서 생겼느냐? 하는 이 질문을 못하게 만들지요. 물질만 되어 있다면. 그렇다면 칼 가지고 누굴 찔러도 괜찮지요. 왜 찌르느냐? 니 전부다 없어질 건데.

아니야. 신이 날 만들었어. 라고 나온다면 신은 물질이 아니고 어디에 속합니까? 정신적인 것에 속하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변화고 사라지는 없어지고 부서지는 물질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은 뭐도 있어야 돼요? 물질 말도 정신이 있어야 되는데, 이 정신의 특징은 비록 사람이 키가 작고 뭐 몸집이 뚱뚱하지 않고 야위고 뭐 남자고 여자고 관계없이 정신은 하늘같이 보편성을 지녀요. 뭐 뚝 하네. 보편성을 지니고 있어요.

보편성은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뭐냐? 타인과의 보편성. 당신하고 나하고 같은 점이 있어서 의사가 소통되는 겁니다. 지금 우리 같은 한국말을 쓰기 때문에 보편성이죠. 또 두 번째는 내 내부적으로 개인적으로 여러분 손가락은 뭐로 만들었습니까? 세포로 되어 있죠. 물질로 되어 있죠. 그러면 이거 머리는 뭐로 되어 있습니까? 물질로 되어 있죠. 그러면 내가 머리 때리는데 왜 손이 같이 나갑니까? 이거 말이 안 되잖아요.

머리도 물질이고 손도 물질 같으면 물질은 정신이 없어야 되잖아요. 없었는데 왜 남들이 에이, 임마하고 탁 때리니까 이게 어디? 손이 나간다 말이죠. 왜 이걸 때리면 이걸 대야지 왜 손이 나가느냐 말이죠. 이것은 손과 머리 사이에 뭔가 물질과 물질을 이어주는 결합된 게 있지요. 그게 뭐냐? 영혼이라 영혼. 또는 마음, 또는 정신. 아시겠습니까? 이 논리에 빈틈이 없습니다. 지금.

사람은 손가락 따로 발가락 따로지만 손, 발가락 각각 전부다 하나로 묶는 어떤 다른 어떤 물질이 아니고, 본드 바르는 게 아니고 본드 없어요. 본드 없고 뭔가 물질이 아닌 다른 요소로서 여기 때려도 이것이 반응하고 이것이 아프면 이것이 반응하는 하나의 개인적으로 결합돼 있는 묶어주는 게 있다는 겁니다.

그게 용어가 뭐라고 붙여도 괜찮아요. 정신이라 해도 괜찮고, 또 어떤 사람이 ‘끼리끼리’ 하면 끼리끼리 하던지 무엇이든지 괜찮은데 뭐냐? 물질적인 것은 아니란 말이죠. 물질적이 아니라면 그걸 뭐라고 이름 붙일까요? 그럼 정신적으로 붙이면 된다 말이죠. 정신이 어디 있느냐 라고 묻지 마세요. 물질이 아니니까 물질로 표현 안 되니까 물질 외에 다른 표현을 쓰는데 그걸 정신으로 하자 이 말이에요.

정신으로 하니까 그 정신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언어가 나오거든요. 언어가 나오니까 서로 사는 환경 달라도 코미디 보면 같이 웃잖아요. 저, 실례합니다만 어느 동네 사시는데 같이 웃으십니까? 나는 동산동에 사는데. 그럼 물질이 다른데 왜 웃죠? 이건 말이 안 된다고. 물질이 다른데 왜 웃어요. 나는 지묘동에 사는데 우리 다른 물질인데 같이 웃습니까? 말이 안 되잖아요.

왜 같이 웃을까요? 물질이 다른데 세포가 60조 개의 세포로 되어 있는데 물질이 다른데 왜 같이 웃느냐 말입니다. 그거는 그 코미디가 보여주는 코미디는 뭐로 구성되어 있어요? 언어로 구성되어 있지요. 그 언어는 어릴 때부터 지가 동산동에 살든 지묘동에 살던 상관없이 같이 사회적으로 통합해서 교육받은 게 있잖아요. 교육 받는다는 게 뭐예요? 그 사회적 정신을 공유, 보편적으로 받는 거잖아요.

만약에 사람이 그냥 물질로 되어 있다면, 벽돌로 되어 있다면 벽돌을 향하여 아무리 교육해 보세요. 벽돌이 코미디에 웃는가? 벽돌아 웃어줘. 안 웃습니다. 이것은 사람에게 물질만 있는 게 아니고 뭐도 있다? 정신이 있는 거예요.

만약에 정신이 나 개인의 정신이라면 서로 의사소통이 안 됩니다. 나는 지묘동에 살았기 때문에 당신하고 이야기 안 통해. 이래 되는데 지묘동에 살던 동산동에 살던 의사소통이 통한다는 말은 이것은 ‘나’라는 물질과 ‘너’라는 물질을 뛰어넘는 같이 인간이라면, 그걸 ()입니다. 인간이라면 같이 통하는 게 있죠.

그러면 내가 동산동에 있는 그 사람한테 가르쳤습니까? 아니지요. 그 사람이 날 가르쳤습니까? 아니지요. 그러면 전 세계 60억의 언어가 통하고 다 통하도록 하는 것은 영혼으로 하면 다 통하게 되어 있거든요. 사고방식이. 그건 누구에요? 그건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죠. 한번 적어 볼까요? 너도 아니고 그 다음에 나는 아니잖아요. 그 다음에 뭐도 아니에요? 물질도 아니죠.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면 그 바깥에 그걸 뭐라고 표현해야 됩니까? 그걸 한 자로? '신'이라고 표현하자 말이죠. 신을 봤나 따지지 말고 신을 봐서 신이라 하는 게 아니고, 뭔가 이게 물병이다. 물병이라 물병이지만 물병이라 한 게 아니고, 물질이라 할 때는 박카스다, 물병이다 되지만, 정신이라 할 때는 물질이 아닌 다른 요소를 할 때는 정신적인 언어를 가지고 그걸 표현하는 겁니다. 그걸 신이라 하자 말이죠.

신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다른 동네에 살아도 그 사람이 어려움에 처하면 도와주잖아요. 자, 도와준다는 마음은 이건 물질에 속한 거예요, 어디에 속합니까? 정신 쪽에 속하지요. 그런데 내가 나중 어려울 때 그 사람이 도와주더란 말이죠. 그 사람이 언제 봤다고. 그건 뭐냐? 정신에 속하지요.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건 정신에 속하기 때문에 계산이 없어요. 정신은.

다만 그러한 도와주는 걸 뭐라고 하느냐? 그걸 표현하기를 자비, 또는 사랑, 또는 동정함 이렇게 표현하자 이 말입니다. 그러면 그 사랑, 동정함이 그 사람만 동정하는 게 아니고 다른 사람도 날 도와주잖아요. 보편적일 때 그걸 아까 뭐라고 했다고요? 이걸 한 자로 뭐라고 했다고요? 신이잖아요. 결국 신이 정신 속에 인간에게 뭐 줬다? 우리에게 자비를 주고, 우리에게 동정을 주시고, 우리에게 사랑을 베풀게 한거란 말이죠. 그러니까 이미 우리 인간의 존재 속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무한이 들어 있잖아요. 신의 무한이 들어있다 이 말이죠.

그래서 그 무한의 속성이 자비고 사랑이라면 그 사랑을 품을 그 무한과 유한 사이에는 그만큼 폭이 있잖아요. 어떤 인간도 나는 신이다 이런 인간 없잖아요. 내가 너를 다 키웠다. 이런 거 아니잖아요. 니가 어릴 때 난 다 알고 있었고, 너 태어나기 전에 내가 태어나게 했다. 이런 인간 없다 이 말입니다. 미친 놈 아니면.

신이 알아서 다 태어나게 했다면 보편적 인간 되게 했다면 그렇다면 이 보편적인 정신의 입각해서 그 신이 우리에게 이미 존재할 때부터 집어넣어준 게 있다면 그냥 집어넣어 주고 말겠어요, 에이 잘 먹고 잘 살아라. 이렇게 했습니까? 아니면 뭔가 목적이 있겠습니까?

지금 신학자나 철학자가 뭐가 궁금하냐 하면, 왜 인간은 가만있질 못하고 아까 처음에 어떤 목표를 향하여 목적으로 나아가느냐 이 말이죠. 그거는 여기 교재에도 있지만 이거는 무한이 유한이 찾아온 이유는 무한이 무한 자체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우리를 잠시 이용한 거라 본 거예요.

아, 여러분 은혜롭지 않습니까? 로마서 11장 36절 말씀 안 같아요? 모든 것이 주로부터 와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감이라. 그런데 제가 강의 처음에 할 때 다 잊어버렸지요, 처음에 할 때 뭐라 했습니까? 그렇게 은혜롭고 복음적인 것 같은데 뭐가 안 빠진다? 절대로 뭐가 안 빠진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나는 더욱더 가치 있다 이 말이죠.

10분간 쉽시다. 너무 진도 나가는데.

우리교회(IP:220.♡.176.168)

07-06-06 16:20

woorich070224b-인간구원을 위한 신학구조(2)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비정신적인 것이 정신을 낳지를 못합니다. 반드시 정신은 물질이 아니고 물질 외에 따로 있어야 됩니다. 사람이 정신을, 사고, 생각을 한다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것을 부인한다 할지라도 생각은 부인하는 나는 내가 아니야. 생각이 없어. 그 생각도 생각이잖아요.

그러니까 이것은 내가 원해서 만들어낸 것이 아니고, 생각하게 된 것은 이것은 나 이전에 나를 나 되게 한 어떤 분에 의해서 생각이 먼저 주어졌기 때문에 그 생각에 따르다 보니까 아, 이것은 나고, 저거는 개고, 저거는 코끼리고, 구분이 되는 겁니다. 그것은 어디서 찾는가? 그것은 나도 아니고 너가 집어넣어 준 것도 아니니까. 너, 나와 물질을 그 외에 다른 또 있으면서 존재케 하는 것, 존재케 한 그 무엇, 이걸 신이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신은, 인간들 생각에 반드시 신은 뭐가 되느냐 하면, 존재케 한 그 무엇이 신이라면, 신은 반드시 무엇과 연관되어 있느냐 하면, 존재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신이 있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뭐가 '있다'라 할 때 어이, 있는 거, 너 누가 있게 했어? 반드시 물음이 성립되거든요.

어이, 너 있는데 니 왜 있는지 나 안 묻겠어. 이런 거 없다 말이죠. 너 출신이 어디야. 너 누가 너로 하여금 있게 만들었어. 이건 남이 안 묻더라도 본인이 묻게 되어 있어요. 그럴 때 나를 나 되게 하신 것은 이거는 신일 수밖에 없다. 왜? 너가 아니니까. 또 나도 아니니까.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라면 그렇게 너, 나를 따지게 했던 그 따질 수 있는 하나님이 따로 있지요.

그러면 이 신은 우리의 존재의 사유, '사유'란 생각이죠. 생각을 주니까 신이 뭐가 되냐 하면, 이게 신이 지성이 되죠. 지성을 가진 분이 되죠. 지성을 가진 분.

다시 그 논리 다시 설명하겠습니다. 신이 있지만 그냥 대자연이 신이야. 신은 없어. 그냥 대자연이 서로 섞이다 보니 신이야. 라고 할 경우에 뭐가 딱 걸리고 뭐가 설명이 안 되느냐 하면, 생각을 한다는 것이 내가 생각하고 싶은 게 아니고, 나는 생각해야 돼. 해서 열심히 했더니만 생각할 것 같으면 나는 그렇다 할지라도 남도 나같이 그렇게 된다는 말은, 이거는 각자각자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생각하시는 분이 먼저 계셔서 그 생각하시는 분이 자기의 성격 따라 그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지음 받은 피조물이 생각하는 창조자에 따라서 같이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고, 창조자의 지성에 따라서 같이 지성적인 인격체가 됐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하고 지성이 있다는 말은 우리를 만드신 그분도 지성이 있다는 말이 되잖아요. 지성이 있다는 말은 곧 뭐와 같으냐 하면, 그분은 바로 우리들과 같이 어떤 목표를 향하여 목적으로 나아가는 그러한 추세로 전 세계를 운영하고 있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맞다. 라는 것이 그쪽 주장이에요.

그렇게 신은 그냥 만들어놓고 아이고, 마음대로 살아라. 이런 게 아니라 애야. 예. 너도 뭐든지 니 마음대로 사나? 이렇게 하나? 아닙니다. 너는 어떻게 사는데? 저는 목표를 향하여 어떤 목적 없는 행동은 없습니다. 그렇지? 너만 그런 줄 아나? 누구도 그래요? 나, 너를 만든 신도, 나도 그렇다 말이죠. 그때부터 사람들은 뭘 생각합니까? 내 작은 사적인 목적과 거대한 신이 벌이시는 그 목적과 부합되느냐, 부합되지 않느냐 그걸 따져서 내가 벌 받겠는가, 축복 받겠는가 가름하겠지요. 그렇지요.

그 한 예가 여러 번 이야기했는데 다시 한번 해보면 그 예가 뭐냐 하면, 신의 뜻을 알아야 돼요. 신의 뜻을 알아차리면, 신의 뜻을 왜 알아야 되느냐 하면, 신의 뜻을 우리가 몰라도 신의 뜻은 그대로 뜻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의 뜻을 내가 안 알아도 신의 뜻대로 가져가요. 왜 구태여 알아야 되느냐 하면, 신의 뜻을 알아야 내가 행복해. 왜? 신의 뜻을 어긋나면 나는 거대한 신의 뜻에 장애물이 되기 때문에 불행을 자초하게 되죠.

신의 뜻이 뭐냐 하면, 신의 뜻을 어떻게 아느냐? 신의 뜻을 아는 방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잘 들어보세요. 신의 뜻은 신의 머리를 해부해서 아는 것이 아니고, 신이 남긴 모든 대자연의 변화가 신의 뜻입니다. 왜냐? 자연이라 하는 것은 신이 만들었기 때문에. 근데 대자연을 분석해 보면 신의 뜻이 분석 되겠지요. 그렇지요. 그럼 대자연은 어떻게 되어 있는가? 음양으로 되어 있어요. 반드시 대립되는 개념으로 짝을 이루게 되어 있습니다.

낮이 있으면 밤이 있고, 창세기 1장. 낮이매 밤이 되니 하루가 되죠. 한 날이 돼버리죠. 낮이 오면 밤이 있고. 그리고 아픔이 있으면, 행복이 있으면 비극이 불행이 높은 곳이면 낮은 곳이 있고. 여자가 있으면 남자가 있고. 모든 것이 음양의 조화로 되어 있습니다. 동양적으로 말하면 음양인데, 서양적으로 말하면 대립된 서양적으로 말하면 양을 사랑이라 하고 음을 미움이라 합니다. 그러니까 동양이나 서양이나 마찬가지죠. 모든 게 사랑과 미움으로 되어 있다는 거예요. 사랑과 미움으로.

이걸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사랑은 뭐로 하면 되겠습니까? 축복이고. 미움은 뭐가 되겠어요? 저주 되겠지요. 축복은 다른 말로 하면 이게 뭐가 되느냐? 선이 되고, 저주는 뭐가 됩니까? 축복은 선에 대한 보상이고, 저주는 악에 대한 보상이 되죠. 처벌이죠. 신의 뜻을 안다는 것은 결국은 뭐냐? 우리가 우리 내부에서 신의 뜻에 부합하면 누가 손해 봅니까? 내가 손해 보잖아요.

전에 여러 번 광주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여기서 이야기했고, 황금돼지날에 뭐가 중요하다? 소 띠, 닭 띠, 뱀 띠가 삼재가 임하니까 절에 가서 시주하라 이 말이죠. 이게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음양에서 나오는 거 아닙니까. 어데 니가 사사로운 인간이 건방지게 신의 뜻을 어겨? 바쳐라.

니가 신의 뜻을 이해하면, 어느 구조로 되어 있느냐 하면, 신의 뜻은 파동으로 되어 있어요. 양자역학 또 나와야 되는데. 신의 뜻은 파동으로 되어 있어요. 모든 주위의 일이 다 파동이란 말이죠. 이 변화가. 변화가 봄, 여름, 가을, 겨울 아닙니까. 이게 바알 종교 아니에요. 바알 종교. 죽었다가 소생하고 소생한 것도 사라지고 이것이 파동으로 되어 있는 거예요. 모든 것이.

늘 좋고 늘 슬픈 건 아니에요. 언젠가는 슬플 때가 있고 언젠가는 기쁠 때가 있고 슬플 때가 있다 이 말이죠. 지금 올라갈 타이밍이냐, 내려갈 타이밍이냐를 해야 돼요. 지금은 소 띠 하고 닭 띠하고 뱀 띠는 내려갈 타이밍이라니까. 따라서 신에게 잘 보여서 보상하면 그냥 거저먹기로 넘어갈 수 있는 거예요.

이건 뭐냐 하면, 결국은 신의 뜻에 부합되지 않으면 이 세상은, 이거는 젊은 사람은 모르는데 나이 조금만 들어보면 세상은 내 마음대로 안 되고 남이 이 세상이 밀치는 대로 밀릴 수밖에 없다는 걸 느껴요. 그렇다면 미는 그 타이밍, 이러한 커브를 알아서 그때 아파트 투기를 하든지 뭘 하든지 할 수 있는 겁니다.

그건 뭐냐 하면, 선과 악이죠. 신의 뜻이 내 안에 들어올 때 뭐가 된다? 선과 악이 되죠. 여기서 뭐가 되냐? 윤리가 생겨요. 윤리와 도덕이 생겨요. 도덕은 사회적이고 윤리는 개인적으로 보면 윤리와 도덕이 발생되는 겁니다.

바깥에 있는 신의 뜻은 음양적인 조화지만 내 안에 있는 신의 뜻은 뭡니까? 내가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는 거예요. 야, 이거 사도 바울과 똑같네.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는. 우리가 구원됨은 선한 일에 힘써 행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함이라. 이거는 유다서 1장 1절입니다. 똑같네, 똑같아. 그래서 만약 안 하면 벌 받고 저주받고.

그러니까 불교 스님들은 수녀들은 이 사도 바울 성경책 이걸 달달 외워요. 외우고 공부해요. 공부하는 학자들은. 중들은 보면서 이거는 뭐, 부처님 하는 이야기하고 똑같은 거예요. 예수가 온 것은 뭐냐 하면, 이 신의 뜻의 선한 쪽의 모델로 보여줘서 예수를 믿는 사람은 그 선 쪽을 따라감으로 말미암아 심지어 죽는다 할지라도 스데반 집사처럼 순교하는 일이 있더라도 신의 뜻에 복종함으로써 신의 뜻만 이루어지게 하는 신의 뜻만 드러내기 위함이라. 누가? 중들이. 그런 소리 하는 거예요, 중들이.

배설물을 버린다고요? 지금 뭐가 배설물인지 알고나 버리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알고 배설물, 버려야 될 거, 이런 거 다 버려야 돼요. 그런데 이거 버리면 한국교회 자체가 안 됩니다. 이거를 복음이라고 쥐고 있으니까. 아주 깊이 있게 은혜롭게 이런 미사여구를 쓰면서.

서양의 신학은 바로 이게, 다시 말하면 존재가 있다는 것은 신이 있고, 신은 존재를 거부하지 않고 신은 존재와 항상 결탁된 채 존재를 통해서만 신은 자기 뜻을 드러낸다. 그런데 결국 가만 보니까 뭐였더라? 개인적인 윤리였다 이 말이죠. 윤리 도덕이었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속에 선한 뜻을 많이 품게 되면 그러면 이 무한과 유한 사이, 그러니까 신과 인간 사이에 딱 붙어 있겠습니까, 멀찍이 떨어져 있겠습니까? 떨어져 있겠지요. 그죠? 떨어져 있을 것 아닙니까. 여기에는 뭐가 있겠어요?

아, 첫 번째 시간 다시 합시다. 의사소통이 안 되시는데. 첫 번째 강의 중요한 대목 다시 해봅시다. 이거 중요해요. 나 원과 나 투 사이에 나 원과 나 투가 떨어져있습니까, 안 떨어져 있습니까? 여러분, 답변해 보세요. 안 떨어져있습니다. 나 투는 어디서 발생된 거예요? 나 원에서 투입된 것이 만들어져서 나 투가 되지요. 온갖 것 집어넣어서 나 투가 되잖아요.

그렇다면 이러한 왜 그러느냐 물으면, 인간은 그냥 가만있는 인간이 없고 반드시 뭐가 있다? 목표를 두고 목적 지향적인 행동을 하게 되어 있잖아요. 그러니까 목표를 목적 지향적인 것이 있다는 것은 나만 그렇습니까, 남도 그렇습니까? 남도 그렇지요. 남도 그렇다는 말은 뭔 뜻입니까? 우리 인간을 인간되게 만들었던 누가 그렇다는 말입니까? 신이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신은 나 투가 필요 없으니까 신은 신밖에 없으니까 신은 투를 누구로 보느냐 하면, 인간으로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신은 목적과 목표가 있지요. 그것은 뭐냐? 인간을 거쳐서 신의 사람으로 다시 만드는 것, 이런 경로를 밟는다 말이죠. 이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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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668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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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