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여호와를 의지함 (역대하 13:13-22)
6. 여호와를 의지함 (역대하 13:13-22) 여로보암이 유다의 뒤를 둘러 복병하였으므로 그 앞에는 이스라엘 사람이 있고 그 뒤에는 복병이 있는지라 유다 사람이 돌이켜보고 자기 앞뒤의 적병을 인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제사장은 나팔을 부니라 유다 사람이 소리 지르매 유다 사람의 소리 지를 때에 하나님이 여로보암과 온 이스라엘을 아비야와 유다 앞에서 쳐서 패하게 하시니 이스라엘 자손이 유다 앞에서 도망하는지라 하나님이 그 손에 붙이신 고로 아비야와 그 백성이 크게 도륙하니 이스라엘의 택한 병정이 죽임을 입고 엎드러진 자가 오십만이었더라 그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항복하고 유다자손이 이기었으니 이는 저희가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음이라 아비야가 여로보암을 쫓아가서 그 성읍들을 빼앗았으니 곧 벧엘과 그 동네와 여사나와 그 동네와 에브론과 그 동네라 아비야 때에 여로보암이 다시 강성하지 못하고 여호와의 치심을 입어 죽었고 아비야는 점점 강성하며 아내 열넷을 취하여 아들 스물둘과 딸 열여섯을 낳았더라 아비야의 남은 사적과 그 행위와 그 말은 선지자 잇도의 주석책에 기록되니라 (역대하 13:13-22)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그 원리와 원칙이 있는데, 우리가 그 원리와 원칙을 모르고 그냥 하나님만 외친다고 되어질 일이 아닌 줄 압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 하시는지 이 시간 소상히 아는 시간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지난 시간에 남쪽나라와 북쪽나라가 싸운다고 제가 말씀을 드렸습니다. 누가 좋은 편입니까? 즉, 남쪽나라 유다는 여호와를 의지하는 나라고 북쪽나라 사람들은 자기의 힘을 의지했던 사람들입니다. 자... 이 두 나라가 이제 싸움을 벌입니다. 누가 이기겠습니까? 우리는 소위 교회 한번이라도 다닌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나라가 이긴다고 백이면 백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실지로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불신자와 부딪칠 때는 이상하게도 이 생각을 염두에 두지 아니하는 그런 희한한 현상들이 일어납니다. 분명히 우리가 성경을 볼 때는 여호와를 의지하면 이긴다라는 공식을 잘 알고있지만, 막상 세상에 나갔을 때는 여호와는 맥을 못 추더라. 역시 힘있는 사람, 돈 되는 사람이 낫더라는 그런 생각을 가진 많은 경험들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시험한다고 위험천만한 종교 아이디어를 실시하곤 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즉, 세상 사람 너희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지만, 나는 하나님을 의지해서 승리해 보리라 세상 사람들이 힘과 돈을 의지하지만 나는 그래도 신앙이 좋기 때문에 하나님 의지해서 한번 승리해 보리라 이렇게 다짐을 하고 세상과 맞닥뜨린 사람들, 백이면 백 아마 모두 떡이 되어 가지고 아주 엉망진창이 되었던 경우가 제가 보기에도 한, 두 명이 아닙니다. 마태복음에는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했는데 믿음으로 버티다가 아주 완전히 박살 나버린 사람 한, 두 명이 아닙니다. 제가 예를 들겠습니다. 목사님이 교회 건축을 하면서 여러분들은 믿음, 신앙의 싸움에서 승리해야 됩니다, 신앙의 선배들은 신앙을 위해서 목숨까지 바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어린아이를 통해서 바쳤더니만 5천명이나 먹고도 남은 게 있었는데 여러분들이 비록 작은 돈이라 할지라도 믿음으로 바치면 백 배, 천 배로 축복해줍니다. 이말 듣고 적금 해약해서 낸 사람 나중에 그 집안 엉망진창이 되어 오십 배, 백 배는 고사하고 빚더미에 올라 가지고 회사까지 날린 사람 한, 두 명이 아닙니다. 결국 하도 믿음이 없으니 나름대로 자기 신앙 기적을 경험해 본 것으로 나도 믿음 있음을 확정해 보려는 도박을 걸어본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 이것 챙겨주면 그때야 비록 하나님을 의지하겠다 라고 나온다면 그 사람은 악마의 꾀임에 빠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있어야 축복이고 승리라는 그런 공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짜 신앙이 좋은 사람은 없는 그 자체도 이미 승리이고 있고 없고 상관없이 이미 승리라는 이런 뜻의 승리를 이야기합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성도들이 마지막 때에 신앙의 승리를 했는데 그 승리한 대목에 그들은 믿음에 이기었으니 자기 목숨도 죽기까지 복종했다고 되어있습니다. 믿음으로 이기고 결과는 죽기까지 복종했다고 그랬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죽음직전에 갔다가 드디어 살아나야 승리로 알고 있는데 그냥 죽음에서 죽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그것을 승리로 보더라 이 말입니다. 아니 우리 보통 상식으로는 자기 죽어버리면 죽고 난 뒤에 하나님이 무슨 소용 있으며 축복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이것이 우리의 상식이잖아요.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오늘 본문의 싸움에서 12절에 보면 남쪽에 있는 왕이 북쪽에 있는 왕에게 "너희들은 하나님 여호와와 싸우지 말라 너희가 형통치 못할 것이라" 라고,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자, 이게 북쪽나라 사람한테는 말이 안 되는 것이 자기들의 지금 싸움은 남쪽나라 사람들 하고 싸우는 것이지 하나님하고 싸우는 것이 아니잖아요. 하나님은 너희들만 믿는 게 아니고 우리도 믿는다는 이 말입니다. 예를 들어, 교회에서 두 패로 갈라졌다고 합시다. 한쪽 편은 위층에서 예배드리고 또 다른 편은 아래층에서 예배드리고 그런 것 있잖아요. 위층, 아래층에서 예배드리면서 각자 하는 말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은 형통치 못한다"고 똑같은 소리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처음 온 사람은 어리둥절한 겁니다. 위층에 가도 너희가 사람을 대적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복음을 대적하니까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찬송하며 울부짖고 난리고, 아래층에 내려가니까 위층에 있는 사람들이 도리어 이렇게 하나님을 잘 믿는 우리를 공격하고 있으니깐 그들이 형통치 못할 것이다 라고 이야기 하니까 제3자가 들어볼 때 어느 말이 맞는지, 그러니까 둘 다 틀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 그걸 내포하고 있는 겁니다. 둘 다 틀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교회에서 어떤 집사님이 환경이 어려워서 죄를 지었습니다. 죄를 지으니깐 평소에 신앙이 철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그 집사님을 향하여 흉을 봅니다. 흉을 볼 때에 그 당한 집사님은 성경구절인 마태복음 7장을 찾죠. "남을 비판하지 말라 비판받는 그대로 너희가 비판받느니라 어떻게 네 눈 속에 들보를 깨닫지 못하고 남의 눈의 티를 보느냐" 라는 이런 성경구절을 뽑을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반대로 완전하게, 자기 나름대로 완벽하게 한다는 사람은 좀 실수하고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보고 뭐라 하겠습니까? "네가 받은 성령을 다 잊어버리고 이제는 육체로 돌아선다. 한번 타락한 뒤에 다시 회개치 못한다" 라는, 이런 본문 가지고 공박할 수 있다는 이 말입니다. 다 같은 성경구절인데 그걸 자기입장을 옹호하고 자기의 의를 변명하기 위해서 성경은 무차별적으로 이렇게 인용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전체를 봐야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 그런 현상이 일어나니까 이 본문을 한번 봅시다. 여로보암이 유다의 뒤를 둘러 복병을 하였음으로, 즉, 북쪽나라가 남쪽과 전쟁을 하는데 북쪽나라가 어떤 전략을 꾸미느냐 하면 매복작전을 벌렸습니다. 그런데 이 매복작전은 앞서 성경에 여러 군데 나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여호수아 8장에 나오는데 여호수아가 아이성을 칠 때에 매복작전을 해 가지고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어떻게 했느냐하면 상대방의 교만함을 이용하는데 거꾸로 상대방이 한껏 교만하여 그 교만의 도가 넘칠 때, 그 때 그 허점을 공격해서 함락시키는 작전이 매복작전입니다. 여호수아가 아이성 이라는 조그만 성을 칠 때에 매복을 해놓았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패하는 척 해 가지고 도망을 칩니다. 도망을 치니깐 아이성에 있는 사람들이 기가 살아 가지고 "야! 저놈들이 도망을 친다. 야! 승리는 우리 것이다"하면서 마음의 교만이 가득해 가지고 '이 판에 완전히 치자' 그러면서 쭉 따라나와 가지고 자기의 성과 마을을 모두 놓고 도망치는 적군들 치기에 바빴거든요. 따라나올 때에 매복된 다른 사람들이 그 본 성에다가 불을 질러 가지고 전쟁을 형편없이 끝내 버렸습니다. 이것이 매복작전인데, 두 번째 유명한 매복작전이 사사기 20장에 보면 나오는데 거기에는 베냐민 지파와 나머지 12지파가 연합해서 전쟁을 벌리는 겁니다. 그것도 역시 상대방의 교만을 이용하는 거예요. 세 번씩이나 연합군들이 베냐민 지파를 공격하는데 가자마자 왕창 깨어지고, 죽어 오더란 말이죠. 그러니깐 이 베냐민 지파가 얼마나 기가 살았겠습니까? 역시 하나님은 우리편이다 이렇게 자신만만했는데 또 세 번째 공격을 하지요. 역시 이번에도 매복작전을 했어요. 처음에 한 서른 여섯 명쯤 죽으니깐 그들이 기가 살아서 "야! 하나님 또 우리를 도와주신다 또 치자" 그럴 때에 그 틈을 이용해서 베냐민 지파 매복된 사람들이 그들의 강력한 집단에서 유인해서 그들을 고립시켜 놓고 쳐버리니깐 베냐민 지파는 거의 씨를 말리듯 다 죽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는 전쟁에서 상대방의 교만성을 한껏 이용해서 겸손하게 승리하는 방법, 이 방법이 여호와전쟁의 방법으로 등장했지요. 그러니까 사람들의 머리 속에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매복작전 쓰면 항상 우리가 이긴다 라는 의식이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있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재미있는 것은 그 매복작전을 누가 쓰느냐 하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남쪽나라가 쓰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북쪽나라 여로보암이 이 매복작전을 사용합니다. 이건 결국 뭐냐하면, 하나님이 전에 가르쳐주셨던 그 모든 비법을 비법만 챙기고 이제 더 이상 하나님 자체를 의지할 필요가 없다고 보는 거예요. 그러니깐 13절에 봅시다. "북쪽나라 여로보암이 남쪽 유다의 뒤를 둘러 복병하였으므로 그 앞에는 이스라엘 사람이 있고 뒤에도 복병이 있는지라" 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진퇴양난의 위기에 빠졌습니다. 남쪽나라 사람이. 매복작전에 걸려들었습니다. 그때 중요한 사실은 14절에 유다 사람이 돌이켜보고 자기 앞뒤의 적병을 인하여, 그 다음에 여호와께 부르짖고 라고 되어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눈감고 두 손 모으고 꿇어앉아서 기도하니까 또는 40일 연속으로 하니까 응답되더라 하는 식의 어떤 기도의 방법만 채용한다면 그것은 북쪽나라 사람들과 똑 같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현재 의뢰하지 않고 하나님이 전에 가르쳐줬다고 생각했던, 전에 응답 받았다는 그 방법론만 전수해 가지고 소유하는 거예요. 그 방법만 계속 되풀이 사용하면 어떤 난관도 해결되겠다고 보는 겁니다. 언약궤 가지고 요단강 건너니깐 홉니와 비느하스는 그 언약궤만 쥐면 무조건 승리하는 줄 알고 언약궤 쥐고 블레셋과 전쟁하다가 거기서 둘 다 죽었습니다. 악마의 시험, 곧 자기 욕망의 시험에 자신도 못 빠져 나와서 허우적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깐 하나님께 부르짖는다는 것은, 진실로 겸손하게 "나는 아무 것도 못합니다. 할 수 없습니다. 할 줄도 모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뭘 하겠습니까" 라는 하나님만 의지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소위 기도회로 모인다든지, 철야 기도를 정기적으로 한다는 것은 참으로 미신적으로 주술적입니다. 물론 악마가 도와주어서 어떤 실효가 일어났다고 한다면 그러한 미신의 골은 더욱더 깊어지기 마련입니다. 미신이란, 딴것이 아니라 내 행위로 말미암아 없는 일도 새로 추가해야만 한다는 마땅하다는 교만이 밑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세상의 주도권을 자기가 쥐고 있어야 당연하다는 교만 말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복 줄 거야 이런 얍삽한 머리 굴리기 이런 이중적인 태도는 사람은 속아 넘어 가지만 하나님은 안 속아 넘어 갑니다. 그야말로 "야! 세상 살아가는 것이 내가 해서 내가 살아갈 수 있는 그러한 위치에 놓여있지 않구나. 나는 내 힘으로 살 수 있는 그런 인생이 처음부터 아니구나. 나는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은혜주시고 복 주시지 아니하면 한 발자국도 내 힘으로 걸음도 걸을 수 없는 그런 자구나" 라는 것을 알고 쉬지 말고 부르짖는 것. 이걸 바로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기도는 어떻게 합니까? 40일을 할까요 꿇어앉아 할까요. 이렇게 기도방법의 문제가 아니고 속마음이 "아휴 나 같은 인간도 산다고 내가 무슨 힘으로 나를 살리지? 주식도 폭락했고 나는 이제 죽는 것 밖에 없다. 주여! 오늘밤에 어떻게 천당 안되겠습니까?" 이러한 낮은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그게 바로 부르짖는 겁니다. 이게 바로 진정한 기도예요. 그런 기도를 할 때는 어떻게 자기영광, 자기이름 뽐내는 식으로 기도를 할 수 있겠습니까? "아, 겸손히 기도하니까 하나님께서 무조건 내 편이 되어주는구나?"라는 교만한 마음이 과연 들겠습니까?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 보세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제일 처음 나오는 것이 뭡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옵시며..." 라는, 이런 말이 말로만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옵소서 천 번을 이야기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 하나님이 듣기에는 그 속마음을 보시거든요. 진짜 내 영광 취하지 않고 아버지 영광만 있으면 어떻게 살아도 저는 족합니다. 그런 솔직한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하나님께서 아십니다. 아니 귀를 지으신 자가 모르시겠습니까.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못하겠습니까. 다 아시는 거예요. 여기에 아주 놀라운 전략, 복병을 사용하는 이 아주 발달한 전략을 누가 쓰느냐 하면 재미있게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북쪽나라에서 사용한 게 아니겠습니까? 북쪽나라에서 사용했더니만 어리석게 남쪽에서 걸려든 것입니다. 걸려든 그 순간이 위기의 순간인 동시에 하나님께 제대로 복을 받을 수 있는 순간입니다. 부르짖었더니만 어떻게 되었습니까? 14절에 "부르짖고 제사장이 나팔을 불 때, 하나님이 여로보암과 온 이스라엘을 아비야와 유다 앞에서 쳐서 패하게 하시니..." 즉, 하나님께서 패하게 하셨습니다. 유다가 부르짖을 때 자기들의 용기가 백 배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패하게 하시고 적들을 도망케 하시고 하나님이 그 손에 붙이신 고로 그때 죽은 자가 80만 대군에서 무려 5/8인, 50만 대군이 모두 죽어버렸습니다. 그러면 누가 승리한 것입니까 하나님이 승리하신 거죠. 저와 여러분의 인생이 하나님의 승리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승리가 되신다는 말은 내 인생에서 내가 한 몫은 손톱만큼도 없다는 것을 인정 해줘야됩니다. 그것이 하나님 의지하는 것이고 믿음이고 이것이 기도입니다. 우리 기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탄식하시면서 기도하시는 그 기도 덕분에 살아났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한다면, 그 인생 전체가 거지처럼 살더라도 그건 축복된 삶이고 여호와전쟁에서 승리한 삶입니다. 고급전략, 멋 떨어진 전략, 옛날에 이렇게 써먹었더니 먹혀들어 가더라는 결과, 옛날에 차 타기 전에 딱2분 동안 기도하니까 순경도 봐 주더라. 그러니까 차 탈 때마다 기도를 2분하면 앞으로 딱지 안 떼일 거야. 이러한 방법론만을 채택해 가지고 그걸 신앙의 주특기로 삼아서 사용하면 무조건 목회성공, 교회성공이고 내 신앙생활 성공이다. 이게 바로 교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날마다 자기의 가진 것도 부인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목사가 되었으면 내 교인 몇 명되나 헤아리지 말고 날마다 교회는 없다 한 명도 없다 내 사람은 한 명도 없어도 된다는 그런 마음으로 자기를 비우고 부인할 때, 그 사람의 전부가 다 하나님의 종이 되고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옛날에 써먹었던 매복작전, 정말 훌륭한 작전, 거기에 꼼짝달싹 없이 말려든 유다 나라, 그러나 승리의 비결은 매복작전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내 힘으로 승리하지 못하고 오직 주님의 손에 달렸습니다" 라고 고백하며 주님 앞에 부르짖은 이것이 승리의 비결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방금 이것이 승리의 비결이라고 하니까 어떤 사람은 그럼 부르짖으면 되겠네요 주여 3창하고 부르짖으면 됩니까? 백날 부르짖어 보세요 목만 아프지. 이 시간 마치면서,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것을 다시 한번 되새겨보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우리가 과거에만 되새기지 말고, 지난날에 한번 되새기지 말고, 매일같이 되새기면서 우리의 모든 인생이 오직 우리의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승리로 나타나는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