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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070105b 울산강의-창세기 4장(2) 녹취자유게시판창세기

20070105b 울산강의-창세기 4장(2) 녹취

이름 : 한윤범(IP:61.73.49.89)

20070105b 울산강의-창세기 4장(2)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을 시작하겠습니다.

첫 번째 시간에서 이야기한 것은 사람이 사는 목적을 내가 목적이 무엇입니까? 라고 말할 수 없는 입장에 우리가 이미 놓여 있습니다. 목적이 우선이고 그 다음에 내가 그 후에 목적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 따로 내가 내 사는 목적이 뭡니까? 그렇게 말할 필요조차 없는 입장에 놓여 있어요. 그것은 내가 여기 있다는 자체가 신기하거든요. 참, 신기하기 짝이 없는 거예요.

그러한 이러한 오늘날 이 모습을 그걸 오늘날에서 찾지 말고 창세기 3장, 4장에 있는 옛날 아담, 우리 조상 그 위치, 그 배치를 그대로 한테 가보면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그런 입장에 놓여 있다 이 말이죠. 그들에게 주어진 모든 삶이라 하는 것은 자기가 결정한 삶이 아니고, 하나님이 배치해 놓은 삶에 그냥 하나의 가구처럼 여러 가지 배치 가운데 하나의 배치로서 가운데 놓여 있는 겁니다.

아담과 하와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이미 에덴동산 한 가운데 따먹지 말라는 선악과와 생명나무가 함께 존재했고, 그리고 뱀하고 집에서 키운 게 아니고, 뱀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서 활동하게 된 거예요. 그리고 아담과 하와가 입었던 가죽옷도 무화과나무는 안 질겨서 못하겠다. 질긴 것 해 달라 해서 부탁한 것도 아니고, 그냥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가죽옷을 입힌 겁니다.

이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새삼스럽게 내 목적이 뭐냐? 라고 물을 필요 없을 정도로 우리는 전체가 하나님의 뜻과 계시에 푹 풍성하게 파묻혀 있는 그런 입장에서 현실에서 우리는 지금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다만 그것이 어떻게 어떤 분류가 일어날지 거기에 대해선 창세기 4장을 통해서 하나님은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뭔가 같은 인간이면서도 전혀 다른 운명으로 갈 수밖에 없도록 조치하신 겁니다.

그건 창세기 4장에서 하나님께서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나, 죄. 죄가 무엇이냐? 죄가 무엇이냐를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거부하신 것이 죄다. 라는 말도 성립이 되게 하시는 거예요. 참, 어렵다. 우리가 보통 죄라 하는 건 내가 혼자 스스로 죄라고 할 때는 죄를 느끼잖아요. 그걸 죄책감, 양심의 가책하잖아요. 하나님은 그걸 죄라 하지 않고 죄라 하는 것은 하나님하고 내가 있을 때 죄가 성립돼요.

내가 아무리 정성 드려 바쳐도 하나님이 거부하면 그건 죄인 줄 알아야 돼요. 하나님이 안 받으면 죄인 줄 알아야 돼요. 왜 우리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이 몽땅 죄냐? 그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만 받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안 받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가 되는 거예요. 아담의 창세기 4장에 의해서.

만약에 상상인데요. 아벨이 하나님의 믿음으로 하지 않고,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지시를 받지 않고, 아벨이 자체에서 양을 잡아서 드렸으면 하나님께서 받으시겠습니까? 안 받지요. 왜?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 빠져 있잖아요. 보이지 않는 증거가 없잖아요. 이거는 그렇게 바치면 누구 증거냐? 보이는 나를 증거해서 바치는 거잖아요. 가인은 믿음이 없는 상태기 때문에 보이는 내가 보이는 정성을 거기다 보태서 그래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다가서려고 애쓴 겁니다.

그런데 이 행동이 나쁘다는 게 아니고, 그 행동이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보이지 못한다는 점에서 죄가 된다 이 말입니다. 무척 복잡하고 어렵지요. 이게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항상 우리가 버릇이 내 위주로 내 행동 따라서 죄와 의가 결정된다고 이런 버릇대로 쭉 푹 빠져 있기 때문에 이 버릇에 의해서 성경해석하면 성경해석 자체가 되질 않아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하나님이 안 받으신 것은 죄인 줄 아시고, 하나님이 받으신 것은 우리가 죄라고 우겨도 그건 의가 되는 겁니다. 그게 중요한 거예요. 살인강도는 지옥 간다. 알아요. 맞습니다. 지옥 갈만 하죠. 주께서 오늘밤에 낙원에 있겠다는데 왜 말이 많아. 간음한 여인, 지옥 가야지요. 돌에 맞아 죽어야지요. 주께서 용서하시겠다는데 왜 바리새인들이 돌 들고 그런 짓을 하고 있느냐 말이에요. 죄 없는 자가 돌 치라 하니까 다 도망갔잖아요.

중풍병자가 열심내서 살린 게 아니에요. 중풍병자를 낫게 하신 것은 죄를 사해 주시는 예수님이 걷게 하시니까 중풍병자가 나은 것이지, 지붕 뚫었다고 나은 게 아닙니다. 지붕 뚫어서 나을 것 같으면 그 집에 정문으로 나오고 뚫어서 위로 쳐들어오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병 고치는 권세 정도가 아니고,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사람들이 예상 못한 중풍병자 그냥 낫게 걸어간 겁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왜 그렇게 ( ) 걸어서 가느냐? 그때 예수님께서 초점을 바꾸지요. 일어서 걸어가는 것보다 죄를 사하는 게 어느 게 더 강한 권세냐? 하고 주님 원하는 쪽으로 바꿔버려요. 바리새인들은 병 고치는 용서하되 예수님이. 죄를 사하는 것은 용서 못하겠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죄를 사하는 것은 하나님 소관이지, 니가 인간인데. 병만 고쳐라 이 말이죠. 의사 병 고치는 데 누가 뭐라 합니까? 그런데 의사 죄 용서한다면 그 의사는 지가 메시아지 의지이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병 고치면서 거기에 숨어있는 원래의 목적, 죄 용서를 하시면서 더불어 죄가 무엇이냐를 이야기해요. 죄라는 것은 예수님이 고치지 않는 것은 다 죄에요. 내가 고침 받겠다하는 것도 죄가 되지요. 아무리 고침 받겠다 해도 주께서 안 고쳐준다 해도 계속 죄 용서 받아야겠다고 우기는 것도 죄가 되는 거예요.

사렙다 동네에 과부가 그래 많아도 용서받은 것은 사렙다 과부 한 사람 밖에 없어요. 이게 누가복음 4장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그 많은 과부 가운데 한 사람만 용서받은 것처럼 그리고 소경이 그렇게 많아도 돌아온 사람은 한 사람 밖에 없는 것처럼, 그게 문둥병이죠. 문둥병 한 사람 밖에 없는 것처럼, 주께서 주의 용서하심에 따라서 주께서 주시는 배치에 따라서 의가 되고 죄가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창세기 4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 하시고자 하는 취지는 뭐냐?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이 지상에서는 주님께서 죄라고 규정짓는가, 아니면 의라고 받아들이는가? 거기에 준해서 정체가 드러나는 거예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자기 정체를 드러내는 겁니다. 죄라면 마땅히 뭐가 주어집니까? 심판과 저주가 주어지고, 의라면 마땅히 뭐가 주어집니까? 축복과 영생이 주어지겠지요. 그죠?

그렇다면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누구냐가 아니라 누가 여자의 후손이고 뱀의 후손이고 어느 편이 아니라 그 결정은 뭐냐 하면, 주님께서 용서하시면 그것이 주께서 제사를 받아주면 믿음을 받아주면 그게 여자의 후손 편이고, 안 받아주면 그건 뱀의 후손 편이 되겠지요. 이 말은 곧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더 중요한 것은 지금 앞으로의 모든 인류의 역사 속에 여호와 하나님이 친히 반드시 개입하신다는 뜻이에요. 아, 이거는 중요한 이야기에요.

창세기 4장 끝에 한번 봅시다. 4장 23절. 23절인가 24절인가? 25절이구나. 26절,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무엇의 이름을 불렀더라?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이 여호와 하나님은 그냥 하늘에서 팔짱 끼고 계시는 분이 아니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인간세계에 침투하셔서 지속적으로 쉬지 않고 열심내면서 계속해서 작업에 나서는 분이죠. 무슨 작업입니까? 의 와 죄,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구원될 자와 저주할 자를 계속해서 그 빌미와 그 근거를 계속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이죠.

그게 창세기 6장에 보면, 드디어 노아 홍수가 일어나잖아요. 노아홍수가 이렇게 지상에 저주가 일어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개입하신다는 뜻이고, 개입할 때 그 원칙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선택한 사람만 건져주시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버리기로 선택했다.

선택했는데 한 사람은 버리기로 선택하고, 한 사람은 구원하기로 선택하는 그 작업을 지속적으로 하시죠. 그 작업을 하시는 분은 하나님 쪽에서 나오신 어떤 분, 여호와라는 분, 하나님 이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연결고리를 이루시는 그 하나님에 의해서 그 작업을 계시가 되는 겁니다. 그런 작업의 계시를 위해서 인간세계는 존재해야만 해야 돼요.

이렇게 되면 뭐가 풀리느냐 하면, 하나님 동생을 죽인 가인은 왜 안 죽습니까? 하는 해법이 나오지요. 가인은 죽어야 돼요, 안 죽어야 됩니까? 죽지 않아야 돼요. 생생하게 살아있어야 돼요. 왜?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저주와 죄가 뭐냐를 널리 전파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저주가 무엇이며 죄가 무엇이며. 왜 전파하느냐?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이런 성질을 갖고 계신다고 널리 전파해야 돼요.

나의 제사를 안 받으신 하나님께서 이런 분이라는 것을 진짜 나의 제사를 안 받는 분이 진짜 하나님이라는 것을 널리널리 전파해야 됩니다. 그리고 아벨은 죽음으로서 죽고, 그리고 그 아벨의 후손 셋이 등장함으로써 말미암아 여호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이런 식으로만 계속 진행된다는 것을 보여주지요.

그렇다면 아벨과 가인이 만나면 그것은 뭐냐? 십자가에서 바리새인과 예수님의 만남의 맛보기라, 맛배기라 보면 돼요. 가인은 바리새인이고 십자가에 못 박아라 해서 그 당시의 민중들이고, 대중들이었고, 거기에 십자가 맥없이 그 세력에 넘어졌고 그냥 저항도 못 해보고 그냥 맞아 죽는 약하신 아벨의 역할은 누가 하느냐? 예수님이 해야 됩니다.

아벨과 예수님의 공통점을 마태복음에서는 뭐라고? 한 자로 이야기했지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한 자로 뭡니까? 피죠, 피. 피로써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게 언약의 피죠. 그래서 성경에서 언약의 피라 하는 것은 피 한 방울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그 피 하기 전에 양대 진영이 다 나오는 거예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피를 이야기할 때만 그게 노출돼요. 딴 거 이야기하면 노출 안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 율법, 교회, 천국 이야기하면 다 감춰져요. 성화, 거룩 다 감춰져요. 그런데 피라는 거만 딱 튀어나오면 에이, 하고 고개 돌리는 쪽과 저 피만이 우리를 구원할 거다. 피의 능력으로 구원받는다 한다면 그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유월절 날 뭐로 결정됩니까? 피잖아요. 유월절 피 아닙니까? 유월절 피 보고 넘어가잖아요. 그리고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에요. 맨 유월절을 그대로 적용시키겠다는 겁니다.

피 아니고 다른 걸 집어넣으면 마귀가 흉내를 다 내버려요. 그래서 복음을 아는 설교자가 피를 증거해야 됩니다. 그래야 가짜 교인들에게 대우를 다 하신 게 돼요. 가짜야, 맞지? 이렇게 이야기를 해 줄 수 있어야 돼요. 그런 혜택이 있죠. 그냥 그 피 말고 딴 걸 얼추 전해버리면 자기가 가짜이면서도 가짜 아닌 걸로 오해할 소지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죠. 예의가 아닙니다. 왜 가짜 이면서도 앉아 있습니까? 유다야, 니 할 일 해야지. 이렇게 할 때는, 알겠습니다. 하고 나가서 핍박을 해야지요. 그래서 피만을 증거해야 돼요.

제가 하나의 설교자로서 설교를 하고 이렇게 쭉 지금까지 돌아보면, 내가 할 일이 뭐냐? 내가 할 일이 없는 게 아니에요. 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할 일이 있다는 그 자체가 내가 존재의 기쁨이 돼요. 내 할 일이 삶의 일이 있다는 게. 사실 목사는 주일날 설교하는데 그 다음부터 육일 동안 할 일이 없어요. 그때는 미치는 겁니다. 너무 놀면 주의 종 아닌 것 같아. 미안스러워서 못 놀아요.

그런데 사실은 할 일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노느냐 안 노느냐가 아니라 항상 피를 생각하면 그것 자체가 주의 일에 충실히 하는 겁니다. 주의 피를 생각하면. 이건 목사뿐만 아니고 교인들도 마찬가지에요. 장사하는 사람이 열심히 장사한다고 주의 일 하는 것 아닙니다. 그건 칼빈이 잘못 생각한 거예요.

뭐, 소명해서 판사는 판사의 소명 받았다. 아닙니다. 판사 소명 없습니다. 공장 소명 없고, 사업 소명 없고, 농사꾼 소명 없어요. 성도의 소명, 하나 밖에 없습니다. 항상 피를 생각하는 것. 피를 잊지 않는 거기서 피를 잊지 않으면 거기서 전도가 튀어나오게 되어 있지, 시아버지한테 용돈 준다고 효도가 아니라 피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피를 한 사발 이야기하는. 그것보다 효도가 없습니다. 드시옵소서. 뭔데? 십자가 핍니다. 안 그러면 저리 비켜!

바로 아벨과 사가랴의 피가 나에게 적용된다고 했어요. 선지가 사가랴, 그 대목 억울하기 짝이 없습니다. 제가 지난 주일오후 설교에 그런 이야기했어요. 사람이 억울한 게 있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가 왜 있는지 모를 때만 억울함을 느껴요. 예수님이 계신데도 불구하고 억울함을 느낀다는 것은 뭔가 되게 수상하다고 내 이야기했습니다.

사람이 그럴 때 어떻게 해야 되느냐? 제가 오후 때 설교 잘못했다고 그런 생각 안 드는데 자칫 그런 생각 들 수도 있죠. 여러분, 시험을 해보자고 했어요. 헌금 땡전 한 푼 안 내는 겁니다. 왜 내가 그런 소리를 했느냐 하면 설교시간에, 사람이 헌금 했는데도 불구하고 기대했던 축복이 안 올 때는 되게 하나님한테 억울한 느낌이 들잖아요. 차라리 뭐냐, 땡전 한 푼 안 주는 거예요. 교회에 돈 십 원도 안 하는 거예요. 그러면 안 억울할 것 아닙니까? 그 정도로 억울할 필요가 없는 건데, 우리는 가만 보면 되게 평소에 억울해 합니다.

하나님이여, 제가 이렇게 충성을 다하는데 왜 내 뜻대로 안 됩니까? 그래서 제가 지난 아침에 그런 이야기했어요. 올해에는 제발 기도를 할 때에 올 한 해는 제발 소망대로 되지 않게 하옵소서. 올 새해가 밝았습니다. 소망대로 안 되게 하옵소서. 뭐, 주의 뜻대로 소망대로 안 되게 해주실 줄 믿습니다.

절대로 여러분 소망대로 되면 큰일 납니다. 왜? 그걸로 만족할 우리가 아니기 때문에. 그걸로 감사할 우리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데 예상 밖의 일로 주어지면 우리는 작은 것에도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외칠 사람이에요. 우리들. 기대치 않는 주께서 친히 인도하실 것을 여러분, 경험하는 한 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 창세기 4장에서 아벨의 피와 사가랴의 피가 예수님의 피와 연결됩니다. 그러면 창세기 4장과 요한계시록까지 성경해석 끝났습니다. 피만 나오면 돼요. 피만 나오는 해석, 설교하면 어떤 설교도 그거는 나쁜 설교도 아니고 잘못된 설교가 아닙니다. 피만 나오는 설교는.

피만 나오는 설교 되려면, 본인이 피 나오는 것을 고마워해야 돼요. 억울해 하지 않아야 돼요. 목사 설교 자체가. 이 설교하고 사모님이 오늘부로 나가라 해도 거기에 대해서 원통하거나 분하거나 화를 내거나 억울해 하지 말아야 돼요. 아, 이게 피의 대가구나. 이러고 그냥 그걸 당하면 당해야 됩니다.

피를 피 흘림을 고마워하면서 설교해야지, 지는 하나도 안 고마워하면서 피 전하면 진짜 설교자가 돼서 피 하면 마귀가 눈치 챕니다. 야, 니부터 한번 피 좀 볼래. 본인이 그걸 기뻐하면서 스데반 집사처럼 피를 감사하면서 해야 돼요.

어쨌든 간에 죄가 무엇인가 나옵니다. 죄가 어디서 나오는가? 가인은 자기가 가인에게서 죄가 나오죠. 사실은 죄가 가인을 지배하는 건데.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아벨은 죄인 아닙니까? 아벨도 죄인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죄인이라는 말은 죄가 지배하는 영역 속에 속해 있다는 뜻이죠. 아벨도 죄가 지배합니다. 그래서 아벨도 믿음으로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받는 제사를 드릴 수가 없어요. 그냥 양 잡고 기름 분리했다고 받는 게 아닙니다. 아벨이 믿음으로 드려야 돼요.

그러나 믿음이라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분의 능력이기 때문에 그 아벨이 이길 수 없는 것을 주께서 이기신 거예요. 그래서 구원받는 겁니다. 우리가. 현재 우리가 믿음이 우리 열심으로 생긴 믿음이 아닙니다. 내가 만든 생산된 믿음이 아니고, 주께서 우리가 이길 수 없는 죄마저 이겨서 얻은 결과물로 우리에게 믿음이라는 게 있어요. 기적을 받은 거예요.

피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 상식으로 믿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 피가 이천 년 전 피가 무슨 내 죄를 씻어요. 그럼 좋다. 실컷 간음하고 도적질하고 피 믿습니다. 하면 구원받겠네. 구원받습니다. 그걸 어떻게 믿어요. 못 믿잖아요. 믿어질 때 믿어진다는 것은 우리 능력이 아니고, 외부에서 능력이 왔다는 겁니다, 이거는.

그리고 동시에 나는 어떤 다른 배치에 속하는 거예요. 십자가 안이라는 그 배치에 속했다는 증거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의 피의 증인, 복음의 증인 되는 겁니다. 성령이 임하면 우리가 예수의 증인 되는 거예요.

아벨이, 그러니까 이걸 제가 그림을 이렇게 그렸어요. 가인 같은 경우에 죄라는 동그라미 속에 하나만 가인이 그냥 들어있지만 아벨한테는 동그라미가 두 개에요. 죄 속에 있는 그것을 여기에 또 하나의 바깥에 울타리가 또 동그라미가 있지요. 그게 뭐냐? 주님의 용서가 있습니다. 피의 용서가 있으면 죄에서 나오는 것을 용서다. 죄가 있는 곳에 뭐가 넘친다? 은혜가 넘친다는 식으로 죄가 있는 곳에 주님의 용서가 넘치지요.

우리가 육신에 속한 이상은 우리는 어디에 속하는가? 율법의 적, 맞습니다. 우리는 율법에 죽은 자입니다. 하지만 바깥에 있는 더 큰 원이 주님의 의에 의해서 우리 죽은 자가 날마다 살림을 당하지요. 그런데 이 불신자들은 율법이 있어요. 양심도 있고, 이방인은 양심이 있고, 유대인들은 율법이. 율법에 이거 밖에 없는 거예요. 무슨 짓을 해도 이거는 온전하게 다 이룰 수 없습니다. 율법은 그냥 가만히 있는 율법이 아니고, 저주를 내뱉는 율법이에요. 못하면 저주하는 거예요. 계속해서.

탐내지 말라하는 순간부터 탐내면 저주받게 되어 있어요. 저주가 아까 무슨 형태라고요? 알 수 없는 욕심이 자꾸 생기는, 욕심이. 우리도 마찬가지죠. 매일 같이 욕심내죠. 욕심 없다는 것은 거짓말 아닙니까?

제가 지난주 주일 아침에 그런 설교했어요. 우리 교인들 아주 좋아하던데. 정직하게 살자! 에라이, 정직을, 누가 정직한데. 정직한 사람이 누가 있는데. 교인들이 입가에 만면에 기쁨이 충만해. 이제부터 예수 믿고 정직하게 살겠습니다. 그런 구라가 구라. 세상에 그런 거짓말이 어디 있어요. 그것 자체가 내가 거짓말이에요.

다만 우리가 놓여있는 배치가 우리가 거짓말할 수 없는 거짓말 하며 살아갈 수 없는 그런 배치인 동시에 그 거짓말도 용서받는 배치 속에 들어가 있는 겁니다. 죄가 넘치는 곳에 은혜가 넘치는 거예요. 율법에 맨 날 죽어야 되지만 맨 날 율법에 죽은 우리를 맨 날 살려내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이 맨 날 살리는 거예요. 그래서 우린 날마다 죽고 날마다 사는 거예요. 죽음은 우리 안에 역사하고 예수님의 생명은 우리 안에 또 역사하고.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이상한 미친놈은 아예 우리가 율법에 죽었다하는 이걸 없는 걸로 여겨요. 그러니까 뭐냐? 우리에게 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죄를 이기는 거지요. 한번 적을게요. 성도한테는 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죄를 이기지요. 누가? 예수님이 죄를 이기지요. 이거 밑줄 쫘~악. 별표. 적어 놓으세요. 우리에게 죄가 없어지는 게 아니고, 이김으로써 구원받는 거예요. 누가 이겨요? 우리가 못 이기는 걸, 주님이 이김으로써 구원받는 겁니다.

아벨이 평생 가면서 죄 많이 지었어요. 아벨도. 세상에 아벨이 돌에 맞는 것이 자기 의가 아닙니다. 뒤에서 때려 찍어버리는데 거 뭐, 의가 있어요. 주여, 순교합니다. 자, 카메라. 이래서 죽는 거 아니지요. 자기 죽고 싶은 사람 누가 있습니까? 뒤에서 쳐버리는데 짱돌로 때려버리는데 지가 안 죽고 됩니까?

죽은 것이 착한 일입니까, 아닙니까? 아니지요. 죽은 게 착한 일. 착한 일을 하신 분은 예수님이지, 자기가 착한 일 한 게 아니지요. 다만 아벨은 착한 일에 지배를 받게 되었지요. 주님이 하신 선한 일에 지배받은 거예요.

그러면 죄는 무엇이냐? 가인은 안색이 변했습니다. 따라서 역사 속에서는 이것이 방금 이렇게 제가 구분한 것처럼 구분되지 않아요. 왜냐하면 본문에 보세요. 본문에 보면 구분되지 않습니다. 농사졌기 때문에 농사 진 것을 바쳤고 양치는 사람이기 때문에 양 바쳤는데 그것 가지고 어느 제물이 좋다, 나쁘다를 역사 속에서는 인간의 힘으로 인간의 지혜로서 판단력으로선 그게 결정지어지질 못합니다.

이 말은 뭐냐? 결국 농사져서 농사 바쳤고, 양 해서 양 바쳤는데 그게 뭐가 나쁘냐? 라고 구분이 안 되는 그런 와중이 우리 역사 시절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분류해내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 말은 뭐냐? 우리가 분류하는 분류를 안 받는다는 거예요. 주께서 분류하면 분류한 대로 살아갈 뿐이지요.

사울 왕이 회개했습니까, 회개 안 했습니까? 회개했습니다. 가룟 유다가 회개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회개 했어요. 사울이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이 사울 왕의 회개를 받았습니까, 안 받았습니까? 택도 없습니다. 안 받았습니다. 다윗은 어떻게 했습니까? 회개하니까 덜렁 받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와, 내 마음대로다, 왜. 그거는 하나님, 오야 마음대로지, 뭐. 하나의 배치인데.

만약에 다윗이 자기 힘으로 회개했으면 역시 안 받습니다. 다윗은 알아요. 내가 회개하는 이 근사한 마음을 결코 하나님이 받는 게 아니고, 주께서 받는 것은 상한 심령이라고요. 회개 알 줄 안다는 이 대견한 마음을 받는 게 아니에요. 그냥 상한 심령일 뿐입니다.

주께서 씻어주는 것은 자기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서 오는 사랑, 씻어주는 우슬초의 피가 자기를 용서하는 거예요. 그럴 때 다윗은 하나의 배치의 사람, 주의 피의 증인으로써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입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 시대가 따로 있어요. 주께서 주신 배치가 많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맨 날 거짓말하고 열배에 맞추어서도 죄 덩어리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기대하지 않는 피의 용서가 늘 생각되고 그것이 날 구원한다는 것을 증거하고 싶지 않아도 증거 된다는 사실이 이것이 우리 능력이 아닙니다. 주께서 우릴 사용하시는 증거로 받아주시길 바랍니다.

이건 우리가 예배당 크게 세우고 헌금 많이 하고 남북이 종교적인 큰 일한다고 해서 그걸 실적이라고 하지 마세요. 진짜 실적은 뭐냐? 우리도 예상 못한 일을 주께서 사용한다는 것을 그걸 느낄 때 그것보다 더 큰 실적은 없습니다. 왜? 그때 비로소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과 형제애가 나오기 때문에.

이건 내가 한 게 아니다. 내가 한 게 아닌데 나의 경험 가지고 아이고, 성화되었구나. 그러고 왜 자꾸 이 따위 소리하지 마라. 나, 성화 그런 거 난 모른다. 내가 한 게 아니고 주께서 하게 하셨단 말이죠. 누구든지 봉사하려거든 주께서 주신 힘으로 하고, 누가 말씀 전하는 것도 주께서 하게 하셔서 했다. 이거보다 더 큰 실적이 없어요, 이거는. 주께서 거기다 집어넣은 거예요. 그냥.

다시 한번 정리하면, 이런 아벨의 운명과 가인의 운명에 대해서는 일체 부모가 개입을 못한다는 거예요. 그냥 부모는 허탈하게 있을 뿐이죠. 그 다음에 아벨 죽고 난 뒤에 아벨 대신 셋을 낳거든요. 셋을 누가 낳습니까? 여기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다른 씨를 주셨지요. 분명히 주신 것으로 되어 있지요.

그러면 아담이 보기에 자기가 셋을 낳은 것도 이것은 누구의 능력이다? 자기 능력이 아니다 말이죠. 그러나 남들 보기에는 이거는 분명히 누가 낳았다? 아담과 하와가 낳은 거죠. 그러니까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일과 인간의 일을 분류를 못해요. 우리의 판단과 지식으로 분류가 안 됩니다, 그거는. 뭐, 근사하다고 주의 일이고 안 근사한 건 주의 일이 아니고. 아니에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죄라고 우기는 것도 의로 바꾸십니다. 우리가 의라고 우기는 것도 죄로 바꾸시고. 문제는 뭐냐? 의냐, 죄냐가 아니라 누가 하셨느냐를 고백하느냐가 중요해요. 누가 하셨느냐? 누가 지금 내 속에서 일하시느냐가 중요합니다.

그걸 내 놔라. 그러면 당신을 주의 종으로 주의 증인으로 간주하겠다. 주께서 당신에게 어떻게 뭘 했느냐를 내 놔라 말이죠. 우리가 뭘 한다, 방종한다, 이걸 내 놓지 말고 주께서 뭘 했냐? 그걸 내 놔 봐라. 아무리 이야기해도 개혁주의 주장하는 사람은 못 내놓습니다. 왜냐하면 개혁주의신학 자체가 주의 신학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의 신학이기 때문에. 옛날에 그것도 구닥다리 옛날 지나간 신학이기 때문에.

손가락 아파 죽겠다. 갑자기.

창세기 가인이 비록 아벨을 죽이고 자기의 죄가 지배를 당해서 자기가 힘으로 아니죠. 죄의 힘으로 동생을 죽이게 됩니다. 땅에서 뭘 받았습니까? 동생의 피를 받았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찾아왔습니다. 찾아와서 할 때 가인과 하나님과의 대화 속에서 뭐가 들어 있느냐하면, 이게 나중에 이스마엘 보호하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하나님께서 가인을 버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만약에 우리가 아벨의 입장 같으면 저 말 같은 놈, 버렸으면 좋겠는데 하나님은 다 쓸모가 있어서 가인의 후손을 번창케 해요.

창세기에 보면 이스마엘을 축복합니다. 이삭을 축복하지만 이스마엘을 축복합니다. 축복해서 이스마엘을 확장을 시킵니다. 팽창을 시킵니다. 이건 마치 창세기 1장 같아. 창세기 1장에 뭡니까? 하루가 되고, 둘째 날 되고, 셋째 날 되고 해놓고 복을 주니까 뭡니까? 바다 속에 있는 물고기는 번창하고, 땅에서는 뭐가 번창하고? 짐승들이 번창하고, 식물들이 번창하잖아요. 복을 주니까. 번창하고 번창하잖아요. 이게 복이거든요.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이 가인의 후손을 번창하기 위해서 이스마엘을 번창시켜요. 창세기 한번 볼까요? 이스마엘 대목. 창세기 21장 17절 보면, 방성대곡하지요, 그 하갈이. 저는 하갈 가지고 연속극, 드라마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얼마나 하갈이 억울한지. 아니, 사라가 자기 애 없고, 둘째, 세컨드인 둘째 하갈이 아기 생겼다고 해서 큰 어머니가 둘째를 얼마나 핍박을 학대하던지, 그 학대를 못 이겨서 결국은 그 사랑하는 남편도 자기 아내, 본부인 말 들어서 어떻게 돼요? 졸지에 추방당하잖아요. 그 애하고 엄마하고 어떻게 살라고. 그러니까 방성대곡 할만 하잖아요. 분통 터지고 억울하잖아요. 한 맺힌 여인 될 것이 뻔하지요.

이게 성경이 아니고 이 대목을 그대로 따서 어떤 소설책 같은데 넣으면 누가 나쁜 여자에요? 사라가 나쁜 여자지요. 하나님께서 애를 안 얻게 했는데 애 없다고 해서 애 있는 여자를 질투해서 그렇게 핍박하고. 그건 마치 사무엘 엄마, 한나하고 비슷하게 그렇게 돼버렸지요. 마찬가지죠. 이상하게 인간적인 윤리도덕과는 어긋나게 성경은 왜 애가 생겼냐고 학대를 해요. 왜 애가 있느냐고. 허, 참내. 애가 왜 아들 왜 낳았냐고 학대하잖아요. 없어야 되는데 왜 있느냐 말이죠.

그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 언약 가운데 자식 없는 여인이 자식 있는 여인보다 더 많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배치들이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적인 상식에서 성경해석하면 큰일 납니다. 아이고, 불쌍하다. 이스마엘. 이렇게 된다고요.

주님께서 억눌리고 고난 받는 자 도와주시고 신원한다는 말은 어떤 것이냐 하면, 복음 때문에 고난 받는 사람을 말하지, 이 땅에서 신음하고 억울한 그 사람 도와주는 게 아닙니다. 복음으로 인하여 고난 받고 핍박받을 때 그게 순교지, 그냥 집구석에 돈 없어서 그것 가지고 하는 게 아니에요. 죽어 마땅한 인간이 돈 없어 일찍 죽으면 좋지, 뭐 하려고 돈 없다고 한탄합니까?

여기 17절에 보면, "하나님이 그 아이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가라사대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니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큰 민족을 이루지요. 큰 민족을 이룹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창세기 4장에 가인에게 이마가 아니고 가인에게 표를 주어서 만나는 사람에게 죽음을 면케 하신다. 자, 이게 사인인데. 가인에게 어떤 표가 있기 때문에 그 표가 어떤 표인지 알 순 없지만 가인을 만나는 사람에게는 만나는 사람마다 저 가인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느끼게끔 하게 만드는 어떤 표. 그건 우리는 모르죠. 참, 신기하죠.

하나님이 동생을 죽인 살인자, 죄의 지배를 받아서 동생을 죽이고 하나님께 거절했던 대항했던 그 살인자를 이토록 왜 보호하시느냐? 그것은 가인이 있어야만 이게 살인자 노릇을 톡톡히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악이 있어야만 비로소 진리가 악 틈바구니에서 솟아날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죽음 밖에 없는 세계가 되어야 거기서 그 죽음을 이겼다. 라고 할 사람이 가치 있게 거기서 튀어오르는 겁니다. 여기서 생명, 자기 힘으로 죽음을 이길 것 같으면 지나 개나 이길 것 같으면 이건 우리 힘으로 이길 수 있네. 이렇게 되거든요. 모두 다 깜깜한 어둠이 되 있을 때 빛이라 하는 것은 결코 어둠 속에서 어두움이 빛을 만들어 낸 적이 없다는 것이 분명해지잖아요.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목회자나 설교자나 누구 하나 예수님의 피를 고백하면 깜짝 놀라야 돼요. 이건 내 설교해서 그런 게 아니고, 주께서 저 사람에게 떨어졌구나. 마치 동방박사에게 별 떨어지듯이 떨어졌구나하고 깜짝 놀라야 돼요. 지금 우리가 복음을 이야기하는 게 장난이 아니네. 실제 상황이구나. 주님 살아계시는 게 실제 상황이라고 깜짝 놀라야 돼요. 그처럼 지금 하나님이 계속 실제적으로 개입하고 있어요.

그렇게 해서 가인의 특징은 뭐냐? 가인의 특징은 라멕이 증거합니다. 가인 후손들의 공통점이 뭐냐 하면, 모든 것이 자기 입장이에요. 자기 입장이라는 거예요. 라멕 한번 봅시다. 가인의 칠대손 라멕이 23절 두 아내에게 하는 것 보세요."아다와 씰라여" 아내, 두 여자의 이름입니다.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춘자야, 영희야 이런 게 있지요.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끝부분에요.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라고 되어있지요. 이 말은 뭐냐? 누구 중심이다? 가인에게 벌 받은 사람 있다면, 가인에게 대들기 때문에 벌을 일곱 배 받았지요. 그렇지요. 그게 누구 중심이에요? 가인 중심이죠.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나에게 벌을 칠 배 받는다면, 이거는 가인한테 잘못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 잘못한 것도 아니고 누구한테 잘못한 거다? 당사자, 나. 나에게 코털 건드리는 놈은 어떻게 한다? 벌을 칠십칠 배 받는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조상도 없고 선배도 없고 궁극적으로 누구 밖에 없다? 경사도 말로 하면 '지 밖에', 표준말로 하면 '나 밖에'. 나 밖에 없다는 거예요.

왜 이러한 자기 찬양, 찬양이 노래니까, 이러한 자기 찬양이 나올 수밖에 없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보호한 거예요, 가인을. 왜냐하면 어떠한 인간이든 이 가인의 속성에서 벗어날 위인이 없다는 겁니다. 어떤 인간이든. 심지어 베드로, 요한도 마찬가지고. 어떤 인간이든. 이런 인간의 궁극적 속성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거예요.

자, 강의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사람은 왜 삽니까? 흔히 이야기하기를 자식 때문에 산다고. 그럼 자식한테 실망당해 보죠. 그러면 자식 때문에 산다는 것도 같이 날아가 버립니다. 다 남편 때문에 살지. 그런데 남편한테 실망당해 보세요. 그땐 누가 남습니까? 남편도 이제는 귀찮지요.

결국은 사람은 누구 때문에 삽니까? 내 남편이기 때문에 그만한 봉사를 했는데, 저 내 남편이라고 여기던 사람이 지 남편 되고 내 남편 안 된다면, 나도 남편과의 관계를 끊어버리겠지요. 그죠?

이처럼 모든 것이 내 주위를 훌훌 떠나버릴 때 그럼 나는 무슨 보람으로 무슨 재미를 느끼는가? 궁극적으로 내 자식이었고 내 남편이기 때문에 나는 사랑한다 했지만 그게 그러한 사랑을 안 받아줄 때 떠나버릴 때는 결국 남는 것은 나 밖에 없습니다.

만약에 나에게 애를 먹이고 다른 여자 만나서 도망친 남편에게 어떤 나쁜 일이 생겼다 하면, 옛날 전남편에게 있었던 벌이 일곱 배이라면 나한테 걸리면 칠십칠 배, 이런 소리 할 수밖에 없다 이 말이죠. 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KBS-TV에 보면 이런 게 있습니다. 용서하는 시간, 용서하는 시간 하는 게 있데요. 지나간 과거 가운데서 용서 못한 게 맺혀 있는 게 있으면 공개적으로 용서를 구해서 다시 화합하기를 바라는데. 이게 그 프로가 내가 보기에 약간 아슬아슬한 게 본인은 본인의 용서를 받겠다고 나서는 본인의 즐거움이 끝나요. 용서해주겠다 하는 것은 억지로 끌려 들어왔어. 용서 해주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게 아니고, 아예 잊고 싶은데 괜히 용서해달라고 매달려서 그때 아픈 감정을 또다시 새롭게 기억나게 만들어버렸어. 사람들 힘들게 만들어버린 기라.

그러니까 용서하겠다는 아주 거룩한 심정을 둘러댔지만 이건 자기 입장만 생각했지, 내 입장은 용서해달라는 내 입장은 생각해 본적도 없는 기라. 벌써 잊혀진 과거 이야기를 가지고 이제 와서 끄집어내서 용서해달라고 매달리니까 용서해줄게요. 용서해줘. 용서해준다고 안 합니까? 용서해줘. 아이, 귀찮아 죽겠네. 용서해준다 안 합니까? 결국 이렇게 돼버려요.

냉정하게 생각해 보세요. 사람은 자기 밖에 몰라요. 자기 행동 안 게 자기한테 굉장히 중요해요. 자기는 중요한데 같이 한 방에 한 이불 덮고 자는 다른 사람한테 별로 안 중요해요. 어젯밤에 꿈 꿨지요. 본인은 그 꿈이 대단하지요. 옆에 사람 물어보세요. 내 꿈 어떠냐고 하니까 니 꿈 뭔데? 이렇게 하거든요. 몰라요. 하나도 안 중요해요. 남편은 남편 꿈 따로 꿨어요. 지 꿈이 중요하지, 아무리 개꿈이라도. 따로 꾸는 겁니다.

그럼 같이 사는 것은 뭐냐? 전략적인 이유 때문에 살아요. 양보, 정치적 이유 때문에 사는 거지. 그냥 적당한 타협을 하는데 오랫동안 타협을 했기 때문에 마치 한 마음처럼 느껴질 뿐이지요. 어떤 계기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사건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사건이 벌어지면 본색이 드러나서 난리가 하겠지만. 지금까지는 뭐냐 하면, 서로서로 너무나 타협을 잘했기 때문에 마치 한 마음처럼 같이 굴러가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다 나중에 장가가고 시집갈 때 자식 때문에 혼수 때문에 싸우고 해서 신문에 나오면 곤란하지만. 아파트 사주니 마니 해서 얻어맞고 들어오고. 그때는 문제되지만.

이처럼 여러분,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배치된 입장이기 때문에 불신자들이 활개 칠 때 그것을 성경에 보면 시편에 나오지요. 목사님, 늘 시편 하시는데, 그걸 부러워하지 말라. 악인이 잘 될 때 잠시 내가 미끄러질 뻔했다. 나오지요.

그리고 지난주 시편 49편 하셨는데, 49편에 보면, 중요한 말이 나와요. 깨닫지 못하는 인간은 멸망하는 짐승 같다고 했어요. 사람도 아니라 이 말이거든요. 사람이 깨닫지 못하는 것은 인간 취급도 마란 말이죠. 하나님은 깨달았느냐 이걸 보지, 나 사람입니다. 이걸 인정 안 합니다.

시편 자체가 시편 전체 자체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지금 놓여있는 배치와 지금 자기를 덮어씌워 있는 그것이 내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 지금 우리는 그냥 놓여 있을 뿐이다 말이죠. 놓여 있으니까 깨달음이 오지요. 아하, 나는 멸망할 짐승이구나. 멸망할 짐승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는 자체가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라니까, 그게. 사람의 생명은 돈으로 바친다고 해서 속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게 시편 49편에 나오지요. 그걸 안다는 게 이게 우리 능력이 아니에요. 우리가 가인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는 거예요.

그러나 가인 나라 가 보세요. 가인 나라 가면 그런 소리 안 나옵니다. 전부다 누구 중심입니까? 내가 잘나서 내가 잘된 거예요. 그래서 가인의 모든 문명은 웅장하지요. 여기 창세기 4장에 가인에 보면, 가인은 창조의 능력을 발휘합니다. 여기에 음악과, 예술과 그리고 철기문화와 여러 가지 산업과 성채, 성채가 옛날의 요새거든요.

성은 하나의 집단거주지 정도가 아니고 요새에요. 전쟁을 대비한 성이에요. 캐슬이에요, 요새. 이것은 뭐냐 하면, 옛날 도시는 전쟁을 대비한 거예요. 전쟁을 대비했다는 말은 그 도시가 수비용이고 동시에 무슨 용이다? 공격용이 되는 겁니다.

이것은 저주받은 인간은 자신의 욕심에 만족한 인간이 없다. 끊임없이 정복하고 정복당하고 규합하고 지배하고 지배받고 그리고 그 전쟁에 필요해서 만든 것이 뭐냐? 바로 무기에요. 철기문화고. 거기서 나오는 여흥은 음악으로 즐기고.

그래서 인간시대는 뭐냐 하면, 전부다 각자 자기중심이기 때문에 좋은 것이 빼앗고 싶고, 힘 있는 사람한테는 빌붙어서 덕을 보려고 하고. 이것은 결국 뭐냐 하면, 더 큰 힘에 종속되는 그런 식으로 항상 권력의 힘에 의해서 혼란스러운 그런 시대를 맞이하는 겁니다.

그리고 가인의 이런 문명과 더불어서 그러면 목사님, 아벨의 문명은 없습니까? 없습니다. 대답은 없습니다. 왜 없습니까? 아벨이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이 개입해야 되지, 우리가 따로 어떤 문명 만든다고 그것이 선한 문명될 수가 없어요. 이 점이 아주 중요해요. 기독교문화는 없습니다. 기독교문화라는 이름은 있어요. 그게 가인의 문화고, 악마의 문화입니다.

기독교, 기독교문화는 그거는 아무 의미 없는 거예요. 구원은 기독교로 구원되는 게 아니에요. 복음으로 구원되는 겁니다. 주께서 건지는 건 복음의 능력이지, 기독교의 능력으로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교회의 능력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복음의 능력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도 가인의 문화 욕할 수 없어요. 왜? 우리가 가인의 자손이고 후손이기 때문에. 동일하게 우리는 내 잘되기 위해서 지금도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자식들 그런 식으로 교육하고 있습니다. 학교분위기, 교회분위기, 직장분위기 모두가 가인의 위주에요.

이놈아, 이겨야 안 돼. 패배하면 안 돼. 꼭 승리해야 돼. 누가 내 자식 때리느냐? 저 애 때리면 일곱 배인데 내 자식 때리면 일곱 배의 일곱 배 때릴 참이야. 이런 본성이 항상 우리한테 충만해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우리 욕망대로 안 되니까 그때 생기는 게 뭔가? 억울함과 분통함. 분통보다 더 큰 건 절통함. 그것보다 못한 건 방성대곡. 그거 안 되면 허탈과 허무. 무리수. 하루 스물네 시간이 어쩌면 그걸로 다 덮어져 있어요.

억울함, 분통과 애통과 안타까움과 초조와 불안과 알 수 없는 불안이 밀려와요. 왜? 내 중심이기 때문에. 내가 실패하면 안 되기 때문에. 우리는 실패를 겁내고 있어요. 실패를 겁내고 성공을 좋아합니다. 실패를 겁내고 있다는 건 내 중심에 있다는 뜻이에요. 다른 말로 하면 내 중심이에요.

그래서 제가 이런 말 하는 것은 결국 어떤 인간이든 간에 하나님 문화를 우리 손으로 만들 수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찾아오심과 다루심에 의해서만 우리는 하나님의 실적과 업적을 우리는 여기서 생산해 낼 수가 있습니다.

그게 바로 언약입니다. 그 언약을 위하여 이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아담의 후손, 셋의 후손을 쫘악 기록합니다. 그것은 문화도 아니고 문명도 아닙니다. 그저 단순하게 말해서 죽었는데 살았더라. 단순히 이것 밖에 없습니다. 죽음에서 이겼더라. 그것 밖에 없어요.

여기 누굽니까? 에녹 같은 경우에는 믿음으로 죽었는데 살았다. 이렇게 되지요. 죽어야 될 자리에 안 죽고 산 채로 하늘나라에 올라간 거예요. 믿음으로. 그럼 다른 사람은 믿음이 아니냐? 이런 뜻이 아니고, 에녹은 믿음의 증거를 딴 게 아니고, 에녹의 믿음의 증거는 죽어야 되는데 안 죽고 그냥 하늘로 올라간 걸 믿음의 증거로 보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개입했다는 겁니다. 어떤 문화를 이룬 게 아닙니다. 문명을 이룬 게 아니에요. 따라서 독자적 공동체운동을 한 게 아닙니다. 공동체, 우리끼리 잘살아 보세가 아닙니다. 그런 게 없어요. 없는데 다만 하나님이 개입하니까 예상치도 못한 죽어야 될 자리에 죽지 않고 그냥 하늘에 올라간 거예요.

죽어야 될 사람이 올라가니까 똑같은 모습의 일이 뭐냐? 홍수에 그 폭풍우에 죽어야 될 노아가 희한하게 방주라는 이상한 상자 안에서 거대한 상자 안에서 그들은 구원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게 에녹이 죽어야 되는데 산 것과 똑같은 입장이에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죽어야 되는데 예수님의 십자가, 이천년 전에 우리한테 물어보지 않고 죽었던 그 피가 우리를 지금 생명을 주었다는 것이 노아와 똑같은 효과를 주고 있습니다. 어느 시대에도 관계없이 우리는 주님께서 이런 식으로 우리에게 찾아왔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 이것이 우리의 사는 목적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에 우리만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죽는다는 사실 그리고 하나의 불신자들이 활개 친다는 사실 이 자체가 이미 하나님이 개입하고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증거로 받아들이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바로 가인의 후손이며 우리는 나 밖에 모르며 율법에 의하면 늘 죽어야 마땅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를 알게 하고 그 피로 말미암아 용서 받지 못할 죄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니 바로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온 증거로 여기고 이것을 증거할 수 있는 성도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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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8,422건 중 332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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