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07. 1. 26) 1번 녹취록
광주강의(07. 1. 26) 1번 녹취록
이름 : 서경수(IP:221.164.110.135)
광주 강의(07. 1. 26) 22-1
지난 시간에 요한 1서 3장 12절까지 했습니다.
오늘은 3장 13절부터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여기에서 우선 잘못된 해석부터 먼저 시작하겠습니다. 잘못된 해석이 어떤 것인가 하면, 내가 여기 있고 저쪽 형제가 있다. 내가 형제를 사랑해야 된다. 이것이 요한 1서 3장 방금 읽었던 13절 말씀을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하신다면 그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큰 오류입니다. 왜 큰 오류냐 하면, 사랑이 ‘나’라는 것을 정립해버리면 첫 번째 정립된 나에 대한 애착과 사랑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내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요한 1서 3장 13절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제가 먼저 선언하고 들어갔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사람이 내가 누구 누구를 사랑한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사랑해야 될 주체가 되는 나를 포기를 못하지요. 내가 사랑하지 않으면 저 사람을 누가 사랑할 수 있으랴! 내가 하나님 말씀 이룬다고 내가 사랑해야 되니까 누구부터 먼저 사랑해야 되는가 하면 남 챙기기 전에 남을 사랑할 수 있는 대견하기 짝이 없는 아주 훌륭한 나부터 내가 지독하게 사랑하지 아니하면, 나부터 정립하지 아니하면 남을 사랑할 그 다음 차례가 있을 수 없거든요.
그러다보니까 남을 사랑하는 일에 급급하기 보다는 먼저 나부터 깨끗하고 훌륭한 나로 만들어 놓고 그 훌륭한 내가 훌륭한 값 한다고, 말씀 지킨다고 형제 사랑을 하게 되면 만약에 내가 나에 대한 실망감을 느낀다든지 ‘아, 나는 이정도 인간밖에 안 돼.’ 라고 한다면, ‘내 주제에 어떻게 형제를 사랑해?’ 지금 형제 사랑보다도 자신을 추스르기에 더 급급해 하면, 이 요한 1서 3장 13절은 차후의 문제로 남겨두게 되는 거예요. 미루게 되는 겁니다.
결국 이것은 뭐냐 하면, 나부터 정립이 된다면 이것은 정립해야 될 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어요.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이기주의에요. 하나님말씀을 사랑하다는 것을 빌미로 삼아서 극단적인 이기주의를 유지해야 된다는 그러한 논리에 직면하게 되지요.
두 번째 내가 나를 너무 지독하게 사랑해서 얼마나 사랑하는지 요한 1서 3장 13절 말씀을 순종할 정도로 나는 나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다. 그 정도로 사랑한다. 그 정도로 사랑하는데 이렇게 대견스러운 내가 형제를 사랑하는데 형제라는 인간이 나의 고귀하고 숭고한 이 사랑을 안 받아준다든지 내가 기대한 만큼 반응이 안 나타나면 그 형제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사랑하겠어요, 미워하겠어요? 미워할 수밖에 없지요.
내가 당신을 위해서 온갖 희생을 다 했는데 당신은 내게 해 준 것이 뭐가 있느냐? 그렇게 되는 거죠. 이 말은 뭐냐 하면, 어떤 인간이든 행동에 나서게 되면 반드시 행동에는 기대치가 있게 마련이고, 그 기대치에 부응되느냐 마느냐에 따라서 사랑은커녕 미움으로 결론이 난단 말이지요.
‘네가 나의 사랑을 안 알아주고 말이야. 내가 누군지 알아? 골목대장 마빡이야. 골목대장 마빡이를 몰라보고.’ 만날 이러잖아요.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내가 누군 줄 알아? 나는 요한1서 3장 13절 말씀대로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마빡이야!’ 이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이런 나를 교회에서 몰라보고’ 이러고 있어요.
지독한 자기 사랑으로 인하여 자기 사랑에서 나오는 고결한 하나님의 말씀 사랑을 교회의 주위 사람들이 안 알아준다고 해서 그때부터 자기편과 자기편 아닌 사람을 가르고, 그 다음부터 남을 시시하게 보고 미워하는 그 원인 제공을 누가 하는가? 바로 본인이 자아 정립에서 비롯되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성경 보면서 내가 뭘 하겠다고 출발점을 이렇게 갖는 그 순간부터 그것은 하나님 말씀하고는 동떨어진, 아무 상관도 없는 자기의 신앙 자랑이라고 생각하시면 딩동댕 맞는 말입니다.
이렇게 자기가 내 놓을 수 있는 사랑과 소망과 믿음을 제시하겠다고 할 때 이미 주위 사람들은 그 사람의 노예가 되고 희생물이 되지요. 그 사람의 훌륭함을 증명해주는 노리갯감으로 전락해 가는 겁니다.
이런 경우가 참 많이 있습니다.
며느리가 되어서 주 안에서 부모님을 섬기라고 해서 열심히 시어머니를 섬겼는데 그 시어머니가 자기한테 재산을 남겨줄 줄 알았더니만 말썽꾸러기 아들한테 재산 다 물려주고 죽었을 때, 얼마나 시어머니를 원망하겠습니까? 여기서 원망 안 할 사람 누가 있겠습니까. 다 원망하지.
그러면 주 안에서 부모를 섬기라고 했던 그 사랑은 결국은 어떤 반대급부를 요구하는, 내가 이만큼 훌륭한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증거물로 타인들을 이용한 것밖에 안 되지요.
지금 제 논리에 의하면 여기에 안 걸리는 사람이 없어요. 모든 인간이 성경 보면, ‘아 순종해야지. 순종하기 위해서는 나부터 정립해야지. 하나님이여 이제부터 날마다 사랑할 겁니다.’ 라고 시작할 때부터 이미 문제에 접어들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것에 대한 힌트가 어디에 있는가 하면 14절 끝에 나옵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사망에 거하느니라” 여기에서 거한다고 하는 상태동사에 들어가면 이것은 공간 개념입니다. 공간이란 말은 어떤 사람이 개별적으로 딱 떼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성경 해석 잘못된 것이고, ‘우리는 지금 어떤 공간 안에 지배를 받고 있나?’ 이렇게 출발해야 합니다. ‘내가 처한 공간으로부터 어떠한 혜택과 어떠한 능력을 부여받고 있는가?’ 이렇게 출발해야 됩니다.
상당히 어렵게 했는데,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사람이 내 시간이라는 것. 내 시간을 따로 갖게 되면 거기서부터 ‘나’라는 것이 정립이 돼 버려요. 이기주의로 나가는 하나의 시발점입니다. 내 시간, 내 역사, 내 과거, 내 미래. 나를 중심으로 시간을 잡아버리면 이것이 이기주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이런 경험을 했다.’ 하면 내 시간 따로 하고, ‘나는 고등학교부터 대학까지 이런 과거를 거쳤다.’ 하고 내 과거, 시간을 잘라서 나만의 역사, 나만의 시간으로 잘라버리면 그 전체가 뭐냐? ‘나’라는 Identity, ‘나’라는 주체성이 확립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해서는 말씀을 못 지키거든요.
시간을 없애버리는 것이 뭐냐? 이걸 가지고 묵시라고 합니다. 묵시라는 것은 내 시간이 아무 쓸데없고 의미도 없고 소용도 없는 거예요.
시간은 원래 나에게 없다고 생각해 보세요. 내 시간이 아예 없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시간 전체가 하나의 창고, 공간이 되어버리죠. 내 시간이 없어요. 내 시간을 따로 챙기면 거기서 ‘나’라는 이기주의가 발생되지만 내 시간이 아예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은혜 속에 그냥 파묻혀 있는, 폭설 속에 파묻혀 있는 그런 입장이 되는 겁니다.
요즘 시청률이 40~50% 가까이 되는 [주몽]의 예를 한번 들어봅시다. 송일국이 주몽 역을 맡았는데, 그 드라마 제목이 ‘주몽’이기 때문에 그 당시 일어나는 모든 천재지변이라든지 여러 가지 움직이는 모든 것이 누구 중심으로 보는가 하면, 주몽 중심의 역사로 다 몰아가지요.
일식으로 해가 가려졌다. 해가 가려지는 것도 다물군이 나중에 새로운 조선을 회복하는 것으로 해석하잖아요. 신녀들이 다 이런 식으로 해석하고, 그 다음에 주몽의 의붓아버지 되는 금아 왕 얼굴 반쪽이 꺼멓게 되었잖아요. 저주를 받아서. 이것도 주몽과 관련을 시켜서 사람들은 이야기 한단 말이지요.
그러면 시청자들은 주몽의 입장에 서서 주몽의 역사에 동참을 하게 되지요. 동참하게 되는데, 만약에 [주몽]하는 그 시간에 노무현대통령이 연설하면 기분 되게 나쁜 거라. 지금 MBC 주몽 하는 시간에 노무현이 왜 나오냐 말이지요. 노무현 연설 때문에 11시에 주몽 했어요. 주몽 역사 속에 나만의 역사를 잠시 접어두고 주몽 역사에 합치해보니까 이제는 주몽과 함께 가는 거예요. 주몽이 만약 얻어맞고 일이 꼬이면 그 다음날은 화가 나고 일이 손에 안 잡혀. 주몽이 승리하면 그 다음부터는 일이 손에 잘 잡히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나만의 역사를 따로 챙기기 때문에 이기주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게 사실은 드라마가 끝나버리면 다 허망한 것들이에요. 헤겔이란 철학자는 이것을 가지고 ‘가상’이라고 합니다. 허상이지요. 환상이지요.
이 세상 움직이는 것이 성경을 보면 복음적으로 움직이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자기 의로움 중심으로, 자기 잘남을 중심으로 자연 변화가 돌아가는 것처럼 그렇게 여기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나에게 대드는 저 인간 망했단다. 내게 대들었으니까 망해야지.’ 하는 그 때의 상쾌함. 기분 좋음을 느끼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런 뜻이 아닌데.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다른 말로하면 십자가 복음 중심으로 돌아가는데, 우리는 그렇게 보지 않고 내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고 싶은 겁니다. 이것은 내 욕망이 만들어낸 가상이고, 허상이고 부질없는 발상에 불과한데, 이상하게 우리는 여기에서 벗어나질 못해요.
그래서 묵시의 세계와 역사의 세계의 차이점을 제가 여기서 잠시 말씀을 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묵시라는 것은 시작과 중간과 끝이 그 자리에 함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 고 합니다. 여기에서 문제를 내겠습니다. 985년은 며칠 입니까? 1,000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1,000년 같으면, 985년은 어떻게 돼요? 이것도 하루가 되는 겁니다. 1,000년이 하루 같다는 것은 숫자로 비교하라는 말이 아니고, 시간은 질이 중요하지 양이 의미 없는 세상, 이것을 묵시의 세계라고 합니다.
현재 어떤 공간,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지, 그 놓인 상태에서 몇 년 흘러갔는가? 거기에서 신앙생활 몇 년 했는가? 이런 것은 안 쳐주는 세계가 묵시의 세계입니다. ‘내가 이 교회 나온 지 몇 년 되었습니다.’ 라든지 ‘장로, 목사 된 지 몇 년 되었다.’는 이런 것은 아무 의미 없는 것입니다. 왜냐? 이것은 자기 역사이기 때문에.
묵시의 반대가 역사입니다. 역사에는 시작과 끝이 구분돼요. 이것이 어려운데, 시작과 끝이 구분되면, 묻습니다. 끝이 되면 시작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이것이 역사의 세계입니다. 이건 어렵지 않은데.
2006년도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졌어요. 벌써. 2005년도 없어졌어요. 왜냐하면 현재 있는 것은 2007년 밖에 없기 때문에. 그러나 묵시 시계는 뭐냐? 지금 선악과 따 먹은 효력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지요. 우리는 선악과 구경도 못했습니다. 얼마나 맛있는지 우리는 모르지만 선악과의 그 원리는 우리에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우리가 태어났습니까, 안 태어났습니까? 안 태어났지요. 예수님이 십자가 달리실 때 사도 바울이 그 현장에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없었지요. 그런데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보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했지요?
십자가는 역사로 해석해서는 안 된단 말이지요. 옛날 십자가가 지금 오늘 우리를 구원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10년 후도 그 십자가 사건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왜냐, 묵시 세계에서는 시간 흘러감이 의미가 없기 때문에.
지금 묵시 세계는 어떤 것이 통치하고 어떤 것이 지배하고 어떤 것이 은총으로 내려오느냐? 묵시를 지배하는 그 역사의 질, 성격 이것이 중요하지 지금 몇 년 흘러갔는가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시간은 흘러가기에 과거는 지금 없습니다. I.M.F가 지금은 없습니다. 그 여파가 있든 말든 지금은 없어요. 그런데 묵시에서는 지나간 십자가 사건이 지금 우리와 함께 있고, 과거에도 함께 했고, 미래의 역사에도 함께 다 들어 있는 거예요. 이런 경우를 간단히 말해서 ‘거한다’고 합니다. 어떤 장소, 어떤 처소에서 빠져나가지 못할 그러한 범위 내에 그냥 놓여 있는 거예요.
내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놓이게 만든 그 공간이, 공간 자체에 와보니까 이웃 사랑이 넘쳐나는 공간에 내가 와있는 거예요. 여기서는 내 임의대로 내 역사를 못 만들고 주님이 주신 능력대로 이웃을 사랑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그러한 공간 속, 이것을 ‘생명 안’이라고 이야기하고, 아무리 애써도 이웃을 사랑할 수 없게 만드는 공간을 본문 말씀에는 ‘사망에 거한다.’고 한 것입니다.
나쁜 짓해서 사망에 거하는 것이 아니고, 사망이 나보다 더 우월하여 나로 하여금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게 만드는 그러한 영적인 공간 속에 우리가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궁금한 것이 ‘나는 어디에 놓여 있습니까? 나는 생명에 거하고 싶지 사망에 거하고 싶지 않습니다.’ 라고 다 이야기하지요. 이렇게 될 때, 오늘 본문은 뭐라고 하는가 하면, 네가 어느 공간에 놓여 있느냐(사망이냐, 생명이냐) 하는 것은 각자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지금 사랑을 알면 그 아는 장소가 바로 생명이 있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네가 주님의 사랑을 알게 되면, 사랑을 아는 네가 이웃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너를 알게 한 그 사랑이 너로 하여금 사랑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믿음으로 사랑이 찾아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내가 사랑하고 말고 할 그런 사랑이라면 그것은 주님의 사랑을 안 받은 사람입니다. 사랑하고 싶으면 사랑하고 미워하고 싶으면 미워하고 그런 입장에 우리가 놓여 있다면, 이것은 내가 어디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거한다’는 묵시 세계와는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진정한 묵시 세계 속에 놓인 것을 안다면, 나에게 찾아온 그 사랑이 그 이후에 나로 하여금 이웃을 사랑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사랑으로 나를 가지고 이용하는, 사용하는 그러한 사랑이 믿어질 때 그 사람은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력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사랑을 알았으니 그 사랑이 우리를 가만 두지 않고 우리로 하여금 그 사랑을 이웃 사랑까지 퍼지게 만들 때 이것은, ‘나는 생명에 놓여 있다.’고 믿으면 된다는 거예요. ‘내가 뭘 했다.’가 아니라, 이렇게 되면 또 내가 정립되니까, 또 이기주의가 되니까.
그래서 교회에서 “집사님! 무슨 사랑이 이렇게 많아서 나를 사랑해 줍니까?” 할 때, 자기 역사만 고집하는 사람은 “제가 10년 전에는 못했는데 이제 제가 할 수 있거든요.” 왜? 이제 이만큼 성화되었기 때문에. “10년 동안 열심히 배우니까 이제 할 수 있겠네요.”
이런 사람은 10년 전에는 못했는데 지금은 할 수 있고, 그러면 앞으로 10년 후에는 할 수 있을지 없을지 어떻게 장담합니까? 장담 못하지요. 이런 사람은 사랑을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하면, “아이쿠 집사님, 어떻게 그런 사랑을 베푸십니까?” 할 때, “내가 사랑한 것이 아니고 주님의 사랑이 나를 통과해서 나를 몰고 가서 주님의 사랑이 집사님을 변화시켰습니다.” 라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의 사랑을 증거하는 고백이 나올 때, 그 사람은 여전히 사랑이라는 통치 권한 속에 사로잡힌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고 본문을 보면 과연 제 말이 맞는지 확인이 되겠지요.
13절에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보세요. 이미 공간의 패가 갈려졌잖아요. 저쪽 패가 이쪽 패를 미워할 때 이상히 여기지 말라. 지금 세상은 내가 놓여 있는 공간을 시비를 걸거든요.
14절에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이것은 누가 안 가르쳐줘도 본인이 안다는 말입니다. 본인이 아는데 자꾸 ‘알아야 된다, 알아야 된다.’ 그 말이 아니고, ‘이것은 제가 한 것이 아니고 집사님, 주님의 사랑이 그렇게 했습니다.’ 본인이 이미 알고 있는 상태에서 그런 고백을 하는데 그걸 누가 말릴 수 있습니까? 못 말리지.
본인이 알고 있다는데 옆에서 자꾸 ‘네가 아는 게 아니야.’ 라고 우겨도 소용없는 거지요. ‘네가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아?’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내가 알고 있는 사랑을 그가 모른다는 말은, 그 사람은 사망에 여전히 머물러 있으니까 이 사랑의 출처가 어디인지 모르는 거예요.
우리는 이 사랑이 내 사랑이 아니고 십자가에서 나왔다고 이야기하고, 사망에 거하는 사람은 ‘아니야, 내가 사랑하면 사랑 할 수 있어!’ 자꾸 출처를 자기에게 두니까 우리는 답답하지요. ‘어이, 네게서 빠져나와. 네가 사랑한 것이 아니야.’ 그 사람은 ‘내가 사랑한단 말이야.’ 그러면 이쪽에서는 ‘네가 어떻게 사랑을 해. 주님이 사랑하지.’ 그러면, 저쪽에서는 ‘너는 신비주의구나.’
흔히 세상 목사들이 그러지요. ‘목사님, 그렇게 하지 마시고 주님의 사랑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하면,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그렇게 해서 어떻게 교인들을 격려하겠느냐?’ 그러니까 교육을 시켜야 되는데, 주께서 알아서 사랑하신다고 하면 모두가 주께서 하신 텐데 하면서 태만하고 방종할 테니까 그렇게 해서는 교회 꼴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떻게 하느냐? 간증집회 열어서 어떤 사람은 이렇게 해서 복 받았다. 여러분도 본받아서 복 받으세요. 이렇게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건 아니죠.
이미 생명으로 옮긴 사람은 누가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본인이 알고 있다니까요. ‘나로서는 도저히 이런 사랑이 나올 수가 없다.’ 함께 계시는 주께서 이런 일을 시켜서 이런 사랑이 나왔지 이것은 내 실력으로는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아는 겁니다.
3장 8절을 봅시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여기에서 마귀를 뭐로 보느냐 하면, 죄의 능력을 꽉 쥐고 있는 그런 존재, 그래서 어떤 인간도 본인의 의지로 못 벗어나는 강한 힘을 갖고 있는 그러한 존재가 마귀입니다.
그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은 여전히 묶여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해석하란 말이지요. 이 말은 상대방을 비판하는 말이 아니고, 현재 십자가의 사랑을 알고 있는 너는 네 힘으로 마귀에게서 빠져나온 것이 아니고 악마가 아닌 다른 힘에 묶여져 있기 때문에 너는 죄를 지을 수 없는 인간이 된 거지요. 짓고 싶어도 죄를 못 짓는 거예요.
그럼 뭐가 죄냐? 죄고 싶으면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이 죄고, 뭐가 죄 아닌가? 짓고 싶어도 죄를 못 짓는 것이 죄 아닌 거예요. 이 말에 시비 걸려면 시비 걸어보란 말이지요.
당신은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죄라는 개념을 내 주체 개념으로 보는 게 요한 1서가 아니고, 죄라는 것은 어떤 공간의 성질, 묵시적으로 볼 때는 악마의 질이냐, 아니면 성령님의 질이냐? 그 속성으로 따지기 때문에, ‘당신은 내 행동 여하에 따라 죄도 되고 의도 된다.’고 보지만, 나는 공간적 개념으로, 속성 개념으로 보기 때문에 ‘죄를 지어야만 죄가 된다고 여기는 그것이 죄고, 죄를 짓고 싶어도 못 지을 그러한 형편에 놓여 있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죄가 아닌 거고.’ 말 되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전도할 때 어느 인간도 예수님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어요. 12제자 중 한 사람도 알아듣지 못했어요. 성령이 오니까 그때야 아하, 주께서 공간 개념으로 이야기한 것을 가지고 우리는 유대교적 사고방식으로, ‘구원 받은 내가 어떻게 바르게 말씀 순종하느냐?’ 이런 개별적인 자기 자아 중심으로 성경 말씀을 성취해 보겠다는 그러한 열성으로 하니까 아무도 주의 말씀을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사람이 열심을 내게 되면요, 열심을 내게 된다는 말은 뭘 염두에 두게 되는가 하면, 열심히 아닌 것과 열심인 것을 이미 구분 짓는 잣대위에 본인이 서서 쳐다봐야 열심을 낸다는 말이 성립이 됩니다. 제 말 맞잖아요.
열심을 낸다고 할 때는, ‘아하, 이건 열심이 아니야. 이건 열심이야.’ 라고 결정짓는 기준점에 누가 있다는 말입니까? 본인이 있는 거예요. 이건 반칙이잖아요.
축구할 때 22명 선수 외에 3명의 심판이 따로 있습니다. 그런데 촐랑대기 좋아하는 이천수 선수가 자기가 선수도 하고 자기가 심판도 해서 자기가 한 것은 무조건 반칙이 아니래요. 그게 무슨 게임입니까? 그건 자기중심의 자기 역사지요.
아까 한 자기 역사 다시 한 번 해 봅시다.
사람이 아침 눈 뜨면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자기만의 역사입니다. ‘오늘은 광주에 가야하는데 눈이 적게 와야 할 텐데.’ 눈 오는 것은 복음을 위해서 눈이 오는데, 우리는 광주 가는데 자신이 힘들지 않기를 바라는 자신의 편함부터 먼저 챙기고 ‘폭설아 알아서 해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사실은 더 따져보면 그 폭설을 누가 내리는 겁니까? 하나님이 내리시잖아요. 그러면 결국 뭐냐 하면, ‘하나님, 당신도 내 마음대로 되어야 해.’ 이거잖아요. 이것은 마음속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것과 동일한 거예요.
그런데 기대 밖으로 눈이 더 올 때, 그 때는 무엇이 깨집니까? 역사에서 묵시로 옮겨갑니다. ‘주여, 잘못됐습니다. 광주 가고 안 가고가 의미 없는 나의 역사를 가지고, 나의 기준점을 가지고 주님의 기준점에 헤딩을 했던 것이 잘못입니다.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 차가 박든지 뒹굴든지 가든지 말든지, 코가 깨지든지 차가 빠지든지 주의 뜻대로 하옵소서. 주께서 복음대로 쓰실 겁니다.’ 이것이 아까 오 목사님 고백이잖아요.
주님께서는 오 목사님께 가끔가다 역사에서 묵시로 옮겨가도록 일깨움을 줍니다. 물론 주위 사람들의 역사도 함께 고통을 받지요. 사모님도 같이 역사가 깨어지는 고통. 기다리는 사람의 자기 역사가 깨어지는 고통.
우리는 매일같이 자기 역사를 포기 못합니다. 그런데 주님도 역시 묵시를 포기 못해요. 매일 싸우는 거예요. “두려워 말라!” ‘두렵습니다.’ 만날 싸우는 거예요. “이미 다 이루었느니라.” ‘그렇지만 제 욕심은 따로 있습니다.’ 만날 싸우는 거예요. 결국 주님께서 깨드리니까 나중에 이런 소리 하지요. ‘형제여, 나는 당신을 미워한 인간입니다.’ 이게 뭐냐, 두자로 ‘사랑’입니다.
주를 사랑하면서도 ‘나는 나밖에 모르는 인간입니다.’ 라고 나왔을 때, 형제가 뭐라고 하는가 하면, ‘형제여! 그것이 자비와 양선과 형제 우애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열매입니다. 자기는 형제에게 ‘형제를 미워하는 일 밖에 안 했다.’는 고백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받는 형제는 성령의 은혜로 받지요. 그러니까 ‘당신은 훌륭합니다.’ 고 했을 때, 내가 훌륭한 것이 아니고 요한1서 3장 16절의 말씀처럼, 주께서 나를 통해서 주의 사랑이 당신을 사랑하는 그 경우란 바로 내가 당신께 죄를 고백하는 경우를 통해서 이뤄집니다.
그러니까 주께서 일 하시잖아요. 물론 이 과정에서 나의 역사는 박살나지만 주의 사랑이 형제에게 사랑을 전달하도록 그렇게 되었잖아요. 그러면 말씀 성취되었잖아요. 그래서 주께서 다 이루었다는 고백 그것밖에 안 나와요.
15절을 봅시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자, 봅시다. 하나하나 따져보면 평소에 우리가 얼마나 성경 말씀을 잘못 해석 했는가 나타나요. 형제 미움이 살인으로 넘어가는 논리를 우리가 이해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우리에게서는 이런 논리가 안 나옵니다. 살인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고 미움은 죽이는 것이 아니고 그냥 미워하는 것이죠. 미움이 살인이라는 이 논리는 아무리 따져 봐도 우리는 이런 논리가 나오지 않아요.
그런데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곧 살인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이것은 어느 공간에 해당되는가 하면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공간 속에서만 이런 논리가 진리로서 우리에게 제시되는 겁니다.
우리는 아무리 따져도 형제 미움이 살인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깁니다. ‘주여, 내가 형제를 미워하긴 했지만 살인은 안 했습니다. 내가 어떤 가족을 미워하지만 죽였다고 하는 것은 너무 억울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형제 미움이 살인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어떤 근거에 의해서 미움이 살인이 됩니까?’ 라고 물을 때, 주님은 ‘너, 십자가에 대해서 들어봤나? 알아 봤나?’ 이렇게 나와요.
그러니까 형제 미움이 곧 살인이라는 공식이 살아있는 공간은 생명과 사랑 안의 공간에서는 성립이 되거든요.
그러면 생명과 사랑을 유지하는 그 원칙은 무슨 원칙입니까? 바로 우리가 잠시 잊었던 십자가 사건에서 나온 원리입니다.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마음속으로 간음한 것도 간음이다.’ 이것은 얼토당토않은 이야기에요. 그런데 주님은 우기는 거예요. ‘네가 하는 모든 맹세는 헛맹세다.’ 내가 그렇게 되고 싶어 맹세를 했는데도 헛맹세에요. 그러면 그것이 헛맹세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십자가 사건으로 가야 그 원인이 규명됩니다.
모든 성경 말씀은 우리를 어디로 몰고 가는가 하면, ‘네가 십자가에 대해서 도대체 얼마나 아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껏 안다는 것이 내가 교회 나와서 헌금하고 주일 지키고, 예배하고, 자꾸만 내가 주체가 되어서 내 위대함과 나의 대견함을 남에게 과시하는 식으로 뭔가 행했다는 것, 이런 것만 주어모아서 나만의 고유한 역사를 가지고 이것이 진리인 냥 우기고 있으니까 주님께서 그것을 때리면서 ‘네가 그것 때문에 십자가를 놓쳤구나. 자, 이 말씀 들이댄다. 형제 미움이 곧 살인이다.’ ‘주여, 저는 형제를 미워한 적은 있지만 살인한 적은 없습니다. 너무 심하십니다.’ 주님은 ‘네가 십자가를 놓쳤기 때문에 심하다는 말이 나온다. 따라서 이 말씀을 추적해서 다시 한 번 십자가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를 깊이 한 번 들어가 봐라.’ 하는 식으로 우리에게 말씀으로 깨우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제가 전도서 설교를 함부로 한다고 시비를 거는데, ‘전도서 전체가 완전한 한 권의 책인 것을 왜 모르느냐?’ 그렇게 나오는데, 저는 그 사람에게 묻고 싶어요. 성경 전체가 한 권인 것을 왜 모르느냔 말이지요. 전도서와 잠언서가 차이나면 안 돼요. 출애굽기와 잠언서 내용이 차이나면 안 됩니다. 성경 전체가 한 권입니다. 뭘 이야기합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것만 나와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성경은 곧 내(예수)게 대해서 증거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성경 전체에서 일관되게 예수님을 이야기하는 것을 모르고 전도서만 드려다 보면서 국어시간에 문단 나누기 하는 식으로 해서 결국 나오는 것은 ‘나는 이렇게 할 수 있고, 나는 저렇게 할 수 있고, 이것은 못한 거고--’ 이게 자아의 주체잖아요.
십자가와 연결되지 않는 그러한 설교가 무슨 설교입니까? 그렇게 해서 어떻게 전도서를 해석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언제 예수님이 전도서를 해석할 때 그렇게 했습니까? 전도서 전체를 묶어 한 마디로 해서 지혜, 그 지혜는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제가 십자가 전했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틀렸데요.
십자가가 지혜고, 지혜가 전도서의 목적인데, 전도서 설교하면서 십자가 이야기했는데 그것이 왜 틀려요.
성경 말씀은 사람들에게 어떤 교훈을 주기 위함이 아닙니다. 교훈이라는 것이 얼마나 엉터리고 무서운 것인지 한 번 보세요. 자, 목사님이 교인들에게 교훈을 한다고 합니다.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한 수 가르치겠다는 거예요. ‘나는 이 말씀을 이렇게 지켰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왜 이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습니까?’ 라고 한다면, 교인들은 목사에게 뭘 요구하는가 하면 목사나 자기나 똑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같은 인간인데 그분이 지켰고 나는 못 지켰다면 지키는 방법론이 있을 것 아닙니까? 어떤 기술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그 기술을 전수받아서 두 번 다시 그 목사에게 잔소리 듣기 싫은 거예요.
옛날 어린 시절 우리 할아버지가 얼마나 잔소리를 하는지 나중에 보니까 그게 행동이 나빠서가 아니라 나를 미워해서 나온 잔소리인줄도 모르고 나는 할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그대로 하면 사랑 받을 줄 알았어요.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더 화가 나서 내가 지키기 힘든 숙제를 계속 제시하는 거예요. 그래서 나도 한 오기 하잖아요? 계속 완벽하게 더 지킵니다. 예를 들어, 잠을 잘 때 베개를 반듯이 하고 자라는 것 까지 간섭을 해요. 그래서 평소에는 자유롭게 자다가 할아버지 오신다고 하면 반듯이 해서 당신에게 보란 듯이 한 거예요. 이게 뭡니까? 이게 오기 싸움이고 자존심 싸움이지. 이것은 사는 게 사는 게 아닙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해서 미움 받는 자예요.
사울이란 왕이 회개를 얼마나 자주 했습니까. 그런데 계속해서 사무엘에게 밉상 받지요. 왜냐하면 미움 받기로 작정되었기 때문에 그래요. 이것은 인간의 행동여하에 따라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미움 받기로 작정된 인간은 어떤 짓을 해도 밉상이고, 사랑 받기로 작정된 자는 어떤 행동을 해도 고운 자식이에요. 이미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은 무슨 짓을 해도 주님께 기쁨이 되는 겁니다. 까불어도 기쁘고 교만해도 기쁘고 다 기뻐요.
물론 이것을 깨 부숴서 십자가로,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너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원천이 십자가에서 흘러나온 사랑이기에 십자가를 보고 너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목사가 교인들에게 교훈삼아 설교를 한다면 교인들은 오기가 있어서 ‘목사 네가 잘 지키나, 내가 잘 지키나 한 번 붙어볼까?’ 이렇게 나올 수가 있습니다. 고분고분한 사람은 그렇지 않지만 한 신앙했다는 사람들이 교회에 오면 눈에 불똥 튀게 목사와 신앙경쟁을 하면 골치 아픕니다. 목사가 새벽기도 때 30분 기도하면 자기는 35분 기도하고, 목사가 40분 기도하면 자기는 기어이 45분 하고.
결국 이것은 말씀에 대한 곡해, 잘못된 해석 때문입니다. 목사가 잘못된 해석을 하니까 자신이 교인들을 교훈할 자격이 있는 것으로 착각을 하고, 그것으로 인해 교인들은 이만하면 이 말씀에 대해서 더 이상 지킬 것이 없이 완벽하다는 착각에 빠지게 합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반드시 죄가 고백되어야 해요. 그 죄는 아까 이야기한 간음도 아니고 살인도 아니고, 내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가 된다는 이러한 생각이 바로 죄입니다. ‘내가 주체가 되어서 내 행동 여하에 따라 죄가 되기도 하고 의가 되기도 한다는 이러한 착각이 바로 이 목사가 여러분에게 잘못 가르쳐서 그렇습니다.’ 라고 회개할 때, 이것을 자백할 때, 교인들도 ‘목사님만 그런 줄 압니까, 저도 그런 착각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제 목사님 말씀 듣고보니 우리가 주님의 사랑으로 인도받는 것을 모르고 내가 잘해야 사랑받고 인도 받는 줄 알고 착각했었습니다.’ 둘 다 부둥켜 앉고 울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린단 말이지요. 물론 이것도 연출된 상황일 수도 있지만, 이런 것을 다 믿을 수는 없지만 --
어찌했든 초대교회에 유무상통하고 서로 나눠주고 했던 것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했습니까? 서로 나누자는 교훈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된다는 놀라운 기적 때문에 정신없이 주고, 정신없니 내 놓는 거예요.
더 이상 내 행동여하에 따라 구원되고 안 되고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성령이 오게 되면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게 되고, 예언을 하고 이것이 자기가 소유하거나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주께서 주시니까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잖아요. 내가 십자가 피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는 자체가 이미 딴 사람으로 변화되었다는 뜻이고, 이 변화의 능력은 자신에게서 유발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알잖아요. 그러니까 그 때부터는 가르치는 것에 급급한 것이 아니고 증거하는데 급급하고 고백하는데 급급하다 보니까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사랑만 나오는 거예요. 이게 정말 멋진 교회 아닙니까?
미움이 살인이 되는 것을 인간들은 감히 생각을 못했습니다. 미움은 미움이지 살인과는 달라요. 그런데 십자가에서는 주님에 대한 미움이 결국 주님에 대한 살인으로 되었습니다. 이러한 본성이 아담 자손에게 계속 이어진다면, 우리가 미처 이런 본성이 있는 줄 몰랐다 뿐이지 이런 본성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발적인 살인 같은 것은 언제든지 나올 수 있는 거예요.
아주 미운 교인이 입원을 했다. 그래서 목사가 미워서 심방을 안 가면 그 교인을 간접적으로 살인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한 번 기도해서 위로해 주었으면 한 달 만에 나을 것을 미워서 안 갔더니만 희망을 잃어버리고 죽을 수가 있단 말이지요. 하하하 ---
기대를 잔뜩 한 애가 성적도 떨어지고 공부도 열심히 안 하고 하면, 미워서 밥도 덜 먹었는데 설거지를 한다든지 해서 무언의 압력을 준다든지, 청소를 하면서 괜히 앉아있는 아이의 발을 꽉 부닥치면서 걸레질을 한다든지 하는데, 이 순간 ‘너는 죽어도 기분 좋겠다.’는 자신의 감춰진 아담의 본성을 노출하는 거지요. 이것은 결국 나의 역사를 가지고 타인의 역사를 압박을 가하는, 나만의 기대와 나만이 가지고 있는 역사의 사슬로 타인을 공격했기 때문에 이것은 묵시적 사랑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원래 나는 애를 미워할 수밖에 없는데, 나는 평소에 착한데 네가 성적이 떨어졌기 때문에 너를 미워한다는, 평소에 나는 의로운데 너 때문에 나의 의로움에 흠집이 생겼다는, 그 탓을 자식에게 돌릴 때 그러한 모습이, 공부 못해도 구원 받는 자식이라면 얼마나 귀합니까? 공부는 못하지만 천국을 같이 간다는 것, 이게 얼마나 귀한 거예요.
그러니까 결국은 미움이 살인이라고 이야기했던 그 주님이 미운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내 죄인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은 주님의 넘치는 사랑입니다.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으켜서 십자가를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 말씀의 능력입니다.
16절에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보세요. 자꾸 십자가로 몰아가요.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렸다는 것이 십자가 아닙니까?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마땅하다는 말은 그렇게 되도록 조치하신다 이 말입니다.
자, 그러면 미움이 살인이라면 문제 내겠습니다. 쉬운 문제입니다. 미움이 살인이라면 사랑은 뭐가 됩니까? 생명이 되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미움을 사랑으로 바뀌게 함으로 말미암아 나로 인하여 상대방이 살게 하는 그러한 능력이 오는 거예요. 사랑이 생명이 된다면 곧 미움이 살인이 된다는 말이 맞잖아요?
사랑이 나를 살린다면 미움이 살인이라는 말이 맞잖아요. 앞의 것은 맞고 뒤의 것은 틀렸다고 하면 안 되잖아요. 뒤의 것이 맞으면 앞의 것도 맞는 거예요. 미움이 살인이란 말은 바로 주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었다는 말이 맞는 것을 보니까, 미움이 살인이 되는구나. 그러니까 나에게 생명이 왔다는 것은 주께서 우리를 사랑했다는 거고, 심지어 우리가 남을 미워할 때도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는 구나. 그 사랑을 내가 왜 모르고 애들한테 닦달을 했나? 나는 공부 잘해서 구원 받았나? 공부 못해도 구원 받았는데 내 아들 공부 못한다고 그렇게 닦달을 했구나. 이로서 내가 이제 사랑을 알았으니까 이제부터는 미워서 때리는 것이 아니고 사랑으로 때려서 공부 더 하게 하는 거예요. ‘이제 TV 그만보고 들어가!’ 이제 사랑으로 하는 거예요.
결론이 아주 명쾌하게 되었지요?
20절을 봅시다.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거든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일까보냐”
우리가 어느 공간에 속했단 말이지요. 우리를 다 감찰하시고 아시는 공간속에 있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21절을 보면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그의 계명들을 지킨다.’는 말에서 그 계명은 바로 사랑입니다.
24절에 보면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뭐냐 하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계명이 우리에게 늘 주어져 있다는 것, 계명은 사랑입니다. 그 당시 유대의 풍토에서 계명이라고 하는 거예요. ‘사랑이 우리 안에 거하는 줄을 우리가 안다.’ 그래서 이 아는 것을 우리가 증거하면 된다는 말이지요. 뭘 걱정합니까. 이것이 담대함이에요.
모르면서 아는 채 하면 담대함이 없지만, 내가 십자가 피의 사랑으로 구원 받은 것을 안다면 거리끼지 말고, 자꾸 나의 역사 따로 만들 필요도 없이 어떤 공간 속에, 사랑 속에 지금 인도받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랑을 쳐다보면서 담대하게 살아라는 이야기가 3장의 내용입니다.
10분간 쉽시다.
(2007. 2. 13. 14:12 녹취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