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206a 부산강의 : 조지 래드 [신약신학]-하나님나라와 교회(1) 녹취
20070206a 부산강의 : 조지 래드 [신약신학]-하나님나라와 교회(1) 녹취
이름 : 한윤범(IP:211.218.2.253)
20070206a 부산강의 : 조지 래드 [신약신학]-하나님나라와 교회(1)
(강의:이근호 목사)
시간 1분전인데 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하나님나라와 교회], 이 주제가 상당히 많은 이야기를 해야 될 주제거든요. 하나님나라를 보고 싶어 하거든요. 사람들이. 하나님나라를 내가 죽어서 가야 될 나라를 미리 앞당겨서 보고 싶어 하고, 그리고 더 보고 싶은 것 같은 뜻으로 체험하고 싶은, 경험하고 싶은. 내가 과연 천국에 지금 합격될 것이다. 라는 것을 자신이 체험적으로 그걸 체험을 갖고 싶어 하지요.
그러면서도 그 체험된 것을 모아서 하나의 절대 체험, 하나님의 신적인 체험들을 하나 둘 모으면 A도 하나님의 천국에 들어갔다는 체험, A체험. 그 다음에 B체험. C체험. 이걸 다 플러스 시키면 절대적인 신의 나라, 교회가 우리 손에 들어오지요. 손에 딱 쥐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노력은 추상적인 천국을, 질서죠. 구체적 질서로 전환을 시켜보겠다는 겁니다.
이건 대전서 강의할 때 로마서 1장 20절 할 때 제가 했습니다. 여기에 동원되는 것이 뭐라 했느냐? ‘합리화’라 했죠. 오전에 시간 있을 때 꼭 한번 들어보세요. 합리화에 동원되는 것이 뭐냐 하면, 이성이죠. 이성을 합리화 신학, 특히 조직신학이 나오죠. 이 조직신학은, 신학 자체는 교회를 위해서. 흔히 교수들이 상투적으로 무심코 툭툭 나온 말이, 신학이란 신학을 위함이 아니라 교회를 봉사하기 위함이다. 교회를 위함이다. 이런 말이 툭툭 나오지요.
그러나 신학은 예수를 위함이지, 교회를 위함이 아니라고 이야기한 사람이 한스 큉. 한스 큉이라는 카톨릭에서 파문당한 사람. 한스 큉은 교회조직, 제도, 이것이 역사적으로 분석해 들어가면 해체시켜보면 남는 게 아무것도 없다 이 말이지요.
한번 고구려라고 그 뒤에 계속 고구려일 수 없고, 주몽 아들이라고 주몽일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아버지가 주몽이지, 아들은 주몽이 아니잖아요. 유리 왕이잖아요. 같을 수가 없다 이 말이죠.
이건 동양사상에서는 이미 보편화 된 겁니다. 서양에도 파르메니네스가 그런 철학을 이야기했지요. 흘러가는 강물에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씻을 수 없어요. 발 씻고 들어가 또 발 씻어버리면 이미 내가 먼저 발 씻었던 물은 저 십 미터 밑에 떨어져가고 있고, 새로운 물에 내 발을 새로운 물에 발을 씻는.
자연세계라 하는 것은 모든 것이 변화하는 거예요. 변화하는데 여기도 동양사상에서 변화한다, 그냥 흘러 떠내려 간다가 아니라 변화하는데도 나름대로의 고유의 질서가 있다. 그걸 가지고 동양에서는 뭐냐? ‘순환’이라고 하죠. 순환자체가 신이 될 때 이걸 천지신명이라 하지요. 이러한 신 개념, 이러한 하나님 개념은 한국민족 심성에 교회 다니는 심성에 그대로 다 들어있습니다.
이 순환되는 것을 커브가 파동이 이래 칠 때 파동이 축복받는 파동 때나 낮아진 파동이냐 이걸 따지는 거예요. 이게 점쟁이들, 사주팔자 보는 사람들, 이걸 빼줘요. 이게 꼴아 박을 때를 피하고, 업 될 때 그때를 때를 잡아서 주식을 투자하든지, 땅을 사든지, 이사를 하든지 한다고.
그러니까 고리, 간단하게 단순하게 고리 한 개만 있는 단순 고리 아니고, 여러 고리 겹치니까 정치적 고리 겹치니까, 그 고리 자칫하면 상쇄되어서 날아가 버리는 수가 있고, 운만 좋으면 이 고리에다가 또 고리를 하나 더해서 곱빼기 파동이 커지는 수가 있잖아요. 그걸 그때를 잡아줘서 점을 쳐주는. 타로 카드라든지, 여러 가지, 점쟁이들이 이제 이 파동을.
모든 변화가 파동이 있다는 말은 천지신명의 조화고, 순환이고. 이 순환은 어디서 나오는 거예요? 인간의 이성에서 나온 거지요. 인간의 이성이라는 것은 아주 고상하게 말해서 이건 뭐냐? 통계지요, 통계학. 확률, 통계. 그래서 신세대 점쟁이들은 말합니다. 우리는 무당이 아니다 말이죠.
통계에 입각해서 근거해서 확률적으로 높은 그런 시점을 제시한다. 무당은 안 되는 운명을 억지로 바꾸려는 건, 이건 무리다. 우린 그런 사기꾼이 아니고, 이거는 모든 자연조화는 올라갈 때 있으면 내려갈 때도 있고, 내려갈 때도 있으니까 그 고리를 잘 해서 이때 투자하시면 됩니다. 라고, 고건 양반은 다음에 나오든지 지금 나오면 안 되고. 이런 식으로 조정해주는 거예요.
그걸 천지신명 같은 이런 인간이 이성이 있는 사람은 순환구조를 찾기 마련이고, 그 순환구조 찾는데 천지신명이라는 것은 상당히 이건 모호하잖아요. 그런데 교회 목사들은 이걸 모호한 신이 구체적인 예수라는 신으로 나타났다. 주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는다가 아니라 주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는다. 이렇게 되잖아요.
그 모든 예수에 관한 예수가 누군지 모르지만 자기가 기존에 확정돼있는 이러한 심성을 그냥 천지신명이란 이름으로 바꿔치기에 들어가죠. 주님, 예수도 싫어해요. 주님이에요. 주님의 뜻으로 해 달라. 그 고리를. 어느 때가 적당합니까? 지금 뭐 해야 됩니까? 고리를 하는 거죠.
이것이 바로 이 합리, 아주 무식한 민중들의 대중들의 그러한 모호하지만 어떤 질서를 지향하는 질서를 얻고자 하는 그것을 좀더 이렇게 아주 체계 있게 합리화시켜줄 때 그때 이건 하나의 조직신학이 되고, 특히 조직신학에서 강조되는 것은 이제 구원론이라든지 성령론, 또는 교회론 이런데 관심이 있겠지요. 그 구체화시키는 이러한 인간들의 민중들의 심성을 영적 권위로서 안심을 안도하게 하기 위한 어떤 합리적인 체계를 잡아주는 것이 교회다 말이죠.
그런데 교회라 하는 것은 이미 이러한 천지신명에 비는 식으로 효과 봤던 사람들의 A체험, A라는 사람의 체험, B라는 체험, C라는 체험. 체험들, 체험들 뭉쳐서 우리 교회 질 때는 하늘에 일식이 일어났다든지, 우리 교회 질 때는 장로가 꿈에서 예수님이 나타났다든지 이런 신적인 체험들을 모아 모아서 교회가 역사적으로 권위를 지니게 돼요. 이 권위에 대해서 또 우려먹고. 후배 목사들이. 어거스틴 나오면, 칼빈 나오면, 루터 나오면, 그걸 우려먹으며 루터 이름으로 우려먹고 장사해 먹고.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성을 가지고 합리화하는데 이미 인간의 바탕은 천지신명이고, 다만 천지신명은 모호하기 때문에 A체험, B체험을 끌어 모으는데 A체험, B체험이 여기에다가 인간 체험이라면, 여기에 유명한 권위 있는 체험이 더 추가 되지요. 이게 뭐냐 하면,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체험과 제자들의 체험, 사도들의 체험이 여기 덧붙여져서 교회가 만든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성경에서 사도와 선지자의 터 위에 교회가 세워진다. 그다음에 너희들만 성령 받은 것이 아니고, 오늘날 우리 교회 이런 분들도 성령 받았다. 하는 것이 정당화 될 수 있어요. 그러니까 교회의 문제점이 뭐냐 하면, 교회가 성경에서 예수님이 말하는 교회가 아니라 이미 기존적으로 인간들이 자기 나름대로의 교회가 서 있다는 것을 고려를 안 해요. 사람들이.
지금 이 책을 쭉 읽어봤는데 팔 번에 래드의 [하나님나라와 교회] 읽어봤는데. 읽어보셨습니까? 급작스럽게 뭘 봤습니까?
쭉 읽어보면, 근본적으로 내가 만약에 이 챕터에 글을 쓴다면, 인간들의 기존적으로 이런 천지신명에 입각한 천국관이 있어요. 하나님나라 관이 있다고. 그리고 인간들이 기본적으로 성경 덮어버리고도 나올 수 있는 교회관이 있어요. 그것을 언급하고, 그 다음에 유대교에서 말하는 남은 자 개념. 이것 약간 언급했어. 토라라는 거, 약간 언급했는데 토라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지도 않았어요. 여기서는.
유대인들이 나름대로의, 유대인들은 엉터리 신 아닙니까? 나름대로의 여호와의 감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장차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할 때 예수님이 오실 그때에 유대 지도자들이 어떤 식으로 하나님의 왕국과 그 하나님의 택한 선민의 공동체를 구상해 왔든가 그런 것을 여기다 넣어야 돼요. 그런 걸 넣어야 된다고.
간단히 말해서. 천국이 있다 하면 사람들이 동의하면 되는데, 천국은 인간들이 지점지점 각자각자 만들어낼 재주들이 있어요. 그런 것을 고려 안 하고 천국과 교회가 과연 맞는가 안 맞는가? 하나로 어떻게 연결되는가? 연속성이 있다, 불연속이 있다. 이렇게 나와 버리면, 저도 신학교 때 봤습니다만, 신학생이 왔을 때 이 책을 보면서 내 속에 있는 천국과 성경에 있는 천국이 어떻게 다른가? 그런 것을 생각할 어떤 기회조차 안 주는 거예요. 이 신학 책들이.
저도 뭐, 신학교 때 이런 생각을 감히 못 했습니다. 지금 신학교를 졸업한지 20년이 넘었지요. 20년이 지난 후에야 야, 이거. 그저 한국교회 썩었다, 썩었다, 썩었다, 썩었다 했는데 가만 보니까 왜 썩었다고 이야기하면서 계속 썩은 교회가 나올 수밖에 없는가? 그 원천에 대해서 누구 하나 이야기하는 사람 없더라.
그것은 인간 자체가 아무리 신학을 많이 해도 인간 자체가 따로 뭔가 생산해 내는 게 있더라. 인간이 만든 천국이 무엇이며, 인간이 만든 교회가 무엇인가? 그게 가상 천국, 가상 교회가 이미 있는 이상, 그런 것을 고려하지 않고 그냥 천국과 교회를 연결시키려고 아무리 성경구절, 공관복음, 마태복음 다 뒤집어도, 그것은 아무 짝도 소용없는 거예요.
대구 수성구에 보면, 동신교회가 있습니다. 그 동신교회 당회장 이름이 권성수라는 사람인데, 그 권성수라는 사람이 계약을 했어요. 올 때 내 연봉 얼마 주고, 사택 몇 평짜리 주고, 내 시키는 대로 다 해라. 단 그렇게 하면 나하고 계약을 하자. 내가 삼천 명 모아줄게. 이렇게 됐어요.
교인들은 목사가 기도 많이 해서 저희들은 가만 앉아 있기만 하면 다 되는 줄로 삼천 명 그냥 나와서 삼천 명 되면 헌금 나올 테니까 성과급이 아니잖아요. 갈라먹기 하면 된다 말이죠. 장로들은 교회 챙기고, 그중 일부를 목사 수고했다고 성과급으로 CEO니까 경영자니까. 이렇게 간단히 생각했는데,
삼천 명 모으는데 목사가 이렇게 혼자서 삼천 명 모으는 게 아니고, 설교를 잘한다든지, 여리고 작전을 벌여서 새 아파트단지니까 교인들을 하루도 빠짐없이 그 여리고성을 뱅뱅 돌아야 여리고성이 무너지잖아요. 그래서 아파트단지를 교인들이 매일같이 뺑뺑 도는 거예요.
돌 때 한 파트는 한 조는 기도하는 조로 교회 계속 기도하고 있고, 돌 때 영발 없으면 안 되니까 기도하면서 영발을 이렇게 공간을 뛰어넘어서 투사를 하게 되면 돌면서 도는 쪽에 힘이 나서 잘 돈다 말이죠. 그러면 메트로폴리스라는 그 아파트단지는 와르르 들어온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그러면 이 말은 듣고 목회자들이 우리도 한 조는 기도조로 반 나누고, 나중에 기도 조를 바꾸죠. 기도는 쉬우니까. 밖에 나가면 우사스럽잖아요. 온갖 인간관계 하에 얽혀 있으니까. 바꾸고 하는데. 이 소리를 들은 목회 성공을 바라는 목사들은 순수하게 아, 교인들은 그렇게 하라면 되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그건 그렇게 하면서 그 다음에 아파트에다 거울에다가 동신교회 거울 다 걸어 놓는데.
그런데 이 권성수 이 사람이 뭘 놓쳤느냐 하면, 라이벌이 옆에 있다는 사실을 모른 거예요. 대광교회에서 이제는 누가 거울을 설치하느냐의 쟁탈전이 벌어졌어요. 조선일보 넣을 거냐,중앙일보 넣을 거냐 싸우듯이, 북경반점 들어올 거냐 아니면 장안루가 들어올 것이냐 그 광고지 싸움하듯이 들어온 기라.
아파트에 들어오는데 거기에 거울 하는 것 떼어버리고, 대동교회 넣은 것 떼어버리고 동신교회 난리 났어. 그래서 아파트 결정하기를 둘 다 떼게 되었어. 다시 말해서 돈 내라 이 말이에요. 돈만 내는 게 아니라 돈도 내야 되고 돌아야 되고 해야 되고. 목사 지는 팔짱 끼고 앉아 있고. 삼천 명. 가만, 목사 지는 그냥 있는 기라.
그러니까 권성수가 총신에 교수했던 사람이고 지금도 강사나 할 것 아닙니까? 지금 교수잖아요. 교수가 래드처럼 모르겠어요? 성경신학 교수인데. 모르겠어요? 그럼 그 사람이 지금 뭐가 문제입니까? 뭐, 어떻게 잘못했어요? 그 사람은 기본적으로 교회가 뭔지 모르고, 천국이 먼질 모르는 거예요. 그러니 래드하고 똑같은 거예요.
그냥 교회가 천국의 모형이고 닮았느냐 성경구절 동원해서 연결시키면 되는 줄 알지만, 이 천국이 엉터리 천국이고 이 교회가 엉터리 천국이라 하는 것을 본인이 그렇게 한번도 생각할 수가 없지요. 왜? 하나님의 열심 없이는 지옥을 못 가니까. 하나님이 노력해야 지옥 가니까. 하나님이 가로 막으니까 아무리 박사학위 받아도 소용이 없는 거예요. 이게. 내 천국이 어디서 잘못된 천국이냐를 모르는 거예요.
래드가 학자기 때문에 나처럼 이렇게 직접 따지진 못하지만 본인도 잘 모르지만, 이 책에서 이것 하나는 희미하게나마 자신도 모르게 내가 보기엔 그게 보이지만, 자신도 모르게 그걸 드러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이 책에 보면, 남은 자 개념에 있어서 두 종류가 있다는. 래드는 지금 이 이야기를 뻔한 이야기인데 자기는 공부 많이 해서 선배 성경신학자들 공부 많이 해서 알은 거예요. 희미하게 뭔가 오는 거예요. 중요하지는 않다고 보지만.
뭐냐 하면, 남은 자 개념에 유대인의 남은 자 개념이 있고, 예수님의 남은 자 개념이 따로 있다. 라는 사실을 여기서 기억을 했다고. 이게 얼마나 중요한 건데 이 사람은 기존의 신학자들이 이야기하니까 중요하다고 느끼면서도 왜 중요한지, 그냥 써 놓은 거예요. 학자니까 좋은 소리는 다 실어놔야 학자로서의 흠집이 안 나잖아요.
구약의 남은 자 개념이 그러니까 구약의 남은 자 개념은 뭐냐 하면, 세대주의자하고 다투면서 세대주의자는 이런 쪽이에요. 간단히 예를 듭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너무 무섭더라. 그런데 신약의 예수님은 너무 착한 분이더라. 하나님은. 따라서 구약과 상관없이 구약에는 이런 뜻이다. 하도하다 안되니까 사랑을 보냈다. 이런 식이거든요.
세대주의가 성경 전체를 보면서 구약의 하나님은 너무 무섭게 하니까 사람들이 기가 죽어서 말씀을 못 지키니까 안 된 걸로 확인하고, 신약에 와서 아이고, 사랑해 줄게. 해서 구원받았다는 겁니다. 이게 세대주의가 이런 식으로 신구약을 이렇게 구약은 복음도 아니지요. 복음에 대한 몽학선생 정도지, 복음은 아니다 이 말이죠.
여러분, 몽학선생이 복음입니까, 복음이 아닙니까? 갈라디아서. 율법이 몽학선생인데. 그게 복음이냐, 복음 아니냐? 이게 굉장히 어려워요. 여기에 깊은 논리가 포함이 되어 있어야 됩니다. 왜냐하면 율법이 만약에 복음이 아니라면, 구약을 우리가 볼 필요도 없고 봐서도 안 되고 버려야 되는 문제에요. 그리고 율법이 만약에 복음이라면, 율법을 믿는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율법을 행한다는 뜻입니다. 결국은 뭐냐 하면, 율법 행하면서도 구원받고, 복음을 믿으면서도 구원받는, 구원받는 루트가 통로가 두 개가 생겨버려요. 두 개가 생긴다고.
어느 쪽으로 설명해도 갈라디아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몽학선생이라는 말이 그 본문에서는 마치 다 해석이 되는 것처럼 그렇게 느껴질 거예요. 착각이죠. 신직수가 이런 이야기했잖아요. 죄를 누가 만들었느냐? 하는 그 이야기했단 말이죠. 그것 할 때 제가 리플 단 것 보셨습니까? 제가 설명하고 상당히 힘들 게 설명할 수밖에 없지요.
대전에서 강의할 때 이런 것 했지요. 오렌지하고, 사과하고 그 다음에 테니스공하고 또 무슨 공? 럭비공이라 했지요. 테니스공하고 럭비공하고 같이 묶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지요. 왜 같은 공이니까. 오렌지하고 사과하고 같이 묶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묶을 수 있지요. 왜냐하면 과일이니까. 오렌지가? 오렌지, 사과? 참외다. 참외하고 럭비공하고 묶을 수 있지요? 왜냐? 타원형이니까. 그 다음에 오렌지하고 테니스공하고 묶을 수 있지요. 왜? 같은 구형이니까. 같은 동그란 공이니까.
범주가 범주 층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버리면 사람들은 논리적으로 손을 들어버려요. 해석이 안 돼서. 논리 층들이 해석이 안 되면 손을 들어버린다고. 갈라디아서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율법을 이야기하는 것은 이 율법이 이미 복음 안에 들어온 율법이란 말이죠. 복음 안에 들어온 율법이고, 유대인들이 생각한 율법은 전혀 복음을 이단시한 상태에서 율법 범주에요. 범주가 다르다니까. 다른 범주를 둘 다 설명을 다 해줘야 돼요.
만약에 설명을 안 해주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구약성경은 필요 없는 세대주의처럼 되는 겁니다. 세대주의자들의 근본적인 잘못은 뭐냐 하면,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이다. 이 하나님부터 우상 하나님 아닙니까? 무슨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 못해 환장한 하나님 같으면, 처음부터 지옥을 만들지 말고 처음부터 에덴동산에서 추방하지 말아야 돼요. 왜 추방하는데 사랑의 하나님이, 고생할 줄 뻔히 알면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가 새로운 범주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새로운 범주는 뭐와 충돌을 일으키느냐 하면, 범죄하고 난 뒤의 인간, 땅에서 만든 천지신명과 합리적인 조직신학과 이런 인간들이 납득이 되는 범주하고 대충돌이 일으키기 위해서 주께서 새로운 범주를 제시하는데, 그 충돌이 야기된 사건이 뭐냐 하면, 십자가 사건이죠.
그러면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양쪽 진영이 다 갖고 있는 인간들의 합리적 사고방식, 그 양쪽 다를 알아야 되지요.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었다는 말은 죽게 한 그 인간이 갖고 있는 무기도 알아야 될 것 아닙니까? 그 무기라 하는 것은 창이 아니에요. 인간의 사고방식이잖아요. 인간의 언어지만, 언어라 하는 것은 사고방식을 깔고 나오니까.
인간의 사고방식 전부가 십자가를 모독한 거라면 십자가를 알려면 뭘 알아야 됩니까? 인간의 사고방식을 알아야 되는 게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인간의 사고방식은 뭐냐? 과학과 철학과 이런 모든 기술과 이런 윤리와 도덕, 그쪽 내막을 알아야 되잖아요. 그쪽 내막을 알고, 그 다음에 예수님으로부터 오는 남은 자.
남은 자 중에서 유대인의 남은 자와 여기 이 책에는 예수님, 사실은 유대인의 남은 자라 하지만 이 배경의 유대인은 인간들의 대표니까 인간들의 남은 자. 인간들의 모든 심성에 남은 자. 지금은 래드의 남은 자, 저자가 생각하는 남은 자도 유대인의 남은 자 포함되겠지요.
예수님이 생각한 남은 자는 예수님 밖에 몰라요. 심지어 누구도 몰랐어요? 예수님의 제자들도 몰랐습니다. 예수님의 남은 자 개념을 예수님의 제자들도 몰랐고, 심지어 예수님의 교회라 하는 것도 베드로가 몰랐어요. 네 위에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라. 해놓고 베드로가 돌아서서 뭐 합니까? 주여, 그러시면 안 됩니다. 했다고. 네가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 일을 생각하지 않으니, 사탄아, 물러가라. 했다고. 더 영적으로 나가면 인간의 생각은 악마의 생각, 악마의 사고방식. 그렇게 되잖아요.
그러니 남은 자 개념, 여기 또 나와요. 뭐냐 하면, 남은 자, 이 책에서 지금 이 책에서 끄집어낼 것, 좋다는 것 다 끄집어내요. 이 책을 쓴 사람들 해서 이거는 복음에 유익하다 하는 것을 제가 나름대로 편집해서 끄집어낸다고. 수고를 해야 된다고.
그 다음에 뭐냐 하면, 연속성 문제. 연속성 문제에서 여기서 유대인이 말하는 연속성이 있고, 예수님이 말하는 연속성이 따로 있어요. 양쪽 다를 알아야 된다고. 그런데 사람은 유대인의 이걸 자꾸 버리려고 하는 거예요. 목사님, 이미 십자가사건에서 끝난 이야기인데 왜 자꾸 거론합니까?
십자가사건은, 그 문법적 해석과 역사적 해석과 기독론적 해석, 이 세 가지 전부다가 이게 지금 이단적 사고방식이라니까. 이게 전부다 이단적 사고방식이에요. 왜? 주체를 숨기거든. 그야말로 은밀하거든, 주체를. 기독론적 해석이라는 게 주체를 숨겨요. 주체를 숨긴다고.
그저 2월 24일 강의할 때 아마 참석인원이 내 예상에는 두 명, 세 명, 한 명이지 싶은데. 다 스케줄 있는데 하겠어요? 하여튼 간에 하는데. 이 문법적인 지층이 있잖아요. 문법적인 지층은 언어적 구조잖아요. 대식 씨가 시스템언어라고 했는데, 구조적인 언어요. 밑에는 뭐냐 하면, 인간의 존재론이 나옵니다. 말이라는 것은 나, 여기 있소. 라는 외침이에요.
그 개콘에 나오는 [대화가 필요해] 있지요. 대화가 안 되니까 밥 먹어도 시체들 아닙니까? 아버지예. 형민아. 너 요새 이래 나오나. 밥 먹자. 그 여자가 하는 씨부리 쌌고. 부산말 그대로 나오데.
언어라 하는 것은 한 사람이 있을 때는 아무 말 안 해도 돼요. 그러나 두 사람이 있을 때 내가 살아있다는 걸 표현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상대방에게 말을 건넴으로 살아있다는 거예요. 이게 하이데거의 철학입니다. 하이데거는 존재가 말을 걸어온다는 거예요. 말을 건넴.
이 존재가 말을 걸어온다, 이 존재라는 말 대신에 하나님으로 본 사람이 에벨링, 그 다음에 불트만이에요. 하나님이 말을 건네 오고, 거기 대해서 나오는 것이 응답. 응답함으로써 비로소 하나님과 우리가 교제한다. 말을 건네는 이걸 가지고 말씀이다, 로고스다. 이렇게 봐요. 불트만은 이렇게 본다고. 이게 하이데거의 철학에 나온 거예요.
존재는 은닉되어 있어요.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존재는 가만있질 못해요. 존재는 존재자에게 말을 건넵니다. 존재자라 하는 것은 인간이죠. 인간, 돌, 돼지죠. 모든 돼지. 그걸 언약적으로 말하면 노아언약이죠. 언약 속에 소와 양, 말, 전부다.
그래서 하이데거의 말이 맞는지, 틀린지 확인해 보려고 하면, 남의 집 개하고 우리 집 개 차이점이 뭡니까? 사실은 차이점이 없어요. 그런데 우리 집 개는 나에게 꼬리를 흔들고, 남의 집 개는 짖지요. 생물학적으로 과학적으로 기술적으로 아무리 현미경 들여다봐도 왜 꼬리를 흔드는가가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안 나오지요. 그러니까 과학이 진리 맞습니까, 아닙니까? 과학이 진리 전부는 아니지요. 왜? 개가 꼬리 흔드는 건 안 나오니까. 개꼬리 흔드는 건 안 나온다 이 말이죠.
개가 아프다. 수술하자. 이건 과학 맞잖아요. 과학이 필요 없는 건 아니지요. 하지만 과학이 전부를 설명해 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절대로 안 되는 거예요. 왜 개가 꼬리를 흔드는가? 그거는 과학 말고, 과학자 들으면 기분 나쁜데, 과학 말고 다른 분야에서 설명하는데 이게 뭐냐? 말을 건넸다 말이죠. 말을 건네고 개는 거기에 대해서 응답하면서, 응답이 뭐냐? 말을 건네는 거예요. 서로가 말을 건넬 때 그것은 혼자 있을 땐 말을 안 하니까 이것은 상대 때문에 그렇죠. 둘 다 존재의 기반을 갖고 있다.
이것이 이제 좀 더 깊이 들어가면 폴 틸리히 신학이에요. 존재의 기반에서 나온다 이 말이에요. 그런데 이게 방금 이야기한 불트만, 불트만은 약가 그렇지만, 여기 틸리히 같은 철학이 세상에서 아주 좋아해요. 브라운대학 미국에 그런 유명한 대학에서 조직신학 아주 좋아 하는데. 틸리히의 이런 철학과 하이데거의 철학의 공통점이 뭐냐 하면, 아까 처음에 강의했습니다. 인간의 죄를 기본 논리로 설정하지 안 해 놨어요. 이게 악마와 결탁된 사고방식에서 나왔다는 것을, 존재를 아무리 파고 들어가도 안 나옵니다.
현미경 들여다보면 죄 나옵니까? 안 나오잖아요. 마찬가지로 철학 깊이 들어가면 죄 나옵니까? 안 나와요. 죄 안 나오고 뭔가 이상하다는 거예요. 죄 안 나오고 뭐냐? 뭔가 이상하다는 것, 그게 뭐냐? 키에르케고르는 불안, 초조, 갈등, 우울증. 왜 슬프냐? 모르겠다. 부정, 이런 개념 나오지, 죄의 개념은 나오질 않아요. 뭔가 손해 본. 그걸 불교에서는 뭐냐 하면, 왜 태어나며, 왜 죽으며, 왜 고생하며, 왜 아프냐? 생노병사의 그 미지수가 물음표가 나올 뿐이죠. 죄는 안 나와요. 죄는 안 나온다고.
교회가 죄로부터 나와서 죄를 보여주지 못한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십자가 안에 은닉되어 있어요. 천국은 반드시 십자가로만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꺼버리세요. 끄세요. 이 마이크, 앰프가 죄를 지었구나.
참고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인간의 고통, 불행, 괴로움, 이거 전부다 주관적입니다. 다 주관적이에요. 축구할 때 한 골 넣고 난 뒤에 상대방 진영은 울고불고 난리 나고, 저쪽은 좋아서 날아가고 난리에요. 얼마나 주관적입니까? 똑같은 사태가 벌어졌죠. 사태 그 자체, 똑같은 사태인데 한 골 넣었다는 사태, 사건이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대한 한 쪽은 슬픔을 느끼고, 한 쪽은 기쁨을 느낀다는 것이 평소에 인간들은 자기가 행복하다, 진리다 하는 게 얼마나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냐 말이죠.
그것을 매일같이 그 주관을 때려 부수고 예수님의 주관만 고추 세우는 바딱 세우고 부각시키는 곳이 성령을 통해서 나타나야 그게 바로 교회입니다. 두세 사람 있는 곳에 내가 나타나야 돼요. 주님이 있음이 나타나야 돼요. 노아방주에 여덟 명 들어갔지만 그 방주 출발했습니다. 지체하지 않았어요. 어이, 좀 더 태우자! 이런 거 없습니다, 그냥. 그냥 때가 되매 여덟 명이 탔어도 방주요, 두 명 탔어도 방주요, 팔천 명 타도 방주요, 그건 뭐, 방주는 사람 수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이게 언약의 특징은 사람 수에 연연하지 않아요. 여기에 팔 번에 나왔습니다만, 적은 무리여, 두려워하지 말라, 나오죠. 아, 그거 참, 그 말씀이 참 좋아요. 이것은 숫자 적어도 참으라는 말이 아니고, 근본적으로 천국은 숫자 적고 많고 그 범주와 상관없는 새로운 범주를 형성한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오늘 공부할 게 많아요. 범주론도 이야기해야 되니까.
숫자 적다고 기죽지 마라가 아니라 숫자가 적다고 하면, 요시, 나중에 한번 숫자 키운다. 이러면 그거는 노는 동네가 맨 아래층이라. 그거는. 숫자 많고 적고 아래층에서 논다고요. 이건 다른 범주라고. 적어놓으세요. 이 책에 없으니까.
천국은 중심이 없어요. 중심이 따로 없다. 천국에 중심지가 따로 없어요. 모델교회라는 게 없습니다. 모델인간도 없어요. 누굴 본받자 하는 것도 없어요. 왜? 안 본받아야 돼요. 우리는. 우리는 죄인이 죄인대로 드러나야 되지, 누굴 본받으면 안 돼요. 예수님은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나를 본받고, 예수님을 본받으라 하는 것은, 사도 바울이 지금 누굴 지향하고 있느냐를 본받으라는 이 말이에요. 내 중심이라는 말이 아니고.
그런데 그런 천국의 범주를 사도 바울 같으면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어떤 사람을 아는데 그 사람은 삼층천에 올라갔지요. 그 사람이 본인이면서도 그때는 언어, 말로 표현이 안 되기 때문에. 그 사람에 대해서 관심두지 말란 말이죠. 그래서 내가 이야기하지 않고 내가 어떤 사람을 하나 아는데 하고, 어떤 사람에 대해서 중심이 없는 것이 천국의 특징입니다.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지요.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란 중심이 시간과 공간 개념의 범주에 들어올 때는 이게 중심이 없이 들어와 버립니다. 그게 현대물리학에서 과학에서 그런 흔적을 찾아냈어요. 이게 뭐냐? 상승원리라는 거예요.
일반상대성원리에 들어가면 시간이 절대시간, 절대공간이라는 게 없어요. 전부다 상대적이에요. 니 시간하고 내 시간이 달라요. 시간이 다르다고. 전에는 시간은 이 시간에 저 사람이 어떻게 할까? 그걸 내가 있는 이 시간과 부산에 있는 내 시간과 이 시점의 대구의 시간과 똑같은 시간이라고 본 거예요.
블랙홀에 가면 블랙홀 중심에 가면 시계가 안 갑니다. 시계가 안 간단 말은 목사님, 고장 났습니까? 아니에요. 고장 난 시계가 아니고, 잘 나가는 시계라도 고장 안 난 시계도 시계가 안 갑니다. 상상 갑니까? 상상 됩니까? 도저히 상상 안 되지요. 이걸 물리학에서 특이점이라 하는데,
여러분. 시간이 안 간다는 말이 시간이 안 흐른다는 말이 이게 시적으로는 가능한데 실제로 가능하다고 여러분 생각됩니까? 목사님, 그게 말이 됩니까? 시간이 안 간다니. 내가 아무것도 안 한다면 그건 말이 되고. 아, 시간 참, 더디 가네. 시간이 퍼뜩 걸렸나. 이렇게는 되는데, 아니 우리 감정 말고 시간이라는 느낌, 의식 말고 실제로 시간이 초침이 안 간다니까요. 고장 안 나고 밧데리 잘 돌아가도 안 가는데. 우리 의식이 확실치 않는데 보니까 맨 한 시간 안 갔어. 여러분, 상상 안 되지요? 이게 4차원세계 아닙니까? 그런데 이게 실제로 블랙홀 근처에 실제로 그렇게 돼요.
상승원리에 의하면, 우리의 몸집이 속도가 빠르면 우리 몸집이 늘어나요. 세포, 세포 사이가 커진다니까. 이게 또 상상이 안 되잖아요. 우리가 3차원의 인식과 그런 범주 안에 있다보니까 4차원도 인식이 되지 않은 것처럼.
그래서 성경 말씀을 가지고 3차원으로 풀려고 하는 사람들이 뭐, 어찌 그럴 수 있습니까? 맨 날 어찌 그럴 수 있습니까? 맨 날 예수님 말씀에 바다가 잔잔할 수 있습니까? 맨 날 그런 소리하는 거예요.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날 수 있습니까? 해가 왜 어두워집니까? 이런 식으로. 여호수아가 해가 멈출 수 있습니까? 라든지,
동방박사가 어떻게 별이 요만한 것도 아니고, 어떻게 별이 떴다 하면 여기 하단에 가도 그 별이 있고 대구 가도 그 별인데. 그 정도로 별이 크잖아요. 멀리 있고. 그런데 어떻게 별이 작대기도 아니고 꼭 집어서 어떤 특정 마구간에다 딱 집어, 이쪽 마구간도 아니고 요쪽 동정녀 마구간에다 집어넣을 정도로 작으려면 어느 정도 작아야 돼, 도대체. 별인데. 그게 형광등 같으면 따 버리지, 아예. 그게 진짜 별인데. 상상이 안 되잖아요. 모든 게.
천지창조부터 상상이 안 되지만, 그것보다 더 상상 안 되는 게 뭐냐? 우리를 죄를 주님의 피로 용서했다는 사실, 이거는 정말 상상이 안 되죠. 실험을 해보세요. 지랄발광을 해보세요. 죄 짓기 위해서. 용서 다 됩니다. 이게 정말 놀랄 지경이에요.
그래서 복음의 이 놀라운 가치를 누가 훼손하고 무시하느냐? 복음 전하는 목사들이 훼손하고 무시해요. 왜? 남들 안 알아주니까. 벌벌 떨고 있는 기라. 복음 앞에 벌벌 떨어야 될 우리가, 자기가 품고 있는 그 보물의 가치는 엄청남을 깨닫지 못하고 남들이 안 먹어준다고 상대방한테 고개 숙이는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안 돼요.
남은 자 개념의 두 가지 개념은 연속성 개념인데 결국은 이것은 뭐냐 하면, 래드의 이야기는 어디에 초점이 있느냐? 이거 학자들인데, 연속성 개념에다가 모든 천국과 교회의 연결고리를 연속성개념으로 바꾸는 겁니다. 말이 어렵지요.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천국이 교회 안에 들어오느냐, 아니면 교회가 천국 안에 들어가야 될 거냐? 아직까지 미 천국이냐, 완료된 천국이냐? 하는 일반교인들의 모든 문제를 학자들은 어떤 특정 시점에서 특정 공간에서 이 교회가 천국입니까, 아닙니까? 천국이 일부 포함되었습니까, 몇 % 포함됐습니까? 이렇게 묻는 일반교인들의 그 아쉬움을 학자들은 이렇게 일반시점으로 보는 게 아니고, 구약과 신약이 연결점이 되느냐, 안 되느냐를 이 문제를 이렇게 전환시켜서 해결을 본다 이 말이지요.
그건 다 이유가 있어요. 왜냐하면, 현재 이 교회가 천국 맞다. 라고 해버리면, 이게 2007년도라면 2007년도에서 교회라고 확정지었다고 할지라도 2008년도에 교회냐, 안 교회냐 2008년에 또 정해야 돼요. 따라서 지금 어떻게 모습을 드러낸다고 교회라고 볼 수 없고, 기본적으로 무슨 본질, 어떤 본질을 추구하고 현재 이 교회가 추구하는 그 본질, 본질은 변하지 않거든요. 세월이 가도 변하지 않는 그 본질, 그 본질이 예수님이 생각하는 천국과 일치되느냐를 통해서 내년 되도 2008년 되도 교회입니다. 라고 확정짓기 위해서는 본질 문제를 이루어야 되고,
그 다음에 본질 문제는 천국 추구합니다. 라고 우긴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고, 이 본질 문제는 성경에서 말한 예수님이 말한 교회 본질과 일치될 때 이 교회는 천국 같은 교회라고 확정지을 수 있다 이 말이죠. 왜냐하면 신학자들이 그렇게 해야 기존교회 봉사할 수 있으니까. 저, 유명한 학자님, 우리 교회 맞습니까? 본질이 뭡니까? 아, 맞네요. 이렇게 서비스를 해 줄 수 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교회의 본질을 이야기할 때 여기서 세대주의처럼 두 가지 견해가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사람들한테 맡겨놓으니까 안 되더라 이 말이에요. 일이. 공동체가 하나님이 선택된 공동체가 안 되니까 아이고, 이 놈들아. 내가 할게. 해서 신약에 했다는 거예요. 구약을 일단 읽고는 버리는 책이다 이 말이죠. 이게 세대주의에요.
여러분, 편지에 이틀 뒤에 제가 여기 오겠습니다. 하고 쪽지를 어떤 지나가는 사람이 이 성문교회에 오겠습니다. 하고 쪽지를 남기고 갔어요. 목사님이 쪽지를 봤습니다. 이틀 뒤면 일요일인데 오시겠구나. 했단 말이죠. 이틀 뒤에 주일날 왔어요. 그럼 그 쪽지는 계속 있어야 됩니까, 버려야 됩니까? 버려야지요. 이제 이해되십니까?
세대주의가 이게 뭐예요? 구약은 뭡니까? 예언이지요. 예수님 왔으면 그럼 뭡니까? 몽땅 버려야 되는 거예요. 지금 왔는데 본인 왔는데 왜 쥐고 있어요. 세대주의는 뭐냐? 구약과 신약은 지금은 연속성이 없는 거예요. 예수님이 새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것도 유형교회 실패했기 때문에.
그럴 때 래드나 이런 학자들이 말하기를 내가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다는 말이, 성립이 안 되잖아요. 그거는 잃어버린 양이 찾으러 왔다 이 말이에요.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야기하면 최종적으로 맞아요. 나는 이스라엘 중에서 잃어버린 양도 찾고, 그 다음에 이방인들도 채우고. 이러면 세대주의자들도 그 점에 대해서 동의하겠지요.
유대인들이 실패했는데 일단 우리는 이방인들을 만들고, 실패한 것 중에서 몇 명 괜찮은 놈 있으면 뽑아서 여기까지 됐는데,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나는 이방인에게 가지를 않았다는 거예요. 말씀을 하실 때 이거 모으고, 저거 모으고 아니라 나는 이방인을 위해서 온 메시아가 아니라고 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건 뭐냐 말이죠. 뭐냐? 그러면 구약 속에도 이미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 있을 게 아니냐 말이죠. 그래서 학자들은 뭐냐? 아까 이야기한 남은 자 개념에 주목하게 된 거죠. 아시겠습니까? 남은 자 개념을 주목하게 되면, 세대주의자들이 남은 자, 우리도 인정한다. 여기서 이야기는 그 의미가 아니고, 구약 때 남은 자 개념을 주께서 남은 자 위주로 메시아 되셔서 오셨다면, 이게 오늘날도 남은 자만 건진다는 말이 유효하다고 보는 거예요.
그런데 세대주의자들은 그거는 그때뿐이고, 지금은 온전한 교회가 구원받는다는 겁니다. 이제는 남은 자 개념을 구태여 우리한테 적용할 필요 없다는 거예요. 한때 적용했지만. 우리는 전부다 예수 믿는 사람인데 거 왜 남은 자 하느냐 이 말이고, 학자들은 그게 아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그렇게 생각하니까 교회가 마지막 일어난 천국이다.
그래서 세대주의는 교회 이퀄 뭡니까? 천국이 교회 됐다는 말은 곧 교회가 천국이라는 말로 그들은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교회가 천국이라는 말로. 천국이 교회 되었다는 말이, 교회가 천국이란 말을 할 수 없는 겁니다.
예를 들면 빵에다 이스트를 넣으니까 아니, 밀가루에 이스트를 넣으니까 빵 되었죠. 빵이 이스트입니까? 아니잖아요. 아니죠. 되게 한 것과 된 것과 같이 혼동하면 안 돼요. 혼동하면 안 된다고.
사실은 목회자들이 이러한 교인들이 그냥 설교를 건성으로 듣는 것 같지만 교인들이 항상 목회자 설교를 따지고 들어요. 속으로. 목사님, 말씀을 그렇게 해버리면 그 다음 차례 가능성이 두 가지가 있는데, 목사님은 그다음의 말을 어느 쪽으로 빠질까 궁금해 하는 거예요.
어, 나는 A 쪽으로 논리가 전개 되는 줄 아는데 B 쪽으로 가네. B 쪽으로 가면 A는 왜 아닌데? 궁금증이 설교 끝날 때까지 남아 있는 거예요. 목회자들은 이런 이야기할 때 두 가지 갈래가 나올 때 두 가지 갈래를 다 이야기를 다 해 줄 때 교인들은 모든 궁금증을 다 해결해 지우면서 목표점에 도달할 수 있는 겁니다.
설교가 그렇게 집중력을 요구하는 거예요. 설교가. 그 집중력이 너무 힘들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제 어떤 목사들은 일일이 하나하나 전부다 써서 아예 읽어버리잖아요. 하나님 앞에 실수 하면 안 되니까. 쓰고 읽으니까 이거는 뭐냐 하면, 교인들을 마주보는 말 건넴이 아니고, 자기들한테 화가 나서 가르치는 거예요. 아이들한테 대화합니까? 아니잖아요. 얘들 가르치잖아요. 일반적으로 목사님들 잘하면 또 대화할 수 있지만, 보통 가르치죠. 분필 던져가면서 막 쭉쭉 그어가면서 빨간 분필, 파란 분필 쓰잖아요.
이렇게 할 때는 교인들이 그 다음의 반응이 두 가지가 나온다. 그 두 가지 반응을 목사들이 미리 공부해 알아서 양쪽 다를 설명해서 왜 이 길이어서는 안 되고 이 길로 가야 되느냐 이야기해주면 교인들이 아, 이 설교를 통해서 새로운 걸 알았다. 라는 느낌을 기쁨을 가져요. 아, 이래서 내가 목사님께서 그건 잘못됐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구나. 라는 것을 안다 말이죠. 그런데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렇다면 또또 갈라져요. 계속 새 길로 새 길로 쭉쭉 갈라진다고.
그래서 신학적인 훈련을 받아야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신학 이런 책을 읽어야 되는 이유가 이런 책을 쭉 읽으면 맞네, 맞네. 이렇게 봐서는 안 되고, 왜 래드가 이 주장을 하게 되고, 이 주장은 이래서 틀리고, 왜 이 주장이 맞고, 이야기를 계속해서 해야 된다고. 세대주의가 나오면 세대주의가 뭐라고 주장했는지 알아야 돼요.
이런 책들은 평소에 공부해야 될 이유가, 나만 믿으면 되지가 아니라 그러면 목회하지 말고 저 산 속에 도 닦으면 돼요. 나 혼자 잘 믿는데 누가 나한테 시비를 거노. 이렇게 되는데. 적어도 누구한테 말을 건네고 설교를 할 때는 상대방이 이런 오해를 갖고 있다. 오해를 당연히 갖고 있죠.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그것까지 다 이야기를 해주셔야 돼요.
여기서 보니까 이창섭 목사님, 살 많이 빠졌네. 새삼 보니까. 전에 하고 완전히 다르다. 교회가 바뀌니까 그런가?
자, 여기서 골치 아픈 문제가 돼요. 남은 자가 학자들은 연속성이 있다고 보고, 세대주의는 연속성이 없다. 남은 자고 뭐고 그건 한 때고 이제는 예수님이 새로 만들었다. 그러면 연속성을 갖고 다니는, 우리 목사님이 피곤하신 것 같은데. 시간을 봅니다. 조금만 하고 쉴게요.
연속성을 해야 될 그 내용이 있잖아요. 어떤 것을 담아야 될 내용에 있어서 학자들이 제대로 보지요. 예수님께서 잃어버린 양을 가지고 왔을 때 이 원리가 이미 그전부터 해왔다는 거예요. 엘리야 시대도 그렇게 이미 처음부터 구약에서는 남은 자와 안 남은 자, 했다 이 말이죠.
여기서 중요해요. 뭐냐 하면, 그러면 구약 시대 때 남은 자인 사람 따로 있고, 안 남은 사람 따로 있겠지요. 그 가르는 기준이 뭡니까? 그 기준을 뽑아내어서 엑기스를 뽑아내어서 그걸 오늘날 교회 연속성으로 집어넣어야 되지, 만약에 그 기준을 놓쳐 버리면 전부다 자기 교회 차려놓고 우리 교회는 천국이다. 전부다 우길 것이 뻔하기 때문에 성경에서 남은 자와 남은 자 아닌 사람을 가려내는 그 연속성, 가려내는 그걸 끄집어내고 그걸 계속 연속성으로 유지를 시켜줘야 돼요.
어이, 과거에만 그랬지. 이러면 안 돼요. 처음부터 갈라지는 기준을 찾아내야 되고, 남은 자 될 수밖에 없는 그 원칙을 연속성을 가지고 오늘날 적용되려면 어디로 건너와야 돼요? 남은 자 연속성이 십자가를 건너오면서도 이것이 파괴되지 않아야 되죠. 부활에도 계속 살아있어야 되고. 남은 자가. 계속 이렇게 나와야 돼요.
이렇다면 이러한 십자가에도 파괴되지 않고 부활에도 건너와서 오늘날 교회도 계속 연속성, 남은 자 개념이 추가됩니다. 하려면 그 논리에 대해서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공관복음을 통해서 그걸 찾아내야 됩니다. 그게 뭐냐? 나는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다. 할 때 이것만 하고 쉽시다. 아이, 내가 지친다.
잃어버린 양을 찾아 갈 때 그 잃어버린 양이 누구냐 하는 겁니다. 여기서 래드하고 기존 신학자는 헷갈립니다. 이 사람들은 이스라엘 택한 백성이 남은 자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저는 그렇게 보지 않고. 그때그때마다 예수님을 증거 할 사람을 주께서 만들어내신다. 이렇게 봅니다. 구약에서도. 이삭을 새로 만들어내듯이.
내가 이렇게 주장할 근거가 뭐냐 하면, 제자들의 제자 됨을 제자들한테 맡기지 않았습니다. 얘들아, 내 메시아인데 내 믿어라! 이렇게 제자들에게 부탁하는 식으로 제자들 한 게 아니고, 제자들로 하여금 열두 명만 뽑은 것도 그렇고, 그리고 열두 명을 하나의 기초로 삼은 것도 그렇고. 제자의 제자 됨은 구약의 남은 자의 원칙 따라서 그들을 제자 되게 만들어나가시는 예수님의 고유권한 속한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하면, 천국의 특징은 우리 인간 쪽에서 어떤 중심점을 찾을 수가 없어요. 무슨 뜻이냐 하면, 베드로, 나는 수제자다 이럴 수가 없다 이 말이죠. 베드로가 중심점이 아니고, 베드로 되게 하시는 예수님이 중심점이며, 그 중심점이 예수님한테 있음으로 말미암아 베드로가 중심점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베드로로 하여금 수제자 되게 하시는 예수님이 중심점이지, 베드로가 중심점이 아니다 이 말이죠.
그래서 참된 교회가 되려면 그 중심점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주께서 나를 중심점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 모일 때 그게 천국이고 교회이어야 하는 겁니다.
목사가 최 집사, 청소 좀 하세요. 내가 씨, 나는 딴 거 하는데 나보고 하라고 합니까? 라고 할 때 최 집사님, 지금 주께서 당신을 청소도구로 삼습니다. 이렇게 할 때 그 말을 이해를 해야 돼요. 그러면 최 집사가 목사, 당신이 청소하세요. 내가 청소할게. 그 말도 이해를 해야 돼요.
개인의 특권으로 제자를 생각하면 안 되고 특권 되게 하시는 그 주님으로 말미암아 내가 주님 안에서 이 일을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게 요한복음 보면, 베드로가 요한보고 뭐라고 합니까? 쟤는 어떻게 됩니까? 하니까 쟤는 어떻게 됐든 니는 네가 원치 않는 죽음으로 간다.
남은 자 개념이 내가 어떤 레떼르처럼 상표처럼 붙어 있는 게 아니고, 남은 자 되게 하시는 그러한 원리가 항상 우리 속을 떠나지 않고 있는 거예요. 그렇게 되려면 남은 자는 누구여야 됩니까? 오직 남은 자는 예수그리스도 밖에 없지요. 구약에서 남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어요.
그래야 남은 자의 원리가 뭡니까? 물으면 예수님만이 남은 자 되게 하는 것이 원리입니다. 그러면 그 말은 뭐냐? 모든 인간은 배제하는 거예요. 예수님만 남은 자라는 원리가 아브라함에게 임할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언약이 일하는 중심점으로 되어야 되는 거예요.
본인이 원해서가 아니라 남은 자가 그 속에 있으니까 아브라함은 남은 자가 돼야 되고, 에스겔이 속에 주의 영이 있으니까 에스겔은 남은 자가 되어야 되고, 이사야도 마찬가지. 누가 갈꼬? 내가 가겠나이다. 이사야 본인이 원해서가 아니라 주께서 남은 자 되게 하니까 그루터기가 돼야 되는 겁니다.
그런 관점에 오늘날 교회가 어떻게 하면 되는지, 그거는 한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