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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안산 2월 9일 강의 (고린도후서 2장)강의고린도후서

안산 2월 9일 강의 (고린도후서 2장)

이름 : 우리교회(IP:220.81.176.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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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IP:220.♡.176.169)

09-06-24 17:30

ansan070209

안산강의 2007년02월09일

오늘은 고린도후서 2장을 할 차례입니다.

사도 바울은 ‘누가 최후에 살아남을 것인가?’.
이것은 ‘제발 미래에서 현재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현재에서 미래를 바라보면 희미해서 안 보입니다. 현재에서 미래를 보면 미래는 비현실이 됩니다. ‘어느 누가 (미래를) 아나? (미래에) 가 봤나? 뭐, 가 보면 있겠지. 죽으면 천국 있겠지. 중요한 것은 현재야.’ 현재 위주로 살아가게 됩니다.

사도 바울의 고린도 전후서를 보게 되면, 현재에서 미래로 치고 들어가는 관점이 아니고요, 미래가 이러하니까 따라서 현재는 이러해야 한다는 관점입니다. 그래서 미래가 불확실한 사람은 신앙생활 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시도해 보는 것이죠, 시도. 그냥 한 번 밀어 보는 거죠. 시도해 보는 거죠.

고린도 후서에서 사도 바울이 말한 핵심을 하나만 끄집어내라고 한다면, 우리의 미래가 얼마나 확실한지 지금 우리가 현재 당하는 환란에도 끄떡없다는 정신입니다. 미래가 너무 확실하기 때문에, 현재 몸이 아프다든지 바쁘다든지 생활이 궁핍하다든지 하는 이런 것으로 아무리 흔들어 대도 그것으로 인하여 미래가 변함이 없다, 는 것이 고린도후서의 중요한 중심 테마입니다.

이런 관점을 가지고 보게 되면, 그 다음에 무엇이 궁금하게 되느냐 하면 ‘도대체 사도 바울은 미래를 어떻게 잡았기에 현재 그 어떤 환란도 흔들림이 없다는 말인가?’ 아주 희한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겠지요. 우리가 보통 적금을 들거나 펀드를 넣을 때 미래를 누가 만든단 말입니까? 현재 내가 뭔가 꼼지락 꼼지락 해야 미래에 돈을 타죠.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미래는 누가 만들어요? 미래는 미래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현재의 내가 미래를 만들잖아요. 그것이 우리들의 일상 생활입니다. 모든 사람이 이해하고 납득이 갑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것이 아니고 미래가 너무나 확실하기 때문에... 무엇이 확실하냐면 미래는 확실하고, 무엇이 불확실하냐, 현재는 불확실하다고 봅니다. 그러면 현재라는 밀림, 현재라는 수풀을 헤치면 그곳에서 무엇이 톡 튀어나오겠습니까?

밀림 속에서 토끼나오고, 멧돼지 나오고, 여러 야생 동물들이 나오듯이, 현재라는 수풀을 헤치면 무엇이 톡톡 튀어나오겠어요? 사도바울의 입장이라면 무엇이 튀어나오겠습니까? 미래의 모습이 나오겠지요. 이해되십니까?

여기 이렇게 밀림이 있습니다. 아프리카 밀림이 있고, 저 멀리 눈 덮힌 킬리만자로의 산이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 밀림에서 킬리만자로 산으로 간다면 미래는 확실합니다. 미래는, 목표는 킬리만자로 산. 그런데 우리는 가는 길을 모르잖아요. 왜? 수풀이 앞을 가려서 앞이 보이지 않지요.

그런데 미래로 가는 길을 수풀을 헤치며 나가다 보니까, 여기 킬리만자로 산에서만 사는 토끼가 톡 튀어 나왔다, 는 이야기는 ‘아! 이 길로 가면 킬리만자로 산으로 가는 길이구나.’ 알게 됩니다.

고린도 후서 1장부터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환란이 오더라도, 밀림이 오더라도 현재 미래가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 그 환란가지고 네 믿음이 떨어졌다, 좌절되었다, 잘 못 되었다 이렇게 곡해를 하지 말라, 라는 것입니다.

현재 생활이, 인생이 너희를 속일 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는 말도 있잖아요 ^^ , 푸쉬킨인가 그런 멋진 시가 있는데, 미래가 지금 보장 된 상태이기 때문에 현재에 이러 이러한 환란이 있더라도 그것을 헤치면 미래가 이렇게 톡 톡 튀어나오게 되어 있어요. 미래가 보장되어 나오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미래에 만나게 될, 미래에 있을 일들을 현재 만나게 될 때, 그 사람은 환란 중에 기뻐하겠습니까? 안 하겠습니까? 기뻐하죠. ‘반갑다! 친구야!.’

제일 웃기는 것이 친구인 줄 알고 ‘반갑다, 친구야.’ 하고 예수님의 손을 붙잡았는데, 예수님이 ‘처음 뵙겠습니다’ 이렇게 나올 때, 그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

제가 이렇게 말하면 의문점이 무엇이냐 하면, ‘목사님 그러면 미래가 현재에 섞일 수 있습니까? 이것이 어렵죠. 왜냐하면 미래는 미래고, 현재는 현재인데 미래가 현재와 섞일 수 있습니까?’ 질문할 수 있겠죠. 미래가 현재와 섞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천국의 능력밖에 없습니다.

지금까지 요약하면 고린도 후서는 천국의 능력이, 다른 말로 하면 미래의 능력이 미래에서만 우리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앞당겨서 벌써 어디에 와 있다? 현재에 침투해 있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보통 사람들은 미래를 누가 어디서 만든다고 했습니까? 현재에서 만듭니다. 예를 들면 적금이나 펀드 넣는 것들. 넣어야 미래에 돈을 찾으니까요. 그런데 고린도후서의 사도 바울 같은 경우에는 이미 미래가 보장되어서 미래의 관점에서 현재를 바라본다고 했어요.

그러면 미래는 내가 만들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현재라는 이 수풀을 헤치면 그 곳에서 무엇을 만납니까? 미래에나 나올 사건, 사태들을 현재 속에서 만날 때 ‘반갑다, 친구야!’ 하게 됩니다.

‘크! 내가 구원받은 것이 맞구나! 내가 환란 중에 이렇게 기뻐하다니! 이것은 미래에나 기뻐 할 일을 지금 현재에서 미리 기뻐한다는 것은 주님께서 천국에서 마중 나온 것이구나.’ 그래서 여기서 궁금한 것이 사도 바울은 도대체, 세상 모든 사람은 ‘장래란 현재 내가 열심히 해야 장래가 보장되기 때문에 미래는 현재 내가 만들어 간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사도바울은 거꾸로 ‘미래가 오늘의 나를 만든다. 미래의 능력이 지금 나를 만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을까? 상당히 궁금하지요.

고린도후서 끝 부분을 한 번 봅시다. 제 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 1절에 보면 (고후 12:1)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미래상입니다. 사도바울은 지금 미래를 보았습니다. 지금 미래에 가서 본 것이 아니고, 14년 전에, 앞 당겨 본 겁니다. 앞 당겨 보니까 첫째 하늘도 둘째 하늘도 아니고, 셋째 하늘에 내가 갔는데, 그 사람은 하나님이 아시는 분인데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밖에 있는지 몸 안에 있는지 나도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신다...’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그 세계에서는 무엇이 날아가 버린다? 나. 자아. 자아가 날아갑니다. 나라는 것이 날아갑니다.

사람이, 자아가 있는 것이, 불교식으로 말하면 업보입니다. 불행의 시작, 눈물의 씨앗입니다, 자아가 느껴진다는 것이. 모든 눈물은 자아 때문에 생깁니다. 내가 미리 현실을 가상현실로 만들어 놓은 것이 있기 때문에 그 가상현실대로 안 될 때, 우리는 그 때 누가 우느냐? 소리 높여 내가 울어요. 내가 운다구요.

내가 모르는 사람이 병원에 현재 누워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어제 밤에 돌아가셨는데 내가 웁니까? 안 웁니까? 안 울지요. 그런데 만일 어제 밤에 삼촌이 돌아가셨다. 내가 슬프죠. 삼촌, 아는 사람이 돌아가셨으니까요. 사랑하는 사람이 돌아가면 더 슬프지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병원의 입장에서는 그냥 사람이 죽은 겁니다. 이 사람의 친척이 누구인지 몰라요. 그냥 사람이 죽은 것뿐이지만, 그 사람이 죽었다고 우는 사람 따로 있고, 안 우는 사람 따로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건이 터졌다고 우는 것이 아니고, 나와 연관되어 있을 때만 사람은 반응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지금 죽는 사람이 많아요. 다 슬퍼해야 합니까? 그렇지 않지요. 내가 아는 사람만 골라서 슬퍼해야 하지요. 그러니까 인생이 행복하다 불행하다 하는 것이 언제나 항상 자기 입장이지 이것이 진정 불행해서 불행한 것이 아니고, 행복해서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만든 자기 입장을 생각하니까 불행이고 슬픈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불행하라고 또는 행복하라고 돌아가는 것이 아닌데, 다만 하나님이 하는 일과는 따로 나만의 일이 있기 때문에, 내가 그 하나님이 (따로) 하시는 일을 보고 좋아 했다 어떤 때는 슬퍼했다, 혼자 울었다 웃었다... 그러다가 세월 다 보내고 머리가 허옇게 쉬고 머리는 다 빠져버리고 나중에는 염색할 머리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

인생이라 하는 것은 자기도취에 빠져 살다가 주님께서 부르실 때 그냥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미 미래 세계에 이런 경험을 했습니다. 미래 속에 무엇이 없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모른다 했지요. 그런데 지금은 14년 전 생각을 해 보니 ‘그’가 누군지 알아요. 나인 줄 알았죠. 그런데 14년 전 당시에 그 계시를 받을 때는 그 사람이 나인지 알았습니까? 몰랐습니까? 몰랐지요.

나중에 그 계시에서 벗어나 보니까 그 사람이 누구였다? 바로 나다 이 말입니다. ^^ 이것이 사도 바울의 미래상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미래상입니다. 우리는 뭔가 티끌만한 것이라도 우리와 연관이 있을 때만 반응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항상 ‘나’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언제의 법칙이냐 하면, 현재에서 내가 미래를 만들려고 할 때에는 이러한 주눅드는, 항상 육신으로 울었다가 슬펐다가 하는, 그러한 운명을 질 수 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미래가 되고 안 되고는 내가 잘 되어야 하니까.

내가 잘 되어야 미래가 잘 되니까. 그러니까 나를 버릴 수가 없어요. 나를 못 버리니까 여기서 근심도 찾아오고 걱정도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후서 12장에 보니까 거기에 사도 바울은 무엇이 없었습니까? 나가 없지요. 나가 없고 무엇만 있습니까? 미래만 있지요.

그 미래 속에 들어가면 누구는 없어진다? 내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미래에서는 내가 없어요. 그냥 ‘함께 있는 나’ 밖에 없어요. 내가 만들어 놓은, 내가 만들어 가는 세상이 아니고, ‘어떤 세상’에 있는데 그 곳에 초청받은 것이지요. 누구에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삼층천까지 올라 간 것이지 자기가 사다리타고, 엘리베이터 눌러서 올라간 것이 아니다 말입니다.

자기가 엘리베이터 눌러서 1층, 2층, 3층 올라 간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초청해서 휩싸이다 보니까 3층 세계에 올라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히 우리도 똑 같은 팔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미래가 보장되어 버렸어요. 연탄가스 중독으로 죽던지, 오토바이 사고로 죽던지 간에 그 죽는 순간부터 무엇이 되느냐 하면 고린도후서12장입니다.

전기에 감전되어 죽던지 상관없이, 죽으면 고린도후서 12장입니다. 이미 보장 받은 상태입니다. 이것이 고린도후서에 또 나옵니다. 고린도 후서 전체를 알기 전에 중간 중간 알려 주도록 할 텐데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전체를 보는 안목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에 보면 16절에 (고후 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날로 새롭도다' 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지금 현재 내가 나를 새롭게 만들었기 때문에 날로 새롭게 되는 것입니까? 그런 거예요? 아니잖아요. 아니예요. 날로 새롭다는 말은 우리가 새삼스럽게 안 만들어도 나를 만드신 분이 따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고린도후서 5장에 보면 하늘에 이미 장막을 만들어 놓았어요. 그렇기 때문에 고물딱지 같은 (고물이라 해서 죄송합니다 ^^) 이 몸을 무슨 몸이라? 후패한 몸. 다른 말로 하면 고물. ‘이 고물, 정 고물...’ 이렇게. 고물이죠. 고물은 후패해야 되는 겁니다. 자기가 늙는다는 것에 대해서 너무 아쉬워하면 안 됩니다.

특히 남자는 몰라도 여자같은 경우에, 제일 아쉬운 것이 젊을 때에는 화장발이 잘 받아요. 화장하면 화장이 먹어주는데, 나중에 나이가 많아져서 화장을 하면 화장(품)이 피부를 배척해요. ^^ 놀기 싫다고. 화장(품) 위신 다 버린다고. 피부야 미안한데 내가 참 네 피부에 바르려니 내가 참 우사스럽다(?) 할 정도로 뭔가 화장품하고 (피부하고)서로 싸우는 것 같아요. 그래서 자고 나면 화장발이 다 떨어져버려서 귀신처럼 해 가지고... ^^

물론 과학적으로 여성 호르몬이 전보다 활성화되지 못해서, (호르몬이) 나오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만, 어떠하든지 새로운 것이 있기 때문에 옛 것은 서서히 정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체가 되어야 합니다. 교체되는 광경을 이야기 합니다. 미래가 이미 너희 속에 작용하고 있으니 현재는 없어져도가 아니라 없어지는 것이 마땅하니라, 그런 뜻입니다.

그러면 미래의 힘이 무엇이냐? 지난 시간에 했는데 봅시다.
고린도후서 1장 21절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고후 1:22)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책임지고 땡겨 줄게.’ ^^ 책임지고. ‘당겨주는 증거를 대 보세요. 제가 당겨지는 지 어떻게 압니까? 증거가 무엇입니까?’ 환란이 오더라도 끄떡없게 해 줄게. 환란이 없게 해 줄게,가 아니라 환란이 오더라도 너의 견고한 믿음, 성령은 변함없이 너에게 작용시켜 줄게. 이것이 지금 특수한 인간입니다. 세상 사람이 아니고 특수한 인간.

세상 사람들은 현재의 내가 미래를 만들어 가는 사고방식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내가 굼뱅이처럼 게으르고 신앙생활을 잘 못하면 미래에 내가 구원받지 못한다, 라는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그런 사람에게 묻지요. ‘그러면 교인인(이런 분은 성도도 아니죠 그냥 교인이죠) 당신은 미래에 천국가기 위해서 지금 어떤 어떤 일을 하면 확실하게 천국에 갑니까? 그 방법을 한 번 제시해 보세요?’ 하면, 말을 못하지요.

성경 2장 읽고, 기도 2시간해도 안되지요. 왜 안 되지요? (시간이) 2시간만 있습니까? 2시간 반은 없습니까? 성경도 2장만 있습니까? 3장도 있잖아요. 5장은요? 도대체 현재에서 내가 꼼지락 꼼지락해서 한 걸로 미래에 천국을 보장 받을 방법이 없어요. 방법이 없다구요.

무엇을 끊고, 무엇을 해도 백날 소용이 없어요. 왜냐하면 그 나라는, 생각해보세요, 늙어가는 후패해가는 몸 가지고 이웃사랑 해 보았자 이웃 사랑이 되겠습니까? 저 우리 사모님, 편찮을 때에 이웃사랑이 되던가요? 자기 몸이 아픈데. 안 되잖아요. 사람이 아프면 이웃 사랑보다 누구 사랑이 우선이죠? 내 사랑이 먼저 우선입니다. (답변을 안 하시네요^^)

내가 몸이 건강해야 최고 아닙니까. 건강해야 남을 사랑하는 거죠. 그죠? 사람이 아파보면 만사 귀찮고 내 몸 하나 어떻게 하고 싶죠, 관심이. 사실 건강하면 그 다음에 자식이고 뭐고 생각하겠지만... 사람이 몸이 아프면 다 귀찮아요.

지금 사모님이 몸이 아프다면 우리 여기 모임부터 귀찮아서 문도 안 열어줄 거예요. ㅎ ㅎ ㅎ 가소 그만, 오늘은 귀찮아요. 내가 몸이 끄덕거릴 힘도 없소, 그럴 거란 말이죠. 몸이 아프면 성경 공부하러 오시라고 해도 가기 싫어요. 찌부둥하니 신경통에 비가 오려나? 아이고... 웬만해서는 드러눕고 싶지 성경공부고 뭐고 다 하기 싫은 거예요.

사람이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그 주체자가 뭔가 움직일 본인을 먼저 사랑해야, 내가 나를 사랑할 수 있어야 남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순서가 그래요, 순서가. 내가 무슨 특별한 위대한 도사가 되라는 말이 아니고, 인간은 타고 난 순서가 나부터 먼저 챙기고 내가 숨쉰다 싶으면 그 다음에 여력으로 남을 챙기고, 그리되면 저 태평양 건너 선교한다고 난리하고 그런 겁니다.

자기가 아프면 모든 관심사도 다 회수합니다. 다 다시 도로 다 끄집어내는 겁니다. 돈 빌려 준 것 다 받아내고, 교회 작정 헌금한 것도 안내고 다 끊어 버리고 다 그런 거예요. IMF터져버리면 교회 헌금 나오는 줄 압니까? 다 자기 있는 곳으로 다 끌어 모으죠.

따라서 여기서 좀 어려운데, ‘몸’이 후패 한다 할 적에 사람은 자기 몸만 이야기 하는데 사도 바울의 ‘몸’이라 하는 것은 그 ‘몸’에서 무엇이 나오느냐, 몸에서 사상도 나오고 몸에서 성격도 나오고 몸에서 마음가짐도 나오고 몸에서 양심도 나오고... 다 나와요.

‘몸’이 후패한다는 것은 결국은 무엇이냐 하면, 너의 육체만 달랑 바뀌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모든 마음가짐도 성령님이 주시는 것과 기존에 내가 가지고 있는 사고방식과 교체가 되는 과정 속에 우리가 놓여 있습니다. 이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미래의 힘이 현재를 묵살내고 , 현재를 미래로 바꾸는 그 과정을, 그 하나님의 일을 고린도후서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참 이 이야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제가 단적으로 이야기 할께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 내가 신앙생활을 잘 해야 구원된다, 이러거든요. 그런 사람들에게 묻고 싶어요. ‘저, 당신이 말하기를 내가 지금 신앙생활 잘 해야 구원받는다고 하는데 하루에 신앙생활 몇 시간 합니까?’ ‘2시간이요.’ ‘그러면 3시간하면 더 빨리 가겠네요’. 그러면 말 못하죠.

‘지금 믿어야 미래에 구원받아요.’
‘그러면 내가 지금 믿는다고 하는 걸 몇 분 몇 시의 믿음을 말합니까? ’
‘그게 무슨 말입니까?’
‘당신은 지금 아침의 믿음이 다르고 오후의 믿음이 다르다고요. 빚쟁이가 왔을 때의 믿음이 다르고, 돈 많은 친척이 선물 들고 왔을 때의 믿음이 달라져요. 한 번 측정해 보세요’

자기 몸이 아플 때의 믿음과 몸이 건강할 때의 믿음이 달라지는데, 어느 믿음을 말하는 겁니까? 그러니까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을 내가 문제 삼느냐하면 현재의 내가 똑바로 안하면 미래가 보장되지 못한다는 기존의 이 사고방식. 이 사고방식이 문제가 된다는 말입니다.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나’라는 인간은 현재를 밀어서 미래로 올라 간다, 이렇게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현재의 나를 밀어서, 현재의 내가 현재의 나를 미래까지 밀어붙이면 나는 성공하고 그렇지 못하고 도중에 힘빠져서 놓아버리면 나는 비참하게 되고 원통해서 넘어진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성경 전체를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내가 보기에는 성경해석을 그렇게 안 하는 것이 드물 정도로 그렇게 다 해석해요. 지금 사모님도 그렇게 안 배웠습니까? 다 그렇게 알고 있죠. 이것이 고린도후서 1장 21절에 성령의 보증이라는 말씀에 보면 틀렸다는 말입니다.

성령은 어디에 사시는 분이냐. 성령은 현재, 과거, 미래가 없으신 분이예요. 이것을 제가 천국이라고 아까 얘기했는데, 다른 말로 하면 묵시 세계입니다. 묵시 세계란 천년이 하루같고 하루가 천년같은 세계입니다. 그러면 하루가 천년이면 12시간은 몇 년입니까? 이것이 묵시 세계에서는 못 따지요. 왜냐하면 하루가 천년 같다는 말은 천년이 하루같다는 말하고 같이 이해가 될 수 있어야 됩니다.

그 말은 시간과 상관없는 세계라고 이해하셔야 합니다. 시간과 상관없이 똑 같이 지금 내가 현재, 미래 이렇게 이야기 하지만, 우리가 현재 미래라고 일방적으로 정했지만, 하나님의 묵시 세계에서는 우리가 정한 대로 안 따라 주고, 지금도 천국이고 그 때 가도 천국이고... 이것이 부활의 세계입니다. 부활의 세계는 묵시의 세계인데 지금도 천국이고 그 때 가서도 천국입니다.

지금 들어오신 성령님이 나중에 만나게 될 성령님과 다른 분이 아니고 똑 같은 성령님이십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이야기해요. 사역하는 사람, 방금 막 목회하려는 목회자에게, 복음을 아는 사람에게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목사님이 되셔서 이제는 기존 교회에 갈 때 혼자 들어간다 생각하지 말고 주님께서 함께 투입되었다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나중에 교인들에게 추방당할 때 혼자 추방당했다고 생각을 하게 되면 되게 억울해요. 하나님이여 이럴 수가 있습니까? 복음만 전했는데..?. 지금 세상은, 요한복음에도 나와요, 그 목사를 추방한 것이 아니고 그 목사 배후에 있는 주님을 추방한 것인데 이 목사는 교인들이 나를 추방한다고 오해해서 너무 씁쓸해 하는 겁니다. 인간들에 대해서 대단히 섭섭해 합니다.

그러나 그 복음을 모르는 분들은, 그 죄 많은 인간들은 주님을 추방하는 겁니다. 단지 내가 추방당하는 것은 내가 그들 편에 서지 않고 주님 편에 섰다는 이유 때문에 밀리다 보니까 추방당한 겁니다.

사무실에서 1년에 한 번씩 물청소 할 때 문턱에 찌꺼기 종이들이 있을 때 양동이로 물을 확 뿌립니다. 여기에 쓰레기 A(종이), 쓰레기 B(비닐)이 있다가, 지금 A에게 물 뿌리나보다 하다가, 물을 뿌리면 둘 다 휩쓸리듯이 지금 보이지 않는 분, 누굽니까? 예수님. 보이지 않는 예수님, 보이는 사람은 나 잖아요. 교인들은 보이는 나를 추방하는 거예요. 왜? 복음을 전하니까. 십자가를 전하니까 십자가가 싫어서 처리를 할 때, 사람들은 자꾸 자기만 억울하다 하는데 왜 자기만 억울해요. 주님과 함께 침투했다가 함께 추방당한 입장인데.

그래서 저는 이것을 보고 사람은 ‘홀로 살지 말라’. 다른 말로 하면 ‘홀로 결정하지 말라’ 해요. 더 줄이면 ‘결정하지 말라’. 더 줄이면 ‘그냥 살아라’. ^^ 사람이 뭔가 걱정하는 것은 혼자 그곳에 투입하려니까 걱정하는 거예요. 주님이 보내시면 보내신 주님이 걱정해야지 왜 본인이 걱정합니까.

그 이야기가 고린도후서 2장 이야기입니다. 이 근심 이야기가 쭉 나오는데 근심은 무엇이냐 하면 5절에 보면 (고후 2:5) 근심하게 한 자가 있었을지라도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이 아니요 어느 정도 너희 무리를 근심하게 한 것이니 어느 정도라 함은 내가 너무 심하게 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현재만 들여다보고 사는 사람에게는 근심이 아예 근심을 불러 들여요. 왜? 미래가 없기 때문에. 미래의 능력을 못 믿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현재의 내가 내일을 결정한다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지금 현재 잘 하냐 못하느냐에 따라서 그것이 심각한 문제입니다.

여러분, 성도에게 심각한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진지한 것은 있지요. ^^ 그냥 아무렇게나 살지 말고 진지하게 살되 심각한 문제, 심각한 오류, 심각한 파괴 이런 것은 성도에게 해당이 안 됩니다. 어쨌든지 성도가 본인이 잘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옆에 계신 분 덕분으로, 두 자로 대.신.

참, 이것을 자꾸 잊어버려요. 성경공부 할 때마다 생각나고 그 다음에 잊어버리곤 하는데. 대.신. 살아간다는 사실을 몰라요. 인생을 대.신. 살아준다는 사실을 모르고 자꾸 내가 잘 해야 내가 구원받는다는 생각을 하는 겁니다.

사실은 기본인데. 사실 복음의 기본 아닙니까. 주님께서 내가 나쁜 짓을 아무리 죽을 때 까지 한다 하더라고 구원받는데 전혀 지장이 없어요. 왜냐하면 처음부터 대신해 주기로 작정을 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결정해서 내 인생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내 인생을 대신 사신 분 때문에 그 덕분에 내가 구원받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사는 버릇이 있기 때문에 내 인생을 내가 꾸려서 내가 결정지으려고 합니다. 내가 결정지으려고 하니까 어느 것이 옳은가 그 다음에 어느 것이 그른가 하잖아요.

어느 것이 옳은가 어느 것이 그른가 한다는 것은, 중요한데, 그것을 내가 판단한다는 말은 결국은 최종 판단자를 누구로 결정했다는 말입니까? 세상에! 자기를 최종 판단자로 결정했다는 말 아닙니까!. 이것은 누구를 모독해요? 내가 내 인생 결정해서 천당 갑니까? 아니잖아요. 주님께서 이미 판정을 하셨죠. 너는 백날해도 죄인이며 너가 구원받는 것은 내가 너 대신 행한 의 때문에 구원받는다.

그렇다면 최종 판단자가 누구입니까? 내가 아니라 이 말이죠. 내가 아닌데 평소에 우리는 예수 믿는다 말만 했지 세상 사람들처럼 결정은 누가하고 판단은 누가 합니까? 내가 내리잖아요. 판단을 내가 내리다 보니까 거기 따라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결정을 내가 하니까 그것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죠. 책임감을 느낀다는 자체는 결국 누구를 모독해요? 최종 책임자이신 누구를 모독합니까? 예수님의 결정 사항을 누가 방해합니까? 내가 방해하잖아요, 내가.

무슨 말이냐 하면 사람이 최종 판단자를 만나기 전까지는 항상 최종 판단자가 누가되느냐 하면 내가 됩니다. ‘주여, 잘 해 보려고 하다가 실수 했는데, 다음번에는 잘 해 보겠습니다’ 요런 거. ‘주여 제가 판단해서 이것은 잘 못되었다 해서 이것은 안 했고, 이것은 잘 했다 싶어서 했습니다’ 이러는 거예요.

그런데 둘 다 주님에게는 의미가 없는 거예요. 대.신. 죽으셔서 구원받았잖아요. 그런데 대신 죽었다는 것은 가위로 잘라 버리고 ‘뭐 대신 안 하셔도 되요, 알아서 하겠습니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결국 그것은 누구를 공격한 것입니까? 복음을 안다는 자가 누구를 공격해요?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공격하지요.

가장 공격하는 자가 누구냐? 복음을 안다는 자가 공격하는 거예요. 복음을 알고 난 후에 내가 잘 해 보겠습니다, 이 따위 사고방식을 갖는 겁니다.

고린도후서가 쉽다고 하지만 가만히 보니 쉽지가 않죠. 지금 고린도후서 성경 해석을 누가 방해합니까? 내가 방해하지요. 왜? 최종 판단자가 나이니까. 그렇게 되면 안 되지요. 그렇게 되면 최종판단자가 나 같으면, 대신 죽으심의 의미가 그 사람 앞에서 날아갑니다, 최종 판단을 내가 한다면.

지금 주님께서는 대기하고 계세요. ‘너 대신 내가 와서 너를 구원한다.’ 대기중인데 ‘가만있어 보세요, 지금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기 딴에는 열심히 살려고 하는 거예요. 열심히 산다는 말은 뭐예요? 자기가 판단해서 나쁜 짓은 안하고 착한 일만 골라 하겠다. 그렇게 해서 누적된 의로 괜찮은 미래를 보장 받겠다 그것이지요.

죄 지으면 미래가 나쁘고 저주받고, 현재 착하면 미래에 복이 주어지고..., 그런데 이런 사고방식 자체가 결국 무엇에 위배된다? 대신 죽으심의 기쁜 소식에 위배되지요. 그러니까 결국은 아까부터 내가 이야기 한 것이 뭡니까. 왜 자꾸 현재의 나를 미래로 밀어 넣으려고 하느냐 말입니다.

그러면 고린도후서 1장 21절의 말씀처럼 이미 성령은 우리 속에 보증으로 와 있다는 의미와 가치를 어디에서 찾습니까. 찾을 수가 없지 않느냐 이 말입니다. 근본적으로 기독교가 무엇이냐, 복음이 무엇이냐, 예수님이 누구냐, 근본적으로 완전히 바뀌어야 된다 이 말입니다. 바뀌어야 되요.

세상살이 오래 하다보면 이것이 잘 안 바뀌어요. 맨 날 결국 남는 것이 뭐냐 하면, ‘주여, 열심히 살았잖아요’ 이것만 남아요. ‘나쁜 것은 나쁘다고 내가 피했잖아요.’ 이런 것. ‘좋은 것은 내가 목숨 바쳐 충실히 하려고 했잖아요’ 이것만 남는다고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피 흘리시면서 누가 너를 최종 판단자로 지명한 적이 있느냐? 하시는 겁니다.

아까 고린도후서5장 이야기했지만, 사람이 몸이 아프면 판단 생각보다도 몸이 안 따라 주어요. 사람이 책임감이 강하면 강할수록 본의 아니게 남에게 피해를 입혀요. 이 [본의 아니게]에 해당되는 것이 몸이 아플 때, 그리고 치매에 걸렸을 때, 그리고 정말 부지중에 실수 했을 때, 차로 딴 생각, 졸음 운전하다 사람을 죽였을 때. 그 책임감. 나 때문에 죽었다는 그 아픔. 이 거 못 견디어서 ?(37분20초)

그런데 인간은 처음부터 부지중에 누구를 죽였느냐.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감각이 없어요. 우리가 죽여 놓고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가 죽인 것이 아니고 내가 너희를 위해서 일부러 죽었다. 왜? 너희들의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진다’는 이 따위 사고방식이 바로 옛 사람, 마귀에 속한 옛 속성이기 때문에 이것을 대신 하여서 내가 인생에서 어떻게 살았던 간에 내가 대신하여, 외부에서 이미 잔치 상을 다 벌렸다는 거예요.

이것은 찌짐이 굽고, 잡채하고 할 필요 없어요. 여기서 탕수육 만들고 할 필요 없다 말이죠. 외부에서 이미 다 해 놓았다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언제 쯤 들어오느냐? 이제 중요합니다. 강의의 핵심인데요. 우리가 우리 스스로 하다가 ‘안 될 때’, 우리가 스스로 ‘실망스러울 때’, 성도에게는 뭐가 침투해 들어오느냐면, ‘그래도 대신 죽으신 이가 계시다’는 그 기쁨이 틈바구니 빈 공간에 차고 들어오게 되어 있어요.

이것을 제가 강의 처음에서 ‘미래가 현재에 들어온다’. 이해되시지요? ‘안 될 때’를 고린도 후서에서는 두 자로 환란이라 합니다. 고린도후서12장에서 사도바울은 가시, 고린도후서11장에서는 고난. 고린도후서2장에서는 환란.

환란을 당하니까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근심을 하게 되죠. 근심할 때 사도바울이 편지를 보내요. 너희들이 사는 것은 현재에서 미래를 내다보면서 살아가는데, 나 사도 바울은 미래에서, 미래를 이미 보장받고 난 뒤에, 미래가 (현재) 어디에서 일어나는 가를 찾는 방식으로 현재를 살아간다.

미래가 이미 왔는데 그 온 미래가 어디 쯤 있는가 찾아가는 식으로 자기는 현재를 살아간다. 그러니까 배불렁(?)하지요. 편하지요. 아까 이야기 했지만 교회 어디를 가든지 혼자 있다 하지말고 추방되더라도 너 보고 추방한 것이 아니고 너와 함께 있는 예수님 보고 추방한 것이니까 너만 추방했다고 섭섭해 하지 말고 주님과 함께 추방당했다고 생각해라.

그것이 미래가 현재와 함께 섞여 있는 것입니다. 그 미래가 접촉되는 순간은 다시 말해 성령과 접촉하는 순간에는 현재 내 계획대로 모든 것이 ‘안 될 때’ 그 때 비로소 대신 죽으심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린도후서 2장의 시작점입니다. 전체와 연관됩니다.

고린도후서 5장 8절을 다시 한 번 봅시다.
(고후 5: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니라

자, 이제 이해되십니까? 편하게 이해되십니까? 억지가 아니고 편하게. 사도 바울의 의식이 뭐예요? 미래에 벌써 바탕을 두고, 다리를 딛고 살아요? 현재에 두 다리를 딛고 살아요? 미래에 두 다리를 딛고 거꾸로 머리를 현재에 쳐박고(?)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그림을 그려보면, 하늘에 두 다리를 걸치고 눈은 지금 현재에 있고. 이렇게 살아가고 있고, 우리는 뭐냐, 미래는 보장이 안 되어 있어요. 우리라고 하면 안 되지만, 성도하고 다르니까, 성도가 아닌 사람은 그냥 가 보는 거예요. 갈 때 까지 가 보는 거예요. 어떤 식으로? 현재에 내가 한 것으로 인하여 미래가 열릴 것이야, 라는 그냥 기대하는 거죠.

그러니까 이것은 뭡니까? 홀로 사는 것이죠. 누가 대신 죽으심도 없고 그냥 자기 혼자 알아서 혼자 사는 것을 최선을 다 한다 하잖아요. 그냥 최선을 다해 보는거죠. 그러니 이것은 믿음도 아니고 가상현실라고 해요. 현실은 현실인데 자기 위주의 현실. 제가 강의 처음에 뭐라 했습니까 인간은 누구 우선이다? 자기 우선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이 아니고 뭐가 없다? 미래에 ‘나’가 없어지지요. 그런데 이 사람들은 현재에 누구밖에 몰라요? 나 밖에 모르죠. 병원에 누가 죽더라도 우는 이유가 뭐다? 나하고 연관되어 있을 때 우는 거예요. 그것이 현실이 아니고, 현실은 나 위주가 아닌데 사람들은 그걸 나 위주로 만들어 낸 현실을 무슨 현실? 4자로 무슨 현실? 가상현실입니다.

각자각자 가상현실에서 살아갑니다. 이 가상현실을 구축하려니까 사서 고생하고 사서 근심하고 사서 걱정하는 겁니다. 주님을 찾아오심(?)을 생각 안 하고, 내가 주님을 만날 생각을 하니까 문제가 생기는 거예요. 지금 주님께서 무엇을 주셨느냐는 생각 안 하고, 내가 어떻게 하면 주님을 만날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겁니다.

좀 더 어렵게 이야기해 볼까요? 부활의 능력은 나를 깨는 능력이예요. 현재 나의 가상현실을 깨는 능력이 부활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환란 중에 기뻐하고. 사도 바울은 가시 빼 달라고 세 번씩 기도해도 주께서 하시는 말씀이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이것이 고린도 후서 12장에 나오지요.

(고후 12: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항상 고린도후서 12장을 볼 때는요, 성경 전체를 (가지고 설명해 줘야 해요), 성경구절을 가지고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구절 밑바닥에 있는 그 복음을 가지고 설명해 줘야 해요. 성경 구절이 쭉 나열되어 있다면 성경 구절 하나 뽑아서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 구절 밑바닥에 있는 복음, 대신하여 죽으심, 이걸 성경 구절을 통해서 이야기해야 되죠. 어떤 구절을 해도 복음이 나와야 되죠.

고린도후서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다시 한번 1장을 보면, (고후 1:20)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어디 안에 있습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그리스도가 오셨죠. 그러면 약속이 취소 될 수 있다 없다? 없지요. 고린도후서 5장을 봅시다. 21절. (고후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약속이 취소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죠. 이 약속을 우리가 만들어냅니까 못 만들어냅니까? 못 만들지요. 그런데 우리가 우리의 최종 판단자를 왜 ‘나’로 정했습니까?. 이것도 못 하는 주제에, 이것도 못 만드는 주제에, 이 약속도 할 줄 모르는 주제에 왜 자기가 자기를 판단하고 자기가 자기를 평가해서 낙담하고 절망하고 까불고 왜 그러는 거요.

그것은 혼자 살려고 그러는 거예요. 주님과 더불어 살아야 되는데 자꾸 혼자 살려고 그래요. 버릇이 그래요. 자꾸 혼자 살아요. 나 아니면 나를 살릴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결국 신앙이 없는 거예요. 자기는 실컷 신앙생활을 했다고는 하는데 어느 날 가만히 보니까 신앙이 없는 거예요. 지금까지 열심히 나 혼자 살아온 거예요.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온 겁니다. 언제 주님을 부른 적도 없고 주님을 원한 적도 없어요. 주님을 느낀 적도 없고, 내 곁에 있다는 것을 생각한 적도 없고, 내 아니면 내 인생 그냥 살려주는 사람 없다, 그런 본성만 붙들고 살아 온 거예요.

그리고 예수 이야기하면 내가 열심히 다가가야 겨우 만나는, 내 먼 발치에, 그냥 나한테 내가 불러 주기만 기다리는 어떤 등신같은 분. 바보같은 분. 그림 속의 모나리자 같애. 또는 아이 피아노 위에 있는 인형같고. 오늘 잘 잤나? 하고 노는 바비 인형같애. 내가 만져주면 그 때 비로소 반응을 나타내는 그런 예수가 되어 버린 거예요. 내가 등치가 너무 커졌으니까.

여기 나오잖아요. 대신 죽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이라면, 아까 고린도 후서 5장 21절에 나오는, 그 약속은 예수 안에서 뭐가 된다 했습니까? No가 아니고 Yes가 되지요. 그렇다면 그 예(Yes) 됨에 말려든 사람이 누굽니까? 그 예수님의 약속이 Yes(맞다)라고 확정짓기 위해서 부름 받은 사람이 누구예요? 우리 몸, 우리 몸뚱아리 잖아요.

그렇다면 우리는 후패해도 괜찮죠. 왜? 후패해도 우리 속은 날로 새롭고 죽음 뒤에는 뭐가 기다리기 때문에? 새로운 장막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차라리 몸을 떠나서 죽는 것이 더 낫다는 말은 이미 그 말은 뭐냐, 나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약속을 보여주는 도구가 되었다. 내가 내 인생을 꾸려가는 것이 아니고 내 속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이 나 보다 더 위대하고 그 약속이 계획, 시나리오 짜여진대로 나는 거기에 말려들고 끌려가는 그런 인간 밖에 안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 섭섭한 것이 아니고 그것이 얼마나 홀가분합니까. 신바람 나는 이야기예요. 그러니까 2장에 보세요. 교인들아 왜 근심하느냐? 신바람 나는 인생을 왜 근심하느냐 말이죠. 그것은 네 인생을 네가 꾸려나가려니까 애썼기 때문에 그렇단 말이죠. 사도 바울이 내가 다시 갈 때는 그렇게 하지 말라 말이죠. 내가 갈 테니까 근심하지 말라 말이죠. 사도 바울이 가는데 왜 근심하지 말아야죠? 사도 바울이 무엇을 가지고 간다? 그들이 걱정하는 것을 해결하는 것을 가져가는가요? 아니잖아요. 무엇을 가져갑니까? 하나님이 예(Yes)하는 하나님의 약속을 가져가지요.

지금 어느 집사님 가정에 부도가 났다. ‘목사님, 부도났어요. 집도 빼앗기고 길바닥에 나 앉게 되었습니다’ 할 때 사도 바울이 전화 받고 ‘걱정하지 마소. 내가 갈 테니까.’ 무슨 뜻입니까? 그 쪽에서 ‘아, 사도 바울이 집 한 채 준비하는구나.’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이것은 뭡니까? 현재 집 한 채 있는 내가 집 한 채 있는 상태에서 신앙생활 잘 하면 미래에 뚤린다(형통한다) 이래 되잖아요.

그게 아니고, 그게 아니라 사도 바울이 전해주려 하는 것은, 주님께서 너를 부르려고 하는 시점이다. 그리고 집 빼앗은 것도 다른 사람이 아니고 주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사도 바울의 가시가 누가 심어 놓은 가시예요? 주님께서 마귀를 통해 심어 주신 가시예요. 주님께서 주신 가시 맞습니다. 마귀를 통해서 줬지요.

성도한테 죄라는 것도 주께서 허락하사 마귀를 통해서 주어진 죄입니다. 우리에게 죄가 있어야 죄를 대신한 것도 의미가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성도가 죄 짓는 것도 대신 죽으심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마귀를 통해서 집어넣은 죄예요.

따라서 우리가 잘났다가 아니라 우리는 못났어요. 우리는 죄만 짓는 못난 놈인데 다만 감사한 것은 이렇게 못 난 놈도 대신 죽으심 때문에 살려 주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천국가게 되면 우리의 모든 은혜 된 것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이 땅에서 우리가 아무리 잘 살려고 발버둥쳐도 우리는 죄밖에 지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기정사실로 생각하세요. 그래도 근심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때문이예요. 대신 죽으시어, 죄를 알지 못하는 자로 대신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죄 밖에 모르는 우리를 뭐가 되게 한다?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한다. 아까 고린도후서 5장21에 나와 있죠.

(고후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니까 이렇게 쉽게 하세요. 하나님은 누구 일 밖에 모릅니까? 자기 일 밖에 모르죠. 하나님은 지금 이 집에서 하는 것 몰라요. 전혀 관심 없어요. 하나님은 자기 일 밖에 몰라요. 어떻게 하면 저 죄 많은 인간이 의인되어 천국에 가느냐 그거만 관심이 있어요.

따라서 우리가 이 땅에 아무리 살아도 뭐 될 수 없다? 의인 될 수 없어요. 왜냐? 의인될 수 없어야 대신 죽으심의 가치가 돋보이니까. 내가 착해버리면 대신 죽으심이 소용없잖아요. 미래에 다리를 딛고 살아야 돼요. 현재의 나를 내가 밀어 붙여서 천국까지 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복음을 모르는 일반 교회에서 목사들이 하는 생각입니다. 열심히 하시오, 게으르지 말고. 충성을 다 하시면 천국 갈 수 있습니다. 기껏 그래봐야 베드로가 자기 목숨 바쳐서 주님께 합세하는 것 밖에 안되요. 주님께서 그것을 용납했습니까 안했습니까? (용납하지 않으셨지요.) ‘주여 제가 죽기까지 주를 따르겠습니다’ 베드로가 했을 때 주님이 뭐라했습니까? 장하도다 이 놈아, 천당가자. 이랬습니까 뭐랬습니까? 너는 내가 있는 곳에 오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뭐냐 주님께서 대신 죽으심이 아니면, (그 때가 주님께서 십자가 지시기 전이거든요.) 주님께서 십자가 안 지면 사도 베드로가 백날 천번 만번 죽어도 천당에 못가요. 그것이 우리의 입장이예요. 우리의 현실입니다. 가상현실이 아닙니다. 실제 우리의 모습이 그런 모습인데 왜 우리는 자꾸 우리 위주의 가상현실을 만들어서 거기서 최선을 다 하려고 합니까? 최선도 아니면서.

성경 전체를 보세요. 최선을 다하라는 말이 있는가. 조폭(조직폭력배) 사무실에나 있지 성경에는 없어요. 하면 된다는 말이 성경에는 없어요. 다단계에서 하는 이야기이지 성경에는 없어요.

주님께서 아직 우리를 죽이지 않는 것은 주님이 힘이 없어서 안 죽이는 것이 아니고요, 살아가면서 죄를 좀 더 깊이있게 알라고 살려주시는 겁니다. 죄라는 것을 깊이있게 파 들어가 봐라. 거기 보면 최선을 다하며 애쓴 것도 죄라는 것을 좀 알라고.

거기에 7절에 보면,
(고후 2:7)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저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저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고후 2:8) 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을 저희에게 나타내라
(고후 2:9) 너희가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를 알고자 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고후 2:10) 너희가 무슨 일이든지 뉘게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고후 2:11) 이는 우리로 사단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그 궤계를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

근심하는 것 자체가 어디에 속한다? 근심 안 할 수는 없지만 근심하고 계속 근심하는 것은 근심의 범주에서 못 벗어나는 것은 결국 사탄의 책략이다는 말입니다. 결국은.

주님의 사랑이 있잖아요. 주님의 용서가 있는데. 계속 근심한다는 것은 마치 하나님의 일을 내가 안 하면 하나님의 일이 안 되는 것처럼 착각하는데서 오는 겁니다. 우리가 요한복음을 쭉 했지만 세월이라는 것이 고마운 것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세월 지나면 다 잊어버려요.

요한복음 6장을 봅시다. 38절 (요 6:38)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요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주님이 하시는 일에 어떤 하자가 있겠습니까? 없죠. 주님이 하시는 일에 어떤 누락이 있겠습니까? 없지요. 그런데 왜 우리는 근심합니까. 이상하잖아요. 결국 우리는 누구를 안 믿는다? 예수님이 하시는 솜씨에 대해서 안 믿는다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열심히 한다고 안 택할 자가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요, 내가 열심히 안한다고 해서 택할 자가 지옥 들어가는 것도 아닙니다.

걱정을 해도 주님이 걱정할 문제이지 왜 우리가 걱정합니까? 상당히 수상해요. 참으로 이것은 수상하기 짝이 없어요. 그 마음가짐이 수상해요. 정신머리가 엉뚱한데 가 있어요. 분명히. 그 사람은 정신을 엉뚱한데 팔고 있어요.

뭔가 두렵다는 것. 한 번 정리해 볼까요. 두렵다는 것은 지금 주님에게 정신이 전혀 안 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두렵다는 것은 이미 자기가 결정 내린 것이 있다는 말이고, 이 사람은 자기 결정을 무가치하게 보지 않고 뭔가 큰 가치가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다시 할께요. 두렵다는 것은 자기가 어떤 결정을 내렸다는 말이고 결정을 내렸다는 말은 결정을 내린 나에게 가치가 있다는 말이고, 나에게 가치가 있다는 말은 나 홀로 살아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하고 전~혀 동떨어진, 예수님이 없는 세계에서 지금 혼자 놀고 있어요. 혼자 지금 힘쓰고 있는 거예요. 전혀 주님과 관계가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 요한1서에 보면 무엇이 두려움을 쫓습니까? 사.랑.입니다. 사랑이 두려움을 쫓지요. 그러면 사랑이 있는 앞에서 우리의 결정은 의미가 없잖아요.

아버지; 얘야 너를 사랑한다. 이 집은 네 것으로 해라.
아들; 아버지, 제가 열심히 했으니 지금 받을 만 해서 받겠습니다.
아버지; 내가 너를 사랑한다 했잖아. 그냥 받아.
아들; 제가 열심히 해서 받겠습니다.

이것은 사랑을 배척한 것 밖에 안되죠. 그러니까 사랑이 오게 되면 남는 것은 반응은 뭐 밖에 없습니까? ‘감사합니다’ 밖에 없죠. 그죠? 감사합니다, 이니까 내가 사랑받을 만 해서 받는 것입니까? 아니면 결정을 누가 했습니까? 주님이 결정해서 사랑했으면 내 결정은 사랑 앞에서 의미 없지요. 의미 없으니까 사랑 앞에서 내 결정이 의미 없다는 말은 내가 최종 판단자가 아니죠.

사람이 최종 판단자를 만나기 전까지는 자기가 최종 판단자가 되요.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최종 판단자를 만나게 되면 자기가 최종판단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모든 판단은 주님께 일임해 버리면 그 분이 누구냐 사도 바울이예요. 이미 자기는 십자가에 일임했기 때문에 따로 걱정할 것이 없어요.

자기가 없지요. 자기에게 가치가 없으면 그 사람은 그 다음부터 혼자 살지 않지요. 사랑을 주신 주님과 함께 살지요. 이것을 예수 안이라고 하고, 성령 안, 성령이 이미 보증으로 들어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느냐? 사랑을 이야기해 보면 되요. 십자가 사랑을 들이대면 성령이 없는 사람은 십자가 사랑을 배척하게 되고, 사랑이 있는 사람은 감사합니다, 하고. 참으로 언제 적 고백인지는 모르겠지만 감사합니다, 라는 것을 받게 되지요.

죄송합니다만 만약 사모님이 아파서 오늘 내일 한다면, 자식 셋이나 있고 철없는 남편 있고 그냥 가려니 안타깝다 말이죠. 그럴 때 주님이 찾아와서 자식이고 남편이고 세상일이고 간에 지금까지 그걸 버리고 안 버리고는 누구 소관이냐 하면, 요한복음 6장에 보니까 내가 택할 자는 내가 알아서 택하고 버릴 자는 내가 알아서 버리는데, 너는 침대에 누워서 왜 쓸데없이 걱정을 하느냐 이 말이죠.

걱정한다는 말은 결국은 그동안 주님하고 안 놀았다는 이야기 밖에 안되요. 주님하고 바이바이 했다는 고백 밖에 안되요. 주님은 저 쪽에서 놀고 나는 이쪽에서 놀면서 ‘만나지 맙시다.’ 주님과 안 만난 상태에서 지금까지 살아온 것 밖에 더 되요? 그러면 몸이 아프다는 것은 뭡니까? 몸이 아파 볼 때 비로소 내가 와장창 깨어지잖아요.

그 깨어진 틈 사이로 뭐가 들어옵니까? 주님의 사랑이 들어온 거예요. 물론 퇴원하면 마찬가지 되지만. 또 답답해가지고 내가 설쳐야 또 일이 되는 것처럼 하지만. 주님의 사랑은 그러니까 주님께서 환란을 주신 것은 우리로 근심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현재 주님께서 주신 사랑과 약속의 위대함을 새삼 느끼고 감사하도록 앞으로 더 큰 환란이 오더라도 기뻐하도록, 주께서 지금도 우리를 손수 쥐었다 놓았다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증거 할 때 상대방들은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 받게 되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2장 14절에 그 이야기가 나오는데....(고후 2: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여러분 평소에 생활하면서 이겼다는 느낌을 받을 적이 있습니까? 참~ 드물잖아요. 하는 일마다 안 되잖아요. 그것이 왜 이기는 것입니까 실패지. 실패가 (사람을) 무서운 것이 아니고, 나는 실패하지 않을 자존심이 있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나를 실패하게 하십니까 하면서 짜증내는 것, 화를 내는 것이 무서워요.

예, 이것이 무섭다구요. 이것이 독소예요. 내가 주님을 미워해요. 왜? 성공하는 나를 건드리지 말라고. 실패하게 만들지 말라고. 나는 실패해서는 안되는 존재입니다. 알아서 하세요. 라는 식의...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것이 아니고 뭐든지 그 자체가 실패가 아니고 뭐였다? 이김이었다. 이기었는데 얼마나 어떻게 이겼는지 봅시다.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 니들이 예수님을 알아? 그리스도께서 이미 대신 죽으셔서 확정된 미래를 우리가 보장받았다는 것을 너희들이 알아? 라는 냄새.

이 하나님의 냄새는 망하는 자에게는 악취가 되고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향수가 되죠. 목사가 교인들에게 교회에 가서 그리스도의 향수를 뿌렸는데 날아오는 반응은 짤리는 것이죠.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 교회는 통째로 무엇이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망하는 자이죠. 그러면 그 목사가 졌습니까 이겼습니까? 이겼죠. 결국은 그 복음을 아는 자의 이김은 다른 것이 아니고 본인이 매일같이 복음 앞에서 복음이 자기를 이기고 자기는 복음 앞에서 져야되요. 자기의 계획 .. 복음을 위해서 살아야지 나를 위해서 살아서는 안되겠구나. 주여 졌습니다! 하고 매일같이 주님 앞에 져버려야 그 사람은 복음에 의해 이긴 사람이 되고 복음으로 이긴 사람이 되면 나중에 어떤 반응에도 상관없이 그 사람은 복음으로 이긴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각처에 무엇을 나타내었다?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풍겨대었다. 이 외에 다른 해석은 있을 수 없어요. 전도 많이 했다고 이기었다면 뒤에 망하는 자에게라는 말은 없어야 되요. 빠져야 되요. 망하는 자들이나 구원받을 자들이나 그런데 개의치 않고 하는데, 문제는 이것을 인간의 힘으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16절 끝에 나오죠. (고후 2:16)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두 식당이 있는데 한 식당에서 돼지고기 굽는 냄새를 풍기고 한 식당에서는 고등어 굽는 냄새를 풍길 때, 아무리 두 친구가 오더라도 고등어 좋아하는 사람은 고등어 굽는 집으로 가게되어 있고, 돼지고기 좋아하는 사람은 돼지고지 굽는 집으로 갈라지게 되어 있지요.

그렇게 갈라지게 하려면 냄새가 제대로 풍기게 구워야 되요. 고등어 굽는 것을 돼지고기로 오해할 수 있으니까. 그게 그 이야기입니다. 사망에 이르는 자는 고등어는 고등어로 가고. 돼지고기는 돼지고기로 가게 하는 것. 그런데 문제는 누가 이것을 감당하랴. 왜 감당 못하는 겁니까? 전부다 자기가 스스로 자기를 성공자로 만들려고 하는 세상이기 때문에 만약 이렇게 되면 자기 말 안 들어주는 사람이 있으면 한 명도 못 얻잖아요. 그러면 자기는 뭐가 되어요? 실패자이죠. 그런데 스스로 실패자가 되려는 자는 아무도 없잖아요. 그러니까 이것을 아무나 감당하지 못하는 거죠. 함부로 감당 못하죠.

너무나 막중한 일입니다. 누가 감당하리요. 특수한 사람이 아니면 감당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발을 미래에 두고 현재에 자기의 얼굴이 있고. 발은 미래에 있고. 미래가 현재를 잡아당기는 식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아무도 이 일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단순히 뭐 기계에 목쳐서 순교한다, 이래서는 안 되요. 순교가 성공이 아닙니다. 무엇을 전했느냐가 중요하지 순교하냐 안하냐는 자기 과대망상일 수 있어요. 주여 내가 순교하나이다, 이것도 하나의 착각일 수도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다시 정리하면 제일 중요한 것은 자기 냄새가 아니고 누구의 냄새입니까? 그리스도의 냄새죠. 이것이 제일 중요해요. 그리스도의 냄새. 그런데 사람은 항상 그리스도를 빙자해서 자기를 나타내기 쉽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성도에게 환란을 (주시고) 아예 실패자로 만들어서 실패자가 두 번 다시 자기를 성공자가 되겠다는 낌새조차 안 나오도록 무엇을 해도 실패자로 아예 만들어 놓고 그 실패자라고 자부하는 사람들 통해서 성공하시고, 주님이 그 실패자와 더불어 일을 하셔서 주님만 늘 성공하시고, 나는 그 가운데 나는 왜 실패할 수밖에 없는가 깨닫게 하는 식으로, 짝이 되어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 안에서의 일입니다. 그 외에 다른 성령의 일은 찾지 마세요. 이것 뿐입니다. 성령은 주 그리스도 밖에 몰라요.

성령은 우리 일에 하나도 관심이 없습니다. 내가 죄를 지어도 관심이 없고 잘 되어도 관심이 없어요. 오직 주님의 복음이예요. 대신하여 죽으심, 그 복음이지 쓸데없이 자기 일에 주께서 관여한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그것은 자기 올무, 자기 가상현실에 불과한 것입니다.

17절에 보면
(고후 2:17)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자기가 자기 자신을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그리스도께서 다 해 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깔끔하게 하십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조금만 더 하겠습니다. 3장 봅시다. 3장을 이해하려면 고린도후서 11장을 먼저 봅시다.
(고후 11:4)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이미 고리도 교인들이 무엇을 받았다?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사도, 다른 목사를 이미 받아 들였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고린도후서 3장에서 무어냐 하면 여기서 충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가짜들 즉 악마의 종이 사도행전 19장에 나오잖아요. 마귀가 하는 말이 내가 예수도 알고 그 다음 누구를 안다고요? 바울도 안다고 했잖아요.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죠.

마찬가지로 고린도 후서 11장에 보면 이 사람들은 누구의 종입니까. 양의 탈을 쓴 악마의 일꾼들이죠. 이들은 다른 사람은 신경쓰지 않고 누구만 지금 거짓말로 잡으면 되요? 사도 바울만 가짜 사도가 잡으면 되는 거예요. 그 소문이 퍼져서 지금 두 번째 편지를 보내는 겁니다. 그래서 3장에 보면 우리(사도바울 일행)가 가는데 누구를 천거하겠느냐 우리가 진짜 사도입니다는 말을 다른 백(back) 있는 사람의 천거를 받겠느냐 나는 그 자체가 그리스도의 편지다 했어요.

한 번 3장을 봅시다. 아니 그게 아니고 너희는 그리스도의 뭐다? 그리스도의 편지다 라고 했어요. 이것은 몸으로 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다. 내가 전에 썼던 것(고진도전서)은 이 편지가, 너희들이 편지를 받을 때에, 내가 만약 바울이라 하고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합니다.

바울; 너희들 내가 전에 편지 줬잖아
고린도교회; 예 받았습니다.
바울; 편지 받았을 때 그게 뭐였었나?
고린도교회; 문자였습니다.
바울; 아하 그게 문자가 아니라니까. 그것이 바로 영으로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다.

너희가 편지라는 말은 이미 너희가 그리스도의 편지를 이미 받은 적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받고 영이 있는 사람은 ‘야~ 사도바울이 진짜 참된 사도구나’ 할 것이고, 가짜같으면 영으로 해석 못하고 문자로 해석하는 사람 같으면 ‘그 사도바울은 사기꾼이다.’ 라고 할 거란 말입니다.

그래야 망하는 사람이 있고 그리스도의 생명에 이를 사람이 있잖아요. 그 이야기를 한 겁니다. 그래서 편지를 볼 때에 너희가 어떤 식으로 편지를 읽었느냐 되묻는 대목이 이 3장의 대목이예요. 내가 전에 보냈던 편지를 어떻게 읽었느냐? 문자로 읽었지요. 어허 그러면 안된다니까. 흐름이 이런 이야기입니다. 저는 영으로 읽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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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