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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061201a 울산강의-창세기 3장 녹취자유게시판창세기

20061201a 울산강의-창세기 3장 녹취

이름 : 한윤범(IP:211.218.2.82)

20061201a 울산강의-창세기 3장

(강의:이근호 목사)

첫 째 시간 강의 시작하겠습니다.

지난했던 것, 1장, 2장 했던 것, 요약해 드리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했다는 것은 그 안에 하나님의 자신의 뜻과 목적이 함유된 창조지, 그냥 맹탕으로 아무 의미도 없이 창조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뜻이 포함되어 있느냐? 거기에 대해서는 나중에 신약성경 골로새서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닮기 위한 창조였다. 하는 것이 골로새서 1장 16절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어떤 경로든 어떤 이유든 간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되어 있다, 이런 겁니다.

칠판에 보면, 하늘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면 어떤 경로든 어떤 식이든 간에 모든 창조는 코끼리든 코스모스가 되던 모든 창조물들은 물론 여기에 인간도 포함되지요. 심지어 천사도 포함되고, 악마도 포함되고. 어떤 경로든 창조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성이 있게 마련입니다.

어떻게 연관되어 있느냐? '어떻게'가 중요하죠.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되어 있는데, 어떤 식으로 관련되어 있느냐하는 것이, 우리가 오늘 강의를 통해서 규명해야 됩니다. 알아봐야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골로새서 1장 16절, 모든 만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뜻이 있어서 예수님께서 뭔가 본래의 뜻이 있어서 우리를 이렇게 만들어놨는데, 그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는 어떤 관련성이 있느냐하는 그 문제에 대해서는 창세기 3장부터 풀어봐야 된다 이 말이죠.

누가 한번 찾아보세요. 요한복음 17장 3절 한번 찾아보세요. 17장 2절이네요. 17장 2절을 찾아서 읽어 주실래요. 요한복음 17장 2절.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읽어보면,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그 다음에 "권세"라 했지요. 권세를 누구한테 주셨습니까? 아들한테 주셨지요. 이 권세가 방해받을까요? 이 권세가 어떻게 저항 받을까요? 이 권세를 사용하려는데 아, 권세를 제대로 못 사용했다. 그런 게 있을까요? 없습니다.

이 예수님이 갖고 있는 권세는 어떤 방해도 없이 본래 이 질서, 본래 이 관계를 유지하는데 완벽하게 철저하게 실현이 가능합니다. 이러한 방금 제가 이야기한 강의 처음부터 지금 이야기한 관계를 알게 되면, 더 이상 우리가 더 이상 뭔가 미흡한 게 없어요. 아, 모든 걸 다 안 셈이 되지요. 창조부터 마지막까지 다 알고, 예수 그리스도 알고, 우리 알고, 그 사이의 관계 알고. 뭐, 완전히 깔끔하게 전부다 정리 다 돼버렸단 말이죠. 더 이상 미진한 게 남아있질 않잖아요. 전혀 남아 있질 않지요. 강의 끝나버렸어요.

강의를 지금 해야 될 것은 이 관계에 대해서 이것만 남아있지,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알아서 만드시는데 더구나 그리고 그런 관계를 유지하는 힘, 그 권세가 누구한테 나옵니까? 지금. 예수님한테 나온다는데 우리가 왜 걱정하느냐 말이죠.

우리가 걱정한다는 이유가 수상하지 않습니까? 모든 권세가 예수님한테 있다는데 우리가 왜 걱정하느냐 말이죠. 모든 권세가 예수님한테 있다는데 왜 우리가 걱정하느냐 말이죠. 왜 행동을 올바로 했느니, 못 했느니 왜 쓸데없이 행동을 관찰하고 그걸 증거 하느냐 이 말입니다. 권세가 그리스도한테 있는데.

이 비슷한 이야기가 마태복음 28장 20절에 나오지요. 보라 세상 끝 날까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주님께서 세상 끝 날까지 계속해서 제자들을 관리하고 있다 이 말이죠. 그래서 제가 강의를 시작하면서 다시 한번 당부하고 싶은 것은, 이 근심이나 걱정, 두려움, 초조, 불안, 아, 이런 것이 나온다는 것이 결국은 걱정, 근심, 두려움, 초조, 불안, 인생을 살면서 이런 것이 발생된다는 것은 도표, 이 디자인, 이 그림 여기에 대해서 눈을 돌려버리니까 시선을 돌려버리니까 그때부터 근심, 걱정, 초조, 두려움, 이런 게 다 생기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관계가 주님의 권세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는 이런 판국에 우리는 감사하고 즐거워하고 찬양하고 좋아하면 그만이지, 자기가 우주의 주인공이나 되는 것처럼 말이죠. 자기가 왜 걱정하고 근심하고 두려워하느냐 말이죠. 이거는 다른 그림, 다른 도표를 염두에 두다보니까 이런 확정된 주님의 뜻에 대해서 신경을, 잘 안 나오니까 이런 그림이 잘 안 떠오르니까 나름대로의 걱정, 근심, 두려움, 이런 것이 생기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완전히 도표가 예수 그리스도, 피조물, 주님의 권세로써 이 관계를 유지한다. 끝난 이야기에요. 더 이상 욕심내지 마세요. 전부 끝난데, 죄라는 것이, 창세기 3장에 들어갑니다.

죄라는 것이 무엇이냐? 죄가 무엇이냐? 할 때 이런 그림, 이 도표, 이 그림에 대해서 감사가 나오지 않으면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전부다 죄가 되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죄라고 규정을 지을 때는 무엇을 기준했는데 그 기준에서 이탈했기 때문에 죄가 되는 겁니다.

그 정해놓은 기준이 뭐냐? 정해놓은 기준이 제가 방금 그림 그렸던, 예수 그리스도와 피조물 사이의 주님의 어떤 관계를 유지하는 것, 권세로써. 이건데 여기 이것에 대해서는 시선을 돌려버리면 우리에게 뭐가 나온다 했습니까? 감사와 찬양과 고마움과 기쁨이 나오는데, 만약에 우리 속에 죄가 발생돼버리면 이런 감사가 나오질 않고 근심, 걱정, 두려움, 이런 게 나온다는 말은 지금 죄가 복음의 광채를 흐릿하게 만드는 그러한 힘에 우리가 지금 눌려 있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제가 말하는 게 어려운데, 그럼 왜 이런 취지를 이야기하느냐 하면, 이렇습니다. 사람들 흔히 길에 가는 사람이나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흔히 죄 지었다고 하는데, 저는 죄 지었다고 생각하는 게 난 죄로 봐요. 죄 지었다고 생각하는 것. 당신은 뭘 가지고 죄라 하느냐? 착한 일을 안 했으니까 죄 지었다는 거예요. 사람이 착한 일을 하면 두려움과 걱정이 생긴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경험상 알고, 저도 알고 다 압니다.

착한 일 하게 되면 근심, 걱정, 두려움이 생깁니다. 왜? 착한 일 몇 시간 유지할 지, 내일 또 이 같은 착한 일 해야만 하는지, 왜 전에는 이런 진작 착한 일 못 했는지 후회. 착한 일 자체가 근심, 걱정, 두려움을 유발한다면 이 착한 일이 한 자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죄라고 하는 거예요. 착한 일을 했는데 착한 일 한 걸로 통해서 착한 일이라고 생각한 자체를 회개를 해야 될 텐데, 착한 일 했는데 미쳤다고 회개하느냐 이렇게 나온다 말이죠.

오늘 저녁 좀 늦게 먹어서 분비물이 나오는데, 죄송합니다.

사람이 나쁜 짓 할 때만 회개가 아니라 착한 일 한 그 순간도 회개를 해야 돼요. 왜? 착한 일이 나를 새로운 궁지에 몰아넣거든.

그러면 목사님은 어떤 경우가 죄 아닙니까? 이 그림을 생가하고 감사가 나오면 죄 아니에요. 그런데 착한 일 했다는 것은 누구를 관찰하는 거예요? 그 순간. 자기를 관찰하잖아요. 자기를 관찰하면 이 그림이 사라진다고.

이것부터 우리는 창세기 3장에서 새로운 인식에서 출발해주셔야 됩니다. 착한 일 중심으로 나가버리면 성경 하나도 해석 안 됩니다. 착한 일은 장려하고, 나쁜 일은 줄이고 이래 가지고는 성경, 전혀 해석이 안 됩니다.

그 성경을 예수 그리스도 말고 착한 일 중심이 돼버리면, 그때는 어떤 그림이 나와 버리느냐 하면, 이런 그림이 나와요. 무슨 그림이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지한다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크게 보이고, 그 다음에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이렇게 나타납니다. 자기 자신이 이렇게 되고. 양쪽 다 생각이 나지요.

그런데 아까 그림 같은 경우에는 뭐만 크게 됩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그 수하에 있는 피조물, 이 그림인데 만약에 내 중심으로 봐버리면, 나의 착한 일 중심으로 내가 뭘 하느냐 중심으로 보면, 나와 그리스도가 이렇게 봅니다.

그런데 포이에르바하라든지 많은 철학자들의 연구한 바에 의하면 여기의 예수가 어떤 예수냐 하면, 내가 만든 예수에요. 내가 환상 가운데 만든 예수라고요. 만든 예수인데 어떻게 만드느냐 하면, 내 속에 나를 관찰해서 선이 있잖아요. 정의로움, 착함, 성실함, 열심, 믿음 좋음, 이런 것이 뭉쳐져서 이걸 쏟아내며 만들어내는 예수에요.

이것이 성경에서 이걸 가기고 다른 예수에요. 예수가 달라요. 예수가 다르다는 말은 예수님의 아버지도 달라요. 하나님도 다른 하나님이에요.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하나님,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감사가 나오는 게 아니고, 철저함이 나와요. 완벽함이 나오고 완전함이 나와요. 감사가 나오는 것이 아니고, ‘고맙습니다.’라는 말 대신에 ‘잘해볼게요.’가 나와요. ‘고맙습니다.’란 말하고 ‘잘해볼게요.’란 말하고 완전히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고맙습니다.’란 말은 다 해놨으니까 고맙다는 말이고, ‘잘해볼게요.’하는 앞으로 미완료에요. 앞으로 내 하는 일에 따라서 감사할 것과 감사 안 할 것이 새로 뭔가 시작이 되어야 된다는 겁니다.

제가 방금 강의하면서 두 가지 경우를 생각했습니다. 나와 예수님과 이렇게 마주보는 이러한 도표 하나 생각했고, 두 번째로 생각했고. 첫 번째는 뭐냐? 예수 그리스도의 중심이고 그 안에 모든 피조물이 있고 예수님이 권세 가지고 한다. 이런 도표 이야기 했죠. 기억나지요. 벌써 주무시면 안 됩니다. 지금 주무실 군번이 아닙니다. 조금 있다가.

두 개 있잖아요. 이 두 개 다를 다 알아야 됩니다. 왜 둘 다를 알아야 하느냐 하면, 창세기 3장부터 해서 이 둘 다 나오거든요. 양쪽 다를 알아야 돼요. 이쪽의 자기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이런 사람은, 방금 제가 첫 번째 이야기는 이해 안 되지만 적어도 첫 번째에 해당되는 사람은, 이 두 번째도 아주 구구절절 평생 살면서 철저하게 이걸 다 알고 있어야 돼요.

왜 알고 있어야 되느냐? 2번이 틀렸고, 1번이 맞는다면 2번은 버려야 되지 않습니까? 2번을 버리려면 우리는 창세기 3장부터가 아니라, 창세기 2장의 죄짓기 전의 인간 같으면 2번을 버려야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조상을 잘못 만나서 조상이 이미 창세기 3장 이후로 넘어왔기 때문에 우리는 1번과 2번 둘 다를 같이 느낄 수밖에 없는 그런 입장에 있습니다. 이게 현실이에요.

한쪽은 잊어버리자. 2번은 나쁜 거니까 잊어버리자. 할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면 바리새인들은 나쁜 사람이니까 바리새인들은 잊어버리자. 그럴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그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신앙 생활했는가? 그걸 철저하게 우리의 삶을 통해서 다 보여줘야 됩니다. 우린 같은 통속이기 때문에 한 통속이기 때문에 바리새인과 우리들이. 같은 인간이기 대문에.

이 둘 다에 해당되시는 분은 예수님 밖에 없지요. 사실은 예수님도 세례를 통해서 이게 같이 우리의 죄가 어떠냐는 것에 대해서 다 경험했지만. 우린 태어날 때부터 이렇게 두 번째 사람이고, 예수님은 세례를 통해서 두 번째 속에 개입되신 것이고. 그런 차이가 있습니다만.

어쨌든 지금 우리가 창세기 공부하면서 바로 우리가 인간들이 자기 마음대로 만들어낸 이 다른 예수, 다른 복음. 이것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하는 것을 이제부터 우리가 그걸 알아야 됩니다. 둘 다를 알아야 됩니다.

한번 그림을 다시 그려보면, 첫 번째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예수님께서 권세로써 자기 피조물들을 어떤 관계 속에서 다스리느냐? 이 관계, 이거 알아야 되고, 두 번째는 우리 인간이 이미 죄인 된 인간이 어떤 식으로 가짜 예수, 가짜 복음, 가짜 하나님을 어떤 의식으로 이걸 만들어내는가 그 만드는 욕망, 만드는 사고방식, 이것도 알아야 됩니다. 둘 다 알아야 돼요.

초등학생들은 부모가 시키면 그게 진리인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중학교, 고등학교 올라가면 그걸 반성하게 되지요. 과연 그런가 하여 자꾸 반성하게 됩니다. 독자적인 노선을 하지요. 과연 초등학교 때는 말 잘 듣더니만 중학교 올라가서 말 안 듣더라. 그러면 초등학교 때는 착한 아이고, 중학교 되면 나쁜 아이입니까? 이거 중요한 문제에요. 답변해 보세요. 그런 거예요, 같은 인간이에요? 같은 인간이죠.

그렇다면 걔가 사십이 되고, 오십이 되고, 교도소 갔다 오고하면 또 같은 인간이거든요. 같은 인간입니다. 그런데 그 애는 날마다 자라잖아요. 그러니까 날마다 자라난다는 말은, 자기의 본색을 나중에 감추고 싶어도 못 감추는 지금까지 자라나지요. 그게 죽음이라는 겁니다.

이 성경책을 무시하는 불신자들은 이 성경책 자체를 전부다 과거의 이야기로 소설로 갖다 버릴 수 있어도 본인이 이유도 없이 죽어가는 사실은 버릴 수 없습니다. 본인이 죽잖아요. 죽는 이유는 여기 창세기 3장에 명확히 나와 있다 말이죠. 자기는 죽어가고 있으면서 자기 죽음을 감추려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라게 하시는데 어떻게 자라게 하시느냐 하면, 우리가 죽어야 될 죄인인가를 기어이 그걸 폭로시키는 방식으로 우리를 점점 더 자기 본색을 가까이 가도록 주님께서 그렇게 역사하시고 일하십니다. 그걸 제가 아까 이야기하기를 두 자로 뭐라고 했습니까? 권세, 예수 그리스도의 힘으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이 그림을 첫 번째, 두 번째 그림을 여기서 통합시켜 보겠습니다. 첫 번째, 두 번째 그림을 여러분 기억하시니까 이제 첫 번째, 두 번째 그림을 같이 한번 그려보겠어요. 예수님이 계시고 여기 피조물이 있는데 이 피조물 속에 인간도 있습니다. 여기에 다른 피조물, 천사도 있고, 악마도 있는데. 예수님께서 권세를 가지고 피조물을 다스리는데,

요 인간들은 나름대로의 머리 속에서 뿅뿅뿅뿅, 거품. 나름대로의 뭐를 생각하느냐 하면, 다른 예수를 창작해서 만들어내지요. 그렇지요? 이렇게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하나님 만들어내는 것까지 누가 하십니까?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이게 1번과 2번을 통합시키면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인간들이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하나님을 만들어내는 것까지 주님께서 권세로 그렇게 작용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권세 중에 뭐가 있느냐 하면, 악마가 있거든요. 악마가 인간을 지배하고 예수님께 대들도록 하는 것까지 누가합니까? 바로 예수님께서 권세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모든 권세는 주님한테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까 첫 번째 그림보고 여러분, 뭘 하라 했습니까? 감사하라 했지요. 그런데 인간만 달랑 떼버리면, 인간에게는 감사가 아니라 철저한 완벽한 뭔가 초조함 속에서 보다 완전하지 않으면 나는 도중 탈락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있지요. 자, 첫 번째 그림, 두 번째 그림 합쳐 봤습니다. 합쳐보니까 결국 이 그림 보고 뭐가 나와야 됩니까? 결국 이 그림 보고 뭐가 나와야 됩니까? 감사가 나오면 된다 말이죠.

동의를 안 하시는 것 같아. 지금 이해가 안 되서 동의를 안 하는 겁니까? 동의 하니까 계속 지껄여 보란 이야기에요?

이 감사가 나오지요. 그럼 이것 전체가 감사가 나온다면, 뭐도 감사해야 돼요? 나란 인간이 다른 복음, 다른 예수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도 감사해야 돼요, 감사 안 해야 돼요? 감사해야 되지요, 그걸. 논리가 그렇잖아요. 논리가. 논리가 그렇잖아요.

그러면 지금 여기까지 일단 동의하신다하고 일방적으로 결정내리고. 그렇다면 에덴동산에 선악과 심은 것, 감사해야 돼요, 감사 안 해야 돼요? 감사해야 되지요. 뱀이 찾아온 것, 감사해야 돼요, 감사 안 해야 됩니까? 감사해야 되지요. 그래서 이마에 땀 흘리고 여자들 해산의 고통을 낳는 것 감사해야 됩니까, 감사 안 해야 됩니까? 감사해야 되지요. 강의 끝났네.

이 그림을 보기 전에 성경을 보면서 그토록 고민고민 했던 것, 왜 하나님은 선악과를 따먹게 해서 우리를 죽게 했느니, 왜 철조망 만들어 마귀 못 오게 만들어놨는데 왜 ( ) 해서 우리로 하여금 부부 간에 싸우게 만들고 에덴동산 맛도 못보고 쫓겨나고, 우리는 태어나서 다 죽어. 이게 무슨 난리냐? 이게 자비냐? 그 안 풀리던 고민들이 그림 이렇게 그려보니까 그 까짓 것 모로 가든 저로 가든 천당 가면 그만. 영생 얻으면 그만이잖아요.

그래서 요한복음 17장에 3절에.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제가 읽어 보겠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속에 뭐가 포함되어 있습니까? 모든 권세는 누구한테 있다? 예수님한테 있다는 것까지 포함해서 예수님을 아는 거잖아요. 따라서 우리는 당당하고 자신만만하게 우리가 평생을 살면서 우리 속에서 뭘 끄집어내야 됩니까? 다른 예수가 뭐예요? 나란 인간은 왜 다른 복음을 쫓아갈 수밖에 없느냐를 끄집어내는 것조차도 감사할 수 있을 때 이것이 위로부터 오는 선물, 믿음의 선물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고 자기가 자생적으로 제조해야 될 믿음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바른 복음 만들려고 기도하고 열심히 성경 보면서 내가 올바른 복음 만들어야지 바른 예수 참된 예수 믿어야지, 라고 하는 믿습니까, 이런 것 따지면서 이렇게 하는 작자들이 결국은 뭐냐? 이것이 바로 그걸 가지고 한 자로 뭐라고 하느냐? 이걸 바로 ‘죄’라고 합니다.

인식의 변화가 주어져야 돼요. 완전히 인식의 변화가 주어져야 돼요. 제가 어제하고 오늘 뭘 봤느냐 하면, 중세철학에 대해서 쭉 흘러가는 책을 제가 봤습니다. 아벨라르, 보나벤투라.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둔스스코투스, 어거스틴, 토마스 아퀴나스. 쭉 보고 난 뒤에 이단 옆집이에요. 이단이 따로 없어요. 어거스틴이 이단이고,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단이에요. 그 사람들은.

그 사람은 뭐냐 하면, 인간이 이성으로 어떻게 하면 참된 하나님을 규정할 수 있느냐? 여기에 전력을 다해요. 인간은 이성을 가지고 이런 걸 할 수 있다는 자기 자신을 증언하는데 혼신의 노력을 다 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책은 총 200페이지의 책, 50권. 지금 분량으로 하면 만 페이지가 넘어요. 200페이지의 책을 50권 할 정도로 엄청난 책을 썼습니다. 저도 뭐, 열 몇 권 썼습니다만. 열 몇 권 더 된다. 한 스무 권 되는데.

그 엄청난 책을 쓰고 했지만 그 모든 시도가 뭐냐? 바로 제가 보기엔 한 마디로 죄에요. 그 자체가 죄에요. 뒤에 어거스틴, 둔스스코투스 이외에 윌리암 오캄에다 에크하르트, 신비주의로 나갑니다. 그것도 제가 보기에는 죄에요. 이건 뭐냐 하면, 나를 증언하는 것 밖에 끝나는 거예요. 나를 증언하는 거예요.

왜 성경 보고 그리스도가 눈에 안 보이고, 왜 성경 보고 모든 것이 주로부터 와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 돌아간다. 왜 그게 안 보이고 왜 감사가 안 되는지, 이해가 안 돼요. 물론 이해는 되지요. 성령을 안 받았으니까 그런 믿음이 안 생기는 게 이해되지만.

그러니까 믿음이 있는 사람은 이해가 되는 거예요. 왜? 우리가 평소에 그런 짓을 하고 있으니까. 토마스 아퀴나스 짓을 하고, 어거스틴 짓을 하고 있으니까 이해되지요. 저쪽이 수를 쓰면 뭣 때문에 그런 소리 하는 걸 이해가 되지요. 하지만 그쪽은 이쪽을 이해 못하는 거예요. 어떻게 다른 예수, 다른 복음인데 그게 감사가 되느냐? 그거 감사해야 돼요.

로마서 9장에 뭐라고 되어 있는 줄 알아요? 사도 바울이. 내가 예수 그리스도에서 끊어질지라도 예수님께서 시키는 일이라면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내가 수용하겠다, 했어요. 정말. 그거 로마서 9장 1절, 2절에 이 말씀은, 3절까지. 2절 빠지고 3절인데, 1절, 3절 이 말씀은 토마스 아퀴나스나 어거스틴 그거 해석 못합니다.

한번 볼까요. 로마서 9장. 이번에 겨울수련회에 제가 로마서 할 예정입니다. 다른 의견이 있으면 또 수정할 수 있지만 일단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9장 1절에서 3절을 보면,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여기에 근심 들어가고 고통 들어가지요. 그런데 이 근심, 고통이 뭡니까? 자기가 구원 못 받아서 환장해서 하는 고통이 아니잖아요. 뭐냐 하면, 사도 바울이 있다면, 사도 바울은 이 관계. 이걸 두 자로 뭐라고 했습니까? 관계를 유지하는 힘이 뭐라고 했습니까? 제가 아까. 권세라 했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가 임하게 되면, 그리스도가 갖고 있는 십자가 고난도 자기가 함께 받아야 되는데 이 사실조차도 자기는 수긍을 할 수 있다 이 말이에요. 내가 지금 형제를 당한 고통과 아픔이 있다면 이것조차도 주님이 주는 권세고 관계라면, 이거는 피조물로 마땅히 받아야지, 그것을 왜 안 됩니다. 나는 구원받아야 됩니다. 이렇게 나설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이 그림이면 끝나는 이야기에요.

그러면 이 거대한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피조물들을 어떤 관계로써 할 때에 여기서 이제 창세기 3장부터 알아야 될 것은, 이 관계가 어떻게 짜여져 있느냐? 그 짜여진 관계, 이거 하나 밝혀내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어떤 관계냐? 라고 밝혀내는데 제가 미리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내린 정답을 미리 말씀드리면,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어떤 관계냐 하면,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와 사이에 있던 그 관계가 이 관계입니다. 이게 돼요.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 사이에 있었던 그 관계를 예수님은 우리를 지배하는 관계로써 그대로 사용하신다. 이게 제가 알고 있는 정답이에요.

이 관계를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의 관계를 만약에 이걸 안 끄집어내면, 토마스 아퀴나스나 유명한 신학자들처럼 우리 인간 쪽에서 억지를 부리면서 예수님을 믿어보려고 온갖 이성과 의지를 총동원시켜서 이 관계가 안 끊어지기 위해서 성사시키기 위해서 온 혼신의 종교적인 노력을 다할 것 아닙니까? 이걸 한 자로 뭐라고 했습니까? 죄!!

이 관계는 오직 이 관계라 하는 것은 우리의 힘이 아니고, 성령의 도움으로 주님의 은혜로, 용어상 성령의 도움으로 주님의 은혜로 아무리 말을 집어넣어도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에는 이것은 창세전부터 있었던 관계기 때문에 결정적 관계기 때문에 우리 인간이 개입을 못해요. 개입을 못한다는 말은 우리가 눈치를 못 채는 사이에요. 우리가 개입할 수 없는 사이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 관계를 성령의 도움으로 주의 은혜로 뭐, 온갖 말을 다 집어넣고 한다는 말 자체가 결국 이 관계를 내가 이해하고 내가 알아듣는 관계로써 전환시키겠다는 그런 심보를 드러낸 것 밖에 안돼요.

아아, 논리가 어렵지요. 지금 너무 정답을 일찍, 감춰진 판도라 상자를 너무 일찍 터뜨렸어. 다시 쉽게 하면,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는 창세전부터 결정된 관계기 때문에 우리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어요. 태어나지도 않은 관계다 말이죠.

그러니까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이바구를 말을 뗄 수가 없어요. 이거는 저래 해야 된다, 저거는 이래 해야 됩니다. 우리가 어떤 성의를 가지고 개입할 쨉이 안돼요. 개입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어머니는 지옥 가더라도 우리 어머니는 구원받아야 돼. 왜냐? 내가 믿음 좋고 기도 열심히 하니까. 라고 어떤 압력을 가한다든지. 다른 딸들은 지옥 가도 내 딸은 천당 가야 됩니다. 라고 압력을 가할 수가 없어요. 이거는.

사람들이 예정론을 싫어하는 이유가 뭡니까? 예정론을 결정지어 놓으면, 그 다음부터 이미 끝난 문제기 때문에 나중에 뒤에 와서 우리가 백 쓴다든지, 압력을 가할 수 있는 여지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예정론 싫어하는 사람이 뭐냐 하면, 그렇다면 인간에게 자유의지 준 것은 왜 주었느냐 말이죠. 누가 자유의지 줬다고 누가 이야기하는데, 자기가 지 마음대로 자유의지 줬다고 이야기 해놓고,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은 그러면 이미 결정 다 해놓고 우리에게 자유의지 줘서 어쩌라는 말인데? 라는 식으로 따지거든요.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에 있었던 그 관계를 예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로서 전환시킴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예수님의 관계가 없어지는 게 아니고, 그걸 죄로 드러나게 하시죠. 결국 이렇게 되면 뭐냐? 전 우주의 움직임은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가 아니고, 의와 죄의 관계 속에서 모든 것이 다 제자리를 잡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천국이 있고, 그래서 지옥이 있는 겁니다.

내가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 어떻게 합니까가 아니라 의는 창세전에 확정되어 있고, 나머지 모든 것은 죄니라. 그래서 그 죄 앞에서 의가 의로 드러나고, 죄는 의 앞에서 죄로 드러나고. 그런 질서체제가 원래 하나님께서 그렸던 그림이니까 우리는 찬양하고 감사할 따름이지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었습니다. 내가 나 된 게 은혜입니다. 주께서 영광 받는 게 합당합니다. 그렇게 된다 이 말이죠. 모든 게.

목마르다.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죠.

지금까지 이해되시겠습니까? 다시 한번 정리하면, 늦게 오신 분들도 있으니까. 다시 한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골로새서 1장 16절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모든 피조물들을 예수님이 만들었어요. 왜 만들었느냐? 창조라 하는 것은 목적 없이 만든 게 없어요. 의미 없이 만든 게 아니고, 의미가 있어 만들었는데, 그 의미가 뭐냐?

골로새서 1장 16절에 보니까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가 만드셨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렇다면 만드셨는데 유지하고 보존하고 그런 관계를 지탱하는 힘은 뭐냐? 요한복음 17장 2에 보니까 누구의 권세? 하나님께서 모든 권세를 주님께 주셔서 주님의 자기 권세로 유지케 하신다 이 말이죠.

그런데 이런 그림만 우리가 생각하면 될 텐데 지금 현실상 이런 그림만 나오는 게 아니고, 여기에 대항하는 그림도 우리가 그릴 수밖에 없다 했습니다. 그건 왜 그러느냐? 우리는 창세기 2장에 나오는 인간이 조상이 아니라 창세기 2장에서 3장으로 넘어온 그러니까 범죄한 인간을 우리 조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범죄, 죄가 무엇인가를 드러낼 수밖에 없는 입장입니다.

범죄라는 게, 죄라는 게 뭐든가요? 죄라는 것은 바로 내 중심에서 그 다음에 하나님도 예수님도 모든 것을 내 중심에서 시작하는데 거기서 시작하면 뭐가 나온다 했지요. 뭐가 나옵니까?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하나님 이게 솔솔솔 나오는 거예요. 이렇게 나오는 것조차 누구 권세 하에 움직인다? 예수님 권세 하에서 움직인다는 것을 믿는 사람이 진짜 신앙인이다. 그래서 감사할 수밖에 없지요. 감사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생각할 게 뭐냐 하면, 그렇다면 지금부터 생각해야 될 것은, 예수님께 나오는 관계라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관계냐? 그거 하나하고, 두 번째는 우리에게서 이런 다른 예수, 다른 하나님, 다른 복음이 왜 나올 수밖에 없는 이게 다른 언약이죠. 우리가 만든 언약. 이 두 가지를 왜 이렇게 나올 수밖에 없는가? 왜 2번이 나오고, 1번도 역시 같이 나오고. 이게 병행해서 나올 수박에 없는가를 생각해보자. 병행해서요.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언약을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계시를 받고, 여기서 ‘예수님의 계시’라는 게 중요해요. 사도 바울이 자기 생각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계시를 받고 전 역사를 둘로 쪼개놨어요. 한쪽은 약속의 자녀, 한쪽은 율법의 종의 자녀라고 딱 둘로 나눠졌습니다. 이걸 가지고 두 언약이라고 해요.

분명히 사도 바울이 두 언약을 이야기했으면 둘 다를 알아야 될 텐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만 챙기고 한 쪽의 언약은, 이거는 몰라도 돼. 왜? 이거 알아서 구원받는데 지장 없으니까. 한 쪽은 나쁜 거니까 나쁜 것은 나는 잊을 거야. 한 쪽은 몰라도 되는 냥 생각하는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까?

갈라디아서 4장, 어떤 내용이 있는지, 제가 한번 보면, 갈라디아서 4장 23절에 보면,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하가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또 하나는 어머니가 하늘에 있다. 이렇게 되어 있는데,

여기에 보면 23절에 계집종에게서 뭘 따라 났습니까? 육체로 따라 났지요. 한쪽은 뭘 따라 났습니까? 약속이지요. 그러니까 약속과 육체는 섞입니까, 안 섞입니까? 안 섞여야 되지요. 섞여 버리면 둘이 아니고, 하나가 되니까. 지금 따로따로 의도적으로 분리시켰잖아요.

그럼 우리도 분리해야 되지요. 육체가 뭔지 알아야 되고, 약속이 뭔지 알아야 되고, 둘이 섞이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야 되고, 서로서로 배타하는 서로 튕기는 그런 것도 알아야 돼요. 그 튕기는 증거물이 뭐냐?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빼버리면 둘이 아니고, 하나로 통합돼버려요. 그러면 뭐가 남느냐 하면, 나 예수 믿는다. 알아 줘. 이것 밖에 안 남아요.

하나님께서 둘로 쪼갰으면 우리 내부에서 둘로 쪼개야 돼요. 우리 내부에서. 왜 나는 죽어야 되고, 왜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나야 되는가? 나란 인간 자체에서부터 이미 둘로 분리돼야 됩니다. 그래야 두 언약을 증거할 수 있는 증거물이 되죠. 우리가. 피조물이 뭔데? 피조물 다시 해볼까. 아까 강의 들어도 돌아서면 잊어버려요. 한번 돌아서볼까? 돌아서면 잊어버려요.

예수님께서 우리의 관계는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서 관계로 하는데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이미 약속이 있었잖아요. 무슨 약속? 두 언약이라는, 옳지, 색깔 괜찮게 나오네. 두 언약이라는 약속이 있었잖아요. 색깔 바꿔서 해야겠다. 이 생각을 왜 못했을까? 앞으로. 색깔나는 걸 생각 못했네. 두 언약이 있지요. 두 언약이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 무엇을? 십자가. 아아, 색깔 튀네. 빨간 색깔, 이젠 기억나죠.

두 언약이 창세전에 생각했던 하나님과 예수님의 두 언약에 지상에서는 어떤 형태로 나타난다? 십자가로 나타나게 되면, 이 십자가가 피조물인 우리 속에 십자가 들어옵니까, 안 들어옵니까? 반드시 들어와야지요. 들어오면 힘으로 인해 부활이 일어나니까. 부활의 힘으로 십자가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뭘 증거합니까? 바로 하나님과 귀찮아 죽겠다, 정말.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있던 두 언약이 십자가라는 걸 통해서 우리 속에서 두 언약이 드러나지요. 이것이 바로 주께서 창조하신 그 원래 목적이잖아요. 이게.

이게 드러나는 사람 같으면 구원받은 사람이고, 이런 그리스도의 십자가 흔적이 없는 사람은 이거는 믿음을 못 받았기 때문에 여전히 자기가 풍선처럼 부풀은 자기의 다른 예수, 다른 복음 여기에 매달려 있고, 그 안에 붙잡혀 있는 인간이죠.

그래서 창세기부터 공부한다는 것이 상당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들어오게 되면, 사도 바울 같은 경우는 자기의 죄 때문이 아니라 주님 때문에 십자가 때문에 고생고생 하죠.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세 번이나 맞고, 세 번인가 다섯 번인가 몰라. 세 번이나 맞고, 강도의 위협과 도적의 위협과 강의 위험과 심지어 굶기도 하고, 몸에 가시도 있고.

근데 그것이 전부다 뭐냐? 왜 사도의 마음에 가시가 있습니까? 왜 안 빼줍니까? 사도의 몸에 가시가 있어야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에 있었던 그 두 언약이 거기에 증거되기 때문에 가시가 있어야 되는 거예요. 증거가 되기 때문에.

내가 약한 가운데서 나는 약하지만 주님은 내 속에서 강하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이 언약대로 실시하여 나 같은 약한 인간도 가시 있는 인간도 구원되더라. 라는 것을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은 그러한 부림을 당하는 거예요. 그러한 역할도 해야 된다 이 말입니다.

그것 때문에 사도 바울이 슬퍼했습니까? 항상 기뻐한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궁핍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내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렇게 된다, 이 말입니다.

이렇게 들어보면 믿는 자한테는 이게 어렵지 않습니다. 이제 이것을 논리적으로 이제부터 어렵게 들어가는데. 예수님께서 우리의 관계 창세기 4장부터 출발하는데 창세기 1장, 2장, 3장 이것은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의 영원한 창세전에 있었던 은밀한 계획서에요. 프로젝트죠. 프로젝트가 창세기 2장, 3장으로 쭉 넘어옵니다. 그걸 설명하는 게 상당히 어렵지만 그게 논리상 어렵더라도 전체적인 그림만 이렇게 꽉 잡고 있으면 그게 어렵지 않아요. 맨 이 안에 들어가는 거니까.

붕어빵 만드는 것, 집에서 틀 없이 만들면 어려워요. 그러나 틀 다 만들어놓고 앙꼬 집어넣으면 되잖아요. 이미 틀은 완성된 거고. 앙꼬 털어서 넣기만 하고 뒤집어서 먹기만 하면 된다 말이죠. 그게 뭐가 어렵냐 말이죠. 먹는 것도 못 먹어요. 구워서. 이미 이 틀은 다 마련되어 있으니까 안에 이제 앙꼬 넣는 것이 힘들고 논리적으로 좀 어렵더라도 여러분 참으시고 결국 이 틀에서 안 벗어나면 된다 이 말이죠.

예수님께서 창세전에 있던 개념을 우리를 틀로 사용해서 우리 속에 집어넣는다. 그래서 우리 속에는 두 언약이 나온다. 뭐냐? 나는 육체지만 주께서 약속이 되는 순간, 육체에 속한 자가 아니고, 약속에 속한 자로서 있더라. 그 약속은 뭐냐? 그 약속은 바로 십자가다. 영원한 십자가가 우리 속에,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 하니까.

그러면 이 그림을 지웁니다. 여러분 머리 속에 지우지만 다시 또 되면 나중에 그려요. 왜냐하면 지웠습니다하면 지우는 순간, 멍하니 뭐더라. 기억나지 않아요. 전도연처럼 기억나지 않는다. 이래요.

창세기 3장에 보면, 창세기 2장부터 보게 되면, 에덴동산에 주목을 끄는 두 개의 나무가 있습니다. 이거 지난 시간에 했는지, 안 했는지 모르겠는데, 했더라도 괜찮죠. 에덴동산에 한 가운데 나무 두 개가 있어요. 그런데 이 나무 둘 다 특징이 뭐냐? 열매가 맺혀 있다는 거예요. 그것도 동산 한 가운데. 두 가지 나무가 있어요.

여기에 사람을 만들어놓고, 이 에덴동산의 의미가 뭐며, 왜 에덴동산을 만들었으며 그리고 너, 인간이라는 것을 왜 만들어놨느냐를 설명하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가지고 설명을 시도하는 게 아니고, 다른 성격의 나무 두 개를 가지고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설명하시는 거예요.

장차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 이것을 설명할 때 자, 제가 문제를 하나 내 보겠어요. 예수님 오시기 전에 에덴동산 생명나무와 선악과 가지고 설명하는 게 이것이 이해하기 쉽습니까, 아니면 예수님 오시고 이해하기 쉽습니까? 어느 쪽이 쉽습니까? 어느 쪽이 더 쉬워요?

예수님 오시고 난 뒤에 이걸 보는 게 쉽습니까, 그냥 예수님 오시는 것 모르고 생명나무 가지고 하나님 뜻을 이해하는 게 쉽습니까? 어느 쪽이 쉽습니까? 우리 생각에는 오시고 난 뒤에 이게 더 쉬울 것 같지만, 실은 예수님이 생명나무라 하는 말이 더 어려워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사람이지 나무가 아니잖아요. 그건 생뚱맞은 소리 아닙니까?

제가 문제 하나 드릴게요.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다. 할 때 우리 인간은 바라지요. 바라는 것의 실상은 믿음이단 말이죠. 예수님이라 할 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 하는 게 쉽습니까, 예수님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 하는 게 쉽습니까? 어느 쪽이 쉽습니까? 바라는 것 자체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믿음이란 말이죠. 이 세상에서 이야기하는 믿음이라 말이죠. 믿음이란 실상을 말하기 위해서 믿음이 생겼다 이렇게 되거든요. 그런데 믿음은 믿음으로 말하면 믿음은 믿음 가지고 믿음의 실상은 믿음이다 이렇게 되거든요. 내가 말해 놓고 후회된다. 정말.

내 당신을 사랑하거든. 왜 사랑하느냐 하면 당신이 사랑스럽기에 사랑해. 이 말이 말 하나마나 아닙니까? 왜 그렇게 사랑스러운데?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거야. 왜 사랑스러운가 말이야. 사랑스러우니까 사랑스럽지. 이게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지요. 상당히 말하기 힘듭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는, 당신이 먼저 나를 사랑했기 때문에 당신 준 사랑 있기에 그 사랑이 어디서 나왔는가 따라가 보니까 당신에게 나와서 당신을 바라면서 당신을 사랑한다. 진작 그렇게 이야기해야지. 이렇게 되거든요.

믿음이라는 것은 지금 현재 믿는 그 믿음이 어디서 나왔는가를 따라가기 위한 그 실상이 되는 것이 믿음이다. 이렇게 되거든요. 그러니까 믿음이라는 것은 예수님은 현재 우리가 믿는데 그 믿음조차도 예수님한테 나왔던 믿음이기 때문에 그 예수님 주신 믿음으로 그 믿음의 주인한테 지금 찾아가는 중이다. 이렇게 된다 이 말입니다. 이걸.

믿는 사람한테는 굉장히 쉬운데 안 믿는 사람은 믿음이 두 가지 돼버렸어요. 바라는 것도 나오고, 믿음이 두 개 나왔어요. 그러니까 그 사람들은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이해 안 되면 나만 이단 돼야지.

해봅시다. 생명나무와 선악과가 왜 있느냐? 생명과 선악과나무를 왜 심어놨느냐 하면, 장차 오실 예수님을 설명하기 위해서 입니다. 어떤 사람은 생명나무가 예수님입니까? 아니요. 그럼 선악과가 예수님입니까? 아니요. 그럼 둘 다 예수님입니까? 아닙니다. 그럼 뭡니까? 여기 인간 있잖아요. 인간 더불어 셋 다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 권세를 보여주는 모형입니다.

드라마 [주몽]하는데 송일국이 혼자 칼싸움하면 재미 하나도 없잖아요. 소서노가 재미있지 않습니까? 그리워, 그리워 하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뭔가 관계가 있어야 비로소 주몽의 의미가 살아날 것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라 하는 것은 우리가 범죄하고 난 뒤에는 이거 뭡니까? 비타500. 하나의 사물과 지시하는 그 이름과 사물이 일치가 되지만,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비타500이라며. 이러면 안 돼요. 그런 건 부흥사들이 그런 짓해요. 부흥사들이 성막에 대해서 강의할 때 그렇게 해요. 이거는 예수님의 뭐고, 뭐고. 아닙니다. 전체가 관계로 어울려져야 그것이 그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와요. 전체가.

아, 이거 참, 아까 쉽다고 붕어 틀까지 이야기했는데 앙꼬 넣기만 하면, 앙꼬가 되게 어렵네. 갑자기. 앙꼬 넣는 게 되게 어렵게 돼버렸는데, 참으세요.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선악과 어떻게 생겼습니까? 흉하게 생겼습니까, 기괴하게 생겼습니까? 아니면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탐스럽기만 하고 어떻습니까? 이 선악과 어때요?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탐스럽기 하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따먹으라 했어요, 따먹지 말라 했어요? 따먹지 말라 하는 거예요. 누구 환장하고 미치게 만들 일 있습니까? 따먹지 말라고 했으면 정말 두 번 다시 보기도 싫은 몰골로 하고 있어야 따먹지 않지요.

밥 쉬게 되면 퍼런 푸른곰팡이 피잖아요. 그때 엄마가, 얘야, 이 밥 쉬었으니까 먹지 마라. 그건 먹으라고 해도 안 먹습니다. 그건, 퍼런 건. 먹으라고 해도 안 먹어요. 그런데 엄마가 이야기합니다. 이게 찰지거든. 얼마나 맛있다고. 이게. 그런데 먹지 마. 이건 무슨 이야기에요. 앞뒤에 안 맞는 이야기 아닙니까?

지금 주님께선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먹지 말라 했으면 아예 안 먹도록 조치를 해서 흉하게 생겼든지, 꼴 보기 싫다든지 그렇게 열매 맺혀야 되는데, 왜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하고 탐스럽기만 한 그 과실을 그렇게 만들어놓으시고 먹지 말라 하느냐 말이죠. 황전도사님, 그 이유 아십니까?

그거 한번 심사숙고 해 본적 있습니까? 이상하지 않습니까? 만약에 생명나무가 더 먹음직하고 탐스러울 것 같으면 얼른 따먹습니다. 그런데 먹지 말라 하는 것이 사람을 유혹케 하고 사람을 끌어당기잖아요. 이것은 결국 인간의 모든 의지라는 것, 감정, 이성은, 인간은 어디까지나 종속적인 것. 자기가 자기를 처리할 수 없는 입장으로 우리는 만들어졌습니다. 내가 스스로 결심해서 어떤 일을 처리할 수 있는 그런 위치에 우리가 놓여 있지 않습니다. 그런 입장에 있지 않아요. 처음부터 만들어질 때부터.

우리가 어느 인간이 스스로 결심해서 나는 먹고 싶은 것도 안 먹고, 보암직하지만 안 봤고, 탐스럽긴 하지만 거부했다. 이런 인간은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아담이 너무나 의지가 굳어서 어지간히 안 예쁘고 어지간히 이렇게 안 탐스러우면 안 따먹을 그 정도로 강단 있는 사람이라면 주께서는 더 예쁘고 더 탐스럽게 만들었을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아무리 강단이 있고 의지가 강해도 결국은 탐스럽고 아름답고 보암직한 것에 굴복될 수밖에 없는 처음부터 그러한 인간이 만들어졌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이렇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이 자율적으로 자립적으로 인간이 인간을 유지한다? 이거는 애초에 이런 게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인간은 어디에 의지해야 됩니까? 한번 비교해 보세요. 선악과.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하지요. 반대편에 뭐가 있습니까? 그런데 따먹지 말라 하지요. 따먹지 마라를 두 자로 줄이면 이거는 '말씀'입니다. 그죠? 따먹지 말라는 명령이잖아요. 말씀 아닙니까?

인간은 너희가 스스로 아하, 먹고 싶다. 그거 따먹고 싶다. 하는 너의 결정보다도 뭘 우선해야 합니까? 따먹지 말라는 말씀을 우선해야만 하는 그런 조건 하에서 처음부터 인간은 이 땅에 태어났어요. 인간은 자체적인 권한을 발휘할 수 있는 처지에 놓이면서 탄생한 것이 아니고, 철저하게 어디에 종속되어야 돼요? 말씀. 말씀에 종속되어야 돼요. 말씀이 떠나버리면 풀의 꽃같이 말씀은 영원히 남으나 뭐는 사라진다? 인간은 사라집니다.

첫째 시간 끝내면서 휴식시간 가지면서 아까 그림 다시 그려 보겠습니다. 예수님 계시고 여기 인간이 있습니다. 피조물 있습니다. 인간이 자율적으로 자립적으로 예수님께 다가온다? 이거는 안 됩니다. 여기 뭐가 가로 놓여 있습니까? 자율적으로 못 오도록 보암직하고 탐스럽기도 하고 아름다운 것을 깔아서 결국은 주님보다도 여기에 기울일 수밖에 없는 이런 처지에 있고 다만 진짜 원하는 것은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에 있던 말씀 있잖아요.

이게 잠언서에 나오는데 말씀이 인간에게 스며들지 아니하면 이거는 인간이 아니라는 거지요. 그렇다면 진짜 말씀대로 사시는 분은 누구 밖에 없습니까? 예수님 밖에 없으니까 예수님은 나중에 뭐가 돼야 돼요? 인간이 돼야 돼요. 육체를 지니고 와야 됩니다. 이게 참된 모델이에요.

하나님이 원하는 참 아들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기뻐하는 내 아들이라. 참된 아들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참 아들인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나서 결국은 육체로 허망하게 흙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뭐만 증거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만 증거 하기 위해서.

10분간 쉽시다.

참, 힘들다, 힘들어. 해물탕 먹은 것, 기운 다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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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8,422건 중 332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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