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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 1월 26일 강의강의-

광주 1월 26일 강의

이름 : 우리교회(IP:122.47.57.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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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교회(IP:220.♡.176.160)

07-02-21 15:52

광주 강의(07. 1. 26) 22-1

지난 시간에 요한 1서 3장 12절까지 했습니다.

오늘은 3장 13절부터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여기에서 우선 잘못된 해석부터 먼저 시작하겠습니다. 잘못된 해석이 어떤 것인가 하면, 내가 여기 있고 저쪽 형제가 있다. 내가 형제를 사랑해야 된다. 이것이 요한 1서 3장 방금 읽었던 13절 말씀을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하신다면 그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큰 오류입니다. 왜 큰 오류냐 하면, 사랑이 ‘나’라는 것을 정립해버리면 첫 번째 정립된 나에 대한 애착과 사랑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내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요한 1서 3장 13절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제가 먼저 선언하고 들어갔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사람이 내가 누구 누구를 사랑한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사랑해야 될 주체가 되는 나를 포기를 못하지요. 내가 사랑하지 않으면 저 사람을 누가 사랑할 수 있으랴! 내가 하나님 말씀 이룬다고 내가 사랑해야 되니까 누구부터 먼저 사랑해야 되는가 하면 남 챙기기 전에 남을 사랑할 수 있는 대견하기 짝이 없는 아주 훌륭한 나부터 내가 지독하게 사랑하지 아니하면, 나부터 정립하지 아니하면 남을 사랑할 그 다음 차례가 있을 수 없거든요.

그러다보니까 남을 사랑하는 일에 급급하기 보다는 먼저 나부터 깨끗하고 훌륭한 나로 만들어 놓고 그 훌륭한 내가 훌륭한 값 한다고, 말씀 지킨다고 형제 사랑을 하게 되면 만약에 내가 나에 대한 실망감을 느낀다든지 ‘아, 나는 이정도 인간밖에 안 돼.’ 라고 한다면, ‘내 주제에 어떻게 형제를 사랑해?’ 지금 형제 사랑보다도 자신을 추스르기에 더 급급해 하면, 이 요한 1서 3장 13절은 차후의 문제로 남겨두게 되는 거예요. 미루게 되는 겁니다.

결국 이것은 뭐냐 하면, 나부터 정립이 된다면 이것은 정립해야 될 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어요.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이기주의에요. 하나님말씀을 사랑하다는 것을 빌미로 삼아서 극단적인 이기주의를 유지해야 된다는 그러한 논리에 직면하게 되지요.

두 번째 내가 나를 너무 지독하게 사랑해서 얼마나 사랑하는지 요한 1서 3장 13절 말씀을 순종할 정도로 나는 나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다. 그 정도로 사랑한다. 그 정도로 사랑하는데 이렇게 대견스러운 내가 형제를 사랑하는데 형제라는 인간이 나의 고귀하고 숭고한 이 사랑을 안 받아준다든지 내가 기대한 만큼 반응이 안 나타나면 그 형제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사랑하겠어요, 미워하겠어요? 미워할 수밖에 없지요.

내가 당신을 위해서 온갖 희생을 다 했는데 당신은 내게 해 준 것이 뭐가 있느냐? 그렇게 되는 거죠. 이 말은 뭐냐 하면, 어떤 인간이든 행동에 나서게 되면 반드시 행동에는 기대치가 있게 마련이고, 그 기대치에 부응되느냐 마느냐에 따라서 사랑은커녕 미움으로 결론이 난단 말이지요.

‘네가 나의 사랑을 안 알아주고 말이야. 내가 누군지 알아? 골목대장 마빡이야. 골목대장 마빡이를 몰라보고.’ 만날 이러잖아요.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내가 누군 줄 알아? 나는 요한1서 3장 13절 말씀대로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마빡이야!’ 이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이런 나를 교회에서 몰라보고’ 이러고 있어요.

지독한 자기 사랑으로 인하여 자기 사랑에서 나오는 고결한 하나님의 말씀 사랑을 교회의 주위 사람들이 안 알아준다고 해서 그때부터 자기편과 자기편 아닌 사람을 가르고, 그 다음부터 남을 시시하게 보고 미워하는 그 원인 제공을 누가 하는가? 바로 본인이 자아 정립에서 비롯되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성경 보면서 내가 뭘 하겠다고 출발점을 이렇게 갖는 그 순간부터 그것은 하나님 말씀하고는 동떨어진, 아무 상관도 없는 자기의 신앙 자랑이라고 생각하시면 딩동댕 맞는 말입니다.

이렇게 자기가 내 놓을 수 있는 사랑과 소망과 믿음을 제시하겠다고 할 때 이미 주위 사람들은 그 사람의 노예가 되고 희생물이 되지요. 그 사람의 훌륭함을 증명해주는 노리갯감으로 전락해 가는 겁니다.

이런 경우가 참 많이 있습니다.

며느리가 되어서 주 안에서 부모님을 섬기라고 해서 열심히 시어머니를 섬겼는데 그 시어머니가 자기한테 재산을 남겨줄 줄 알았더니만 말썽꾸러기 아들한테 재산 다 물려주고 죽었을 때, 얼마나 시어머니를 원망하겠습니까? 여기서 원망 안 할 사람 누가 있겠습니까. 다 원망하지.

그러면 주 안에서 부모를 섬기라고 했던 그 사랑은 결국은 어떤 반대급부를 요구하는, 내가 이만큼 훌륭한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증거물로 타인들을 이용한 것밖에 안 되지요.

지금 제 논리에 의하면 여기에 안 걸리는 사람이 없어요. 모든 인간이 성경 보면, ‘아 순종해야지. 순종하기 위해서는 나부터 정립해야지. 하나님이여 이제부터 날마다 사랑할 겁니다.’ 라고 시작할 때부터 이미 문제에 접어들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것에 대한 힌트가 어디에 있는가 하면 14절 끝에 나옵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사망에 거하느니라” 여기에서 거한다고 하는 상태동사에 들어가면 이것은 공간 개념입니다. 공간이란 말은 어떤 사람이 개별적으로 딱 떼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성경 해석 잘못된 것이고, ‘우리는 지금 어떤 공간 안에 지배를 받고 있나?’ 이렇게 출발해야 합니다. ‘내가 처한 공간으로부터 어떠한 혜택과 어떠한 능력을 부여받고 있는가?’ 이렇게 출발해야 됩니다.

상당히 어렵게 했는데,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사람이 내 시간이라는 것. 내 시간을 따로 갖게 되면 거기서부터 ‘나’라는 것이 정립이 돼 버려요. 이기주의로 나가는 하나의 시발점입니다. 내 시간, 내 역사, 내 과거, 내 미래. 나를 중심으로 시간을 잡아버리면 이것이 이기주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이런 경험을 했다.’ 하면 내 시간 따로 하고, ‘나는 고등학교부터 대학까지 이런 과거를 거쳤다.’ 하고 내 과거, 시간을 잘라서 나만의 역사, 나만의 시간으로 잘라버리면 그 전체가 뭐냐? ‘나’라는 Identity, ‘나’라는 주체성이 확립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해서는 말씀을 못 지키거든요.

시간을 없애버리는 것이 뭐냐? 이걸 가지고 묵시라고 합니다. 묵시라는 것은 내 시간이 아무 쓸데없고 의미도 없고 소용도 없는 거예요.

시간은 원래 나에게 없다고 생각해 보세요. 내 시간이 아예 없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시간 전체가 하나의 창고, 공간이 되어버리죠. 내 시간이 없어요. 내 시간을 따로 챙기면 거기서 ‘나’라는 이기주의가 발생되지만 내 시간이 아예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은혜 속에 그냥 파묻혀 있는, 폭설 속에 파묻혀 있는 그런 입장이 되는 겁니다.

요즘 시청률이 40~50% 가까이 되는 [주몽]의 예를 한번 들어봅시다. 송일국이 주몽 역을 맡았는데, 그 드라마 제목이 ‘주몽’이기 때문에 그 당시 일어나는 모든 천재지변이라든지 여러 가지 움직이는 모든 것이 누구 중심으로 보는가 하면, 주몽 중심의 역사로 다 몰아가지요.

일식으로 해가 가려졌다. 해가 가려지는 것도 다물군이 나중에 새로운 조선을 회복하는 것으로 해석하잖아요. 신녀들이 다 이런 식으로 해석하고, 그 다음에 주몽의 의붓아버지 되는 금아 왕 얼굴 반쪽이 꺼멓게 되었잖아요. 저주를 받아서. 이것도 주몽과 관련을 시켜서 사람들은 이야기 한단 말이지요.

그러면 시청자들은 주몽의 입장에 서서 주몽의 역사에 동참을 하게 되지요. 동참하게 되는데, 만약에 [주몽]하는 그 시간에 노무현대통령이 연설하면 기분 되게 나쁜 거라. 지금 MBC 주몽 하는 시간에 노무현이 왜 나오냐 말이지요. 노무현 연설 때문에 11시에 주몽 했어요. 주몽 역사 속에 나만의 역사를 잠시 접어두고 주몽 역사에 합치해보니까 이제는 주몽과 함께 가는 거예요. 주몽이 만약 얻어맞고 일이 꼬이면 그 다음날은 화가 나고 일이 손에 안 잡혀. 주몽이 승리하면 그 다음부터는 일이 손에 잘 잡히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나만의 역사를 따로 챙기기 때문에 이기주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게 사실은 드라마가 끝나버리면 다 허망한 것들이에요. 헤겔이란 철학자는 이것을 가지고 ‘가상’이라고 합니다. 허상이지요. 환상이지요.

이 세상 움직이는 것이 성경을 보면 복음적으로 움직이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자기 의로움 중심으로, 자기 잘남을 중심으로 자연 변화가 돌아가는 것처럼 그렇게 여기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나에게 대드는 저 인간 망했단다. 내게 대들었으니까 망해야지.’ 하는 그 때의 상쾌함. 기분 좋음을 느끼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런 뜻이 아닌데.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다른 말로하면 십자가 복음 중심으로 돌아가는데, 우리는 그렇게 보지 않고 내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고 싶은 겁니다. 이것은 내 욕망이 만들어낸 가상이고, 허상이고 부질없는 발상에 불과한데, 이상하게 우리는 여기에서 벗어나질 못해요.

그래서 묵시의 세계와 역사의 세계의 차이점을 제가 여기서 잠시 말씀을 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묵시라는 것은 시작과 중간과 끝이 그 자리에 함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 고 합니다. 여기에서 문제를 내겠습니다. 985년은 며칠 입니까? 1,000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1,000년 같으면, 985년은 어떻게 돼요? 이것도 하루가 되는 겁니다. 1,000년이 하루 같다는 것은 숫자로 비교하라는 말이 아니고, 시간은 질이 중요하지 양이 의미 없는 세상, 이것을 묵시의 세계라고 합니다.

현재 어떤 공간,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지, 그 놓인 상태에서 몇 년 흘러갔는가? 거기에서 신앙생활 몇 년 했는가? 이런 것은 안 쳐주는 세계가 묵시의 세계입니다. ‘내가 이 교회 나온 지 몇 년 되었습니다.’ 라든지 ‘장로, 목사 된 지 몇 년 되었다.’는 이런 것은 아무 의미 없는 것입니다. 왜냐? 이것은 자기 역사이기 때문에.

묵시의 반대가 역사입니다. 역사에는 시작과 끝이 구분돼요. 이것이 어려운데, 시작과 끝이 구분되면, 묻습니다. 끝이 되면 시작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이것이 역사의 세계입니다. 이건 어렵지 않은데.

2006년도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졌어요. 벌써. 2005년도 없어졌어요. 왜냐하면 현재 있는 것은 2007년 밖에 없기 때문에. 그러나 묵시 시계는 뭐냐? 지금 선악과 따 먹은 효력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지요. 우리는 선악과 구경도 못했습니다. 얼마나 맛있는지 우리는 모르지만 선악과의 그 원리는 우리에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우리가 태어났습니까, 안 태어났습니까? 안 태어났지요. 예수님이 십자가 달리실 때 사도 바울이 그 현장에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없었지요. 그런데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보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했지요?

십자가는 역사로 해석해서는 안 된단 말이지요. 옛날 십자가가 지금 오늘 우리를 구원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10년 후도 그 십자가 사건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왜냐, 묵시 세계에서는 시간 흘러감이 의미가 없기 때문에.

지금 묵시 세계는 어떤 것이 통치하고 어떤 것이 지배하고 어떤 것이 은총으로 내려오느냐? 묵시를 지배하는 그 역사의 질, 성격 이것이 중요하지 지금 몇 년 흘러갔는가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시간은 흘러가기에 과거는 지금 없습니다. I.M.F가 지금은 없습니다. 그 여파가 있든 말든 지금은 없어요. 그런데 묵시에서는 지나간 십자가 사건이 지금 우리와 함께 있고, 과거에도 함께 했고, 미래의 역사에도 함께 다 들어 있는 거예요. 이런 경우를 간단히 말해서 ‘거한다’고 합니다. 어떤 장소, 어떤 처소에서 빠져나가지 못할 그러한 범위 내에 그냥 놓여 있는 거예요.

내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놓이게 만든 그 공간이, 공간 자체에 와보니까 이웃 사랑이 넘쳐나는 공간에 내가 와있는 거예요. 여기서는 내 임의대로 내 역사를 못 만들고 주님이 주신 능력대로 이웃을 사랑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그러한 공간 속, 이것을 ‘생명 안’이라고 이야기하고, 아무리 애써도 이웃을 사랑할 수 없게 만드는 공간을 본문 말씀에는 ‘사망에 거한다.’고 한 것입니다.

나쁜 짓해서 사망에 거하는 것이 아니고, 사망이 나보다 더 우월하여 나로 하여금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게 만드는 그러한 영적인 공간 속에 우리가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궁금한 것이 ‘나는 어디에 놓여 있습니까? 나는 생명에 거하고 싶지 사망에 거하고 싶지 않습니다.’ 라고 다 이야기하지요. 이렇게 될 때, 오늘 본문은 뭐라고 하는가 하면, 네가 어느 공간에 놓여 있느냐(사망이냐, 생명이냐) 하는 것은 각자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지금 사랑을 알면 그 아는 장소가 바로 생명이 있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네가 주님의 사랑을 알게 되면, 사랑을 아는 네가 이웃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너를 알게 한 그 사랑이 너로 하여금 사랑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믿음으로 사랑이 찾아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내가 사랑하고 말고 할 그런 사랑이라면 그것은 주님의 사랑을 안 받은 사람입니다. 사랑하고 싶으면 사랑하고 미워하고 싶으면 미워하고 그런 입장에 우리가 놓여 있다면, 이것은 내가 어디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거한다’는 묵시 세계와는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진정한 묵시 세계 속에 놓인 것을 안다면, 나에게 찾아온 그 사랑이 그 이후에 나로 하여금 이웃을 사랑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사랑으로 나를 가지고 이용하는, 사용하는 그러한 사랑이 믿어질 때 그 사람은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력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사랑을 알았으니 그 사랑이 우리를 가만 두지 않고 우리로 하여금 그 사랑을 이웃 사랑까지 퍼지게 만들 때 이것은, ‘나는 생명에 놓여 있다.’고 믿으면 된다는 거예요. ‘내가 뭘 했다.’가 아니라, 이렇게 되면 또 내가 정립되니까, 또 이기주의가 되니까.

그래서 교회에서 “집사님! 무슨 사랑이 이렇게 많아서 나를 사랑해 줍니까?” 할 때, 자기 역사만 고집하는 사람은 “제가 10년 전에는 못했는데 이제 제가 할 수 있거든요.” 왜? 이제 이만큼 성화되었기 때문에. “10년 동안 열심히 배우니까 이제 할 수 있겠네요.”

이런 사람은 10년 전에는 못했는데 지금은 할 수 있고, 그러면 앞으로 10년 후에는 할 수 있을지 없을지 어떻게 장담합니까? 장담 못하지요. 이런 사람은 사랑을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하면, “아이쿠 집사님, 어떻게 그런 사랑을 베푸십니까?” 할 때, “내가 사랑한 것이 아니고 주님의 사랑이 나를 통과해서 나를 몰고 가서 주님의 사랑이 집사님을 변화시켰습니다.” 라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의 사랑을 증거하는 고백이 나올 때, 그 사람은 여전히 사랑이라는 통치 권한 속에 사로잡힌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고 본문을 보면 과연 제 말이 맞는지 확인이 되겠지요.

13절에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보세요. 이미 공간의 패가 갈려졌잖아요. 저쪽 패가 이쪽 패를 미워할 때 이상히 여기지 말라. 지금 세상은 내가 놓여 있는 공간을 시비를 걸거든요.

14절에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이것은 누가 안 가르쳐줘도 본인이 안다는 말입니다. 본인이 아는데 자꾸 ‘알아야 된다, 알아야 된다.’ 그 말이 아니고, ‘이것은 제가 한 것이 아니고 집사님, 주님의 사랑이 그렇게 했습니다.’ 본인이 이미 알고 있는 상태에서 그런 고백을 하는데 그걸 누가 말릴 수 있습니까? 못 말리지.

본인이 알고 있다는데 옆에서 자꾸 ‘네가 아는 게 아니야.’ 라고 우겨도 소용없는 거지요. ‘네가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아?’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내가 알고 있는 사랑을 그가 모른다는 말은, 그 사람은 사망에 여전히 머물러 있으니까 이 사랑의 출처가 어디인지 모르는 거예요.

우리는 이 사랑이 내 사랑이 아니고 십자가에서 나왔다고 이야기하고, 사망에 거하는 사람은 ‘아니야, 내가 사랑하면 사랑 할 수 있어!’ 자꾸 출처를 자기에게 두니까 우리는 답답하지요. ‘어이, 네게서 빠져나와. 네가 사랑한 것이 아니야.’ 그 사람은 ‘내가 사랑한단 말이야.’ 그러면 이쪽에서는 ‘네가 어떻게 사랑을 해. 주님이 사랑하지.’ 그러면, 저쪽에서는 ‘너는 신비주의구나.’

흔히 세상 목사들이 그러지요. ‘목사님, 그렇게 하지 마시고 주님의 사랑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하면,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그렇게 해서 어떻게 교인들을 격려하겠느냐?’ 그러니까 교육을 시켜야 되는데, 주께서 알아서 사랑하신다고 하면 모두가 주께서 하신 텐데 하면서 태만하고 방종할 테니까 그렇게 해서는 교회 꼴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떻게 하느냐? 간증집회 열어서 어떤 사람은 이렇게 해서 복 받았다. 여러분도 본받아서 복 받으세요. 이렇게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건 아니죠.

이미 생명으로 옮긴 사람은 누가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본인이 알고 있다니까요. ‘나로서는 도저히 이런 사랑이 나올 수가 없다.’ 함께 계시는 주께서 이런 일을 시켜서 이런 사랑이 나왔지 이것은 내 실력으로는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아는 겁니다.

3장 8절을 봅시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여기에서 마귀를 뭐로 보느냐 하면, 죄의 능력을 꽉 쥐고 있는 그런 존재, 그래서 어떤 인간도 본인의 의지로 못 벗어나는 강한 힘을 갖고 있는 그러한 존재가 마귀입니다.

그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은 여전히 묶여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해석하란 말이지요. 이 말은 상대방을 비판하는 말이 아니고, 현재 십자가의 사랑을 알고 있는 너는 네 힘으로 마귀에게서 빠져나온 것이 아니고 악마가 아닌 다른 힘에 묶여져 있기 때문에 너는 죄를 지을 수 없는 인간이 된 거지요. 짓고 싶어도 죄를 못 짓는 거예요.

그럼 뭐가 죄냐? 죄고 싶으면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이 죄고, 뭐가 죄 아닌가? 짓고 싶어도 죄를 못 짓는 것이 죄 아닌 거예요. 이 말에 시비 걸려면 시비 걸어보란 말이지요.

당신은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죄라는 개념을 내 주체 개념으로 보는 게 요한 1서가 아니고, 죄라는 것은 어떤 공간의 성질, 묵시적으로 볼 때는 악마의 질이냐, 아니면 성령님의 질이냐? 그 속성으로 따지기 때문에, ‘당신은 내 행동 여하에 따라 죄도 되고 의도 된다.’고 보지만, 나는 공간적 개념으로, 속성 개념으로 보기 때문에 ‘죄를 지어야만 죄가 된다고 여기는 그것이 죄고, 죄를 짓고 싶어도 못 지을 그러한 형편에 놓여 있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죄가 아닌 거고.’ 말 되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전도할 때 어느 인간도 예수님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어요. 12제자 중 한 사람도 알아듣지 못했어요. 성령이 오니까 그때야 아하, 주께서 공간 개념으로 이야기한 것을 가지고 우리는 유대교적 사고방식으로, ‘구원 받은 내가 어떻게 바르게 말씀 순종하느냐?’ 이런 개별적인 자기 자아 중심으로 성경 말씀을 성취해 보겠다는 그러한 열성으로 하니까 아무도 주의 말씀을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사람이 열심을 내게 되면요, 열심을 내게 된다는 말은 뭘 염두에 두게 되는가 하면, 열심히 아닌 것과 열심인 것을 이미 구분 짓는 잣대위에 본인이 서서 쳐다봐야 열심을 낸다는 말이 성립이 됩니다. 제 말 맞잖아요.

열심을 낸다고 할 때는, ‘아하, 이건 열심이 아니야. 이건 열심이야.’ 라고 결정짓는 기준점에 누가 있다는 말입니까? 본인이 있는 거예요. 이건 반칙이잖아요.

축구할 때 22명 선수 외에 3명의 심판이 따로 있습니다. 그런데 촐랑대기 좋아하는 이천수 선수가 자기가 선수도 하고 자기가 심판도 해서 자기가 한 것은 무조건 반칙이 아니래요. 그게 무슨 게임입니까? 그건 자기중심의 자기 역사지요.

아까 한 자기 역사 다시 한 번 해 봅시다.

사람이 아침 눈 뜨면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자기만의 역사입니다. ‘오늘은 광주에 가야하는데 눈이 적게 와야 할 텐데.’ 눈 오는 것은 복음을 위해서 눈이 오는데, 우리는 광주 가는데 자신이 힘들지 않기를 바라는 자신의 편함부터 먼저 챙기고 ‘폭설아 알아서 해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사실은 더 따져보면 그 폭설을 누가 내리는 겁니까? 하나님이 내리시잖아요. 그러면 결국 뭐냐 하면, ‘하나님, 당신도 내 마음대로 되어야 해.’ 이거잖아요. 이것은 마음속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것과 동일한 거예요.

그런데 기대 밖으로 눈이 더 올 때, 그 때는 무엇이 깨집니까? 역사에서 묵시로 옮겨갑니다. ‘주여, 잘못됐습니다. 광주 가고 안 가고가 의미 없는 나의 역사를 가지고, 나의 기준점을 가지고 주님의 기준점에 헤딩을 했던 것이 잘못입니다.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 차가 박든지 뒹굴든지 가든지 말든지, 코가 깨지든지 차가 빠지든지 주의 뜻대로 하옵소서. 주께서 복음대로 쓰실 겁니다.’ 이것이 아까 오 목사님 고백이잖아요.

주님께서는 오 목사님께 가끔가다 역사에서 묵시로 옮겨가도록 일깨움을 줍니다. 물론 주위 사람들의 역사도 함께 고통을 받지요. 사모님도 같이 역사가 깨어지는 고통. 기다리는 사람의 자기 역사가 깨어지는 고통.

우리는 매일같이 자기 역사를 포기 못합니다. 그런데 주님도 역시 묵시를 포기 못해요. 매일 싸우는 거예요. “두려워 말라!” ‘두렵습니다.’ 만날 싸우는 거예요. “이미 다 이루었느니라.” ‘그렇지만 제 욕심은 따로 있습니다.’ 만날 싸우는 거예요. 결국 주님께서 깨드리니까 나중에 이런 소리 하지요. ‘형제여, 나는 당신을 미워한 인간입니다.’ 이게 뭐냐, 두자로 ‘사랑’입니다.

주를 사랑하면서도 ‘나는 나밖에 모르는 인간입니다.’ 라고 나왔을 때, 형제가 뭐라고 하는가 하면, ‘형제여! 그것이 자비와 양선과 형제 우애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열매입니다. 자기는 형제에게 ‘형제를 미워하는 일 밖에 안 했다.’는 고백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받는 형제는 성령의 은혜로 받지요. 그러니까 ‘당신은 훌륭합니다.’ 고 했을 때, 내가 훌륭한 것이 아니고 요한1서 3장 16절의 말씀처럼, 주께서 나를 통해서 주의 사랑이 당신을 사랑하는 그 경우란 바로 내가 당신께 죄를 고백하는 경우를 통해서 이뤄집니다.

그러니까 주께서 일 하시잖아요. 물론 이 과정에서 나의 역사는 박살나지만 주의 사랑이 형제에게 사랑을 전달하도록 그렇게 되었잖아요. 그러면 말씀 성취되었잖아요. 그래서 주께서 다 이루었다는 고백 그것밖에 안 나와요.

15절을 봅시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자, 봅시다. 하나하나 따져보면 평소에 우리가 얼마나 성경 말씀을 잘못 해석 했는가 나타나요. 형제 미움이 살인으로 넘어가는 논리를 우리가 이해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우리에게서는 이런 논리가 안 나옵니다. 살인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고 미움은 죽이는 것이 아니고 그냥 미워하는 것이죠. 미움이 살인이라는 이 논리는 아무리 따져 봐도 우리는 이런 논리가 나오지 않아요.

그런데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곧 살인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이것은 어느 공간에 해당되는가 하면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공간 속에서만 이런 논리가 진리로서 우리에게 제시되는 겁니다.

우리는 아무리 따져도 형제 미움이 살인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깁니다. ‘주여, 내가 형제를 미워하긴 했지만 살인은 안 했습니다. 내가 어떤 가족을 미워하지만 죽였다고 하는 것은 너무 억울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형제 미움이 살인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어떤 근거에 의해서 미움이 살인이 됩니까?’ 라고 물을 때, 주님은 ‘너, 십자가에 대해서 들어봤나? 알아 봤나?’ 이렇게 나와요.

그러니까 형제 미움이 곧 살인이라는 공식이 살아있는 공간은 생명과 사랑 안의 공간에서는 성립이 되거든요.

그러면 생명과 사랑을 유지하는 그 원칙은 무슨 원칙입니까? 바로 우리가 잠시 잊었던 십자가 사건에서 나온 원리입니다.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마음속으로 간음한 것도 간음이다.’ 이것은 얼토당토않은 이야기에요. 그런데 주님은 우기는 거예요. ‘네가 하는 모든 맹세는 헛맹세다.’ 내가 그렇게 되고 싶어 맹세를 했는데도 헛맹세에요. 그러면 그것이 헛맹세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십자가 사건으로 가야 그 원인이 규명됩니다.

모든 성경 말씀은 우리를 어디로 몰고 가는가 하면, ‘네가 십자가에 대해서 도대체 얼마나 아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껏 안다는 것이 내가 교회 나와서 헌금하고 주일 지키고, 예배하고, 자꾸만 내가 주체가 되어서 내 위대함과 나의 대견함을 남에게 과시하는 식으로 뭔가 행했다는 것, 이런 것만 주어모아서 나만의 고유한 역사를 가지고 이것이 진리인 냥 우기고 있으니까 주님께서 그것을 때리면서 ‘네가 그것 때문에 십자가를 놓쳤구나. 자, 이 말씀 들이댄다. 형제 미움이 곧 살인이다.’ ‘주여, 저는 형제를 미워한 적은 있지만 살인한 적은 없습니다. 너무 심하십니다.’ 주님은 ‘네가 십자가를 놓쳤기 때문에 심하다는 말이 나온다. 따라서 이 말씀을 추적해서 다시 한 번 십자가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를 깊이 한 번 들어가 봐라.’ 하는 식으로 우리에게 말씀으로 깨우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제가 전도서 설교를 함부로 한다고 시비를 거는데, ‘전도서 전체가 완전한 한 권의 책인 것을 왜 모르느냐?’ 그렇게 나오는데, 저는 그 사람에게 묻고 싶어요. 성경 전체가 한 권인 것을 왜 모르느냔 말이지요. 전도서와 잠언서가 차이나면 안 돼요. 출애굽기와 잠언서 내용이 차이나면 안 됩니다. 성경 전체가 한 권입니다. 뭘 이야기합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것만 나와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성경은 곧 내(예수)게 대해서 증거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성경 전체에서 일관되게 예수님을 이야기하는 것을 모르고 전도서만 드려다 보면서 국어시간에 문단 나누기 하는 식으로 해서 결국 나오는 것은 ‘나는 이렇게 할 수 있고, 나는 저렇게 할 수 있고, 이것은 못한 거고--’ 이게 자아의 주체잖아요.

십자가와 연결되지 않는 그러한 설교가 무슨 설교입니까? 그렇게 해서 어떻게 전도서를 해석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언제 예수님이 전도서를 해석할 때 그렇게 했습니까? 전도서 전체를 묶어 한 마디로 해서 지혜, 그 지혜는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제가 십자가 전했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틀렸데요.

십자가가 지혜고, 지혜가 전도서의 목적인데, 전도서 설교하면서 십자가 이야기했는데 그것이 왜 틀려요.

성경 말씀은 사람들에게 어떤 교훈을 주기 위함이 아닙니다. 교훈이라는 것이 얼마나 엉터리고 무서운 것인지 한 번 보세요. 자, 목사님이 교인들에게 교훈을 한다고 합니다.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한 수 가르치겠다는 거예요. ‘나는 이 말씀을 이렇게 지켰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왜 이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습니까?’ 라고 한다면, 교인들은 목사에게 뭘 요구하는가 하면 목사나 자기나 똑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같은 인간인데 그분이 지켰고 나는 못 지켰다면 지키는 방법론이 있을 것 아닙니까? 어떤 기술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그 기술을 전수받아서 두 번 다시 그 목사에게 잔소리 듣기 싫은 거예요.

옛날 어린 시절 우리 할아버지가 얼마나 잔소리를 하는지 나중에 보니까 그게 행동이 나빠서가 아니라 나를 미워해서 나온 잔소리인줄도 모르고 나는 할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그대로 하면 사랑 받을 줄 알았어요.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더 화가 나서 내가 지키기 힘든 숙제를 계속 제시하는 거예요. 그래서 나도 한 오기 하잖아요? 계속 완벽하게 더 지킵니다. 예를 들어, 잠을 잘 때 베개를 반듯이 하고 자라는 것 까지 간섭을 해요. 그래서 평소에는 자유롭게 자다가 할아버지 오신다고 하면 반듯이 해서 당신에게 보란 듯이 한 거예요. 이게 뭡니까? 이게 오기 싸움이고 자존심 싸움이지. 이것은 사는 게 사는 게 아닙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해서 미움 받는 자예요.

사울이란 왕이 회개를 얼마나 자주 했습니까. 그런데 계속해서 사무엘에게 밉상 받지요. 왜냐하면 미움 받기로 작정되었기 때문에 그래요. 이것은 인간의 행동여하에 따라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미움 받기로 작정된 인간은 어떤 짓을 해도 밉상이고, 사랑 받기로 작정된 자는 어떤 행동을 해도 고운 자식이에요. 이미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은 무슨 짓을 해도 주님께 기쁨이 되는 겁니다. 까불어도 기쁘고 교만해도 기쁘고 다 기뻐요.

물론 이것을 깨 부숴서 십자가로,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너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원천이 십자가에서 흘러나온 사랑이기에 십자가를 보고 너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목사가 교인들에게 교훈삼아 설교를 한다면 교인들은 오기가 있어서 ‘목사 네가 잘 지키나, 내가 잘 지키나 한 번 붙어볼까?’ 이렇게 나올 수가 있습니다. 고분고분한 사람은 그렇지 않지만 한 신앙했다는 사람들이 교회에 오면 눈에 불똥 튀게 목사와 신앙경쟁을 하면 골치 아픕니다. 목사가 새벽기도 때 30분 기도하면 자기는 35분 기도하고, 목사가 40분 기도하면 자기는 기어이 45분 하고.

결국 이것은 말씀에 대한 곡해, 잘못된 해석 때문입니다. 목사가 잘못된 해석을 하니까 자신이 교인들을 교훈할 자격이 있는 것으로 착각을 하고, 그것으로 인해 교인들은 이만하면 이 말씀에 대해서 더 이상 지킬 것이 없이 완벽하다는 착각에 빠지게 합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반드시 죄가 고백되어야 해요. 그 죄는 아까 이야기한 간음도 아니고 살인도 아니고, 내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가 된다는 이러한 생각이 바로 죄입니다. ‘내가 주체가 되어서 내 행동 여하에 따라 죄가 되기도 하고 의가 되기도 한다는 이러한 착각이 바로 이 목사가 여러분에게 잘못 가르쳐서 그렇습니다.’ 라고 회개할 때, 이것을 자백할 때, 교인들도 ‘목사님만 그런 줄 압니까, 저도 그런 착각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제 목사님 말씀 듣고보니 우리가 주님의 사랑으로 인도받는 것을 모르고 내가 잘해야 사랑받고 인도 받는 줄 알고 착각했었습니다.’ 둘 다 부둥켜 앉고 울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린단 말이지요. 물론 이것도 연출된 상황일 수도 있지만, 이런 것을 다 믿을 수는 없지만 --

어찌했든 초대교회에 유무상통하고 서로 나눠주고 했던 것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했습니까? 서로 나누자는 교훈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된다는 놀라운 기적 때문에 정신없이 주고, 정신없니 내 놓는 거예요.

더 이상 내 행동여하에 따라 구원되고 안 되고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성령이 오게 되면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게 되고, 예언을 하고 이것이 자기가 소유하거나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주께서 주시니까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잖아요. 내가 십자가 피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는 자체가 이미 딴 사람으로 변화되었다는 뜻이고, 이 변화의 능력은 자신에게서 유발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알잖아요. 그러니까 그 때부터는 가르치는 것에 급급한 것이 아니고 증거하는데 급급하고 고백하는데 급급하다 보니까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사랑만 나오는 거예요. 이게 정말 멋진 교회 아닙니까?

미움이 살인이 되는 것을 인간들은 감히 생각을 못했습니다. 미움은 미움이지 살인과는 달라요. 그런데 십자가에서는 주님에 대한 미움이 결국 주님에 대한 살인으로 되었습니다. 이러한 본성이 아담 자손에게 계속 이어진다면, 우리가 미처 이런 본성이 있는 줄 몰랐다 뿐이지 이런 본성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발적인 살인 같은 것은 언제든지 나올 수 있는 거예요.

아주 미운 교인이 입원을 했다. 그래서 목사가 미워서 심방을 안 가면 그 교인을 간접적으로 살인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한 번 기도해서 위로해 주었으면 한 달 만에 나을 것을 미워서 안 갔더니만 희망을 잃어버리고 죽을 수가 있단 말이지요. 하하하 ---

기대를 잔뜩 한 애가 성적도 떨어지고 공부도 열심히 안 하고 하면, 미워서 밥도 덜 먹었는데 설거지를 한다든지 해서 무언의 압력을 준다든지, 청소를 하면서 괜히 앉아있는 아이의 발을 꽉 부닥치면서 걸레질을 한다든지 하는데, 이 순간 ‘너는 죽어도 기분 좋겠다.’는 자신의 감춰진 아담의 본성을 노출하는 거지요. 이것은 결국 나의 역사를 가지고 타인의 역사를 압박을 가하는, 나만의 기대와 나만이 가지고 있는 역사의 사슬로 타인을 공격했기 때문에 이것은 묵시적 사랑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원래 나는 애를 미워할 수밖에 없는데, 나는 평소에 착한데 네가 성적이 떨어졌기 때문에 너를 미워한다는, 평소에 나는 의로운데 너 때문에 나의 의로움에 흠집이 생겼다는, 그 탓을 자식에게 돌릴 때 그러한 모습이, 공부 못해도 구원 받는 자식이라면 얼마나 귀합니까? 공부는 못하지만 천국을 같이 간다는 것, 이게 얼마나 귀한 거예요.

그러니까 결국은 미움이 살인이라고 이야기했던 그 주님이 미운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내 죄인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은 주님의 넘치는 사랑입니다.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으켜서 십자가를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 말씀의 능력입니다.

16절에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보세요. 자꾸 십자가로 몰아가요.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렸다는 것이 십자가 아닙니까?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마땅하다는 말은 그렇게 되도록 조치하신다 이 말입니다.

자, 그러면 미움이 살인이라면 문제 내겠습니다. 쉬운 문제입니다. 미움이 살인이라면 사랑은 뭐가 됩니까? 생명이 되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미움을 사랑으로 바뀌게 함으로 말미암아 나로 인하여 상대방이 살게 하는 그러한 능력이 오는 거예요. 사랑이 생명이 된다면 곧 미움이 살인이 된다는 말이 맞잖아요?

사랑이 나를 살린다면 미움이 살인이라는 말이 맞잖아요. 앞의 것은 맞고 뒤의 것은 틀렸다고 하면 안 되잖아요. 뒤의 것이 맞으면 앞의 것도 맞는 거예요. 미움이 살인이란 말은 바로 주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었다는 말이 맞는 것을 보니까, 미움이 살인이 되는구나. 그러니까 나에게 생명이 왔다는 것은 주께서 우리를 사랑했다는 거고, 심지어 우리가 남을 미워할 때도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는 구나. 그 사랑을 내가 왜 모르고 애들한테 닦달을 했나? 나는 공부 잘해서 구원 받았나? 공부 못해도 구원 받았는데 내 아들 공부 못한다고 그렇게 닦달을 했구나. 이로서 내가 이제 사랑을 알았으니까 이제부터는 미워서 때리는 것이 아니고 사랑으로 때려서 공부 더 하게 하는 거예요. ‘이제 TV 그만보고 들어가!’ 이제 사랑으로 하는 거예요.

결론이 아주 명쾌하게 되었지요?

20절을 봅시다.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거든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일까보냐”

우리가 어느 공간에 속했단 말이지요. 우리를 다 감찰하시고 아시는 공간속에 있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21절을 보면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그의 계명들을 지킨다.’는 말에서 그 계명은 바로 사랑입니다.

24절에 보면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뭐냐 하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계명이 우리에게 늘 주어져 있다는 것, 계명은 사랑입니다. 그 당시 유대의 풍토에서 계명이라고 하는 거예요. ‘사랑이 우리 안에 거하는 줄을 우리가 안다.’ 그래서 이 아는 것을 우리가 증거하면 된다는 말이지요. 뭘 걱정합니까. 이것이 담대함이에요.

모르면서 아는 채 하면 담대함이 없지만, 내가 십자가 피의 사랑으로 구원 받은 것을 안다면 거리끼지 말고, 자꾸 나의 역사 따로 만들 필요도 없이 어떤 공간 속에, 사랑 속에 지금 인도받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랑을 쳐다보면서 담대하게 살아라는 이야기가 3장의 내용입니다.

10분간 쉽시다.

(2007. 2. 13. 14:12 녹취 마침)

우리교회(IP:220.♡.176.160)

07-02-21 15:52

광주 강의(07. 1. 26) 22-2

둘째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요한1서 4장 2절에 보면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거짓 영이냐, 아니면 참된 영이냐? 거짓 선지자냐, 참된 선지자냐? 하는 것은, 본인이 참된 선지자라고 우기고 큰소리친다고 될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의 육체의 그 의미, 담긴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이 참된 선지자냐 아니냐가 판명되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육체가 지닌 의미가 뭐냐 하는 것은, 4절 이하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6절에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이렇게 되어 있지요.

여기에 ‘속했다’는 말을 첫째 시간에도 이야기 했습니다만 지금 공간개념을 가지고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속했다’는 것은 우리의 우두머리가 따로 존재하고 우리는 그 우두머리에 의해서 영향 받는 그러한 형편과 처지에서 우리 자신에 대해서 봐야 된다는 겁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뿐만 아니고 상대방을 이해할 때도 그가 개인적인 자질이 얼마나 뛰어난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당신은 누구로부터 영향을 입고 그의 지시와 통제를 받는 사람입니까? 우리는 이분으로부터 받습니다.’ 하는 서로가 다른 공간의 속성으로 비교를 해야 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여기 왜 예수님이 육체로 오신 것이 참된 영과 거짓 영을 구분하는 절대 기준이 되는가 하면, 예수님의 육체에서 비로소 참된 영이 나오기 때문에 그래요.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세상에 많은 거짓 영이 있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이 세상 종교가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뜻이에요. 많은 종교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 많은 종교들이 무엇을, 인간들에서 무슨 결핍을 보충하기 위해서, 인간들의 무슨 한 풀이를 들어주기 위해서 종교들이 그렇게 융성하고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겠습니까?

사람은 자기 자신을 볼 때, 자기 육신이 이렇게 괴롭고 고통스럽고 자기 인생을 돌아볼 때 슬프다는 생각을 지울 길이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다 그래요. 사람이 아무리 하나님이고 예수고 하지만 자기 몸이 아프면 ‘내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아픈가? 남은 안 아픈데 나는 왜 건강을 잃었는가?’ 라면서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인생을 가난하게 산다든지 힘들게 산다든지, 누구한테 사기를 당했다든지, 민족이 나라를 빼앗겼다든지, 직장에서 바른 소리 했는데, 강제 퇴직을 당했다든지 하는 경우를 당할 때, 사람에게는 욕망이 없어지는 게 아니에요. 기존에 내가 잘나야 된다는 욕망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현실이 거기에 안 따라주는 것에 대해서 뭔가 추가적으로 하나님께 애타게 기대하게 되고 기도하게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인간이 육체의 연약함을 알면 그 때부터 안 연약한 육체, 이상하게 나쁜 짓 하면 두 번 다시 나쁜 짓 안 하는 내 몸뚱아리. 그것을 잔뜩 기대하게 됩니다. 이것은 어떻게 되느냐? 사람은 새로운 신선한 영, 거룩한 영, 나를 훌륭하게 만들어 낼 능력을 담뿍 안고 찾아오는 영, 대단한 위력을 가진 영, 나로 하여금 모든 괴로움과 슬픔과 눈물을 씻어줄 수 있는 그러한 고상한 영, 성품도 착해지는 그런 영, 그 영을 구하게 되고 찾게 되지요.

괴로운 나와 그리고 그것을 회복시켜 줄 영, 이것이 인간의 종교적인 본능이고 본심입니다. 순복음 같은 경우에, 순복음 교단이 커지게 된 것은 조용기 목사의 개인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 몸이 그렇게 아팠는데 성령을 받고난 뒤부터는 깨끗해져서 성령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때부터 여기에서 가능성이 수입되지요.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절망이지요. 불가능성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아무리 현실적으로 어려운 지경에 놓여있다 하더라도 가능성, 된다는 희망이 남아있는 한 사람은 다시 한 번 용기를 낼 수가 있습니다.

‘참된 영은 예수님의 육체로부터 나온다.’는 이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로부터, 그 육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잖아요. 죽었으니까 부활하고, 부활되니까 성령을 보내시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만이 유일하게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구원 받을 영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은 예수님의 아픔은 이것은 남의 아픔이기 때문에 자기 아픈 것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몰라요. 거기에 별 관심도 없고. 중요한 것은 내가 아프고 내가 인생이 고달프고 괴롭다는 겁니다. 자기의 욕구대로 안 되는 비참함 속에 놓여 있다는 거예요. 그 원인을 남들에게서 찾고자 해도 찾을 수가 없어요.

물론 사람이 양심이 있는 이상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다 내가 옛날에 죄가 많아서, 업보가 그래서 그렇다.’고 하지만 그게 여러분 맞습니까?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고생하다가 죽는 것이 우리가 죄를 지어서 그런 거예요? 그런 겁니까? 그 죄라는 것이 우리가 나름대로 측정한 죄잖아요. 자기가 스스로 기준점에 되어서 ‘이것은 죄고, 이것은 의다.’라고 규정한 거잖아요.

성경에서 무슨 말씀이 있다 할지라도 그 말씀을 해석하는 것은 본인이잖아요. 그러니까 성경 말씀의 뜻과 관계없이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선악적인 구조를 가지고 성경을 해석해서, ‘이것은 죄고 이것은 의구나.’ 이렇게 나오는데, 그러한 판단 때문에 만약에 고난 받고 한다면 그것은 욥기와 달라요. 욥기에서는 그런 이야기를 할 수가 없다고요. 왜냐하면, 욥 같은 경우에는 친구들보다 더 착한데 문제는 친구들이 욥보다 더 고통을 안당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 아닙니까? 친구들이 완벽하다는 뜻이 아니고, 욥이 완벽하다는 뜻이 아니에요. 정말 욥이 죄 값으로 힘든 고난을 받는다면 욥보다 덜 착한 친구들은 욥보다 더 심한 벌을 받아야 합리적으로 맞는 이야기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 사도요한은 계속해서 예수님의 피, 예수님의 육체 그것에 도달하지 아니하면 ‘왜 하나님께서 나의 이 육체 중심으로 출발하지 않고 예수님 십자가 지신 그 육체 중심으로 모든 일을 하는가?’ 그 이유에 대해서 우리는 전혀 모르게 되는 겁니다.

이것을 모른다면 그것은 곧 성령께서 임해야 된다는 것도 모르게 되지요. 우리 허약한 육체와 그것을 능히 강한 사람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고상한 영이 임해서 영과 육이 결합될 때 우리는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면, 그것 자체가 거짓 영들이 주장하는 주장이라는 말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육신을 통해서 오셨는가 하면, 우리의 육체는 죄가 나오기 때문에, 죄인은 성령이 임할 수 있는 그 대상이 못됩니다. 죄인에게 성령이 온다면 성령께서는 거룩한 영이 아니고 그냥 더러운 것도 봐주는 영이 돼 버려요. 그것은 엉터리죠.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나온 영이 아니고 그냥 성령 같으면,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고 그런 귀찮은 일 할 필요 없습니다. ‘너, 너, 너 구원 받아!’ 이러면 되는 거예요. ‘아이쿠, 내가 보니까 너 고생 많은데 불쌍히 여겨줄게 구원 받아!’ 이러면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과해서 구원 받을 영이 나온다면, 이것은 어떤 인간도 자기의 괴로움, 병듦, 허약한 육체 가지고 ‘저는 너무 억울합니다.’ 라는 소리를 못하도록 완전히 입을 막아버리는 겁니다. 어떤 인간도 구원 받는데 꽉 막혀 있어요. 베드로는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내 놓고 주님 따르려는 이런 다짐을 했는데 주님께서 그것을 거절하잖아요. ‘안 된다. 너는 목숨 받쳐도 나 있는 곳에 오지 못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이 세상 모든 것이 꽉 막혀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막혀 있는 상태에서 ‘우리가 전도해서 구원 받을까요?’ 라는 것도 죄고, ‘찬양해서 구원 받을까요?’ 라는 것도 죄고, ‘예수 믿어서 구원 받을까요?’ 라고 나오는 것도 죄예요. 왜냐하면 구원 받을 자격이 안 되는데 구원 받으려고 하는 그 의욕과 시도 그 전부가 성령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타고난, 자기가 자기를 살리고자 하는, 자기 전체가 죄인인 것을 인정 못하겠다는 데서 나오는 오기 또는 고집 그런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에 비위를 맞추면서, ‘당신의 구원 욕구와 회복 욕구를 성령이 오게 되면 달성할 수 있습니다.’ 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것들이 바로 적그리스도고 거짓 영들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육체를 거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게 될 경우에, 꽉 막혀있다고 하면 두 영토가 완전히 구분되게 되겠지요. 하나는 예수님이 계신 영토. 거기는 성령이 충만합니다. 여기는 주님의 거룩한 육체가 있으니까. 이것 말고 꽉 막혀있는, 서로 내통할 수 없는 두 영역이 서로 통할 수 없는 또 하나의 바깥에 있는 영이 있죠. 이것은 바로 꽉 막혀 있는 영역인데, 주님의 성령께서는 십자가의 효과를 가지고 도저히 구원될 수 없는 인간에게 주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그 효력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예수님 자기 영역으로 빼 옵니다. 자기 영역서 합류시키지요.

그렇게 되면 원래 있었던 동네 사정도 알고, 새로 자기가 소속된 동네도 아는데, 이 사람은 다음과 같이 고백하지요. ‘나는 전적으로 구원될 자격도 없는 인간인데 예수님을 통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기 이렇게 오게 되었습니다.’ 라는 이야기를 하게 된다 이 말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나올 때 그는 무엇만을 증거하는가 하면 ‘나는 이런 일을 해서 구원 받았다.’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은혜가 아니었으면 나는 구원될 수 없는 인간이다.’ 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나는 도저히 구원될 수 없는 인간이다. 이것을 요한1서 4장 4절에서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6절에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뜯지 아니하나니” 왜? 꽉 막혀 있으니까 그런 겁니다.

우리도 전에 주님을 몰랐을 때는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구원 받는다는 것을 아주 우습게 여겼지요. 그런데 이제 우리가 새로운 영역에 오다 보니까 저쪽 사정 이쪽 사정을 다 아니까 그야말로 사람의 힘으로 그 영역 이동이 불가능하다는 것도 깊이 알지요.

그래서 우리가 그 사람에게 다가갈 때는 요령을, 어떤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성령이 임해야 구원 받습니다.’ 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어요.

순복음 같은 경우에는 인간의 가능성을 계속 제시합니다. ‘내가 이런 식으로 하니까 성령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그 소리 듣고 병들고 고생하는 사람들이 가능성 있는 기적을, 희망을 안고 순복음 교회 조용기 목사의 말을 듣는 겁니다.

그러면 그들은 어떤 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수입하는가 하면, 먼저 성령 받은 사람들의 경우를 전부 다 모아서 그들은 어떤 식으로 거듭나게 되었는가 그 방법론을 다 배웁니다. 물론 그 전체가 불가능성이 아니고 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배울 욕구를 가지게 되는 겁니다. 아예 되지도 않는 것이라면 무엇 때문에 배우겠습니까? 하면 되게 되어있기 때문에 그 방법론을 몰라서 못했을 뿐이지 그 방법을 알면 누구든지 할 수 있다. 끝까지 인내를 가지고 하면 할 수 있다. 이런 희망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계속해서 이 희망으로 모이는 겁니다.

모여서 자기가 존경했던 사람과 같이 방언이 터지면 그 다음부터는 자기가 소망하는 바를 다 얻었다고 여기고 안심을 하게 되지요. ‘야, 나도 성령 받은 사람의 부류에 속했구나.’ 그러면 자기가 못했는데 자기가 이렇게 되니까 이것을 자랑삼아 다른 사람에게 전도하는 거예요. ‘당신도 안 된다고 하지 말고 된다니까.’ 이렇게 자꾸 희망을 주니까 그 사람도 또 제 2의, 제 3의 자기처럼 또 그렇게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그렇게 해서 커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해서 순복음 교회가 커진 것은 뭐냐 하면, 불가능성이 아니라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십자가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성령을 달라고 하면 주어진다는 겁니다. 사도행전을 가지고 그렇게 설명을 해요. 사도행전에 성령 받은 사람이 나오거든요. 그러면 순복음 교회는 이야기합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람은 어디 처음부터 인간이 아니고 천사였나? 그게 아니라는 거죠. 그들도 인간이고 우리도 인간이라면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람처럼 우리도 성령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방언이 터지고 병을 고치고 서로 자기 재산을 나눠주고 이상적인 공동체가 형성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 희망 자체가 사람에게 희망을 주지요. 사람이 희망을 달성했는가가 아니라 계속적인 희망이 없으면 사람은 살맛을 잃어버립니다. 그런데 하나가 성취되면, 이렇게 해서 이렇게 되었는데, 그 다음 목표도 달성할 수 있다고 계속 새로운 희망을 제시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런 순복음 편을 들어주지를 않지요. 그것은 이단이니까.

요한복음 16장 끝에 이런 말씀이 나와요. 33절에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여기에서 ‘내 안에’라는 말이 나오죠?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여기에서 세상을 이겼다는 것은 누가 이겼다는 것입니까?

지금 이 성경말씀을 가지고 아까 한 이야기를 연결시키면 이렇습니다. 환란을 당할 때 이것은 성령이 안 와서 환란 당한다. 성령만 오면 환란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해서 영을 찾게 되면 순복음적인 영밖에 찾을 수가 없어요. 물론 거짓 영들이지요.

그런데 성령 받아도 환란 당할 때 그 의미를 이렇게 봐요. 환란에서 벗어나서 승리가 아니라 환란 속에서도 승리가 되어야 그게 참된 성령이 임한 사람입니다. 환란은 환란대로 있고 그러면서도 거기에서 승리감을 마음껏 누리는 것, 이것이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환란의 대처 방법을 내가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또 내가 너무 어렵다. 힘들다. 해서 나온 것도 아니고, 내가 힘들든 힘들지 않든 주님께서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그 승리가 나아게 임하니 그 승리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비록 환란 중에 있더라도 그 환란을 구태여 피해 갈 필요도 없을 정도로 그 안에서 이미 승리를 만끽하게 만드는 그런 성령이란 말이지요.

주님이 승리했기에 내가 구태여 승리할 필요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요한1서 다시 보면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 속했다는 말은 이미 승리 안에 속한 거지요. 그리고 그 승리하는 것은 예수님의 육체로 이루신 것입니다. 우리 육체가 아니고.

이제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육체만 고집하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왜 우리 육체부터 시작하지 않는지 그 이유를 아시겠지요. 예수님을 우리 소속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예수님 소속으로 만들어서 예수님이 이긴 그 이기심이 우리의 이김이 되게 하기 위해서 어떤 공간 개념으로 주님께서 우리를 다루신다는 것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겁니다.

그 다음 요한1서 4장에 보면 사랑에 대해서 나오는데, 9절을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사랑을 설명하면서 구태여 사도요한이 이 말씀을 삽입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라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는 말을 넣지 않고 “사랑은 여기 있으니 하나님이 독생자를 보내시고 화목제물 되었다.” 라고 이렇게 썼을 때, 차이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라는 것을 삽입하는 것과 이것을 빼는 것과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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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