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제사와 예수님 (히 10:5-7)
레위기 강해 7 이근호http://222.231.1.74/~woorich/성경강해/레위기-1990/(07)제사와예수님(히10,5-7).MP37. 제사와 예수님 (히 10:5-7) 구득영 2002-05-08 09:28:48, 조회 : 137, 추천 : 0
7. 제사와 예수님 (히 10:5-7)
오늘 이 시간에는, 우리가 계속 살펴보는 레위기를 잠시 멈추고, 이 레위기의 제사가 신약 성경에서 어떻게 기록되어져 있는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간단하면서도 설명을 하려고 하면 사실은 상당히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정작 이 믿음에 대해서 말하려고 하면 머뭇거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위해서 이 땅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준비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즉, 믿음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더욱더 어렵게 느껴지십니까?
쉽게 말씀드려서, 믿음이라는 것은, "여기 있소!" 라고 내어놓을 수는 없지만, 우리의 마음속에 끌리고 당겨져서 믿어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렵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분명히 이 믿음이 있어서 아는데, 그런데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니, 힘든다는 것입니다. 아니, 불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 애써서 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 주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안 보이는 것이 있는데, 우리는 믿는다" 라고 하면, 그것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남을 설득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보이는 세계는 마음대로 비행기를 타고, 배를 타고 갈 수 있지만, 그러나 보이지 않는 세계인 천국에는 못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것을 준비해야 하는 것인데, 그래서 믿음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래서 이 믿음을 보이는 쪽으로 만들어 버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어느 집사님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을 했습니다. "집사님, 믿음이 있습니까?" "예,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예수님을 믿어서 부자가 되었습니다" 라고 한다면, 그것은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부자가 되었다고 하는 눈에 보이는 것을 믿음이라고 내어놓았기 때문입니다.
병 고침을 받은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좋은 의도라고 할지라도, 내가 병을 고침 받았기 때문에 그것을 믿음이라고 내어놓는다면, 그러면 예수님을 믿고 병 고침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믿음이 없는 것이 되고, 나중에 자기가 다른 병에 걸리게 된다면, 그것은 어떻게 해결을 하겠습니까? 믿음이 없어서 그렇습니까?
그렇게 눈에 보이고,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믿는 사람끼리만 아는, 그런 신비로운 것이지, 세상 사람들도 알 수가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좀 더 쉽게 예를 들어 설명을 한번 해보겠습니다. 아주 친한 여자 친구가 네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같은 마을에서 자라났고,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같은 학교를 다녔습니다. 이들은 자라면서 나름대로의 꿈이 있었습니다. 한 친구는 피아니스트가 꿈이고, 한 친구는 유명한 패션 디자이너가 되는 것이 꿈이고, 마지막 한 친구는 훌륭한 선생님이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이들은 각자 자기들의 꿈을,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 열심히 살았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다들 뿔뿔이 헤어지고, 10년 뒤에 다시 만났습니다. 이 네 명의 친구들 가운데서 세 명은 결혼을 했는데, 그런데 패션 디자이너가 되는 꿈을 가진 친구는 그것을 이루기 위해 결혼도 못하고 시간을 다 보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 친국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하는데, 결혼을 하지 않은 친구는 도무지 이해를 못합니다. 왜 그런고 하니, 처녀 시절에는 그렇게 꿈도 많고 희망도 많던 이들이, 오랜만에 만나면 그 동안 자기들이 해 온 그런 것을 이야기 할 줄 알았는데, 하나같이 하는 이야기가 자기 자식 이야기이고, 남편 이야기입니다. 세 명이 모두 똑 같은 것입니다. 자식 자랑하기에 바빠서 다른 이야기는 관심도 없는 것입니다. 과거 학창시절에 가졌던 꿈이고, 희망이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결혼을 하신 분들은 아마 이해가 될 것입니다. 자식이 얼마나 소중하고 사랑스러운지를 아니까 말입니다. 그러한 자식이 있는데, 다른 이야기는 별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시집을 안 간 노처녀에게는 그런 것은 별로 관심도 없고, 전혀 재미가 없는 것입니다. 아주 평범하고 일상적인, 여자들의 수다 정도로 밖에는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놓으면 그제야 이해가 되겠지만 말입니다. 자식 키우는 재미가 다른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물론, 요즘 젊은 여성들은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만.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 줄 아실 줄 압니다. 이 믿음의 세계라고 하는 것은 설명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속에 들어와 봐야 안다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들어와 봐야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이고 행복인지, 그 믿음이 있어야 느끼는 것이지, 믿음도 없는 사람에게 아무리 설명을 해도, 잔소리 밖에 되지를 않는 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싫어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것이고, 하나님과 함께 사는 그 기쁨을 날마다 누리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자식을 키우는 재미도, 하나님을 믿고, 그분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즐거움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정말 이런 믿음의 기쁨이 있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믿음이 있는 사람은 남들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헐뜯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믿음의 세계가 세상처럼 남과 나의 관계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그 정다운 사귐 때문에, 만남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지, 옆 사람이 어떻게 하는 것을 보고 신앙생활을 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하나님과 일대일로서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질문을 할 수가 있습니다. "목사님, 그렇게 되면 너무 개인주의 아닙니까? 교회는 주님의 몸이고, 우리가 모두 다같이 신앙생활을 함께 하는 것이지, 어떻게 그렇게 혼자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맞습니다. 얼마든지 이렇게 물을 수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주님의 몸이고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웃에 대한 관심이 자기에 대한 관심이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남에게 비판을 하지 않고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자기의 허물보다 남의 잘못을 먼저 지적하는 그런 이기적인 마음, 사랑이 없이 함부로 말을 내뱉는 그런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잘못을 지적을 해도 먼저 자신의 허물을 드러내 보이고 사랑으로 지적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 없이 비난하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랑이 있고, 하나님과 만남이 있는 사람은, 결코 남의 눈치를 살피지는 않습니다. 무식하리만큼 용감합니다. 때로는 너무나도 외골수고 직선적이어서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그런 일을 하기 때문에 주위의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도 없이, 자기의 허물을 보지 못하고 남을 비판하는, 그런 인간의 타고난 기질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자기 허물을 먼저 내어놓지 않고,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으면 남을 비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기 것도 감추고 남의 것도 점잖은 척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더욱더 나쁜 것이고 말입니다. 우리는 참된 사랑으로 이런 위선의 가면을 벗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윤리와 도덕은 이러한 가면일 때가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다시 정리해서 말씀드리면,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남이 알지 못하는 신비의 세계를 갖고 있는 것이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무지 남이 알지 못하는 신비한, 너무나도 신비한 세계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믿음은 도대체 어떻게 생겨납니까? 교회에 억지로 데리고 온다고 생깁니까? 목사가 설교를 잘 하면 생깁니까? 기도를 많이 하면 생깁니까? 그러나 믿음은 오직 하나님께서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 손에서는 도무지 나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장에서 다음과 같이 분명히 말합니다.
(엡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목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이러한 사실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믿음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지, 여러분들이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상한 목사들은, 믿음을 목사가 주는 것처럼 공갈을 치고, 그것이 '맞다' 라고 하면서, 교인들은 '아멘'을 하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그것은 분명히 성경 말씀에 어긋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것은 분명히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로부터 믿음을 받지 않은 사람은 누가 뭐라고 해도 믿음이 없는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받은 사람은, 자기가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이 믿음이 자기에게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시키는 데로만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모습입니다. 즉, 믿음은 있으면 있는 것이고, 없으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대로 살지 못하고, 자신의 모습이 안타까워서 하나님께 믿음을 달라고 간구하는 자는 어디에 속하겠습니까? 그것은 믿음이 없는 자의 모습이 아니고, 믿음이 있는 자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완벽하게 하나님께서 시키는 데로 사는 것을 하나님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고, 그러한 모습으로 날마다 하나님께 긍휼을 간구하는 사람을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자라고 하는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어서, 말씀에 순종한다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을 완전히 이루는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님만이 그렇게 하는 것이고, 우리 중에는 그런 자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이 요구하는 것은, "예수님처럼 완벽하게 살아라" 라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의 부족을 알고 날마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두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산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의 세계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너무나도 생소합니다. 아무리 설명을 해도 모르는 것입니다. 아는 사람은 알고 말입니다. 이 세계를 불신자들에게 설명했을 때, 고개를 꺼덕꺼덕하면 잘못 설명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어떤 반응을 해야 합니까? 도저히 모르겠다고 고개를 흔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상한 이야기를 한다고 하면서 화를 내면서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가버려야 제대로 설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납니까? 이미 그 사람의 마음속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마귀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혹시 아이들 낳지 않은 여자가 어머니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지는 몰라도, 그것도 불가능합니다만, 믿음이 없는 사람이 믿음의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셔야만 알 수 있는 것이 믿음의 세계, 신앙의 세계라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 천국이라는 것이, 한낱 헛된 꿈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공상이고 망상이지, 도무지 현실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천국 가는 길이, 구원의 길이, 이 십자가의 도가 어떠합니까?
그것이 고린도전서 1장 21절 이하에 나와있습니다.
(고전 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지혜는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의 도가 세상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어리석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어리석어 보이고, 미련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도 이 길을 따라오지 않습니다. 어떤 자만 따라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선물로 받은 사람은 세상 사람이 아무리 손가락질하고, 핍박해도 꾸역꾸역 모여들고 말입니다. 교회에 사람이 많이 모인다고 문제가 아니고, 믿음도 없이 와서 믿는 자들을 핍박하니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은 누가 뭐라 해도 이 길은 걸어가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힘이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입니다. 이것을 십자가의 걸림돌이라고 합니다. 걸림돌을 아십니까? 걸려서 자빠지는, 그래서 무릎을 깨는 그런 튀어나온 돌말입니다.
이 세상에 구원을 받기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구원의 길이 있다고 하니 모두 다 뛰어 가다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는 다 걸려서 자빠지는 것입니다. 넘어져서는 다 돌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잘못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받은 사람은, 모든 사람들이 다 싫어하고 버린 바 된, 그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도, 내가 걸어가야 될 길 인줄을 알고, 그 길로 들어선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도저히 갈 수가 없는 길을 우리는 지금 주님의 은혜로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집안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절에 다니는 사람은 부처에게 가서 어려움을 없애 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당연합니다. 그러면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교회에 와서 어려움을 없애 달라고 기도하면 됩니까? 그렇게 되면 절에 다니는 것이나, 교회에 다니는 것이나 뭐가 다릅니까? 절에 가는 것 대신 교회에 왔으니까 다릅니까?
그래서 믿는 자들은 어려운 일이 닥치면, 하나님께 뭐라고 기도해야 하는고 하니까, "하나님이여, 지금 저에게 고난이 닥치고 있는 것을 아실 줄 압니다. 이 어려움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시고, 고난 가운데서 소망을 가지고 더욱더 주님만 사모하게 하옵소서!" 라고, 이렇게 되어야 제대로 된 기도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해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지, 뒤에 예수님의 이름만 갖다 붙인다고 기도를 제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을 환난과 핍박 가운데서, 병들어 있으면서, 괴로워하면서 만날 때, 진정 우리는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니, 말은 맞고 고상하게 참 믿음이 있는 소리로 들리지만, 이것이 우리의 현실로 다가오면, 그런 생활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가를 알아야 합니다. 어떠한 어려움 가운데도 실망하지 마시고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저의 이야기가 아니고 마태복음 25장에 그대로 다 나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는 들은 염려하지 말고, 환난 가운데 소망을 가지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서론이 좀 길었습니다만, 이제 오늘 본문 히브리서 10장 5절을 보겠습니다.
(히 10:5)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우리가 지난 시간 동안 제사에 대해서 '번제', '소제', '화목제', 그리고 '속건제'에 대해, 다섯 가지 제사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이 제사가 너무나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제물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습니까? 죄 없는 어린양, 염소, 소, 비둘기, 그리고 고운 곡식가루가 자기 대신 불에 태워진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죽어야 하는데, 그 대신에 애꿎은 짐승들이 죽어 가는 것입니다.
제사의 중요한 점은 바로 자기 대신 죽는 제물이 있다는 것입니다. 대신 죽어 가는 희생제물, 그것이 바로 제사의 특징이고, 기독교의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자기의 못난 모습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자기 모습이 좋아서 흐뭇해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못나고 추하고 더러워서, 안타까운 심정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과는 헤어져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바라 볼 때는 절망을 느끼지만, 대신 죽어 가는 어린양을 볼 때 희망을 갖는 것이 바로 기독교라는 것입니다.
저 죽어 가는, 불에 태워지는 어린양이, 단순히 짐승이 아니라, 자기 대신 죽어 가는 희생의 제물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바로 죽음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고, 그래서 새 생명을 보다 감사하게 느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누가 믿습니까? 안 믿는다는 것입니다. 아니, 못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는 믿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선물로 받은 자는, 이런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자기의 허물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큰 일을 해도 말입니다. 죄인이 자랑은 무슨 자랑을 한단 말입니까?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5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신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니, 이상하지 않습니까? 구약 때에 제사를 하나 하나 가르쳐주시면서, 제사를 드리라고 할 때는 언제이고, 지금은 그런 제사와 예물을 받지 않는다고 하니,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입니까?
그것이 아니고, 그 뒤에 보면,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사가 아니고, 한 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6, 7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히 10:6)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히 10:7)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이것이 바로 신약성경의 신비입니다. 구약 때에는 어린양 인 줄 알았는데, 이 신약 시대에 들어오니까, 그 어린양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이제는 한 몸이, 즉, 사람이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나이 33세에, 별로 아름답지를 못한 외모와 풍채를 가지신, 예수라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제사를 드리면서 양이 죽을 때는, 그래도 그 어린양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그래도 동물에 불과하니, 별로 미안한 마음이 없었는데, 그런데 알고 보니까, 그 어린양이 의미하는 것이 단순히 어린양이 아니고 사람인데, 그것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렇게 되면, 내 죄 때문에 양이 죽는다면 괜찮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내 죄 때문에 죽는다면, 우리는 이제는 완전히 끝장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님께서 내 죄 때문에 죽었는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놈들, 내 아들을 죽여 놓고, 네가 내 이름을 불러" 라고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사시나무 떨듯이, 벌벌 떨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들을 죽인 원수인 우리가 아버지라고 하나님께 부를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생각은 할 수 있습니다. "왜 하필 아들을 우리 죄 때문에 죽이셨는가? 그냥 양이나 소를 대신 죽이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서" 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했으면 우리도 덜 미안하고 좋기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왜 안 됩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죄의 심각성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가 너무 깊고 크기 때문에 양이나 소나, 짐승이 죽어서는 감당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방법은, 하나님의 아들이 대신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죄를 없애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합니다만, 그러나 실제로 알고 보면 무서운 현실입니다. 실제로 자기의 아들을 죽여야 하는 것이 기독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신 유일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어야지, 다른 그 어떤 것도 믿어서는 구원에 이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처가 대신 죽었습니까? 공자가 대신 죽었습니까? 우리의 부모가 우리 죄를 대신해서 죽었습니까? 오직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이 일을,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행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만이 유일한 우리의 소망이 된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이제는 제사를 드리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참 희생제물이 되셔서 모든 제사를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바로 제대로 제사를 드리는 것이요,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직 예수님입니다.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이 뭐라고 해도,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예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임을 기억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아 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