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5. 속죄제(贖罪祭) (레 4:1-12)성경레위기

5. 속죄제(贖罪祭) (레 4:1-12)

이름 : 우리교회(IP:122.47.57.66)

레위기 강해 5 이근호

5. 속죄제(贖罪祭) (레 4:1-12)
구득영 2002-05-08 09:25:43, 조회 : 128, 추천 : 0

5. 속죄제(贖罪祭) (레 4:1-12)

세상은 가면 갈수록 어두워지고 캄캄해집니다. 아무리 발전소를 많이 만들어서 불을 밝혀도 이 어두움을 물리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도 이러한 세상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만은, 교회인지 세상인지 구별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살다가 교회에 나오면, 더러운 곳에 있다가 깨끗한 곳으로 나아오는 모습이 있어야 하는데, 깨끗해야 할 교회가 오염이 되니까, 그런 모습이 없어지고,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점을 우리는 알고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구약의 다섯 가지 제사 중에서(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네 번째 시간으로 속죄 제사를 살펴보려고 하는데, 이 속죄제는 말 그대로 죄를 속함, 용서함 받는 제사인데, 도대체 무슨 큰 죄가 있기에 이렇게 제사까지 지내면서 용서를 받아야 하는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제사는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이 드리는 제사가 아니고,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리는 제사인데, 그들에게 무슨 죄가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오늘 교회 안에 무슨 죄가 있기에 이러한 속죄제를 드려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은, 우리가 특별히 깨끗하다는 의미가 아니고, 우리나 세상 사람들이나 다 똑같은데, 특별히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말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철저히 깨닫고, 그 더러움을 제대로 보아야, 주님의 사랑의 위대함을, 얼마나 고마운가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용서 받은 기쁨을 알자는 것입니다. 완벽하게 죄를 안 짓는 것이 아니고 말입니다. 완벽하게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완벽하게 용서해 주시는 그 사랑과 은혜를 알아서 기뻐하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완벽하게, 죄를 짓지 않고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그렇게 살아갑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하시는 그 기쁨을 알고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제사를 드리러갈 때, 제물을 가지고 어디로 갑니까? 바로 제단으로 가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불이 훨훨 타고 있습니다. 제사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기에, 제대로 하려면 하늘에 가야 되지만,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이 제단 불이, 훨훨 타는 그 제단 불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불이 타올라야만 합니까? 타올라야만, 그래서 제물을 태워져야만, 죄가 용서함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태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세속화된 것은,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별로 차이가 나지 않고 어울려서 살아가는 것은, 그 타오르는 제단 불을 바라보지 않고, 의식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자기 멋대로, 자기가 하고 싶은 데로, 자기가 하나님이 되어서, 주인이 되어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세상의 사고 방식인 것입니다.

교회가 세속화되었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은 사람이 세금을 잘 안 내고, 교통질서를 안 지키고, 뇌물을 받고 하는, 그런 윤리적인 차원이 아니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타오르는 불꽃같은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구약시대로 말씀을 드리자면, 제사를 드릴 때, 양이, 염소가, 소가 왜 죽어야 하는지를 전혀 모른다는 것입니다. "아이쿠, 저렇게 아까운 짐승을 왜 죽일까?" 라고 전혀 엉뚱한 생각을 하니까, 어떻게 신앙 생활을 제대로 한다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 제단 불에 의해서 새까맣게 타 들어가는 짐승을 바라보면서, "주여, 잘못 했습니다. 제가 죽일 놈입니다. 제 탓입니다!" 라고 하는 진지한 회개와 뉘우침이 있어야 하는데, 그 타는 짐승을 바라보면서도, 왜 저 짐승이 저렇게 타 죽어야 하는지, 왜 저런 시커먼 숯 덩이로, 재로 변해야 하는지를 모른다면, 그 사람에게는 구원이 정말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는 자가 구원을 받아 천국에 가서 도대체 무엇을 하겠습니까? 거기서도 이리저리 다니면서 말썽만 일으키지를 않겠습니까? 사실 우리는 모두가 다 사고뭉치고, 말썽꾼일 수밖에 없지만, 오직 주의 은혜로, 그 타오르는 제단 불에 날마다 자기 자신을 태우고 또 태워서, 그래서 나의 모습은 없어지고, 주의 은혜로만 살아가는 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 제단 불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좌우에 날선 검 같은 이 말씀을 날마다 보면서, 우리의 마음이 찔리고 또 찔려서, 정말로 낮아지고 또 낮아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단 불을 바라보면서 그들의 얼굴이 붉어진 것처럼, 오늘 우리도 주의 말씀으로, 우리의 모습들이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타오르는 불꽃을,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마음에 깊숙이 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마음의 할례입니다. 성도는 바로 이러한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왜 우리가 교회에 나옵니까? 칭찬을 받기 위해서 나옵니까? 인정받기 위해서 나옵니까? 교회는 결코 우리 이름을 내는 곳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 자격이 있다면 왜, 아무런 잘못도 없는 짐승이 대신 죽어서, 온 몸이 찢겨져서 저렇게 제단 불에 시커먼 숯 덩이가 되도록 태워지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들의 죄의 모습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조건이 없습니다. 무조건입니다.

한 편으로 우리는 또한 이런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우리 주위를 가만히 살펴 보면, 그래도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좀 나은 것 같습니다. 우리가 술을 퍼먹고 취해서 싸움질을 합니까? 바람을 피워서 이혼을 하니 안 하니 하면서 야단법석을 피웁니까? 물론 그럴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지만 말입니다.

사실 우리가 말을 다 안 해서 그렇지, 지금 우리 동네의 각 가정을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모두가 다 엉망이 아닙니까? 하루가 멀다하고 외박하고, 매일 술에 취해서 사는 것은 기본이고, 도박에다, 티켓다방에다 얼마나 많은 돈을 갖다 넣습니까? 그래서 날마다 집안에서는 고함 소리가 떠나지를 않습니다. 남자들은 잘한 것 하나도 없으면서 고함을 어찌 그리 지르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그렇게 이 세상 사람들처럼 엉망으로 살지는 않지 않습니까? 정말로 가능한 한 말씀대로, 그리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서, 정직하게 살아가려고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합니까? 그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 시간에 교회가 세상과 같아진다는 것은 그런 차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방금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점점 자기밖에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기주의자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 인생에 그만 주인이 되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심지어 교회도 자기가 주인인 줄 알고,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합니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만 시비를 걸고 불평을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십자가의 사랑이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 주셨는데, 우리는 그 용서함의 은혜도 모르고,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남을 비방하려고 합니다. 자기 눈의 들보는 모르고 남의 눈의 티를 가지고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이 세상에서는 허용될 지 몰라도, 교회에서는 안 됩니다.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원래의 창조된 모습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에덴 동산으로의 회복입니다. 이기심이 없는, 즉, '자기' 라고 하는 것을 내세우지 않는, 주님의 이름만이 존재하는, 그런 곳이 있다는 것을 이 세상에서 교회가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런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 오면, 자기만 자랑하는 이 세상에서 탈출하는 것입니다. 이제 자기는 부정되고, 오직 예수님만 높이는, 그러한 모습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자기 몸이 아니고, 우리의 몸이 이렇게 있어도 교회는 주님의 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교회에 나와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서도, 자기를 앞세우고, '자기가 아니면 안 된다' 라는 식의 주장이 있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는 내 몸이 아니고, 주님의 몸이라는 사실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아니, 목사님! 그런 엉터리 같은 교회가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할지 몰라도, 우리는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잘 모르지 않습니까? 여러분, 도시교회에 한번 나가 보십시오? 도대체 교회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아마, 우리 교회도 교회 건물이 몇십 억이 되고, 교인이 수 천명이 되면 그렇게 안 된다는 보장이 없고, 설교하는 저도 그런 큰 교회에 만약에 간다면, 그렇게 안 한다는 보장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은혜가 족한 것입니다. 교회성장이라는 유혹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그것은 오늘 이 시대에 마치 창세기의 에덴동산의 선악과와 같은 유혹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교회라고 하는 것은,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교회는 주님의 몸이기에, 성장하고, 자라고 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몸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세상처럼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즉, 교회 안에 이기주의가 있다는 말은,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른 것, 예수님보다 더욱더 사랑하는 것, 십계명에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바로 그것을 "우상숭배" 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상숭배라고 하면, 절에 있는 부처나 단군 신상 정도로 생각하는데, 그러나 그것은 누구나 다 이야기하는 우상이고, 성경에서 말하는 우상은 따로 있습니다. 정말 부처가 우상이면, 우리는 평생 우상 숭배를 안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과거에 부처에게 절한 사람은 할 수가 없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 자식이든, 남편이든, 직장이든, 집이든, 이런 것이 우상이 될 수가 있고, 마지막에는 나 자신이 우상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로 내가 우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계명, 1계명에서, 하나님을 섬기라고 한 것이 아니고, 부정적으로, "나 외에 다른 신들을 우리에게 있게 하지 말라" 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그 어떤 것이라도 용납해 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훨훨 타오르는 제단 불에, 하나님의 말씀에 무엇을 태워야 합니까? 시장에 가서 염소 한 마리 사서 태울까요? 그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인 것입니다. 내가 내 욕심으로,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태워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그 어떤 것은 절대 하나님께서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예외란 없습니다. 모두 다 태워 버리시기 바랍니다. 아낌없이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런 마음으로 제사를 드려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짐승을 그냥 바치지 않고, 안수해서, 손을 얹어서, 그 짐승의 운명이 나의 운명임을 깨닫고 제단 불에 태워 드렸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제사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그러한 말씀이 나옵니다. 4절입니다.

(레 4:4) 곧 그 수송아지를 회막문 여호와 앞으로 끌어다가 그 수송아지 머리에 안수하고 그것을 여호와 앞에서 잡을 것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를 드리면서, 훨훨 타오르는 제단 불을 바라본 것처럼, 오늘 우리는 교회에 나와서 늘 주님의 십자가만을 바라보고,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자기 몸을 희생의 제물로 바친 그 십자가, 그 십자가가 날마다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십자가가 여러분의 삶 가운데 있습니까? 무엇을 할 때마다 이 십자가가 생각이 나십니까? 정말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고 행동을 하십니까? 아니면, 내가 하고 싶은 데로 마음대로 하면서 살아가십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 십자가를 바라본다는 것은, 이제는 더 이상 내 생각대로, 내 고집대로, 이 세상 사람들처럼 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정신입니다.

우리는 흔히, "교회에 사랑이 없다", "너무 자기 밖에 모른다" 라는 말을 듣습니다. 때로는 우리 자신들도 스스로에게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 된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왜 사랑이 없고, 왜 이기주의와 세속주의가 팽배하게 되었는지를 말입니다.

예를 들면, 자기 엄마가 방을 깨끗이 청소를 해 놓았는데, 그 집 아이가 옷을 다 버렸습니다. 그래서 엄마는 옷을 깨끗이 갈아 입히고, 하는 말이, "이제 밖에 나가서 흙장난하지 말라"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그만 밖에 나가서 온 몸에 흙과 모래를 묻혀와서 청소를 해 놓은 방에 들어와 엉망을 만들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하는 말이, "엄마, 왜 이렇게 방이 더럽지. 엄마가 청소를 안 했지?" 라고 따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몽둥이로 맞아도 열 대를 맞고, 밖에서 벌을 서도 한참을 서야 할 것입니다.

혹시, 이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지 알아야 합니다. 교회를 세속화시키고, 사랑이 없도록 한 장본인이 나 자신인데, 자꾸 다른 사람을 쳐다보는 것입니다. 교회에 사랑이 없고, 메말라 있으면, 내가 먼저 하나님 앞에, 자기 탓임을 깨닫고 회개하고, 주님만을 사랑하는 믿음을 달라고 겸손하게 무릎을 꿇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정말 그런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먼저 희생하고 낮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인 되신 예수님이 먼저 이러한 삶을 살았음을 다시 한번 기억합시다. 이렇게 낮아지고 희생하는 것은, 기분 나쁘고 자존심 상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믿는 자의 모습입니다. 영생의 일입니다. 진리라는 것입니다.

이 속죄제는 앞서 말씀을 드린, 번제, 소제, 화목제와는 또 다릅니다. 번제는 자기의 헌신을 보여주는 것으로, 자기 몸을 바치면, 하나님께서 기분 좋다고 하시면서 기쁘시게 받는 것입니다. 그런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번제를 드릴 때 제물이 타는 냄새를 향기로운 냄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소제도 거의 동일한 의미입니다. 향기로운 냄새라는 것입니다. 이 소제를 드리면서 하나님과 함께 살겠다고 하니, 비록 고난의 길이라도 그렇게 살겠다고 다짐을 하니까, 하나님께서는 기분이 매우 좋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이 화목제입니다. 이 화목제는 하나님이 한 턱 내시겠다는 것입니다. 맛있는 고기를 잔뜩 차려 놓았으니, 와서 먹자는 것입니다. 물론 가서 보고는, 그것이 자기가 바친 제물인 줄 알고 놀랍니다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함께 먹자는 것입니다. 즉, 나와 화목하자는, 같이 잘 지내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이 시간에 말씀드리는 "속죄제" 란 무엇입니까? 이 제사는 아무리 살펴보아도 향기로운 제물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기쁨이라는 것도 없습니다. "함께 먹고 마시자" 라는 것도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더럽다는 것입니다. 더러워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죄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이 속죄 제사는 제물을 성전의 제단 불에서 태우지를 않습니다. 성전 마당에 들어오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성전 바깥에 가서 태워 버리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오늘본문 11, 12절에 보면 나옵니다.

(레 4:11) 그 수송아지의 가죽과 그 모든 고기와 그 머리와 다리와 내장과
(레 4:12) 똥 곧 그 송아지의 전체를 진 바깥 재 버리는 곳인 정결한 곳으로 가져다가 불로 나무 위에 사르되 곧 재 버리는 곳에서 사를지니라

재를 버리는 곳에 가서 불태워 버리라는 것입니다. 즉, 쓰레기장에 가지고 가서 태워버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재를 버리는 곳을 신약에서는 지옥이라고 합니다. 도무지 천국에 들어올 가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속죄 제사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도무지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더럽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서 헌신을 하든, 충성을 하든, 하나님께서 받아 주어야 하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받아 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전혀 그렇게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것이 바로 히브리서 13장 12절에 보면 나옵니다.

(히 13: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느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곳이 어디입니까?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고, 바깥인데, 그것도 성문 밖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바로 이 속죄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죄가 없으신 분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가장 큰 죄를 대신 뒤집어쓰고 그 더럽고 치욕스러운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십자가를 찬송하면서, 영문 밖의 길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바로 성문 밖의 가장 큰 진노를 받아 죽으신 모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무서운 것입니다. 실제로 주님이 달리신 십자가도 골고다 언덕인데, 예루살렘 성 밖에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런 저주받은 무서운 사형 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께서 속죄 제물이 된 것입니다. 그 무서운 하나님의 진노를 혼자 다 받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주님을 어디서 만납니까? 성전입니까? 히브리서 13장 13절입니다.

(히 13:13)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영문 밖이라고 분명하게 나오지 않습니까? 성문 밖이라는 말과도 같은 의미입니다. 성밖은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입니다. 사람이 성안에 살지, 성밖에는 살지를 않습니다. 죄를 지어서 쫓겨난 사람이 아니면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영문 밖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셨고, 우리는 영문 밖에서 십자가에서 주님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오직 십자가에서만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다른 곳은 안 됩니다.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만나주지 않습니다. 만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들은 교회라고 하는 건물이 아니라, 십자가를 바라보고 나오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십자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희생이, 피 흘림이, 죽으심이 있는 십자가, 그곳만이 우리의 죄를 용서함 받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의 정신이 있어야 교회이고, 성도가 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죽는 십자가의 정신이 교회에 충만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교회입니까? 왜 우리가 성도입니까? 주님의 십자가의 희생이, 자신의 몸을 바친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날마다 이러한 십자가의 주님만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을, 비록 죄인이지만,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리스도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 멘
6. 속건제(贖愆祭) (레 5:14-19)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아는 것과는 다른 것인데, "안다" 라고 하는 것은, 이것도 알고 저것도 알고 여러 가지를 다 한꺼번에 알 수가 있지만, 즉, 이것이 마이크인 것을 알고 또 저것이 꽃인 것도 알 수가 있지만, 그러나 신앙은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한꺼번에 두 가지를 다 알고서 믿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아는 것은 여러 가지가 되지만, 믿는다고 하는 것은 하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만을 믿는 것을 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 가지를 믿는다면, 그것은 자기가 그렇게 믿는 다고 착각하는 것이지,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든, 절에 다니는 사람이든 마찬가지입니다. 믿는 것은 하나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만 믿는 것이지, 부처를 함께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절에 다니는 사람도 부처만 믿지, 부처하고 다른 것을 함께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현대인들에게 던지는 질문은, "무엇을 알고 계십니까?" 라는 아니라, "무엇을 믿습니까?" 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최종적으로 우리는 우리들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거기에 대해서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남에게 질문을 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에게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정말 마지막에 내가 믿고 의지하는 것이 있다고 하면, 그런 사람은 믿음이 있는 것이고, 그것이 없으면 아는 것은 많지만 믿는 것은 없다고 밖에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 것도 믿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자식을 믿는 사람, 돈을 믿는 사람, 그리고 자기 자존심을 끝까지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즉, 자기 자신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신 여러분들은, 자기 자신을 포함해서 그런 것들을 믿지 마시고, 오직 예수님만을 믿기를 바랍니다. 믿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더 중요한 것은, "누구를 믿는가?" 라는 것입니다.

자식을, 돈을, 자기 자신을 믿지 마시고, 오직 예수님만을 믿고 의지하고 붙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모습이 있어야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영생의 길을 가는데, 어찌 행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이 시간, 여러분이 이 세상에게 당했던 억울한 일과, 가슴 아픈 일과, 섭섭했던 모든 것을, 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푸시고, 버리시고, 새로운 삶을 다짐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날마다 버리고, 버리고, 또 버리고, 그렇게 해서 새롭게, 새롭게 살아가는 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처럼 믿고 의지하는 예수님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방금 말씀드린, 우리가 믿음이 없는 자로서 날마다 변화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새롭게 살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게 말입니다.

"우리가 일 주일에 몇 번씩이나 교회에 나오는가?" 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얼마나 변화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교회에 나오는 것을 소홀히 하지 않고 말입니다.

그러면 어떤 분들은 이러한 궁금증이 생길 것입니다. "아니, 도대체 어떻게, 얼마나 변해가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인가?", "이 정도만 해도 괜찮지 않습니까?" 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자 그러면 제가 예를 들어서,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변화해서 살아야 하는가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옛날 중국에 진나라에 시황제라고 아주 유명한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아시죠, "진시황제" 말입니다. 그런데 이 왕은 유명하기는 유명한데, 좋은 일로 유명한 것이 아니고 사실은 악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 진시황제는, 한 마디로 자기 밖에 모르는 깡패 같은 자입니다. 남들은 전혀 생각해주지를 않는 것입니다. 오직 자기 자신뿐입니다. 얼마나 성질이 고약하고 엉망인지, 요즘 같으면 병원에 가야 할 사람입니다. 사람만 보면 죽이려고 하는 그런 왕입니다. 악한 왕인 것입니다. 자기가 마음먹은 것은 어떤 희생과 대가를 지불해도, 사람이 수백, 수천 명이 죽어도 반드시 하고 마는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독재자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진시황제보다 더욱 더 심각한 것은, 그런 왕을, 아니 황제를 좋다고 받들고 자기 나라의 최고 황제로 모시고 섬기는 신하들과 그런 나라의 분위기입니다. 그런 왕이 있으면 쫓아내어야 하는데, 오히려 그러한 폭력을, 잔인함을 즐기려고 하는 그때 그 당시의 나라 형편이 더욱더 놀랍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은 지금도, 전 세계에 퍼져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의 모습이고, 우리 인간의 잔인성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시황제가 이처럼 잔인하게 했는데, 그런데 "진나라" 라는 국가를 위해서 큰 운하도 만들고, 만리장성도 쌓는 등, 큰 일들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래도 진시황제가 잔인한 면도 있지만 국가를 위해 좋은 일도 많이 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왕도 아니고, 왕 중의 왕인, 황제라는 칭호를 주었고 말입니다.

제가 이러한 말씀을 드리는 것은, 바로 이 세상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바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어떻게 그 일을 했는지, 그런 과정을 살펴보기보다는, 그 사람의 눈에 보이는 업적 위주로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어떤 분들은 그래도 5공 전두환 시절이 좋았다고 합니다. 주로 경상도 분들이 많이 그렇게 말을 합니다. 그때 경제적으로 먹고사는 것이 괜찮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광주사태 때에 자기 자식을 잃은 부모도 그런 마음이 들겠습니까? 자기 딸이 자기 나라 군인에게 무참히 짓밟힌 부모의 심정도 그러하겠습니까?

김영삼 전 대통령과 전두환 전 대통령, 두 사람이 고향을 찾고 하면서 T.V에 나오는 것을 보면서, 그리고 오히려 전두환 전 대통령이 더 멋진(?) 사람으로 비추어지는 것을 보면서, 이 세상의 모습을 다시 한번 발견하곤 합니다. 세상이 잔인하다는 것을, 폭력을 오히려 즐긴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아이들이 오락 게임을 하면서 제일 좋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싸워서 이기는 것입니다. 이겨도 그냥 이기는 것이 아니고, 상대방을 잔인하게 죽이는 수준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오락게임이 아니면 인기가 없습니다. 이런 인간의 잔인성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에게 다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이유를, 창세기 4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범죄를 하여 낳은 자식인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그 잔인한 살인 사건을 통해서 분명히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너무나 확실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큰일을, 업적을 많이 남긴 사람을 위대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구약 이스라엘 시대에 가장 큰 일을 많이 한, 다윗보다, 솔로몬보다 더욱 업적을 많이 남긴, 여로보암 2세에 대해서 성경을 뭐라고 하는 줄 아십니까?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왕하 14:24, 참고) 라고 합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의 하나님을 떠난 인간적인 업적은, 사람들은 좋아할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여로보암 2세에 대한 기록이 너무 짧습니다. 불과 다섯 절밖에 없습니다. 그의 업적을 가지고서 기록하자면, 다윗보다도 더 많이 성경에 기록되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평가하시는 기준은, "얼마나 일을 많이 했는가?"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회개를 하며, 겸손한 삶을 살았는가?" 라는 것입니다. 다윗이 죄가 없습니까? 악하지를 않습니까? 그는 악한 왕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긍휼을 입고 회개한 왕이었기에,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두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라고 최고의 칭찬을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아흔 아홉 마리의 양보다도 회개한 한 마리의 양을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숫자가 많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가, 개척교회를 몇 개 세웠는가?" 라는 것이 아니고, "내가 얼마나 하나님 은혜를 깨닫고 겸손하게 주의 일을 감당했는가?" 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보신다는 것입니다. 겸손한 자를 말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정신으로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변화된 삶이란, 성질이 바뀐다든지, 술을 끊는다든지 하는 외면적 모습뿐만 아니라, 변화된 삶이란, 바로 나만 생각하고, 나 밖에 모르던, 할 수만 있다면 진시황제처럼 살아가고 싶어하던 우리가, 이러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새로운 기준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교회에 나와서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이만큼 일을 많이 했으니 인정해 달라는 것입니까? 헌금을 많이 했으니 알아달라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아닌 것입니다. 이런 것을 버리기 위해서 교회에 나옵니다.

교만하고 못된 나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마음을 주셔서 인도해 주신 것을 감사하기 위해서, 내가 아니라 나를 인도하신 분이 따로 있음을 말하기 위해서, 그래서 우리들은 교회에 나옵니다. 그래서 교회는 오직 주님만이 자랑되어야지, 자기 자신은 그 근처에 가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릎 꿇고 손들고 앉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소유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매일 그러한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직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이 담긴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그런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가 읽었던 본문을 이러한 차원에서 한번 다시 바라보기를 원합니다. "도대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레위기 5장의 본문은,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제사 중에서 마지막 다섯 번째로, "속건제"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용이 조금 어려운 줄 압니다만, 잘 들어보시길 바랍니다.

시간이 지나갑니다만, 복습하는 의미에서 지금까지 살펴본 제사에 대해서 다시 요약해 드리겠습니다. 보통 설교를 듣고서 3시간이면 절반을 잊어버리고, 하루가 지나면 별로 기억나는 것이 없다고 하니, 다시 반복해도 괜찮은 줄 압니다.

첫째로, 번제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몸 전체를 바치기를 원하는데, 그래서 짐승을 잡아서 여러 조각으로 나눕니다만, 모두 다 하나님께 바치는 제사가 번제입니다. 내 모든 것을 다 바치니까, 목회하라는 줄로 아는 분도 계십니다만, 그것이 아니고, 어떤 직업에 종사하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자는 것입니다.

둘째로, 소제인데, 이 소제라고 하는 것은, 식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바치는 제사인데, 주로 곡식을 바치는데, 바치면서 하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고생이 뒤따르니, 그것을 각오하고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로 무사히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맛있는 빵이 아니라, 맛없는 딱딱한 누룩이 없는 "무교병" 이라는 떡을 바친다고 했습니다. 인생이 이처럼 맛없는 딱딱한 빵과도 같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화목제인데, 이 제사는 잔치를 베푸는 것인데,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고백을 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들으시고 기뻐서 잔치를 베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기쁨의 제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잔치에 참석해서 음식을 먹으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내가 무엇을 많이 갖다 바치는 것이 아니라, 죄인임을 깨닫고서 감사하는 삶을 제일 좋아하신다는 것을 알게되는 것입니다. 잔치를 베풀 정도로 말입니다.

넷째로, 속죄제인데, 이 속죄제는, 죄를 짓고는 하나님께 못 나아오니까, 저기 성밖의 쓰레기 하치장이 있는데, 가서 자기 몸을 타 태워 버리고, 버리고 나서 하나님께 나아오라는 것입니다. 죄를 지어놓고서 무슨 염치로 하나님께 나아오느냐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는 죄를 가지고서는 못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다섯 째로, 이 속건제에 대해서 오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속건제라고 하니까 말이 참 어렵지 않습니까? 여기서 속(贖)이란 것은 "바꾼다" 라는 의미이고, 건(愆)이라고 하는 것은 "실수", "허물" 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허물을 바꾸는 제사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허물을 바꾸는, 있었던 이 허물이 없었던 것으로 되는 제사가 "속건제" 라는 것입니다. 실수한 것을 용서함 받는 제사라는 것입니다. 허물이 죄가 없어져서,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되어서 나오는 제사가 바로 속건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생각에, 속죄제와 같다고 여기실 모르겠습니다. 맞습니다. 같습니다. 죄를 용서함 받는 것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다른 점도 있습니다. 무엇이 다른고 하니, 속죄제는 무조건 하나님께 잘못했다고 비는 것입니다. 용서해 달라는 것입니다. 나는 인간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는 천당 갈 놈이 못된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속건제라고 하는 것은, 내가 잘못했으니 보상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어떻게 보상을 하겠습니까만, 제사를 드렸다고 해서 입닦고 모른 체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잘못한 자에게 보상을 하는 것입니다.

이 속건제는 주로 살면서 이웃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인데, 예를 들어서, 우리 집 둘째 놈이 옆집에 가서 놀다가 T.V를 그만 박살을 내어버렸습니다. 도저히 수리가 안 되도록 박살을 낸 것입니다. 요즘은 T.V들이 좋아서 다 백 만원쯤 하는 것이 많습니다. T.V가 박살이 났는데, 살 때는 백 만원을 주고서 샀더라도, 몇 년이 지나서 그 가치가 한 오십 만원쯤 밖에 안 된다고 합시다.

그러면 당연히 오십 만원을 물려주는 것인데, 이 속건제의 경우는 그것이 아닙니다. 살 때의 백 만원하고, 거기에다가, 오늘 본문 16절에 보면 나오는데, 5분의 1을 더 얹어 주는 것입니다. 20%를 더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T.V값을 오십 만원이 아니고, 120 만원을 물려주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생각에는 뭔가 합리적이지 못한 것처럼 보입니다. 백 만원도 아니고, 어떻게 120 만원을 주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중요합니다. 왜 20%를 더 내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백 만원은 원래대로 해 주는 것이고, 이 나머지 20만원은, 이제부터 우리는 이웃끼리 서로 사이좋게, 친하게 지내자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이가 T.V를 부순 것 때문에 사이가 서먹서먹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좋아진다는 것입니다. 20 만원이 부순 집의 성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20%를 더 지불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원상 복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더 친하게, 사이좋게 잘 지내라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흘러 넘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제로 우리가 이웃과도 그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돈이 좀 덜어서 문제이지 말입니다. 만약 여러분 중에서, 누군가 이웃집의 물건을 실수로 깨거든, 20% 더 얹어서 보상을 한번 해줘 보십시오.

아마 그 이웃 사람은 두고 두고 그 일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얼마나 고마워하겠습니까? 물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 다음부터 하루가 멀다하고, 찌짐에다, 나물에다, 미역에다, 마구 갖다 줄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 이 시간에 이 "속건제" 라고 하는 제사가 우리들에게, 우리 교회에 보여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쉽지 않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알도록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입니까? 우리 서로가 화목하게 사랑하는 모습을 가지고 살라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보상을 해도 세상 삶들처럼 깍지를 말고 20% 더 얹어서 해 주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고마워하겠습니까? 서로에게 사랑이 넘쳐나라는 것입니다.

오늘처럼 각박한 사회에서, 한 푼이라도 자기 돈을 더 손해보지 않으려고 이리 빼고, 저리 빼는 세상에서 하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보상하라! 보상을 하되, 듬뿍 하라!"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돈이 많은 것이 아닙니다. 모세와 함께 애굽을 나올 때에, 집도 살림살이도 다 애굽에 두고 빈 털털이로 나왔습니다. 손에 들 수 있는 것만 대강 꾸려서 들고, 패물 몇 가지만 제외하고 말입니다. 물질이 넉넉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려웠습니다. 정말 가난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사정을 아시면서, 이들에게 보상을 하되 넉넉히 하라는 것입니다. 없지만, 어렵지만 그런 마음가짐으로, 이웃을 돌아보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 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여주는 것은, "너희들은 서로 하나이다" 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속건제를 온전히 이루신 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사실은 우리가 지금도 남의 물건을 이렇게 20% 더해서 배상해야 할 책임을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의 율법입니다. 그리고 20% 더 배상을 해도, 이런 속건제를 온전히 지키는 것은 아닙니다. 이 제사의 정신은 사랑이고, 그 사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같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우리는 남에게 더 보상을 해 주기는커녕, 본의 아니게 손해를 입힐 수도 있는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손해배상은 엄두도 못 내고 말입니다.

그러나 물질적으로 손해를 봐도, 본의 아니게 손해를 끼쳐도,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고, 그분께 우리들의 모든 것을 다 맡기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살아간다면, 그래서 그리스도의 살을 느끼고 전한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참사랑은 오직 주님에게만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로만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랑을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직접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사람의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말로만 사랑이 아니라, 아낌없이 나누어주는 모습이 있어야만 합니다. 물질이 있든지, 없든지 말입니다. 너무 내 것만 챙기고, 내 가족만 아는, 그런 사람들이 되지를 마시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 몸을 아낌없이 나누어주신 그 주님을 사랑 앞에 우리는 뭐라고 해야 합니까? 예수님을 아는 것이 아니고, 믿는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걸어간다는 것입니다. 억지가 아니고 기쁨으로 말입니다. 이것이 성령을 받은 자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시기를 바랍니다.

아 멘

◁ 이전글

다음글 ▷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674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4,317 성경 7. 제사와 예수님 (히 10:5-7) 히브리서 최고관리자 07-01-24
4,316 강의 6. 속건제(贖愆祭) (레 5:14-19) 레위기 최고관리자 07-01-24
4,315 성경 6. 속건제(贖愆祭) (레 5:14-19) 레위기 최고관리자 07-01-24
4,314 강의 5. 속죄제(贖罪祭) (레 4:1-12) 레위기 최고관리자 07-01-24
열람 ➜ 성경 5. 속죄제(贖罪祭) (레 4:1-12) 레위기 최고관리자 07-01-24
4,312 강의 4. 화목제(和睦祭) (레 3:1-5) 레위기 최고관리자 07-01-24
4,311 성경 4. 화목제(和睦祭) (레 3:1-5) 레위기 최고관리자 07-01-24
4,310 강의 3. 소제(素祭) (레 2:1-3) 레위기 최고관리자 07-01-24
4,309 성경 3. 소제(素祭) (레 2:1-3) 레위기 최고관리자 07-01-24
4,308 강의 2. 번제(燔祭) (레 1:3-9) 레위기 최고관리자 07-01-24
4,307 성경 2. 번제(燔祭) (레 1:3-9) 레위기 최고관리자 07-01-24
4,306 강의 1. 사랑의 제사 (레 1:1-2) 레위기 최고관리자 07-01-24
4,305 성경 1. 사랑의 제사 (레 1:1-2) 레위기 최고관리자 07-01-24
4,304 강의 출애굽기 4:2-5 (97. 5. 23 -cbs 방송설교) 출애굽기 최고관리자 07-01-24
4,303 강의 창세기 1:27-28 (97.1.31-cbs방송설교) 창세기 최고관리자 07-01-24
4,302 성경 창세기 1:27-28 (97.1.31-cbs방송설교) 창세기 최고관리자 07-01-24
4,301 강의 창세기 4:3-5 (96년 12월 13일 - cbs방송설교) 창세기 최고관리자 07-01-24
4,300 성경 창세기 4:3-5 (96년 12월 13일 - cbs방송설교) 창세기 최고관리자 07-01-24
4,299 강의 창세기 19:24-26 (97. 4. 25 cbs방송설교) 창세기 최고관리자 07-01-24
4,298 성경 창세기 19:24-26 (97. 4. 25 cbs방송설교) 창세기 최고관리자 07-01-24
4,297 강의 창세기 32:24-28 (97. 9. 19 cbs방송설교) 창세기 최고관리자 07-01-24
4,296 성경 창세기 32:24-28 (97. 9. 19 cbs방송설교) 창세기 최고관리자 07-01-24
4,295 자유게시판 오 목사님께서 사면당하신 이유-제가 보기에 - 최고관리자 07-01-23
4,294 자유게시판 영원히 갈라서기 전에(교회시무사면서에 붙이는 글) 오 용익 목사님의 글 로마서 최고관리자 07-01-23
4,293 자유게시판 손성식 목사님의 글: [행복에 걸려 비틀거리다]-서평 - 최고관리자 07-01-22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