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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4. 화목제(和睦祭) (레 3:1-5)성경레위기

4. 화목제(和睦祭) (레 3:1-5)

이름 : 우리교회(IP:122.47.57.66)

레위기 강해 4 이근호

4. 화목제(和睦祭) (레 3:1-5)
구득영 2002-05-08 09:18:00, 조회 : 126, 추천 : 0

4. 화목제(和睦祭) (레 3:1-5)

날이 갈수록 생활이, 살아가는 것이 혼란스러워 집니다. 세상이 아무런 질서도 없이 자기 마음대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힘이 있다고 남의 나라를 공격하고, 전쟁을 일으켜도 아무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무서운 세상을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최근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인간의 역사가 계속 이러한 일들의 연속적으로 진행되어 왔습니다. 한 손에는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빵을 들고 있지만, 한 손에는 총을 들고 발포하는 것이 인간의, 그리고 인간이 다스리는 나라가 행하는 이중적인 모습이고, 이러한 모습은 미국이나 유럽의 강대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나 자신에게도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어떤 절대적인 기준이 없습니다.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엄격한 기준이 없다는 것입니다. 각 나라마다 법이 있고, 나라들간의 국제법이 있습니다만, 그것도 다 인간들이 만들었기에, 흔들리는 인간에게 그런 것은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오직 힘있는 자만이 모든 것을 차지하는, 그런 세계가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2000년의 모습인 것입니다. 쓸데없는 희망을 걸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천국은 없습니다. 유토피아, 말 그대로 꿈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세상에 살다보니, 믿는 사람들조차도 어떻게 살아야 될지 모르고 흔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산다고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엄연히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기준이 있는데도 갈피를 못 잡고 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노릇입니까? 말씀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는 목회자의 책임이 실로 큰 줄 압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이렇게 어지럽게 살아갑니까? 왜 우리의 삶이 혼란스럽습니까? 그것은 바로 신앙이 제대로 서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의 절대 기준인 말씀을 제대로 붙들지 않고, 사람을 의지하려고 하니까, 우리의 삶도 흔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의 원칙에 의해서 우리가 움직이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런 무질서한 세상의 원칙에 말씀을 갖다 넣어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으니,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인간의 말로 바뀌고 말아서, 우리가 엉망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러한 책임을 누가 해야 합니까? 하나님께 그 책임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세상을 엉망으로 만들고 말았습니까? 아마 어떤 분들은 그런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시키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여기에 대해서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고 인간의 책임이라고 말입니다. 그것이 어디에 나옵니까? 바로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사건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 살면서 에덴동산이 얼마나 기쁘고 즐거운 것인지를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속에는 뭔가 허전함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귀가 뱀을 통해서 그 허점을 찌르고 들어온 것입니다.

마귀가 뭐라고 유혹했습니까? "너희들 뭔가 불만이 있지? 하나님은 자기가 주인이라 하면서 매일 너희들에게 시키기만 하고, 너희들이 하나님이 한번 되어 볼래?"

여러분, 이 얼마나 달콤한 유혹입니까? 돈을 몇 천 만원 갖다 준다고 해도 눈이 '뿅!' 하는데, 하나님이 된다니 말입니다. 정말 이것은 인간이 도저히 뿌리칠 수가 없는 유혹이었던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이 왜 그처럼 자기 이름 내기를 좋아하고 남을 지배하려고 하는 줄 아십니까? 바로 이 신(神)이 되고 싶은, 그래서 선악과를 먹은 까닭입니다. 신만이 사람을 지배하지, 인간은 인간을 지배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의 왕들은 단순히 인간이 아니라 신의 위치에까지 올라있던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마귀의 유혹으로 말미암아 그 좋은 에덴 동산은 다 잃어버리고 지금 이 혼란스러운, 죽어 가는 인생을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직도 신이 되고 싶은 욕심은 버리지 못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 로마 신화나 단군 신화 등은 단순히 신들의 이야기가 아니고, 사실은 신이 되고 싶은 인간들의 이야기입니다. 인간들의 모든 꿈과 희망을 다 거기에다 쏟아 부어놓은 것입니다. 모두 다 선악과를 먹은 결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참으로 비극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그래서 지옥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을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죄로 말미암아 더러워지고 파괴된 인간을 벗어버리고 원래의 모습을 회복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대로 하는 것입니다. 어려운 말로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다" 라고 합니다. 즉,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본래적인 인간 모습을 회복하는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이 말씀을 묵상하고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전혀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본문의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은 바로 "화목제" 라는 제사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는 번제, 소제를 살펴보았고, 이제 세 번째로 "화목제" 라는 제사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제사를 통해서 우리의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그 모습을 한번 발견해 보자는 것입니다. 이 제사는 인간이 알아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이기에, 분명히 길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제사에 제대로 동참한다면, 우리는 이 어지러운 세상에서 빠져 나와서 제대로 된 에덴 동산의 그 원래의 모습을 회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꿈이 아니라 현실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드리라고 하신, "화목제사"란 무엇입니까? 지금부터 설명을 해드릴 테니까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화목제사" 라고 하는 것은, 쉽게 말씀드리면, 우리에게, "너희들, 내가 잔치를 마련해 놓았는데 와서 음식을 좀 먹어 볼래?" 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잔치 상을 잔뜩 차려놓고 우리를 초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맛있게 먹는 것은, 짜장면, 짬뽕, 탕수육, 순대국밥 등인데, 그런데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준비한 맛있는 음식을 먹을 용의가 있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화목제사" 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맛있어도, 먹으면 뒤로 도로 나오는, 그러다가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음식 말고, 이제는 먹으면 천국 가는 영생의 고기를 좀 먹으러 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화목제사는 먹는 제사라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린 "번제" 라는 제사는, 짐승을 잡아서 불에 태워서 바치는 것은 똑 같은데, 그 번제는 먹을 것이 없습니다. 모두 다 태워 드리는 제사이고, 이 화목 제사는 내장을 꺼내서 불에 태워 하나님께 드리지만, 고기는 드린 사람이 제사장과 함께 먹을 수 있는 제사입니다. 먹는 제사입니다. 먹고 즐기는 제사가 화목 제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먹는 것이라고 하면, '껌뻑' 하지 않습니까? 결혼식이고, 장례식이고 먹는 것을 빼버리면 별로 남지를 않습니다. 어쨌든 우리도 먹는 것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날씬하든지, 뚱뚱하든지 상관없이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다 놓고 먹으라고 내 놓는 그 음식이, 하나님께서 직접 마련하고 준비해서 내 놓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하나님께 바친 그 제물이 음식으로 도로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제사를 드리는 제물은 그냥 단순한 어린양이나 소가 아니고, 제물을 바치는 사람이 안수를 해서, 그러니까 그 짐승은 단순히 짐승이 아니라, 자기 몸을 바치는 모습으로 하나님께 바치는데, 그 바친 제물을 도로 내어놓고 먹으라고 하는 것은, 바로 자기 살을 먹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 제사를 드린 사람은, 하나님께서 음식을 먹으라고 하니까, 좋다고 가서 먹으려다가 그 음식은 바로 자기가 바친 제물임을 알고 기겁을 하는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 어떻게 이것을 제가 먹을 수 있습니까?" 라는 말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화목 제사를 실제로 성경에 있는 그대로 드린다고 생각을 한번 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마음으로 그 제사 음식을 먹겠습니까? 아마 그리 마음이 즐겁지 않을 것입니까? 자기가 바친 짐승이, 제물이, 더 나아가서 자기 몸이 음식으로 나와있으니 어떻게 기쁜 마음으로 먹을 수가 있겠습니까? 아마도 먹으면 소화는커녕 체해서 소화제를 한 병은 먹어야 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이런 먹지도 못할 음식을 차려놓고 우리를 초청하는지, 그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자기 살점을 뜯어먹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자기를 먹는다는 것은, 바로 "죽어라" 라는 것입니다.

아니, 사람이 죽으려고 음식을 먹는 법이 어디에 있습니까? 음식을 먹는 것은, 모두 살려고 먹는데, 그런데 하나님은 잔치 상을 벌려놓고서 음식을 먹으라고 하시면서, 죽으라고 하시는, 정말 희한한 분이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인이기 때문에, 죽지 아니하고는 안 되는, 죽어야 만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잔치를 열되, 죽어야 하는 잔치가 아니라, 사실은 장례식을 열고 계시는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에는 다섯 종류의 제사가 있는데, 그 중에도 이 화목제사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깊은 의미가 이 제사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죽어야 산다는 원리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는 우리가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까? 이 세상은 무엇을 보여 주는 것입니까?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 그리고 이러한 인생들이 모여 사는 세상은 행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행복하다고, 잘 된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불행입니다. 아니, 죽어 가는 몸을 끌어안고 살아가면서 뭐가 그리도 행복하고 기쁨이 넘치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을, 인생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오래 산다고 아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시는 지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니라고 하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잔치에 오겠습니까? 안 옵니다. 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면 죽으라는 소리 밖에 안 하니까 말입니다. 먹지도 못하는 음식을 내어놓고 먹으라고 하니까, 어떻게 올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이 교회에 안 오는 것이 이상해 보입니까? 아닙니다. 안 오는 것이 정상입니다. 어떻게 옵니까? 이 세상 잔치에 가면 맛있는 것을 얼마든지 차려놓고서 오라는 데가 있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그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교회에 나옵니까? 오늘 어떠한 모습으로 교회에 나오셨습니까? 혹시나 세상 사람들이 어디에 놀러 가는 사람들처럼, 잔치 집에 가는 것처럼 교회에 나오지는 않습니까? 아마, 이런 분은 없을 줄 압니다. 그러한 마음가짐으로는 아무리 교회에 다녀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 것은, 구약의 의미로 말하면, 자기 몸을 제사로 드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제가 나왔습니다. 알아서 하십시오" 그러한 모습으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설마 하나님이, 그 바친 나의 몸을 도로 내어놓고 먹으라고 할 줄은 상상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에 나와도 그 고기를 먹지를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내가 내 살을 먹을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아무리 먹고 싶어도 도저히 먹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전혀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교회에 나온 것은 살려고 왔지, 죽으려고 교회에 나왔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몸을 바치면, 하나님께서 알아서 살려 주실 줄 알았는데, 그런데 하나님은 나를 죽이고, 또 그것을 먹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입니다. 도무지 믿음이 없는 이 세상 사람은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만 죽을 줄을 알고도 하나님께 나아옵니까?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람, 성령을 받은 사람만 교회에 나와서 믿음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화목 제사를 드렸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고, 예수님은 마태복음 14장 22절에서 이같이 말씀하십니다.

(막 14:22)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예수님은 떡을 나누어주시면서 자기의 몸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 전날, 제자들을 모아 놓고 최후의 만찬을 벌이시면서, 떡과 포도주를 떼어 주시면서, 이것은 자기의 살과 피라고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예수님이 구약의 제사를 제대로 완성하는 것입니다. 즉, 구약시대에는 백성들이 화목제물을 먹으면서 자기의 몸인 줄 알았는데, 그런데 나중에 십자가의 사건에서 다시 조명해 보니, 자기들이 먹은 그 음식은 자기의 몸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의 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잔치 상을 벌이신 것입니까? 하늘 나라의 아주 좋은 소를 잡은 것도 아니고, 양을 잡은 것도 아니고, 천도 복숭아를 내어놓은 것도 아니고, 바로 자기 아들을 제물로 잡아서 잔치를 베푸시고, 우리들을 초청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잡아서 잔치 상을 준비했습니다. 그 잔치 집에 가서 우리가 잘 살기를 바랄 수 있습니까? 그 아픈 하나님의 희생 앞에서, 사랑 앞에서 우리가 도무지 무슨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헌금을 많이 했다고 자랑할 수 있습니까? 좋은 옷 입고 왔다고 폼을 잡을 수 있습니까?

그냥 우리는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나를 살려달라고 하겠습니까? 이사야가 말한 것처럼,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다!" 라고 밖에는 할 수 없습니다. 자기가 죽을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아들마저 죽인 죄인임을 온전히 깨달을 때, 그때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이 내려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웃고 떠들면서 그 화목제물을 먹은 것이 아닙니다. 숨을 죽이고 말 한마디 못하고, 벌벌 떨면서 그 음식을 먹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때에 그들은 그것이 예수님의 피와 살 인줄은 몰랐지만, 그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제사의 동참함으로, 그 약속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던 것입니다.

철저하게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는 자만이 천국에 들어갑니다. 그래야 천국에서 자기 자랑을 안 하는 것입니다. 천국에는 내 이름이 없습니다. 주민등록증이 없는 것입니다. 누구의 이름만이 있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이름만이 있고, 그래서 그분이 다스리는 나라가 바로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이는 것이 끝이 아니라, 그 죽은 몸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하나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서,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 천국에 간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지, 밖에 있고서는 천국에 도무지 들어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길입니다. 다른 길은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무엇을 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꿈틀거리고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데서 살리시고, 없는 데서 새로운 것을 만드시는 분입니다. 그 하나님의 능력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유일한 방법은, 주님의 십자가를 나의 십자가로 인정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동행하며 살아가는 삶이 바로 자기를 부인하는 삶이요, 천국 가는 영생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

아 멘
5. 속죄제 (레 4:1-12)

세상은 가면 갈수록 어두워지고 캄캄해집니다. 아무리 발전소를 많이 만들어서 불을 밝혀도 이 어두움을 물리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도 이러한 세상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만은, 교회인지 세상인지 구별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살다가 교회에 나오면, 더러운 곳에 있다가 깨끗한 곳으로 나아오는 모습이 있어야 하는데, 깨끗해야 할 교회가 오염이 되니까, 그런 모습이 없어지고,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점을 우리는 알고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구약의 다섯 가지 제사 중에서(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네 번째 시간으로 속죄 제사를 살펴보려고 하는데, 이 속죄제는 말 그대로 죄를 속함, 용서함 받는 제사인데, 도대체 무슨 큰 죄가 있기에 이렇게 제사까지 지내면서 용서를 받아야 하는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제사는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이 드리는 제사가 아니고,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리는 제사인데, 그들에게 무슨 죄가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오늘 교회 안에 무슨 죄가 있기에 이러한 속죄제를 드려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은, 우리가 특별히 깨끗하다는 의미가 아니고, 우리나 세상 사람들이나 다 똑같은데, 특별히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말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철저히 깨닫고, 그 더러움을 제대로 보아야, 주님의 사랑의 위대함을, 얼마나 고마운가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용서 받은 기쁨을 알자는 것입니다. 완벽하게 죄를 안 짓는 것이 아니고 말입니다. 완벽하게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완벽하게 용서해 주시는 그 사랑과 은혜를 알아서 기뻐하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완벽하게, 죄를 짓지 않고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그렇게 살아갑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하시는 그 기쁨을 알고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제사를 드리러갈 때, 제물을 가지고 어디로 갑니까? 바로 제단으로 가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불이 훨훨 타고 있습니다. 제사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기에, 제대로 하려면 하늘에 가야 되지만,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이 제단 불이, 훨훨 타는 그 제단 불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불이 타올라야만 합니까? 타올라야만, 그래서 제물을 태워져야만, 죄가 용서함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태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세속화된 것은,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별로 차이가 나지 않고 어울려서 살아가는 것은, 그 타오르는 제단 불을 바라보지 않고, 의식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자기 멋대로, 자기가 하고 싶은 데로, 자기가 하나님이 되어서, 주인이 되어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세상의 사고 방식인 것입니다.

교회가 세속화되었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은 사람이 세금을 잘 안 내고, 교통질서를 안 지키고, 뇌물을 받고 하는, 그런 윤리적인 차원이 아니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타오르는 불꽃같은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구약시대로 말씀을 드리자면, 제사를 드릴 때, 양이, 염소가, 소가 왜 죽어야 하는지를 전혀 모른다는 것입니다. "아이쿠, 저렇게 아까운 짐승을 왜 죽일까?" 라고 전혀 엉뚱한 생각을 하니까, 어떻게 신앙 생활을 제대로 한다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 제단 불에 의해서 새까맣게 타 들어가는 짐승을 바라보면서, "주여, 잘못 했습니다. 제가 죽일 놈입니다. 제 탓입니다!" 라고 하는 진지한 회개와 뉘우침이 있어야 하는데, 그 타는 짐승을 바라보면서도, 왜 저 짐승이 저렇게 타 죽어야 하는지, 왜 저런 시커먼 숯 덩이로, 재로 변해야 하는지를 모른다면, 그 사람에게는 구원이 정말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는 자가 구원을 받아 천국에 가서 도대체 무엇을 하겠습니까? 거기서도 이리저리 다니면서 말썽만 일으키지를 않겠습니까? 사실 우리는 모두가 다 사고뭉치고, 말썽꾼일 수밖에 없지만, 오직 주의 은혜로, 그 타오르는 제단 불에 날마다 자기 자신을 태우고 또 태워서, 그래서 나의 모습은 없어지고, 주의 은혜로만 살아가는 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 제단 불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좌우에 날선 검 같은 이 말씀을 날마다 보면서, 우리의 마음이 찔리고 또 찔려서, 정말로 낮아지고 또 낮아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단 불을 바라보면서 그들의 얼굴이 붉어진 것처럼, 오늘 우리도 주의 말씀으로, 우리의 모습들이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타오르는 불꽃을,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마음에 깊숙이 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마음의 할례입니다. 성도는 바로 이러한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왜 우리가 교회에 나옵니까? 칭찬을 받기 위해서 나옵니까? 인정받기 위해서 나옵니까? 교회는 결코 우리 이름을 내는 곳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 자격이 있다면 왜, 아무런 잘못도 없는 짐승이 대신 죽어서, 온 몸이 찢겨져서 저렇게 제단 불에 시커먼 숯 덩이가 되도록 태워지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들의 죄의 모습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조건이 없습니다. 무조건입니다.

한 편으로 우리는 또한 이런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우리 주위를 가만히 살펴 보면, 그래도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좀 나은 것 같습니다. 우리가 술을 퍼먹고 취해서 싸움질을 합니까? 바람을 피워서 이혼을 하니 안 하니 하면서 야단법석을 피웁니까? 물론 그럴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지만 말입니다.

사실 우리가 말을 다 안 해서 그렇지, 지금 우리 동네의 각 가정을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모두가 다 엉망이 아닙니까? 하루가 멀다하고 외박하고, 매일 술에 취해서 사는 것은 기본이고, 도박에다, 티켓다방에다 얼마나 많은 돈을 갖다 넣습니까? 그래서 날마다 집안에서는 고함 소리가 떠나지를 않습니다. 남자들은 잘한 것 하나도 없으면서 고함을 어찌 그리 지르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그렇게 이 세상 사람들처럼 엉망으로 살지는 않지 않습니까? 정말로 가능한 한 말씀대로, 그리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서, 정직하게 살아가려고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합니까? 그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 시간에 교회가 세상과 같아진다는 것은 그런 차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방금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점점 자기밖에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기주의자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 인생에 그만 주인이 되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심지어 교회도 자기가 주인인 줄 알고,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합니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만 시비를 걸고 불평을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십자가의 사랑이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 주셨는데, 우리는 그 용서함의 은혜도 모르고,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남을 비방하려고 합니다. 자기 눈의 들보는 모르고 남의 눈의 티를 가지고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이 세상에서는 허용될 지 몰라도, 교회에서는 안 됩니다.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원래의 창조된 모습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에덴 동산으로의 회복입니다. 이기심이 없는, 즉, '자기' 라고 하는 것을 내세우지 않는, 주님의 이름만이 존재하는, 그런 곳이 있다는 것을 이 세상에서 교회가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런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 오면, 자기만 자랑하는 이 세상에서 탈출하는 것입니다. 이제 자기는 부정되고, 오직 예수님만 높이는, 그러한 모습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자기 몸이 아니고, 우리의 몸이 이렇게 있어도 교회는 주님의 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교회에 나와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서도, 자기를 앞세우고, '자기가 아니면 안 된다' 라는 식의 주장이 있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는 내 몸이 아니고, 주님의 몸이라는 사실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아니, 목사님! 그런 엉터리 같은 교회가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할지 몰라도, 우리는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잘 모르지 않습니까? 여러분, 도시교회에 한번 나가 보십시오? 도대체 교회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아마, 우리 교회도 교회 건물이 몇십 억이 되고, 교인이 수 천명이 되면 그렇게 안 된다는 보장이 없고, 설교하는 저도 그런 큰 교회에 만약에 간다면, 그렇게 안 한다는 보장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은혜가 족한 것입니다. 교회성장이라는 유혹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그것은 오늘 이 시대에 마치 창세기의 에덴동산의 선악과와 같은 유혹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교회라고 하는 것은,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교회는 주님의 몸이기에, 성장하고, 자라고 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몸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세상처럼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즉, 교회 안에 이기주의가 있다는 말은,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른 것, 예수님보다 더욱더 사랑하는 것, 십계명에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바로 그것을 "우상숭배" 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상숭배라고 하면, 절에 있는 부처나 단군 신상 정도로 생각하는데, 그러나 그것은 누구나 다 이야기하는 우상이고, 성경에서 말하는 우상은 따로 있습니다. 정말 부처가 우상이면, 우리는 평생 우상 숭배를 안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과거에 부처에게 절한 사람은 할 수가 없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 자식이든, 남편이든, 직장이든, 집이든, 이런 것이 우상이 될 수가 있고, 마지막에는 나 자신이 우상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로 내가 우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계명, 1계명에서, 하나님을 섬기라고 한 것이 아니고, 부정적으로, "나 외에 다른 신들을 우리에게 있게 하지 말라" 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그 어떤 것이라도 용납해 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훨훨 타오르는 제단 불에, 하나님의 말씀에 무엇을 태워야 합니까? 시장에 가서 염소 한 마리 사서 태울까요? 그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인 것입니다. 내가 내 욕심으로,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태워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그 어떤 것은 절대 하나님께서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예외란 없습니다. 모두 다 태워 버리시기 바랍니다. 아낌없이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런 마음으로 제사를 드려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짐승을 그냥 바치지 않고, 안수해서, 손을 얹어서, 그 짐승의 운명이 나의 운명임을 깨닫고 제단 불에 태워 드렸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제사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그러한 말씀이 나옵니다. 4절입니다.

(레 4:4) 곧 그 수송아지를 회막문 여호와 앞으로 끌어다가 그 수송아지 머리에 안수하고 그것을 여호와 앞에서 잡을 것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를 드리면서, 훨훨 타오르는 제단 불을 바라본 것처럼, 오늘 우리는 교회에 나와서 늘 주님의 십자가만을 바라보고,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자기 몸을 희생의 제물로 바친 그 십자가, 그 십자가가 날마다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십자가가 여러분의 삶 가운데 있습니까? 무엇을 할 때마다 이 십자가가 생각이 나십니까? 정말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고 행동을 하십니까? 아니면, 내가 하고 싶은 데로 마음대로 하면서 살아가십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 십자가를 바라본다는 것은, 이제는 더 이상 내 생각대로, 내 고집대로, 이 세상 사람들처럼 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정신입니다.

우리는 흔히, "교회에 사랑이 없다", "너무 자기 밖에 모른다" 라는 말을 듣습니다. 때로는 우리 자신들도 스스로에게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 된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왜 사랑이 없고, 왜 이기주의와 세속주의가 팽배하게 되었는지를 말입니다.

예를 들면, 자기 엄마가 방을 깨끗이 청소를 해 놓았는데, 그 집 아이가 옷을 다 버렸습니다. 그래서 엄마는 옷을 깨끗이 갈아 입히고, 하는 말이, "이제 밖에 나가서 흙장난하지 말라"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그만 밖에 나가서 온 몸에 흙과 모래를 묻혀와서 청소를 해 놓은 방에 들어와 엉망을 만들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하는 말이, "엄마, 왜 이렇게 방이 더럽지. 엄마가 청소를 안 했지?" 라고 따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몽둥이로 맞아도 열 대를 맞고, 밖에서 벌을 서도 한참을 서야 할 것입니다.

혹시, 이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지 알아야 합니다. 교회를 세속화시키고, 사랑이 없도록 한 장본인이 나 자신인데, 자꾸 다른 사람을 쳐다보는 것입니다. 교회에 사랑이 없고, 메말라 있으면, 내가 먼저 하나님 앞에, 자기 탓임을 깨닫고 회개하고, 주님만을 사랑하는 믿음을 달라고 겸손하게 무릎을 꿇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정말 그런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먼저 희생하고 낮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인 되신 예수님이 먼저 이러한 삶을 살았음을 다시 한번 기억합시다. 이렇게 낮아지고 희생하는 것은, 기분 나쁘고 자존심 상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믿는 자의 모습입니다. 영생의 일입니다. 진리라는 것입니다.

이 속죄제는 앞서 말씀을 드린, 번제, 소제, 화목제와는 또 다릅니다. 번제는 자기의 헌신을 보여주는 것으로, 자기 몸을 바치면, 하나님께서 기분 좋다고 하시면서 기쁘시게 받는 것입니다. 그런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번제를 드릴 때 제물이 타는 냄새를 향기로운 냄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소제도 거의 동일한 의미입니다. 향기로운 냄새라는 것입니다. 이 소제를 드리면서 하나님과 함께 살겠다고 하니, 비록 고난의 길이라도 그렇게 살겠다고 다짐을 하니까, 하나님께서는 기분이 매우 좋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이 화목제입니다. 이 화목제는 하나님이 한 턱 내시겠다는 것입니다. 맛있는 고기를 잔뜩 차려 놓았으니, 와서 먹자는 것입니다. 물론 가서 보고는, 그것이 자기가 바친 제물인 줄 알고 놀랍니다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함께 먹자는 것입니다. 즉, 나와 화목하자는, 같이 잘 지내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이 시간에 말씀드리는 "속죄제" 란 무엇입니까? 이 제사는 아무리 살펴보아도 향기로운 제물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기쁨이라는 것도 없습니다. "함께 먹고 마시자" 라는 것도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더럽다는 것입니다. 더러워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죄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이 속죄 제사는 제물을 성전의 제단 불에서 태우지를 않습니다. 성전 마당에 들어오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성전 바깥에 가서 태워 버리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오늘본문 11, 12절에 보면 나옵니다.

(레 4:11) 그 수송아지의 가죽과 그 모든 고기와 그 머리와 다리와 내장과
(레 4:12) 똥 곧 그 송아지의 전체를 진 바깥 재 버리는 곳인 정결한 곳으로 가져다가 불로 나무 위에 사르되 곧 재 버리는 곳에서 사를지니라

재를 버리는 곳에 가서 불태워 버리라는 것입니다. 즉, 쓰레기장에 가지고 가서 태워버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재를 버리는 곳을 신약에서는 지옥이라고 합니다. 도무지 천국에 들어올 가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속죄 제사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도무지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더럽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서 헌신을 하든, 충성을 하든, 하나님께서 받아 주어야 하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받아 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전혀 그렇게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것이 바로 히브리서 13장 12절에 보면 나옵니다.

(히 13: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느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곳이 어디입니까?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고, 바깥인데, 그것도 성문 밖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바로 이 속죄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죄가 없으신 분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가장 큰 죄를 대신 뒤집어쓰고 그 더럽고 치욕스러운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십자가를 찬송하면서, 영문 밖의 길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바로 성문 밖의 가장 큰 진노를 받아 죽으신 모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무서운 것입니다. 실제로 주님이 달리신 십자가도 골고다 언덕인데, 예루살렘 성 밖에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런 저주받은 무서운 사형 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께서 속죄 제물이 된 것입니다. 그 무서운 하나님의 진노를 혼자 다 받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주님을 어디서 만납니까? 성전입니까? 히브리서 13장 13절입니다.

(히 13:13)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영문 밖이라고 분명하게 나오지 않습니까? 성문 밖이라는 말과도 같은 의미입니다. 성밖은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입니다. 사람이 성안에 살지, 성밖에는 살지를 않습니다. 죄를 지어서 쫓겨난 사람이 아니면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영문 밖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셨고, 우리는 영문 밖에서 십자가에서 주님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오직 십자가에서만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다른 곳은 안 됩니다.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만나주지 않습니다. 만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들은 교회라고 하는 건물이 아니라, 십자가를 바라보고 나오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십자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희생이, 피 흘림이, 죽으심이 있는 십자가, 그곳만이 우리의 죄를 용서함 받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의 정신이 있어야 교회이고, 성도가 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죽는 십자가의 정신이 교회에 충만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교회입니까? 왜 우리가 성도입니까? 주님의 십자가의 희생이, 자신의 몸을 바친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날마다 이러한 십자가의 주님만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을, 비록 죄인이지만,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리스도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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