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의견입니다.
저의 의견입니다.
이름 : 조 규 현(IP:221.167.200.109)
인터넷 상의 글자는 책의 활자가 아니기 때문에 읽기에 피곤함이 더 합니다. 그래서 글쓴 이의 뜻을 완전히 전달받기에는 불충분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문장과 단락 나누기에 있어 너무 간격을 두다보면 읽기에 힘이 더 들 수가 있기 때문에 과도한 나누기는 피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참고로 저 의견을 올려봅니다.
박윤진 님의 주옥같은 글들이 더 큰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상술한 저의 의견을 참고하시면 어떨가 싶습니다. 박윤진 님의 글들을 저가 다시 편집하여 올려 봅니다. 박윤진 님의 양해를 바람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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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인간은 그토록 책임지길 원하는가?
책임을 기꺼이 부담함으로써 인간이 집요하게 노리고 있는 것, 그것은 바로 "기회"라는 체면 상태이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가치와 자신의 행위를 별개로 생각하고자 한다. 그것이 자신의 자존심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얇은 눈속임에 불과하다.
책임은 나에게 유리한가, 불리한가의 계산이 끝난 후 변명하기 위한 논리적 구조물에 불과하다.
인간은 자신의 행위가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대시키고 있다는 판단이 서면 그 행위를 곧바로 존재와 연결시킨다.
그래서 자신의 존재가 지속적으로 유지되어야 할 이유를 타인들에게 역설한다.
나의 존재가 당신들의 존재에 유용하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에서 "유용"이라는 말은 "돈이 된다"는 뜻이다. "나의 존재가 당신에게 돈이 됩니다. 나의 행동이 당신의 몸값을 상승토록 가공해 드립니다." 오늘도 많은 광고들이 이런 속삭임을 주문처럼 인간들에게 세뇌시키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행위가 자신의 존재가치를 감소시키고 있다는 판단이 서면 그 행위를 곧바로 자신의 존재와 단절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 때 , 단절을 위한 중요한 수단이 바로 "책임"이다. 책임이라는 또다른 행위를 통하여 돈이 되지 않았던 자신의 행위를 용서하고 싶어한다.
결국, 행위로서 행위를 꾸미고 포장하는 것이다. 소의 되새김질처럼 인간은 자신의 행위를 씹고 씹고 또 씹는다. 앞서 책임이 인간의 유리/불리의 계산을 포장하기 위한 논리적 구조물에 불과하다는 말은 이런 의미이다.
책임을 지겠다는 쪽도, 책임을 지라고 요구하는 쪽도 모두 돈을 주인으로 섬기는 자들이다. 책임을 진다는 행위를 통해서 인간은 다시 "나쁜 행동 없었음"이라는 처음 상태로 돌아올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기회이다. 다시 평가받고, 다시 돈 벌이가 될 수 있는 쪽으로 도약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 그러한 체면상태는 책임이라는 댓가로 얻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돈이라는 주인을 한번 죽여보자! 과연 책임이 무엇일까? 책임이라는 말이 예초에 가능하기는 한 것인가? 돈을 제외하면, 그러니까 책임이라는 것을 통해서
인간이 궁극적으로 노리고 있었던 것을 발로 걷어차버리면, 인간과 책임이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것인지가 쉽게 들통나고 만다.
책임이라는 말 뒤에 숨어있던 욕망의 노리개로서 벌거벗겨진 죄인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다. 책임이라는 말은 피조물에게는 없는 말이다.
회복시킴이라는 능력은 종에게는 금지된 것이다. 자신의 약속에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분, 회복이라는 능력을 오른 손에 들고 계신 분, 그 분이 바로 주인이다.
자신의 약속 안에 자신의 죽음이 담겨있음도 책임질 수 있는 분이 계시다.
십자가!
이것이 바로 생명되신 분의 권세이다.
요한복음 10장 17-18절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지금, 참된 생명의 권세 아래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당신의 행동을 책임지고 계신 분이 계시다! 스스로 자신을 책임지려 하지 말라...
십자가
이번 수련회 강의을 듣고 녹취록을 읽으면서 생각나는 것을 메모하고 있습니다.
어떤 해석을 비판하거나 제 해석이 옳다는 것이 아니라, 그 누구의 해석도 틀렸음을, 그래서 오직 십자가 지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진리임이 자연스럽게 드러나길 바랄 뿐입니다. 십자가는 해석의 대상이 아니라 감사의 대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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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라는 말씀은 내가 주체가 되어 복음을 부끄워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이 말씀의 본의(本意)는 나는 복음을 부끄워할 수 밖에 없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복음이 나를 복음의 것으로 삼아 버렸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롬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이 무엇인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바로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한다. 즉, 복음은 오직 십자가의 도 뿐이다. 그런데 이 십자가의 도를 인간들은 부끄러워한다.
<고전 1:23-25>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즉, 사도바울은 자신 또한 유대인과 헬라인(이방인)의 범주를 벗어날 수 죄인으로서 당연히 십자가를 거리끼는 것이나 미련한 것으로 밖에는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 자신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된 것은 내가 아니라 복음이 나를 주님의 것으로 소유했기 때문인 것이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기 때문에 그가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상관없이 부르심이 그를 소유하고 지배하는 것이다. 보다 정확하게는 부르신 그를 죽이시고 참 생명되시는 예수 안으로 끌어당기시는 것이다.
인간이 복음을 지배할 수 없고 오직 복음이 인간을 지배한다는 사실은 이제 사도바울에게는 너무나 자명하다. 이렇게 나는 십자가를 부끄러워 할 수 밖에 없는 죄인됨과 동시에, 복음이 나를 지배하는 것이 자명하게 된 상태를 "믿음"이라고 한다.
박윤진(IP:210.♡.130.40)
07-01-22 09:29
의견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결 읽기에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