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11: 1- 3 (이방인의 뜰)
계 11: 1- 3 (이방인의 뜰)
이름 : 우리교회(IP:220.81.176.152)
본문 : 요한계시록11장1-3절
제목 : 이방인의 뜰
일시 : 2007년 1월 21일
http://222.231.1.74/~woorich1/성경강해/요한계시록-2006/046강-계11장,1-3,(이방인의,뜰)-rev070121.hwp
이근호
07-01-21 13:21
이방인의 뜰
2007년 1월 21일 본문 설교: 요한계시록 11:1-3
(계 11:1)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계 11:2)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계 11:3)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흔히 사람들이 교회를 찾을 때는, 자신의 안정된 사후 세계를 소유를 확보하기 위해서 찾습니다. “자 교회 왔습니다. 천국에 넣어주세요”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막상 교회에 와서 성경을 들추어보면, 거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파견 근무하는 형식으로 신앙생활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우리는 우리가 챙기고 얻고자 하는 것만 챙겨서 독자적인 나의 세계로 복귀하는 형식으로 살고 싶지만, 성경의 신앙 선배들은 철저하게 하나님에게 예속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인간이란 원래 누구로부터도 지시받는 것을 대단히 싫어합니다. 물론 신앙의 선배들도 예외가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는 궁금한 점이 떠오르게 됩니다. 어떻게해서 그들은 하나님의 지시를 마다하지 않고 순종하는 자들이 되었느냐 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두 증인’이 나옵니다. 이 단어를 보고 행여 우리도 이 두 증인처럼 다루어질까봐 지레 겁을 집어먹게 됩니다. ‘나는 안 하고 싶으니 제발 빼달라’는 식으로 나오게 마련입니다.
실제로 험악한 세상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한다는 것이 참으로 주제 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과 우리가 무슨 차이점이 있어야 우리가 건방을 떨면서, “너희들 나에게 한 수 배워. 나는 이미 진리 안에서 살아가고 있단 말이다”라고 복음을 전할 수 있을 것인데 실제로 우리는 세상 사람하고 조금도 다를 바 없이 살아가는 형편입니다.
세상 사람들 좋아하는 것, 똑같이 좋아하고, 세상 사람들이 싫어하는 대통령 똑같이 싫어하고, 세상 사람들이 갖고 싶은 것, 똑같이 갖고 싶어 합니다. 이런 형편에서 우리가 무슨 우월한 위치에서 그들에게 소위 진리라는 것을 전할 수 있단 말입니까. 따라서 우리는 은근쓸썩 두 증인의 노릇에서 빠지기를 기대하게 됩니다.
사실 성경에 나오는 분들도 우리가 마찬가지라면, 여기에는 필시 하나님께서 그들을 변화시킨 방도가 따로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알아야만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무슨 방법을 사용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위인들로 성도들을 부리게 되느냐”하는 점입니다.
우선 세상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가볍게 처리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입장은 이러합니다. 인간들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취급하지 않는 이상, 하나님도 인간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인간들을 마구 심판하고 저주할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사무엘상 2:30에 보면,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흔히 불교의 고승들은 악마까지 포용합니다. “사단아 나는 너를 사랑한다”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비해서 하나님은 참 쩨쩨하게 보일 것입니다. 나약한 인간을 상대로 갋을 것이 뭐가 있다고 갈겠느냐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철저하게 인간을 관계의 대상으로 삼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성도를 특별히 어디엔가 쓰시고자 하시기 때문에 성도 자체부터 인식의 변화를 촉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인식의 변화라는 것이 딴게 아니라, 보통 인간들은 자신의 행복을 위하여 살고, 행복을 극대화하기 위해 신을 찾지만, 하나님은 인간들의 그런 심정에는 관심조차 두지 아니하시고, 오로지 자신의 할 일을 하시는데 필요한 그릇으로 골라잡기 위해서 성도에게 찾아드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위신’입니다. 인간은 자기 위신을 감히 포기할 자들이 아닙니다. 무엇을 해도, 몸을 어떻게 움직여도 자기 위신과 결부시켜 행동에 나서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성도에게만 그 위신을 박살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자신의 위신으로 채워나가십니다.
예를 들면, 주기도문이 그런 것입니다. 인간이 지어낸 그 어떤 기도도 이 주기도와 상관없습니다. 주기도문은 두 가지 점에서 인간의 기도를 배제합니다. 하나는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경건하게 올리는 기도하고 주기도문 내용하고는 전혀 맞지 않습니다. 둘째는, 인간들이 자기에게 필요한 것은 신에게 도움받기 위해 드리는 그 모든 기도와도 주기도문 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주기도문은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합니다. 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지상에 벌어질 일이 바로, 일용할 양식만으로도 감사하는 자들의 등장과, 죄 용서 받았다는 것이 너무 감사해서 자기에게 죄지은 자까지 용서하는 그런 특이한 자들의 양상도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내용으로 채워집니다.
이 하나님의 위신과 영광은 오직 ‘예수님의 피’로 채워져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의 영광을 달성하기 위해 자신의 피까지 투자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위신을 인간에게 빼앗기실 분이 아니지요. 그런데 인간들은 이것도 모르고 자신의 위신을 높이기 위해 신이 자기를 도와야 한다고 곡해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인간이란 하나님에 의해 철저하게 짓밟히지 않고서는 성도가 되지 못하는 법입니다. 그 기간이 오늘 본문에 보면 1260일도 나와 있습니다. 대략 3년 반의 세월입니다. 과연 이 1260일에 담긴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것을 3년 반이라고 뭉쳐서 이해하면 안됩니다. 이 시간은 일정한 속성의 영속성으로 이어지는 시간이 아니라 3 종류의 시간이 질로 구분되는 기간입니다.
따라서 3년 반이 아니라 1년째 의미, 그리고 2년째, 그리고 반년째 의미라는 식으로 해석이 되어야 합니다. 다니엘 식으로 말하면, 한 때 두 때, 반 때입니다. 그렇다면 이 기간의 각각 차이나는 속성의 뜻은 어떻게 구분됩니까?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성전 척량을 사도 요한에게 당부합니다.
성전 척량이란 하나님이 하시는 성도 찾기 위한 분류작업을 말합니다. 성도될 자와 그러지 못할 자가 하나님이 벌리시는 분류 작업에 의해 드러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분류작업은 불신 세력에 의한 짓밟힘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즉 복음으로 고난의 장이지요. 이 고난의 장 안에서 성도 한 사람으로 인해 성도 주위에 ‘영적 배치도’가 새로이 그려집니다. 소위 분류작업이 성도를 통해 연이어진다는 말입니다.
첫 번 째 1년의 고난 기간은 마치 이스라엘의 범죄의 대가가 받게 되는 70년 포로세월과 같이 자기 죄로 인한 징벌의 기간입니다. 사람이 자기가 지은 죄가 생각날 경우에 아낌없이 그 죄에 대한 징벌은 군말 없이 마땅히 받게 됩니다. 두 번째 2년 째 고난은, 억울하게 당하는 고난의 기간입니다. 아무 잘못도 없는데 억울하고 분통을 느끼면서 세상에서 버림받는 기간입니다.
이 기간을 주님의 능력으로 이겨내었다고 자부한다면 여전히 이 사람은 십자가의 참된 코스와는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조차 교만이기 때문입니다. 고난 가운데 여전히 자신이 공로가 살아있는 격이 됩니다. 세 번 째 반년의 의미는, 그저 하나님의 막무가내 밀어내는 식으로 이 세상 안에서 밀어냄을 당하는 세월을 말합니다. 즉 아무 것도 한 것도 없이 오로지 주님이 은혜로만 구원되었음을 느끼는 기간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으로부터 발목 잡혀 계속 지시받으면서 이 세상에서 십자가 코스를 밟아가는 성도의 운명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마음대로 사는 길이 십자가가 아님을 알았습니다. 지시 따라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