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28:14-16(시온에 놓인 어떤 돌)
사 28:14-16(시온에 놓인 어떤 돌)
이름 : 우리교회(IP:220.81.176.151)
본문 : 이사야 28장14-16절
제목 : 시온에 놓인 어떤 돌
일시 : 2007년 1월 17일
http://222.231.1.74/~woorich1/성경강해/이사야-2005/071강-사28장,14-16,(시온에,놓인,어떤돌)-isa070117.hwp
이근호
07-01-17 21:08
시온에 놓인 어떤 돌
2007년 1월 17일 본문 말씀: 이사야 28:14-16
(사 28:14) 『이러므로 예루살렘에 있는 이 백성을 치리하는 너희 경만한 자여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사 28:15) 『너희 말이 우리는 사망과 언약하였고 음부와 맹약하였은즉 넘치는 재앙이 유행할지라도 우리에게 미치지 못하리니 우리는 거짓으로 우리 피난처를 삼았고 허위 아래 우리를 숨겼음이라 하는도다』
(사 28:16)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이라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
이사야 선지자가 사람들에게 곱게, 그리고 차분하게 상대방을 공격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하나님의 계시를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는 아닌 것을 분명히 아니다 고 말하고 하나님의 뜻을 전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이란 사람들의 호응에 준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사람들의 반대받는 양상으로 주어집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선지자는, 상당히 호감이 가고 어질고, 성품이 온화하며, 이해심을 많아서 어지간한 잘못도 못본척 눈감아주는 그런 선지자이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이사야는 결코 사람들이 원하는 타입의 선지자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그런 선지자를 선호하는 것은 이미 잘못된 하나님상과 잘못된 구원관을 지니고 있으니 그런 것으로 표출되는 겁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구원관은 자신들이 충분히 납득이 되는 양상이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자기 구원받음에 대해서 자신이 조금이라고 보탬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모든 인간들에게 다 공통적인 면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과연 하나님으로부터 구원받을 만한 위인이 되는지 아니되는지 조차 검토할 생각없이 자기 자신만큼은 당연히 천국가야만 하는 존재라고 간주하기 일 수입니다. 이 세상 어느 누가 신으로부터 영원토록 저주만 받는 악마 같은 처지에 있기를 원하겠습니까?
그런데 바로 이런 점으로 인해 사람들은 하나님의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구원관을 염두에 두게 되는 겁니다. 종교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겁니다. 사람들에게 충분히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 구원관을 주축으로 형성되는 것이 세상에 있는 모든 종교단체들입니다. 자기에게서 출발하면 언젠가는 도달될 수 있는 곳이 하늘나라인 줄로 알고 있습니다.
즉 자신은 그런 노력을 당연히 시도할 자격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거짓 성직자들은, 장차 재앙을 대비해서 자신들은 죽음의 세력과 다 사전에 타협을 보았다고 대중들을 안심시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중들은 이런 인간들의 시도를 이해하고 환영합니다.
마치 태산이 아무리 높아도 첫걸음을 떼어서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가다 보면 언젠가는 그 높은 산 정상에 우뚝설 수 있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결과인 것처럼, 하늘나라 가는 것도 그런 식으로 가능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물론 가는 도중에, 좌절하거나 중도 포기할 마음이 들더라도 하나님이 힘 주시면 다시 일어나서 그 높은 곳을 향하여 전진할 수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어쨌든 구원받는 당사지인 본인이 뭔가 자기 구원에 대해서 한 게 있을 때에만 구원이 성사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바벨탑 건립 추진의 취지도 자기네들을 하늘까지 닿기 위함입니다. ‘걸어서 하늘까지’가 인간들의 모토입니다. 누구나 의지만 있다면 언젠가는 고통이 없는 세계로의 입성이 가능하게끔 하는 구원을 인간들은 창안해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방식은 인간들의 이러한 구원방식으로 인해 밉상받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싫어버린 바 된 그런 방식으로만 구원을 실행시키십니다. 이사야는 인간의 한계가 무엇인지를 너무나도 잘 압니다. 인간들이 선호하는 ‘넓은 길 구원관’을 그냥 못본척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지적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나타냅니다.
그가 알려주는 하나님의 구원관은 인간을 시험하는 ‘시험하는 돌’의 존재로 말해진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는데 있어, 인간의 실력을 테스트하는 식으로 구원을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과연 자신이 구원에 적합지 않는 존재임을 아는지 모르는지를 밝히시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이 구원의 테스트로 제시한 돌은, 보석이 아닙니다. 그렇다고해서 그냥 흔한 돌도 아닙니다. 흔한 돌이며 사람들로부터 주목받지도 못할 돌이지만 그 돌에는 사람들의 죄성을 증거물이 묻혀 있는 돌입니다. 즉 ‘버림받은 돌’이며 결국 ‘피 묻은 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전혀 구원에 보탬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장애물이 된다고 여긴 그런 돌의 모습으로서 구원방식은 제시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된 구원관으로 인해 그 분의 가치를 무시하고 밀쳐버린 그런 흔적으로서 존재하는 돌입니다. 하나님은 그 돌을 사람들에게 제시하므로서, 참으로 자신이 구원될 입장에 못된 죄인임을 발견되는 자만이 구원받을 사람이 되는 겁니다.
즉 인간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그 돌을 기피하고 거부할 수 밖에 없는데 그것은, 그 돌 자체가 사람들에게 ‘버림받아야 될 돌’의 신세를 지녔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것을 극복하고 그 돌의 비밀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결코 인간 본연의 능력으로서는 불가능한 겁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받아들이기에 불가능한 방식으로 구원하려고 합니다.
그렇게해서 구원받는데 있어 조금이라도 인간들이 자기 구원에 자신의 노고가 보탬이 되었다는 의식을 품지 못하게 하려는 겁니다. 로마서 9:32-33에 보면,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참된 성도만이 자신이 죄인을 됨을 철저하게 고발하는 그 피묻은 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도리어 영광스러운 자랑거리로 삼게 됩니다. 성도만이 예수님의 버림받음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다 자신의 죄로 인해 버림받는 사태가 벌어졌음을 수용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3:12-14에 보면.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제대로 성령받은 사도 요한이나, 사도 바울이나 사도 베드로가 전하는 하나님 진리의 핵심의 ‘피’입니다. 따라서 피만을 증거하지 않는 그 모든 성경 해석은 사람들을 지옥으로 몰아세우는 해석들입니다. 성경에 그 많은 신학적 주제들과 개념들이 넘쳐나지만 그 모든 것도 다 ‘피’로 몰리고, ‘피’에 쏠리는 주제들입니다.
사람들에게만 피만을 증거하지 않으면 인간들은 반드시 자기 구원에 자신의 행위를 기여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것은 시온의 돌을 모독하는 구원방식입니다. 오직 ‘피’ 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우리 노력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의 능력으로만 구원됨을 죄인의 입장에서 영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