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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수련회 강의 9번자유게시판로마서

수련회 강의 9번

이름 : 서경수(IP:221.164.110.134)

강의 9

지난 시간까지, 로마서 11장에서 인간이 범죄하고 난 뒤 예초부터 인간을 죽은 자로 간주하고, 그 다음 천국 사람 되고 안 되고는 우리의 몫이 아니고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알아서 할 문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자기 나름대로 부지런을 떨지요. 여기서, 왜 우리가 열심히 하는 그것은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 혼자 모든 것을 다 하셔야 하는가?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은 새로운 아담이 등장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두 번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한 이상은 우리 특성, 우리 본질, 우리 고집, 우리 자존심 이런 것을 하늘나라에서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로마서 11장 35절에 보면, 우리 쪽에서 뭔가 제시해서 응답받고 반대급부 받는 식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상대하지 않습니다.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이것은 헌금뿐만 아니고 그 외 우리의 기도와 찬양 등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이 받아 챙겨서 거기에 대한 대가로 구원을 준다든지 영생을 준다든지 그런 일을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36절을 보면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 존재한다는 것조차도 주께서 다시 본래의 일을 만족하게 성취하시고 도로 하나님이 회수하기 위한 용도로서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사느냐, 어떻게 먹느냐, 마시느냐, 죽어서 지옥 갈거냐, 천국 갈거냐 이런 것에 대해서 우리가 근심할 사항이 되지 못하고, 우리는 마치 콘베어 시스템에 놓인 콜라처럼, 제조공장에서 콜라 만들 때 병이 가만있어도 결국은 콜라가 담기잖아요. 이처럼 결국은 우리는 주께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것이 타고난 본성입니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가 설친다고 해서 하나님의 작업이 우리의 설침 때문에, 우리의 강력의 반항이나 발악 때문에 하나님의 이끄심에 방해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아무리 애가 말썽꾸러기라도, 엄마 손잡고 시장에 가서 맛있는 것 안 사준다고 아무리 애가 행패를 부려도 엄마가 그 애를 시장에 버려두고, 이제 독립해서 살라고 버려두는 엄마는 없습니다. 때려서라도 기어이 집에 데리고 오지요.

이처럼 우리가 자신의 구원을 너무 염려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염려 안 해야 될 증거가 뭐냐?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오셨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그 사실을 통해서 ‘아, 우리가 따로 내 구원에 대해서 염려할 필요 없구나.’ 라고 믿음의 관계가 유지될 때, 그 사람은 이미 주님의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자, 이제 로마서 1장에서 12장까지 했는데, 이것을 우리가 몽땅 다 지식으로 알았다고 하고, 이런 것을 가지고 ‘인생을 행복하게 살리라.’ 하고 우리는 이 지하 세미나실에서 밖으로 나갔다고 합시다. 그럴 때 과연 우리가 이 성경을 본 행복을 유지할 수 있느냐? 우리 힘으로 유지할 수 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밖에 나가면 뭐가 있느냐 하면, 경제적 여건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복음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알았던 그 기쁨이 어떤 기쁨이냐 하면, 경제적 여건이 아주 좋지 않은 아주 극심한 가난, 나를 비참하게 만들 정도로 호주머니에 돈 한 푼 없는 그러한 비참함마저도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그런 기쁨이며 행복이냐 하는 것은 직접 부닥쳐 봐서 아는 겁니다.

‘나는 이 복음에 목숨을 걸었다. 로마서에 나는 전부를 걸었다.’ 라고 나름대로의 다짐과 결심을 하고, 이제는 세상에서 어떤 공포가 오더라도 나는 이 복음으로, 주께로 와서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는 말씀으로 이기리라. 하고 막상 나갔더니만, 세상이 기다리는 것은 차가운 바람. 날씨가 추워서 찬바람이 아니고, 젊은 사람이나 청소년들은 항상 꿈을 휘감고 다니거든요.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이런 식으로 꿈과 희망과 계획과 상상력을 총동원해서 부풀어 있는데, 세상에서 찬바람이 한 번 휙 불때마다 환상이 하나씩 뚝뚝 떨어져 나가지요. 나중에 보면 아무것도 없어. 그 때 찾아오는 그 비참함. 그럼 나라는 존재는 뭐냐? 왜 나의 가치를 알아주는 이는 한 사람도 없지. 처녀 같으면, 나같이 살림 잘하고 깨끗하고 남편 잘 섬기는 이런 나를 손잡고 “삼순씨, 같이 삽시다.” 뭐 이렇게 잡아당기면서 “평생 당신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하겠습니다.” 뭐 이런 상대가 안 나타나느냔 말이지요.

그러면 결국 우리가 로마서 공부를 통해서 알았던 복음의 가치라는 것은 언제 검증이 되느냐 하면, 복음이고 언약이고 선택이고 나발이고 나는 내 육신이 배고프니까 비참하기 그지없더라. 배부터 채워야겠다. 설사 어떤 사람이 나에게 취직자리 준다면 그것이 절에서 비빔밥 만들고 절에서 보살님을 뒷바라지하는 일이라도, 기독교신자라는 타이틀도 다 떼고 절의 신도가 되어 밥이나 먹고 살겠다. 얼마든지 이럴 가능성이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지하실에서 복음 듣고 로마서 공부한 것 다 허탕인 것입니다. 내가 더 소중히 여기는 가치가 이 바깥에 엄연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처 그런 것을 만나보지 못해서 마치 이 순간에는 ‘나는 복음을 위해서 전부를 투자하고 목숨을 걸었다.’고 스스로 자기가 자기한테 다짐을 했을 뿐이지요.

그러나 바깥에 찬바람 불고, 사회적인 냉대와 나의 가치가 인정받지 못할 때 우리는 신에 대해서 실망을 금치 못하지요. “날 보고 예수 믿으라고. 예수 당신이 내게 해준 게 뭐가 있다고 예수 믿으라고 해. 신이 나에게 해준 것이라고는 날 비참하게 만든 것밖에 더 있냐? 내가 필요한 것이 있어 기도해도 응답 없었고, 어느 인간이 이런 예수를 믿겠느냐? 나는 당신에게 실망했어. 당신의 예정론, 당신의 토기장이 이야기 다 실망했어. 십자가 죽고 부활한 것 모두 필요 없어. 내가 배고파서 찬바람 맞으며 거리를 헤매는 비참한 내 모습, 나는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어. 가장 믿을 만한 것은 예수가 아니고 내 육신이 배고프다는 것. 나 이것 외에 더 실감나게 믿을 것 없어.”

이런 사람들 참 많습니다. 한 때 중고등부 회장하고, 청년회 회장도 하고, 청년회 회장한 사람이 보면 나중에 교회 안 다녀요. 젊은 때에 열심히 교회 봉사하고 해도 나중에 20여년 지나서 만나보면 ‘희미한 등불 아래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옥경이처럼.

“김 집사님, 어떻게 사십니까?” “저, 집사 아닙니다.” 얼굴에는 세월의 때가 묻어있고, ‘어디서 어떻게 굴렀는지’ 이것은 결국 뭐냐 하면, 교회 있을 때는 복음이 최고인줄 알았는데, 막상 세상에 나가보니 나의 최고가 따로 있었다는 것을 알았어요. 교회 있을 때는 몰랐지요.

예수님께서 40일을 굶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배부른 상태에서 하나님 일 하는 게 아니었어요. 인간은 아무리 하나님 말씀을 줘도 말씀을 못 지키는 이유가 있습니다. 육신을 갖고 있는 이상은 먹는 것, 입는 것, 마시는 것 이것이 하나님과 그 나라 의보다도, 하나님의 의보다 천국보다, 죽어서 어디 좋은 곳에 가는가 이것보다 지금당장 내 배가 꼬록꼬록 배고프다는 사실이 더 시급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그런 육신을 우리 조상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았어요. 이것은 천성이고 본성이어서 우리 힘으로 거역할 수 없습니다. 배고픈데 교회 나갈 시간이 어디 있어요? 돈 벌어야지. 당연한 것 아닙니까?

목사시절 때 교인들 주일 안 지킨다고 그렇게 닦달하던 목사가 교인 없어서 목사 그만하고 직장에 나가보니까 자기도 주일 못 지키는 거예요. 옛날 목사시절에는 교인들이 일요일 교회 나오는 것을 그냥 쉬운 일인 줄 그렇게 생각하고, 그것이 자신의 근원적인 본성과 싸우는 과정이라는 것을, 영적 투쟁인 것을 알지 못하고 그냥 집구석에 뒹굴다가 심심해서 교회 나오는 줄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로마서 12장에서는, 나라는 존재는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천성이 있는데 그것은, 각양 좋은 것들을 끌어 모아 내 속에다 꽉꽉 채우고 또 채워서 나를 뚱뚱보로 만드는 것 -돈의 뚱뚱보, 권력의 뚱뚱보, 명예의 뚱뚱보 - 나를 뚱뚱한 요새로 만드는 겁니다. 온갖 것 다 집어넣어요. 000이 남편에게 얻어맞아 코뼈 부러진 것도 집어넣고, 이라크 사태도 집어넣고, 온 잡동사니를 다 집어넣어요. 왜냐하면 끌어 모아서 ---

철학에서는 이렇습니다. 존재라는 것은 없어요. 끌어 모은 소유가 어떤 형식을 갖출 때 이것이 나라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이 소유가 없으면 나라는 존재도 같이 날아가 버려요. 존재 있고 그 존재를 채우는 것이 아니고, 내가 소유한 것들을 -학력은 어디까지 나왔고, 재산은 얼마이고, 부모는 어떤 사람이고, 같이 어울리는 친구들은 어떤 부류이며 - 주워 모으니까, 그 가운데서 테두리를 형성하고 나가 형성되는 겁니다. 나라는 것은 소유의 정도에 따라서 나가 항상 바뀝니다.

그런데 로마서 12장을 보면 반대에요. “너희 몸을 ---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양 잡아서 양을 대신 드리지 말고 네 몸 자체를 이제는 산 제물로 바칠 때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천성은 끌어 모으는 것을 배웠지, 나의 것을 누구에게 받치는 것을 배운 적이 없어요. 그런 것은 우리 본성에 거스르는 겁니다. 혹시 뭔가 남에게 내 놓을 것이 있더라도 이왕이면 괜찮게 목욕재계해서, 우리 조상들 삼신할머니한테 빌 때 정안수 떠놓고 빌잖아요. ‘우리 손자 이번에 꼭 대학 들어가게 해 주시고, 가족들 건강하게 하시고 --

옛날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 멘트가 있어요. 빌 때 매뉴얼이 있어요. “거저 온 식수가(13식구인데) 남산 위의 노루새끼처럼 잘 뛰놀게 해 주시고---” 그것을 위해 빌어요. 부엌에서 종이를 태우면서 기도하면 종이가 중력에 어긋나서 막 위로 쏟아요.

남산위의 노루새끼를 찾기 위해서 제가 서울 남산까지 갔잖아요. 남산에 노루가 없어요. 그래서 ‘남산위의 노루새끼’가 무슨 의미냐? 나중에 보니까 어느 동네건 남산은 다 있어요. 남산위의 노루새끼는 활기찬, 생동감 넘치는 건강을 비는 거예요.

이렇게 할머니가 사적인 제단을 쌓았던 것이, 이제는 사적인 욕망을 집단적으로 모여서 오늘날 한국교회가 부흥되었습니다. 옛날 부엌에서 종이 태우는 것 대신 이제는 일정한 공간에서 성구까지 마련해서 가운 걸친 무당 목사하나 세워놓고 그렇게 빌면서 교회가 부흥된 겁니다. 복음으로 부흥된 게 아니고, 인간의 종교적인 -지성이면 감천이다. - 정성이 더하면 더 할수록 하늘은 감동한다.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시81:10)” 입의 각도를 크게 벌리면 벌릴수록 많이 채워준다. 교회마다 이런 수법 ‘바쳐야 주지. 바치지도 않고 어디 뻔뻔스럽데 달라고 하느냐?’ 이런 식이란 말이지요.

그런데 로마서 12장은 반대입니다. 뭐냐 하면, 네가 정안수 떠놓고 빌면 복 받는다는 것이 아니고, 11장 35절을 다시 할까요. 무엇을 드려서 갚으심이 아니라 드리든지 아니 드리든지 너의 소유권이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기 때문에 네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굴렀는지 그런 것 생각하고 스스로 개선할 생각하지 말고, 창녀로 있었던지, 깡패로 살았던지 그런 것 상관하지 말고 현재 있는 그대로라도 ‘주의 것입니다.’ 라는 것을 표를 내라 이 말입니다. 이게 산 제물로 드리라는 말입니다.

자꾸 자기를 윤리적으로 정화시키고, ‘가만 있어보세요. 내가 술 끊고, 담배 끊고 교회 나오겠습니다.’ 이러지 마시고 술고래인 채로, 하루 담배 세 갑 피우는 채로 이것이 주님이 받으시는 산 제물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제물을 영광스럽게 하는 그 중간조치는 우리가 새로운 윤리를 가미해서 우리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우리를 변화시키는 중간 루트가 있어요.

제물 이야기하니까 하나님이 제물에 대해서 어떻게 보는지 시편 50편을 통해서 한 번 봅시다. 지금 시편 50편 보고 그 다음에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드리는 과정이 뭐냐 하는 것입니다. 드리는 과정이 교회 가서 드린다는 것이 아니고 놀랍게도 같은 이웃에게 같은 성도에게 드리는 방식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방식이 되는데, 이런 것들도 다 구약적으로 근거가 있습니다.

일단 시편 50편을 봅시다. 제물에 대해서 이렇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8절에 “내가 너의 제물을 인하여 너를 책망치 아니하리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수염소를 취치 아니하리니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새들도 나의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집에 있는 염소나 집에 있는 양이, 우리는 아담으로부터 타고난 본성이 뭐냐? ‘이것은 내 것이다. 내가 키웠다. 내 노동력이 투입된 것이다.’ 자꾸 내 것으로 여기는데, 그런 식이라면 내게 가져오지 마라. 차라리 너의 노동이 투입되지 않은 산에 있는 그런 것들을 가져오는 것이 오히려 기쁘다. 이 말입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내가 바쳤나이다.”하는 제물은 안 받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바친 것이 아니고 원래 주님이 주신 것입니다. 라는 것만 가져 오라 이 말입니다. 가져올 때 그 제물에 인간의 손 떼가 묻지 않은, 인간의 노동력과 정성이 담겨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존재 자체로서 하나님의 것이 된 것만 하나님께 가져오라는 뜻은, 장차 이 제물을 받을 때에 우리 인간의 것을 받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경우도 나라는 자체는 내가 다루고 내가 관리하고 내 것으로 여기고 정성을 기울인 ‘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받는 제물은 나의 손 떼가 묻은 것이 아니고 전혀 또 다른 인간이 있는데 이것은 나의 손 떼가 묻지 않은 다른 인간을 하나님이 받으신다는 것을 제물로서 지금 확인해 주는 거예요.

그 한 가지 예가, 마리아가 아기를 임신할 때 그 아기에 대해서 마리아는 어떤 권한도 없습니다. 키울 권한은 있지만, 키울 일만 떠맡았지 이 자식은 내 자식이다. 이 예수는 내가 낳았다고 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자기가 어떤 남자를 알아서 아기가 난 것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이것은 마치,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런 경우에만 하나님께서 영광스럽게 받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이 범죄한 노선을 이미 타고 들어왔기 때문에, 인간이 범죄 했다는 것은 죄가 묻었다는 정도가 아니고, 계속해서 인간이 자기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죄인에서 나온 노동을 자꾸 가미를 하는 거예요. ‘신이시여, 나의 정성이 담겨 있습니다. 이것은 내가 아껴서 남겨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여호와께서 거저 은혜로 주는 것, 긍휼로 주는 것과 배치가 되는 거예요.

지난 일요일 오후 설교 때 한 내용이 기억납니다. 하나님은 긍휼히 여기시고 자비를 베푸시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비와 긍휼로 다가오는데 우리가 하나님께 마중 나가는 것은 내 행위에 대한 반대급부를 노리고 나갑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다른 사람과 차별이 되잖아요. 기도에 열심을 냈던 내가 그 시간에 기도하지 않은 다른 집사보다도 성과급이 더 있어야 차후에 또 기도할 맛이 나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때, ‘주여, 이것은 내가 정성 드려 기도했고, 금식하며 시도했습니다.’ 라고 자기의 종교적인 노동을 가지고 다가오는데, 주님은 ‘내가 거저 줄게. 아무 대가없어 그냥 줄게. 자비를 베풀게.’ 하니까, 하나님과 우리가 서로 맞지를 않고 충돌이 일어나는 겁니다.

저도 살면서 그런 황당한 경험을 많이 했는데, 지하철이나 길에서 나를 부르는 것 같아요. “오, 반갑다.” 해서, 저는 저보고 하는 소리인줄 알고, 누군지 확실치는 않지만 가까이 가서 확인하려고 다가가면서 손을 내미는데, 내 뒷사람과 악수를 하면서 “반갑다.”하고 이야기를 해요. 이 때 제가 내 민 손은 뭐예요?

“주여, 우리의 정성이고 십일조입니다.” 하고 다가가는데, “오 반갑다.” 하면서, 하나님은 예수님과 이야기하고 우리는 빠져요.

이미 성령이 임한 성도는 ‘우리가 정성 드려 저를 가꾸었습니다.’ 라는 것과 동시에 ‘나는 이렇게 개판입니다.’ 라는 것, 어떤 경우에도 상관없이 주님의 것으로 주님의 책임 하에 산 제물의 가치가 이미 있다는 겁니다. 우리 때문이 아니고 예수님 때문에.

바로 이러한 것이 교회에서 일어날 때, 그 다음 로마서의 어떤 대목이 충분히 이해되는가 하면, 14장이 이해됩니다.

로마서 14장에 보면, 소위 남들 보기에 참 철딱서니 없고, 허술해 보이고, 신앙인지 아닌지 도무지 불분명할 정도로 아주 신앙적으로 어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나보다 신앙이 더 좋은 사람 볼 때에 그렇게 측은해 하는 내가 또 어려보이겠지요?

그런데 여기에 보면, 14장 15절을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하지 말라”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특히 목회자들이 주의해야 될 것은, 주님께서 성령을 줬는데 마치 목사자신이 기도해서 자기기도 힘으로 그 성도에게 성령이 임한 것처럼 착각을 합니다. 이것은 그 성도가 주님의 온전한 제물이 되지 못하고 목회자인 나의 노동이 거기에 가미되어서 값어치가 있다고 생각해서 하나님께 누를 끼칠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생생한 자연물이 아니고 우리 손을 대는 거예요.

교회에서 봉사를 해 보면, 목회자로서 실망할 경우가 어떤 때인가 하면, 공을 들였는데 다른 교회 갔을 때. 이거 미칩니다. ‘하나님, 왜 저를 두셨습니까? 세상에 왜 태어나게 했습니까?’ 할 정도로.

공을 들였는데, 남들보다 심방 한 번 더 가고, 기도도 더 많이 해 줬는데 교회 안 나온다든지 아예 기독교를 포기한다든지 아니면 복음에 반대한다든지 할 때 그 공들인 것이 날아간다는 그 아쉬움.

그런데 로마서 14장에 보면, 우리의 사랑(노동)이 주님의 사랑보다 무가치 하다는 거예요. 우리는 기껏 사랑한답시고 주의 종 만들겠다고 주님의 훌륭한 성도 만들어 보겠다고 하지만, 그것은 인간적인 사랑이고 오히려 그것이 진짜 주님이 주신 십자가의 사랑으로 주신 형제를 망하게 하는 그런 훼방꾼이 된다는 거죠. 물론 십자가 사랑이 끊어지지는 않습니다만 그런 양상이 된다는 거죠.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대체하는 위대한 자로 등장할 수 있단 말이지요.

쉽게 말해서, 예수님의 피로 구원한 형제를 목사의 낙타무릎과 목사의 피로 새삼스럽게 건지겠다고 건방떨면서 덤벼드는 것 이거 엘로카드고 레드카드입니다.

그러면, ‘목사님, 심방하지 말고 목회 하지 말란 말입니까?’ 아닙니다. 항상 주의 일은 공통점이 있어요. 이것은 꼭 적어놓으세요. 주의 일이냐, 아니냐? 그 점검방법은 주의 일을 통해서 ‘내가 죄인입니다.’ 라고 느껴지면 주의 일이고, ‘나는 역시 잘난 놈이야!’ 라고 되면 그것은 주의 일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십자가 안에서만 주의 일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일할 때 우리를 밟고 일해요. 우리를 격려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밟아버립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에 보면, ‘나가 약한데서 주님은 강함이라.’고 되어 있어요. ‘내가 강해서 주님의 강함’이 아니에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12:10)

예수님이 연약하게 죽으셨지만 하나님은 연약한 주님을 살리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갖고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일하시는 것은, 항상 십자가의 그 의미가 드러나지 않는 주의 일은 없어요. 만약에 십자가의 의미가 안 드러나면 그것은 악마가 주의 일을 빙자해서 나의 의를 축적하기 위한, 그래서 나를 넘어지게 하기 위한 악마의 유혹이고 시험입니다.

그러니까 로마서 10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열심을 모르고 자기의 열심을 세우려고’ 그렇게 한단 말이지요. 그 한 예로, 목사가 교회에서 쫓겨날 때 그냥 나가면 되는데 퇴직금을 운운한다든지, ‘내가 와서 교인이 얼마나 불었는데’ 이런 소리가 나온다는 것은, 그동안 교회를 주님의 교회로 생각한 적이 없다는 겁니다. 주님의 양을 볼 때 그냥 자기의 밥으로 간주한 거예요. 교회를 완전히 자기 밥벌이로 간주한 겁니다. 사료지요. 키워서 잡아먹겠다는 겁니다.

제가 이 소리를 신학교 졸업할 때부터 했는데, 같은 전도사들이 억수로 좋아했습니다. “너하고 나는 개혁주의 정신이 똑같구나!” 이랬습니다. 이 소리를 10년쯤 지나서 하니까 “우리끼리 있을 때는 하고 다른데서는 그런 소리 하지 마라.”고 해요. 20년 뒤에 아니까 “그런 소리 하지마라.”고 합니다.

결국 이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산 제물이 아니라, 나는 있고 십자가를 내 속에 소유물로 계속 집어넣는 거예요. ‘나는 삼위일체도 알고 하나님도 알고 언약도 알고 십자가도 안다. 그러니까 날 알아 도. 나 같은 인간 있으면 교회 부흥된다. 그러니 제발 나랑 손잡고 날 키워 도.’ 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산 제물이 아닙니다. 자기 노동을 자기에게 투입한 거예요. 나라는 인간은 주님의 작품이 아니고 자기가 공들인 자기 작품이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고 뭐라고 했습니까?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부인하라고 했어요.

자기를 부인하라고 해도 자기를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아담의 본성이 있기 때문에. 자기를 부인하라는 주님의 명령, 사도의 명령도 주님의 명령이에요. 주님의 명령과 지시는 우리는 못하고 반드시 성령께서 이대로 하고야 말리라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물론 성도에게만 이런 혜택이 있어요. 불신자에게는 없고.

성도에게만 주께서 이루셔서 ‘주님께서 이런 것을 이루었다. 너는 못했지. 주께서 풀었어.’ 하고 우리한테 집어넣어 주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우리교회 어떤 권사님이 오뎅 국을 끓일 때, 자기는 그 일을 하면서 뭘 하느냐 하면, ‘주여, 제가 얼마나 쩨쩨한 사람인지 소고기 국을 끓일 수 있는 여력이 되는데 겨우 오뎅 국이 뭡니까?’ 라고 하고, “권사님, 믿음도 좋다. 연세도 많고 몸도 약한데 젊은 사람도 하기 힘든 오뎅 국을 이렇게 맛있게 끓이다니. 정말 권사님은 성령의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렸군요.”

서로가 주님 은혜를 발견하는 겁니다. 성도들은 주님의 거저주신 긍휼과 은혜를 맛보고, 권사님은, 자기는 천하의 죄인인데 다른 분들이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다른 분들을 통해 주님 주신 십자가의 은혜와 자비를 또 느끼고. 그렇게 되면 오뎅 국이 짜도 아무 문제가 안 되지요. ‘그런데 조금만 소금을 적게 넣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은 사랑에서 나온 권면이거든요.

이것이 로마서 12장에 나오는 “서로 권면”입니다. 산 제물 안 된 사람끼리 서로 권면해 봐야 이것은 윤리, 도덕밖에 안 돼요. 이것은 소용없어요. 항상 주의 일은 무슨 봉사를 해도 ‘너무나 쩨쩨한 인간, 나는 내 소유밖에 몰라.’ 라는 식으로 봉사하는 거예요.

나는 저 산림에 있는 남산위의 노루새끼 밖에 안 되는 거예요. 내가 나한테 가미해서 내 것을 조금 내는 식이 아니라, 모든 것이 주의 것인데 내가 워낙 죄가 많아서 다 드려도 되는데 쩨쩨하게 이것밖에 못 드리는 이 죄인. 라는 식으로 하는 거예요.

그런데 소고기 국 끓이는 사람이 있다가, “권사님, 권사님은 돈푼이나 있으면서 오뎅 국이 뭡니까?” 라고 할 때, ‘네가 그의 식물, 그의 봉사, 그의 행동을 인하여 네 형제를 근심하게’(14:15)하는 것입니다. 본인은 죄라고 깨닫고 있는데 거기에다 완전히 구정물을 부어서 그로 하여금 자비와 은총을 네가 뭔데 가리느냐는 것입니다. 주께서 그 사람에게 주신 자비와 은총을 네게 뭔데 가리느냔 말이지요.

또 한 가지 예를 들면, 어떤 집사가 한 주에 소주 3병을 마시는데 큰 마음먹고 2병으로 줄였어요. 새로 부임한 목사가 그것도 모르고 ‘아직도 집사가 소주를 한 주에 2병씩이나 마시다니.’ 이렇게 나온다면, 본인은 한 병 줄인 것도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로 느끼는데, 새로 온 목사가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이렇게 나오면 주님이 얼마나 섭섭해 하겠습니까? 이것이 아까 이야기한 로마서 14장 이야기입니다.

이제 이것을 더 확대해 봅시다.

방금 제가 이야기한, 주의 일은 죄를 깨닫는 방식으로 한다. 목사도 마찬가지에요. 심방을 가야되는데 또 내가 춥다는 핑계로 안 갔구나. 전화로 때우자. “집사님, 지난 주에 안 보이던데 아팠습니까?” “아이쿠 목사님, 전화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목사는 게을러서 전화만 했는데 교인은 전화 받고 ‘웬 주님의 은혜고, 자비인가. 어제 내가 화투치다가 밤을 세워 교회도 못 갔는데, 목사님께서 전화를 주셔서 염려해 주시네. 다음 주에는 꼭 교회 나가야지.’ 목사는 집사님이 화투 쳤는지 몰라요. 그냥 주께서 양쪽을 다 작용했을 뿐인데, 느끼는 것은 개별적으로 따로따로 십자가의 은혜를 깨닫는 쪽으로 하신단 말이지요.

그래서 목회는 주님이 하시지 목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는 자기의 성깔대로 할 뿐입니다. 심방가야 되는데 춥다고 안 가고 전화하는 것 그것 자기 성깔 아닙니까? 성깔대로 할 뿐이에요. 주께서 부리는 종이라는 말은 그야말로 주께서 부리는 종이에요. 그리스도 몸은 주님이 머리이지 목사가 머리가 아닙니다.

한 가지 더 이야기해야 되는데 잊어버렸다. 요새 나이가 연세로 바뀌니까 자꾸 잊어버리는

데,

이런 원리를 극단적으로 들어가 버리면, 로마서 12장 19절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이것이 인간적인, 소유적 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도저히 못합니다. ‘이게 어디 내 소유를 건드려. 이게 어디 내 명예에 먹칠을 해. 네가 뭔데 내 자존심을 훼손 해.’ 소유가 있는 이상은 이것은 반드시 본능적으로 저주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주의 일을 하는 사람은, 아까 오뎅 국 이야기, 소주 이야기를 더 확대해 보세요. 이것을 계속 확대해가면 어디까지 가능한가 하면, 내 원수를 내가 친히 갚지 않는 경지까지 이르게 되지요.

경지라고 하니까 지금은 안 된단 말인가? 그런 뜻은 아니고, 그렇게 되면 선악구조에 빠지니까 그것은 아니고, 사람이 이 말씀을 대하게 되면 구분을 합니다. 사람이 친히 갚을 원수와 주께 맡길 원수를 자기가 구분해요. 어떻게 구분하는가 하면 원수가 나보다 더 강할 때는 주께서 친히 나의 복수를 대신해 주기를 바라지요. 킬러를 고용하든지 어떻게 하든지 해주기를 바라지만, 내 선에서 처리될 수 있는 원수는 내가 처리하겠다는 거지요. 이것이 가장 약한 방식으로 진행되는 것이 뭐냐 하면, 기도해 주다가 기도 끊기. 아주 소극적 대응이지요. “주여, 주의 말씀에 보면 ‘원수를 사랑하라. 원수를 위해서 기도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따라서 저는 나에게 해코지하는 원수를 위해 지금 기도합니다.” 하면서 이빨을 갈지요. 기도는 하는데 갑자기 이빨이 갈리면서 기도를 하지요.

이 말은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해당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원수를 사랑해버리면 이미 원수가 아니에요. 원수는 원수대로 남고 사랑을 사랑대로 해야 되는데 이게 우리한테는 해당이 안 됩니다. 만약, 사랑한 사람은 원수가 아니요, 원수 같으면 사랑하지 않아야 원수라는 개념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 앞뒤가 맞지 않아요. 그리고 놀라운 것은 우리 자신이 늘 주님의 원수입니다. 따라서 같이 사기 치는 놈들이 사기를 덜 쳤다고 같은 사기꾼들끼리 싸우면 그것은 주님께서 사랑으로 보지 않습니다. 조폭들이 서로 의리 지킨다고 그것을 누가 의리라고 이야기합니까? 아무도 이것을 의리라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들끼리 동업하는 것이지 의리가 아닙니다.

같은 인간들끼리 서로 의리 지키고 하는 것 인정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남을 용서하든 심판을 하든 간에 나 자신부터 하나님의 원수며, 내가 바로 주님의 원수인데 나 같은 원수를 주께서 은혜로서 용서해 주고 있다는 사실에, 그 사랑에 충만한 자에 한해서만 이 말씀이 주께서 우리를 통해서 실현되는 겁니다.

세상에 내 원수가 어디 있습니까? 다 주님의 원수지. 하는 쪽으로 해석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야말로, 내가 원수 갚는 것은 손을 떼고 주님의 원수이기에 주께서 반드시 갚으십니다. 왜? 주님은 자기의 원수를 놓치는 법이 없기 때문에.

자꾸 우리는 나의 원수로 생각해요. 내가 십자가를 전했는데 거부한다면 십자가를 전하는 나에게 공격하는 것으로 착각하면 안 됩니다. 십자가 때문에 욕을 먹는다면 십자가 지신 주께서 알아서 할 문제이지 전하는 내가 나선다는 것은, 내가 십자가만을 전한 것이 아니고 십자가 증거하는 나를 전했기 때문에 그러한 오기와 울분이 터지는 겁니다. 맞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우편배달부가 소포를 전해줬는데 소포에서 폭탄이 터졌어요. 그러면 폭탄 제조한 알 카에다에게 원망해야지 왜 우편배달부에게 닦달을 하느냔 말이지요. 반대로 생각해서, 우편배달부가 돈다발을 전해줬을 때, 받은 사람은 돈 보낸 사람에게 감사해야지 왜 우편배달부에게 관심을 갖느냔 말이지요.

양쪽 다 우편배달부는 내가 주님 앞에 죄인이란 사실을 깨닫는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서는 십자가를 증거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여러분들이 이 지하실에서 올라갈 때, 세상 찬바람 만날 때, 주께서 하라, 말라가 아니라 반드시 이렇게 되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주님 책임 하에 움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로마서 13장으로 가 봅시다.

13장에서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이 말도 마찬가지지요. 인간이 자기 소유로 존재를 확증해버리면 자기가 돛대가 되고 절대 신이 되기 때문에 자기의 어떤 권세를 주의 종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가만히 보면, ‘나는 주의 종이다.’ 기독교 신자가 되어 살아가면서 내심 부끄러울 때가 많아요. 언제 그러냐 하면, 날씨는 추운데 차를 놓쳐서 이미 버스는 끊어지고, 택시를 타려고 해도 택시는 서지 않고, 지나가는 자가용 차 손들어도 세워주지 않는데, 손도 안 들었는데 어떤 차가 앞에 딱 서서 타라고 합니다. 그래서 탔는데 그 사람이 여호와증인이라.

또 가계에서 쌀을 사는데, 이 가게는 20Kg에 45,000원, 저쪽은 47,000원, 농협에 39,000원 --, 제가 쌀값을 좀 압니다. 이렇게 쭉 있는데, 제일 좋은 쌀을 양심껏 파는데 가보니까 그것은 통일교 교인. 그래도 제일 싸니까 살 수밖에 없지요.

사람이, 내가 가장 미워하던 사람한테 가장 큰 결정적인 도움을 받을 때 부끄럽기 짝이 없는 겁니다. 그 때 우리는 무엇을 느끼느냐 하면, 자비를 느끼죠. 바로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가장 싫어하는 예수님으로 등장해서 그 싫어함에도 불구하고 사랑으로 되갚아주는 분으로서 매일같이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먹지 않을 수 없고, 교인 2명 나갔다고 짜증내고, 헌금 제대로 안 나온다고 짜증내고, 이처럼 목사로서 자기 배를 채우고, 교회를 채우기 위해서, 왜? 그래야 나라는 존재가 확립되니까. 거저 드리는 것이 아니고, 봉사가 아니고 그냥 내 교회니까 내가 채우겠다는 그러한 하나님의 원수 짓 하는 우리에게 십자가를 통해서 ‘네 때문에 마음고생 했지만 내가 그것마저 내가 사랑해 주리라.’ 이것이 바로 율법의 정신입니다.

이것이 로마서 13장에 나오는 권세자는 봉사하는 사람이고, 8절 이하에 나오는 모든 율법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이것을 지키지 못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내 소유를 채우기 위해서 ‘나는 또 간음 안 했다. 나는 또 살인 안 했다. 나는 또 도적질 안 했다.’ 계속 대견스럽고 훌륭하고, 점점 향상되어가고, 완벽한 인간 되어가는 것은 나라는 주체거든요. 이것이 바로 율법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진짜 율법은 뭐냐? 사랑입니다. ‘사랑은 모든 율법을 다 이루느니라.’ 사랑이 모든 율법을 이루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랑은 뭐냐? 내가 죄인 되었을 때 비로소 사랑을 느낍니다. 나같이 사랑 받을 자격 없는 인간을 사랑하다니. 이렇게 되는 겁니다.

조금만 더 하고 마치겠습니다.

15장 1절을 봅시다.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한다.’는 것은 자기를 잊어버린다는 말입니다. 나는 누구를 도와줬기 때문에 착하다는 자기를 잊어버리는 거예요.

로마서 14장 7절에 보면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이 말은, 살았다 하는 인간이나 죽었다 하는 인간이나 주의 관리 하에 있지 너 관리 하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너라는 인간이 너 책임 하에 너가 있는 것이 아니고, ‘네가 잘 하면 구원할게. 네가 못하면 버릴게’가 아니라, 주께서 잘하나 못하나 너를 구원해 주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미 남산 위의 노루새끼에요.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간에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이 제물 됨을 우리가 교회에서 자기 죄인 됨을 고백하고 봉사함으로서 확인하는 거예요. 이것이 산 제물입니다. 쉽지요?

이 이야기가 어디 나오느냐 하면, 로마서 15장 16절에 나옵니다. 조금만 참아주세요. 3분 남았습니다.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재미있지요? 막되 먹은 개 같은 이방인이 성령을 통과하게 되면 거룩한 제물이 된다. 그 성령 안에는 무슨 장치가 있습니까? 십자가라는 장치가 있지요. 어떤 죄를 지었던 통과하기만 하면 죄는 다 날아가 버리고 의인 되는 그러한 놀라운 변신. 성령을 통과하면, 십자가를 통과하면 의인되는 그 변신. 따라서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그런 것 때문에 고개 숙이지 말고 고개 쳐들고 오란 말이지요.

오면, 성령을 통과하고 십자가를 통과하면 의인 되는, 이미 이 일을 위해서 사도는 풍랑 속에서 살아남아 주님 앞에서 이 로마까지 편지를 보내면서, 앞으로 내가 로마에서 증거하고, 또 로마에 와서 다른 사람에게 증거하는, 그리고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증거되는 그러한 로마서를 기록한 것입니다.

끝으로 로마서 16장을 봅시다.

바울서신의 끝에는 반드시 뭐가 있느냐 하면, 이 시대에, 복음 시대에, 허물치 않는 시대는 끝났고 십자가를 가지고 허물하고 심판을 작정한 이 시대에는 반드시 이 복음이 전파되면 그 뒤에 가짜가 들끓는다는 것으로 마감하고 있습니다.

그 가짜는 어떤 가짜냐? 18절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사람은 사랑받기 원하잖아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 사람은 사랑받기 원하잖아요. 사랑받기 원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줌으로 말미암아 자기를 그 교회에서 주류로 만들어서 자기 사람 만들고, 교회는 사적인 자기 배를 채우는 교회가 되는 겁니다.

이렇게 순진한 자를 미혹케 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있게 마련입니다. 이런 류가 없다고 하면 잘못 된 거예요. 반드시 그런 사람이 있고, 이런 사람이 교회 안에서만 주류가 아니라 기독교 내에서도 주류가 되는 거예요. 이것이 뭐냐? 치유와 위로의 목회 아닙니까.

치유와 위로의 목회에서는 뭐가 빠지느냐 하면, 죄가 빠지지요. 죄가 빠지면 최종적으로 십자가와 죄를 깨달을 수 없어요. 치유와 위로의 목회를 하면 자기 부인이 아니고 자기 긍정이죠. 그런데 십자가를 통과하게 되면 자기 부인이지요. 너무나 반대되지 않습니까? 정반대지요?

끝으로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로서 나타나는 하나님이에요. 우리는 산 자의 하나님, 거창한 하나님, 영웅적인 하나님을 기대했지만, 주님께서는 죽은 자로서 나타나서 우리가 죽어야 될 자로 이야기합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 존재가 절대적이기 때문에 나를 긍정해 주고, 나를 위로해 주고, 나를 치유해 주고, ‘고생 많지? 애 쓴다. 내가 도와줄게. 정성으로 바치면 복 줄게’ 이런 신을 원하고 있었는데, 주님께서는 ‘넌 죽어야 돼. 넌 지옥가도 마땅해. 천당은 네가 원한다고 주는 것이 아니야.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는 거야.’ 이렇게 나올 때 누가 믿겠습니까?

바로 이것이 로마서 16장 26절에서 “비밀”이라고 합니다. 감춰진 비밀.

생각해 보세요. 옛날부터 인간들은 많았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 신약시대에 그 똑똑하다는 유대인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들이 현미경을 갔다대고, 심지어 예수님 옷을 만져도 그들은 예수님이 메시야인줄 못 알아봤어요. 왜? 철저하게 비밀이기 때문에. 모든 인간에게 비밀이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사람만 십자가의 그 고유의 가치와 십자가 피의 위력을 알지, 인간적인 치유와 위로의 목회라든지 이런 것들을 원하는 사람한테는 십자가는 철저히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비밀로만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 성도 여러분! 당부하기는 혹시 여러분 옆에 혹시 십자가 믿는 사람 있거든 주님의 종으로 기적 받은 줄 아시기 바랍니다. 보통사람이 아닙니다. 이것은 최홍만 정도가 아닙니다. 건드리면 맞습니다. 주님이 용서하지 않습니다. 어디에 나오느냐? 갈라디아서 5장 10절에 나옵니다.

끝으로 다 같이 읽어봅시다. 갈라디아서 5장 10절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성령께서 우리를 제 2, 제 3의 예수로 다루셔서 우리를 살아있는 그리스도의 비밀을 맡은 종, 또는 비밀을 가진 직분, 비밀을 품고 있는 사람으로 기적을 주셔서, 십자가 은혜가 있는 자가 이미 구원 받은 자로서 이 땅에 복음 전파하는 행세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서 이런 자를 소위 악마의 종들이 건드리면 반드시 하나님의 약속대로 심판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심판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이러한 축복을 받는 것에 대해서 너무 과분하고, 우리는 이런 기적 받을 필요도 없이 다른 사람과 같이 지옥 가야되는데 웬 은혠지 빼도 박도 못하고 천국으로 가야된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지하실에서 올라가서 세상 자본주의의 바람이 불더라도 거기에 마음 빼앗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최종적으로 가치를 두고 목숨을 걸고 생명을 걸고 다 걸고 바쳐야 될 것이 우리한테 있다는 것이 너무나 행복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외에 믿을 사람이 없는데, 우리는 주 예수 외에 믿을 사람이 없다는 것을 너무나 감사히 여깁니다. 마지막 구름타고 오신다는 약속을 믿사오니,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하신 것이고 그 뒤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고, 죄와 상관없이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두 번째 찾아오신다는 그것이 우리 속에 늘 살아 있는 저희들 삼아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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