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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겨울수련회 로마서 2강 녹취자유게시판로마서

겨울수련회 로마서 2강 녹취

이름 : 오용익(IP:59.3.201.208)

2007 겨울수련회 로마서 강의 2(이근호 목사)

인간이 하나님께서 금지한 선악과를 따먹은 이상은 더 이상 금지할 법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조차 인간의 자유의지를 빼앗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로마서 1장에 보면 중요한 단어가 나옵니다. “내어버려두사”(롬 1:24, 26,28)

(로마서 1:24-25)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내어버려 두사” 방치입니다. 방치하는 거예요. 그냥 내어버려 두는 거예요. 1장에 내어버려두심이 나오고 2장에 가면 저주가 나옵니다. 3장에 가면 심판이 나옵니다. 무슨뜻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심판아래 두게 하심”이라는 것입니다. 즉 심판아래 갇혔다는 거죠.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이렇게 진행되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빼앗을 의향이 없다는 뜻입니다.

네 마음대로 해보라는 거죠. 네뜻대로 마음껏 해보라는 겁니다. 그 어떤것도, 그 어떤 인간의 행동으로도 율법을 탈출하는 일에 성공한 경우는 없다는 겁니다. 예외없습니다. 사울이 아무리 잘못했다고 자기 행동을 회개하고 반성해봐도 그것으로 다시 왕의 자리로 복귀되지 않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서 참 신기해할만하지 않습니까? 사울이 울면서 사울의 옷자락 찢어질 정도로 잡아 당기면서 울어도 다시 복귀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다윗 같은 경우에는 방치나 저주로 인해서 왕이 되는 것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이 테두리, 이 방식과 다른 아주 엉뚱한 방식으로

“너! 왕 해!”

“제가 왕입니까?

“네가 왕이야”

그걸로 끝나 버렸어요. 그냥 왕 하라는 거죠. 이것은 어떤 테두리냐 하면 사울처럼 울어도 울어도 다시는 왕으로 복귀가 되지 않는 그런 테두리가 아니라, 자기쪽에서 무슨 짓을 해도 그왕의 자리가 취소되지 않는 그런 방식으로 “너는 왕 해!” 이렇게 되는 겁니다. 희한하죠. 같은 왕인데 어떻게 이렇게 다를까요? 이것을 다윗은 잘났고 사울은 못났다는 이런 인간의 행함을 가지고 다가서게 되면 그것은 완전히 조작된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겁니다.

그런 하나님은 없어요.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율법에 의해 갇히는. 어떻게 갇혔습니까? 사파리 알죠? 사파리. 사파리의 사자가 자유롭습니까? 아닙니까? 자유롭지요? 에버랜드 사파리에 보면 사자하고 호뢍이 하고 서로 온돌방 차지하려고 싸우는데 거기 대장인 호랑이가 얼마나 까불고 설치는지요. 쿠데타 일으켜서 동물의 왕국이 제 2탄까지 준비되어 있는 모양이던데---. 그것은 아무리 해도 결국 갇혀 있는 셈이 되는 겁니다.

갇혀 있지 않은 인간, 다시 말하면 이 율법마저 금지되지 않은 인간, 율법마저 어떻게 할수 없을정도로 해방된 인간을 가지고 뭐라고 하냐, 이것을 가지고 “율법외의 한 의”가 주어진다고 합니다. 즉 율법외에 다른 의가 주어진다는 겁니다. 로마서 3장 21절이죠.

(로마서 3:21)

이제는 율법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예수님은 어떤 율법에라도 해당없이 자유롭게, 율법의 저주와 심판에서 벗어난 그런 인간상이라는 말입니다. 이 율법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정죄받지 않는 예수님과 율법에 갇혀 있는 인간들 사이에 유일한 통로가 있다면 이것이 다윗언약입니다. 다윗언약! 그 중간 매체로 갇혀 있는 이 안에 사나이 하나 있었으니 그 이름은 바로 다윗입니다. 이걸 가지고 다윗혈통이라 합니다. 다윗혈통!

쉽지요. 다윗혈통이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느냐 하면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다윗에게 “너는 왕해! 너는 왕 해야되!”라고 찍어 주시는데 찍어주실 때 그 능력이 어떤 능력이냐 하면, 일체 율법의 테두리가 없는 율법의 테두리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채로, 혹은 벗어난 채의 지위로, 그러한 신분으로 왕이 될 수 밖에 없는 - 이 말이 제일 적당해요. 왕이 될 수 밖에 없는 - 영생을 얻을수 밖에 없는, 그런 사람으로 찍어 넣은 사람이 다윗입니다.

그 다윗과 예수님의 연결고리가 다윗의 혈통이죠. 이 다윗의 혈통에 해당되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한 사람 한 사람이 전혀 율법의 테두리와 상관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율법과 전혀 상관없이 어떻게 무슨 짓을 해도 용서받는 모습. 이거 미치고 환장할 정도로 기분좋은 일이예요. 무슨 짓을 해도 용서받고, 뭘 해도 용납이 되고요. 다윗혈통안에 있는 인간들이 정말 희한한 인간들이예요.

어떤 행동을 해도 율법으로도 정죄함을 받지 않는 아주 특이한 족속, 그런 특이한 종족이 이 다윗혈통안을 채우게 되는 겁니다. 듣고 보니 그런 혈통에 가입되면 참 좋겠다는 마음이 들면서 기분이 아주 좋아지지요? 그런데 다윗혈통안에 들어 있는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갖고 있는 그 본성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에 미리 앞서서 다윗혈통에 가입되어 있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성이 그대로 들어 온다는 것, 이게 문제예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고난을 미리 땡겨서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좋습니까? 이렇게 묻고 나서 “가하면 예하십시오”라고 동의를 구할 문제는 아닙니다만. 그래서 마태복음 에 보면 예수님께서 아주 희한한 이야기를 했어요. 구약선지자들이 “나”예요 나!, 여호와가 아니고 곧바로 “나”인데, 구약선지자들이 예수 “나”를 위해서 그렇게 고생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이야기를 듣는 바리새인들이 벙 찌는 거죠. 이상하다 저 스무살밖에 안된 청년이 저렇게 건방진 말을 하느냐. 구약선지자들과 저 청년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런데 예수님은 관계가 있다는 겁니다. 다윗혈통안에서 관계가 있다는 겁니다. 여기서 제가 다윗혈통이라는 것을 좀더 풀어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교재 7페이지를 보겠습니다. 위에서 열 번째 줄입니다. “이렇듯 두패로 나뉠 때에는 ‘본 부인과 여종’이라는 구조로 쪼개지고 있지만 법궤를 이동시킬 때에 법궤 사방을 진쳐야 되는 지파별 위치를 보면 거기에도 라헬과 레아의 갈등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본부인과 여종이라는 구조로 쪼개지고 있지만, 라헬과 레아의 갈등구조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서 구조가 여기 몇 개 나옵니까? 서로 관계성 없는 두개의 구조가 따로 나오죠. 한쪽은 뭡니까? 본부인과 여종, 그러니까 열두 지파의 근원적인 기초, 즉 구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본부인과 여종이라는 구조로 구분되고 또 하나는 라헬파와 레아파의 갈등구조로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 이것과 다윗언약의 혈통과는 무슨관계가 있느냐는 거죠.

어떤 분이 이것을 실제로 꼼꼼하게 살펴보면서 ‘설마, 이근호 목사가 거짓말 할 리가 있나’하는 마음으로 공부하면서, 여기에 나오는 법궤를 중심으로 한 지파들의 동서남북 배치등등 이런 이야기들이 다 ‘구라’로 하는 이야기일리는 없는데 이게 정말 이럴까 한 분이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제가 지은 책 「교회를 넘어서」에 구약 에스겔 부분에 나오거든요. 7쪽 중간에 보면 “이 원리에 따라서 성전을 중심으로 하여 여종 소생의 지파들은 북쪽과 남쪽 끝에 땅을 분배받게 되는데 이는 성전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다(단, 아셀, 납달리, 갓). 거기에 비해 정실 부족들은 남쪽과 북쪽에 각각 넷씩 성전 가까이에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구조를 통해, 새 성전이 장차 드러내 보여줄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그 인물은 오직 하늘의 아들에만 지칭함을 지향케 한다.” 고 되어 있습니다.

이거 뭐 맞겠지. 이근호 목사가 틀릴 리가 없으니까. 다들 이렇게 생각들 할텐데, 이것을 ‘과연 그러한가’ 하여 따지는 분이 있었습니다. 참 고마운 일이죠. 지금 본부인에 의해서 출생된 자녀와, 시녀들에 의해서 출생된 자녀의 비율이 8:4입니다. 그리고 언니 레아와 라헬 사이의 구성 비율이 8:4입니다. 라헬이 4명을 낳았다는 말이 아니고, 라헬의 시녀인 빌하가 낳은 자녀가 2명이죠. 라헬이 2명을 낳고, 라헬의 시녀 빌하가 2명을 낳고, 레아가 6명을 낳고, 레아의 시녀인 실바가 2명을 낳고 그래서 레아쪽과 라헬쪽의 비율이 8:4라고요.

그런데 동서남북이라는 것은 분명히 4각형입니다. 네 방향으로 3, 3, 3, 3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신명기 27장에 가면 그리심산과 에발산 양편으로 나뉘어서 그리심산은 저주를 외치고, 에발산쪽에서는 저주를 외치는데, 두패로 그러니까 청군 백군 나뉘듯이 양쪽으로 나눕니다. 그러면 8:4 구조를 6:6 구조로 수정되어야 할 필요가 있거든요. 성경에서는 어떻게 이것을 6:6구조로 수정하느냐 하면, 이게 아주 재미있는데요. 예를 들어 보면 신명기 27장에서 찾아 보면 이렇습니다.

(신명기 27:12,13)

12 너희가 요단을 건넌후에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요셉과 베냐민은 백성을 축복하기 위하여 그리심 산에 서고 13 루우벤과 갓과 아셀과 스불론과 단과 납달리는 저주하기 위하여 에발산에 서고

여기에 잇사갈은 분명히 레아가 낳은 자식이 맞습니다. 맞는데 라헬 자식으로 집어 넣어서 6:6구조로 일부러 맞춥니다. 왜 잇사갈이 라헬 자식이 되느냐 하면, 그때 언니 라헬이 남편과 합궁을 하지 않고 싶었는데 동생 라헬이 합환채를 얻는 조건으로 바꿔치기 하는 식으로 되어서 그 상황속에서 잉태된 자녀가 잇사갈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원래 라헬쪽에서 나와야 할 자식인데 언니가 값주고 산것이 되어 버리기에 잇사갈은 라헬쪽에 편입되어 버립니다. 그런식으로 억지로 6:6구조로 맞춘겁니다. 그런식으로 해서 법궤를 중심으로 해서 진을 치는 것도 3,3,3,3의 동서남북의 구조를 맞추어 들어가거든요. 결국 이것이 말하는 것은, 이걸 따져서 뭘 하자는 것이 아니고, 본부인과 시녀출생과의 차별을 두고, 라헬과 레아쪽에 차별을 둡니다.

그런데 여러분! 야곱의 본부인이 동생 라헬입니까? 언니 레아입니까? 동생입니다. 그럼 언니는 뭐냐? 야곱이 라헬을 얻기 위해서 슬쩍 언니를 그냥 보조 수단으로 취한 것 뿐이지요. 진짜 사랑했던 사람은 동생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12지파를 가지고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최초 아브라함언약에 의하면 인간의 육으로 난 자식은 천국에 못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서 나온 자식이 이스마엘인데 그가 아무리 불쌍하다 해도 그는 여종 하갈에게서 나온 자식이기에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약속의 유업을 받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약속을 보여주는 인물에 적당치가 못하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갈에게서 말고 사라에게서 낳으면 될것이 아닌가?’ 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라가 하나님의 약속을 보여주기는 하는데, 사라의 문제점, 곧 다윗혈통에 속한 사람의 문제점이 뭐냐 하면, 자기힘으로 아무것도 할게 없다는 겁니다. 할게 아무것도 없고 그냥 죽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라의 태가 그냥 죽기를 기다렸습니다. “나는 애기를 못낳는 죽은 여자입니다” 라고 할 그 순간까지 기다린 겁니다. 기다려서 이삭을 줌으로 말미암아, 죽은 나에게 부활의 자식으로서 이삭이 피어났음을, 오실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한 것을 미리 앞당겨서 하나의 인화지에 사진 찍듯이 아브라함때부터 찍혀 나온겁니다.

이 세상의 어떤 인간도 산채로는 하나님의 율법의 그 무서운 저지선을 돌파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어떤 행함으로도 율법의 저지선을 돌파할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도 없다는 말은 그냥 죽어야 되는 거죠. 그래서 예수 안에 있는 인간이냐 예수 밖에 있는 인간이나 공통점은 다 죽어야 한다는 겁니다. 예수 안에 있는 인간도 죽어야 하고, 예수 밖에 있는 인간도 공히 다 죽어야 하는데 단지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죽은자도 살려 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살려 달란다고 살려주는것이 아니고, 살려주는 근거가 예수 그리스도 자기 맘대로 살려주겠다는 겁니다. 예수님에게는 누구를 살리고 죽일 권세가 있는 분이니까요.

중풍병자에게 예수님께서 일어나 걸어가라고 했을 때 일어나 걸어갔거든요. 그때 예수님께서 “일어나 걸어가”라고 하지 않고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이야기 했거든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예수님이 참 건방지다. 쉬운 말을 놔두고 왜 어려운 말을 하느냐?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더 확실하고 쉬운데 왜 네 죄사함을 받았다고 하는 그런 어려운 말을 하느냐”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상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풍병자를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예요. 중풍병자는 하나의 인화지로서 예수님이 무엇을 해야 될 분인지를 알리기 위한 하나의 인화지에 불과한것입니다.

그러니까

“주여! 제가 걷기를 원하나이다”

“그래 일어나서 걸어가라”가 아니고

“어이!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이러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중풍병자는 뭐라고 하겠습니까? “야! 나, 걸었다!” 이게 아니라, “야 나 예수님이 누구신지 이제야 알았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치킨집을 하는데 백번이면 백번 다 망하는 그런 치킨집을 하는 거예요.

“주여! 이번에는 제 치킨집 잘 되어서 성공하게 하옵소서”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야! 이제야 나의 치킨집이 성공하게 되었다”가 아니라 나는 “내 치킨집 못되는 것을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신지 이제는 알았다”가 되는 겁니다. 주께서 나의 죄를 일방적인 권세로 용서하면 그것으로 모든 구원은 완료된다는 것을 이제는 알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목회자가 개척교회 하면서 목회 안된다고 답답해한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지금 복음 아는 목회자 중에서 목회 성공한 사람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목회 성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왜 목회 성공을 못하느냐? 성도의 목적은 목회 성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면 끝나는 문제입니다.

목회 성공은 우리가 관심둘 사항도 아니예요. 자꾸 우리가 살아 있다고 여기니까 욕심을 내서 이왕 살아 있는것, 목회 성공을 하면서 살아 있고 싶다고 이런 욕심을 냅니다. 주님께서 이런 예를 들었잖아요. “창고에 수천명을 집어 넣어 놓고 목회 하다가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데려가면 그것이 뉘것이 되겠느냐? 이 어리석은 목회자여! 저 창고같은 예배당에 수천명을 모아놓고 네가 죽으면 뉘것이 되겠느냐” 후임자차지가 되겠지요 뭐.

구약의 다윗언약, 아브라함, 정실과 시녀의 아들. 이런 관계성을 제대로 모르니까 구약을 백날 봐도 “아하! 이렇게 하면 아브라함처럼 복받겠구나”하면서 맨날 그런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그것은 내가 살아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살아 있다고 여기기에, ‘내가 살아 있는 이상 내가 뭘 할까?’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다시 이야기합니다. 예수 밖에 있는 인간은 율법에 의해서 이미 죽은 인간입니다. 예수 안의 인간도 율법으로서는 이미 죽은 인간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율법으로는 죽었고 그리스도안에서는 삶을 얻은 사람입니다.

따라서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이 뭘 아느냐 하면, 자기는 율법에 의해서 죽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예수 밖에 있는 사람은 본인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살아 있다고 우기는 사람입니다. 내가 자꾸 안죽었다고 여기니까 자신의 살아 있음에 대해서 존재의 가치를 두고, 거기에 의미를 두고, ‘살아 있는 내가 무엇을 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까요?’라고 종교적인 품세를 자꾸 드러내는 겁니다. 교재 1쪽에 보면, “존재로 보는 로마서와 언약으로 보는 로마서”이렇게 차이를 둡니다. 제가 알기로는 이렇게 존재로 보는 로마서와 언약으로 보는 로마서라고 이렇게 구분해서 로마서를 기술한 논문이나 책을 본적이 없습니다.

제가 잘난척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책을 제가 참고했으면 참고했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혹시 그런책을 보신적이 있거든 저에게 신고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떡 하나 더 드리겠습니다. “존재로 보는 로마서, 언약으로 보는 로마서” 왜 이렇게 차이를 둬야 하느냐면 사람이 존재로부터 출발을 하게 되면 - 존재란 있으니까 존재하고 없으면 존재를 하지 않잖아요 - ‘있는 것을 어떻게 잘 있게 하느냐, 멋있게 있게 하느냐, 이왕 있는 것 가져다 버릴수는 없고 이왕 있는 것을 계속 영원토록 잘 있게 하는 거기에 로마서가 어떤 기여 혹은 어떤 보탬이 되지 않을까? 나라는 인간이 지금 여기에 있다. 이렇게 꼬집어 보니 아프다. 분명히 있는 나를 로마서를 공부해서 얼마나 잘있고, 영생을 얻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돌릴수 있게 하겠느냐’ 하는쪽으로 보는 것이 존재론으로 보는 로마서입니다. 그런데 그 로마서는 아무리 로마서를 달달 외운다 할지라도 그것은 사울 계통이고, 종의 계통, 이스마엘 계통이지 다윗계통 혹은 다윗혈통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종 하갈에게서 나온 자식은 어떤 경우에도 인정받지 못합니다. 하갈은 약속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비해서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낳아진 사람입니다. 자 여기서 이스마엘이 놀랍게도 축복을 받습니다. 이스마엘이 축복을 받는다는 말은 이스마엘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그존재가 크게 확장되는 겁니다. 크게 하늘의 별만큼 많아지는 거죠. 왜 있어야 하는가? 이삭의 후손들이 유지되려면 이삭과 이스마엘의 그 두 계통에서 그냥 고요한 평화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 싸움을 일으키는 대적의 관계, 서로 싸우는 관계로 존재하기 때문에 이스마엘과 이삭의 관계가 양쪽 다 있어야 되는 겁니다.

이 싸움이 성도의 내부적인 갈등으로 계속 유지되는 겁니다. 이스마엘을 가지고 갈라디아서에 보면 엉뚱하게 “율법으로 난 사람”이라고 합니다. 참 희한하죠. 아브라함때는 율법이 있지도 않았습니다. 맞지요? 율법은 아브라함이후에 430년 뒤에 왔잖아요. 아브라함도 이스마엘도 율법은 구경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이스마엘을 가지고 율법으로 난 자고, 이삭은 약속으로 난 자이고, 성령으로 난자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율법개념이 할례나 제사법, 십일조, 안식일등 이 개념의 율법이 아니고, 율법은 우리 인간 자체를 전체적으로 규정짓는 전체적인 필드, 영역으로서 즉 “인간은 저주아래 갇혀 있어”라는 것을 규정하기 위한 율법으로서의 개념이 사도바울에 의해서 새롭게 시도되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보통 알기를 율법은 지키면 지켜 지는 줄로 알잖아요. 그런데 율법은 거대한 창고의 지붕같아서 아무리 밑에서 팔짝 팔짝 뛰어도 도달될수 없는 동시에, 율법에 도달될수 없다는 그 점으로 인해서 율법으로부터 저주가 계속 쏟아져서 율법의 저주를 뒤집어 쓸수 밖에 없는 그 환경자체를 “율법에 속했다”고 하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저주에 속했다. 심판에 속했다. 죄에 갇혔다.” 죄에 갇혔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서 율법이 투입되었다고 갈라디아서는 말씀하고 있죠. “너는 지금 너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죄에 갇힌채로 놓여 있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함인데, 율법을 줌으로써 갇혀 있다는 것이 확실시 되는 겁니다. 쉽게 말해보면, 지금 이 더러운 예까지 꼭 들어가면서 설명해서 나중에 제집사람으로부터 욕을 얻어먹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지금 저는 방구냄새에 갇혀 있습니다.

그런데 대식씨가 제 옆으로 와가지고는 ‘와~ 막 코를 막으면서 냄새난다’고 하는거죠. 대식씨가 가미된것은 뭔가 나로 하여금 갇혀 있다는 것을 노출시키고, 확인시키기 위함입니다. 예가 적당했습니까? 그런데 유대인들은 율법은 지킬경우에는 의인되고, 안지킬 경우에만 죄인이 된다고 말도 안되는 소리를 했습니다. 이것은 선악과 따먹은 그 자체가 죄인줄을 모르고, 선악과를 따먹었지만 앞으로 잘하면 될것 아니냐는 소리하고 똑같은 거예요.

선악과를 이미 안 그순간부터 죄인이라고 규정되어서 추방된 주제에, 이왕 먹은 선악과 앞으로 잘해보면 될것 아니냐고 우기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선악과가 그정도가 아니고요.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이란, 자기가 원하는 하나님을 자기가 스스로 만들어 내고, 자기가 좋은대로 메시아도 창조해 내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켰나 못지켰나 하는 것도 스스로 다 결정하고 판단하고, 그러면서 남의 들보는 못보면서 남의 티는 본다고 이런 이야기들을 하죠. 그런데 그런 면들이 다 율법에 갇혀 있는 다양한 모습에 해당된다는 말이죠.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혈통 - 혈통으로 계속 밀어 부칩니다. 다윗은 유다지파입니다. 유다지파는 하나님의 약속에 속해 있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약속 아닌것 곧 비약속과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반드시 전쟁관계에 있죠. 그래서 유다지파를 포함한 12지파는 이스라엘 자체가 전쟁을 위한 집단이기에 어떤 전쟁을 해야 되요. 전쟁을 하는데 유다지파는 율법을 지키지도 못하고, 제사장 지파도 아니지만, 제사장 지파인 레위지파가 제대로 율법을 지키지도 못한다는 그 점을 확인시키기 위해서 개입된 지파입니다.

유다지파가 착해서가 아니라, 레위지파보다 유다지파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레위지파에서 제사장이 나오고, 제사장으로서 성전일을 하고 해도 해도 아무리 해도 율법 하나 제대로 못지켰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 얼토당토 않은 유다지파가 등장하는 겁니다. 시편에 이것이 나옵니다. 시편에 보면 요셉지파는 버리기로 작정했고, 유다지파는 선택하기로 작정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진다는 겁니다.

(시 78:67,68)

67 또 요셉의 장막을 싫어 버리시며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68 오직 유다 지파와 그 사랑하시는 시온산을 택하시고

그래서 제가 지금 길게 이야기를 못하고 짧게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이 유다혈통으로 등장했다는 것은, 인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리 잘 지킨다 해도 결국 못지킨다는 것으로 판정났음. 땅땅땅! 유다지파에서 메시아가 오는 것으로 봐서 인간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구원되고자 하는 것은 글러먹었음. 땅땅땅! 이런뜻입니다. 그런뜻으로 유다지파에서 메시아가 오신겁니다.

그래서 유다혈통에 속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혈통적으로 유다지파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 주께서 유다지파의 약속이 담겨 있음을, 곧 유다지파 같은 그러한 방식으로 메시아를 보내줌을 믿는 사람들이 유다지파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되는 겁니다. 여기서 좀 어려운데, 유다지파에서 예수님이 어떻게 오셔서 그 일을 하느냐 하는 점을 봅시다. 유다지파라는 것은 기존의 레위지파 - 이 지파에서 제사장을 뽑았고 제사장이 잘해야 구원을 받고 복을 받는데 이것이 모세 언약이죠 - 가 아무리 잘하고, 열심히 해도 안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유다지파가 들어온거죠.

유다지파가 그런의미로 들어왔다면, 유다지파에서 오시는 메시야는 첫 번째로, 인간이 못한 죄의 결과도 보여야 하고, 두 번째로 그 죄의 결과가 어떤 식으로 회복 혹은 극복이 되었는가 하는 양쪽 다를 보여주는 유다지파의 메시야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로마서 1장 4절에 보면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이런 소리를 하면 유대인들은 이해가 되지 않는 겁니다. 왜냐하면 메시아가 죽을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유리가 유다의 족속이고, 유다지파에서 메시아가 온다면 그냥 메시아지, 메시아가 왜 죽는가에 대해서 그들은 해결책이 없어요. 만약에 죽는 것이 마땅하다고 한다면 그들은 졸지에 “살아서 우리가 지킨것은 다 헛짓이었습니다”라고 자인하는 셈이 되기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겠죠. 그렇지 않습니까?

제가 여기서 강의를 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와가지고 “이번 시간은 서경수 목사님이 강의를 하겠습니다” 라고 한다면, 그냥 밀리는 것이 아니고 이래서 안되고 이래서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 다 나오잖아요. 그때 제가 “서경수 목사님이 강의를 하셔야 합니다”라고 말한다는 것은 무슨뜻이 되냐 하면 “나는 강의할 자격이 못됩니다”라는 것을 스스로 자인하는 것밖에 안되잖아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다는 말이 무슨 뜻이 되는 겁니까? 이제 정답이 나오잖아요. 내가 전도하고 찬양하고 십일조 하고 전도하고 강의하고 설교하고 목회하고 무슨짓을 해도 “나는 안된다”는 것을 자인하는 뜻에서 십자가를 받아 들인다는 뜻이 되는 겁니다. 이제 내속에 나의 주특기, 나의 능력, 나의 재치, 나의 말재주 이런것이 살아 있지 말고 십자가의 피만 살아 있기를 학수고대하고 원한다는 그런 경우에만 십자가를 받아 들인다는 말이죠.

그럴 경우에만 십자가를 아는 목회자, 십자가를 아는 성도라 하잖아요. 그런 사람을 향하여 “우리는 죄인이며, 주의 십자가가 다 합니다”라는 말이 왜 그렇게 성질나는 말이 됩니까? 그게 환희요, 기쁨이요, 동감으로 나와야지 왜 그게 성격 돋우는 이야기가 되고, 성질나는 이야기란 말입니까? 대체 앞뒤가 제대로 맞지가 않잖아요. 십자가를 모르니까 화를 내고 있지, 십자가를 제대로 안다면 “맞습니다. 동의합니다. 찬송합니다.” 그래야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인화지이기에. 이것은 지난간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이야기입니다. 앞으로 누가 또 그렇게 될지 잘 모르겠어요. 누가 그럴지 모른다니까요. “그래도 그것은 맞는데 그래도 행함으로 뭐 ---” 그렇게 될 수가 있거든요. 여기서 십자가의 구조가 어렵다는 게 뭐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는 예수님이 죽음을 통해서 부활에 이르는 겁니다.

예수님의 죽음이라 할 때 여기에는 아브라함의 정실부인 사라와 하갈의 관계, 사울과 다윗의 관계가 다 들어 있고, 레위지파와 유다지파와의 관계가 다 들어 있는 겁니다. 예수님의 죽음안에 이것이 다 들어 있단 말이죠. 그래서 죽음을 통과했다면 이스마엘은 아니라고 그어야 하고, 레위지파는 아니라고 그어야 하고, 사울은 아니라고 다 그어버려야 한다는 거죠. 이렇게 레위지파, 사울, 이스마엘 죽죽 그을수 있다는것이고 그리고 그을수 있게 하십니다.

스스로 이것을 그어 버릴수 있다는 사실은 새로운 신분이 된 사람에게만 해당됩니다. 이스마엘이 누구냐 하면 이것이 인간의 육 아닙니까? 사울이 인간의 육, 곧 인간의 요구조건입니다. 인간의 성경말씀지킴, 성경말씀순종하기 아닙니까? 그러면 이런것을 그어 버린다는 것은 진짜 구원받는 사람들은 이런 것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 나 왜 그렇게 육적인지 모르겠어. 나 미치겠어. 나 이제 지옥가는 가봐” 이런식으로. “내 요구조건을 왜 안들어 주는거야. 나는 왕이 되고 싶은데 왜 나는 왕이 못되게 하는거야”라는 요구조건. “나는 말씀을 열심히 지키는데 지킨 만큼의 보너스를 주겠지”라는 그런생각. 십자가를 믿는 사람은 이걸 스스로 철폐할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이죠. 예수님의 죽음을 통과했다는 하나의 증거로서 내쪽에서는 이런 사고방식들을 아예 꼴보기 싫다는 식으로 자기가 자기에게 그런 외침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바보 등신아! 왜 그런식으로 생각을 해. 그것은 사울식 사고방식이고 이스마엘적이고 레위지파식인데.” 그렇다면 이게 죽었다는 말은 이게 무엇이 없다는 겁니까? 이것을 한마디로 하면 자기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자기것이 없다는 말이 로마서 1:6에 나옵니다.

(롬 1:6)

너희도 그들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자니라

십자가를 통과 했기에 이제는 “나의것” “나의것”이라고는 이제 없는 거예요.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겁니다. 맘대로 사세요. 맘대로 사세요. 제가 이 말하고서 욕을 얻어 먹어도 할수 없습니다. 맘대로 사세요. 맘대로 살아도 그리스도의 것이 되기에 그 신분은 달라지는 법이 없습니다. “맘대로 살면 죄를 짓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마음대로 사는데 죄를 짓는 공식은 이쪽 그어 버린 사울쪽이나, 레위쪽이나, 이스마엘쪽에서는 가능합니다.

그런데 이쪽을 지워버린 이상은 맘대로 산다는 말 자체가 성립이 안되죠. ‘주님의 것으로서 맘대로 산다’ 이것이 말이 됩니까? 이게 누구 맘대로 겠습니까? 주님의 맘대로 아닙니까? 주님께서 자기 맘대로 부리겠다는데 그걸 어쩌겠습니까? 주님맘대로 하시는대 내맘대로 산다는것은 앞뒤가 안맞고 모순이 되잖아요. 주님의 맘대로 내맘대로 산다는 이것이 말이 안맞잖아요. 주님은 뭐고 이근호는 뭡니까 도대체. “네 안에 내가 있다” 이런식인가?

그래서 사도바울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이 못 알아먹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욕을 얻어 먹습니다. 사도바울은 자꾸 그리스도를 증거하려고 하는데, 다른 사람은 자꾸 네가 나보다 뭐가 잘났냐는 식으로 해서 욕을 얻어 먹는 겁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아무리 외쳐도 안되는 거예요. 로마서 14장을 봅시다. 다같이 읽어 봅시다.

(로마서 14: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자도 없도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해서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서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보세요. 사람이 사는게, 인생이 뭡니까? “살고 죽는 것”이잖아요. 살고 죽는 것 사이에서 모든 일상적인 일이 벌어지는데 사는 것도 주를 위해서 살고 죽는 것도 주를 위해서 죽는다면 그 중간에 끼인것은 다 누구를 위해서 사는 겁니까? 자동적으로 주를 위해 살지요. 죽는 것도 주를 위해서 죽습니다. “나는 내가 잘못해서 죽었어”라고 그러지 마세요. 죽는 것도 주를 위해서 죽고 사는 것도 주를 위해서 산다면 그 중간에 끼인 모든 것도 다 주를 위한 일이 되지요.

다 주의 일입니다. 그런데 성도가 자꾸 오해하기를 “나를 위해서 일했다”고 자꾸 오해를 하지요. 그러나 오해는 용서가 됩니다. 돌이켜 보면 나라는 인간은 나를 위해서는 살수가 없도록 되어 있다는 것을 나중에는 깨닫게 됩니다.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째 일어서면서 “다 주께서 알아서 하신 일이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에 중간에 있는 것은 괜찮아요.

일곱 번째 넘어져도 여덟 번째 일어선다고 하니까 아홉 번째는 어떻게 되느냐고 하는 분도 계신데 9878번 넘어져도 9879번째 일어서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이 이미 주의 것이 된 이상은 우리는 늘상 나의 일이라고 오해는 하지만 오해의 눈꺼풀이 벗겨지면 주께서 모든 일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신다는 로마서 8장의 그 말씀이 동의가 되지요.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물론 2초정도 가지요. 한 3초 가면 많이 가지요. 돌아서면 또 잊어버리죠. “또 내맘대로 살았구나. 아 미안하다”하죠. 미안할거 하나도 없습니다. 미안할거 하나도 없어요. 우리가 미안스러워 해줘서 구원받는것이 아닙니다. “참 미안하다”는 그 말은 나도 뭔가 했다는 말이 아닙니까? 이 세상에서 그렇게 건방진 말이 어디 있어요? 미안하다는 그 말뒤에 무슨 말이 숨어 있습니까? ‘조금이라도 더 잘할수 있었는데’라는 것인데 주님앞에서 그런 건방진 말이 어디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이미 시험지 100점을 만들어서 주셨기에 이미 100점을 맞아 놓고는, 시험지를 빨리 내라고 하니까, 시험지를 들여다 보면서 ‘이것도 못풀었고, 이것도 못풀었는데’ 하면서 “선생님!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하고 있어요. 주님께서 “다 이루었다”고 했으면 다 이룬겁니다. “다 이루었다”고 했는데 가만히 있으면 될걸, 자기가 문제를 푼다고 지우개로 지우고 하면서 시험지를 다 찢어지게 만들어 놓고서는 ‘하~! 내인생이 억울하다. 원통하다. 예수믿고나서 이익본게 없다’고 하면서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어요. 귀때기를 맞아야 합니다. 빨리 시험지나 내놓으라는 말이죠. 100점짜리 시험지를.

시험지가 걸레가 되었는데요. 걸레라도 괜찮아요. 점수만 100점 나오면 되는거예요. 이 세상에 걸레 아닌 인생이 어디 있어요. 다 걸레인데. 전부 다 자기 인생인줄 알고 “주여! 목회 하다가 30명이었는데 2명밖에 안남았습니다. 걸레같은 인간~” 두명 남으면 그게 어떤데요. 그게 뭐라고요. 예수안에서 정죄함이 없는데. 100명 모이면 내교회 됩니까? 아니지요. 오늘밤에 내영혼을 데려가면 그게 누구교회 됩니까? 다 소용없는 짓이 아닙니까? 오늘밤에 내 남편을 데려가면 사모님은 누구것이 됩니까?@#!?$^!?

마찬가지거든요. ‘나는 죽어도 다시는 결혼을 안한다’는 그 말을 믿느니 차라리 이스마엘을 믿는다고 하세요. 해도 마찬가지고 안해도 마찬가지고 별 의미가 없습니다. 사도바울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우리보고 어떤 행동을 조심하라는 것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시대가 특별한 시대가 되었다는 겁니다. 예상밖의 시대가 찾아 왔다는 겁니다. 우리가 기대하지도 않았던 놀라운 변화가 십자가라는 사건을 통해서 이미 확연하게 재정비 되었고, 전혀 다른 질서가 완전히 잡혔다는 겁니다.

두가지 질서가 완전히 구별되었다는 거예요. 다윗언약이 완성된 말씀의 세계와 그것에 거부하는 세계가 나란히 놓여 있는 겁니다. 시간이 다 되어 가는 것같지만 시간이 아까워서 조금 더 해야 합니다. 로마서 1장 7절에 보면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좆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 되어 있습니다.

지금 사도바울이 믿음이라는 말을 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먼저 끄집어내 놓고 그 다음에 믿음이라는 말을 하는 겁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내가 믿습니다” 하는 그것은 믿음도 아니고, “나는 누구의 것이 되었습니다”라는 입장에서 자연 그 실천력으로 인해 자연 나올수 밖에 없는 것이 믿음이라는 겁니다. 지금 사도바울이 로마서 1장에서 믿음을 말할 때, 우리의 것이 사라졌기에 우리의 것으로 통하지 않고 - 이미 우리는 죽은 자가 되었기에 - 믿음이 주님의 것임을 확인해 주는 믿음으로 계속 연결시키려고 논리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해놓고, 그 다음에 믿음을 출발함으로 말미암아 믿음이 나의 것으로 오는 그런 오류가 없도록, 그런 착각이 없도록 만드는 거예요. “내가 있다. 뭐하면 될까? 옳지 믿으면 되겠네”라는 이런 믿음은 로마서에서 애시당초 인정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그것은 조작된 믿음이고 자기 신념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 믿음이 그리스도의 것으로 가고 내것은 없다면 우리는 뭡니까? 빚진 자 입니다.

(로마서 1:14)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자라

“내가 빚진 자”라고 합니다. 사도바울이 누구에게 돈 빌려 준적도 없고, 또 돈 꾼 적도 없습니다. 빚진자라는 것이 무슨뜻이냐 하면, 더 이상 내가 뭘 해야겠다는 계획이 내 선에서 나오는 것은 없어졌고, 주께서 원하는 대로 살수 밖에 없는 그런 입장에 놓여 있다는 뜻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주님이 다가서고자 하는 그 사람이 누군지를 몰라요. 성도입장에서 누가 주님으로부터 구원받아야 될지를 모르는 상태에서는. 자 그림으로 그립니다.

주님께서 A라는 사람을 구원할지, B라는 사람을 구원할지 선택했겠지만 우리는 몰라요. 모르는데 모르는 상태에서 이런 사람들에게 간다는 것이 - 즉 사도바울처럼 모르는 입장에서 로마에 가야 한다는 것이 -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가 이 사람들에게 무엇을 전해야 합니까? 복음을 전달하는 하나의 우편배달부가 되니까 고객에 대한 서비스를 해야 할 빚진자라는 뜻입니다. 서비스를 해야할 하나의 손님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빚진자라고 할 때는 뭘 믿습니까? 예수님께서 분명히 택한자가 있을 것이라는 그 사실을 믿잖아요. 이것이 사도행전 마지막에 나옵니다. 사도바울이 난파선속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어이! 바울아! 정신차려라. 너는 로마로 가서 해야 할 일이 있어. 여기서 안죽게 되어 있어. 로마로 가야해” 로마로 가야 한다는 그 소리를 듣고 사도바울은 무엇을 느끼겠습니까? 주께서 로마에 나같이 구원될 사람이 있기 때문에 전한다는 그 말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아직까지 주님이 재림하지 않았고 구름타고 오시지 않았습니다. 안왔는데 지금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빚진자들이예요.

여러분들이 미국가든, 프랑스를 가든, 영국에 가든, 한국의 서울에 있든지 간에 여러분들의 임무는 이것 한가지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다는데서 그치지 말고, 나는 당신에게 복음에 빚진자라는 입장에서 나가야 된다는 이 말이죠. 그러한 실천이 보여질 때 그걸 가지고 믿음이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로마서 1장 16절에 보면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고 합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말은 “복음을 자랑스러워한다”는 말보다 더 강조하는 말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말이 내가 복음을 가지고 부끄러워한다는 차원에서 하는 말이 아니고, 이미 복음이 나를 나답게 만들었다는 것을 강조하죠. 나를 나답게 했다. 곧 나라는 존재는 복음이 없으면 의미가 없다는 거죠. 목회자들이 목회하면서 고민거리가 있고, 여러 가지 스트레스 받는 것이 있습니다.

그럴때는 생각을 아주 간편하게 차분하게 정리 정돈만 하면 됩니다. 뭐냐 하면, 주께서 원하는 것은 뭐냐? 나의 완벽이냐?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면 됩니다. 그것만 하면 되는 겁니다. 성도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만 전하면 되고, 나머지는 우리가 행동을 어떻게 하고, 가난하다든지 하는 그런 것들을 전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닌 거예요. 복음 안전하는 것이 부끄럽다는 거예요. 복음 전하기만 하면 자랑스럽다는 겁니다.

그래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복음만이 최고다는 뜻이 됩니다. 결국! “나에게는 복음이 전부다”는 뜻입니다. “어차피 나는 복음 아니면 죽은 놈이고, 복음 때문에 살았기에 나를 살게 하시는 그 복음만이 나에게는 부끄러움이 없는 유일한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 복음이 사도바울이나 나에게만이 아니고 “그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임한 것이 믿음이라는 형식으로 등장하는 겁니다. 능력이 임했기에 믿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17절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것을 간단하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의”라는 것은 모든 말씀이 완료된 상태, 말씀성취의 상태를 “의”라고 합니다. 구약에 있는 모든 말씀의 성취된 상태를 “의”라고 합니다.

구약의 하박국에 있는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하는 그 말씀도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의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너무 어려운 것 같으니까 다시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의”란 구약의 모든 말씀, 하박국의 모든 말씀까지를 다 포함해서 완료된것을 “하나님의 의”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그것을 쪼개보니까 그안에 뭐가 들어 있다? 복음이 곧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만 산다”는 것이 완료된 상태의 것이 믿는 자에게 들어와 버리면 믿는자는 “오! 믿음으로만 사네”라고 느껴지는 현상까지라도 지금 우리가 실천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실시하는 중이라는 말입니다.

제가 말을 어렵게 하지 않았는데 잘 이해가 안되는 것 같습니다. 제가 가야산에 등산한적이 있거든요. 정상까지 가야산이 1300여미터 됩니까? 올라갈 때 보니까 구름이 이 위에 있어요. 그런데 올라가 보니까 그 위가 다 구름이 덮였어요. 구름을 찾아 올라간 것이 아니고 구름이 찾아 온거예요. 찾아오니까 구름이 온 어깨에 다 덮인거예요. 이 구름이 하나님의 의라고 합시다. “하나님의 의” “의”안에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

우리보고 깨달으라는 말이 아니고 설치라는 말이 아니고,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가 아예 먹구름처럼 우리를 덮어 버린 거예요. 완전히 푹 젖게 하는 거예요. 푹 쑤시면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또 쑤시면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이것을 어디서 배웠습니까? 이것은 생활화 혹은 습관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뒤집어 쓴겁니다. 복음이라는 귀신이 뒤집어 씌어 가지고 어디나 쑤시면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가 나옵니다.

왜 그런 소리가 나옵니까? 이미 주께서 완료 되었으면 적용을 해요. 그런데 적용대상자가 누구라는 말입니까? 재수좋게 내가 걸려들었다는 말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것을 우리 힘으로 못 이루는데, 예수님께서 이루셔서 공짜로 우리에게 주기만 했는데 그 주기만 한 그것이 우리에게 도착하니까, 우리에게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아주 희한한 고백이 튀어나오게 되었더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뭐냐 주님의 일의 성취대상으로 뽑혔다는 뜻입니다.

그걸 두글자로 “능력”이라 합니다. 우리능력이 아니고 주님의 능력입니다. 주님의 능력을 뒤집어 쓰고 살아가는 것이 성도죠. 내능력을 발휘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요. 그러니까 성도는 뭐가 필요 없는가? 수련이 필요 없어요. 수련이나 숙달이나 연습이 필요 없습니다. 성도에게는 이것이 일체 필요 없어요. 몇 번 해봐라. 운전면허 딸때는 이런것이 필요하지만 이런것이 필요 없어요. 세 번 연습하고 천당보냅니까? 뭡니까?

왜냐하면 주께서 능력으로 덮치면 오늘밤에라도 낙원에 갑니다. 어떤 사람은 설거지 하다가도 예수 믿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면 우리도 다 지금 설거지를 해야 할까요? 설거지를 하다가 예수믿었다는 말은 설거지 안해도 예수 믿을 수밖에 없다는 그런뜻이 아닙니까? 기도를 해서 은혜 받았다는 말을 좋게 해석하면 기도 안해도 은혜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기도를 시켰다고 되는 겁니다.

내가 해놓고도 그 말을 다시 하기 힘드는데 다시 한번 해보겠습니다. 기도를 해서 은혜 받았다는 말을 좋게 해석하면 내 기도와 상관없이 은혜 받았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기도해보니까, 내가 열심히 기도한것과 구원되는것과 상관이 없다는 것을 비로서 깨닫게 되더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두 번다시 기도할 필요는 없는데 기도하게 하시는것은 있지요?

내가 기도할 필요가 없는데, 기도하게 하시는 가운데 기도해서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는 그 사실을 깨닫게 하는 그런 기도는 주님께서 앞으로 다루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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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