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수련회 7번 강의 녹취
겨울 수련회 7번 강의 녹취
이름 : 이장우(IP:220.119.16.92)
2007 겨울 동계 수련회 로마서 7번 강의
4분 남았는데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근본적으로 죽는 하나님에 대하여서 사람들이 생각을 못합니다. 사람은 죽어도 신은 주지 않아야 하는데, 신이 신다우려면 안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경험하지 않아야 신답다고 하는 것입니다. 신은 죽음을 초월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상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죽는 하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거부하였습니다. 죽는 하나님은 싫다는 것입니다. 그런 나약한 하나님은 싫다는 것입니다. 인간 손에 맞아죽는 하나님이 무슨 하나님이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너무 낯설고 예상치도 못한 신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이방 종교를 보면 죽는 하나님은 없습니다. 왜 죽는 하나님이 성립이 안 되는가 하면, 신을 섬긴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의로운 행동이기 때문에, 신은 의로우신 분으로 그저 계시고 우리가 열심히 순종하고 믿으면 되지, 죽는 하나님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대고 설치지 않고 안방에 그냥 턱하니 앉아 계시면서 우리가 드리고 바치는 정성과 찬양과 예배와 경배를 그냥 받으시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쉽게 납득이 되고 걸림돌이 되지 않는 그런 하나님이 우리가 평소에 가지고 있는 하나님 관에 딱 적합한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낯선 하나님, 누가 믿었으리요. 누가 알았으리요. 무언가 겁을 잔뜩 주시면서 보아라! 안 믿었잖아! 다 거부하였잖아!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을 죄인으로 몰아붙이고 심지어 신을 믿을 능력까지 없다고 쏘아붙이는 그런 하나님,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아예 없다고 단정하고 접근하시는 하나님, 그런 하나님이라면 우리가 신을 섬긴다는 이 거룩한 종교적인 행위가 하나님 앞에 아무 쓸모 짝이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에 우리 민족의 심성에 종교성이 없었으면 몰라도 종교성이 있습니다. 시녀들이 있었고 옥저 동예 시대의 부족들은 제천의식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국사의 기초만 배운 사람들은 다 압니다. 가야지방에 발굴된 고고학에 보면 다 제천의식이 있습니다. 그 제천의식을 보면 국가의 큰 행사가 있기 전에 선행되는 행사가 있습니다.
나중에 학자들이 그렇게 말하지요! 그것은 신이 있어서 비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 백성들의 의지를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집결시키기 위한 하나의 이벤트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석을 합니다만 그러나 그 당시의 사람들은 어떻든 신 앞에 모든 것을 뭉치는 것입니다. 신이시여! 우리는 나약합니다. 도와주소서!
동네에서도 큰 행사가 있을 때에는 대동제라고 하여 정기적으로 신에게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낸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조상들이 돌아가신 날을 기념하여 제사장인 가장이 식솔들과 함께 동참하여 부인은 시녀가 되고 하여 가장의 권위를 세우고, 특히 형제가 많은 데서는 장남이 힘쓰는 것입니다. 장남이 제사를 드리고 동생들에게 돈 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제사할 때만 장남이 아니라 집안의 큰 일 들도 장남이 주도하는데 특히 유산문제가 생기면 장남이 주도하는데 그런 때는 형수가 주도하지요!
그런데 죽는 하나님이란 참 낯섭니다. 그런데 왜 죽는 하나님입니까? 죽지 않고서는 자기 백성과 관계를 엮을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사람이 살아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선악과를 따 먹고 난 뒤에 죽은 것으로 보는데 자꾸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쏘아 되시는 죽음을 보지 않고 살아있으니 살아있는 채로 어떻게 신과 어떻게 엮어 보겠다는 것입니다.
가인처럼 제사를 드려서 이 제사를 받아 달라는 것입니다. 아벨은 자기가 죽어야 되는 존재임을 드러내는 제사를 드리고 결국 그 제사에 의하여 죽게 됩니다. 소위 죽은 자의 폭력에 의하여 정말로 살아있는 자가 죽은 자로부터 죽음을 당하는 그런 연출이 되는데 그것이 마치 진짜 살아계신 예수님이 진짜 죽은 인간 놈들에 의하여 맞아 죽는 기이한 현상들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죽음의 장을 자꾸 확장시키셔서 죽음의 장에서 죽음에서 연합하자, 산채로 신과 인간이 결합하지 말고 죽은 자리에서 너와 내가 만나자는 것입니다. 너도 죽고 나도 죽고 죽음 안에서 만나자는 것이 하나님의 생각이었습니다. 이것이 제 생각이 아니고 하나님의 생각인데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유명한 목자와 양의 관계가 나오는데 특히 14-15절을 보면,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과 하나님만이 아는 그 관계를 다른 사람에게는 감추시고 내양, 참된 양에게만 이 정보가 전달되는 것입니다. 이 정보가 어떻게 전달되는가 하면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는 것이 납득이 되는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목자는 나를 위하여 목숨을 버려야 목자답다는 것을 이해할 만한 양이 이 세상에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목자가 나를 위하여 죽어야 한다는 것은 나는 죽어야 하는 양이라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 목자는 죽으러 오고 나는 이미 죽은 양이라는 것을 알고 죽음이라는 공통분모를 통하여 예수님과 하나님이 아는 그 정보가 죽음 안에서 서로 교통하고 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로마서 6장의 이야기와 동일합니다. 로마서 6장에서 죽음 안에서의 연합을 세례라고 합니다. 고린도 전서 10장에 보면 이 세례를 집단 죽음으로 표시합니다. 그것을 가지고 홍해건너기라고 합니다. 여러분 홍해위에 다리가 한강다리처럼 다리가 있어서 그 다리 위를 건넜다면 이 사람들은 아무리 홍해가 있더라고 홍해를 건넌 것이 아니라 다리는 건넌 것이지요! 제 말 맞지요! 홍해를 건넌 것이 아니라 다리를 건넌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성경을 한번도 읽어보지 못하였다고 치고 홍해라는 검푸른 파도가 있다고 합시다. 자 여기서 다리가 없는 상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넜다고 하면 그들은 반드시 무엇을 생각하는가 하면 죽음 없이 산채로 건너는 방법만 생각합니다. 1) 헤엄치기 2) 배 구하기 3) 홍해가 계절상 다 마르고 땅이 나왔을 그때 건너기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홍해를 건널 때에 계절상 물이 바짝 말랐을 때에 건넌 것이 아니고 홍해를 건널 때에 홍해의 바다 물이 좌우에 절벽처럼 갈라진 것입니다. 이것은 홍해 물리 마르지 않고 풍부한 상태에서 이 죽음의 바닷물을 중간에 갈라지게 해서 건넌 것입니다. 이것은 죽음 속을 통과한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고린도전서 10장에서는 세례라고 합니다.
이것이 요단강 강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연인지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여러분의 교재 표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세례 받는 모습인데 웃통을 벗고 반쯤 잠긴 모습인데 사실은 물에 푹 잠기는 것이지요! 완전히 잠겨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홍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례는 죽음을 의미하며 이 세례는 단독 세례가 아니라 집단 세례를 말합니다. 집단 세례가 왜 가능한가 하면 어떤 사람이라는 특정 사람을 상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 전부를 차별 없이 다 상대하기에 집단적으로 홍해를 통과하는 것이며 이것은 죽음을 통과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구약의 이스라엘은 역사적으로 죽음을 통과하지만 신약에서는 구약처럼 통과함이 없이 그냥 함께 계속 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같은 경우 홍해 건너고 나서 헤헤거리다가 광야에서 죽었잖아요! 그런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신약의 십자가란 그 십자가를 통과해서라는 것은 성립이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 때에 홍해를 건넌 이후 에라는 말이 되지만 신약에서는 십자가에 의하여 삼킴이 되기에 이제는 십자가가 이동하는 곳에 백성이 늘 함께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목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십자가 안이냐 십자가 밖이냐는 것으로 이제 확증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죽음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자신이 죽어야 하는 것을 모르면 신에 대하여 무언가 엉터리 같은 개념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나는 죽어야 마땅하고 지옥가야 당연합니다. 라는 입장에서 비로소 눈에 띄게 하는 것입니다. 누가? 예수님께서 죽음에 함께 동참하여 살려내는 그 위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능력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7장에서 12장에 보면 10가지 재앙이 나오는데 5번째 재앙부터 보면 이스라엘 입장은 그 재앙을 느긋하게 맞이합니다. 하나님의 재앙이 애굽 인들이 사는 땅은 작살을 내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는 고센 땅은 아주 잠잠하여 여유만만하게 그들이 당하는 고통을 즐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10번째 재앙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쪽이나 이쪽이나 죽음의 재앙이 찾아오는데 단지 사는 것은 어린 양의 피에 동참을 해야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답게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 이방인이라고 유월절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살아남았습니다. 잡 족들도 이스라엘 백성을 따라 나왔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동행하는 것이 항상 죽음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7:1-4절을 보면 새로운 혼인잔치가 나오지요! 율법과 혼인 한 여자가 이제 율법과 헤어지고 이제 성령과 더불어 사는 즉 새로운 남편을 맞이하는 그런 대목이 나옵니다. 이런 대목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에는 누구하고 살았습니까? 전에 남편이 죽으면 그 남편에서 벗어났다고 말씀합니다. 이 대목을 볼 때에 자기가 살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대목을 아무리 보아도 그리스도인이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율법의 남편을 만났을 때에 이미 자기는 어떠한 입장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 안에서 성령이라는 살려내는 새로운 남편과 새로운 부부관계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방금 요한복음과 출애굽기를 말씀드렸는데 그렇게 정리하여 두시고 로마서 4:24절을 한번 봅시다.
다시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낯선 하나님을 소개하였습니다. 어떤 하나님입니까? 죽음의 모습으로 죽음의 세력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내가 살아있기에 살아 있는 나와 살아있는 하나님으로 교류가 가능한 그런 신을 원하였지만 살아있는 나라는 것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죽음의 모습을 왔을 때에 우리는 그런 것은 우리가 원하는 신이 아니라고 배척하였고 그분은 그렇게 죽임을 당하고 그 죽음이 확대되어 우리에게 찾아 온 것입니다. 우리가 밀쳤던 그 죽음을 가지고 찾아오신 것입니다.
23-25절부터 봅니다.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 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이 특징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는 죽은 채로 가만히 있는데 우리 바깥에서 혼자 바쁘신 것입니다. 이러한 경향이 어디까지 가느냐 하면 로마서 끝까지 갑니다. 우리는 우리 입장이 노출 된 것으로 가만히 있는데, 어찌 할 수가 없는데 우리 바깥에 계신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혼자 분주하기 짝이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자 하시는 것을 우리는 그냥 멍청히 쳐다보지요! 아~ 우리를 살리시려고 저렇게 백방으로 애를 쓰시는 구나! 아~ 우리를 위해 죽으셨구나! 어!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살아나셨구나! 우리는 그냥 쳐다볼 뿐입니다. 우리 편에서 어떻게 손을 쓸 수도 없고 말릴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냥 분부하게 예수님께서 일을 자꾸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로마서 5장 6장 7장 8장 9장 계속해서 특히 9장이 하이라이트 인데 11장도 마찬가지이고 계속해서 끝까지 밀려갑니다.
우리는 전혀 손 쓸 수도 없는데 주님과 하나님만이 바쁘신데 우리는 멍청히 서 있는데도 주님께서 알아서 다 해주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그러면 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우리는 아예 죽은 자로 규정을 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5장을 봅시다. 우리는 가만히 있고 우리를 위하여 처리 하시는, 처리하는 용어가 적당하다고 봅니다. 우를 위하여 처리하시는 하나님께서 어떤 작업을 벌리시는 것입니까? 우리는 가만히 있는데, 어떤 식으로 가만히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점잖다. 우리는 살아있다는 식입니다. 이런 우리를 어떻게 처리하시는가 하면 앞에 아담을 내 세우시는 것입니다.
아담을 내 세우시고 두 번째 아담인 예수님을 내 세우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이에 끼인 것입니다. 별 의미 없이 존재하는 상태입니다. 우리는 가만히 있는데 이 두 큰 어른 분께서 아담은 죄인입니다. 예수님은 의인입니다. 우리는 가만히 있는데 우리의 조상 아담과 예수님이라는 두 큰 기둥사이에서 우리는 그냥 가만히 있는데, 아담을 인하여 우리가 죄인 되었음을 알았고 예수님을 인하여 의인되었음을 안 것입니다. 그뿐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행함이 없이!
로마서 5장 간단하지요! 첫 번째 조상 때문에 우리에게는 죄가 생산되고 죄가 폭발하고 두 번째 아담 되신 예수님 때문에 그 죄에 대한 은혜가 넘쳐나고 우리는 그 사이에 끼어서 멍청하게 바라보고! 이것을 가지고 연합 또는 세례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홍해를 건널 때에 가만히 있어라! 주께서 다 알아서 하신다. 홍해를 어떻게 건널까를 구상하지 않고 바다가 갈라져서 홍해 속으로 갔습니다.
분명히 애굽 군대가 뒤에서 보았을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런데 가까이 와서 보니 그 안에 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도 따라 왔습니다. 그들이 홍해 물이 합쳐져서 죽었습니다. 애굽 사람들의 입장에서 억울합니까? 억울하지 않습니까? 전혀 억울하지 않습니다. 물고기도 아니면서 물에는 왜 들어오는 것입니까? 사람은 육지를 걸어야지 바다 속을 왜 들어오는 것입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건너가지 않습니까? 우리가 남이가!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것입니다. 너희들과 우리가 같은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유월절의 피로서 이미 죽은 자이기에 죽음 속을 통과하지만 너희는 살았다고 자처하기에 죽음이라는 장벽을 통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사기에서 이스라엘 나라가 승리하는 하나님의 무기는 한 가지 뿐입니다. 이미 죽음을 가지고 무기를 삼기 때문에, 이미 죽은 이스라엘에게는 해가 되지 않고, 살았다고 여기는 이방민족들에게는 하나님의 죽음의 방식으로 전부 쓰러지게 되어 있습니다. 유황불이 떨어지고 해가 멈추고 이스라엘 백성은 멍청히 있는데 붙여주시니 살았다는 작자들이 이미 죽었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부딪히니 죽어나가 떨어질 수밖에 없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죽음 속에서 생명을 찾았고 그들을 삶 속에서 죽음이 찾아와서 그냥 죽어버리고, 이것을 되풀이 하는 것이 제사법입니다. 아침저녁으로 제사를 드림으로 우리는 이미 죄로 죽은 자이고 하나님의 의로 산자라는, 아브라함 약속을 그대로 적용받고 있는 그런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확인하지요!
아브라함의 축복은 야곱에서 주어졌습니다. 야곱은 이미 죽은 자입니다. 죽은 자이기에 야곱이라는 이름이 불러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야곱은 죽고 이스라엘은 살아났기에, 그러니 살아난 것은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기에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행사할 하나님이 야곱 안에 살아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야곱 안에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야곱으로 하여금 이스라엘다운 행동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요셉의 죽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내 아들 죽었구나! 나중에 보니 요셉은 분명히 죽었어요! 지난 주일학교 설교하면서 야곱이 사랑하는 아들 요셉에게 채색 옷을 입혔는데 비로도로 입혔다고 하였습니다. 요즘이야 비로도 아무것도 아니지만 옛날에는 비로도 하면 알아주었지요! 번득번득하는 채색 옷을 입힌 것입니다.
그러니 형제들은 시기가 난 것입니다. 다른 형제들은 그 채색 옷에다가 짐승의 피를 묻혀서 아버지! 당신이 제일 사랑하는 아들 죽었습니다. 이 피 보세요! 그때부터 다른 사람들의 역사 속에서는 요셉이 여전히 살아있지만 야곱의 역사 속에서는 요셉은 이미 죽은 자입니다. 요셉이 살아있다는 것은 상상도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살아있다는 것은 이것은 누가 뭐라고 하여도 하나님의 언약이 갖고 있는 고유한 능력, 즉 죽은 자를 살려내는 그 능력이 야곱을 떠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할 이유는 십자가는 어제나 오늘이나 항상 죽은 우리를 살려내는, 지금 이 시간 심장마비로 죽어도 또 살려낼 능력이 있다는 것을 항상 우리로 하여금 일깨워 주기 위하여 십자가의 의미 죽은 하나님이라는 모습으로 자꾸만 우리에게 느끼도록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5장 6장 7장 8장에서 우리는 가만히 있는데 우리 외부의 성부 성자 성령께서 나중에 8장에 성령까지 동원됩니다. 우리는 가만히 있는데 자기들끼리-하나님을 자기들끼리라고 하면 안 되지만-하나님이 알아서 가만히 있는 우리를 다 하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아담으로 말미암아 가만히 있어야 될 수밖에 존재임을 첫 번째 아담을 통하여 우리에게 설명하여 줍니다. 그것이 로마서 5장의 이야기입니다.
율법을 준 것은 너희가 왜 죽어야만 하는 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추후에 죄 때문에 죽었다는 이유를 알려주기 위하여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 조상이 죽고 또 죽어도 그 이유를 몰랐는데 율법에 와 보니 아하! 먼저 죽었던 조상들이 죄의 값이 사망이라는 것 때문에 죽었고 우리고 죽을 것이고 앞으로 내 자식도 죽을 것이고 이 죽음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피할 수 없는 숙명이구나! 하는 것을 율법이 확정지어 주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 밖에서 대단히 분주하신 분이 계십니다. 십자가를 지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자기 백성을 부활시킬 수 있는 권세를 부여받은 예수님께서, 우리가 죄 때문에 죽었기에 이 죄를 해결하고 용서하시고 은혜로 씻어주시는 일을 하셔서, 옛날에 아담이라는 조상 때문에 그냥 가만히 있어도 죄인 된 것처럼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가만히 있어도 의인되는 그런 혜택이 예수님으로부터 쏟아진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뒤 알게 된 비밀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참된 하나님을 나타내셨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행함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죽은 자에게 무슨 행함이 의미가 있습니까?
로마서 9장 30절에 보면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 참 이 말을 잘하였지요! 이방인들이 의롭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아예 관심조차 없다는 것입니다. 아~ 의로워야 하는데 하면서 애쓰는 정도가 아니라 의? 그게 뭔데? 하면서 의에 관심조차 없는 인간들, 의를 추구하지도 않고 의로운 것이 아니라 의라는 것이 있는지도 없는지도 몰랐던 그들이 의를 받은 것은 사도행전에 보면 성령세례라고 합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나니 그들이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그들이 사전에 무엇을 추구하였다든지, 의인되기 위하여 유대인의 메시아를 믿었다든지 하는 것이 없이 그냥 성령이 임하니 그들이 의인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리하였느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참 어려운 말입니다. 믿음에 의지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의지한다는 것이 행함에 속합니까? 속하지 않습니까? 어렵지요! 의지함이란 행함입니까? 아닙니까? 여기서는 행함이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을 행하지 않아서 문제가 있다는 말이 아니고, 그냥 표현이죠! 믿음을 드러내지 않고 행함을 드러냈다는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언가 의지한다는 것을 딱 떼 내면, 내가 의지해야지! 마음에 결심을 먹고 그것을 행동으로 실천에 옮겨야 의지하는 것이 나오는 줄 알고 있지만 성경에서는 그런 것이 아니라 앞에 있는 앞에 있는 믿음과 앞에 있는 행함에 그냥 따라오는 것이기에 이것은 별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즉 믿지 않고 행하였기에 그들은 부딪히는 돌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죽음 안에서 행해서 무엇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미 죽음 안에 있는 인간이, 그러면 이방인들은? 이방인들이 언제 의에 관심이나 있었던가 하는 것입니다. 없는데 그러면 누가 행하였는데 주체가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5장부터 나옵니다.
우리는 아담이기 때문에 죄의 지배아래 있는 아담이기에 자력으로 예수님을 부른다든지 찾는다든지 하는 것은 죄에 갇혀있는 인간으로는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포기하세요! 그러나 예수님 때문에 그들에게 은혜가 임하니까 자신이 예수님의 은혜를 입었음을 비로소 아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하여 5장 초반에 보면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그 다음에 더 심하게 말합니다. 10절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 되었을 때에’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신을 이야기 하실 때에 아들의 죽음을 신의 자리에 집어 넣어버리시는 것입니다.
아들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신을 찾는 행위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들의 죽음에 의해서 무언가 너에게 전달되는 것이 있어야 구원되는 것이지, 네가 산채로 신을 대상으로 삼아서 신에게 나아가고 영접하고 하는 식으로 구원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앞에서 주님께서 다 하셨습니다. 라고 고백하지 아니하면 그것은 신자가 아니고 성도가 아니라는 뜻이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5:7-10절중에 9절을 보면,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로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의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러므로 예수님이 안 죽으셨다면 우리에게는 필연적으로 무엇이 주어지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진노가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목숨이 죽는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우리를 노리고 대기 상태에 있었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심으로 말미암아 그 피안에 있는 사람은 무엇에서 벗어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진노하심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진노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원수 된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피아래 있는 사람은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그 피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하심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피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 피를 안 믿든지, 살아있다는 내가 그 피를 믿어서 천당을 가볼까 하는 수작을 벌린 것입니다. 그런 것은 다 가짜이지요! 그런 것은 다 가짜입니다. 피가 나로 인하여 믿게 하였다는 그런 의식이 있어야지 내 쪽에서 살아있다는 내가 더 살아보려고 그리스도의 피를 이용하려고 하는 것은 5장에 가만히 있으라는 원칙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만히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죽은 존재 이지요!
5장을 넘어가기 전에 17절을 다시 봅시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은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여기서 왕이라는 개념을 현대 민주주의 시민들은 잘 못 느끼는 것입니다. 왕이라는 말은 자기가 통치하는 영역에서 반발이 있을 수 없는 상태를 왕이라고 합니다.
죄가 우리의 왕이라는 말은 우리가 한번도 그 죄에 대하여 거역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되었다는 것이 죄가 우리의 왕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제 주님의 의가 왕이 되었다는 말은 우리가 아무리 죄를 짓고 죄를 연구하고 지옥가려고 발버둥치더라도 우리의 왕 되신 주님께서 ‘이 못된 것 지금 천국 안가고 어디로 가!’ 하면서 천국으로 집어넣는 그런 관계에 놓여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담의 범죄에서 아무리 애를 쓰더라도 아담의 범죄가 우리에게 왕 노릇 하기에 아담의 범죄에서 벗어날 수 없듯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에서 벗어나려고 용서 싫어! 용서 받지 않을 거야! 나 예수님 말 안 듣고 살려고 아무리 애를 쓰고 노력하여도 그런 노력이 다 부질없이 허사로 돌아갈 것입니다.
이런 기쁜 팔자가 되었습니다. 아무리 연구하고 죄를 지으려고 하여도 주님의 용서에서 빼도 박도 못할 그런 입장이 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몽땅 가져가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을 로마서 6장에서는 연합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연합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연합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 연합에서 취소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 이제 주님과 안 놀래! 하면서 큰소리 쳐봐야 다 허풍인 것입니다. 이미 내가 연합당한 것입니다. 주님에 의하여 내가 연합당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때부터 종이 된 것입니다. 종이란 것은 주인이 누구냐고 물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너는 누구의 종이냐는 것입니다. 나는 의의 종이라고 합니다. 우리 자랑한다고 의의 종이 아닙니다. 의가 오셔서, 주님이 오셔서 종으로 삼았다는 처량한 신세-이거 처량한 신세가 아니지요, 낙담하듯이-그냥 철썩 받아진 것입니다. 아! 나는 종이야! 누구 종인데? 주님의 의의 종이야!
어찌하여 내가 이런 신세가 다 되었는지 빼도 박도 못하는 신세, 나쁜 짓 나쁜 짓을 골라 행하여 지옥가고 싶은 것이 소원이라서 그렇게 하려고 해도 안 된데! 벌써 끝났데! 어디를 가서 나쁜 일을 해도 의의 종이고 좋은 일을 해도 의의 종이고 이것은 의로운 행동을 할 때만 의의 종으로 삼아 준다는 계약 조건이 이것은 무슨 짓을 하여도 그것의 의의 종이 하는 짓으로 그렇게 연합이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는 죽었잖아요! 죽은 곳에서 우리 팔자로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죽은 우리를 주님의 능력을 살려내었다는 것도 내 쪽에서 취소할 수 없는 능력으로 덮쳤다는 것입니다.
저는 티브이를 거의 보지 않습니다. 거의보지 않는데 그런데 개그 콘서트 가운데 제가 인상 깊게 보는 것이 있습니다. 그기에 의의 종이 나옵니다. 의의 종으로 대표적인 사람이 누구인가 하면 안상권씨라는 개그맨이 김대범이라는 사람에게 잡힙니다. 고교 천황이라는 것입니다. 안상권 이름이 맞아요? 안일권 이라는 개그맨이 호크를 풀고 좀 노는 것처럼 삐딱하게 보입니다.
그렇지만 개뿔도 싸움도 못하면서 반항을 하는 것입니다. 김대범이가 나오면 한번 붙어볼까 하면서 덤비지만 멱살 잡혀서 꼼짝도 못하면서도 자존심은 있어가지고 막 반항을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의의 종입니다. 빼도 박도 못하는 것입니다. 다들 자존심이 있어가지고 나는 주님이 그렇게 나오시지 않아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괜치 으스대어 보지만 주님께서 붙잡은 손을 놓지를 않는 것입니다. 꽉 잡고 끌고 가는 것입니다.
종이 된 것이 내 희망사항이나 내가 선택한 사항이 아니라 주님께서 선택하신 능력이기에 그 주님의 멱살 잡는 능력을 무슨 능력이라고 하는가 하면, 그것이 부활의 능력입니다. 이 부활의 능력이 로마서 1장-3장에 나왔지요! 이 부활의 능력에서 나오게 되면 이 관계가 무엇이냐? 안일권과 김대범의 그 관계를 로마서 8장에서 성령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안일권의 내부에서는 김대범의 영이 임하는 것입니다. 방금 제가 든 예를 보기 위해서 개그 콘서트 재방송 꼭 보시기 바랍니다.
의의 종이 우리의 희망사항이 아니었고 희망사항 이전에 연합됨을 통하여 이미 결정된 운명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무슨 짓을 하여도 의의 종입니다. 최소 될 수 없는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부활의 능력이 우리로 하여금 빼도 박도 못하게 만든 것입니다. 부활의 능력으로!
세상에 죽음을 이기는 힘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우리는 아무리 자존심을 세워도 죽잖아요! 그런데 우리보다 더 센 죽음, 그 죽음보다 더 센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를 의의 종으로 삼았으면, 이제는 꼼짝달싹 못하게-비록 자존심을 챙겨가더라도- 의의 종으로 삼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 로마서 6장에서 계속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통하여 기어이 무엇을 배태 하는가 바로, 죄의 삯은 사망이요 그것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십자가에서 나왔지요! 그 다음에 의의 열매는 무엇이라고요? 생명이라! 그것이 어디서 증거 됩니까?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서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붙잡고 있는 분이 이미 생명의 능력으로 붙잡고 있다는 것이 확인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내가 의의 종이라는 것은 내가 오래 살고 나서 나중에 천당 가보았을 때에, 천국에 딱 도착하였을 때에 확인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것은 철학에서 말하는 소망입니다. 그것은 무한한 지연입니다. 무한한 연기 이것을 세상에서는 소망이라고 합니다. 그냥 기다림 자체를 기다려 보는 것입니다. 뚜렷한 확증이나 증거는 없습니다. 그냥 내가 기다린다는 그 자체를 증거 삼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의 소망이 나의 소망의 근거가 된다고 우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 인간의 실존에서 나온 것입니다.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연극이 있지요! 사무엘 베케트의 작품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는데, 현대인들은 이 부조리 속에서 무언가를 무작정 소망한다는 것입니다. 블로흐의 철학에서 보면 소망의 철학이 나옵니다. 현대인들의 희망이나 삶의 보람이란 무엇이냐 하면 무엇이든지 무작정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그 기다림이 너에게 힘을 줄 것이라는 것입니다. 목적 없는 어떤 현재는 희망이 없기 때문에 비전이 없으면 힘을 잃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엇이나 비전을 만들라는 것입니다. 없는 비전도 자꾸만 만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인들이 회사나 어떤 공동체를 운영할 때의 무기입니다. 실제로 다단계나 회사의 신입사원들은 이유 없이 지금보다 더 나은 실적을 그래프로 그려서 목표를 정하여 놓는 것입니다.
만약 은행 지점장이 은행 수탁 금이 2006년에 백억이라면 그 다음 2007년이라면 백 오십억을 목표로 세우는 것입니다. 무조건 더 높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비전이 없으면 일을 안 하게 되니까 일시키기 위해서 계속 높이는 것입니다.
마치 무엇과 같은가 하면 당나귀를 계속 달리게 하기 위하여 당나귀의 눈앞에 당근을 달아놓듯이 무조건 빨리 달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 당근이라는 소망을 향하여 무조건 달리게 하는 것입니다. 엄마들도 애들한테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엄마 내가 이번이 90점 먹었어! 안돼! 95점! 엄마 95점이야! 안돼! 98점! 엄마 내가 반에서 5등 했어! 안돼 3등해! 1등하면 무엇을 해줄게 하면서 계속 족치는 것입니다.
피아노나 음악을 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콩쿠르에 입상하면 더 큰 콩쿠르에 나가는 것입니다. 쇼팽 콩쿠르,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등에 나가기 위하여 한국계가 동양계에서 줄리아드 음대에 공납금 내어가면서 훌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그만한 성과가 있지요! 그런 것은 우리 내부의 욕망이 만들어 낸 자아의 화신이며 자아의 한 이상형으로 좇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망이라는 것은 나의 소망이 아닙니다. 나는 이미 죽은 자이기에 나의 소망은 없고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내가 소유하는 내 소망이 아니고 주님께서 하신 소망을 그냥 수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에서는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바란다면 참음으로 기다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이미 십자가의 의미를 아는 사람, 십자가의 마지막은 영생이라고 하였지요! 그러므로 십자가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기쁨으로 영생의 시기를 고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소망을 수용한 것을 인정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망이라는 것은 십자가 안에 다 들어있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받아들이면 그 안에 소망도 환난도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을 다시 한번 봅시다. 6장 4절에 보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 세례를 받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방금 제가 죽으심 죽으심의 하나님을 찾아 오셨다고 강조하였는데, 목사님 그것을 왜 강조하십니까? 하는데 대한 이유를 된다면 8장에 성령이 나옵니다. 7장에도 약간 나오지만 8장에 성령이 나오는데 이 성령을 이야기 하면서 죽으심과 상관없는 성령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거의 태반입니다.
십자가와 상관없는 성령을 설명하는 것이 태반입니다. 십자가 안에서 성령님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지금 사도 바울이 6장에서 죽으심과 연합한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성경에 나올 때는 십자가가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되는가? 그런 차원에서 이해를 해 주셔야 합니다.
7장을 보겠습니다. 오늘 저녁에 가셔야 하시는 분도 있고 내일 아침 일찍 가시는 분도 있고 해서 오늘 중요한 테마를 마무리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봉사 정신입니다. 로마서 7장전까지는 너는 죽어야 돼! 죽어야 돼! 하지만 로마서 7장에서는 우리가 왜 죽느냐? 왜 죽어지내야 하는가? 여기에 대하여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어지내야 하는 이유는 우리 속에서 죄가 활개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 힘으로 우리를 통치하는 죄를 이긴다는 것은 우리로서는 하나의 희망사항입니다. 하나님! 신이시여! 내가 비록 죄를 지었지만 언젠가는 내 손으로 이 죄를 이기고 하나님께 나아가겠습니다. 그것이 희망사항인데 그 희망사항을 절망으로 바꾸는 것이 율법입니다.
율법은 선한 법이지만 마치 죄와 동업을 한 것 같습니다. 악마와 동업을 한 것 같습니다. 악마와 동업해서 율법이 들어오면 악마가 그 율법과 꼭 반대로 하도록 우리 내부에서 부추기는 짓을 죄가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그림을 그려 봅시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졌습니다. 십계명과 모세의 율법 같은 것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자 율법이 왔다. 이 율법을 내 힘으로 이루어서 의를 이루고 내 소원을 이루자 하기 전에 율법을 통하여 죄가 더욱더 활개 치며 들어와 버리면 나의 이 착한 의지, 의로워야 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하고 올바로 살아야지 하는 이 모든 것을 완전히 꺾어버리고 나로 하여금 절망이네! 절망이네! 다른 말로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그런 일을 위하여 율법과 죄가 서로 반대되는 성향을 가지고 있지만 마치 동업자처럼 우리 자신의 정체를 폭로시키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로마서 7장에서 율법의 남편이 죽고 나서 이제는 성령이 남편이 된다고 할 때에 어떠한 자세와 어떠한 태도인지를 알려주기 위해서 먼저 전의 남편, 율법이 남편이 되었을 때에 우리는 어떠한 입장이 되었는가 하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남편이 되어있을 때에는 그것이 더욱더 우리로 하여금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죄가 발생되고 생산되는 죄 공장, 죄를 마구 만들어 내는 입장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절망합니다. 아하! 나는 곤고한 사람이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