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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겨울수련회 강의 녹취 4번자유게시판로마서

겨울수련회 강의 녹취 4번

이름 : 한윤범(IP:211.218.4.196)

070109d 2007년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할까요?

여자 분들이 명품을 좋아하는 것은 그 명품의 쓰임새, 활용도 이것이 돈값만큼 월등하게 낫기 때문에 명품이 아니고, 그게 명품이 하나의 금지의 법의 해당되지요. 명품 있는 자와 없는 자로 사회가 구분될 때 그 경계선을 넘어 명품 가진 자와 안 가진 자, 명품이 집에 하나도 없는 자와 있는 자를 통해서 자신의 자본주의 시장에서 자아 자체를 C로, C가 뭐냐? 상품이거든요.

자아 자체를 상품으로 내 놓을 때, 이 상품을 결정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신인 돈이 M이죠. 머니, 돈이 커스텀, 이 상품의 가치를 결정하기 때문에 신 앞에 나, 명품 가진 여자입니다. 하는 어떤 상품으로서의 시장에 자발적으로 내놓는 거예요. 이거는 이미 나, 자아를 초월하는 그런 이상이에요.

여기에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 언어소통이 유지가 됩니다. 언어소통이 유지가 되고, 언어소통이 가능하거든요. 이 언어소통이 가능하다는 말은 뭐냐 하면, 여기서 노는 언어소통에 동조하지 않으면 너는 우리 공동체가 아니야. 라고 공동체에서 배제당합니다.

이걸 가지고 라캉이라는 사람은 주체라는 것은 어디서 나오는가? 공동체가 결정한다. 이게 바로 북한의 주체의식 아닙니까? 북한의 김일성, 김정일의 주체의식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은 아오지 탄광이야요. 탈북하든지 가라 이말 이지요. 마찬가지로 북한만 욕할 것이 아니고, 오늘날 자본주의에서 형성된 주체가 공동체에서 결정하는 거죠.

이런 것이 뭐냐 하면, 주류가 됩니다. 술 '주'자 주류가 아니고, 다수가 되지요. 이 주류에 의한 정치체제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가지고 민주주의라고 합니다. 민주주의는 반드시 다수와 소수를 연결해서 다수의 의견을 진리라고 규정하고 소수를 여기에다가 통합시키는 그러한 정치제도가 민주주의지요. 이게 주류가 되지요.

로마서 1장 23절, 24절에 보면, 저희의 욕심대로 내어두게 되면 방치하게 되면 욕심과 욕심의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됩니다. 어떤 의사소통을 해도 내 욕심과 너의 욕심이 타협하는 그런 시장이 형성되죠. 이만큼 양보해 줄게, 이만큼 양보해줘. 결혼생활도 마찬가지에요. 아내라고 남편 마음대로 못하고, 남편도 마음대로 못하고. 어느 정도 양보와 타협, 정치적인 흥정이 있게 마련이죠.

그 흥정을 우리 내부에서도 흥정한다고 이해하는 사람이 프로이드입니다. 그 사람은 인간의 무의식 속에는 인간의 욕정과 사회에서 요구하는 윤리와 흥정을 해서 그 중간 흥정된 지점에 나오는 것이 '에고'라는 자아가 거기에 형성됩니다. '이드'라는 것은 인간의 근원적인 활화산 같은 욕망이라면 '초이드'는 거기서 윤리란 말이죠. 그 중간에 어중간하게 그때그때마다 이렇게 흥정과 타협을 해서 한 거죠.

그래서 결국은 이것은 이렇게 되려면 여기서 뭐가 되느냐 하면, 이 전체를 이걸 가지고 뭡니까? 이게 질서거든요. 이게 지금 로마서와 무관한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질서란 뭡니까? 이게 법이에요.

이 인간이 만든 법과 그리고 하나님 법과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인간이 만든 법은 자신의 질서를 인정하겠다는 그러한 법이라면 하나님의 율법은 모든 인간을 심판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규정하기 위한 율법이 주어집니다. 그 율법이 주어지기 위해서 인간들이 어떤 욕정에 의해서 욕망에 의해서 어떻게 자기 마음대로 방치된 채로 살아가느냐를 보여주는 겁니다.

지난번에 울산강의에서 제가 그런 이야기했지요. 가인을 만나는 사람마다 표를 해서 가인을 죽이지 않도록 한다. 라고 했을 때 왜 하나님께서는 아벨은 덜렁 죽이면서도 아벨을 죽인 그 살인자는 왜 자꾸 이렇게 방치를 해서 그것도 그냥 살려 오히려 죽는 것을 방지시켜서라도 억지라도 계속 살려줘서 그 자자손손 그 가인의 속성을 이 땅에 의도적으로 확장시키려 한 이유가 뭐냐? 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느냐 하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 여자의 후손이라 하는 것은 그냥 발생되는 것이 아니라 뱀의 후손과 겸비해서 병행해야 거기서 자기 윤곽을 드러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전혀 다른 차원에서 생각한다 이 말입니다.

가인의 후손, 칠대 손을 뭐라고 했습니까? 나에게 상처를 내는 사람은 내가 죽이고, 나에게 상처를 낸 소년을 가인에게는 두 배로 죽였지만 나는 일곱 배나 되갚아 준다. 라고 철저하게 자기중심주의로 나가잖아요. 그런 것을 이야기하고 그것이 바로 도시를 이루고.

도시라 성이라 하는 것은 그냥 거주하기 위한 성채가 아니고, 그게 전쟁용이에요.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게 성이라 하지 않고 요새라 하지요. 요새화된 캐슬, 성이라 하는 거예요. 이것은 고대서양에 대한 고고학이라든지 보게 되면, 전부다 성들이 요새화 되어 있어요. 모든 게 요새화 되어 있어요.

그래서 어떤 현대 사람은 말하기를 요즘 아파트가 브라질 상파울루나 브라질리아 도시라든지, 부에노스아이레스, 아르헨티나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가면 재미있는 게 뭐냐 하면, 철저하게 고급층 사는 사람과 그 하류민들 사는 산 위에 사는 사람들과 철저하게 요새화되어 있다고. 사진 같은데 보면 여기에 개인용 풀장에서 수영하는 것을 저 위에서 들여다보지만 들어가질 못해요. 다만 이들은 하루에 여기 출근해서 퇴근은 자기 산 위에 집에 가야 돼요. 그런데 여기선 마음껏 즐기는 거예요.

그러니까 점점 더 자기를 폐쇄화시켜야 돼요. 폐쇄화시키면 시킬수록 자기를 단속해요. 자기가 사는 거주지를 단속하면 단속할수록 자기는 그만큼 가치가 높은.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그걸 안타까워한다든지, 아이고, 참 부자는 안 됐어? 이게 아니라 나도 언제쯤 저렇게 자기 단속하며 살 수 있을까를 부러워한다고 해서 여기에 사는 고급 사람들이 주도적 역할, 사회의 모든 관습이나 문화나 문명이나 모든 것을 이끄는 주도적인 세력으로 등장한다 이 말이죠.

결국 이것은 가인의 문화라 하는 것은 가인을 철저하게 자기를 지킬 만한 사람이 되는 것이 이상적인 모델로 등장합니다. 그러한 창세기의 이야기가 로마서 1장에 쭉 나와 있지요. 28절, 29절에 보면,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이런 자는 사형에 해당된다는 것을 자기도 알면서도 자기뿐만 아니고, 다른 사람께 한다.

이게 뭐냐 하면, 확대재생산이에요. 시장에 나가서 그걸 확산시키는 겁니다. 이게 더 좋다. 퍼질 수밖에 확산될 수밖에 없어. 이렇게 인간의 욕망이 확산된다는 것은 그만큼 저주의 대상이 넓혀지고 확대된다는 겁니다.

이게 로마서거든요. 로마에 쓴 편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의 상황이 이방민족이지만 이방민족과 고대 있던 모세의 율법과 이방민족이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를 지금 여기서 천천히 발걸음을 시작한 거예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욕망 속에 있고.

그런 다음에 로마서 2장 봅시다. 2장 5절에 보면,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고"

이게 뭐냐 하면, 로마에 있는 이방민족, 각색 모든 민족들이 모여 있는 인종 집합체가 되는 제국의 중심가의 모든 사람에 대해서 겨냥하는 겁니다. 네가 어떤 민족이든 어디서 어떻게 살았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진노의 날에는 하나님의 법대로 처리한다. 너희들이 만든 법은 자기를 위한 자기를 상품화시키는 그런 법이라면, 모든 법에서 다 있는 겁니다.

그래서 2장 12절에 보면, "율법이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이름이 뭡니까? '망하고' 아닙니까? "율법이 있고 범죄하는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그러니까 '망하고'라는 것은 누구를 의식해서? 이방민족을 의식해서? 율법에서 심판받는다는 것은 누굴 의식해서 누굴 대상으로? 유대인을 대상으로.

그러니까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상관없이 망하는 것은 이거는 필연적인 순서에 불과하다 이 말이죠. 확실히 망한다. 걱정하지 마세요. 확실히 망합니다. 걱정하세요. 망합니다가 아니라 걱정하지 마세요. 확실히 무너지게 합니다. 로마서 1장이 이렇게 깔고 가는 거예요. 이게 육의 종말입니다.

그 확실한 증거가 뭐냐? 예수님이 죽었다는 사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은 인간에게 더 이상 건질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내가 죽지 않고 살지 않는 한 너희들이 아무리 산 채로 살리려 해봐도 그건 살 수 없다는 겁니다. 죽고 살아난 분에 의해서 살지 아니하면 어떤 인간도 자기 행함으로써 살 수 있는 인간은 없다는 거죠.

십자가 의미가 그렇습니다. 십자가가 그냥 다가오는 것이 아니고, 죽음에 풍덩 빠졌다가 다가옴으로 말미암아 왜 그분의 풍덩 죽음이라는 세계에 빠졌는가? 그 죽음의 의미를 놓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뭔지를 모르는 사람이에요. 자기 자신이 뭔지를 모르는 사람은 주님이 갔던 그 죽음의 길을 지금도 그대로 가고 있는 겁니다.

그걸 표현한 말이 뭐라고 했습니까? 아까 한 자로 뭐라고 했습니까? 그게 바로 ‘육’이다. 육. 요한복음 같은데 잘 나오지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다.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않고서는 하늘나라를 볼 자가 없다. 그 말은 뭐냐 하면, 무너지게 된 세상 속에 너희가 살고 있구나. 하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알아봐야 될 것은, 약간 어려워지는데 알아봐야 될 것은, 왜 심판돼야 되느냐? 그 문제. 사람에게 자유의지가 있고, 자기 나름대로 법을 만들어서 자기 욕망대로 살아간다. 뭐 부족한 인간인 이상 이미 죄인인 이상 그럴 수밖에 없지. 그런데 왜 율법으로 심판을 받아야 되는가?

어떤 때 제가 메모해놓고 메모한 그걸 못 찾아서 설교시간에 애를 먹은 게 한두 번이 아닙니다. 왜 율법으로 심판 받아야 하는가? 제 글씨는 국과수도 못 알아봐요. 율법이 뭐 길래. 하나님이면 다가? 이 말이에요. 왜 우리를 심판하느냐 말이죠. 그것도 왜 율법으로 심판하느냐 말이죠.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인간은 왜 심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가? 제가 여러분한테 물어보겠습니다. 이게 광주강의에 나왔던 질문인데 다시 한번 해보겠습니다. 사람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이 만들었지요. 사랑의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사람 속에 사랑이 있겠지요.

그런데 요한일서에 보면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마귀의 자녀들이라고 되어 있어요. 마귀의 자녀들을 누가 만들었어요? 이게 질문입니다. 하나님이 만들었죠. 하나님이 마귀의 자녀 되라고 왜 만들었습니까? 라는 그 문제. 그게 기독교신자라면 그걸 풀어야 돼요.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만 만들면 되지, 왜 마귀의 자녀까지 일부러 만드셔야 되느냐?

정답을 미리 알려드릴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드러내기 위해서. 이게 정답이에요. 예수님을 빼버리고 그냥 자꾸 우리는 교회 가서 나와 하나님과 둘만 상대해서 하나님 사랑해 주소서.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 아닙니까? 간절히 빌면서 사랑해달라고 하는데. 자꾸 예수 그리스도를 빼버려요.

모든 만물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만들었다는 사실을 빼버리고 나는 마치 나를 위해서 사랑의 하나님이 나에게 사랑을 듬뿍 준 것처럼 그런 식으로 오해를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들어갈 자리가 없어요. 다만 잠시 죄 씻기 위해서 그것도 자범죄가 아니고 원죄, 오리지널 신이죠. 원죄 씻지 위해서 잠간 들어왔다가 그냥 자기 할 일하고 빠지고, 이제 빠지세요. 귀찮으니까 빠지고 그 다음에 나하고 하나님하고 상대하겠다는 거죠.

골로새서 1장 16절에 보면, 우리는 우리를 위해서 만든 게 아닙니다. 이와 같은 왜 하나님은 마귀의 자녀를 만드느냐? 이 질문은 욥기에 나옵니다. 왜 하나님이여, 왜 나를 만드셨습니까? 나를 이렇게 사랑의 백성, 그것도 믿음 있다고 칭찬해준, 마귀 앞에서도 칭찬한 이 욥을 왜 이렇게 고난 받게 하십니까? 정답은 뭡니까?

신약에 정답이 되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을 인화지로 복사하기 위해서 보여주기 위해서 한 것이다. 이게 베드로전서 1장 10절에 나옵니다. 구약에 잇는 선지자들은 그리스도의 영이 있어서 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 영광을 보여주는 증언이라고 한 겁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는 왜 에녹이 방주 안 만들고 노아가 방주 만들어야 되고, 왜 에녹은 시체로 가는 게 아니고 산 채로 올라가야 되고, 왜 아브라함은 방주 만들어서 구원받지 못하고 왜 자기 아들, 이삭을 바치면서 구원받느냐? 왜 야곱은 두 아들로부터 어긋맞게 해야 되느냐? 왜 모세는 그냥 일반백성이 아니고 애굽의 바로의 아들로 태어나서 나면서도 그 애굽의 모든 보화를 버리고 가야 되는가?

그것은 각자 각자의 하나의 피자의 조각처럼 피자를 한 판 다 못 먹잖아요. 한 부분을 먹지요. 각자의 예수 그리스도라는 피자, 피자 라땡? 피자의 한 조각, 조각들이 있는데 그 조각들을 모아보면 그게 전체가 뭐냐?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거예요. 그리스도의 그걸 지체라고 합니다. 지체란 말은 몸의 한 조각을 담당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믿음만 있을 뿐이고 믿음의 실체는 누구다? 예수 그리스도란 말이죠.

보이지 않는 분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 내가 원치도 않는 내가 요구하지도 않는 인생길을 하나의 피자 조각처럼 살아가야 된다. 이것이 히브리서 11장에 나와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의 역할은 뭐냐 하면, 바로 사사기에서 승리하는 역할. 어떤 사람은 어떤 역할을 하느냐 하면, 톱이 베여 죽는 역할. 그게 히브리서 보면 나와요. 어떤 사람은 광야에서 유리하는 역할. 어떤 사람은 암 걸리는 역할.

참, 그럴 때 이왕이면 주몽하고 싶지, 누가 오이하고 싶은 사람 누가 있습니까? 누가 주인공이 하고 싶지, 부득불하고 싶은 사람 누가 있겠어요? 연타발하고 하고 싶지 부득불하고 싶은 사람 누가 있겠어요. 연타발과 연탄은 아무 연관 없습니다.

하나님이 배치한 대로 있어야 될 이유는 우리가 로마서 1장에서 봤지요. 왜? 우리는 '그리스도의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것이란 말은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니지요. 나의 아니라면 나의 소망, 나의 믿음, 나의 사랑도 내 소망, 내 믿음, 내 사랑 끄집어내면 그거 다 거절당합니다. 육적이라고.

그래서 우리는 아무리 말씀을 지키려 해도 내 소망, 내 믿음, 내 사랑이 거기 퍼부어져서 그 율법을 지키려고 하기 때문에 주에게서는 영광이 되지 않는 겁니다. 주께서 우리가 지킨 율법을 받질 않습니다. 예수님께 온전한 사랑과 믿음, 소망만이 예수님만이 자기 홀로 담당이에요. 우리는 어떤 역할을 하느냐 하면, 왜 우리는 안 되느냐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그걸 부정적 방법이라고, 부정신학, 또는 부정적 방법으로 그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왜 율법으로 심판을 받아야 되느냐? 이걸 아직까지 제가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왜 율법으로 심판을 받아야 되느냐? 탤런트 김혜자가 그런 이야기했어요. [아이들을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 하는 책이 있는데 그 제목이 제가 얼른 납득이 안돼요. 왜냐하면 학교 때 교탁에 있는 꽃으로 맞아보면 아파요. 줄기 부분이 상당히 아파다니까.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아기는 연약하다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실제로 꽃으로 맞아본 사람은 기분 되게 나빠요.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

어쨌든 그 꽃에 포함되잖아요. 그래서 저 같으면 제목을 [웃음이라도 때리지 말라] 이렇게. 유치하지만.

율법으로 심판을 받아야 될 이유가 뭐냐 하면, 율법이 사람과 관련된 사항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율법이 왜 건드리느냐? 사람과 관련된 것을 가지고 사람을 심판해 버리면 사람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다음에는 잘 할게요.’가 성립이 돼요. 예를 들어서 너, 왜 신발을 함부로 벗어. 그것 가지고 심판해 버리면, 신발을 나란히 할게. 라고 돼버려요.

하나님께서 심판할 때 어떻게 심판하느냐 하면, 인간의 능력으로는 이룰 수 없었다가 이미 증거된 이미 그것이 왕년에 확정돼버린 법을 가지고 때려줘야 얻어맞고 난 뒤에 그리스도만 바라보지, 앞으론 다시는 이 율법들을 잘 지킬 게요. 란 소리를 두 번 다시 안 나오잖아요. 이게 로마서 7장의 이야기입니다.

꽃이 아니고 율법으로 때리는데 인간이 어떤 인간이냐 하면, 율법으로 때리면 어떤 형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맞으면 맞을수록 오기가 더 생겨나는 게 인간이에요. 그것은 율법은 뭐와? 인간을 지배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어요. 인간을 지배하는 뭐냐? 로마서 7장에 보면, 그걸 한 자로 뭡니까? 죄에요. 죄가 우리의 대장입니다. 율법은 죄를 겨냥해요. 그게 어디서 나오느냐?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옵니다.

율법의 쏘는 것은 뭐라고요? 밑에 있는 인간이 아니에요. 어디를 쏜다고요?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 인간을 완전히 잠식했던 그 죄를 향하여 율법은 쏘지요. 표적이 되지요. 그런데 철없이 날아가는 주몽의 화살을 지가 받아서 내가 지킬 게. 율법의 쏘는 건 죄인데 죄도 못하는 주제에 율법, 그것 걷어서 지켰다?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기입니까? 말이 안 되지요.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 이유는 제가 아까 이야기했지요. 카오스, 자기를 둘러싼 너무나 변화무쌍한 세계에서 자기가 생물학적 적응하기 위해서 자기만의 구역을 정해야 되죠. 동물의 농장인가 거기 보면, 하나의 사자가 에버랜드 사파리에서 자기가 대장질하고 난 뒤에 온 동네에 가서 오줌 찔찔 깔기면서 자기 구역이라고 구역을 정한답니다.

사람하고 똑같지요. 버스나 지하철에서 아줌마들 가서 가방 툭 던져놓고 뛰어가서 내끼다. 극장에 가서 전부다 음악회 가서 권사님들 가방 가지고 전부다 해놓고. 가방 다 놓고 우리 식구들, 우리 교회식구들, 얼마 전에 그런 일이 있었어요. 죽 깔아놓고 우리 식구들. 어떤 권사님. 오늘 참석 안 했어요. 오늘 김철수 권사님 빠지는 겁니다. 자기 구역이라 말이죠.

사람이 자기가 율법을 지키는 게 하나님의 법마저 자기 법으로 전환시켜서 이렇게 하니까 결국은 유대인이 율법 하지만 유대인의 본래 양심이나 이방인의 양심이나 같이 볼 수 있지요. 이방인에게는 양심이 있고, 유대인에게 율법이 있다 하지만 율법 있다 해도 율법 있는 그 값을 못하지요. 왜냐하면 율법만 있는 게 아니고, 자기 안에 죄로 물든 뭐도 있습니까? 자기 양심이 있어서 율법 해석에 자기 양심이 거기다 첨부돼서 선입관을 가지고 하는 거예요.

가다머가 그걸 이야기한 겁니다. 어떤 문구, 어떤 문장을 해석해도 자기 선입관 없이 해석하는 법이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해석하는 선입관은 어디서 생겼는가? 그 시대에 공동체가 요구하는 의사소통되는 그러한 개념 가지고 거기다 선입관을 가지고 해석한다 이 말이죠. 그걸 인간의 역사의 지평이라고 하는 겁니다. 의미의 지평, 역사의 지평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떤 것을 가지고 해도 마찬가지란 말이에요. 그 해석이 어떤 국어시간의 해석이 아닙니다. 주식의 동향 같은 것을 해석해도 이미 과거의 선입관을 가지고 해석하는 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 사회라는 것은 인간사회가 있고 언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언어가 인간사회를 만들어낸다. 인간사회를 새로이 만들어낸다.

만약에 자기와 의사가 안 맞고 의사소통이 안 되는 동네라면 그거는 미국 엘에이로 이민가면 되죠. 강남에서 살다가 한국의 세금 때려서 못 살겠다고 하면 어디 가면 됩니까? 이민 가면 되잖아요. 왜? 미국이란 언어소통하고 한국이란 언어소통하고 다르니까. 나는 이 언어소통 사회에서 나는 언어소통이 안 되고 왕따 당해서 싫다는 거예요. 내 언어에 맞는 언어소통이 있는 나라로 이민 가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민 가잖아요.

제가 지금 국어시간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문장 만들기 이야기하는 게 아니에요. 사람 모든 살아가는 것이 이미 공동체가 요구하는 대로, 그게 거대한 타자지요. 타인이에요. 거대한 타인이 요구하는 대로 수긍하면서 살아가는 적응하는 방식이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하기 위해서는 뭐냐 하면, 자기가 시장에 하나의 상품을 내 놓으려면 자기가 가치가 있어야 되는데 가치와 의미를 뭐로 포장하느냐? 나는 하나님을 말씀을 이렇게 잘 지켰다는 자기의 성화론 가지고 상품화시켜서 내놓을 수밖에 없는 거예요.

교회에서 목사가 남한테 권위 있게 가르친다는 말은 적어도 나에게 배우는 교인이 나보다는 성화가 덜 되어있어야 돼요. 만약에 나보다 더 잘 지키고 착한 사람 같으면 그 사람 때문에 목사가 그 사람한테는 권위가 죽잖아요.

교인이 이렇게 열 명이 있으면 목사가 자기가 나는 카리스마적인 권위가 있다 하고 가르치는데 여기에 맑음, 맑음, 맑음 하는데 이쪽에 D라는 이 교인이 목사보다 더 착하면 흐림 되잖아요. 맑음, 맑음, 맑음, 그러니까 경상도 말로 설교 묵어주기, 묵어주기, 묵어주기, 안 묵어주기 이렇게 되니까 안 되잖아요. 나가란 말이야. 니는. 다른 교회 가라 이 말이에요. 빼버리고 묵어주기, 묵어주기, 온통 묵어주기. 이건 뭐냐 하면, 나는 지시하는 사람, 너는 지시, 명령 받는 사람.

거기에 대해서 니체가 한 유명한 말이 있어요. "명령하는 사람이 순종하는 사람보다 더 힘들다는 것을 왜 모르느냐?" 왜? 명령하는 사람은 순종하는 그 고통까지 다 껴안고 난 뒤에 명령하라 이 말이죠. 명령하려면. 꼭 예수 그리스도 같지요. 명령하는 사람은 순종하는 게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럽다는 것을 이미 순종 못하는 책임까지 질 수 있는 사람만이 명령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 이렇게 돼요. 예수님보다 더 위대하죠. 예수 안 믿는 사람입니다만.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사람들은. 그 명령체계가 아래 순종체계 안에 들어와 버리죠. 잠입시켜버립니다. 잠입시켜서 돌아다니는 신, 흘러 다니는 사건의 흐름으로서의 어떤 이미 우리 안에 있는 그러한 메시아를 찾게 됩니다. 그걸 가지고 세 자로 '세속화'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비 콕스는 ‘신의 죽음’이라고 합니다.

헤겔의 초월적인 신이 아니라 이미 우리 내면에서 자비해서 함께 하시는 신, 그래서 낮은 자의 하나님. 그럼 이거는 어느 쪽이냐 하면, 바로 하나님은 인간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하나님. 그래서 그쪽 신학에서 귀한 대목이 뭐냐? 아주 잘 된 대목이 창세기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이스마엘이 쫓겨나가면서 울부짖을 때 방성대곡 할 때 주께서 그 고통을 들어주시고 축복하는 그 장면입니다. 비록 이스마엘도 하나님이 축복해줬잖아. 하는 그 대목. 그리고 또 대목이 창세기 4장에 가인도 살인자지만 주께서 보호해줬잖아. 따라서 사형제도는 폐지돼야 된다는 주장. 주로 그런 쪽으로 사용되지요.

없는 자, 밥 퍼 사랑, 밥 퍼주는 사랑. 어려운 자나 눌린 자, 가난한 자. 누가복음 4장에 있지요. 내가 하나님의 신이 임하여, 이사야 펴면서 성전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뭡니까? 내가 온 것은 눈 먼 자를 위해서 가난한 자, 버림 받은 자를 위해서 내가 그들을 해방시키려 하심이라. 하고 예수님께서 자기 공생애를 시작했다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사람들은 반박의 여지가 없지요. 야, 이게 맞구나.

하지만 그것이 바로 뭐냐 하면, 인간이 신을 추구함에 있어서 자신의 고통의 입장에서부터 신을 추구하면 신은 그런 신으로 자기에게 되돌아오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이거는 벌써 출발점이 언약이 아니고, 나라는 존재를 정당화하고 비록 가난하지만 그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다고 인정하는 것부터 해서 하나님을 찾다보니까 하나님은 어려운 자를 돌보는 하나님이 된다 이 말입니다. 가난의 하나님이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이미 출발점이 뭡니까? 그렇게 되면 자신의 가난이 뭐가 돼요? 가난 자체가 의가 되지요. 하나의 가치가 되고 의미가 되지요. 이런 것조차 뭐가 공격한다? 하나님의 율법이 저주해 버린다. 이런 것조차 율법이 저주해버려요.

인간들은 그 율법을 못 지킨다는 소릴 안 하고 그 율법을 내면화 시켜서 나는 가난함으로, 무슨 스님입니까? 무소유 주장하는 누구에요? 법정 스님처럼 무소유하는 것. 교회도 없다, 가진 것도 없다, 자식도 없다, 부모도 없다, 나는 나도 없다. 하는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함으로써 이것이 산에 올라가는 길이 달라요. 불교와 기독교라 하지만 결국 올라가면 신은 뭐냐?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이건 뭐냐? 무소유다 말이죠.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스트레스 받는 사람들이 유일하게 피난처로 삼는 종교가 뭐냐? 무소유 종교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천주교야, 기독교야, 우리 불교야 이제 종교 장벽을 허물어버리고 무소유에서 하나로 만나세. 그래서 이 사회에 가치 있는 종교로서 거듭나세. 이것이 범 통일적인, 범 기독교 모임이잖아요. 그런데 그것마저 우리 주께서 심판하신다는 그 고소함. 그게 바로 종교로서의 그거에요.

여러분 교재, 교재 어디 갔노? 교재 한번 봅시다. 교재 1페이지에 보면, 1페이지 중간에. 인간은 왜 자기 존재를 생각할 수밖에 없는가에 보면,

[사람은 자기에게 감동하면 사는 자들이다. 사람이 가장 크게 기뻐하는 경우는 자기 존재의 가치를 새삼 인정하고 확인할 때이다.]

야, 내가 이 정도였나? 아, 미치겠다. 정말. 나는 내가 너무 마음에 들어. 이런 거예요. 그것이 사람에게는 뭐냐? 주여, 저한테 은총을 주셨군요. 자기가 자신에게 은총을 주었기 때문에 남이 주는 은총은 은총도 아닙니다. 그건 나쁜 하나님이에요. 왜 은총이 방향이 나한테 와야지, 저쪽으로 가느냐 말이죠. 남이 주는 은총은 은총도 아니에요. 나한테 은총이 와서 내가 스스로 어떤 가치를 느낄 때 비로소 은총을 느끼는 겁니다. 남이 갖는 은총을 공유 못하게 되어 있어요. 이걸 개별적 존재라고 하는데.

[자기가 자신의 근원을 부인하지 못할 때, 사람은 자기 존재가 품고 있는 신비로움]

제가 이야기하는 게 신비로움인데. 사람은 알 수 없는 자기 존재의 신비로움에 감탄하고 감동하는 거예요.

1페이지 밑에서 세 번째에 보면,

[이 신비는 ‘내 안’에 있는 신비도 아니요 ‘내 앞’에 신비도 아닌 이유는 아예 나라는 기대조차 의미를 상실해 버리게 만드는 신비 속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영성훈련해 보세요. 이렇게 됩니다. 영성훈련, 천주교에서 시작해서 트레스디아스부터 출발해서 지금은 온 교회가 합동, 통합 전부다 시도하는 이 영성훈련. 이 영성훈련 보면, 내 안 있는 신비도 아니고, 내 앞에 있는 신비도 아니고, 이거는 나라는 기대조차 의미를 잊어버리는 신비 속에 있다.

사실은 이걸 이야기하는 사람이 누구냐? 하이데거입니다. 하이데거라는 철학자 있어요. 나를 잠식하고 나를 통제하고 나를 점령하고 나를 포함시키는 존재의 신비. 여기에는 뭐가 빠져 있어요? 뭐가 빠져있습니까? 세 자? 십자가가 빠져 있잖아요. 십자가는 저주잖아요. 저주가 빠지니까 낭만으로 치닫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는 뭐냐? 사람들은 돈이 없는 사람은 자기 존재의 아름다움으로라도 자기의 허함을 메우려고 합니다. 돈은 뜻대로 안 벌리니까 남는 건 뭐냐? 나라는 존재는 신의 은총으로 아름답다. 하는 그걸로 자기의 허함을 메우려고 자꾸 변명하시는데 그걸 가지고 칸트는 형식미학이라고 해요. 있는 자체로서 즐거워한다는 거죠. 있는 자체로서 그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이 말이죠.

그 형식미학이 낭만시대 가면 이게 무슨 미학으로? 숭고미학으로. 숭고 앞에서 숭고라 하는 거룩, 거룩 앞에서 인간은 그림 속에 다 그리지 못하기 때문에 그림을 그릴 때 자기를 개미만큼 그리고 앞의 대자연을 크게 그림으로 말미암아 아, 그림 되네. 큰 산, 큰 폭포 그림으로 말미암아 나라는 자체가 이 숭고에 비해서 숭고 속에다 얼마나 아름다우냐! 이렇게 숭고를 표현합니다.

아블로라는 학자는 이 숭고까지 거부하면서 자연 자체를 안 되도 그냥 놔둠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아름다움이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소위 과학기술로서 낙후되고 탈락되고 거기서 뒤처진 사람은 뒤처진 나름대로의 존재의 보람을 찾기 위해서 계속 개발하죠. 마치 온천 개발하듯이.

돈 쪽으로 안 되면 자기 있는 존재 가지고 파고들어서 그 존재에서 신비에서 어떤 아름다움인가 존재의 의미를 얻으려고 하니까 그게 기독교 십자가 신비와 결합돼버리면 그게 십자가 복음처럼 오해될 소지가 있는 겁니다. 그것도 육인데. 그것마저 육인데.

그래서 이 글들이 어려운 거예요. 인간이 시도하는 모든 시도를 여기다 다 집어넣은 겁니다. 인간이 기껏 노력하고 신학을 동원하든 철학을 동원하든지 하여튼 인간이 애쓰고 한 모든 걸 다 집어넣은 겁니다.

여기 2페이지 봅시다. 중간에 보면,

예를 들면, 회사 직원들끼리의 회식 자리에서 술을 어느 정도까지 먹어야 다른 직원들 눈에 경계와 존경이 조화를 이루는 중간지점일 수 있다. 술을 많이 먹게 되면, 술에 대해선 존경 받지만 나중에 돌아서서 저거 술꾼 들어왔네. 우리 회사 술꾼 하나 들어왔구먼. 이렇게 욕하면, 그것도 욕하면 안 좋고. 술을 전혀 안 마시면 안 마시는 것이 하나의 재판장처럼 되어서 따돌림 당해서 회사의 중요정보에서 따돌림 당해버리면 승진하는데 불이익을 당할 수밖에 없지요. 회사 돌아가는 것도 모르고 무슨 과장 되려고 하느냐 이런 소리 듣는다고요. 과장 정도 올라가면 회사의 중요정보에 참여되어야 되는데 참여하려면 회식도 같이 하고 어울려서 회사 돌아가는 전반을 알아야 뭐, 윗사람으로서 아랫사람을 통제하는데 지 할 일도 몰라서 위쪽에서 어떻게 노는지 모르고 위에 올라가면 지 따로 챙기는 것 밖에 안 되니까 그것은 높은 자리에나 가담을 안 시키죠. 배제해 버리지요. 이러한 어려움이 있다 말이죠.

그런 것 하면서 스트레스 받았다면 다시 돌아오죠. 주여, 제가 이런 존재입니다. 하죠. 그러니까 존재 이야기를 제가 한 것은 로마서를 강의를 이렇게 준비했지만 로마서 강의를 다 하고 난 뒤에 다시 존재로 되돌아가지 말시기 바랍니다. 당부하기 위해서 제가 이 글을 쓴 겁니다. 제 충정을 이해해주시겠습니까? 실컷 하고 난 뒤에 자기 존재로 돌아가서 그러니까 나는 이 정도라도 가치 건졌다. 이렇게 생각하면 곤란하다 말이죠.

십자가라 하는 것은 계속해서 그냥 나라는 인간은 예수님이 껴안고 함께 심청이처럼 풍덩 물에 빠질 수밖에 없는 그런 어제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죽을 때까지 그럴 가치 밖에 없어요. 주님은 나의 죄를 대신 가져가시는 분이고, 나는 주님이 가져갈 죄를 생산하는 자고, 그 주님과 만나서 십자가에서 함께 죽고, 주께서 살려주심으로 말미암아 구원되는 것이지, 따로 독자적으로 내 존재의 신비를 찾는다고 해서 구원되는 게 아니다 이 말입니다. 제가 미리 당부했습니다.

그래서 율법으로 심판받는다는 것은, 율법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죄를 겨냥하고 죄는 지금 우리 속에서 역사하고 있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안 들을 때는 몰랐는데 듣고 난 뒤에는 그 금지한 것을 더욱더 금지한 그 놈을 소망하고 있어요. 우리는. 하지 말라하면 더 하고 싶은 거예요. 어떤 TV프로가 재미있느냐? 보지 말라 할 때 보았을 때 기뻐요.

제가 어느 설교에 그런 이야기 했지만 사람의 기쁨은 어디 있느냐? 죄를 짓는 데 있습니다. 죄를 안 지으면 사람은 사는 보람이 없어요. 뭐든지 하라 하면 재미 하나도 없어요. 자꾸 철저히 금지한 게 있어야 그걸 타 넘는 재미가 있어야 그게 사는 자극도 되고 도전도 되고 재미가 나는 겁니다.

애들 학교 다닐 때 괴로워합니다. 어서 방학이 되었으면. 방학 되어 보세요. 환장하고 미칩니다. 심심해서. 법을 이야기 해. 법을. 엄마, 법을 이야기해 달라. 법 지킬 게. 법 이야기해 달라. 법 없이 못 살겠다는 거예요.

니체가 가장 무서워하고 겁냈던 것은 권태였습니다. 심심하다는 것. 아아, 심심해서 미치겠다. 기업가들 돈 벌기 위해서 기업하는 게 아닙니다. 심심해서 기업해요. 제가 박사동에 있었지만 농사짓는데 십년 동안 있었던 농촌지역에도 돈 벌려 농사하지 않습니다. 심심해서 농사져요.

앞에 있는 팔십 여섯 먹은 할머니가, 권사님이 50평에 파를 심었는데 가을에 파 다 거두니까 50평에 파를 심었는데 돈이 얼마 나왔느냐? 삼만 원 나와요. 50평 되는데. 그래서 기쁨으로 거둬요. 왜? 자기 노동으로 심심풀이로 때워 놓은 거기 때문에.

바로 사회주의가 망하는 이유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쟁을 억누르고 그냥 먹을 것, 입을 것 주면 되는 줄 아는데 그것은 사는 게 아니고, 그걸 가지고 뭐냐? 사육이라고 합니다. 그건 양식이 아니고 사료지요 사료. 사료입니다.

잘 사는 집의 외동아들이 자꾸 엇나가는 이유는 자기 나름대로의 자꾸 사건과 도전과 경계를 타 넘는데서 사는 재미를 느끼면서 자꾸 탈선을 할 수밖에 없어요. 재는 먹을 것 주고 입을 것 주는데 왜 그런지 몰라. 사람은 죄를 짓지 않고는 사는 재미가 없어요.

제가 여러분 목사님께 목회 성공하는 방법 간단합니다. 여러분 목회 성공 하지 마세요. 이 한 마디만 하면 됩니다. 그럼 돌아가실 때 목회 성공하고 싶어 환장할 거예요. 그게 사람 법이에요. 목회 성공이 죄입니다. 하면 그 다음부터는 사람은 그 죄를 범하고 싶어서 미치고 환장합니다. 비로소 사람이 생기가 나면서 엔돌핀이 생깁니다. 사는 에너지가 있어요.

그래서 어떤 사람이 이런 이야기했어요. 십자가를 이야기하지 마라. 왜? 십자가하면 사람은 주눅 든다. 사람이 주눅 들게 하는 십자가를 왜 이야기하느냐? 무슨 그런 십자가가 사람 주눅 들게 하는 십자가가. 평소에 그 말은 뭐냐? 나는 주눅 들기 싫은 쪽으로 살고 싶어서 나를 주눅 들게 하는 것은 전부다 나는 거부하겠다는 그런 고민밖에 안되거든요.

십자가는 우릴 주눅 들게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한계성을 이미 알려주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는 누굴 만나는 거예요. 내 죄를 대신 가지신 분과 그리고 내 죄와 그분에 의해서 해결된 그분이 가져간 그 죄를 생산한 나, 죄인인 나와 그리고 죄를 대속하신 분, 우리는 죄인이고 그분은 대속하신 분, 이 관계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 관계를 '의'라고 하고 그 관계에 놓여있는 우리를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그걸 의인이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의인 중에 있는 죄인이 되지요. 우리는. 성도는 뭐냐? 의인으로써의 죄인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죄인이 되어야 죄를 가져가신 분이 결합이 되기 때문에. 이 관계가 뭐라고요? 이 관계가 한 자로 뭐라고요? 이 관계를 의라 하고, 그 의에 포함된 우리를 뭐라고? 의의 관점에서 의인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거는 독자적으로 떼어내서 생각하면 안돼요. 때내서 나는 의인이다, 죄인이다 하면 안 되고, 의의 관계 속에서 우리는 의인이고, 독자적으로 우리는 뭐다? 죄인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죄인으로써 의인의 관계에 놓여있는 겁니다.

저는 이 방법 외에 인간에 대해서 더 이상 설명할 수 없다고 지금 저는 그렇게 자부합니다. 인간은 죄인인가, 의인인가 물을 때 이런 관계와 독자적인 관계를 분리해서 생각하는 이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봅니다.

따라서 이제부터 우리의 할 일은 뭡니까? 우리 할 일은 계속해서 죄가 어떤 식에서 우리가 죄가 생산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거는 행함의 문제가 아니고 실천의 문제에요. 우리 실천해서 죄가 나오는 실천을 행사할 수밖에 없는 그런 통치권 속에 놓여 있습니다. 누가 그렇게 만듭니까? 의의 능력이, 하나님의 의의 능력이 우리로 하여금 계속 죄인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그런 능력을 우리에게 퍼붓게 되지요.

그럼 우리의 죄는 뭐냐? 언놈이 죄짓자 하는 놈이 누가 있습니까? 우리는 뭐가 죄냐? 우리는 독자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말씀으로 계속해서 의인되는 방법으로 완벽하게 주께 순종하는 방법으로 애를 쓰지요.

애를 쓸 때마다 우리는 뭐에 입가에 미소를 짓느냐 하면, 말씀을 이렇게 지키기 때문에, 그러니까 세 가지 착한 일 했기 때문에 하나님 한 가지 나쁜 일 해도 눈 감아 주소. 라는 나쁜 쪽의 경계선을 넘고 싶은 그러한 일탈, 그 일탈을 소망하기 위해서 일탈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사전 정지작업으로 착한 일 세 개를 해주는 거예요.

왜냐? 착한 일 할 때는 보람이 있는데 뭐냐? 이만큼 많이 했기 때문에 나쁜 짓 하나 넘어서도 눈감아 줄 것이라는 희망찬, 보~람~찬~. 그런 보람을 느끼고 한번 봐줄 거란 보람을 느끼고 인내하는 거예요. 그 인내하면서.

그 전체가 바로 유대인이 반복했던 죄에요. 그래서 유대인 죄에 대해서 먼저 언급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방인도 마찬가지고. 또 유대인 할 때 이방인 거론하는 것은 아무리 유대인에게 율법이 있다 할지라도 그걸 해소하는 것은 이방인과 같이 자기의 양심, 죄에 눌린 양심 가지고 해소하기 때문에 유대인이 그렇게 멸망할 수밖에 없던 이유를 이방인에서 찾는 거예요.

너희들이 유대인이야? 이방인이나 똑같네. 할례 행했어? 없는 자와 똑같네. 라고 하는 이야기는 유대인을 통해서 이방인을 평가하고 이방인을 통해서 유대인을 평가하고 둘 다 똑같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룰 수 없다는 것을 똑같이 이야기하고.

율법으로 왜 심판하느냐? 율법은 바로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죄와 관계하기 때문에 하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정죄함이 없는 이유가 뭐냐? 로마서 8장에 보면 율법의 요구를 누가 이루어요? 로마서 8장 3절에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어떻게 합니까?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자, 그 다음에 이렇게 정죄함이 없는 이유가 하나님께서 죄를 인하여 뭘 줬습니까? 그 다음에 뭐예요? 뭐가 나옵니까? 무슨 단어 나오지요? 죄를 인하여 죄 있는 육신이지요.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제가 문제를 낼 테니까 정답을 맞춰보세요. 객관식 문제입니다. 우리의 죄를 없이 하기 위해서 일 번, 우리가 예수를 믿어야 된다. 이 번째 우리가 예수 믿고 난 뒤에 율법대로 다 살아야 된다. 삼 번, 예수님께서 자신이 율법을 다 이루었다. 우리 대신 율법을 다 지켰다. 네 번, 예수님 자신이 육신이다. 몇 번입니까? 마지막 4번이었죠. 왜냐하면, 그것도 하나 못 찍어서.

예수님의 육신이라 하는 것은 모든 육신은 전부다 저리가, 저리가. 다 버린 거예요. 베드로도 마찬가지고, 요한이고 다 저리가. 예수님의 육신으로 이루었다는 이 말은 어떤 인간도 자기 구원에 자기가 협조한 바가 없고 자기 공로가 여기서 개입될 수 없다 이 말이에요.

이 말은 어떤 기쁨을 주느냐 하면, 나의 육신을 내가 어떻게 굴리던 상관없이 이미 구원되었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육신만 있다면, 우리가 우리 육신을 어떻게 다루는 것에서 더 이상 고민할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주님의 육신 때문에. 내 육신과 주님의 육신을 비교해 보자 이 말이죠.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죄를 생산하는 육신이에요. 죄를 생산하는 육신을 그렇게 통제한다고 될 문제가 아닙니다. 감사한 것은 우리의 육신 말고 또 다른 육체는 있어요. 예수님의 육신이지요.

예수님의 육신에 의해서 죄가 우리에서 날아가 버리는 것이지, 우리 육신을 가지고 어떻게 내가 다루고 통제한다고 해서 우리 죄가 없어지고 구원되는 건 아닙니다. 만약에 우리 육신이 그대로 유지된다면 우리는 예수 안이 아니고, 끊임없이 내 안에서 내가 정죄함이 없는 그런 공식이 돼버려요. 내 안에서.

그러나 우리는 지금 우리 안에 있지 못하고 우리 어디 안에 있습니까? 예수 안에 있지요. 예수 안에 놓여 있어야 돼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육신이 바로 우리에게 구원을 정죄함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내 육신은 어떻게 되는가? 그게 바로 로마서 6장에 보면, 세례나 연합이라는 말을 통해서 우리의 육신은 이미 하나님이 죽은 자로 간주해요. 죽은 자로 간주한다는 말은 시체로 간주한다는 말이 아니고, 뭔가 움직이고 활동하고 밥 먹고 잠자고 해도 거기에서 하나님이 율법으로 볼 때에 죄만 나오기 때문에, 죄의 경향은 뭡니까? 죄의 삯은 사망이잖아요. 그래서 죄관이 나오기 때문에 그냥 죽은 자로 간주하는 거예요. 어떻게 행동하든 간에 죽은 자로 간주하는 거예요.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죽은 자요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산 자가 되는 겁니다. 1층에서 죽은 자요 2층에서는 산 자가 된다는 거예요. 층으로 생각해야 돼요. 1층에서는 죽은 자요 2층에선 산 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산자가 되는 겁니다.

그 안에 들어가 보면, 이미 계속 어떤 활동을 해도 죽은 자의 활동에 불과하다 이 말이에요. 예수님의 육신을 생각 안 하고 자꾸 방향을 내 육신으로 생각해서 내가 어떻게 해야 됩니까? 라고 한다면 아무리 애써도 그것은 거기서 나오는 예수와 하나님 믿기는 그것은 자신의 화신일 뿐이고 마귀가 거기서 웃습니다. 더 한번 애써봐라. 더 노력해봐라.

엑소시스트 보면, 엑소시스트란 영화 봤지요. 귀신들린 애가 침대에서 목아지가 획 돌아가요. 우리는 겁을 냅니다. 그 순간 영화를 보면서 만약에 내가 귀신들려서 침대에서 그 잠옷 입은 소녀처럼 목아지 돌아가면 난 어떻게 되는가? 걱정하지 마세요. 목아지 돌아가도 두 바퀴 반이 돌든 간에 예수님 십자가에 육신이 죽었으면 구원받는 겁니다. 그걸 보고 겁을 낸다는 자체가 뭔가 믿음이 없다는 뜻이에요.

그런 영화 자주 보여 줬어요. 엑소시스트이라든지 오멘인지 영화 봐서 귀신 나오고 갑자기 벌벌 떨고 천지개벽을 해도 예수님이 육신인 사람은 벌벌 떨어도 수리하면 돼요. 미장이 불러서 수리하면 되지. 아마 거기가 8톤, 5톤 트럭 지나가는 모양이지. 이래 생각하면 그만이지 그거 큰 문제 아닙니다.

사람이 자기 안에서 자기가 해결하려고 하면, 전에는 곧잘 방언이 되더니 요샌 방언이 뚝 끊어졌어. 이상해. 전에는 기도하면 조금 낫더니 기도해도 응답이 안 돼. 자꾸 그 원인을 자기에게서 찾아내려고 하면 거기서 추가적인 율법이 자기가 자꾸 자기를 법을 만들죠. 자기가 법을 만들면 자꾸 변명밖에 안 돼요. 변명은 자기 가치죠. 자기 형식화. 그러니까 이건 자기 자신의 우상화되는 겁니다.

이제 3분밖에 안 남았으니까 더 하면. 그렇다면 목사님, 교인들에게 이걸 어떻게 가르쳐야 됩니까? 이렇게 걱정하는데 이걸 그대로 가르쳐야 됩니까? 교인들은 지금 가르치옵소서. 순종하겠나이다. 이런 판국에 교회 오는데.

목아지 돌아가도 괜찮습니다. 이렇게 해보면 그야말로 방종하지 않겠느냐? 그런데 방종하도록 놔두세요. 그냥. 처음부터 방종하는 게 주의 뜻입니다. 왜 목사가 주의 뜻대로 안 합니까? 목사가 됐으면 주의 뜻대로 방종케 해야지요. 처음부터 로마서 1장에 뭐로 되어 있어요? 다 잊어버렸지요. 뭐 한다고요? "내버려두사"

주께서 하나님이 내버려 두니까 우리는 내버려두세요. 모가지가 돌아가든 그냥 내버려두세요. 문제 해결 간단한 거예요. 목사는 할 도리만 하면 되는 겁니다. 그냥 내버려두세요. 다만 이런 건 하겠지요. 청소는 하고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그 정도는 하는데. 청소 안 해도, 육신이 있으면, 세 번 이야기해도 세 번 다 안 해도, 식사당번 해서 식사당번 한 번도 안 해도 육신을 믿으면 구원 받습니다.

쉽시다. 오후시간에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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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