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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겨울 수련회 강의 6번자유게시판로마서

겨울 수련회 강의 6번

이름 : 이장우(IP:220.119.16.120)

2007 동계 수련회 로마서 6번 강의

시작하겠습니다.

3장 20절에 보면,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말이 안 됩니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러므로’라는 말이 성립하려면 모든 사람을 다 실험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섯 사람 실험하여 다 안 된다고 여섯 번째도 안 되는 것입니까? 안된다고 하지 말고 실험해 보아야지요! 아홉 번 실패 하였다고 해도 열 번째 율법 지킬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합니까? 사십 명이 율법 지키는데 실패하여도 사십 한 번째 율법 지키는 사람 또 나올 수 있잖아요!

그러므로 세상에서는 ‘백조는 하얗다’는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 모든 백조가 하얗다는 말은 성립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까만 백조가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흑조가 되겠지요! 이것은 크립피라는 언어학자가 그렇게 주장하였지요!

여지를 남겨두지 않고 앞서서 성급하게 단정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무언가 여지를 남겨 두어야지 어떤 것도 단정을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육체도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받을 수가 없다는 말은 세상 쪽에서 보면 너무 건방지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몇몇 사람들, 유대인들이 못 지킨다고 해서 율법은 어떤 인간도 아예 못 지킨다고 이렇게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면 사도바울의 일방적인 독단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도바울이 지금 학자로서 나오면 욕 많이 얻어먹을 것입니다. 네 잘났느냐고 욕 많이 얻어먹을 사람입니다.

심지어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하였으니 아마 종교적으로 보았으면 참으로 교만한 자였던 것입니다. 마치 십자가마을 사람들 같습니다. 참으로 교만합니다. 십자가 외에는 구원받을 길이 없다고 하니 참으로 교만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기존의 한국교회를 다 엎어버리고 십자가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니 얼마나 교한한 것입니까!

자 그러면 바울 사도가 왜 계속하여 두 번 세 번 실험해보지 않고 어떤 육체도 율법으로는 의롭다 함을 받을 육체가 없다고 단정하는 근거가 무엇인가 하면, 율법은 시험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 참 중요한 말인데, 율법이 시험대상이 아니라 율법이 주어질 때는 우리보고 새삼스럽게 시험하기 위하여, 훅 불어! 또또또 불어! 하는(음주운전 단속하는 경찰?) 실험용이 아닌 것입니다.

율법이 주어질 때에 우리의 능력으로는 극복 못할 것을 보았기 때문에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은 우리를 상대로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우리가 빠져 나갈 수 없는 더 큰 세력을 겨냥해서 왔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타협하거나 우리와 정치적으로 흥정하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여기 사장님 계십니까? 밑에 있는 계장이 자기를 만나러 온 줄 알고 제가 계장인데요? 아니 계장 말고 사장님! 그러자 과장이 나왔습니다. 과장 말로 사장님 만나러 왔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이 회사에서는 사장 말고 나하고 만날 일이 없구나 하는 것을 단정 짓는 것입니다.

율법이 찾아온 것은, 율법은 어떤 인간도 유법으로는 의롭다 할 인간이 없다는 것을 알고 의도적으로 율법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아! 나도 같은 유대인이지만 왜 이것을 모르느냐는 것입니다. 나도 한때 는 율법으로 잘 나갔는데 지금은 예수님 만나고 나서 나는 죄인 중에 괴수였다. 율법은 나로 죄인 되게 하기 위하여 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십일조며 안식일이면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지키는 그런 식으로 나오느냐는 것입니다. 율법은 죄를 깨달음이라! 이것은 원래 신자에게 해당이 되고 불신자에게는 해당이 안 됩니다. 율법에서 죄를 깨닫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율법에서 죄를 깨닫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십자가 지고 난 뒤는 이 율법이 소용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율법을 죄를 깨닫는다고 하였는데, 그러면 율법이 날아가면 무엇도 날아갑니까? 죄를 깨닫는 것도 날아가지요! 죄를 깨닫는 것이 날아가면 그 사람에게 십자가는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나는 십자가 믿고 난 뒤에 율법은 필요 없다고 하는데, 그런데 율법이 날아가 버리면 죄를 깨닫는 것도 날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 없는 상태에서 십자가가 아무 소용이 없잖아요! 그러면 전혀 죄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죄를 아는데 안 지은 것과 죄를 지어도 모르는 사람과는 천지 차이입니다. 요한일서와 연결되는데 이것은 굉장히 복잡한문제입니다.

십자가가 왔기 때문에 율법은 나에게 더 이상 관계하기 않는다고 율법을 치워버리는 것입니다. 자 봅시다. 이것이 무엇이 잘 못되었는가 하면 십자가를 내가 받아들인 것은 내가 받아들이고 싶다고 해서 내 마음대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듯이, 율법도 내가 치우고 싶다고 마음대로 치울 권한이 우리에게 없습니다.

이런 권한이 없는데도 십자가를 모르기 때문에 율법 받아들이고 이제 율법을 거부하고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권한이 자기에게 있는 줄 아는 것입니다. 그런 권한이 우리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없는데도 있다고 여기고 있기 때문에 나는 이제 율법과 상관없고 십자가와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죄를 깨달을 것도 그 사람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죄 있다고 할 때에, 그 죄 있다고 하는 근거가 어디에 있다고 당신은 깨달았느냐고 물으면 뭐 양심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양심이 무엇인가 하면 율법인 것입니다. 그것이 율법적인 기능이란 것입니다.

분위기가 산만한데, 이 양심이란 것에 대하여 잠시 설명합시다. 그 양심이라는 것을 분석하면 그 안에 무엇이 있는가 하면 반성하는 시도, 반성하는 근거가 있는 것입니다. 반성한다는 것은 번성하기 전 a 와 반성한 후 b 그 다음에 무엇이 있는가 하면 반성하고 있는 나 이 세 가지가 다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반성을 한다는 말은 결국 무엇이냐 하면, 반성하기 전보다 반성한 후가 더 훌륭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반성을 하면 할수록 자기 자신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점점 더 훌륭하게 되지요! 이것이 죄가 아까 이야기한 모든 원인은 어디에서 시작된다고 하였습니까? 어떤 차이에 의하여 자기 존재의 가치를 느끼지요!

이 사람은 반성하기 전보다 반성한 후에 더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면, 여기에 어떤 모순점이 있는가 하면, 이것은 칸트가 발견하였고 많은 윤리학자들이 발견한 것입니다. 무엇인가 하면, 훌륭한 사람이 다음에 반성하려면 이 훌륭한 사람이 나쁜 짓을 하여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이것은 머리 좀 써야 합니까?

다시 합니다. 반성하기 전보다 반성한 후에 내가 좀더 훌륭하여 졌잖아요! 이 훌륭한 것이 다음에 더욱더 훌륭한 것이 되려면 무슨 과정을 거쳐야 합니까? 반성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훌륭한 나를 더욱더 나쁜 놈으로 만들어야 그 다음에 반성이라는 것이 성립이 되잖아요! 훌륭한데 어떻게 나쁜 놈 만듭니까! 이 훌륭한 나를 어떻게 나쁜 놈을 만드는 것입니까?

만약에 훌륭한 나를 나쁜 놈 만들려면 그 전에 무엇을 취소시켜야 하는 것입니까? 그 전에 반성한 것이 헛된 짓이라는 것을 스스로 자인하여야 할 것이 아닙니까! 내 말이 맞아요? 안 맞아요? 맞잖아요! 반성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버리면 틈이 없잖아요! 반성해도 나를 나쁘더라는 이것이 되어야 그 다음에 더 훌륭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이 되잖아요! 그죠!

그러면 그 나쁜 놈이 되려면, 그 현재 나쁜 놈이 되기 이전의 상태를 취소하여야 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생각하려니 두뇌에 부하가 일어나는 것입니까? 쉽게 예를 들어봅시다. 어떤 며느리가 나는 죄인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삽니다. 회개합니다. 반성합니다. 이제 시어머니를 잘 섬기겠습니다. 그렇게 반성하고 회개하고 시어머니를 위해서 밑반찬을 천 가지 하면서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자 교회에서 훌륭합니다. 요즈음에도 이렇게 시어머니 섬기는 착한 며느리가 있다니! 하면서 칭찬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그리고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한 것입니다. 하였는데 그 일주일 뒤에 밑반찬 이천 가지를 하는 며느리가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면 그 순간 그 사람은 무엇을 취소하여야 하는가 하면 반성한 자체를 잘못된 반성의 근거를 취소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주여! 왜 나는 이천 가지를 하지 못하고 기껏해야 천 가지 밖에 못합니까! 하면서 반성을 해야 하는데, 새 며느리가 오기 전까지는 자기가 시어머니께 소홀히 한 것에 대하여 반성하였잖아요! 이제부터 밑반찬 천 가지를 하겠습니다. 기껏 일년에 전하 몇 번하고 추석 때 용돈 좀 보낸 것으로 잘했다고 하였는데 지사충성하지 못하여 천 가지를 못하였다고 반성을 하였는데, 이천 가지 하는 며느리가 들어오고 나서는 반성이 어떻게 되는가 하면, 주여! 이천 가지 못하는 이 나쁜 여자가 납니다.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주일 삼천 가지 하는 사람이 들어오면 또 바꾸어야합니다. 이 바보같이 왜 밑반찬 삼천 가지를 못하는가!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왜 반성을 하는 것입니까? 무엇을 노리고 반성을 하는 것입니까? 기어이 나는 반성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는 그런 소망이 있기 때문에 계속하여 수정하는 것입니다. 훌륭한 사람으로 일구어내기 위하여 수정하는 것입니다. 그런 부질없는 짓들이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가 없는 인간이 처해있는 현실입니다. 그러면 성경은 어떻게 됩니까? 그렇게 무한적으로 계속해서 자기반성, 훌륭한 사람 되기, 다시 조져놓고 훌륭한 사람 되기, 또 나쁜 놈 만들어 놓고 반성하기, 또 도약하고 비약하는 이 무한 연쇄 고리, 사슬을 끊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그렇게 반성할 필요조차 없는 곳에서 우리를 구원할 능력이 와 버리면, 내 쪽에서 무언가 꼬물꼬물 거리며 만들어내는 모든 수고가 반성을 하든 회개를 하든 그 모든 것을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리는 무언가 다른 노선이 우리에게 도착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율법 외에 한 의입니다. 율법 외에 라는 말이 무엇이냐 하면, 인간은 율법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그 율법 외에 다른 의가 또 우리를 둘러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으로는 의가 나오지 않습니다. 반성하고 또 반성하여도 의가 나오지 않습니다. 왜? 또 반성할 것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율법 외에 다른 의가 덮치는 것입니다. 율법의 층이 아닌 그 다음의 층인 율법 외의 층에 의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아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지요! 율법 외에 우리의 믿음으로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밀쳐놓고 주께서 그 자리에 서서 주의 이름으로 우리가 영광 되는 것이지 내가 주의 이름을 믿음으로 영광 되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하였습니다. 내가 포도나무이고 주님을 가지로 삼는 것이 아닙니다. 포도나무는 주님이고 우리는 가지로 붙임을 받아 포도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포도나무가 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노력을 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율법 외의 의가 율법의 의와 어떤 차이가 나는가? 율법의 의란 그 주체가 누구인가 하면 그 율법을 행하는 우리가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율법을 지킴으로 말미암아 의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네가 지켜봐! 또는 사도바울의 명령문을 우리에게 지켜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먹는 것과 입은 것으로 족한 줄 알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 계속하여 우리의 주체를 노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 외는 주체가 우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아니고 누구인가 하면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그 예수님께 복속됨으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 복속 되는 그물을 무엇이라고 하는가 하면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 지금부터 사랑과 이 율법의 의에 대한 차이점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 번 들으셨겠지만 다시 기억을 새롭게 하면서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일곱 번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나를 미워하는 자를 용서 하는데 일곱 번을 하면 되겠습니까하면서 용서하는 주체를 나로 삼아 일곱 번이라는 한계를 정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일곱 번을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490번입니다. 그러면 율법의 의가 490번 용서하면 됩니까? 아마 그때 가서 490번 용서하였는데 그러면 되겠습니까? 그러면 예수님은 일곱 번 곱하기 일흔 번 곱하기 일흔 번을 용서하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면 34300번이 됩니다. 그렇게 용서하였다면 됩니까? 또다시 일흔 번이라고 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곱은 완전수이기 때문입니다.

한번 사랑은 끝이라는 것입니다. 한번 준 사랑은 네가 자유의지를 발휘하든지 아니하든지 상관없이 한번 주신 사랑으로 다 끝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확증하였다고 합니다. 로마서 5장 8절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합니다.

확증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 어떻게 압니까? 2천년 전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거기에 무엇이 있습니까? 십자가 사건이 있습니다.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자유의지를 어떻게 반성하며 사용하든지 회개하면 사용하는지와 상관없이 이미 율법 외의 사랑은 확증이 된 것입니다. 이미 사랑의 대상이라는 신분이 확증이 된 것입니다.

아가서에 보면 아가서의 주체자가 하나님입니다. 즉 솔로몬이죠! 술람미 여인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스토커 수준입니다. 계속 거부하여도 끝까지 따라오는 것입니다. 내 사랑을 받아줘! 내 사랑을 받아줘! 그것이 아가서입니다. 장판옥 목사님께서 정판옥 목사님 계십니까? 링거 맞고 계시다는데 링거 맞아도 사랑이 있으면 됩니다. 정 목사님이 극동방송에서 아가서를 설교하셨다고 하는데 궁금하였습니다.

아가서에 보면 지독한 사랑입니다. 얼마나 지독한지 죽음보다 더 지독합니다. 죽음보다 더 지독한 사랑을 신약 식으로 표현을 하면 저주를 이기는 사랑입니다. 죽음은 저주이기에 저주를 이기는 사랑입니다. 그 정도로 이 사랑은 집요합니다. 그래서 사랑 왔으면 모든 계명은 종결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주체가 다릅니다. 네가 받은 주님의 사랑을 내어 놓으라는 것이지 사랑이라는 계명을 또 추가해서 지키라는 것이 아닙니다. 너는 무엇을 받았어? 이것을 받았는데요! 너는 무엇을 받았는데? 이것을 받았어요! 사랑은 받은 것을 내어 놓는 것입니다.

그러면 받은 것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피 밖에 더 있습니까? 아까 간식 먹을 때에 대식 씨가 오징어 내어 놓고 땅콩 내어 놓고 하였는데 그러면 땅콩 오징어 같은 것은 율법이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이것 내어놓고 더 내어 놓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간식은 없습니까? 빵 같은 것도 있고 간식 외에도 자유시간 같은 것은 없습니까? 그런 것도 있잖아요! 그런데 대식 씨가 피를 내어 놓으면 더 이상 내어 놓을 것이 없습니다. 사랑이기에 끝나는 것입니다.

왜 우리 사랑으로는 안 되는가 하면, 사랑 주체가 우리이기에 우리 사랑은 인정이 안 되는 것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은 영원하다는 것은 믿음 소망 사랑의 공통점이 무엇인가 하면 주체가 주님이기 때문에 믿음 소망 사랑은 영원히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사랑은 항상 주체가 우리이기 때문에 우리가 몸이 아프다든지, 링거를 맞고 있다든지, 감기가 들었다면 우리가 찡그리게 됩니다. 우리 육신은 자기 몸부터 먼저 챙기기 마련입니다. 자기 배가 불러야 남을 도와주지 자기가 배고픈데 남을 도와주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그러므로 우리 주체가 행동으로 나서게 되면 그것은 은사가 아니라 우리가 억지로 만들어내는 율법적 믿음 소망 사랑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의 사랑 장에서 주님은 거부하는 방식으로 말씀하십니다. 무엇은 아니고 무엇은 아니라는 식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랑은 내 몸을 불사는 것도 아니고, 사랑은 설교하는 것도 아니고, 사랑은 그런 것과 대체할 수 없는 따로 주어진 것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주체가 되어서 나오는 것과 사랑은 일체 섞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 소망 사랑 가운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라고 것에서 나온 소망과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으로 나온 믿음과 소망만이 참된 믿음과 소망인 것입니다. 그것을 갈라디아서 말씀을 보시면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만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행하는 믿음이라는 것이 갈라디아서 5장 6절에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질문하기를 그러면 목사님은 믿음입니까? 행함입니까? 하면서 묻기에 사랑으로 행하는 믿음이라고 하니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사랑이 추상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의 주체가 예수님이기에 예수님 안에서는 정죄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정죄 하려면 율법이 있어야 하는데 주님의 화목제물로 모든 율법을 이루었기에 그것이 사랑으로 완성이 되었기에, 사랑 안에서 다른 말로 하면 예수 안에서 사랑하겠다는데 무얼 정죄해요!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겠다는데 왜 정죄하시겠습니까? 사랑의 대상인데!

나는 이래서 너를 버린다. 그럴 것 같으면 사랑하지 않지요! 네가 이러할 지라도 네가 너를 사랑하겠다는 것이 사랑이지요! 그래서 주체 자가 예수님이 되어서 우리는 그냥 받는 입장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일을 할 때에 우리하고 어떤 협의를 하였습니까? 협의한 적이 없습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화목제물입니다.

율법 외에 한 의가 화목제물로서 마감이 됩니다. 화목제물로서 마감이되는 이유는 속죄제와 속건제가 화목제물로 다 포함이 됩니다. 화목 제물 이전의 절차 속죄제 속건제 번제를 다 드렸다는 것입니다. 화목제물이라는 것은 모든 제물의 대표 격입니다. 마감처리 하는 제물입니다.

이 화목제물 안에 무엇이 들었는가 하면 죽음이 들어 있습니다. 로마서 5장 8절 다시 보겠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 말씀을 제가 달리 이야기 할 것인데 달리 하는 부분에 대하여 거부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것을 잘못입니다. 하나님께서 말로서 사랑하신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증거가 무엇이냐? 죽으심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사랑을 확증한 것입니다. 사랑, 사랑 말로만 한 것이 아니라 죽으심으로 확증한 것입니다.

제가 지금 강조하는 이유를 모르시는구나! 엄마가 애한테 내가 너를 사랑한다. 이쁘다고만 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이쁘다고 하면서 엄마가 죽는 것입니다. 그 말이 무엇인가 하면 너는 죽어야 마땅한 내 자식이지만 내가 대신 죽음으로 이쁨의 대상으로 거듭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가 사랑받을 자격이 원래 없음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너는 죽어 마땅한 인간이지만 내가 너를 사랑의 대상으로 다시 부활시킨다는 뜻에서 죽으심으로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주님의 죽으심으로 인한 사랑을 아는 사람은 어떤 특징이 있는가 하면, 나 인간이다. 나 사랑해다오! 이런 건방떠는 짓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죽어도 마땅한 인간이 어디서 사랑을 달라고 하는가? 지옥 가야 마땅한 인간이 어디서 살려고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까 쉬는 시간에 질문하시기를 죄가 오고 난 뒤에 율법이 주어졌는데 그러면 율법이 오기 전에는 죄가 없느냐고 질문하셨는데, 죄가 무엇이냐? 죽음이 무엇이냐는 것은 창세기 3장에서 문자적으로 죄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선악과를 따 먹으면 죽으리라고 하였는데 왜 그렇게 오래 살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담이 몇 살 까지 살았습니까? 930살 까지 살았지요! 엄청 오래 살았지요! 900살을 넘었는데 무슨 죽는 것이 그런 죽음이 있습니까?

그래서 당장 죽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오래 참아서 안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빈말을 하신 것이지요! 죽음이란 의미가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야 죽음의 의미가 비로소 최종적으로 밝혀지는 것입니다. 죄의 의미나 죽음의 의미가 밝혀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의 의미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다는 말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사랑이고 자비이고 은혜를 받을 자격조차 되지 않는 존재로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사랑을 안 해 주어도 입 다물고 가만히 마땅합니다. 라고 해야 된다는 이 말이지요! 그런 관계가 선악과를 따 먹고 나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지옥보내기로 작정하고 어떤 사람으로 천당보내기로 작정하여도 우리 인간으로서는 따질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는 것입니다. 없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죽으심으로 사랑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냥 말로만 사랑한다고 하면 옆의 사람이 왜 나는 사랑 안 해주느냐고 할 것입니다. 그렇게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죽으심으로 말미암은 사랑은 구원받는 자도 사랑받을 자격이 없었고 지옥 가는 자도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데 단지 한쪽을 임의로 사랑하기로 작정하였다는 이 말입니다. 그래서 지옥 가더라도 입을 다물라는 것입니다. 애초부터 관계가 끊어져서 저주받을 자라서 그리고 가는데 그것이 무엇이 그리 아쉬우냐는 것입니다.

모두가 지옥 가야하는데 다만 한쪽의 사람을 구원하심으로 지옥 가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하나님은 옳은 하나님이 아니며 예수님도 옳은 예수님이 아니라는 악마적이 반발을 하겠지요! 그러니 저주 받은 자가 더욱 저주 받을 짓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한쪽은 사랑하여 건져냄으로 말미암아 이러쿵저러쿵 하는 소리가 많이 나오도록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여튼 확증하였습니다. 사랑으로 확증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 쪽에서 주체가 되어서 무엇을 할 것이 없이 이미 주체가 되신 주님께서 지독스럽게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1-2절입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자기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시지만 다는 아닙니다. 끝까지 사랑하시는데 예수님을 버리고 고기잡이 하러 간 제자들을 다시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로마서에서는 더욱 함축적으로 말씀합니다.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부정사 용법으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to부정사입니다. 동사에다가 to라는 전치사를 붙임으로 말미암아 명사, 대명사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부정사의 특징이 무엇인가 하면 시간의 전후를 절단 내어 버리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미 하셨다는 말씀은 앞으로 그렇게 된다는 말도 아니고 미리 당겨서 하였다는 것도 아니고 아예 시간에 대하여는 묻지를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간에 대하여 묻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담긴 내용은 묵시적 사건이기에 십자가 전후라는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그냥 십자가 안과 밖뿐이지 십자가 전 후는 없습니다.

노아 홍수 때에는 노아 방주에 들어가지 전과 후가 있습니다. 그러나 노아 방주에 들어가고 나면 노아 방주의 전과 후라는 개념은 없고 노아 방주 안의 세계와 노아 방주 밖의 세계로 나뉘어 질 뿐이지요! 언약이 바뀌면 시간과 공간이 다 틀립니다. 출애굽기 12:1-2절에 보면 카렌다가 바뀝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빠져 나온 그달이 기존의 달력으로 사월달인데 일월 달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제는 이스라엘이냐 아니냐로 축복과 저주로 나뉘어 지는 것입니다. 두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 전쟁사가 이스라엘의 전쟁사입니다. 이처럼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건을 나의 소유화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사건 받기 전과 후를 구분 지을 수 있는 사건이 아닙니다. 왜? to부정사이기 때문입니다. 시간을 박살내는 문법이 들어가니까!

구원파들을 말하기를 당신 언제 구원받았어? 라고 약을 올립니다. 며칟날 구원받았어? 이런 질문이 들어오면 to부정사가 생각이 안 나고 멈칫거리는 것입니다. 이런 질문이 들어오면 이렇게 대답하시기 바랍니다. 창세전에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면 그것 말고 지금 언제 구원받았느냐고 하면, 창세전에 구원받았기에 늘 구원받았다고 하면 됩니다. 이렇게 답하면 그 쪽 학자들 천명이 달려들어도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의 말씀이 에베소서 2장에도 나오지요! 이미 하늘에 앉히시니!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에베소서 강해를 보면 이 점에 대하여 잘 몰라요. 에베소서 강해 영적 투쟁이라는 책에 보면 그때 그 사람은 이런 시간 개념이 절단되고 날아갔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이미 우리는 구원받았다는 것을 신분적으로 해석을 해 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은 역사 속에 묵시가 침투하여 역사 인식 자체를 문제 삼으면서 그것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아까 예를 든 사랑입니다. 한번 사랑은 영원한 사랑입니다. 시간을 초월한 사랑입니다. 창세전부터 준비된 사랑입니다. 그것을 취소시킬 그 어떤 것도 없는 것입니다.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권력자나 천사나 악마나 그 어떤 것도 그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

왜냐하면 묵시적인 존재이신 예수님께서 영원토록 기도하시기 때문에 그 기도를 취소시킬 어떤 피조물로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복락입니다.

로마서 3장으로 돌아가 봅시다. 로마서 3:28절에서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을 우리가 인정하노라” 여기서 율법이라고 하는 것은 아까 이야기 하였듯이 주체를 우리로 지목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으로 라는 말은 주체자가 우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주체는 율법의 행위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출발은 육체의 행위밖에 없는데 우리에게 또 믿음이라는 것이 왔을 때에, 만약에 믿음이 우리 주체에서 오게 되었다면 이것은 어디에 포함되는가 하면 율법의 행위와 같이 결합됩니다. 그렇다면 이 믿음은 따로 와야 합니다. 이것이 따로 와야 하는 것을 가지고 무엇이라고 하는가 하면, 약속이라고 하고 로마서 3장에 4장에 의하면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은혜라고 하는 것은 은혜의 주체자가 따로 있는 것입니다. 은혜라는 행동의 주체가 따로 있어서 그분이 그저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선물, 은사라는 것입니다.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믿음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로마서 4:15절에 나옵니다.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이것은 율법이 없는 곳은 없기에 진노를 안 받을 인간은 없다는 것입니다.

16절입니다.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다른 말로 믿음은 은혜에서 왔지 율법에 속한 우리의 행함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하여 은혜로 온 믿음인 것입니다. 은혜로 왔다는 다른 말로는 믿음이 찾아 왔습니다하는 뜻이고 율법에서 왔습니다하는 말은 행함을 내어 놓으세요 하는 뜻입니다.

당신에게 믿음이 생겼습니까? 당신의 주특기가 아닙니다. 당신의 실력이 아닙니다. 이것은 은혜가 주어졌기에 믿음이 생겼습니다. 하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면 은혜는 어디서 왔는가? 은혜는 하나님의 약속에서 왔습니다. 그러면 약속은 어디에서 왔는가?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왔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약속이 오고 약속에서 은혜가 오고 은혜로 믿음이 온 것이니 이 아브라함은 누구의 것이 됩니까? 예수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예수님의 것임을 증거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당신이 이렇게 정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래야 행함과 믿음이 섞이지 않고 대립되는 관계를 유지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믿음도 내가 주체고 행함도 내가 주체라면 주체가 하나이기에 이것이 같은 영역에 속하겠지요! 그러면 열심히 착하라는 것도 나에게서 나오니 믿는 것도 나에게 나오면 이 둘 다 퉁퉁 나에게서 끄집어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대립된 관계가 아니고 둘 다 나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목사님 이번에는 무엇을 드릴까요? 선한 행함을 드릴까요? 아니면 믿음을 드릴까요? 믿음을 원하면 믿음을 드리지요! 이렇게 되면 대립관계가 아니라 결합관계입니다. 하나의 주체에서 다 튀어나오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주체가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와 비교하는 로마서 3장과 4장의 취지와 어긋나게 되지요!

4장 4-5절에 보면 유명한 말씀이 나옵니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요새 말로 하면 노동하는 사람은 임금을 받을 때에 공짜로 여기지 아니하고 라는 뜻입니다. 다시 합니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다시 말하면 열심히 일한 사람은 그 품삯을 공짜로 여기지 아니하고 이것은 내가 마땅히 받을 것이며 더 받아 내어야 할 “빚으로 여기거니와” 덜 주면 왜 덜 주느냐며 더 받아 내어야 할 것으로 여기지만

“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을 안했다는 것 속에 무엇이 포함이 됩니까? 일안했다는 말과 같은 표현이 무엇입니까? 믿었다는 말과 같은 표현이지 않습니까! 이 믿는 다는 말을 무슨 뜻입니까?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하는 그런 뜻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믿는 다는 일을 했잖아요! 믿어주는 일을 했잖아요! 믿습니다! 하는데 얼마나 애를 먹었다고요! 이렇게 나오는 것은 믿음을 자기의 삯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대립관계가 되는 것이 아니고 똑같은 것이 됩니다. 믿었으니 내어 놓아라 하는 이 말입니다. 이런 믿음의 믿음을 자기 노동의 일부로 포함을 시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바울이 하는 말과 전혀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이런 인간이 있습니다. 내가 당신을 믿게 했으니 돈 내어 놓아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더한 도둑놈이지요! 내가 너로 하여금 믿게 하여 천당 가게 했으니 돈 내 놓아라 하는 것입니다.

제발 목회 성공하지 마세요! 제가 당부하고 싶습니다. 왜? 그래야 여러분이 목회 성공하기 때문에, 제가 금지의 법을 정하여 놓았기에 뿔따구 나서라도 그것을 넘어서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목회 성공하려면 돈이 있어야 하니 믿게 했으니 돈 내어놓아라! 그것 아닙니까! 내가 믿게 하였으니 돈을 엉뚱한데 내지 말고 내가 믿게 하였으니 나에게 내어 놓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일하는 자의 삯으로 당당한 권리로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행함에 속하였기 때문에 행함에 속한 것은 어디에 속하지 않았다? 은혜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은혜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은 어디에 속하지 않았다? 약속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약속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은 어디에 속하지 않았다? 결국 예수님에게 속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속하지 않았다는 것은 어디에 속한 것입니까? 예수님께 속하지 않았다는 것은 나에게 속한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나를 건지려고 하는 심보밖에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을 대치하여 내가 여기에 버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여기서 믿음을 통해서 나를 구원한다는 이것은 바로 성경에서 행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을 아니함에도 불구하고 은혜가 왔다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내가 은혜를 받기 싫어도 주겠다는 은혜를 거부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것을 거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부하는 것도 행함이기 때문입니다. 그냥 주시면 받는 것입니다. 거부할 권리고 없습니다. 그것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은혜로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거부할 틈도 없이 찾아 온 것입니다.

집에 있는 가구가 자기 집에서 이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냥 가구인체로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밤에 보니 시끄러운 것입니다. 강도가 들어와서 주인과 싸워서 주인을 꽁꽁 묶었습니다. 강도가 주인 행사를 합니다. 그 다음날 아침에 가구인 나를 보고

“어이 냉장고 가자”

“왜요?”

“우리 집에 가서 살자!”

가구는 가고 싶지 않은데 주인이 찾아와서 나를 데리고 갈 때 그것을 두자로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천국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천국은 가고 싶지 않은데 그냥 예수님이 납치해서 보쌈해서 옮겨버린 것입니다. 천국으로 옮겨놓고 보니 나에게 주신 것이 은혜였고 약속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 전체를 가지고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7절을 봅니다. 7절을 더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긍정적인 의미에게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그 불법이 사하심을 받고” 아~ 이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불법을 누가 사하여 달라고 했습니까? 우리는 불법을 사하여 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왜? 우리 안에 무엇이 있기 때문에? 반성하는 기능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반성 잘하고 회개 잘하는 주특기가 있기 때문에 불법을 사하실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허락 맡지도 않고 그냥 불법을 사하여 버린 것입니다. 나에게 허락 맡지도 않고 용서 해준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가지고 복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 대표적이 사람이 다윗입니다. 나단이 찾아왔다는 말은 이미 용서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금식하다가 금식하지 않는 것입니다. 머리에 포마드 바르고 말끔하게 나오는 것입니다. 임금님 왜 금식하지 않습니까? 주께서 다 처리하실 일인데 내가 왜 금식하느냐? 내가 금식한다고 죽은 자가 살아서 오느냐? 일상근무 들어가자는 식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택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보편적 특성입니다.

내가 불법을 사하여 달라고 요청한 적도 없는데, 그런 것은 바리새인들이 잘하는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소서! 이렇게 금식하는데! 하는 것은 바리새인들이 잘하는 것입니다. 6,25 기념일이나 부활절 앞두고 몇 개월 남지 않았는데 고난 주간 정하여 6,25를 기억하면서 주먹밥을 먹자니!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일주일간 몇 끼씩 금식하여 불우이웃을 돕자고 하는 것입니다. 제대로 돕지도 않으면서 그러는 것입니다.

그런 짓 해보았자 금식 끝나는 금요일과 토요일 기다릴 뿐입니다. 식식거리면서 내가 끝나고 나서 얼마나 잘 먹는지 한번 해보자! 막강한 사료를 먹을 것입니다. 그동안 못 먹은 것으로 괜히 자기 의만 축적 해놓은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성만찬 할 때에 다음주에 성만찬 한다고 하면 한 주간 동안 얼굴을 찡그리며 주여! 부족합니다. 그리고서는 떡 하나만 먹고 나면 해방이라는 것입니다. 다음 성만찬 까지 해방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반성하는 기능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과 무엇이 충돌되는가 하면 그냥 일방적으로 용서 받은 것과 충돌이 됩니다. 내가 열심히 열 내지 않더라도 이미 십자가 피로서 용서 받았습니다. 하는 것을 차후 적으로 통보받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을 통하여, 은혜라는 것을 통하여 너는 이미 용서 받은 사람이야! 성령을 통하여 믿음을 통하여 느껴지고 믿게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범사에 감사할 뿐이죠! 아~ 복 받았구나! 이것뿐인 것입니다.

조금만 더 해 봅시다. 그러니까 10절에 할례나 무&n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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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