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10: 8-11(말씀의 쓴 맛)
계 10: 8-11(말씀의 쓴 맛)
이름 : 우리교회(IP:220.81.176.151)
본문 : 요한계시록10장8-11절
제목 : 말씀의 쓴 맛
일시 : 2007년 1월 14일
http://222.231.1.74/~woorich1/성경강해/요한계시록-2006/045강-계10장,8-11,(말씀의,쓴,맛)-rev070114.hwp
이근호
07-01-14 13:23
말씀의 쓴 맛
2007년 1월 14일 본문 말씀: 요한계시록 10:8-11
(계 10:8) 『하늘에서 나서 내게 들리던 음성이 또 내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섰는 천사의 손에 펴 놓인 책을 가지라 하기로』
(계 10:9)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책을 달라 한즉 천사가 가로되 갖다 먹어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
(계 10:10)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책을 갖다 먹어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계 10:11) 『저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하늘이 열리면서 하나님께서 직접 음성을 내리시는 경우는 앞으로 인간 세계의 모든 것이 그 뜻으로 진행됨을 알리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 받으실 때에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앞으로의 모든 인류 역사는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리기 위한 용도로 진척됨을 뜻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 점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무엇이 되었던지 간에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모든 행적은 자신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나타내셨습니다. 즉 자기 말고 다른 길은 없고, 자기 말고 다른 진리는 없고, 자기 말고 다른 생명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태어나면서 아담으로부터 줄기차게 받아 내려온 본성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 위주의 삶’입니다. 자신의 인격과 자존심과 위신은 그 어떤 경우에도 양보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는 식의 삶입니다. 따라서 예수님 중심으로 일하시겠다는 하나님과 자기 자존심 위주로 버티겠다는 인간의 고집이 충돌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즉 인간은 나 외에는 달리 나를 구원할 자가 없다는 겁니다. 거기에 비해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너를 구원하지 않더라도 내가 보낸 예수님이 너를 구원한다”고 말입니다. 이 뜻을 한 말씀으로 정리하자면 이러합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입니다.
우리 인간은 자신을 날마다 점검해서 행여 죄가 될만한 것이 있는 지를 살핍니다. 그런데 이런 인간의 행위에 비해서 예수님은 사도는 외칩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말입니다. 과연 누구의 몸짓을 믿어야 합니까?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두 종류를 나누십니다.
이로서 자기 위주로 살겠다고 다짐은 모든 다짐은 다 헛수고로 끝나고 맙니다. 모든 인류를 동일하게 보는 것도 다 거짓된 발상이 되어버립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인류를 두 종류로 나눌 때 어떤 식으로 차이 나게 하십니까? 이 점에 대해서는 아브라함은 두 자녀가 확실한 해답을 줍니다.
한 사람은 육신에 의해서 태어난 자식류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약속에 의해서 태어난 자식류입니다. 약속에 의해서 태어났다는 말은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 인간 안에 하나님의 약속이 침투해 들어오게 된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도 요한이 바로 이런 약속류에 속한 사람입니다.
이 사도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데 나름대로 그 어떤 준비도 갖출 필요가 없습니다. 주께서 아에 그런 준비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사도 요한 본인이 자기 구원을 위하여 애쓰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사도요한을 약속의 사람으로 만들고자 하시는 주님의 능력이 일관성있게 침투하게 됩니다.
이것은 곧 한 인간에게 있어 본인의 의사에 의해서 새로운 나를 만들어 낼 수 없음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인간이란 본인의 힘으로 본인이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힘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겁니다. 즉 주시는 것을 거부할 수 없는 입장에 있고, 또한 갖고 싶어도 빼앗기지 않을 수도 없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요한은 에스겔처럼 말씀을 먹게 됩니다. 결코 본인이 평소에 말씀을 먹소 싶어서 먹은 것이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께서 사도 요한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그렇게 사용하시는 이유는,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외부로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에스겔의 경우, 그가 말씀을 먹은 후에 좌측으로 모로 390일 동안이나 누워지내야 하는 쓴 맛을 봅니다. 결코 자신의 죄악 때문이 아니라 그 당시 백성들의 죄를 대신해서 보여주는 입장으로 선지자가 세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죽어도 그는 울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인간들 간의 부부 사랑으로도 저항할 수 없는 정도로 더 혹독하고 냉정함을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성도에게는 소명과 사명이라는 것이 들어옵니다. 하지만 신앙이 없는 이들은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과 선지자들이 보여주는 사명과 소명을 조작하게 됩니다. 즉 의도적으로 혹독한 상황을 골라잡아서 그 길에 자기 인생을 투자해서,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신앙력을 발휘하는가 스스로 측정해보려고 합니다.
즉 사서 고생하는 길로 접어들어서 거기서 당하는 수모를 마치 예수님을 뒤따라가면서 경험하는 주님의 고난 인처럼 해석하고자 합니다. 갖은 역경을 스스로 불러 일으켜서 그 고난 속에서도 자신이 갖고 있는 인내력과 사랑과 소망이 생생하게 살아있음을 체험해보고자 하는 겁니다. 하지만 참된 소명과 사명이란 인간의 예측력에 따라 조작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참된 소명과 사명은 인간의 예측력을 피해갑니다.
그렇게해서 그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간에 오로지 그 일을 주신 주님의 약속만을 의지하게끔 하십니다. 인간은 본인이 만들어가는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연못 한가운데 종이배를 띄운 아이들이 다시 그 종이배를 수중에 넣기 위해 연못 한가운데 떠있는 종이배 근처로 돌맹이를 던집니다.
여기서 물결이 생기고 파장이 생깁니다. 언른 보면, 마치 배가 점점 아이들 있는 곳으로 오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실은 종이배는 그 자리에서 올라갔다 내려갔다만 되풀이 할 뿐입니다. 이처럼 우리네 인생이란 매일같이 주님께서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 전파의 동원되고자 뺄 것은 빼버리는 식으로 자기 백성을 움직이십니다.
마치 양계장에 문을 열고 주인이 정기적으로 모이를 주면, 닭들은 양계장 문만 열면 자기에게 모이 주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날 그 주인에게 손님이 찾아오게 되고, 주님은 양계장 문을 열고 들어서게 되면, 그 날은 닭 목이 졸지에 비틀어죽게 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들이, 그저 자기 위주로 생각해서 늘 하나님께서 은혜라는 모이만 주는 줄 알지만 닭을 목을 단숨에 비틀어버리는 그런 은혜도 얼마든지 주님이 주실 수 있음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윤리와 도덕을 자신에게 있는 대로 다 퍼부어 그것으로 인해 자신이 구원되리라는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님을 명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