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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07 십자가 마을 겨울 수련회 (수정완)강의[수련회]

2007 십자가 마을 겨울 수련회 (수정완)

이름 : 김대식(IP:122.47.57.66)

2007년 십자가마을 겨울 수련회 총 9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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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교회(IP:220.♡.176.151)

07-01-17 18:19

겨울수련회 로마서 1강 녹취 이름 : 오용익

2007 겨울수련회 로마서 강의 1(이근호 목사)

기도하고 시작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가운데서 그동안 지내왔던 저희들을 천국에 입성하기 전에 과연 저희들이 천국에 입성할만한 사람들인지, 무엇을 알고 있는지, 우리 주님은 어떤식으로 자기 백성을 선택하고 골라내는지 그 지혜를 이시간 허락해 주셔서 주님의 마음과 우리의 마음이 일치되는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로마서 8장 1절에 보면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정죄함이 없다” 는 말이 나오거든요. 제가 여기에 적어 보겠습니다. “예수안에 있는 자는 정죄함이 없다” 상당히 짧은 문장인데, 우린 뒷부분을 상당히 좋아합니다. “정죄함이 없다”는 것. 제가 선언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이렇게 선언했다는 것. 앞에 조건이 어떻하든지 간에 그것은 상관할 필요 없이, 어쨌든지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하여 두 번다시 정죄함이 없다는 이런 상태를 제시했다는 것, 이것만으로도 즐겁습니다.

정죄함이 없다. 무슨 짓을 해도 정죄함이 없다. 하나님 자신이 “내가 없다면 없는거야. 누가 옆에서 뭐라고 수군 수군 거려도 그런 소리 듣지 말고 하나님이 정죄함이 없다는 거야”라는 그런 상태가 있어요. 그렇다면 성경전체가 뭐냐 하면, 왜 예수 안에서만 정죄함이 없느냐? 그러니까 “예수안”이라는 조건을 빼버리면 전체가 정죄함을 유발시키는 조건들로 출렁이고 있습니다.

“예수 안”만 빼버리면 즉 소크라테스 혹은 공자 부처를 믿는다든지, 이런것도 없이 그냥 나홀로 살아간다든지 그런 삶의 상황들과 관계없이, 예수안에만 있지 아니하면 그 전체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처소에 있든지 간에, 지하실이나 바다끝에 하늘끝에 있든지 간에 그것은 정죄함입니다. 이유없이 그냥 정죄함입니다. 그런데 예수안에 있을 경우에는 이유없이 정죄함이 없어요. 이유없이. 예수안에서 사람차별 하지 않습니다. 예수 안에 들어왔는데 너는 얼마나 착하며 얼마나 죄를 지었는지를 일체 묻지 않습니다. 예수 안에서는 모든 것을 불문에 붙이고 정죄함이 없어요. 그런데 예수 밖에만 나가면 얼마나 성실하든 얼마나 착하든 상관없이 거기에는 정죄함 밖에 없습니다. 이 두가지 점, 이 두가지 점인데,

첫 번째, 왜 예수 안에는 정죄함이 없는가?
두 번째, 왜 예수 바깥에는 정죄함 뿐인가?

이 세상에는 착한 사람들도 많고, 신을 부르짖는 바리새인들, 그리고 일본만 해도 수십만 가지의 종교가 들어차 있는데 그 많은 종교가 있는데 나름대로 그들의 인격과 성의를 인정해 주고 존중해주고, 그들의 타고난 성품을 충분히 우리가 존경해줌에도 불구하고 왜 그들은 예수 밖에서 정죄를 당해야 하는가? 이 두가지를 로마서를 통해서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사실은 두가지가 다 어려운데 사실은 이 두 번째가 정말 어려워요. 어렵다기 보다는 이 두 번째는 정말 사람 기분 나쁘게 하는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왜 예수 밖에는 정죄함 뿐인가? 예수 밖에 있는 대표적인 예를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수많은 예가 있습니다만 그것을 다 들수는 없고 대표적인 것을 예로 들겠습니다. 자기가 여기 있고, 예수님이 여기 계시고 자기가 여기 계신 예수님을 믿는 것. 이것이 예수 밖에 있는 사람의 대표적인 사례중의 하나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 것, 이것이 바로 대표적인 예수 밖에 있는 인물들의 전형적인 모습들이죠. 기독교적 냄새가 나는 모습인데, 이 사람 역시 2번에 해당됩니다. 뭡니까? 정죄함 뿐입니다. 천당 못 간다는 얘기고 지옥 간다는 얘기죠. 그래서 이것이 기분 나쁘게 하는 것이고 어려운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그림처럼 이렇게 바깥에서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안에서 예수님을 믿는 겁니다. 이걸 그림으로 그리면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음을 인정하는 것, 이것이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정죄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바깥에서 예수님을 하나의 믿음의 대상으로 삼아서 믿게 되면 이것은 백날 믿어도 예수 바깥에 있다는 것 때문에, 이것은 정죄함 밖에 없지요. 지금 신약에서는 이것을 예수로 보았지만 구약에서는 여호와로 보았어요. 여호와. 인간이 여호와를 믿는다는 이말이죠. 여호와의 존재를 믿는다, 여호와의 활동을 믿는다,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은혜 주심을 믿는다, 전부다 믿는 거예요. 믿는데 그들이 믿는 종교가 바로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던 유대교가 되죠. 유대교가 됩니다.

사람들은 내가 여호와를 믿는 것이 문제였기에 여호와의 그 자리에 예수를 놓아야겠다고 해봤자, 여호와나 예수나 자리를 바꾸어봤자 역시 예수 밖에 있기는 마찬가지인겁니다. 여호와를 예수로 바꾼다고 해도, 예수 안에 있다고 인정해 주지를 않아요. 그래서 이 두 번째 그림, 내가 예수님 바깥에서 예수님을 믿는 것, 또는 여호와를 믿는 것, 또 삼위일체를 믿는 것 이것의 문제점은 뭐냐 하면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고, 지식이 모자란다는 것도 아닙니다. 여전히 바깥에 있으면서 내가 믿는 것이 하나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 자체가, 이것은 정죄함이 없는 예수 안에 있는 상태는 아니올시다는 말입니다.

정죄함이 없다고 규정한 그 예수 안에 있는 상태는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이 뭐냐 하면, 그렇다면 예수 안에서 예수를 믿는 그 현상은 적어도 2번 그림처럼 적어도 바깥에서 믿는 것은 아니어야 한다는 그러한 결말에 도달합니다. 예수 안에서 예수를 믿는 것은 2번처럼 예수를 하나의 대상으로 간주해서 믿는 것 이것은 아니어야 한다는 겁니다. 만약에 1번처럼 나는 예수 안에 있다고 해놓고, 어떤식으로 어떤 식으로 어떤식으로냐고 물으니까 예수님을 이렇게 믿는다고 하면, 이것은 바로 방금 제가 이야기한 2번에 해당되는 것이지, 1번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잠시 상식적인 과학이야기를 좀 하면, 과학에 “브라운 운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학창시절의 과학시간에 잘 알아 들었겠지만, 여기서 잠시 보게 되면, 물위에다가 고운 꽃가루를 띄웁니다. 꽃가루가 이렇게 물위에 뜨겠지요. 이렇게 뜰때 물위에 뜬 꽃가루가 자꾸 움직이는 거예요. 수면위에 떠 있는 꽃가루가 움직인다 이 말이죠. 보통 옛날 사람들은 꽃가루가 움직인다고 했는데, 조사해 보니까 꽃가루는 가만히 있는데 꽃가루보다 작은 물분자들이 움직임으로 말미암아 가만히 있는 꽃가루가 움직이는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이걸 브라운 운동이라고 합니다.

액체속에 있는 다른 분자의 움직임을 다른 대체물을 던짐으로서 확인할 수 있다는 이야기죠. 이것은 바로 과학이죠. 과학은 눈에 보이는 것만 측정해서 대충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변하고 움직일 때 무엇이 원인이 되어서 변화를 유발 했는냐 하는 보이지 않는 원인까지 규명해 냄으로 그 원인과 결과를 이어서 똑같은 결과를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재탕해서 만들어 낼 수 있는 기술을 가지는 것이 바로 과학이 목적하는 바입니다.

제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느냐 하면, 사람이 신을 규명하고 신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때, 신은 상식적으로 안보이지만 같이 신을 믿는다는 사람들의 움직임과 활동을 통해서 그 사람을 움직이게 했던 다른 원인을 신의 능력으로 일단 잡습니다. 신이 능력을 주었기에 저 사람에게서 저런 변화와 기적이 일어난다고 봅니다. 따라서 이사람, 저 사람의 활동의 모든 것을 종합해서 신은 이런 식으로 움직인다고 하는 것을 과학적으로 귀납적으로 또는 연역적이라는 것도 있는데 하여튼 이런 식으로 신을 정립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거죠.

왜냐하면 나타난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인하여 나타났기 때문에, 나타난것만 얼추 정리가 되면 보이지 않는 숨어 있는 신의 진짜 보이지는 않지만 뭘 하려고 하는지는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다는 말이죠. 어떻습니까? 이게 바로 과학이나 신을 파악하는 종교나 너무나 흡사하지 않습니까? 더 이상 완벽하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신을 아는 것이 합당할까요? 이것이 그럴싸 하고 문제가 없어 보이지 않습니까? 뭐가 문제예요?

물분자는 적어서 눈에 안보인다. 너무 적기 때문에 뭔가 움직이는 것을 측정할수 없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 매체물 움직임이 보이는 꽃가루를 던졌다. 그랬더니 바람이 부는 것도 아닌데 꽃가루가 움직였다. 이것은 꽃가루 밑에 있는 물분자가 움직였다. 이렇게 된다 이말이죠. 그러면 마찬가지로 이 원리 그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움직임을 파악해서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실체를 파악하는 것이 뭐가 그리 잘못되었고, 뭐가 문제냐는 거죠. 그래야 옳지 않느냐는 거죠.

또 그것밖에는 달리 하나님의 실체를 찾아낼 방도가 없기에 그것이 옳은 방법이 아니냐고 할때, 과학의 브라운 운동같은 것을 탐구하는 것을 금지할 사람이 있습니까? “어이 안돼. 하지마”라고 하면서 막는 사람이 있습니까? 막을수가 없죠. 호기심이니까요. 궁금하죠. 저 꽃가루는 왜 움직일까? 번개는 왜 칠까? 온도가 0도 이하로 내려가면 왜 물이 얼까? 이런 호기심을 누구도 금지할 수가 없죠.

그런데 로마서에서 천명하는 것은 우리가 이런식으로 과학을 보고 이런식으로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을 하나님이 총체적으로 금지한다는 겁니다. 그점이 로마서를 푸는데 있어서 가장 난점입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겠다고 하나님을 부지런히 연구하고 파악하는데, 왜 그리도 선하고 대견스러운 일을 금지하느냐 이말이죠. 왜 금지할까요? 한가지 예를 들면 쉽게 이해가 됩니다. 방금 어떤 화학자가 어떤 실험을 할때,

“어이 그런 실험을 하지마”
“선생님! 왜 그걸 하지 말라고 합니까?”
“그것은 율법이야”

율법하고 브라운 운동하고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아무런 관계가 없거든요. 사람이 호기심을 가지고 연구하는 것은 일종의 생리현상이예요. 먹고 나면 방귀나오고, 저녁먹고 나면 잠이 오는 이것은 생리현상이잖아요. 당연한것이다는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을 알려고 할때,

“어이 하지 마”
“왜요?”
“율법이 금지한거다”

기존의 유대인들은 율법이 신에 대한 것을 금지한다는 것을 감히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하나님 쪽에서 인간들이 신에 대해서 아는 것을 막으리라고 하는 것을 전혀 생각지도 못했어요. “하나님을 알라”든지,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빛이요” 이런 말씀들이 시편 119편부터 해서 온 성경 전체가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는 식으로 나오죠. 이사야 1장에도 보면 “나귀는 주인을 아는데 왜 너희는 나를 모르냐”는 구절들은 전부다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는 그런 대목이라는 거죠.

그런 내용인데 설마 이것을 금지 쪽으로 나간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죠. 이것은 꿈에도 예상치도 못한 겁니다. 사도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처음 알았어요. 로마서를 썼던 사도바울이 지금까지 하나님을 알고자 했던 것은 다 우상이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고, 말씀을 총 동원해서 인간이 만들어 낸 신인데 왜 만들었냐 하면, 인간은 자기가 믿고 구원받을 대상을 스스로 선택하는 겁니다. 선택.

인간이 자기가 믿고 구원받을 신을 선택하는데 그냥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납득이 되는 식으로 조작해 가면서 아름답게 꾸며 가면서, 스스로 조정하고 개선하고 고쳐가면서, 자기가 믿고자 하는 신을 자기가 만들어 내면서 살아가는 겁니다. 그렇게 믿는 겁니다. 그것이 로마서 1장에 나온대로 “너희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임의로 만든다”는 겁니다. 자 이것을 일단 알았다고 치고 지우겠습니다. 다시 한번 지우기 전에 묻습니다.

예수 안에서는 정죄함이 없습니다. 예수 안에서. 그러면 예수 밖에서는 뭐가 있습니까? 정죄함 뿐이죠. 그래서 구원을 위해서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뭘 믿느냐, 혹은 내가 어떤 대상을 믿느냐가 아니라, 내가 예수를 믿는다든지 여호와를 믿느냐가 아니라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뭡니까? 내가 이미 예수 안에 있는자로서 예수를 믿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죠. 예수 안에 있는자. 나중에 다시 말씀드리겠지만, 예수 안에 있는자는 예수를 믿을 수밖에 없게 되어 있어요.

일체 나의 행함에 의한 믿음이 안나오게 되어 있다는 말이죠. 내가 믿어야지. 믿어야지. 하는 식으로 행함에 의해서 나온 믿음은 이렇게 예수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이것은 가짜지요. 예수 안에서 믿음이 일어날때는. 참 이런게 어려운데. 어떤 학자들은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실천의 다른 표현이라는 겁니다. 그 사람이 예를 이렇게 들었어요. 무용수가 춤을 추고 있을때, 무용수와 춤을 분리할수 있느냐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비트켄 슈타인의 이야기입니다.

무용수가 춤을 출때 무용수가 춤추는 그 실천 자체를 춤이라 하지, 무용수가 춤을 춘다는 것이 말이 안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굉장히 어려운 이야기죠. 뮤용수가 춤을 추는 것이 아니고 무용수가 그냥 춤추는 것이지. 말이 다 똑같은 말이죠. 쉽게 이야기를 해서, 믿는다는 말을 믿음이 무엇이라고 따로 뽑아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믿는다고 할때 그냥 믿느냐고 물으면 안돼요. 왜냐하면 실천하고 있기 때문에.

네가 뭘 믿느냐 혹은 어떤 것을 믿느냐고 이렇게 물어야지 네가 믿느냐고 물으면 안된다는 말이죠. 네가 어느 안에서 실천하고 있느냐를 묻는 물음이 되어야지, 그냥 믿느냐고 묻게 되면 사람은 바빠요. 이것은 잠자는 것이고, 이것은 믿는 것이고, 이것은 먹는 것이고, 이런 식으로 여러 가지 자기 행위중에서 따로 믿는 것을 뽑아 내느라고 굉장히 분주해져 버려요.

이런 사고방식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사고방식 그대로입니다.

여호와라든지, 메시야라든지 내가 믿어야 할 대상으로 이미 내가 어떤 신을 골라잡고 선택하고, 그 뒤에 믿는 내용을 보수하고, 끼워넣고 하는 이런식으로 구조는 바뀌지 않고 내용물만 이방종교의 내용물로 집어 넣으면 되리라고 하는 이것은 인간의 타고난 성품입니다. 어떤 인간도 타고나는 겁니다. 애가 태어나면 다 나오는 겁니다. 물론 갓난애는 안되겠지만 두 살이나 세살쯤 되면 다 나옵니다.

“이 컵 누가 깼어?” “내가 안 깨뜨렸어요”라고 나오죠. “내가”라는 것이 나온다는 말이죠. 이말은 무슨 말입니까? “형이 깼다” 이 말이 아닙니까? 자의식이 벌써 발생했잖아요. 이것은 자의식이 생겨나라고 엄마가 추궁한 것이 아닙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자의식이 발생되고 그 다음부터는 말릴수가 없습니다. 걷잡을수가 없어요. 모든 것을 자기가 판단해서 자기가 선택해서 하는 겁니다. 처음에는 무조건 엄마말을 듣다가 조금더 자라면 자기가 판단해서 들으면 유리한 말, 불리한 말 들을말 안들을말 자기가 판단을 하잖아요.

그애가 커서 예수를 믿어도 마찬가지라는 말이죠. 석가를 믿으나 공자를 믿으나 마찬가지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믿어야 할 하나의 대상에 불과한 겁니다. 그 대상에다가 아무리 풍성하게 성경말씀으로 큐티로 뭘로 치장을 해도 소용 없는 거예요. C.F에 보면 이런 것이 있잖아요. “보아”나 “비” 가수가 나와가지고 퉁 퉁 치니까 옆에서 날개가 튀어 나오는 거 있죠. 내안에 뭐가 있는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거든요. 예상치도 못한 것이 튀어나온다는 말이죠. 어디 안에 있기에 그 어디 안에 있기에, 그 안에 있기 때문에 실천할 수밖에 없는 것이 터져 나와요.

그것이 행함이 되었든지 찬양이 되었든지간에 그걸 전체로 믿음이라 하는 거예요. 믿음이라 하는 것은 무슨 행동을 할것이냐의 차원이 아니라, 어디 안에 있느냐의 차원이예요. 어디 안에 있기에 그런 식으로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스도를 위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 전체를 믿음이라 하는 겁니다. 로마서에 국한해서 보면 믿지 않고 행한 것을 죄라고 합니다. 그 말이 재미있지요? 한번 적어 볼께요. 믿지 않고 행한 것은 죄라고 하는데 그 행함속에 믿음이 들어가느냐 안들어가느냐 이말입니다. 안들어가죠.

이것은 뭐냐 하면 노는 동네가 다르다는 말입니다. 믿는 동네가 따로 있고 행함동네가 따로 있다는 말이죠. 이거 두개를 섞으면 안된다 이말이죠. 노는 동네가 윗층이 있고 아래층이 있는데 이 두층을 섞으면 안된다 이말이죠. 행하세요. 다만 믿음으로 행하시면 됩니다. 이러면 되는 거예요. 행하지 마라. 이것은 믿음이 아니죠. 십자가 마을이 오해받는 이유중의 하나가 - 물론 새십자가마을이지만 - 뭘 믿는다고 하면 안해도 됩니까라는 이런 질문이 자꾸 들어와요.

맘껏 행하세요. 다만 믿음으로 행하면 됩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어떤 행동에 구애를 받지 않는거예요. 미리 말씀드립니다만 인간의 모든 행동은 내가 어떤 대상을 선택할때는 이 전체 테두리가 율법이라는 철조망이 있어가지고 이것이 금지가 되어 버려요. 금지. 어떻게 하느냐 하면 제대로 못할 것 하지도 말라는 겁니다. 제대로 못할 것 왜 하느냐 이 말입니다. 십일조? 네가 십일조를 아나? 네가 십일조 맛을 알아? 의와 신과 인을 버려놓고도 네가 무슨 십일조를 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고? 예수님 나만큼 사랑했어? 그것도 못해놓고 무슨 율법을 거론하냐 이말이죠.

하지 말라는 거죠. 못하거든. 죄밖에 안나오는데. 그런식으로 하는 것은 해도 소용없다는 거죠. 뭔가 경계를 하고 금지를 하고 해도 소용없다고 큰 테두리를 칩니다. 예수 안에서는 그 테두리가 없어요. 뭘 맘껏 해도 괜찮아요. 이미 예수 안에서 나오는 실천이기 때문에. 그래서 성령으로 행하는 것은 금지할 법이 없다고 했어요. 여러분들이 무슨 행동을 하는데 스스로 자제하면서 금지한다면 이것은 여러분들이 상당히 수상합니다. 굉장히 수상해요. 이것은 여러분들이 스스로 율법을 제조하고 있다는 뜻밖에는 안됩니다. 믿는 차원이 아니고 안믿는 차원이죠. 스스로 금지를 당하고 싶어서 환장한거예요.

밀도 있게 이야기를 해서 죄송합니다만 십일조 같은 경우를 봅시다. 어려워져도 계속 하겠습니다. 인간이 십일조라는 법을 행하려고 들잖아요. 그렇다면 십일조라는 그림을 그리게 됩니다. 인간이 바라보는 하나의 대상이 됩니다. 대상이 되면 자기가 십일조를 지키는데 여기에는 금지할 법이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은 자기 의지를 행사하는데 있어서 그 어떤 것도 브레이크 걸리는 것을 싫어해요. 내가 행하겠다는데 하나님이고 예수고 절대로 간섭하는 것을 절대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친히 나서서 금지하시는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뒤에 자기 자신에게 더 이상 금지할 법이 남아 있지를 않게 되었습니다.

따먹지 말라고 금지하신 선악과를 낼름 따먹었으니 더 이상 자기 자유의지를 방해할 그 무엇이 남아 있겠습니까? 자기가 이제부터 신인데 뭘 방해합니까? 선악과 먹지 말라고 한 것을 먹어 버렸는데 방해거리가 더 이상 뭐가 있어요. 금지할 법이 없지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핑계하기를 “하나님이여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소서”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미 가져갔잖아요. 가져가 놓고서 더 달라고 하는 것은 더 나쁘죠. 생각해 보세요. 안경집이 여기 있습니다. 안경집을 자기 뒤에 몰래 숨겨 놓고서 “선생님! 안경집을 저에게 주옵소서” 이러고 있는 거죠. ‘줄까 말까, 줄까 말까’ 이러고 있는데 저쪽에서 헤헤 거리면서 “벌써 내가 가졌지롱”

“자유의지를 주옵소서” 라는 이 말은 새삼스럽게 자유의지를 달라는 말이 아니고, 우리가 자유의지를 무한대로 사용할테니까, 거기에 대해서 이의를 달지 말라는 뜻이예요. 이것이 솔직한거 아닙니까? 제가 몇 년만에 솔직한 이야기를 합니다. 인간이 무슨 자유의지를 달라고 합니까? 이미 다 가지고 있으면서. 그래 놓고서 신학하면서 ‘인간이 자유의지가 있네 없네’ 하는 그 말도 안돼는 소리를 합니까? 입에 침도 안바르고 거짓말을 합니까?

본인이, 우리 조상까지 포함해서 전부다 다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져가 놓고서, 하나님이 자유의지를 허용했니 안했니를 따집니까? 이미 지금 잘 사용하고 있는데 뭘 그런 것을 새삼스럽게 따지고 있습니까? 어느정도인지 압니까? 하나님이 만약에 자유의지를 허용하지 않으면 그런 신은 선택안하면 그만이라는 그런 자유의지까지 발휘하면서 말이죠. 금지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친히 나서서 율법으로 금지하지 않는 한, 인간은 자기의 자유를 무한대로 사용해요. 무한대로 사용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우리 딸애가 요즘 운전을 막 배우기 시작했는데, 그 운전 조교가 바로 접니다. 아주 훌륭한(???) 조교지요. 차의 엉덩이를 뒤로 집어 넣어서 주차하는 것을 잘 못해요. 달리는 것은 어느 정도 되는데, 주차할때는 비뚤 비뚤 해서 딱 집어 넣는 것이 잘 안돼요. 어떻게 할까요? 운전면허를 취소해야 할까요? 한번 하고 두 번 하고 자꾸만 하게 되면 결국에는 딱 집어넣을 수 있게 되지요?

자 사람에게 자유의지가 있습니다. 어려서 철없어서 몰라서 인생경험 적어서 실수할 때 있습니다. 남의 사정 잘 몰라서 자기 욕심만 챙길때가 있어요. 한번 터지고 두 번 터지고 자꾸 욕얻어먹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차츰 나아지지요? 그렇다면 어떤 인간도 사형시키지 말고 더 오래 오래 살게 놔두면 남에게 착한 일을 많이 하게 될지 누가 알겠어요? 누가 아는게 아니고 그렇게 되겠지요?

스물 몇 살때 사람죽인 나쁜 살인자가 나이 90되면 칼을 들 힘이 없어서 못죽입니다. 얼마나 착해졌습니까? 이 말은 뭐냐, 하나님께서 자유의지라는 것을 인간에게 무한대로 주시면 어느 인간도 안착해 지고 싶어도 궁극적으로 착하게 되어 있어요. 이걸 가지고 수학에서는 무한수라고 합니다. 무한수. 칸토르는 무한수마저 하나의 수로 여겨서 초무한수라는 것을 생각해서 모든것을 내 앞에 놓여진 하나의 대상으로 삼았지만.

내가 대상으로 삼았다는 말이죠. 이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아무리 내 앞에 우주 끝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수 없지만 지금 현재 있는 것에 의해서 - 아까 이야기 한 것을 다시 할까요? 지금 현재 물분지의 움직임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물분자의 움직임을 확인시켜 줄 매개체인 꽃가루를 던져서 물분자가 움직인다는 것을 확인하듯이 - 그러니까 아무리 먼 우주에 있는 것이나 아무리 적은 박테리아 미생물의 세계를 다루는 과학도 지금 이미 시작을 했다는 그 자체로서 시간만 허락된다면 언젠가는 이 우주의 비밀은 궁극적으로 풀린다는 이말 아닙니까?

풀린다는 거죠. 그러면 과학자들이나 여타 학자들이 온 우주의 궁극적 비밀이 풀리는 그런 경우를 가지고 뭐라고 합니까? 뭐라고 하지요? 신인이라고 하는 겁니다. 神人!. 그래서 신을 믿는다고 하는 겁니다. 신을 믿는다. 다시 이야기 해 봅시다. 우리가 자유의지가 있고, 우리가 다 못하면 우리 후대가 계속해서 갈것이고 계속 가게 되면 거기에서 누구를 만난다? 신의 비밀, 신의 지식에 결국은 접촉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이라는 것은, 그리고 그리스도안이라는 개념은 지금 이 시대에 적절치 않습니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리고 믿는다는 것은 내가 무제한의 자유가 있으면 그것으로 지금 신에게 다가가고 있음을 믿는, 내가 무엇을 할수 있다는 것을 믿는거죠. 만약 내가 예수를 믿는다면 내가 예수를 믿을수 있다는 것을 믿는 능력자라는 나 자신을 믿는 것 이 전체가 있는 이상 금지라든지 단절이라든지 뭔가 분리라든지 거부라든지 그런 것은 뭔가 적당한 논리가 아니라는 것이 오늘날 모든 인식들 속에 들어차 있습니다. 이런 자본주의사회에서 로마서를 이해한다는 것이 옛날보다 더 어렵게 되어 있어요.

어떤 사람은 과거의 중세신학을 그냥 옹호하는 사람도 있고 개혁신학을 옹호하는 사람도 있고 혹은 21세기 현대의 폴틸리히 신학을 옹호한다는 사람도 있는데, 지금 이 시대의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생각한다면 그것에 머물러서는 안되고 그들의 문제점을 지적해 낼수 있는 복음의 내용이 더 크게 확장되어야 합니다. 사도신경이라든지 그런 것을 되풀이 해서는 곤란하다는 겁니다. 아직까지는 제가 “예수 안에”가 뭐고 “예수 밖에” 가 뭔지 설명한적도 없습니다.

단지 제가 이야기한 것은 이렇게 사도바울이 예수안과 밖을 나누었던 로마서의 견해와,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의 견해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견해는 이처럼 안맞는다는 것을 이야기한겁니다. 이렇게 안맞는데 ‘자 나 여기 있다. 나는 구원되어야겠다. 예수여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달려가겠습니다’ 이렇게 되어 버리면 이것은 예수 밖에서 하나의 대상으로 삼아서 믿는 그런 인식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아무리 로마서를 다 해도 그것은 다 떼었다고 해도 다 뗀 것이 아니예요. 그냥 시간만 보낸거죠.

제가 로마서강의를 준비하고 있는데 어떤분이 말하기를, 이번수련회에 로마서를 공부하게 되는데 그 많은 것을 다 할수 있겠습니까? 라고 했습니다. “다 합니다”고 했습니다. 다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자신하는 이유는 바로 양쪽을 다 설명하면 되니까요. 로마서를 한줄 한줄 다 설명할 필요 없이 이쪽세계와 이쪽 세계의 양쪽 세계의 차이점을 이야기할 뿐이죠. 어떻게 건너갑니까? 어떻게 건너갈수 있습니까? 하는 것은 제 소관이 아니고 다만 제가 할 것은 예수 안에 있는 인식과 예수 밖에 있는 인식이 로마서를 봐도 이렇게 차이가 난다는 것만 이야기를 할 뿐이죠.

자 이제 딱딱하고 어렵게 했는데 로마서 1장부터 들어가 봅시다. 로마서 1장부터 사도바울은 자기가 “예수 안에 있다”는 사실을 규정하고 들어 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이렇게 됩니다. 내가 예수 믿고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는 어디 안에, 즉 어떤 통치안에서 지배를 받는 종속관계에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처럼 이같은 종속관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이 로마서가 이해될 리가 없고, 풀릴 리가 없다는 운을 던지고 들어가죠.

그림으로 그려봅시다. 사도바울이 여기 있다면, 아까 이야기 한대로 인간은 다 실천하는 인간이니까, 사도바울이 뭔가를 실천할 때, 이것이 자신의 실천이라면 이것은 안되죠. 뭐 안에 있기 때문에 나와야 되고 또 나올 수밖에 없는 그 실천을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무엇의 종이냐?” 할때 “나는 예수님의 종”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에 종을 부각하는 종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로마서의 시작부터 눈에 보이는 사도바울이 어떤 인간이냐를 분석하고 그걸 심리화시켜서, 사도바울이 이런 심리로 로마서를 썼다는 식으로 로마서에 접근하고, 로마서를 해석하려고 시도하는 것 자체가 이미 틀려먹었습니다. 사도바울의 심리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사도바울을 통해서 이야기를 할때, 우리의 관심사는 예수님이 사도바울에게 어떤 일을 했기에 사도바울이 종이 될 수 밖에 없었는가 하는 그것만 파악하면 되는 거죠.

예수님은 도데체 어떻게 한거죠? C.F에 이런 것이 있어요. 닭튀김 C.F인데 “무엇을 가미 했기에 이렇게 닭이 맛있게 튀겨진겨야” 이렇게 되는 겁니다. 사도바울에게 예수님이 어떤 일을 남겼느냐 이말입니다. 자기는 그냥 사도니까. 여기 보니까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아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라고 합니다. 도데체 무슨 짓을 한거야. 예수님이라는 분이 도대체 무슨 짓을 해서 사도바울이 이런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느냐 이말이죠.

주님께서 사도바울에게 이런 일을 한다면 주님께서 똑같은 그런 일을 우리에게 동일하게 하신다면 이 로마서 전체의 내용에 대해서 우리가 동조하지 않을수 없게 되겠지요. ‘아! 이래야 주의 성도구나. 이래야 믿는자라고 할수 있겠구나’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제 ‘예수님이 누구시냐?’에 논점이 있겠죠. “예수님이 누구시냐?”에. “내가 구원되어야겠다”는 것이 사라지고 “예수님이 누구신가?”가 되죠.

‘내가 여기에 있다. 나는 구원되기 위해서 무엇을 할것인가?’가 아니라 “예수님이 무엇을 행하셨는가?”가 주제가 되죠. ‘내가 뭐할것인가?’는 이것은 완전히 끊어져야 되죠. 이것은 사라져야 되죠. 내가 무엇을 한다는 그런 것은 휙하고 선풍기 바람에 날라가듯이 날라가버려야 됩니다. 그런 것은 없어요. “예수님이 지금도 나에게 무슨 일을 계속 퍼붓고 있느냐”그것이 초점이 되는 겁니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예수 안에 있는 사람에게만 해당됩니다. 결과적으로. 나중에 그것이 나옵니다만 초반부터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행할것이냐 하는 거기에 관심이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예수님이 사도바울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무엇을 행할것인가?” 여기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죽음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첫 번째 강의에서 제일 중요합니다. “예수안”과 “예수밖”의 차이점이 어떤 공간에 의해서 결정된다면 이것은 아주 쉬운문제입니다. 만일 “예수 안”이 대전이라는 공간이라면 우리는 차를 타고 대전에 가면 됩니다. 그런데 표현은 “안”과 “밖”이라는 공간적인 표현이지만, 실제로 예수 안과 밖은 어떻게 구분되느냐 하면 사건으로 구분됩니다.

어떤 교회에 어떤 지점에 등록해서 “안”에 놓여지게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사건이 터지면 안에 있고, 예수님사건이 터지지 않으면 아직까지 그 사건이 터지지 않으면 여전히 밖에 머물러 있는 겁니다. 그 사건이 사도바울 같은 경우에는 다메섹 사건이 되는 겁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 제자들에게 사건이 일어났잖아요. 엠마오로 제자들이 가는데 어떤 낯선 사람하고 이야기를 하고 가는 거예요.

나중에 식당에 가서 식사하고 나서 보니까 예수님께서 변신을 하는 겁니다. “00V 변신쫙! 어? 예수님이네!” 그때는 만나서 현미경으로 분석하듯이 분석해서 깨달은 것이 아니라, 그러니까 내쪽에서 믿으려고 애써서 믿은 것이 아니라, 주께서 눈을 열어 주니까, 눈을 열어주는 사건이 임하니까, 그 사건안에서 너무나 쉽게 예수를 믿는 거예요. 너무나 쉽게. 예수 믿는게 어렵다는 사람은 굉장히 수상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안믿는 사람입니다.

번개맞는 것이 굉장히 쉬운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은 이미 번개를 맞는 사람입장에서는 굉장히 쉬워요. 로또복권 당첨되는 것이 굉장히 쉬운 사람이 있어요. 로또복권당첨된 그 사람에게는 굉장히 쉬워요. 어느정도 쉬우냐 하면 아무것도 행한것도 없이 그냥 당첨되어 버렸어요. 그래서 구원받는 것, 천국가는 것은 아무것도 행한것도 없이 거저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무지 무지 쉬워요. 다만 중요한 것은 그 사건 때문에 쉬운것이지 그 사건없이 내힘으로 하려면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를 바늘구멍으로 집어 넣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이것은 “사람으로는 할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대목에서 강의하는데 제가 상당히 힘들게 됩니다. 제가 이런식으로 강의하게 되면 이런 질문이 나옵니다. 나중에 할 질문이지만 미리 댕겨서 해보면 이렇습니다. “그러면 교회 50년 다녔어도 그 사건 안터진 사람은 지옥에 가야만 합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은 “왜 그게 기분 나쁩니까?” 이 질문과 답변이 굉장히 어려운 질문과 답변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저 아버지! 저는 왜 들창코가 아닙니까?”이렇게 묻습니다. 아버지가 답하기를 “왜? 들창코 못되어서 기분 나쁘나? 들창코가 되면 애들이 놀릴텐데 기분 나쁘나?” 아들이 답하죠. “기분 나쁩니다” 그렇게 들창코가 되는 것이 기분이 나쁘다는 사람은 이미 들창코라고 봐도 괜찮아요.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반대로 이야기하죠. 아버지 왜 저를 들창코로 만들었습니까? 왜 들창코 되는 것이 기분나쁘나? 기분 나쁩니다. 이 사람은 이미 자기 판단기준에 들창코는 나쁜것이고 들창코 아닌 것은 좋은 것이라는 판단기준이 되어 있지요? 이미 되어 있지요? 그러니까 인간은 이미 자기자유의지를 맘대로 남용하면서 활용하고 있는 거예요. 주님에 대해서 자기 나름대로의 선택기준을 가지고 접근하고 있는 겁니다. 나를 구원하지 않는 예수를 나는 결코 믿지 않겠다는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머리 나쁜 분들은 내말 못알아 듣습니다. 이미 안경집을 자기가 딱 끼고 있는 거예요. 그래놓고는 더 좋은 안경집을 내놓으라는 이것이 말이 안되잖아요. “더 좋은 안경집을 내놓으세요”. 그렇게 요구해 놓고는 “그래 여기 있다. 가져가라.” 하면 “아! 싫다. 싫다.” 이러는겁니다. 이미 자기가 쥐고 자기가 메시아를 만들어 내고 있고, 자기의 구세주가 이미 확정되어 있는데 거기에다가 사도바울이 믿는 예수를 전하니까 없어서 안믿는 것이 아니고 이미 있기 때문에 안믿는 거예요. 이미 자기것이 있기 때문에 들어올 자리가 없어서 안믿습니다. 자기 나름대로의 기준이 확정되어 있기 때문에 자기 입맛에 안맞는 예수이기에 거부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결코 이것은 깊은 예정론 문제가 아니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이 무슨 말을 해도 진짜 최종판단은 내가 내리겠다는 이 말 아닙니까? 최종 판단은 내가 내리겠다는 그런 인간을 하나님이 싫어하겠다는데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고 “신이시여 좋은 메시야를 보내주세요. 그러나 최종점검은 내쪽에서 점검합니다” 이미 자기쪽에서 최종결정을 내리겠다고 하는 이상은 거기에다가 십자가를 전하고 뭘 전해도 이미 자기가 꽉 차있는데 거기 무엇도 들어갈 틈이 없지요. 그래놓고는 핑계대기를 “그것은 진짜 예수님이 아니고---” 라는 식으로 자꾸 핑계를 대는 거예요.

그래서 정답은 뭐냐. 죽여버리는 겁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그런 종내기밖에 안태어나요.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판단하고 내가 선택하고 내가 복음을 다 측정하고 내가 알아서 내 취향에 맞는 복음을 내가 알아서 채용하겠다는 이런 인간을 죽이는 겁니다. 날마다 죽이는 거예요. 그게 뭐냐?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로마서 1장 3절이 있는 겁니다. 예수님도 죽고 난뒤에 성령으로 부활되셔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입은 거예요. 예수님께서 우리보고 선택하라고 쟁반에 담겨져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방식은 우리보고 선택하라는 식의 미스코리아 후보자같은 식으로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날뽑아 달라든지 날밀어 달라든지 이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런 법을 세운적이 없습니다. ‘가만있어 보자. 저 예수가 좋구나’ 이런 방식으로 사람을 구원한적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신학자들이, 목사들이 이 십자가를 몰라요. 십자가를 모릅니다. 그들에게 십자가를 전하면 십자가를 선택대상으로 알고 골라잡으려고 합니다. 십자가를 선택의 대상으로 알고 있는 거예요.

“아이고 좋다. 믿자.” 안셀무스 같은 경우는 “십자가는 대속이기에 믿어야 한다. 믿자.” 이런식입니다. 안셀무스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십자가는 뭐냐? 십자가는 우리죄를 대신한 십자가이기에 믿어야 한다.”고 그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것은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런식으로 믿는 십자가는 아니예요. 진짜 십자가는 내가 선택해서 십자가를 믿겠다는 나가 십자가앞에서 이미 살해당해 마땅하다는 그것을 수용하는 겁니다. 그따위 사고방식을 가지고 구원받겠다고 나서는 이런 나는 진짜 죽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서울에 가면 전철이 있습니다. 전철의 특징이 뭐냐 하면, 전철이 아무리 빨리 달리고, 구로동 가고, 안산가고, 수원가고 어디를 가도, 전철은 그 꼭대기에 전선에서 매달린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전선에서 한시도 벗어난 적이 없는 지하철입니다. 우리가 어디가서 무엇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든지 간에 우리 등허리 위에는 고압선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 죽음이라는 고압선이 흘러서 "지지지지직“ 막 지지는 겁니다. 죽으라고 막 흘러요.

왜냐하면 태어날때부터 뭐든지 내가 선택하는 것이 주특기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뭐든지 내가 선택해야 되요. 우리는 마음껏 자유의지를 발휘하는데서 인생의 사는 보람을 느끼기 때문에. 그래서 로마서 1장에서는 “이 아들은 육신으로서는 다윗의 혈통으로 나셨고 성령으로서는 육신가운데 부활함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합니다. 부활이라는 것은 육신이라는 층에서 성령이라는 다른 층으로 이동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다.

그러니까 어떤 인간들만 아들을 믿을수 있다? 예수님처럼 죽었다가 성령으로 함께 하지 아니하면, 함께 하신 예수님과 함께 있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그 코스를 그대로 따라가지 아니하면 주님을 만날수가 없도록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서 어떻게 구원받는다는 그 코스를 그대로 진척하고 진행시키는 겁니다.

예수 안에서는 정죄함이 없습니다. 왜냐?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예수와 함께 죽었습니다. 새삼 스럽게 “죽어라 죽어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정죄라는 것은 죄값이 사망이기에 죽여야 하는데 이미 죽은자이기에 또다시 죽은자보고 죄를 물을수가 없지 않습니까? 이게 유월절 아닙니까? 유월절안에서 이미 어린양의 피가 있었다면, 그안에 있는 어떤 인간에 대해서도 더 이상 죄를 묻지를 않는 거예요. 이미 죽은 것으로 간주하고 넘어가 버린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죽었다는 말을 이해를 못하고 있는 거예요. 어디까지 죽어야 하는가?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 까지 죽어야 한다는 그 사실을 인정못해요. 주님이 주신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게 된다는 그것을 수용해야 할것인데, 예수보고 내가 믿겠다고 달라드는 것은 또다른 행함의 연장이죠. 나는 펄펄 살아야 한다는 그것을 큰소리로 외치는 거예요. “나는 죽이면 안됩니다. 나를 죽이면 나는 죽습니다.”고 하는 거죠.

“내가 죽쑤면 내가 죽습니다”는 그 말은 맞기는 맞는데 “내가 죽으면 나는 안됩니다”는 그런 인식가지고서는 예수님의 그 십자가의 의미가 어떻게 예수안에 있는 자는 정죄함이 없는지를 알길이 없고, 두 번째로 왜 예수안에 없는 사람은 꼭 정죄함을 당할 수밖에 없는지 그 기초를 닦을 길이 없어요. 남은 2분동안에 할 것은 다윗의 혈통이 무슨 뜻을 가지고 있는지를 하겠습니다.

다윗의 혈통이라는 것은 반드시 전제되는 것이 있습니다. 사울의 혈통이 있어요. 사울이 1대왕이고 다윗이 2대왕입니다. 누가 봐도 그래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런 식의 계보를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사울을 뽑을 때의 그 노선과 다윗을 뽑을 때의 그 노선이 다르기 때문에, 1대, 2대 이런식으로 연결지을수가 없다는 겁니다. 사울과 다윗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사울은 인간들이 요구해서 뽑은 왕이고, 다윗은 인간의 요구를 거부하고 금지한다는 하나님의 요구가 담겨있는 것이 다윗왕입니다. 그래서 다윗왕과 사울왕은 연결할 수가 없어요. 구체적인 것은 5분쉬고 계속 하겠습니다(*).

우리교회(IP:220.♡.176.151)

07-01-17 18:21

겨울수련회 로마서 2강 녹취 이름 : 오용익

2007 겨울수련회 로마서 강의 2(이근호 목사)

인간이 하나님께서 금지한 선악과를 따먹은 이상은 더 이상 금지할 법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조차 인간의 자유의지를 빼앗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로마서 1장에 보면 중요한 단어가 나옵니다. “내어버려두사”(롬 1:24, 26,28)

(로마서 1:24-25)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내어버려 두사” 방치입니다. 방치하는 거예요. 그냥 내어버려 두는 거예요. 1장에 내어버려두심이 나오고 2장에 가면 저주가 나옵니다. 3장에 가면 심판이 나옵니다. 무슨뜻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심판아래 두게 하심”이라는 것입니다. 즉 심판아래 갇혔다는 거죠.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이렇게 진행되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빼앗을 의향이 없다는 뜻입니다.

네 마음대로 해보라는 거죠. 네뜻대로 마음껏 해보라는 겁니다. 그 어떤것도, 그 어떤 인간의 행동으로도 율법을 탈출하는 일에 성공한 경우는 없다는 겁니다. 예외없습니다. 사울이 아무리 잘못했다고 자기 행동을 회개하고 반성해봐도 그것으로 다시 왕의 자리로 복귀되지 않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서 참 신기해할만하지 않습니까? 사울이 울면서 사울의 옷자락 찢어질 정도로 잡아 당기면서 울어도 다시 복귀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다윗 같은 경우에는 방치나 저주로 인해서 왕이 되는 것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이 테두리, 이 방식과 다른 아주 엉뚱한 방식으로

“너! 왕 해!”
“제가 왕입니까?
“네가 왕이야”

그걸로 끝나 버렸어요. 그냥 왕 하라는 거죠. 이것은 어떤 테두리냐 하면 사울처럼 울어도 울어도 다시는 왕으로 복귀가 되지 않는 그런 테두리가 아니라, 자기쪽에서 무슨 짓을 해도 그왕의 자리가 취소되지 않는 그런 방식으로 “너는 왕 해!” 이렇게 되는 겁니다. 희한하죠. 같은 왕인데 어떻게 이렇게 다를까요? 이것을 다윗은 잘났고 사울은 못났다는 이런 인간의 행함을 가지고 다가서게 되면 그것은 완전히 조작된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겁니다.

그런 하나님은 없어요.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율법에 의해 갇히는. 어떻게 갇혔습니까? 사파리 알죠? 사파리. 사파리의 사자가 자유롭습니까? 아닙니까? 자유롭지요? 에버랜드 사파리에 보면 사자하고 호뢍이 하고 서로 온돌방 차지하려고 싸우는데 거기 대장인 호랑이가 얼마나 까불고 설치는지요. 쿠데타 일으켜서 동물의 왕국이 제 2탄까지 준비되어 있는 모양이던데---. 그것은 아무리 해도 결국 갇혀 있는 셈이 되는 겁니다.

갇혀 있지 않은 인간, 다시 말하면 이 율법마저 금지되지 않은 인간, 율법마저 어떻게 할수 없을정도로 해방된 인간을 가지고 뭐라고 하냐, 이것을 가지고 “율법외의 한 의”가 주어진다고 합니다. 즉 율법외에 다른 의가 주어진다는 겁니다. 로마서 3장 21절이죠.

(로마서 3:21)
이제는 율법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예수님은 어떤 율법에라도 해당없이 자유롭게, 율법의 저주와 심판에서 벗어난 그런 인간상이라는 말입니다. 이 율법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정죄받지 않는 예수님과 율법에 갇혀 있는 인간들 사이에 유일한 통로가 있다면 이것이 다윗언약입니다. 다윗언약! 그 중간 매체로 갇혀 있는 이 안에 사나이 하나 있었으니 그 이름은 바로 다윗입니다. 이걸 가지고 다윗혈통이라 합니다. 다윗혈통!

쉽지요. 다윗혈통이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느냐 하면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다윗에게 “너는 왕해! 너는 왕 해야되!”라고 찍어 주시는데 찍어주실 때 그 능력이 어떤 능력이냐 하면, 일체 율법의 테두리가 없는 율법의 테두리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채로, 혹은 벗어난 채의 지위로, 그러한 신분으로 왕이 될 수 밖에 없는 - 이 말이 제일 적당해요. 왕이 될 수 밖에 없는 - 영생을 얻을수 밖에 없는, 그런 사람으로 찍어 넣은 사람이 다윗입니다.

그 다윗과 예수님의 연결고리가 다윗의 혈통이죠. 이 다윗의 혈통에 해당되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한 사람 한 사람이 전혀 율법의 테두리와 상관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율법과 전혀 상관없이 어떻게 무슨 짓을 해도 용서받는 모습. 이거 미치고 환장할 정도로 기분좋은 일이예요. 무슨 짓을 해도 용서받고, 뭘 해도 용납이 되고요. 다윗혈통안에 있는 인간들이 정말 희한한 인간들이예요.

어떤 행동을 해도 율법으로도 정죄함을 받지 않는 아주 특이한 족속, 그런 특이한 종족이 이 다윗혈통안을 채우게 되는 겁니다. 듣고 보니 그런 혈통에 가입되면 참 좋겠다는 마음이 들면서 기분이 아주 좋아지지요? 그런데 다윗혈통안에 들어 있는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갖고 있는 그 본성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에 미리 앞서서 다윗혈통에 가입되어 있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성이 그대로 들어 온다는 것, 이게 문제예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고난을 미리 땡겨서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좋습니까? 이렇게 묻고 나서 “가하면 예하십시오”라고 동의를 구할 문제는 아닙니다만. 그래서 마태복음 에 보면 예수님께서 아주 희한한 이야기를 했어요. 구약선지자들이 “나”예요 나!, 여호와가 아니고 곧바로 “나”인데, 구약선지자들이 예수 “나”를 위해서 그렇게 고생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이야기를 듣는 바리새인들이 벙 찌는 거죠. 이상하다 저 스무살밖에 안된 청년이 저렇게 건방진 말을 하느냐. 구약선지자들과 저 청년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런데 예수님은 관계가 있다는 겁니다. 다윗혈통안에서 관계가 있다는 겁니다. 여기서 제가 다윗혈통이라는 것을 좀더 풀어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교재 7페이지를 보겠습니다. 위에서 열 번째 줄입니다. “이렇듯 두패로 나뉠 때에는 ‘본 부인과 여종’이라는 구조로 쪼개지고 있지만 법궤를 이동시킬 때에 법궤 사방을 진쳐야 되는 지파별 위치를 보면 거기에도 라헬과 레아의 갈등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본부인과 여종이라는 구조로 쪼개지고 있지만, 라헬과 레아의 갈등구조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서 구조가 여기 몇 개 나옵니까? 서로 관계성 없는 두개의 구조가 따로 나오죠. 한쪽은 뭡니까? 본부인과 여종, 그러니까 열두 지파의 근원적인 기초, 즉 구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본부인과 여종이라는 구조로 구분되고 또 하나는 라헬파와 레아파의 갈등구조로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 이것과 다윗언약의 혈통과는 무슨관계가 있느냐는 거죠.

어떤 분이 이것을 실제로 꼼꼼하게 살펴보면서 ‘설마, 이근호 목사가 거짓말 할 리가 있나’하는 마음으로 공부하면서, 여기에 나오는 법궤를 중심으로 한 지파들의 동서남북 배치등등 이런 이야기들이 다 ‘구라’로 하는 이야기일리는 없는데 이게 정말 이럴까 한 분이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제가 지은 책 「교회를 넘어서」에 구약 에스겔 부분에 나오거든요. 7쪽 중간에 보면 “이 원리에 따라서 성전을 중심으로 하여 여종 소생의 지파들은 북쪽과 남쪽 끝에 땅을 분배받게 되는데 이는 성전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다(단, 아셀, 납달리, 갓). 거기에 비해 정실 부족들은 남쪽과 북쪽에 각각 넷씩 성전 가까이에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구조를 통해, 새 성전이 장차 드러내 보여줄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그 인물은 오직 하늘의 아들에만 지칭함을 지향케 한다.” 고 되어 있습니다.

이거 뭐 맞겠지. 이근호 목사가 틀릴 리가 없으니까. 다들 이렇게 생각들 할텐데, 이것을 ‘과연 그러한가’ 하여 따지는 분이 있었습니다. 참 고마운 일이죠. 지금 본부인에 의해서 출생된 자녀와, 시녀들에 의해서 출생된 자녀의 비율이 8:4입니다. 그리고 언니 레아와 라헬 사이의 구성 비율이 8:4입니다. 라헬이 4명을 낳았다는 말이 아니고, 라헬의 시녀인 빌하가 낳은 자녀가 2명이죠. 라헬이 2명을 낳고, 라헬의 시녀 빌하가 2명을 낳고, 레아가 6명을 낳고, 레아의 시녀인 실바가 2명을 낳고 그래서 레아쪽과 라헬쪽의 비율이 8:4라고요.

그런데 동서남북이라는 것은 분명히 4각형입니다. 네 방향으로 3, 3, 3, 3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신명기 27장에 가면 그리심산과 에발산 양편으로 나뉘어서 그리심산은 저주를 외치고, 에발산쪽에서는 저주를 외치는데, 두패로 그러니까 청군 백군 나뉘듯이 양쪽으로 나눕니다. 그러면 8:4 구조를 6:6 구조로 수정되어야 할 필요가 있거든요. 성경에서는 어떻게 이것을 6:6구조로 수정하느냐 하면, 이게 아주 재미있는데요. 예를 들어 보면 신명기 27장에서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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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