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무성목사님의 글에 대해서 꼭좀 답변 부탁드리겠습니다
손무성목사님의 글에 대해서 꼭좀 답변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름 : 이성근(IP:211.204.3.38)
무지하게 긴글입니다
시간이 되신다면 어린 성도들을 위하여 답글에 답글로 이목사님의 답변을 듣고 싶습니다
바쁘신 목사님께는 죄송스럽습니다. 단순하게 답을 얻고자 하는것은 아니며 다른 의도로 글을 올리는것은 아니니
오해가 없으면 좋겠습니다.
이사람의 글을 읽으면 이런것 같고 저런분의 글을 읽으면 저런것 같은 아직 분변치 못한 지식이오니
부디 밑에 글에 대한 답변을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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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성도의 질문에 어처구니 없는 답변을 보고...
손무성 (Homepage)
2006-12-15 17:53:24, 조회 : 253, 추천 : 9
이 질문은 어느 이름 모를 성도가 한 질문입니다. 이에 대해 오용익목사가 어처구니 없는 답을 했기에 이를 답변으로 비평하며 적는 글입니다.
[ 질문 ]
목사님,
이번 사태를 보니 참으로 목사님들은 많은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이번사태가 저 같은 젖먹이 신자들에게는 정말 두려움으로 다가옵니다. 이 글을 읽으면 그 말이 맞는 것 같고 반론을 보면 다시 그 말도 맞고 도대체가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하는지 ... 그리고 질문과 답변에서도 어린자들을 위하여 쉽게 답변하여주면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번사태도 유익이 참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정립이 안 된 것이 손목사가 제시하는 죄인에 대한 정체성입니다. 즉 왜 성도에게 죄만 나온다고 하느냐? 입니다.
또 하나는 갈2-20을 두고 성도가 “죽었다”고 하는데 그런게 아니라 “사는것”이라고 합니다. 성도는 죽은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해석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목사님께서 손목사와 이목사의 차이를 명쾌히 설명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설명이 많으면 여러번에 걸쳐서 또 시간을 두시고요. 무엇에 뒤통수를 얻어 맞은것처럼 멍하고 답답한 마음을 어찌하지 못해 그러하오니 부탁을 드립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답변]
안 그래도 이 부분에 대해 제가 답 글과 평을 하려고 마음이 갔던 글이었습니다. 오용익목사의 답글에 대한 비평은 질문자가 한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대신하겠습니다.
위의 질문자의 마음을 먼저 읽어보면 정말 안타까움입니다. 자신 스스로 ‘어린 자’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런 분께 어처구니없는 답변을 하고 있으니 정말 마음이 아픕니다.
혹 질문자가 이 답변을 보신다면 진심으로 주님의 마음으로 어루만져 주고 싶습니다. 다시 주님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복음을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위 질문자께서는
1) 죄인에 대한 정체성입니다. 즉 왜 성도에게 죄만 나온다고 하느냐?
2) 갈2:20을 두고 성도가 “죽었다”고 하는데 그런게 아니라 “살고 있다”라고 하며, 손목사는 성도는 죽은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해석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1)의 질문은 성도를 어떻게 보아야하느냐? 하는 것과 성도에게서 죄만 나오느냐?는 질문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성경은 성도를 죄인이 아니라, 의인으로 보고 있습니다.(우리 자신의 입장에서 보면 죄를 범하는 죄인이지만)
로마서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왜냐하면 단번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성도의 죄를 다 씻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7:27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그렇다고 해서 성도가 죄를 안 짓느냐에 대해 성도는 육체를 가지고 있는 동안 죄를 짓는다고 합니다. 바울도 이 문제에 대해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7:21-23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
그러니 성도는 의인이로되 육체로 사는 동안 범죄를 하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는 고민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까지도 예수님께서 다 (이미)해결했다는 것입니다.(성도답게 살게 하려고이지 막 살아라고 해결한 것이 아님...오해 없기를...)
바울은 분명 이런 고민을 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지만 이미 이 문제까지도 해결하신 분이 예수님이시고, 성도가 남은 육체를 사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을 섬기는 긴장관계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근호목사의 십자가신학에서는 이런 긴장관계가 없습니다. 이미와 아직의 긴장관계가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언약의 완성자는 인간이 아니라,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그 분만 구원을 완성했고, 모든 율법도 그 분만 다 이루었고, 성도는 그·분 안에서 죽어 있고, 계속 죽어야 할 뿐 완성을 위해 아무 것도 한 것 없고, 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다 맞는 말 같습니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듯이 언약을 이루심에 대해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이루심에 강조점을 두고 있습니다. 새언약의 완성 역시 주도권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통해 완성하셨습니다. 여기에 인간의 도움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구원 완성 역시 성부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시고 십자가에서 완성한 문제이기(성령께서 보증)에 인간은 구원을 위해 어떤 도움을 준 적이 없다는 것을 강조점을 두고 있습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근호목사가 놓쳐버린 것은 언약의 완성자 안에 성부께서 완성자로 말미암아 인간을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신 문제를 왜곡시켜 버린 것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다윗언약, 새언약의 완성이신 예수님에게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는 인간으로 말미암아 언약을 성취하는 것이 아닌 것에 대해 분명히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이 언약의 성취자의 긍휼로 말미암아 새사람을 만들겠다는 것을 모든 언약 속에 배제하고 있느냐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고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근호목사는 위험하게 이것을 빼버린 것입니다.
고후5:17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 이근호목사 식으로 새로운 피조물을 죽어 있지만 예수 안에서 산 상태라는 그런 식의 새로운 피조물이 아님
그래서 이근호목사는 자신의 십자가 신학을 정리하면서 인간은 ‘여호와의 전쟁’(구약의 진멸전쟁-사사기 등에서 보여주는 전쟁)에서 모두 진멸되어야 하는 존재로만 규정하려 했지(강조점을 여기에 두려다 보니) 선택되어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로서 부른 자들을 하나님의 법을 좇아가야 하는 새롭게 창조된 성도로서 살아가야 하는 것을 배제 시켜 버린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나 가나안 땅의 인간들이나 모두 진멸 대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긍휼을 베푸셔서 구별된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 된 자들이 있고 이들을 향해 율법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근호목사는 위와 같이 인간을 규정해 놓았기에(진멸대상으로서의 인간<이스라엘 백성이나 이방인이나=죄인) 율법 자체는 죄인 규정하는 잣대 그 이상은 아닌 것입니다.(복음과 율법은 단지 대립관계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루터의 입장이라면, 칼빈은 복음과 율법은 대립적이나 연속적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제 입장은 칼빈의 입장이 맞다고 봅니다.)
이렇게 되니 그는 새언약의 완성을 이룬 후의 예레미야 31:31에서 말하는 성도의 마음에 기록한 법, 즉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새 계명(요한1서 2:7)은 성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도답게 살아가야 하는 말씀이라고 하는 것을 부정하게 된 것입니다.
(예레미야31:31-33에서 새언약의 완성의 날에 법은 성도의 마음에 새겨진 바 되어 연속성을 갖게 된다고 말하고 있음)
결국 이근호목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인간의 진멸전쟁에 참여 시켜 자기 자신들도 이렇게 진멸되어야 하는 존재라는 것에만 강조점을 두고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는 것 말고는 더 이상 할 것이 없는 존재라고 정리를 한 것입니다.(‘십자가만 자랑하자’ 이런 식이다) 더욱더 그는 철학에서 말하는 인간 규정(도덕적 인간, 절대 자아를 내세워 신의 자리를 추구하는 인간, 욕망적인 인간...)을 보면서, 죄 아니라고 하지만 죄를 짓고 있는 인간, 도덕적, 윤리적, 무의식적으로 담아 두었다가도 꿈으로 라도 이를 죄로 언젠가는 드러내 보이는 어쩔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근호목사는 자신의 십자가 신학에서 십자가를 말하면서 바울이 ‘십자가 외에 자랑하지 않는 이유’를 고린도전서의 본문을 왜곡시키면서까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를 덧붙여 “하나님께서 계속 인간을 십자가에서 계속 날마다 죽여주시기 때문에 바울은 십자가 외에 자랑하지 않는다" 라는 것입니다. 잘못된 해석입니다.
바울은 그런 의미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근호목사는 자신의 십자가신학의 정당성을 위해 성경까지도 왜곡시켜 버린 것입니다.(참조 : 칼럼- 이근호목사님의 십자가 신학 정립을 위해 잘못 끼운 '십자가'라는 첫단추)
성경은 분명 성도를 의인으로 부르시고, 의인된 성도가 육체를 가지고 있기에 남은 때를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렇지만 육체로 사는 동안은 범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도 자신이 볼때에는 죄를 지으니 죄인이라고 보이지만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지옥 가야하는 죄인으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법적 관계적 의인으로 이미 규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양자로 입적하여 아들 된 자가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아들로서 자격 발탁되지 않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다시 회개하고 아들로 부르신 아버지의 부름에 합당히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아들보고 아버지 저는 어쩔 수 없이 죄만 짓는 못된 놈입니다. 늘 이렇게 하라고 아들 만드신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근호목사는 아버지에게 아들은 ‘늘 죄밖에 못짓는 놈이기에 십자가만 자랑합니다. 말만 하다가 한번씩 성령께서 깜빡 깨워 인식시켜 주면 2-3초 착한 일 하다 또 그것마저 자기 의로 만들기에 또 죄밖에 못짓는 놈입니다. 그러니 십자가만 자랑합니다.’ 라는 식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새 사람 된 성도를 하나님께서 새언약의 완성자 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머리 되시고 우리를 그의 몸이 되었는데 어찌 그 머리가 죄만 만들어 내게 할까요? 그를 수 없습니다. 그렇게 지시 하시지도 않으십니다. 포도나무에 달려 있는 자가 그 나무 열매를 안 맺을 수 없도록 한 관계가 새언약 안에서 새사람인 것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의 소원을 두고이를 행하게 하시는(빌2:13) 관계가 된 자입니다. 머리의 착하심과 동일하게 몸은 공급받으며 이를 알게 하셔서 행하게 하시는 관계입니다.
빌립보서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디도서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베드로전서4:2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그러니 성도는 죄만 짓는 관계로만 있어 ‘나는 죄인입니다.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죄만 짓고 있습니다. 또 착한 일하고는 또 나의 의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잘못되었습니다.’ 늘 이런 식으로 살게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육체로 살고 있기에 범죄 하기에 긍휼을 바래야 하는 것은 당연하며,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백성으로서 육체의 남은 때를 이전에 옛사람과 같이 더러움에 빠져 있을 것이 아니라, 깨끗하게 하신 그의 백성으로서 육체의 남은 때를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이것이 성도에게 남아 있는 육체의 완성된 구원의 목표를 향해 살아가야 하는 긴장관계의 삶입니다. 그렇다면 이 삶이 육체의 구원에 완성에 보탬이 됩니까? 아닙니다. 영혼과 육체의 구원의 완성까지 이루신 예수님께서 이미 첫 열매로 완성시켜 놓았습니다. 그 사실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 성령이 우리 성도에게 오셨고, 예수님은 하늘 보좌 우편에 첫 열매로 가 계십니다. 이 사실은 우리 성도도 이렇게 될 것을 미리 보여 주고 있는 확증입니다.
결국 이근호목사는 묵시가 온 것은 역사를 부정하기 위해서요 그 사실을 보여 준 것이 십자가가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동의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 사건은 역사를 부정하고, 즉 인간의 육을 전면 부정한다는 것 역시 동의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능력으로 성도를 역사 속에 새로운 피조물로 현존하게 했다는 것까지 부정되어야 할 역사로 보았다는 것이 엉터리가 되어 버렸기에 동의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근호목사에게는 성도와 하나님의 관계가 이런 긴장 관계나, 역사 속에 살아가야 하는 현존하는 성도의 삶까지도 다 부정하게 된 신학으로 정리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오직 예수님만 완성했고 성도는 죽었다 말만 자꾸 하는 것입니다.
교인들이나 목회자들이 왜 이근호목사의 말에 슬며시 넘어가는가 하면 늘 죄의 문제와 율법 처리 문제를 고민하던 사람이라면 ‘너 착한 일 24시간 하냐? 너 죄 짓느냐 안짓느냐? 율법 다 지킬 수 있냐?(서신서의 모든 명령어들까지도 율법의 행위로 보고 있음)’ 라고 물으면 안 걸려들 인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는 이미와 아직의 긴장관계 속에서 사는 자입니다. 이미 십자가에서 단번에 영원한 죄 씻음을 받았고, 이미 구원된 자요, 이미 거룩한 자요, 이미 의롭다 함을 입은 자요, 이미 율법을 예수님께서 완성했고, 이미 육체까지도 영광중에 거하여 기업을 누리게 됐음을 머리이신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에 앉아계심을 통해 보여 주고 있습니다....,그러나 새로운 피조물인 성도가 역사 속에서 아직 육체로 살면서 육체의 남은 때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야하지만 죄를 짓기도 합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육체는 구원의 완성을 확증한 육체의 구원을 잡은바를 잡고자 향해 가고 있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하고, 의를 구해야 하며, 새 계명을 좇아 살아가야 하는 자가 성도라는 사실입니다.
성도를“죄와 허물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고”(엡2:1,5) 라는 현재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연합하여 죽고 함께 연합하여 산 존재입니다.
2)그런데도 불구하고 이근호목사는 자신의 십자가가 신학의 정당성을 끝까지 내세우기 위해 성도를 죽은자로 보기 위해 갈라디아 2:20절을 왜곡시켰다는 것 아닙니까!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즉 ‘산 것이 아니요’(die), 죽었다는 의미로 해석해 버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근호목사에게서 성도는 부활 했느냐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되면 성도는 이미 죽었고, 살았다고 할 때 예수님 안에서만 살았다고 보자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성도는 예수 안에서만 부활 되어 있다고 들으면 성도의 현재적 부활을 말하고 있는 것같이 들립니다. 그러나 이근호목사에게서는 성도의 현재적 부활(계속 살아 있는 상태로 있는 부활이 아님)은 아닙니다 오직 육체의 부활만 있을 뿐이라고 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그러니 오용익 목사와 같은 답변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근호목사나 오용익목사 에게서는 성경이 말하는 십자가의 완성으로 누리게 된 현재적 성도의 부활 말하고 있는데..., 성도의 자유, 성도의 안식, 성도의 기쁨, 성도가 믿습니다....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누리고 계시지 성도는 전혀 현재 부활을 누리고 있는 사람이 없고 나중 몸의 부활만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요5:24-29은 성도의 "두 부활"을 다루고 있는 내용으로 보입니다.
특히 25과 28-29을 비교하면 더욱 그러합니다.
25절의 부활은
부활의 때 -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바로 이 때(현재)
부활의 대상 - 듣는 자만
28-29절의 부활은
부활의 때 - 미래의 어느 시점
부활의 대상 -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런데도 심지어 이근호목사는
십자가마을 질문게시판 1351에서 이종철님께서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입니다 어떠한 영혼에서 어떠한 영혼으로 구원받는 것이 영혼의 구원입니까 영혼이 구원을 받는 실상이 어떤 것입니까 라는 질문에 대해
질문게시판 1350번 이근호목사의 답변 내용 “믿음의 결국은 영혼 구원이 아닙니다. 몸의 구원입니다. 후패한 몸에서 예수님처럼 영광스러운 몸으로 구원됩니다.”
이 대답은 성경의 정면적 이탈이요. 이단적 사고방식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왜곡시킬 뿐만 아니요, 빼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1: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결국 이근호목사의 신학은 성도가 죽었다는 것은 결국 성도의 현재적 부활을 부정해 버렸고, 장차 부활 마저도 왜 몸만의 부활을 이야기 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2: 20절의 본 취지와 에베소서 2:1-2, 5절에서의 성도를 살았다고 아무리 말해도 부정하려 드는 그들은 누구입니까? 성경에 기록된 말씀까지도 인용은 하지만 바울과 베드로가 말씀하고 있는 내용까지도 왜곡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성도를 살았다고 말하고 있는데도 죽었다며, 성도의 현재 부활을 부정하고 심지어 영혼의 부활을 거부하고 몸의 부활만을 이야기 하는 그들은 도대체 누구일까요?
복음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 사건을 동시에 말합니다. 이 사건은 성도에게 이미 구원을 완성하셨고, 아직 남은 육체로 살아가는 성도를 위해 영혼과 육체까지 구원을 이루시려했던 것입니다. 이제 성도는 십자가의 능력으로 새사람을 입어 부르심의 부름에 합당하게 성도답게 살아가게 하려 벌어진 사건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도는 이미 현재적 부활의 존재로 보고 있으며, 현재적 죄 용서 받은 자로 보고 있으며, 현재적 구원받은 새 사람으로 보고 있으며, 현재적 삶을 성령 안에서 행하게 하기 위해 육체의 남은 때를 살아가야 하는 자입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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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위 질문자의 질문에 오용익목사의 어처구니 없는 답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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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죽었다 살았다의 개념정의가 십자가안에서 볼때와 십자가밖에서 볼때는 전혀 다른 뜻으로 다가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즉 기존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죽음과 생명이란 개념과 언약으로 파악되는 죽음과 생명이란 개념이 서로 충돌합니다. 십자가는 기존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명관(혹은 영생관)을 가지고 생명이신 예수님을 살해한 내막이 담겨져 있는 십자가입니다. 기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명 혹은 영생관이란, "기존의 자기 있음"을 영원히 존속시켜 보겠다는 욕망에서 만들어지는 생명(영생)관입니다.
이런 생명에서는 어떤 경우에도 "자기자신"만큼은 죽음으로 처리되어서는 안되고, 반드시 생명이 될때에만 즉 내가 살아 있는 상태라야만 모든것이, 즉 믿는 것도 가능하고, 말씀대로 사는 것도 가능하고, 하나님께 찬양하는 것도 가능하고, 신앙고백도 가능하지 않느냐 하는 사고방식이 맞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고 성도가 죽었다고 해버리면, 혹은 죄인이라고 해버리면 죽었다고 하는 성도에게서 나오는 신앙도 죽은 것이고, 죄인이라고 하는 성도의 신앙도 다 죄악된 것이 되기에 자체 논리상 모순된다고 보는 겁니다.
이분의 문제점은 한가지뿐입니다. 새언약의 능력을 믿지 않고 자기를 믿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지 못한 자는 다 이런 상태에서 성경을 볼수 밖에 없는데, 이것이 육적인 안목이라고 사도바울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게 손무성 목사의 사고방식(성경해석)입니다.
이근호 목사님의 주장(성경해석)은
1. 십자가앞에서 이 지상의 모든 인간은 예외없이 죄인이고 죽음인데(고린도후서 5:14)
2. 그걸 알게 되는 경로란 자력으로는 절대 안되고, 오직 십자가의 공로를 담아 오는 성령에 의해서만 파악되는 계시인데((고전 2:14)
3. 성령이 오실때는 반드시 인간의 죽음만 통보하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죽음을 능가하는 속죄의 능력 - 히브리서 9:12에 따르면 영원한 속죄 - 을 두고 두고 행사하려고 아예 내주하시는 식으로 오신답니다(고후 5:21).
4. 새언약안에서의 "영원한 속죄"로 볼때 속죄란 속죄하는 분과 속죄받는 대상과의 영원한 관계맺음으로 파악해야지, 소유개념으로 파악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이런 상태를 일컬어서 성도는 "예수 안에서 의인"이라고 하는 겁니다.
5. 즉 성도란 예수님의 영원한 속죄아래서만 의인입니다. 즉 십자가의 피공로가 적용되는 한에서만 의인일수 있는 겁니다. 그 현실은 본인이 결정한 사항이 아니고, 아버지와 아들간의 약속에 의해서 정한 사항입니다. 그래서 새언약입니다.
6. 따라서 새언약안에서 자기를 볼때, 자기는 영원히 죄인임을, 즉 한순간도 십자가의 공로 없이는 하나님앞에서 의롭다는 평가를 받을수 없는 죄인일수 밖에 없음도 자명하지요.
죄인과 의인의 만남이 가능한 자리
죽음과 생명의 만남이 가능한 자리가 새언약 안이라는, 십자가의 공로가 영원한 속죄로 적용되는 성령안외에는 달리 있을수가 없는 겁니다.
7. 사도바울이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다고 하지요. 은혜가 왕노릇 한다고 하고요. 물론 사망도 왕노릇 하는 겁니다. 인간은 그냥 사망과 은혜 사이를 넘나들지 못합니다. 다만 은혜아래 있으면 그 현실을 문득 문득 깨닫습니다. 사망의 권세도 알고 은혜의 권세도 안다는 겁니다. 죽음을 능가하는 것은 십자가피뿐임을 자랑 또 자랑할수 밖에 없는 겁니다.
8. 그러니 두고 두고 십자가만 자랑하고, 십자가의 공로만 높일밖에요. 여기에 자기에게서 나온 의란 일체 있을수가 없기에, 무조건 죄인이라는 고백이, 죽음이 심판당해 마땅하다는 인식과 고백이 서슴치 않고 나오는 겁니다.
9. 사도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 만나고 나서 깨달은 것이 바로 이겁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한분만 높이기로 한 뜻이 이루어지는 오묘한 비밀이 바로 십자가였다는 겁니다. (로마서 11:33-36)
10. 인간이 자기 생명을 소지하고 있다고 여기니까 자기가 활개치는 줄 알고 삽니다. 사망의 노예의 근성은, 뭐든지 소지해서 활개치고 싶은 겁니다.
그냥 도구로서 종으로서 이용당하는 그런 식의 생명은 인정할수 없다는 겁니다. 인간은 노예일뿐입니다. 사망의 노예.
그러나 십자가의 사랑이 내려 꽂히게 되면
그 십자가사랑의 노예가 되는 겁니다.
십자가 사랑의 포로가 된 사람의 입에서
인간은 죽음이며 저주이며 죄인이며 의가 나올수 없다는 고백이 항상 나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며, 아울러 십자가의 공로만의 의가 되며 생명이 된다는 이 증거가 최종증거가 될수 밖에 없음도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히브리서 2:11).
11. 생명으로 적용해 보면 예수님은 성도에게 성령안에서 "영원히 생명을 공급해 주시는 분"이고 성도는 "영원히 생명을 공급받아야 하는 상태에 놓여 있는 대상"으로서의 관계맺음이 새언약안에서의 관계맺음입니다.(고전 15:22, 요 15:1-6). 하나님은 이상태를 의롭다고 하신 것이고 생명이라고 하시는 겁니다.
12. 새언약안에 있는 성도로서는 손무성목사의 주장들이 참 가당치도 않지요.
1) 죽었다고 해놓고 또 왜 살았다고 하느냐?
2) 죄인이라면서 어떻게 의인이라는 주장을 함께 할수 있느냐?
십자가를 빼버리면 그런 주장들이 맞는데
십자가가 개입되면 도리어 그런 주장들이 십자가를 훼방하는 말이 됩니다.
1) 십자가의 공로를 치워버리고(단회적인과거의 사건으로 돌려버리고, 이준씨의 주장처럼 성령이 새언약의 공로를 두고 두고 적용시킨다는 사항은 외면해 버리고)
2) 잘난 우리 행함으로 신자됨의 신학과, 신자됨의 표시를 만들자는(즉 성령의 역사를 빙자해서, 십자가의 공로가 계속 적용되는 그 자리에 인간의 공로를 집어 넣자는)
사망의 노예로서의 근성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 자들이 예수죽였습니다. 유대인의 사고방식입니다. 선악적사고방식입니다. 자기의를 자기 스스로 챙기겠다는 사고방식입니다.
13. 성도라도 그런 사고방식을 스스로 안할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게 예수 죽인 사고방식임을 성령안에서 무시로 깨닫고 회개하는 사람들입니다.
성도란 한시도 한순간도 예수님과 따로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한시도 한순간도 십자가의 공로에서 벗어날수 없다는 뜻입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이점을 실어서 성도에게 적용된다는 뜻입니다.
14. 손무성 목사가 이근호 목사님에게 대드는 것은
한마디로 십자가만 높이기 위해서 인간은 죄인이라고 하고, 죽음이라고만 했기에, 오늘날 복음 아는 교회가 형편없이 바울의 권면의 말씀들도 무시하면서 방종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가 대드는 논리로 하면, 사도들이, 아니 예수님조차 복음을 잘못 전해도 한참 잘못전한게 됩니다.
그의 논리대로 라면 예수님이 제대로 전했다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방종조차 하지 말았어야 하며, 사도가 제대로 전했다면, 사도는 아무런 핍박조차 받지 말았어야 옳습니다.
그는 이근호 목사님이 전한 복음을 알아듣지도 못한채 자기논리로 재해석 하고 있습니다.
15. 제가 알기에 이근호 목사님이 전한 복음은
1) 십자가가 언약의 완성이기에, 이제 모든 말씀에서 신자는 한치도 벗어날수 없도록, 예수와 같은 고난의 길
- 고생길이 아니고 사도바울처럼 십자가만 자랑하다가 이 세상에서 전혀 알아주지 않고(돈이 안되죠. 생계문제로 연결이 안되는 복음),
도리어 거짓 복음 가진 자들에 의해서 수모 당하는 식으로(이근호는 위험한 인간이니 그 가르침을 추종해서는 안된다고 하죠) -
을 갈수 밖에 없는데
2) 그것도 아주 기쁘게 가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벧전 1:6,8).
16. 그에 반에 손무성 목사가 말하는 복음은 얼핏 들으면 성령받았으면 받은자 답게 제대로 믿자는 소리로 들리지만 그 실상인즉,
1) 이제 십자가만 완성된 복음으로 한 20년 가까이 전해보니(실험해보니) 세상으로부터 먹히지 않는다는 것이 입증되었고,
2) 심지어 나조차 도무지 변화되지 않는 그런 복음이라면 복음자체가 틀렸다고 보여지기에
3) 이제부터는 세상 사람들이 누가 들어도 알수 있는 그런 방식으로 즉 십자가만으로 완성이 아니고, 인간의 행위가 반드시 보태져야 완성된다는 식의 복음으로 전환하겠다는 겁니다.
마귀가 좋아할 일입니다.
17. 이 세상에서 마귀와 마귀들린 인간들이 제일 싫어하는 소리는 하나뿐입니다.
1) 오직 십자가 피만 의가 되며, 어떤 인간의 행위도 의가 되지 못한다는 예수님의 행함만 들어 있는 복음입니다.
2) 이 복음이 하나님의 지혜인 이유는, 이 복음은 성령이 아니고서는 인간의 지혜로는 파악할수 없도록 해 놓은 딱 한가지 것이기 때문입니다.
18. 요즘 손무성 목사가 변질된 복음을 꺼내놓자 마자 많은 사람들이 친구하지고 벌떼처럼 달려드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1) 십자가라는 걸림돌을 빼버렸기 때문입니다.
2) 그들의 주장은 한결같이 인간의 행위도 의가 된다는 것인데 그 원인을 성령으로, 교묘하게 인간의 행위가 의가 된다는 것은 아니라고 빠져 나가는 식으로 사기를 칩니다.
3) 그 성령은 악령입니다. 십자가 복음의 광채를 덮어버리는 악령입니다.
19. 십자가라는 걸림돌을 빼버리면 남는 것은,
1) 인간들이 자기 생명(죽음)을 가지고 활개치는 악마의 놀이터가 되는 순서밖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2) 손무성 목사는 앞으로 십자가마을(생명)이라는 간판을 버젓이 내걸고서, 수많은 사람들을 악마의 놀이터로 꾀여들여서 놀다가 지옥가게 하는 죽음의 마을의 촌장노릇을 하게 될 전망입니다.
3) 손무성 목사는
왜 신자를 죽었다고 하느냐고 합니다.
왜 신자를 죄인이라고만 하느냐고 합니다.
신자가 살았다고 합니다.
신자가 의인이라고 합니다.
4) 십자가밖에서 십자가를 보기 때문에 일어나는 고민이고 모순이고 도무지 못알아 먹겠다는 표현입니다.
5) 이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을때나 가능한 현상입니다.
20. 성령을 못받은채 성경을 보게 되면
1) 자기가 살았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성경귀절 들이대고
2) 자기행위가 하나님께 인정받을만한 행위인지를 입증하기 위해서 성경귀절 동원하는 식으로 성경보고 남에게 전파하는 것뿐입니다.
21. 결론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하는 고백을 한 이사야는 손무성 목사에게 혼나도 한참을 혼나야 할겁니다. 아마 뺨맞을 걸요.신자란 그렇게 뺨맞으면서도 계속 외치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만 의가 됩니다. 따라서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은 죽음이고 심판이고 저주입니다. 회개하라! 이런 사람은 십자가에서만 생산됩니다.
(오용익 목사님의 답변입니다)
이근호(IP:220.♡.214.30)
07-01-07 16:23
악마는 노림수는 십자가의 공로를 무효화 하고 그 자리에 인간의 종교 능력을 삽일시키는데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성도들은 모두 성령받은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분들의 특징은 결코 인간과 인간의 능력에 값어치는 주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불쌍히 여겨서 구원됨'에 분명히 알게 된 자들입니다.
즉 로마서 9:16의 말씀처럼, '인간들이 원함도 아니요 달름박질도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긍휼로만'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악마의 일꾼들은 배후에 악마의 조정을 받아서 이 복음을 물타기 위해 흐지부지 하려고 합니다.
그들이 주장은 이러합니다. "제발 인간의 노고도 가치있다고 인정해 달라"는 겁니다. 그들은 십자가 복음만 붙들기가 싫은 겁니다. 그들이 그런 주장을 대는 이유는 단 한가지 뿐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십자가 복음을 훼손하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나야만 하는 저주받은 종자들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열심히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십자가 복음을 묵사발 내어야 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