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사랑의 적용과 배제
하나님 사랑의 적용과 배제
이름 : 박윤진(IP:58.141.242.3)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에게 적용되면
인간이 그 동안 경험하고 정의해 왔던 거짓 사랑과 거짓 저주는 모두 철거된다.
인간이 행한 사랑과 저주의 분리는
선악과의 지붕 아래에서, 즉 죄 아래에서의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어떤 이에게 하나님의 사랑(A)이 적용되었다고 하자.
이 사람은 A가 사랑인지 저주인지 어떻게 판단할까?
그 동안 자신이 겪었던 경험과 생존하기 위해 부단히 공격받고 공격해왔던 지식들
아니겠는가?
즉, 자신의 죄를 잣대로 A를 사랑으로 혹은 저주로 느끼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인간은 죄를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판단한다.
인간이 살아있는 상태로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고 감사하고 전달한다는 말은
죄를 가지고 볼 때, 이해되고 감사하고 전달한다는 말이며
결국 이 또한 죄의 산물일 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을 죽이는 것을 그 시작으로 한다.
인간의 죽음 안에 참 사랑과 참 저주를 스스로 가르치시며 행하신다.
이것이 성령의 활동이다.
그럼, 이제 이러한 참 하나님의 사랑이
왜 선택적/차별적으로 일어나야 하는가에 대해서 말해보자.
결론부터 말한다면,
하나님 사랑의 선택적/차별적 적용의 최종적 근거는
오직 하나님께서 그렇게 행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라는 것 외에는
전혀 없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신다.
출애굽기 33장 19절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여호와는 은혜 주실 자에게만 자신의 이름으로 은혜주신다.
그리고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그렇게 만들고 마신다.
여호수아 11장 20절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로 저주받은 자 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 에게 명하신 대로 진멸하려 하심이었더라
하나님의 사랑이 선택적/차별적으로 적용됨으로써 보다 선명하게 드러나는 결과는 아래와 같다.
즉, 하나님의 사랑이 누군가에게는 적용되고(성도)
또 다른 누군가(비성도)는 배제됨으로써
성도는 사랑과 저주의 주도권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음을 철저하게 알게된다.
물론 비성도는 그 주도권이 자신에게 있다.
또한 성도는 자신이 구원받게 된 것을 전적인 은혜로만 실감하게 되는데
그 현실적 차이물이 바로 비성도인 것이다.
성도는 비성도와의 비교를 통해서 나의 나됨이 은혜임을 안다.
성도 자신 또한 비성도와 함께 동일한 심판을 받아야 마땅한 자로서의 나임을
알게되는 것이다.
비성도의 본성은 바로 성도 자신의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현재 성도와 비성도의 차별성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의 적용됨과 배제됨 뿐이다.
하나님의 사랑 외에 다른 조건, 자격, 외모, 노력이 구별의 표준이 될 수 없다.
이로써 선악의 구별은 온전히 하나님만의 영역임이 분명해 지는 것이다.
성도는 이러한 선악의 구별을 하나님께 위임받은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善의 場으로 끌려들어온 자이다.
그것을 비성도를 보면서 보다 절실하게 배우며 기뻐한다.
이것은 비성도에게는 없는 것이 성도에게는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기쁨이 아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선악관과 함께 하나님의 사랑안에서
죽었기 때문이다.
성도는 자신이 살아있다는 전제 하에
비성도와의 소유물을 비교해서 즐기는 주체가 이미 죽었다.
위에서 말한 성도의 기쁨은 차별적으로 대우하신, 즉 나를 죽이신
하나님의 사랑 자체에서 발생하는 기쁨이다.
나는 죽었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 자체에서 발생하는 기쁨을 느낄 수 있는가라고
혹자가 반문했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나, 그 기쁨을 느끼고 있는 내가
여전히 있지 않느냐고 말이다.
앞서 말했듯이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을 죽이시는 것으로 시작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 자체에서 발생하는 기쁨을 누리는 주체는
예수를 머리로 하는 "한 몸"이지
죽은 성도의 주체가 아니다.
한 몸과 구별된 나의 기쁨을 주장하고 싶은 이유는
여전히 죄인된 나에게 유리한 것과 불리한 것을 구별하여 소유하려는
왜곡된 선악관 때문이다. 한 몸을 빙자한 자기 영역 확보이다.
성도는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안에서 한 몸이 되어
참 사랑과 참 저주를 함께 배운다.
그리고 자신이 저주의 대상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된 것을
감사하고 기뻐하며 찬양한다.
머리되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그렇게 이끄신다.
이제 성도에게 적용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말해야 할 차례이다.
사랑은 여기에 있다.
우리에게는 없다.
요한일서 4장 10절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그렇다!
하나님의 사랑은 화목제물되신 예수님 뿐이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 뿐이다!
성도는 십자가 지신 예수님과 "한 몸"으로 살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을 죽이는 것으로 시작하여
한 몸으로 살리는 것을 그 완성으로 한다.
이 다발 전체가 십자가 안에서 터져 나온다.
보라!
십자가 외에 그 어떤 것을 자랑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