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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강의(06. 12. 22) 둘째시간 녹취록 올립니다.자유게시판마태복음

광주강의(06. 12. 22) 둘째시간 녹취록 올립니다.

이름 : 서경수(IP:221.164.110.134)

광주 강의(06. 12. 22) 21-2

지난 시간에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마귀의 자녀가 왜 등장하느냐?’ 라는 이야기부터 시작했지요?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 모든 인간을 다 사랑해야지 누구를 마귀의 자녀라, 도대체 사랑에서 마귀의 자녀가 도무지 나올 구멍이 없잖아요? 하나님은 사랑인데 마귀의 자녀가 나올 수 없단 말이지요.

그런데 어떻게 마귀의 자녀가 나오는가?

이것은 바로 우리의 잘못된 오해로부터 시작되었는데, 내 중심으로 사랑하니까, ‘나’라는 것이 먼지 있으니까 “무조건 ‘나’는 잘되어야 돼.” 라는 인식을 갖고 있으니까, “나는 인간이고 나만 잘 되면 안 되고 같은 인간은 다 잘 되어야지.” 라는 인식을 갖고 있으니까 “사랑이라면 다 몽땅 사랑하고 구원해야지.” 라는 생각을 한단 말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이 뭔가 하면, 마귀의 자녀는 필히 마귀가 되어야 하고, 하나님의 자녀는 반드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사랑인데, 왜냐하면, 그래야 “나는 구원 받고 싶습니다.” 라는 주체가 다 날아가 버리기 때문에 그래요.

주체가 날아가야 다시는 주체 이야기를 안 할 것 아닙니까. 주체라는 것은 선악과를 따 먹고 난 뒤에 생긴 현상이거든요. 그렇지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쟤는 천당 가는데 나는 왜 지옥 보냅니까?” 라는 소리가 안 나오게 만들어야 돼요. 반대로 “나는 지옥 가야 하는데 왜 천국으로 갑니까?” 라는 말을 할 필요 없게 만드는 거예요.

이것이 성경 어디에 나오느냐? 마태복음에 나옵니다. 25장 35절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절에 보면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오히려 묻지요? ‘제가 언제 주님한테 그렇게 했습니까?’ 라고 묻지요. 이것은 결국 무엇을 뜻합니까? 주께서 하게 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이지요. 나는 매직으로 글을 썼는데, “너는 그림도 잘 그리고 --” “주여, 제가 언제 그림을 그렸습니까?” “내가 그림 그렸다고 하면 그림 그린거야”

주님의 해석은 우리의 해석을 능가해서, 주님이 일방적으로 해석하고 일방적으로 구원해 가시는 거예요. 성도는 그것을 느낄 뿐이지요. 내가 경건한 것도 없고, 일한 것도 없는데 주께서 복을 주셔서 의인 되었다는 것을 성도는 알고, 누구는 모른다? 마귀의 자식들은 모르지요.

여기 마태복음 25장에 마귀 자식 나오잖아요? 이 사람들은 왼편에 있는 자들인데, 지옥 가잖아요. 지옥 가면서 뭐라고 합니까? 44절에 보면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이렇게 나온단 말이지요.

주께서 안했다고 하면 안 한 거예요. 이 말은, 누가 했느냐, 안 했느냐 하는 주도권을 누가 쥐고 있다? 우리 주님이 쥐고 있는 거예요. 이 말은, ‘너는 무엇을 했고, 나는 무엇을 했다’는 해석 권리가 우리에게 있다, 없다? 우리한테는 아예 없는 거예요. 왜? 우리 주체를 박탈해 버리니까.

우리 주체를 박탈시킨 거예요. 그래서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롬4:6)에 대하여 다윗이 말했지요.

주님께서 어떤 자를 버리기로 작정하시고, 어떤 자를 구원하기로 작정했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하면, 너희들이 이 지상에서 주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나는 일체 거기에 대해서 배제해버리겠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배제하고 일방적으로 건질 자를 건지는데--.

제가 오늘 차타고 오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고린도후서에 이런 말씀이 있잖아요.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구원 받을 자에게는 향기고, 망하는 자에게는 그것이 악취가 된다고 했지요?

이 말씀은, 악취가 되게 하시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습니다.’ 라고 할 때, 이미 구원 받은 사람은 ‘아이고 고맙고 감사해라.’ 이렇게 받는데, 안 믿는 사람은 ‘웬 입 냄새냐?’ 이렇게 나온단 말이지요. 이것은 그 사람이 나빠서가 아니라 악취로 느끼도록 의도적으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본인이 악취로 안 느끼고 싶어도 악취로 맡아지도록 주께서 열심히 일하신 거예요. 망하는 자에게.

망하는 자가 인간성이 더러워서 지옥 가는 것이 아니고, 망하게 하시는 분 때문에 지옥 가는 겁니다. 모두가 안 믿는 눈치인데, 진짜예요. 진짜입니다.

여호수아를 봅시다. 11장 20절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로 저주 받은 자 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진멸하려 하심이었더라”

그들에게 저주 받는 자 되게 하시는 겁니다. 적극적으로 나서서 저주 받는 자 되게 하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의 사랑이 사랑답게 하기 위해서 열심히 이렇게 하는 겁니다.

구원 받는 사람은 사랑을 받아 챙기는 사람이 아니고, 자기 자신이 곧 사랑 되게 하시는 거예요. 사랑을 따로 챙기는 것이 아니고 사랑 속에 들어오는 겁니다. 사랑으로 구원 받고, 저쪽은 사랑으로 저주 받는 거예요. 이것을 물론 믿음이라고 하지만.

이사야 22장 14절을 봅시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친히 내 귀에 들려 가라사대 진실로 이 죄악은 너희 죽기까지 속하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 죄악은 너희 죽기까지 속하지 못하리라”는 것은 죽기까지 용서를 안 해 준다는 말이거든요.

한 곳 더 찾아봅시다. 시편 69편 27절

“저희 죄악에 죄악을 더 정하사 주의 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 라고 주께서 기도하셨지요? 절대로 주의 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28절에는 “저희를 생명책에서 도말하사” 라고 나옵니다.

정말 구원 받은 사람은 ‘내가 어떻게 해서 구원 받았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어떤 일을 실시해서 그 실시한 것이 나에게는 이렇게 도착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제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진도를 좀 나가 봅시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왔으면, 그 다음에 3장 1절에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자, 이 대목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상대방을 안다, 모른다를 누가 결정합니까? 내가 오 목사님에 대해서 안다, 모른다를 누가 결정하는 거예요? ‘나’라는 주체가 결정하잖아요? “너, 저분 알아?” “응, 알아.” “누가 알아?” “내가 알아.”

항상 안다, 모른다의 주체는 누굽니까? 내가 주체가 되겠지요.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은 여전히 주체가 누굽니까? 자기 자신이죠. 자기 자신이 주체가 된 이상은 어떤 경우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지요. 이해되십니까? 이 말은, 예수님은 자기 자신이 판단을 내리는 사람한테는 어떤 경우에도 모르는 식으로 움직이신단 말이지요.

자기가 주체인 사람에게는 어떤 식으로라도 발각되지 않는 그런 예수님으로 일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확실한 것은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에서 “우리”는 누굽니까? 성도 아닙니까.

성도가 있고 비 성도가 있다면, 성도에 대해서 안 믿는 사람들이 나름대로 분석하고 판단하고 이해하겠지요. 그렇게 해서 아는 것은 성도를 바로 아는 것입니까, 모르는 것입니까? 모릅니다. 그러니까 ‘네가 아무리 판단하고 분석해도 헛것이고 엉터리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를 어떻게 알아보는가? 성도가 비 성도에게 이야기하면 압니까? 이렇게 해도 몰라요. 이것이 중요해요. 성도가 이야기해도 그들은 몰라요. 왜 그러냐 하면, 성도와 비 성도 사이에는 원래부터 서로 모르는 사이 되게 하도록 주님이 일부러 그렇게 하신 거예요. 어떻게? 주님을 모르는 사람은 절대로 성도를 모르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불신자들이 이런 소리 하는 것은 거짓말이에요. “나는 예수님은 모르지만 당신 보니까 진짜 신자 맞구나!” 이것은 다 거짓말입니다. 불신자들도 납득이 되는 성도는 성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불신자일 확률이 많아요.

신자는 얼마나 꽁꽁 숨었는지 예수를 모르는 사람의 눈에는 절대로 성도로 드러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불신자 눈에 성도가 아닌 것처럼 보여야 그게 성도에요. 절대로 성도처럼 보이지 않아야 그게 성도에요. 왜? 모르는 놈한테는 몰라요 돼요.

주님을 모른다면 성도도 몰라요. 주님과 성도는 함께 가는 겁니다.

말을 바꿔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불신자라고 이야기할 때 그러면 그 사람이 불신자입니까? 어떤 사람이 불신자라고 이야기해서 불신자가 아니고, 성도가 불신자라고 했을 때 불신자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성도인지 불신자인지 어떻게 아는가? 그것은 그 사람이 제시하는 주님이 어떤 주님인가를 제시할 때, 주님을 아는 자가 불신자라고 할 때 그 사람은 불신자 맞습니다. 그러나 주를 모르는 자가 ‘저 사람 불신자다.’ 라고 할 때는 그것은 확실치 않습니다. 진짜 불신자를 불신자라 할 수도 있고, 성도를 불신자라고 욕할 수도 있어요.

결국 이 본문 말씀은, 성도가 불신자에게 납득시키려고, 이해시키려고 애쓸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나는 성도라고 스스로 납득하려고도 애쓰지 말라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요한 1서에 나와요.

성령이 와서 “너는 성도다.”라고 하면 그것으로 만족해야지, 성령이 아닌 ‘내가 따로 성도 맞다.’고 백날 해봤자 그래서 성도 되는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말은 맞는데 뭔가 와 닿지는 않습니까?

요한 1서가 이렇게 힘들어요.

1절 다시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뭘 알지 못한다? “우리를 알지 못함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를 알지 못하는 거예요. 결국 성도는 자신을 세상 사람들에게 납득시키려고 애쓸 필요 없단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타협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란 말이지요. 네가 성도된 것을 세상 사람들이 안 알아줘도 괜찮단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를 구원해서 성도 되게 하신 주님은 어떤 주님이신가? 철저하게 불신자들을 만들어 내는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러면 ‘나’라는 주체는 뭘 합니까? 내가 할 게 뭐냐를 따진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셨다는 것에 대한 모독이고, 불신자들이 그렇게 하지요. 이제 문제가 풀렸지요?

불신자들은 주님을 모르지요? 그러면 불신자와 주님 사이에 뭐가 성립됩니까? 죄가 성립되는 거예요. 다른 말로는 범죄. 범죄는 불신자가 있어야 주님과의 관계에서 범죄가 비로소 무엇인가가 드러나지요.

죄가 뭐냐? 불신자와 예수님의 관계, 이것이 죄 아닙니까. 불신자는 예수를 모르잖아요. 그게 범죄란 말이지요. 그런데 성도는 주님을 알지요. 그게 뭡니까? 그것이 ‘사랑’이고 ‘의’지요. 그러니까 성도는 범죄 합니까, 안 합니까? 할 수가 없는 거예요. 뭐가 어렵습니까? 반복해서 죄 안 짓는 그런 것이 아니지요? ‘주체가 어떻게 하는가’ 그런 문제가 아니지요?

불신자가 주님을 대하는 태도가 뭐라고요? 그것이 죄 아닙니까. 그런데 신자는 죽었다 깨나도 불신자처럼 주님을 대합니까, 안 대합니까? 안 대하지요. 신자도 도적질하고 속이고 다 하지요. 하지만 주님을 버립니까, 못 버립니까? 못 버리잖아요. 주님께서 선택했기 때문에 버리고, 안 버리고 할 권한이 우리에게 없습니다.

성도에게는 예수님을 버릴 권한이 없어요. 우리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어요. 마치 불신자가 예수 믿을 능력이 없듯이 우리는 예수님을 버릴 능력이 없어요. 암 걸리고 뭘 하고 해도 우리가 주님을 버릴 수가 없다고요. 저주가 풀리면 다시 저주를 받을 능력이 없다니까. 저주 받을 기회조차 없어요. “주여, 제가 무슨 짓을 해야 저주 받습니까?” 안 돼요. 끝났어요. 무슨 짓을 해도 저주가 없어요.

저주 받을 놈은 무슨 짓을 해도 복을 못 받듯이, 반대로 성도는 무슨 짓을 해도 저주가 오지를 않아요. 저주는 안 오고, 용서가 오고 사랑이 오고.

저는 순대나 개고기 이런 것을 못 먹어요. 오리고기도 안 좋아 하는데. 웨이터에게 “웨이터! 개고기 2인분” 배달된 것을 보면 ‘영덕 대계’고. 나는 멍멍 개고기 달라고 했는데, 바다 계가 오고, 잡채가 오고.

“아니, 개고기를 달라니까.” “아니, 주인님이 개고기를 주지 말라고 하는데요.”

저주를 달라고 해도 저주를 안 주세요. 저주가 없데요.

왜냐하면, 이미 범죄한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저주가 오지를 않아요. 오는 것은 맨날 축복이라. 주님의 용서와 사랑 이런 것만 와요. 이것을 네 자로 “기쁜 소식”이라고 합니다. 어디서 무슨 짓을 해도 저주가 없다는 것. 이것이 기쁜 소식입니다.

‘네가 뭐 했는데?’ ‘아무것도 안 했어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축복 받는 거예요. 그러면 저쪽 사람이 지옥 가는 것은 무슨 짓을 했기에? 아무것도 안 했는데 지옥 가는 거예요. 저 사람이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지옥 가는 것처럼, 나는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천국 가는 거예요.

이것을 성경에서는, 인간은 원래부터 지옥 가도록 되어 있어요. 왜? 아담 안이니까. 우리 조상 아담이 범죄했으니까. 지옥 가도록 되어 있는 것을, 아무것도 한 것 없는 우리를 그냥 천국으로 빼돌린 거예요. 주께서 사랑하셔서.

아벨이 제사 지낼 때 응답 받는다는 보장이 없었습니다. 그냥 일방적으로 응답하신 것은 하나님이고, 가인의 제사를 안 받는 것 그것도 하나님 마음대로고. 그걸 오야(대장, 보스?) 마음이라고 하지요.

왜 그렇게 합니까? 라고 물으면, “너와 내가 한 몸이니까” 머리에게 해당되는 것이 몸에게 해당되니까 한 몸이지요. 옛날 선악과 따 먹고 깨어졌던 한 몸이, 예수 그리스도 -마지막 아담- 안에서 한 몸이 된 거죠.

고린도전서 15장을 보겠습니다.

아이고, 오늘 빠진 사람이 많아서 영 분위기가 --

22절에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여기 “모든”이란 말을 왜 썼습니까? 아담 안에서 아담만 죽은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죽었다는 말은, 모든 사람은 자기의 주체적 노력과 의지에 상관없이 아담 안에 있다는 이유 때문에 무조건 다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본인이 예수를 믿고 사랑하는 것과 관계없이 그리스도께서 원하는 자는 다 살리십니다.

이 “모든”이란 말은, 개개인의 개성 발휘, 자기 결심, 자기 결단 이런 것들이 일체 반영된 적이 없다는 말입니다. 자기가 구원 받는데 반영된 적이 없어요.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부활이라는 지남철(자석)이 동원돼요. 그래서 누가 구원 받습니까? 그리스도에게 붙은 자.

여러분, 쇳조각이 자석의 힘을 이길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 이기죠. 당기는데 지가 무슨 힘으로 떨치고 나오겠습니까?

부부싸움에서 여자가 불리한 것이, 여자는 머리가 길잖아요. 남편이 술 먹고 와서 아내 긴 머리를 잡아당기는데 몸이 안 따라올 수 있겠어요? 머리카락이 얼마나 강한데 안 빠지잖아요. 가만있으면 빠지지만 당기면 안 빠져요.

머리 쥐고 당기는데 딸려가야지. 무슨 수로 구원에 반항합니까? 지남철이 당기는데 쇳가루가 어쩔 수 없지요. 23절 끝에 나오지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붙었다는 말이 뭡니까? 지남철과 쇳가루의 관계 아닙니까?

그러니까 성도는 ‘나 잘랐다.’가 아니라 그 관계를 증거하는 사람이 성도예요. 성령님도 중보자 위주, 관계 위주예요.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셨기에 우리는 그냥 아무 한 것도 없이 당겨서(붙어서) 구원 받았느냐? 라는 것을 가르치고 깨닫게 하는 것이 성령의 역할입니다.

요한 1서에서 우리가 사랑을 아는 것은 주체가 아닌 것이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만 사랑을 안다고 했어요?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이 뭡니까? 지남철 아닙니까.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는 사랑을 모른다고 할 수가 없어요. 아는데 왜 몰라요. 칼 들고 “예수 믿지마라.”고 해도, 그 때는 “안 믿을게” 해도 괜찮아요. “너, 예수 안 믿는다고 하면 살려줄게.” “안 믿을게요.” 큰 소리로 100번 하세요. 나는 예수님을 저주한다. 세 번에 꼽배기를 해 보세요. 그래도 성령께서 다 아십니다.

“너는 어떻게 해서 예수 믿게 되었는가?” “성령께서 하셨습니다.” “성령 말고, 너는?” “나는 못 믿고요. 주님이 믿게 하십니다.” 이렇게 하니까 “그 봐, ‘나는 못 믿고’가 되는 신학이잖아.” 하고 욕한다고요. 이근호 신학은 ‘나는 안 믿고’ 신학을 하고 있다는 거예요.

‘성령께서 믿게 했다.’는 것은 가위로 오렸는지 지우개로 지웠는지 없어요. 성령께서 믿게 하셨다는 것이 주의 뜻인데, 성령께서 믿게 하셔서 믿는다는 것은 싹 지우고 “내가 산 것이 아니요”라고 했다고 해서 욕하고--

“목사님! 이제 그만 하세요.” 하지만, 이게 아담의 선악과 문제는 계속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그만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아담과 그리스도 이야기를 그만 하세요.” 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그리스도 이야기 하려면 아담 이야기해야 되고, 아담 이야기 하려면 아담에 속한 것이 어떤 현상들이 나타나는가를 이야기 해 줘야 돼요. 그러니까 이것은 죽을 때까지 그만 둘 수가 없어요.

이제 요한 1서가 서서히 풀립니까?

4장 13절을 봅시다.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성령을 안 주시면 어떻게 돼요? 성령 안 주시는데 본인이 성경 연구해서 주님 사랑을 알고 구원 받을 수 있습니까? 안 되지요.

우리가 성령 안 받은 상태에서는 사랑을 모르지요? 그러면 우리는 나름대로 사랑을 알고 있습니까, 모릅니까? 안다고 우기지요. 나름대로 알잖아요. 우리는 선악을 알잖아요. 선악과를 따 먹었지요. 선악이란 것은 인간의 모든 지식을 말합니다. 신의 지식을 말해요. 그러면 사랑도 나름대로 알지요. 의도 알지요. 심판도 알지요. 죄도 알지요.

그런데 이런 것들을 안다고 우기기 때문에 누가 죽었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잖아요. 이 말은,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죄라고 안다는 그 자체가 뭡니까? 그것이 죄라고 보는 거지요. 그러면 우리는 따져야 되지요. 내가 ‘죄는 나쁜 짓’이란 것을 아는데, 강도짓 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을 아는데, ‘나쁜 짓이란 것을 아는 그것이 왜 죄냐?’ 라고. 우리는 그것을 상당히 의아해 하지요?

여기에 대한 성경의 해답은 뭡니까?

3+5=8 이란 것을 알잖아요. 우리는 이것이 진리인줄 알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 죄란 것입니다. ‘그것이 왜 죄냐?’ 라고 물을 때, 하나님 답변은 ‘성령을 받지 않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3+5=9 라고 하면 틀렸고 8이라고 해야 정답이라는 것이 아니고, 그러니까 아예 우리에게는 ‘뭐가 죄 아니고’라는 것이 성사 됩니까, 안 됩니까? 성사가 안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성령을 받지 않고는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우리는 죄 안에서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에(이것을 아담 안이라고 하지요) 성령이 오기 전까지는 계속 죄인입니다.

성령이 오기 전까지는 우리가 죄가 뭔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했던 모든 것이 죄란 것을 알지요? 그러니까 성령 받은 사람이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알잖아요. 내 말이 뭐 틀렸습니까?

하나님의 뜻은 성령이 오기 전까지는 이미 선악을 안 이상은 주체가 됐잖아요. 그러면 하나님만이 아는 것을 우리가 알았으니까 그 자체가 뭡니까? 관계 끊어짐 그 자체가 죄 아닙니까? 죈데, 성령을 받기 전까지는 우리가 죄라는 것을 인정을 안 하지요. 3+5=9가 되면 틀렸다고 이야기하고, 8이면 맞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8은 의롭고 진리고, 9는 오류고 이렇게 알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성령 받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죄 아닙니까? 성령을 받기 전에는 그것이 죄인 것을 모르지요.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고발하니까, 아하 3+5=8 이것도 죄인 것을 알지요. 그러니까 성령 받은 성도가 먹든지 마시든지 뭘 해도 그것이 죄인 줄 알잖아요. 뭐가 문제입니까?

성령 안 받은 사람은 나쁜 짓 하면 죄고, 착한 일 하면 의라고 하지요. 이것이 성령 안 받았기 때문에 생긴 현상입니다.

만약 성령 안 받고도 안다면 성령 받을 필요 없이 3+5=8 맞지요. 그래서 나쁜 것은 줄이고, 좋은 점 -고아를 돌본다든지, 기도를 한다든지, 순교 한다든지 이런 것은 착한 일이잖아요. 착한 일만 고르고 모아서 ‘하나님, 성령 받지 않더라도 내 속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어서 이런 착한 일을 했습니다.’ 라고 내 밀면, 인간은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죄 지을 때도 있지만 전적으로 죄만 짓는 것은 아니라는 거지요. 그들이 주장하는 것이. 일부는 죄고 일부는 의롭다는 말 아닙니까? 그러면 예수님 십자가 왜 졌습니까? 십자가 질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말씀만 해 주셔서 잘 하는 것은 장려하고 못한 것은 제거하고 하면 되지 십자가는 왜 지십니까? 십자가 진다는 것은 성령을 보내기 위해서 십자가 지셨잖아요. 십자가 안 지면 성령이 안 오지요? 그러면 십자가를 져야 성령 세례를 줄 수 있잖아요. 그러면 십자가 진 이유는 성령을 받지 않고서는 어떤 인간도 하나님을 모르게 되어 있어요.

요한 1서에 성령을 안 받으면 하나님도 모르고, 예수님이 십자가 진 이유도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성령을 보내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져야 하고, 십자가를 지고 성령이 오는데, 성령이 오기 전에는 무슨 짓을 해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상태 같으면 이것은 죄 아래 그대로 있는 거예요.

그리고 성령이 오게 되면, 주님 하신 일과 우리가 비교가 되니까 우리의 모든 것이 죄가 됩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이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은 내가 무엇을 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사랑으로 또는 화목제물의 피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라고 고백하겠지요.

이런 고백을 방해할 수 있는 우리의 행동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나쁜 짓을 해도 그런 생각이 드는데, 어떤 짓을 해도 나쁜 짓인 줄 아는 거예요. 이야, 이말 또 어렵다. 우리가 나쁜 짓을 해도 십자가 바라보면서 그 피를 생각하는데, 1) 우리가 스스로 나쁜 짓이라고 생각해도 피의 용서를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2) 어떤 짓도 나쁜 짓이죠. 왜? 성령이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니까. 3) 어떤 짓도 용서 된다면, 4) 어떤 짓을 해도 하나님을 버릴 수 없죠. 그러니까 정답은 ‘우리가 어떤 짓을 해도 하나님을 버릴 수 없다.’ 가 되지요.

어렵습니까? 다시 할까요?

나쁜 짓을 해도 피를 속일 수 없는 입장이라면 어떤 일을 해도 성령이 오기 전까지입니다. 성령 보시기에 다 나쁜 짓이니까 어떤 짓도 나쁜 짓이 되니까 어떤 짓을 해도 하나님을 버릴 수 없는 그런 입장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범죄를 못하지요.

6절을 봅시다. “그 안에 거하는 자” 누구 안에 거합니까?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요. 사랑 안에 거하지요. 그러면 그 사랑이란 것은 뭐가 올 때 사랑입니까? 성령이 와야 그 안에 거하고, 그 안에 거하는 사람은 범죄치 못하지요.

그러면 성령 안에 거하면서 범죄하는 경우는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왜냐하면, 범죄하냐, 안 하냐를 나쁜 짓 했나, 안 했나가 아니라 어디 안에 거하는가를 보거든요. 그러면 만약 하나라도 나쁜 짓 하면 어디에 속하느냐 하면, 8절에 “죄를 짓는 자는” 누구에게 속했습니까? 마귀에게 속했지요.

그러니까 죄를 짓는 것도 일부 착한 일하고 일부 나쁜 짓 하는 것이 아니라 마귀에게 속했다는 것 자체가 무슨 짓을 해도, 일부 착한 것이 없고 전부 다 죄가 되는 거예요. 마귀에게 속했다는 것 자체가.

인간 생각에는 마귀에게 속해도 착한 일 할 수 있다고 여기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마귀에게 속했으면 어떤 식이라도 마귀의 영향력을 못 벗어나서 결국은 마귀가 시키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것이 마귀에게 속한 사람의 특징이란 말입니다.

마치 예수님께 속한 사람은 어떤 짓을 해도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듯이, 마귀에게 속한 사람은 일부는 나쁜 짓이고 일부는 착한 짓이고 그런 것이 아니고 몽땅 다 나쁜 짓이 되고,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성령님이 계시기에 몽땅 나쁜 짓이 아니라 몽땅 다 의로운 것이 된다 이 말입니다.

다시 해 봅시다.

창세기 3장에 우리가 죄 짓고 난 이후에 우리는 뭘 알고 있습니까? 선악을 알고 있지요. 그런데 선악을 아는 것은 누구의 소관입니까? 우리가 알아야 될 사항입니까? 선악은 우리가 몰라야 될 사항이잖아요? 몰라야 될 사항이 우리 속에 들어왔다는 말은, 우리는 이미 비정상이잖아요. 비정상이란 말을 달리 하면, 우리는 마귀에게 속한 자가 되었다는 거예요.

마귀에게 속했는데 “잘 하면 될 것 아닙니까? 바르게 살면 될 것 아닙니까?” 이런 말을 한다는 자체가 비정상이기 때문에 나오는 현상이란 말입니다. ‘내가 나쁜 짓도 하지만 그래도 착한 일도 많이 했잖아요?’ 라고 하는 자체가, ‘계속 선악을 아는 이 상태를 저는 유지하고 싶습니다.’ 라는 그런 악마의 외침이란 말입니다. 이제 이해되십니까?

자진해서 “주여, 선악을 알지 못하게 하옵소서.” 이런 인간은 없단 말이지요. 이왕 알게 된 것, ‘나쁜 짓은 제거하고 바르게 살면 되잖아요.’ 성화론 자들처럼 ‘앞으로 점점 더 거룩하게 살면 안 됩니까?’ 라고 생각하는 것이 원래 주님의 생각은 없고, 자기 입장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아담 안에 놓여 있고, 마귀에게 놓여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란 말이지요. 그런데 이 자체를 뭘로 봅니까? 범죄한 자의 특징이라고 보지요.

그러나 성령이 오게 되면, ‘아하, 이게 범죄한 자 맞구나!’ 하잖아요. 그건 범죄한 자 맞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너, 범죄한 자야!” 할 때, “예, 범죄한 자 맞습니다.” 라고 고백한다는 것은 누구 의견을 주도로 삼는다? 내 의견을 버리고 누구 의견? 내 의견은 ‘바르게 살자.’ 이것이 내 의견이고, 주님의 의견은 ‘넌 뭘 해도 죄야.’ 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주님의 의견이 나의 의견을 지배했고, 내가 굴복했다는 그 자체가 사랑이고 의란 말이지요. 그러면 그 사람은 어떤 것을 해도 주님 생각밖에 안 하니까, 주님의 사랑을 우선시하니까, 주님 사랑을 우선시하는 것이 원래 하나님이 원하는 바잖아요.

그런데 마귀가 있다가 ‘얼래리 꼴래리, 저놈은 거짓말 했데요.’ 하고 놀려도 ‘내가 보기에는 주님을 아는데’ 그러면 “누가 송사하리요. 누가 너를 정죄하리요.” 그가 범죄한 것은 맞아요. 그러나 그의 범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자기 몸을 드렸던 분이 그를 인정한다는데, 그게 사랑이고 사랑 있으면 됐지 그 외 뭐가 더 필요해요?

성도 중에 범죄 안 하는 사람 누가 있어요? 성도는 모든 것이 범죄인데. 그렇잖아요? 모든 것이 범죄 아닙니까? 성도는 하는 것 마다 범죄인 것을 알기 때문에 범죄하지 않는 거예요. 아하, 이 공식이 이제 나온다.

불신자들은 자신의 모든 것이 죄인 줄 모르고 선악체제를 유지하기 때문에 뭘 해도 범죄한 것이 돼요.

하나님께서는 뭘 보고 구원합니까? 사랑보고 구원하지 범죄했냐, 안 했냐를 따지지 않지요. 왜냐하면, 이미 그리스도께서 사랑을 준 입장에서는, 그리스도가 안 오신 입장에서는 우리는 율법대로 범죄하는데, 갈라디아서 3장을 보세요. 모든 율법을 항상 행하지 않으면 저주아래 있어요. 이 말은, 곧 우리는 저주아래 있고 저주에서 못 벗어난다는 말이지요. ‘율법대로 행하면 되지’ 이러면 안 돼요. 저주를 못 벗어나요. 율법이 뭔가 하면 우리가 저주 아래서 못 벗어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지 율법 못 지킨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저주란 것을 알리기 위해서 뒤에 율법이 추가적으로 주어진 것이지 처음부터 율법이 있은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복을 받지 아니하면 구원 못 받는다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400년 후에 율법이 추가된 거예요. 새삼스럽게 ‘잘 지키면 구원해 줄게’가 아니라, ‘네가 죽어가면서도 왜 네 주제를 모르느냐’ 말이지요.

불신자: 왜 죽습니까?

하나님: 아담 안에 있기에.

불신자: 아담 안에 있는데 왜 죽습니까?

하나님: 아담이 문제거든.

불신자: 그러면 죽어야 합니까?

하나님: 그럼, 죽어야지.

끝난 거예요.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이미 죽은 자예요. 모든 사람이. 개별적인 차이는 의미가 없습니다. 다 죽은 거예요. 죽었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주저 아래 있다.’는 거예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가 지남철이 되어 당기는 사람은 어떤 계층이든 관계없이 의인 되는 겁니다.

영광스럽게 부활되면 되지 죄 지으면 어떤데? 그렇잖아요? 영광스럽게 부활되면 그만이잖아요. 죄 안 지으면 당겨준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도가 덜되면 당겨줄게 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이유 때문에 당겨주는 거예요.

만약 우리가 잘해서 당겨준다고 하면, 내가 쇳조각이 아니라 지남철이 되어야 해요. 지금 성화론 자의 문제가 뭐냐? ‘네가 스스로 신이 되라.’ 이말 아닙니까. ‘성령을 받았기에 완벽해야 되고 신이 되어야 한다.’ 이말 아닙니까.

우리가 완벽할 수 있습니까?

‘완벽할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장담하는가?’ 물으면 답변 못해요. 왜냐하면, 자신은 바르게 했다고 하는데도 완벽하지 못하거든요. 그러면 처음부터 완벽하지 못한 거예요. ‘완벽하지 못하지만 믿습니다.’ 이렇게 해요. 이런 믿음은 완벽하지 못한 믿음이라니까.

믿는 것도 완벽하지 못한데 어떻게 구원 받아요? 믿는 것도 완벽하지 못한데. 내가 주님을 믿는 것도 완벽하지 못해요. 내가 믿으면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주신 믿음으로 구원 받지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성령의 은혜로 구원 받는 거예요. 이걸 나타내는 현상을 믿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믿음이란 것은 반드시 인간의 행함과 대비되기 때문에, 성령이 오심으로 사랑을 알고, 그 사랑 안에 있는 자는 --

요한 1서 4장 18절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두려움을 쫓아냅니까? 아니죠. 우리 속에 있는 사랑이 우리에게 있는 두려움을 쫓아내지요. 우리는 늘 두려움이 발생되지만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나 없어지지요. 생기면 없어지고 또 생기면 없어지지요. 주님 보시기에 이것이 범죄하지 않는 거예요. 왜? 주님을 사랑하는데 그게 무슨 범죄입니까?

십자가 이전 이후를 따질 수가 없어요. 이전이나 이후나 마찬가지라니까.

5분 쉬었다 합시다.

(07. 1. 3. 10:37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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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8,422건 중 334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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