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9: 20-21(인간들의 오기)
계 9: 20-21(인간들의 오기)
이름 : 우리교회(IP:220.81.176.151)
본문 : 요한계시록 9장 20-21절
제목 : 인간들의 오기
일시 : 2006년 12월 31일Z
http://222.231.1.74/~woorich1/성경강해/요한계시록-2006/043강-계9장,20-21,(인간들의,오기)-rev061231.hwp
이근호
06-12-31 13:14
인간들의 오기
2006년 12월 31일 본문 말씀: 요한계시록 9:20-21
(계 9:20)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그 손으로 행하는 일을 회개치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계 9:21) 『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적질을 회개치 아니하더라』
연말 연시가 되면 사람들은 소망을 챙겨놓기에 마음이 분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소망 갖기’가 아닙니다. ‘회개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일하시면서 외친 말씀이 이것이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평소에 사람들이 천국을 얼마나 소망했는가를 잘 알고 계시는 주님께서 그 그리운 천국 앞에다가 ‘회개하라’를 붙여놓으셨습니다.
즉 ‘회개’가 안 되는 자는 그리운 천국이 코 앞에 밀려와도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이해하는 천국의 복이란, ‘회개 없이’도 가능한 천국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영 허구였던 것입니다. 회개 없는 천국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천국의 주인 되시는 당사자의 선언이십니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들이 ‘회개’에 성공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자력으로 회개가 불가능합니다. 사람들이 기껏 하는 것은 회개가 아니라 반성입니다. 반성이란 자신의 자질을 향상 시키는 시도입니다. 반성할 수 있다는 것은 곧 자신이 근본적으로 훌륭하고 대단한 인간성을 가졌음을 증명하는 바가 됩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스스로 반성하면서 규정짓는 그 ‘죄’라는 것이 기껏 자신이 찾아낼 수 있는 죄에만 해당되는 죄입니다. 이것은 옳은 죄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찾아낼만한 죄라면 그 죄는 나중에 언제든지 되풀이 될 수밖에 없는 죄에 해당됩니다. 진짜 죄는 인간이 도저히 자기 능력으로 찾아낼 수 없는 죄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회개란 이런 반성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권세를 임의로 줄 수도 있고 아니 줄 수도 있는 예수님께서 어떤 모습의 회개를 우리에게 알려주시든가요? 하루는 바리새인들이 금식하면서 스스로 자기 죄를 반성하는 모임을 가졌을 때에, 예수님은 제자들의 일단의 무리들을 이끌고 식사하시고 즐겁게 술을 마셨습니다.
이 모습을 알게 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 무리의 경망스러움에 대해 비난했습니다. 이것에 대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신랑이 함께 있는 잔치집 분위기가 무거워야 하는가 아니면 즐겁고 흥겨워야 하는가? 나는 의인을 거부하고 죄인을 모아 의인되게 하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이러한 예수님의 자기 권한 실행은 곧,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에 부합되는 공식이 됩니다. 즉 회개란, 예수님에 의해서 부름을 받아서 자신이 죄인됨과 그리고 의인으로 바뀜에는 오로지 예수님의 공로만으로만 가능함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에게 있어 진정한 죄관념은 예수님과 더불어 있을 때만 밝혀집니다. 일찍이 다윗은 자신이 진정 죄가 무엇인지를 아는 상태에서 죄인됨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결코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모친의 죄 안에서 출생한 그 자체가 죄인 되게 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다윗 자신이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죄가 자신을 되레 죄인 되게 만드는 과정에 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죄의 권세는 나의 허락도 없이 들락달락 마구 나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흔히들 사회에서 ,‘정직하라 살라’라고 말을 하지만 이 세상에서 인간이라고 생긴 존재치고 매일같이 거짓말 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울고불고, 반성하고 자책해도, 되레 그것이 자신이 죄를 가리는 역할 밖에 못하는 겁니다.
도박판에서 돈을 따기 위해 수고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의 기술과 오기와 투지와 집착을 나의 기술과 오기와 투지와 집착으로 꺾어버렸다는데서 오는 순간적인 희열을 맛보기 위해 끝까지 올인합니다.
우상이란 바로 이런 겁니다. 우상이란 자기가 반성해서 끄집어낸 죄를 자신이 실시하는 있는 방법을 사용하는 우상입니다. 이런 우상 가지고서는 늘 새롭게 피어오르는 죄를 그때그때마다 대처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란 과거에 한 번 효과 본 그 방식에서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이로서 우상이란 이미 과거에 굳어져버린 것을 두고 말합니다.
인간의 반성 행위 다음에는 반드시 우상이 달라붙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해서 자체적으로 자신의 죄를 제거한 방식을 사용하게 되어있고, 그렇게 해서 스스로 의인으로 거듭 난 처럼 행세하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되면 교회 안에서 도박판이 벌어지는 겁니다. 나의 기도의 능력과 헌금과 신에 대한 충성도가 자기를 지켜주는 판돈이 됩니다.
이 판단에 의해서 상대방의 판돈의 기세를 꺾는데서 오는 쾌감을 즐기는 곳이 교회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만들고 이어놓은 사랑의 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란 우리 자신으로부터 출발래서 하늘까지 닿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우리 외부에 있습니다. 외부에서 쏟아부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받은 자는 자기 방어를 하지 않습니다. 이 사랑의 관계가 회개를 형성시킵니다. 이 회개에 대해서 적절한 예를 우리 주님께서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보면 ‘잃어버린 양’ 비유가 나옵니다. 목자 뒤에는 목자를 졸졸 따라다니는 99마리의 양이 나옵니다. 하지만 진정 하늘나라에 기쁨을 주는 양은 그 99마리의 양이 아닙니다. 되레 잃어버린 양 한 마리가 기쁨을 줍니다. 목자가 그 잃어버린 양이 무사히 찾아 귀환할 때에 너무너무 기뻐합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의 관계로만 이어져야 하는 것이 성도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불신자들은 이런 기쁨은 없습니다. 모든 것은 자기 힘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재앙이 쏟아지니,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강력하게 반발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들이 스스로 미처 발견해내지 못한 죄입니다.
우리 안에 이런 반발이 들어있습니다. 그래놓고서도 우리는 우리들의 반성력을 믿고 싶어합니다. 그래야 자신이 근사한 존재라고 스스로 인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스스로 매일같이 잃어버린 양임을 자인해야 합니다. 매일같이 건져주시고 또 건져 주시는 주님 앞에, 우리는 더 이상 자신의 행위에 의미를 두지 맙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공로에 의해 거져 은혜를 받아놓고서도 여전히 자신의 행함에 의미를 두는 이런 도박을 중단시켜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