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성화론의 허구성(2)
[일반] 성화론의 허구성(2)
이름 : 이근호(IP:220.64.214.30)
언어 배후에는 선입견이 자리 잡고 있고, 그 선입견 배후에는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고, 과시하고 그 존재의 정당함에 가치를 두고, 그것으로 자신의 의로움과 윤리성을 자랑하고 싶은 욕망이 자리잡고 있다. 언어란 바로 겹겹이 접혀있는 이런 욕망이 내부적으로 편집되고 타협되고, 조심스럽게 조립되고, 그래서 정돈되어서 흘러나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내가 살아있으니 나는 기어이 살아남아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옳고, 정당하고, 마땅하다’라는 욕망의 목소리인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이 옳은 소리를 해서, 옳은 생각을 해서 옳은 것이 아니라, 남이 아닌, 나 자신이 발언했고, 나 자신의 욕망이 그것을 원하고 있으니 무조건으로 옳은 것이다. 쉽게 말해서 나의 욕망이 욕망대로 발산하겠다는 그 현상 자체가 욕망의 화신인 나에게는 이유 없이 옳은 일 일수 밖에 없는 것이다.
차후에 나의 말이 과연 옳았느냐 아니면 잘못되었느냐 하는 것은 결국 그런 검토와 반성을 하는 나 자신의 대견스러운 겸손만큼은 이미 옳은 행위라는 것을 기정 사실로 하여 실시되는 일일 뿐이다. 쉬운 예로, 신이 나보고 죄인이라고 했을때, 신의 그 계시에 순종하여 자신을 죄인으로 규정하는 그 행위만큼은 참으로 정당한 짓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정당한 짓은 나 자신에게서 도출되었다는 점에서 이미 나 자신 자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것이다.
즉 무조건으로 옳을 수 밖에 없는 나의 존재는 그 자체로서 이 세상에 모든 것을 판단하고, 분석하고 심판하고 규정짓는 당연한 자격자가 된다는 말이 된다. 내가 판단하기에 나의 판단을 옳을 수 밖에 없으며, 만약에 나의 판단이 틀리고, 옳지 않고, 죄악된 것이라면, 그런 잘못을 외부에서 제대로 지적해주는 판단자가 과연 나 밖에 따로 있음의 여부를 수용을 위해 판단에 필요해서 발휘되는 사전의 나의 판단력 자체는 늘 옳을 수 밖에 없는 법이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외부에서 우리 자신을 보고 죄인이요, 판단에 오류가 있다고 해도, 이미 자기 존재를 인식하고 있는 이상, “나는 항상 옳다”라는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는 노릇이다. 옳기 때문에 옳은 것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를 부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미 존재 자체가 무조건적으로 옳다는 바탕을 이미 장만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인간의 언어구조 이전에 존재 자체로 옳음을 성립되어 있는 형편이라면 차후에 인간 사회에서 타인과의 의사소통에 동원되는 언어구조는 결국 그 ‘존재에서 나오는 옳음’을 변명해주는 구실거리에 불과하다. 여기서 모든 언어는 ‘은유’이다는 원칙이 수립된다.
즉 진리와 언어가 일대일로 대응되는 것이 아니라, 그 언어의 쓰임새와 활용에 의해서 얼마든지 다시 ‘나는 항상 옳다. 왜? 나는 이미 존재하고 있으니까’라는 쪽으로 귀착되는 의미일 뿐이다. 그렇다면 언어란 자기 존재의 정당성을 비호하는 은유로서 그 인간에게 쓰여질 것은 뻔하다. 도대체 어느 인간이 자신의 죄인됨과 오류와 마땅히 저주받아야 됨을 말하기 위해 언어를 쓰는가?
그런 사람이 있다면 참으로 희한한 사람일 것이다. 스스로 자기 존재를 없애겠다는 사실일 것이 분명하다. 여기서 진리와 언어의 의미와의 관계를 살펴보아야 한다. 즉 언어는 규칙과 구조에 의존한다. 그런데 은유를 말하고 있는 자는 자기만의 언어 규칙을 따로 실행하고 있는게 된다. 과연 자기만의 의미규칙이 일반적인 언어 규칙에 통합될 수 있는가? 결국 규칙이란 궁극적으로 환상에 불과하며 은유야말로 다른 언어까지 포용해서 해석해버리는 언어 자체가 숨길 수 없는 현상이 되는 것이다.
은유는 언어 규칙을 진정으로 초월한다.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옳고 그름의 보편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언어도 역시 은유에 불과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거짓된 표현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게 된다. 기호가 지칭하는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예를 들면, 남자로 구성된 착한 여군 女軍) 그 기호는 거짓이라기 보다는 무의미한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언어 사용이란 참 진리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효용성과 관련있을 뿐이다. 즉 효용성이 높은 것이 더 진리답다고 말할 뿐인 것이다. 효용성이 곧 진리라는 말은, 인간의 자기 활동을 긍정하는 것이 곧 진리요 이런 자기 활동을 표현하는데 동원되는 언어들이 ‘진리적이다’이라고 정립하는 것이 된다.
사람이 법을 제정하고 규칙을 제정할 때에, 모든 자신의 행위 방식을 다 담아낼 수는 없다. 즉 인간의 어떠한 행위 방식도 규칙에 의해서 옳고, 그름을 결정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모든 행위 방식이 그 규칙과 일치하는 것으로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방금 강도짓 한 사람도 횡단보도에서는 교통 규칙을 지킨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교통 법규를 준수한 의로운 사람임이 확인된다.
결국, 법이라든지, 규칙 같은 것은, 인간이 평소에 자신이 얼마나 옳은 존재인가를 차후적으로 증빙하는 필요에 따라 차용하는 방식으로 준수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은 경험적으로 봐서 많은 관습과 풍습들이 편재되어 있다. 이것은 행동 패턴이다. 결코 규칙이나 법규를 준수해서 생긴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규칙이나 법규가 그 관습을 정당화 시켜줄 뿐이다.
만약 그 관습이나 풍습에 서툰 자가 있다면 그 사회 안에서 그 인간은 죄인으로 규정되어서 그 사람이 본디 느끼고 있는 자기 존재의 정당함을 대놓고 주장할 수가 없게 된다. 나그네나 이방인이기에 당하는 서러움이다. 따라서 그는 순응하든지 아니면 반대로 순교하든지 해서 자신의 존재의 옳음을 새롭게 증거하려고 한다.
남자가 넥타이를 매고, 여자가 치마를 입는 것은 그것에 무슨 의미가 있건 없건 관심이나 실행 또는 규칙을 구현하는 행위가 된다. 언어 역시 이와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언어들은 그 사회 질서 유지를 위하여 필연적으로 동원되기 마련인데 그 이유는, 닫혀진 사회 안에서는 원활한 의사 소통을 위해 동일한 의미 체제로 굳혀둘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즉 한 사회체는 마치 살아있는 생물체처럼 작용해서 자신의 사회는 이유없이 무조건 존재해야만 하고 번성해야만 한다. 바로 이러한 욕망들의 원활한 고류를 위해, 언어는 자체적인 법규를 제정하고 사회구성원들은 그 법규에 합의된 동의를 보내게 된다. 법규의 등장은, 바로 옳고 그름은 나름대로 차후적으로 규정짓기 위해 언어행위에 속한다.
즉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 하는 것은, 대조성과 차이성을 통해서 실시된다. 선택되지 않는 것은 배제될 것들이다. 배제된 죄악들(?)은 사회체의 존속에 방해가 된 것들이라는 인식을 사회 구성원들이 합의를 보았기 때문에 배제된다. 대자연 세계가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알바가 아니다. 인간들이 어떤 욕망을 발산하느냐 따라 언어는 은유적으로만 의미를 함유하게 된다.
모든 개념은 대상에 대해서 참과 거짓으로 정의된다. 이것은 개념들이 범주적으로 나타난다는 말이다. 그 영역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면 진리가 아닌 거짓으로 배제될 대상이 되어버린다. 이런 점에서 언어가 지나가는 자리에는 권력이 긁고 지나간 흔적을 남긴다.
문법도 법이다. 법이 있는 곳에는 권력이 발생된다. 문법을 규칙이 요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 존재를 구성하는 욕망에 대해 자아가 규칙적으로 대응한다는 말이 된다. 즉 맹목적인 충동을 반복적인 질서로 바꾸어놓는 식으로 자아가 대처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주체 안에 뭐가 들어있기에 무질서에 체제를 잡아 질서로 바꾸어놓는가?
주체는 언제나 자신의 상실을 회복하고 자기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토대를 주체 외부에서 찾게 된다. 그 외부란 바로 대상이다. 이로서 대상이 없이는 주체가 자기 모습을 갖출 수가 없다. 주체와 대상은 서로 연류되어 있다.
주체 안에 외부 대상이 놓이게 된다. 이것은 주체가 자아를 온전히 소유하거나 장악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쉽게 해서 본인의 안구를 생각해보자. 우리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지만 그렇게 보고 있는 우리 자신의 일부, 즉 안구만은 볼 수 없다. 안구를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우리 외부에 투사시키는 거울을 보는 것이다. 주체는 바로 이와 같은 안구와 같다. 주체는 그 자체로는 결코 파악될 수 없으며, 오직 현실의 거울 속에서만 보이는 주체이다. 여기서 비유로 말한 거울이란 곧 현실 세계를 의미한다. 즉 주체는 현실을 통해서 파악된다.
이 주체가 말을 하고 말을 건다는 것은, 거울이 대한 세상에 대해서 건네는 것이다. 그렇게하는 이유는, 그 행위를 통해서 주체가 정립되기 때문이다. 주체는 그런 방식이 아니라 자신을 정립할 수 없다. 말을 하는 가운데서 주체는 자기 존재를 외부에 걸어놓는다. 말하자만 나 외부에서 나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즉 나는 나 자신이 바깥, 나를 대신 표현해주는 기호로서 나의 단일성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처럼 만약 내가 나의 외부에서 나 자신을 발견한다면, 나는 더 이상 자기 동일적이지 않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왜냐하면 기호가 곧 나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달리 나를 표현해줄 방법이 없이 임시적으로 표현하는 것 뿐이기에 언제든지 다른 세상, 다른 시절, 다른 사회 속에 놓이게 되면 나는 지음의 나를 표현할 다른 기호를 동원시키게 된다.
그런데 아무리 시대나 주변 환경이 바뀌어서 나 자신이 죽어야만 함을 이야기해 줄 수 있는 기호는 없다. 왜냐하면 어떤 기호를 선택하여 ‘나’라고 규정하는 그 주체는 없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주체는 계속 상실되는 경우를 강요받아도 계속해서 그 어떤 기호를 동원시켜서 회복되고자 노력하게 된다.
이러한 자아의 쉴새없는 반복적인 노력은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끝없이 춤추는 충동적 리듬은 자아도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다. 아무리 자아를 열린 마음으로 외부로 개방해도 주체는 번번히 폐쇄적으로 돌아선다. 이것은 수축을 의미한다. 하나의 적절한 기호 안에서 강하게 응축되고 싶어한다. 이로서 주체는 내란을 경험한다. 주체를 표현해주는 기호는 기껏 비유와 상징에 머문다. 따라서 나의 존재를 계속 충족시켜 줄 수는 없는 일이다.
다른 적합성을 가진 기호로 반성하며 대체하려고 한다. “나는 적어도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야 돼”라든지, “나는 적어도 지금쯤 이런 인간이 되어야 돼”라는 욕망의 목소리를 내부에서 들려온다. ‘자기’는 끊임없이 갱신되는 것이다. 이것을 ‘분열된 주체’라고 할 수 있다.
이 ‘분열된 주체’에서 소위 ‘윤리’가 피어난다. 선과 악이란 이런 분열된 주체를 봉합하는데 과연 기여 할 수 있느냐 여부에 달려 구분 지어진다. 즉 내가 되고 싶은 내가 되는데 도움이 되는 쪽은 선이고 방해가 되어 더욱 분열의 폭을 넓히면 악이 된다. 바리새인들과 사도개인들과 서기관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계명(기호)을 놓고 그 상징과 자아를 일체시키려고 노력할 때에, 예수님은 그들을 보고 ‘악마의 자식=독사의 새끼’라고 하셨다.
따라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악의 화신으로 간주해서 처형하지 않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그들이 노출시킨 윤리성의 본질이다. 그들은 내부적으로 내란이 없이 행복해지고 싶었다. 통일된 주체성이고 싶었다. 피곤한 신체가 건강을 욕망하게 되면 주체는 ‘건강한 신체’가 곧 자아 자체이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불행하고 그것이 유지되는 기간만큼은 행복하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슨 연유로 이런 자유스러움조차 악으로 분류했을까? 그 이유는, 그런 신체로부터 다른 거룩, 다른 의로움, 다른 사랑, 다른 진리, 다른 메시야, 다른 하나님관이 뿜어져 나오기 때문이다. 즉 절대성에 대한 왜곡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 절대성 왜곡 현상은 인간들이 무제한적인 자유를 담보하고자 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즉 ‘나에게는 무제한적인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이다. 이 자유의지에서 이성적인 실천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성적인 실천이란, 악을 통제하고 선을 실행시키는 실천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실천을 통해서 결국 맺어지는 것은, 무한한 자유가 보장되는 조건 하에서만 무한하게 넘치는 선행이 가능하다는 논리로 귀결될 뿐이다. 이렇게 되면 인간의 무한한 자유를 방해하는 것이 곧 죄악이 되는데 왜냐하면 선을 행할 기회들을 방해하고 박탈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즉 선을 행하기 위해서는 절대적 선이 문제거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제한없는 절대 자유가 인간에게 먼저 주어져야 한다. 절대 자유만 주어지면 미흡한 것은 되풀이해서 수정 들어가면 언젠가는 바라던 선에 도달할 수 있는 기회가 늘 열려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서 악이 발생된 원인은 다른 곳에서 찾을 필요조차 없게 해야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쏟아지는 장마비에 차가 미끌어져 사람을 치게 했다면, 사람을 치게 한 것이 자기 잘못이 아니라 장마비에 있다고 원인을 따로 소급시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부단한 훈련과 좋은 장비를 갖추고 그 다음에는 아무리 많은 비가 쏟아져도 사람을 치는 일을 방비할 수 있는 기회가 그 사람에게 무한히 주어지는 한 그 사람은 악을 선으로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사람이 부당한 짓을 저질렀다해도 그 벌에 대한 상응한 형벌을 받고서도 그에게 여전히 자유가 주어진다면 그 사람은 또다시 그 같은 부당한 짓을 저지르지 않는 선한 인간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참으로 인간에게 선을 원한다면 ‘인간에게는 무제한적인 자유가 주어졌음’이 선결조건으로 주어져 있음을 확인하면 그만인 것이다.
인간에게 죄책감이 들었다고해서 그 사람에게 자유를 박탈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결국 무제한적으로 선을 행할 수 있다. 그런데 만약이 그 무제한적인 자유를 외부에게 가져다 주는 것이 되면 그 자유는 진정한 자신의 것으로서 사용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주어진 자유는, 주신 그 주체자의 분의 자유스러운 주체적 본질이 함유된 자유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자유를 행사는 주체자의 자유가 아니라 자유를 제공한 자의 자유를 대리적으로 행사하는 셈이 된다. 그런데 인간에게 있어 무엇이 죄였던가? 바로 주체적의 주체적 행사를 마음껏 하기 위한 무제한적 자유를 방해하거 훼방하는 것이 죄가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외부에서 주어진 자유는 인간에게 계속 죄로서 느껴질 뿐이다. 이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죄에 종속됨을 의미한다.
따라서 인간의 무제한적인 자유는 인간 자체 내에서 무제한적으로 인간 본유의 것으로서만 생산되어야 한다. 그렇게 자생한 자유만이 그 실천을 행사한 주체를 행복하게 만든다.
행복이란 그 모든 원인과 결과의 사슬에서 벗어나 있는 것을 의미한다. 즉 주체자 본인이 원인이고 또한 결과가 될 때, 그래서 자체적으로 자존하고 자립할 때, 주체는 통일된 일체성을 경험한다. 즉 더 이상 분열을 모른다는 말이다. 이 때만 행복하다.
그런데 주체는 행복하고 싶어도 인간의 신체는 욕망적으로 이 행복을 여지없이 깨뜨려버린다. 예를 들면, 누가 단꿈을 꾸고 있는 자신을 화들짝 깨우면 얼마나 신경질 나겠는가! 잠자고 싶은 자유를 사용하고 싶어도 소음이 가득 찬 공장 내에서는 불가능하다.
비록 나쁜 짓이나 양심에 위배되지 않는 일을 했음에도 충분한 행복감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이 현실세계 안에서 주체는 어떻게 대처하는가?
그것은 타인에게, 혹은 자연에게, 혹은 신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방식으로 나아간다. ‘근본악’ 혹은 ‘원죄’라는 개념을 형성시켜 주체에게 그 책임을 묻지 않게 하여 죄책감을 줄여나가는 방식을 채택하게 된다.
쉽게 말해서, 원죄에 대해서 신 쪽에서 책임지고 처리해주시고, 자범죄에 대해서는 우리의 이성적 자유 발휘로 처리해야 한다는 생각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에 모든 죄에 대해서 책임을 묻게 되면, 인간이 자유를 발휘하면 할수록 그 책임성이 생각나서 죄책감만 자꾸만 증가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인간은 이중적인 태도를 취한다. 주체가 자유롭기를 원하면서도 자신이 감당치 못하는 죄에 대해서는 자신의 자유를 반납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야 그 죄에 대해서는 본인에게는 책임이 면제되기 때문이다.
즉 힘들게 살아가면서도 계속 선한 존재이고 싶어 한다. 자아는 자아 통일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로서 주체는 자유와 부자유 모두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 한다. 악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지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자유가 없는 주체는 없다고 믿는다. 이것이 ‘주체의 추상화’이다. 초월적 주체관인 것이다. 모든 인간이 행동에 나설 때는 초월적 주체관을 지니고 나선다.
이러한 경향은 성경을 대할 때도 변함이 없다. 성경은 언어로 되어 있다. 따라서 성경에 접근한다는 것은 언어 뭉치에 접근하는 게 된다. 그런데 인간은 언어를 볼 때에 거기서 명령을 듣게 된다.
언어활동의 본질은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것이나 의사를 전달하고 소통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하도록 시키고 명령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어린 아이가 말하는 법을 배울 때, 어린 아이는 원초적 형식을 사용한다. 어른이 어린 아이에게 언어를 가르치는 것은 설명이 아니라 훈육이다.
어린 아이들은 이러한 활동들을 하고 그와 동시에 이러한 낱말들은 이렇게 사용하도록,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낱말에는 이렇게 반응하도록 교육받는다. 언어가 없으면 ‘우리는 서로 의사소통할 수 없을 것이 아니라’이 아니라 언어가 없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이러이러하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 도로와 기계들을 건설 할 수 없는 것이다.
언어활동은 특정한 행동을 요구하거나 명령한다는 점에서 명령이야말로 바로 낱말 그 자체를 언표행위로 만드는 변수이다. 이로서 모든 말에는 명령어가 ‘잉여적’으로 부가되어 있고 모든 언어활동은 ‘잉여성’을 갖는다. 언표와 행동의 관계는 동일성이 아니라 잉여성의 관계이다.
정보와 소통, 혹은 음성의 주파수와 공명의 차별성도 모두 특정한 사회적 질서 안에서의 명령어의 전달과 그에 대한 동조를 야기하려는 점에서 ‘잉여성에 종속’된다. 이 명령어의 의미는 어떻게 생산되는가?
우리교회
09-02-02 21:36
성화론의 허구성
2006년 12월 21일 이근호 목사
Ⅰ. 서 론
우리는 경험상 두 번 죽을 수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실은 우리의 신체는 사실 두 번 죽음을 겪도록 되어 있다. 그래야지만 우리 신체에 담긴 하나님의 창조성에 내용이 드러난다.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 하니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 20:4-6, 21:8)
기독교인들의 삶을 정리하면 이 두 번의 죽음을 어떻게 표출하느냐와 관련된다. 쉽게 말해서 ‘왜 인간은 두 번씩이나 죽어야 하느냐’를 오직 거듭난 성도들만 증언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기독교인의 진정한 삶이다. 이 점을 밝혀내려면, 1. 누가 성도를 죽이느냐? 2. 왜 꼭 그 분께서 성도를 죽어야만 하는가? 이 두 가지를 밝혀내면 된다.
그런데 이 진리에 대해서 반대하고 나서는 측이 있다. 진리란 이 우주 안에서 꼭 반(反)-진리를 불러내게 한다. 아무리 꼭꼭 숨어도 진리가 등장하면 맞은편에 반-진리가 그냥 숨어있지 않고 얼굴을 내밀게 되어 있다. 진리에 대한 반대하는 반-진리의 특색은 특히 신학 내에서 ‘성화론’이라는 이름으로 구체화된다.
성화론의 초점은 이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살 수 있는가?’이다. 여기서 ‘우리가’에 해당되는 항목은 강렬한 ‘주체의식’으로 대변된다. ‘내가’, 혹은 ‘우리가’ 혹은 ‘자아가’ 라는 의식으로부터 출발하겠다는 것은, ‘우리’를 살리지 못할 진리는 애초에 거부하겠다는 의사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인간을 살려내지 못하는 거룩은 거룩으로 간주하지 않고, 인간을 살려내지 못할 진리는 진리가 아니며, 인간을 살려내지 못할 복음은 복음이 아니며, 인간을 살려내지 못할 메시야는 메시야로 간주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어떻게하든지 우리 인간들의 존재성을 확보해주는 식으로 모든 진리적 규정들은 움직여야만 한다는 전제를 주장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그 사람의 행동에 따라 거룩해 질 수도 있고 안 거룩해질 수도 있다. 이런 입장에 서서 ‘거룩하게 사는’ 이론을 제시한 것이 성화론이다.
따라서 성화론을 인정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첫째, 인간의 행위가 추가로 바르게 실천되지 아니하면 결코 거룩이라는 것이 이어질 수 없음.
둘째로, 인간의 행함에 의한 성화가 성사되는 과정이 빠지면 구원에 이를 수 없음.
세째로, 성화 과정에 있어서 인간이 주도적으로 행사해야만 함. 만약 성령님이 주도적으로 나서면 이것은 ‘인간 성화’가 아니라 ‘성령 성화’가 되기 때문에 애초부터 성화를 인간에게 부탁할 사항이 아니라 성령님에게 부탁할 사항으로 전이된다. 따라서 철저하게 성화에 있어 인간의 의지나 능력이 주도권이 쥐고 진행되는 과정이지 성령님이 주도권을 쥘 수는 없음.
설사 성령님과 인간이 서로 교제하면서 협력한다할지라도 어디까지나 성령님은 그냥 외부에서 안타깝게 요청하고, 하소연하고, 사정하고 부탁할 위치에 있기만하지 결코 직접 관여해서 대신 행동해 주는 입장은 못된다고 보고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라는 주체자는 인간이라는 주체자의 그 주체 영역까지는 침범하지 못하는 입장에 놓여 있는 형편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과연 신앙이 없는지 있는지를 본인이 납득이 가는 윤리성으로 측정을 통해서 그 때 그 때마다 확인해 보겠노라는 의도에서 비롯된다. 구원에 합당한 열매를 윤리적으로 측정해서 비로소 안심하겠다. 그리고 이것은 ‘신앙 있음’으로 삼겠다는 처사이다.
만약에 처음부터 참으로 이럴 의사가 전혀 없다고 한다면 추가적인 인간의 행함의 거론을 하지 않을 것이다. 즉 ‘신앙 있음’=‘구원 완성’=‘거룩 달성’이 충족됨을 증거 할 것이다. 그리고 사도들의 서신에 나오는, 그리고 예수님의 산상설교에 나오는 온갖 명령들이 ‘신앙’의 내용에 관한 사항으로 초점이 모아진다.
그런데 만약에 자신의 행위를 자신이 측정하는 식으로 신앙을 확인코자 한다면 성경에 나오는 모든 명령들이나 말씀들은 무엇을 믿느냐 하는 신앙 내용에 관한 사항이 아니라 도리어 신앙으로 온전치 못하다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추궁하는 말씀이 될 것이 뻔하다.
그렇다면 성화론의 초점은 의외로 간단히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내가 만족하는 거룩을 내가 과연 더 이상 미흡함이나 모자람이 없이 완전히 생산하고 또한 그 이상의 상승할 그 어떤 여분도 남겨지지 않고 거룩으로 꽉꽉 채워진 그 완전한 상태를 계속 유지해 나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Ⅱ 본 론
사람이 무엇을 알고 믿고 실천에 옮길 때, 그 사람의 행동 하나하나에서 자기만의 개성을 배겨 나오게 되어 있다. 이는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안다는 주님의 말씀과도 통하는 의미이다. 즉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행동을 통해서 파악하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인간이 스스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 수 있을까? 자신의 행동을 자신이 평가해서 내린 결론이 과연 진정 자기임을 주장할 수 있을까?
만약에 자기가 누군지를 제대로 모르면서 자기 행동을 점검하고 측정하고 분석하고 평가를 내린다면 그런 것은 기껏 오류에서 나온 오류들의 연속일 뿐이다. 따라서 진정 자신을 오류없이 파악하려면, 오류 없는 분을 기준점으로 삼아야만 한다. 그 오류없는 분을 하나님이라고 하자. 그리고 그 하나님이 성경 말씀을 통해서 자신을 나타내었다고하자. 그렇더라도 과연 인간이 그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이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을까? 아니면 그것마저 오류가 아닐까?
십계명 제 1계명에 보면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라고 나온다. 이는 이 인간 세계에서는 하나의 신만 유통하고 있지 않음을 이미 참 하나님께서 알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참 하나님과 거짓 하나님과의 차이를 아는 안목이 갖추지 아니한 사람들에게 십계명 1 계명조차도 무의미해진다.
즉 참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안목을 갖지 않는 인간에게는 이 십계명 1계명을 평생 들여다본다 할지라도 참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에게는 영원히 ‘다른 신’만들만 배회하다가 평생을 끝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로마서 5장에서 ‘아담 안’이라고 묘사된 경우가 이런 경우에 해당됩니다.
‘아담 안’에 놓여 있다는 말은 곧 ‘죄 아래’ 놓여있다는 말이고, 죄 아래 놓여 있다는 말은, 참 하나님을 알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죄 아래 놓여 있는 인간이 아무리 부지런히 성경 말씀을 묵상해도 거기서 그 어떤 진리는 도출될 수 없다.
구약 성경은 바로 저주받을 이방민족이 왜 저주받아야 하는지, 그리고 강퍅해야 될 이방민족이 왜 강퍅해야 하는 지를 ‘언약 안’과 ‘언약 밖’으로 설명하는 논리에 부합되는 논리이다. 이처럼 참 하나님도 모르는 처지에서 인간이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거론한다는 것은 고작, 거짓 하나님에게 거짓 구원을 구걸하는 식 밖에 안된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비록 이스라엘 백성들이라 할지라도 참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기 전에는 이방민족과 다를 바 없는 똑같은 신 개념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십계명 돌판이 이미 주어진 상황에서 그들이 어떤 식으로 하나님에게 당하고 있는가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사항이다.
그들이라고 결코 완악하지 않거나 교만하지 않거나 목이 곧지 않는 백성이 아니거나 강퍅하지 않거나, 자기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은 그런 자들이 아니었다. 도리어 그들은 자기 하나님으로부터 철저하게 저주받고 징벌받는다. 옳게 살았다면, 그리고 그들이 제대로 하나님을 알았다면 과연 징벌과 저주와 심판을 받았겠는가?
“내가 너희의 패역함과 목이 곧은 것을 아나니 오늘날 내가 생존하여 너희와 함께 하여도 너희가 여호와를 거역하였거든 하물며 내가 죽은 후의 일이랴”(신 31:27)
“그들이 여호와를 향하여 악을 행하니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흠이 있는 사곡한 종류로다우매무지한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너를 얻으신 너의 아버지가 아니시냐 너를 지으시고 세우셨도다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비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이르리로다”(신 32:5-7)
이처럼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라는 이 계명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잘 지킬 수 있다는 가능성은 전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 계명을 철회할 의사가 없으시다. 이것은 결국 무엇을 뜻하는가? 이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의 계획만이 이 어두운 세계 속에서 빛의 세계를 따로 창설하고 건설하시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따로 택한 자들이 있다는 말은 이들만큼은 이 하나님의 새로운 거룩의 내막을 맛보게 하고 창세 전의 사랑과 용서와 긍휼과 자비에 대해서 감탄과 찬양과 감사가 울려나오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즉 이 지상의 인간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창세 전의 기획된 대로 움직이는 피조세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영광과 찬양을 받으시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말씀 속의 세계로 인도함에 있어 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인간들- 이스라엘-이 자신의 능력으로 순순히 그 세계로 끌려 들어가고자 하지 않고, 도리어 그 거룩한 말씀에 본의아니게 끌려 들어가게 되므로서 이들 죄인을 통해서 하나님의 진정한 거룩과 의로움과 하나님의 얼굴의 무서움을 역사 밖으로 드러나게 하신다.
이 말씀이 직설법적이 되었든 명령법적이 되었든, 그리고 그 어떠한 양식의 말씀이든 간에 인간들은 그 말씀 앞에서 죄인으로 끌려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그 말씀에 의해서 이미 자신들이 속해 있는 그 죄악의 구조를 마음껏 외부로 방출하는 해석을 쏟아내게 된다. 그 해석이 바로 성화론을 품고 있는 모태로서의 ‘인간이 주체가 되는 구원론’이다.
즉 인간 긍정에 기초해서 구원이 성사되는 그런 죄악된 신학을 의로움과 거룩함으로 위장태어 배태하게 되어 있다. 여기서 기존의 인간 세계의 죄악 구조와 하나님이 주신 언약 구조와 정면 충돌을 빚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자신이 택한 민족에게는 ‘언약의 세계’를 열어 보여주므로서, 기존의 선악체계와 이 언약 체계가 얼마나 차이지게 상호 적대인가를 알려 주신다. 이 충돌에서 하나님께서 계속 희생자를 남기는 것을 잊지 않으신다. 연속적으로 희생자가 발생한다. 마치 아벨처럼….
이 희생자의 등장은 인간들이 호락호락하게 하나님의 세계를 영접할 위인들이 못되고 모두 ‘하나님의 원수’로 버티고 있음을 말해주는 바다. 따라서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은 희생자와 그 희생자를 희생케 하는 지상의 공격자의 만남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희생자를 근간으로 ‘대신 죽으심’ 형태의 ‘언약 완성’으로 약속하셨다. 이렇게 되면 장차 ‘메시야 안’ 즉 ‘예수님 안’에 놓여 있게 되는 자들은 거룩이든, 의로움이든, 구원이든 그 어떤 경우라도 자신을 긍정적으로 거론할 수 없는 입장이 된다. 바로 이런 자들의 안목에만 “나 외에 다른 신”라는 의미를 제대로 알게 된다. 즉 참 신과 거짓 신의 차이점은, 인간을 긍정하는 신이냐 아니면 인간을 부정하면서 다가오시는 신이냐로 구분되는 것이다.
‘예수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예수님 안에서는 옛날 ‘언약 안’에 이루어지는 일이 그대로 벌어진다. 일시적이 아니라 그 안에서는 영원토록 동일한 작용이 벌어진다. 그 일은 곧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람의 이름’을 부정하는 일이다.
성화론자들은 십자가 앞에서 인간이 부정당하지만, “저는 한 번은 부정당해야 마땅합니다”라는 고백을 했다고 해서 그것을 근거로 곧장 그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긍정 당하는 존재’로 변모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십자가 안에서 인간이 어떻게 다루어지느냐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 채 어서 속히 자아가 긍정적인 존재로 재 탄생(새로운 피조물) 되기에 희망하는 성급한 마음에서 나온 판단이다. 어떻게 부정당한 자가 어느 새 다시금 긍정적인 인물로 다시 시작되는가? 여기에 대한 논리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다.
십자가에서 나오는 능력은 거룩한 분에 의한 거룩하지 못한 피조물에 대한 심판이요 저주이다. 마치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온 이후에는 전에 있던 사적인 에서와 야곱의 관계란 사실상 소실되어 버린 상태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갈라디아서 6:14에 나온 말씀처럼 이제부터 구원의 주체자는 성도가 아니라 예수님이시다. 예수님께서 직접 나서시고 직접 주도하시고 직접 세상과 관계를 맺는다. 성도가 주체자가 나서서 세상과 관여할 입장이 못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도에게 있어 세상이란 이미 죽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성도는 자신이 마냥 십자가만 있음을 증거하고 자랑하면 그만이다. 그 십자가 안의 세계가 곧 거룩이며 구원이며 생명이며 천국이다. 성도는 십자가 안에서 죽은 자이며 단지 성도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이 살으셨으므로 산 자가 되는 것이다.
십자가는 죄 때문에 발생시킨 하나님의 사건이다. 그렇다면 이 십자가 사건을 중심으로 인간의 죄는 본질이 발각된다. 인간은 자신의 지니고 있는 죄 관념으로서는 도저히 하나님이 보시는 죄 관념을 이해할 수 없다. 이 ‘이해할 수 없음’을 분명하기에 터져버린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참으로 생각하시는 본연의 죄 관념을 나타내 보이시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잘못된 죄관념에 준해서 십자가 사건와 연결시켜 죄를 상쇄시키려고 시도하게 되면 결국 남게 되는 것은, 자신을 ‘용서받은 의인’, ‘구원받은 의인’, ‘영생 얻은 새로운 피조물’로 착각하는 자아 뿐이다.
이 잘못된 의인관 속에서 더 이상 십자가가 계속 머물 이유를 갖지 못한다. 십자가는 새로운 피조물을 위하여 자리를 내어주고 추방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신약에 나오는 사도들의 말씀과 명령들을 그대로 지킬 수 있다고 자부하는 능력이 차지하게 된다. 이 능력을 행사하는 주체자는 누구냐?
그것은 당연히 인간 본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뭘 할건가? 이제부터 하나님께서 마저 하지 못한 의로움과 거룩함을 성취해보겠다는 것이다. 어떻게? 세상에 대해서 자아가 ‘옳음’과 ‘거짓’를 가려내어 ‘옮음’ 쪽으로 실천해 옮겨보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의 문제는 이것이다. 과연 이 세상 안에서 옳고 그름을 구분지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무엇이 옳으며 무엇이 거짓 되는지를 인간들이 어떤 식으로 골라내고 가려내고 분류할 수 있단 말인가?
예를 들면, 빗물이 한참 필요한 철에 전혀 하늘에게 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이 비를 내리지 않는 대자연에 대해서 옳지 않음을 인간이 감히 이야기할 수 있느냐 말이다. 또한 자신이 고이 길렀던 아이가 갑자기 죽게 될 때에 그런 병마에 대해서 옳지 않음을 말할 수 있는 입장에 있는가?
결국 인간이 옳다, 그르다고 판정을 내리는 것은 대 자연에 대해서가 아니라 같은 인간들이 내놓은 것들 뿐이다. 이 ‘내놓은 것들’이 바로 인간들이 행한 실천이나 문화나 문명인데 이런 대상들은 모두 평가가 가능하고 판단이 가능한 것들이다. 그 이유는 인간들 끼리 의사소통이 가능한 구조로 짜여져 있기 때문인데 그 ‘의사 소통’이 가능한 구조로 되어 있다는 말은 곧 ‘언어구조 형식’으로 짜여져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곧 ‘언어 구조 형식’을 통해서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자 하는 것이 인간들의 옳고 그름의 개시이다. 인간은 자신의 실천성이나 행위에 옳고 그름이라는 판단을 부여하는데 따지고 보면 그 모든 것이 언어라는 형식에서 벗어날 도리가 없는 것이다. “꽥!”하고 고함만 질러도 이것이 그 사회 안에서는 서로가 의사가 통하는 언어로서 제 구실을 하게 된다.
예를 들어, 판사가 언도를 내리는 재판장 안에서 판사의 언어를 듣고나서는 갑자기 죄수가 “꽥!”하고 고함을 쳤다는 것은, 곧 “당신의 진위와 판단 여부에 나는 동의할 수 없어!”라는 죄수의 강한 불만을 드러낸 말이 된다. 따라서 인간들이 시도하는 모든 진리와 거짓, 참과 오류에 대한 분석은 언어분석으로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같은 성경 말씀을 놓고서도 서로 올바른 해석을 내놓았다고 하는 것도 결국 언어분석이라는 형식을 가지고 서로 내세우는 식이 된다. 그렇다면 과연 언어분석이 이 인간 사회에서 옳고 그름을 확정지어 줄 수 있을까? 사전에 각기 갖게 되는 선입견으로부터 과연 자유로울 수가 있을까?
만약에 언어분석 형식으로도 옳고 그름이 분명해지지 않는다면, 인간들이 소위, ‘나는 지름 바른 행위를 하고 있고 바르게 살고 있다’를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어디서 얻을 수 있겠는가? 도대체 무슨 근거로 “나는 이 말씀에 순종하고 있다”고 객관적으로 그 진리성을 제시할 수 있단 말인가?
언어 배후에는 선입견이 자리 잡고 있고, 그 선입견 배후에는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고, 과시하고 그 존재의 정당함에 가치를 두고, 그것으로 자신의 의로움과 윤리성을 자랑하고 싶은 욕망이 자리잡고 있다. 언어란 바로 겹겹이 접혀있는 이런 욕망이 내부적으로 편집되고 타협되고, 조심스럽게 조립되고, 그래서 정돈되어서 흘러나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내가 살아있으니 나는 기어이 살아남아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옳고, 정당하고, 마땅하다’라는 욕망의 목소리인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이 옳은 소리를 해서, 옳은 생각을 해서 옳은 것이 아니라, 남이 아닌, 나 자신이 발언했고, 나 자신의 욕망이 그것을 원하고 있으니 무조건으로 옳은 것이다. 쉽게 말해서 나의 욕망이 욕망대로 발산하겠다는 그 현상 자체가 욕망의 화신인 나에게는 이유 없이 옳은 일 일수 밖에 없는 것이다.
차후에 나의 말이 과연 옳았느냐 아니면 잘못되었느냐 하는 것은 결국 그런 검토와 반성을 하는 나 자신의 대견스러운 겸손만큼은 이미 옳은 행위라는 것을 기정 사실로 하여 실시되는 일일 뿐이다. 쉬운 예로, 신이 나보고 죄인이라고 했을때, 신의 그 계시에 순종하여 자신을 죄인으로 규정하는 그 행위만큼은 참으로 정당한 짓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정당한 짓은 나 자신에게서 도출되었다는 점에서 이미 나 자신 자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것이다.
즉 무조건으로 옳을 수 밖에 없는 나의 존재는 그 자체로서 이 세상에 모든 것을 판단하고, 분석하고 심판하고 규정짓는 당연한 자격자가 된다는 말이 된다. 내가 판단하기에 나의 판단을 옳을 수 밖에 없으며, 만약에 나의 판단이 틀리고, 옳지 않고, 죄악된 것이라면, 그런 잘못을 외부에서 제대로 지적해주는 판단자가 과연 나 밖에 따로 있음의 여부를 수용을 위해 판단에 필요해서 발휘되는 사전의 나의 판단력 자체는 늘 옳을 수 밖에 없는 법이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외부에서 우리 자신을 보고 죄인이요, 판단에 오류가 있다고 해도, 이미 자기 존재를 인식하고 있는 이상, “나는 항상 옳다”라는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는 노릇이다. 옳기 때문에 옳은 것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를 부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미 존재 자체가 무조건적으로 옳다는 바탕을 이미 장만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인간의 언어구조 이전에 존재 자체로 옳음을 성립되어 있는 형편이라면 차후에 인간 사회에서 타인과의 의사소통에 동원되는 언어구조는 결국 그 ‘존재에서 나오는 옳음’을 변명해주는 구실거리에 불과하다. 여기서 모든 언어는 ‘은유’이다는 원칙이 수립된다.
즉 진리와 언어가 일대일로 대응되는 것이 아니라, 그 언어의 쓰임새와 활용에 의해서 얼마든지 다시 ‘나는 항상 옳다. 왜? 나는 이미 존재하고 있으니까’라는 쪽으로 귀착되는 의미일 뿐이다. 그렇다면 언어란 자기 존재의 정당성을 비호하는 은유로서 그 인간에게 쓰여질 것은 뻔하다. 도대체 어느 인간이 자신의 죄인됨과 오류와 마땅히 저주받아야 됨을 말하기 위해 언어를 쓰는가?
그런 사람이 있다면 참으로 희한한 사람일 것이다. 스스로 자기 존재를 없애겠다는 사실일 것이 분명하다. 여기서 진리와 언어의 의미와의 관계를 살펴보아야 한다. 즉 언어는 규칙과 구조에 의존한다. 그런데 은유를 말하고 있는 자는 자기만의 언어 규칙을 따로 실행하고 있는게 된다. 과연 자기만의 의미규칙이 일반적인 언어 규칙에 통합될 수 있는가? 결국 규칙이란 궁극적으로 환상에 불과하며 은유야말로 다른 언어까지 포용해서 해석해버리는 언어 자체가 숨길 수 없는 현상이 되는 것이다.
은유는 언어 규칙을 진정으로 초월한다.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옳고 그름의 보편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언어도 역시 은유에 불과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거짓된 표현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게 된다. 기호가 지칭하는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예를 들면, 남자로 구성된 착한 여군 女軍) 그 기호는 거짓이라기 보다는 무의미한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언어 사용이란 참 진리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효용성과 관련있을 뿐이다. 즉 효용성이 높은 것이 더 진리답다고 말할 뿐인 것이다. 효용성이 곧 진리라는 말은, 인간의 자기 활동을 긍정하는 것이 곧 진리요 이런 자기 활동을 표현하는데 동원되는 언어들이 ‘진리적이다’이라고 정립하는 것이 된다.
사람이 법을 제정하고 규칙을 제정할 때에, 모든 자신의 행위 방식을 다 담아낼 수는 없다. 즉 인간의 어떠한 행위 방식도 규칙에 의해서 옳고, 그름을 결정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모든 행위 방식이 그 규칙과 일치하는 것으로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방금 강도짓 한 사람도 횡단보도에서는 교통 규칙을 지킨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교통 법규를 준수한 의로운 사람임이 확인된다.
결국, 법이라든지, 규칙 같은 것은, 인간이 평소에 자신이 얼마나 옳은 존재인가를 차후적으로 증빙하는 필요에 따라 차용하는 방식으로 준수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은 경험적으로 봐서 많은 관습과 풍습들이 편재되어 있다. 이것은 행동 패턴이다. 결코 규칙이나 법규를 준수해서 생긴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규칙이나 법규가 그 관습을 정당화 시켜줄 뿐이다.
만약 그 관습이나 풍습에 서툰 자가 있다면 그 사회 안에서 그 인간은 죄인으로 규정되어서 그 사람이 본디 느끼고 있는 자기 존재의 정당함을 대놓고 주장할 수가 없게 된다. 나그네나 이방인이기에 당하는 서러움이다. 따라서 그는 순응하든지 아니면 반대로 순교하든지 해서 자신의 존재의 옳음을 새롭게 증거하려고 한다.
남자가 넥타이를 매고, 여자가 치마를 입는 것은 그것에 무슨 의미가 있건 없건 관심이나 실행 또는 규칙을 구현하는 행위가 된다. 언어 역시 이와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언어들은 그 사회 질서 유지를 위하여 필연적으로 동원되기 마련인데 그 이유는, 닫혀진 사회 안에서는 원활한 의사 소통을 위해 동일한 의미 체제로 굳혀둘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즉 한 사회체는 마치 살아있는 생물체처럼 작용해서 자신의 사회는 이유없이 무조건 존재해야만 하고 번성해야만 한다. 바로 이러한 욕망들의 원활한 고류를 위해, 언어는 자체적인 법규를 제정하고 사회구성원들은 그 법규에 합의된 동의를 보내게 된다. 법규의 등장은, 바로 옳고 그름은 나름대로 차후적으로 규정짓기 위해 언어행위에 속한다.
즉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 하는 것은, 대조성과 차이성을 통해서 실시된다. 선택되지 않는 것은 배제될 것들이다. 배제된 죄악들(?)은 사회체의 존속에 방해가 된 것들이라는 인식을 사회 구성원들이 합의를 보았기 때문에 배제된다. 대자연 세계가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알바가 아니다. 인간들이 어떤 욕망을 발산하느냐 따라 언어는 은유적으로만 의미를 함유하게 된다.
모든 개념은 대상에 대해서 참과 거짓으로 정의된다. 이것은 개념들이 범주적으로 나타난다는 말이다. 그 영역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면 진리가 아닌 거짓으로 배제될 대상이 되어버린다. 이런 점에서 언어가 지나가는 자리에는 권력이 긁고 지나간 흔적을 남긴다.
문법도 법이다. 법이 있는 곳에는 권력이 발생된다. 문법을 규칙이 요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 존재를 구성하는 욕망에 대해 자아가 규칙적으로 대응한다는 말이 된다. 즉 맹목적인 충동을 반복적인 질서로 바꾸어놓는 식으로 자아가 대처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주체 안에 뭐가 들어있기에 무질서에 체제를 잡아 질서로 바꾸어놓는가?
주체는 언제나 자신의 상실을 회복하고 자기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토대를 주체 외부에서 찾게 된다. 그 외부란 바로 대상이다. 이로서 대상이 없이는 주체가 자기 모습을 갖출 수가 없다. 주체와 대상은 서로 연류되어 있다.
주체 안에 외부 대상이 놓이게 된다. 이것은 주체가 자아를 온전히 소유하거나 장악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쉽게 해서 본인의 안구를 생각해보자. 우리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지만 그렇게 보고 있는 우리 자신의 일부, 즉 안구만은 볼 수 없다. 안구를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우리 외부에 투사시키는 거울을 보는 것이다. 주체는 바로 이와 같은 안구와 같다. 주체는 그 자체로는 결코 파악될 수 없으며, 오직 현실의 거울 속에서만 보이는 주체이다. 여기서 비유로 말한 거울이란 곧 현실 세계를 의미한다. 즉 주체는 현실을 통해서 파악된다.
이 주체가 말을 하고 말을 건다는 것은, 거울이 대한 세상에 대해서 건네는 것이다. 그렇게하는 이유는, 그 행위를 통해서 주체가 정립되기 때문이다. 주체는 그런 방식이 아니라 자신을 정립할 수 없다. 말을 하는 가운데서 주체는 자기 존재를 외부에 걸어놓는다. 말하자만 나 외부에서 나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즉 나는 나 자신이 바깥, 나를 대신 표현해주는 기호로서 나의 단일성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처럼 만약 내가 나의 외부에서 나 자신을 발견한다면, 나는 더 이상 자기 동일적이지 않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왜냐하면 기호가 곧 나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달리 나를 표현해줄 방법이 없이 임시적으로 표현하는 것 뿐이기에 언제든지 다른 세상, 다른 시절, 다른 사회 속에 놓이게 되면 나는 지음의 나를 표현할 다른 기호를 동원시키게 된다.
그런데 아무리 시대나 주변 환경이 바뀌어서 나 자신이 죽어야만 함을 이야기해 줄 수 있는 기호는 없다. 왜냐하면 어떤 기호를 선택하여 ‘나’라고 규정하는 그 주체는 없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주체는 계속 상실되는 경우를 강요받아도 계속해서 그 어떤 기호를 동원시켜서 회복되고자 노력하게 된다.
이러한 자아의 쉴새없는 반복적인 노력은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끝없이 춤추는 충동적 리듬은 자아도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다. 아무리 자아를 열린 마음으로 외부로 개방해도 주체는 번번히 폐쇄적으로 돌아선다. 이것은 수축을 의미한다. 하나의 적절한 기호 안에서 강하게 응축되고 싶어한다. 이로서 주체는 내란을 경험한다. 주체를 표현해주는 기호는 기껏 비유와 상징에 머문다. 따라서 나의 존재를 계속 충족시켜 줄 수는 없는 일이다.
다른 적합성을 가진 기호로 반성하며 대체하려고 한다. “나는 적어도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야 돼”라든지, “나는 적어도 지금쯤 이런 인간이 되어야 돼”라는 욕망의 목소리를 내부에서 들려온다. ‘자기’는 끊임없이 갱신되는 것이다. 이것을 ‘분열된 주체’라고 할 수 있다.
이 ‘분열된 주체’에서 소위 ‘윤리’가 피어난다. 선과 악이란 이런 분열된 주체를 봉합하는데 과연 기여 할 수 있느냐 여부에 달려 구분 지어진다. 즉 내가 되고 싶은 내가 되는데 도움이 되는 쪽은 선이고 방해가 되어 더욱 분열의 폭을 넓히면 악이 된다. 바리새인들과 사도개인들과 서기관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계명(기호)을 놓고 그 상징과 자아를 일체시키려고 노력할 때에, 예수님은 그들을 보고 ‘악마의 자식=독사의 새끼’라고 하셨다.
따라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악의 화신으로 간주해서 처형하지 않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그들이 노출시킨 윤리성의 본질이다. 그들은 내부적으로 내란이 없이 행복해지고 싶었다. 통일된 주체성이고 싶었다. 피곤한 신체가 건강을 욕망하게 되면 주체는 ‘건강한 신체’가 곧 자아 자체이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불행하고 그것이 유지되는 기간만큼은 행복하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슨 연유로 이런 자유스러움조차 악으로 분류했을까? 그 이유는, 그런 신체로부터 다른 거룩, 다른 의로움, 다른 사랑, 다른 진리, 다른 메시야, 다른 하나님관이 뿜어져 나오기 때문이다. 즉 절대성에 대한 왜곡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 절대성 왜곡 현상은 인간들이 무제한적인 자유를 담보하고자 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즉 ‘나에게는 무제한적인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이다. 이 자유의지에서 이성적인 실천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성적인 실천이란, 악을 통제하고 선을 실행시키는 실천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실천을 통해서 결국 맺어지는 것은, 무한한 자유가 보장되는 조건 하에서만 무한하게 넘치는 선행이 가능하다는 논리로 귀결될 뿐이다. 이렇게 되면 인간의 무한한 자유를 방해하는 것이 곧 죄악이 되는데 왜냐하면 선을 행할 기회들을 방해하고 박탈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즉 선을 행하기 위해서는 절대적 선이 문제거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제한없는 절대 자유가 인간에게 먼저 주어져야 한다. 절대 자유만 주어지면 미흡한 것은 되풀이해서 수정 들어가면 언젠가는 바라던 선에 도달할 수 있는 기회가 늘 열려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서 악이 발생된 원인은 다른 곳에서 찾을 필요조차 없게 해야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쏟아지는 장마비에 차가 미끌어져 사람을 치게 했다면, 사람을 치게 한 것이 자기 잘못이 아니라 장마비에 있다고 원인을 따로 소급시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부단한 훈련과 좋은 장비를 갖추고 그 다음에는 아무리 많은 비가 쏟아져도 사람을 치는 일을 방비할 수 있는 기회가 그 사람에게 무한히 주어지는 한 그 사람은 악을 선으로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사람이 부당한 짓을 저질렀다해도 그 벌에 대한 상응한 형벌을 받고서도 그에게 여전히 자유가 주어진다면 그 사람은 또다시 그 같은 부당한 짓을 저지르지 않는 선한 인간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참으로 인간에게 선을 원한다면 ‘인간에게는 무제한적인 자유가 주어졌음’이 선결조건으로 주어져 있음을 확인하면 그만인 것이다.
인간에게 죄책감이 들었다고해서 그 사람에게 자유를 박탈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결국 무제한적으로 선을 행할 수 있다. 그런데 만약이 그 무제한적인 자유를 외부에게 가져다 주는 것이 되면 그 자유는 진정한 자신의 것으로서 사용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주어진 자유는, 주신 그 주체자의 분의 자유스러운 주체적 본질이 함유된 자유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자유를 행사는 주체자의 자유가 아니라 자유를 제공한 자의 자유를 대리적으로 행사하는 셈이 된다. 그런데 인간에게 있어 무엇이 죄였던가? 바로 주체적의 주체적 행사를 마음껏 하기 위한 무제한적 자유를 방해하거 훼방하는 것이 죄가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외부에서 주어진 자유는 인간에게 계속 죄로서 느껴질 뿐이다. 이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죄에 종속됨을 의미한다.
따라서 인간의 무제한적인 자유는 인간 자체 내에서 무제한적으로 인간 본유의 것으로서만 생산되어야 한다. 그렇게 자생한 자유만이 그 실천을 행사한 주체를 행복하게 만든다.
행복이란 그 모든 원인과 결과의 사슬에서 벗어나 있는 것을 의미한다. 즉 주체자 본인이 원인이고 또한 결과가 될 때, 그래서 자체적으로 자존하고 자립할 때, 주체는 통일된 일체성을 경험한다. 즉 더 이상 분열을 모른다는 말이다. 이 때만 행복하다.
그런데 주체는 행복하고 싶어도 인간의 신체는 욕망적으로 이 행복을 여지없이 깨뜨려버린다. 예를 들면, 누가 단꿈을 꾸고 있는 자신을 화들짝 깨우면 얼마나 신경질 나겠는가! 잠자고 싶은 자유를 사용하고 싶어도 소음이 가득 찬 공장 내에서는 불가능하다.
비록 나쁜 짓이나 양심에 위배되지 않는 일을 했음에도 충분한 행복감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이 현실세계 안에서 주체는 어떻게 대처하는가?
그것은 타인에게, 혹은 자연에게, 혹은 신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방식으로 나아간다. ‘근본악’ 혹은 ‘원죄’라는 개념을 형성시켜 주체에게 그 책임을 묻지 않게 하여 죄책감을 줄여나가는 방식을 채택하게 된다.
쉽게 말해서, 원죄에 대해서 신 쪽에서 책임지고 처리해주시고, 자범죄에 대해서는 우리의 이성적 자유 발휘로 처리해야 한다는 생각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에 모든 죄에 대해서 책임을 묻게 되면, 인간이 자유를 발휘하면 할수록 그 책임성이 생각나서 죄책감만 자꾸만 증가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인간은 이중적인 태도를 취한다. 주체가 자유롭기를 원하면서도 자신이 감당치 못하는 죄에 대해서는 자신의 자유를 반납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야 그 죄에 대해서는 본인에게는 책임이 면제되기 때문이다.
즉 힘들게 살아가면서도 계속 선한 존재이고 싶어 한다. 자아는 자아 통일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로서 주체는 자유와 부자유 모두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 한다. 악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지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자유가 없는 주체는 없다고 믿는다. 이것이 ‘주체의 추상화’이다. 초월적 주체관인 것이다. 모든 인간이 행동에 나설 때는 초월적 주체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