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과 귀신 들린 자 2003년 6월 15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8:28-34
Re..마 8:28-34 (예수님과 귀신들린 자)
이름 : 이근호(IP:)
예수님과 귀신 들린 자
2003년 6월 15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8:28-34
8:28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저희는 심히 사나와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만하더라
8:29 이에 저희가 소리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8:30 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 떼가 먹고 있는지라
8:31 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하여 가로되 만일 우리를 쫓아 내실찐대 돼지떼에 들여 보내소서 한대
8:32 저희더러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
8:33 치던 자들이 달아나 시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과 귀신들린 자의 일을 고하니
8:34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귀신이란 참으로 낯선 용어입니다. 현대는 과학시대이며 모든 것을 합리적으로 따져서 생활해야만 하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사람 안에 귀신이 들어 있다는 주장은 도저히 받아들이기 곤란한 주장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귀신의 존재가 아니라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오셔야 하는지 밝혀지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눈에 보이는대로 과학적으로 따지는 것은 사실 껍데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본질적인 면은 따로 있습니다. 에베소서 2:3-4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이에 저희가 소리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즉 귀신은 인간들이 보지 못하는 세상의 근원의 법칙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남에 대해서 부산을 떱니다. 왜냐하면 그 하나님의 아들이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하는 일을 모릅니다. 그것은 귀신에 매여 있기에 왜곡된 세상관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3:16-17에 보면,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가 그저 일반적인 가족 관계인 것처럼 연상할 것입니다. 즉 하늘 나라에서 두 분이 사시다가 잠시 헤어져 한 분이 내려오신 것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곧 이은 마태복음 4장에 들어가면 마귀가 예수님의 대해서 집요하고 공격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 대목을 놓고서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됨'이 갖는 특수한 임무에 대해서 이미 마귀를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에게 세가지 시험을 하시는데 이 유혹은, 보통 인간에게는 극복하기 불가능한 시험들입니다. 경제적인 유혹과 획기적인 기적이 동반한 사명의식과, 세상의 부귀, 영화는 평소에 사람들이 갖고 싶어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의 입장에서는 이런 유혹을 들어주는 것은 멸망시켜야 될 자와 한 통속이 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세상이란 그저 평범하고 고요했습니다. 멸망이라는 단어보다 타협이라는 단어가 더 진리처럼 통하는 그런 평화로운 세상입니다.
그래서 비록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님이 나타나셔도 사람들은 그 예수님에게 요구하는 것이, 그저 조용스럽게 살다가 조용하게 죽는 것입니다. 세상이란 그저 그런거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정작 멸망당해야 될 대상이 되는 악마에게는 심각한 위기로 파악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등장은 곧 이 세상에서 악마의 세상의 종결을 뜻합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의 근원과 자기 자신의 근원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9:14-15에 보면,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불쌍한 것은, 그들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만 온종일 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이 못하는 것을 주님이 해내신다는 사실을 모르면서 말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근원을 안다는 것은, 우리 인간들이 어떤 율법 지키기와 그 어떤 선행을 한다해도 그것으로 구원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구원되는 겁니까? 악마가 고백했듯이 그 점은 '하나님의 아들'만이 해낼 수 있는 몫입니다. 그 작업이 마태복음 12:28-29에 나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즉 인간은 인간보다 더 강한 세력에 묶여 있다는 겁니다. 그 강한 세력을 꺽을 분은 인간에게서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아들 뿐임을 악마도 알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왜 인간들은 이 사실에 어두운 건가요? 그것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분이며 어떤 역할 하는지는 악마의 고백에 따라 악마와의 연관성에서 파악되어야 합니다. 창세기 3:15에 보면, 뱀의 후손은 필연적으로 여자의 후손과 싸움을 피할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누가 이기는가? 반드시 여자의 후손이 이기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악마가 자신의 멸망을 가만히 두고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편 2:1-3편에 보면,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악마는 지금도 할 수만 있다면 국가 권력까지 동원시켜서 하나님의 자녀와 하나님의 아들과의 관계를 끊으려고 합니다. 또한 그 힘보다 더 무서운 것은 양심에 호소해서라도 예수님과의 관계를 청산시키려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어떤 경우라도 예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습니다. 로마서 8:33-39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수 없으리라"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의 임무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기에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는 상황에서 자기 백성을 끄집어내어 주시고 그런 자를 자기 소유로 삼는 일입니다. 로마서 14:7-8에 보면,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악마가 인간에 대해서 결국 노리는 점은 무엇입니까? 이 점에 대해서는 오늘 본문 돼지들이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돼지들이 평소에 바다가 좋아 그 바다에게 수영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돼지는 바닷물을 기피합니다. 하지만 이 사나이 속에 들어 있던 귀신들이 그 안에서 나와서 돼지 속으로 들어가자 귀신의 본래의 모습이 드러났습니다. 돼지는 주체도 못하고 귀신이 요구하는데로 바닷물에 빠져서 몰살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귀신들이 인간에게 노리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죽음입니다. 영원한 멸망입니다. 물론 우리가 이 점을 잘 알고 있다고해서 우리가 그 악마의 세력권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자꾸 이 세상과 친숙해지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이 오게 되면 그 때부터 진정한 강자가 누군지를 알게 됩니다. 근원적으로 이 세상의 강자는 예수님 뿐입니다. 흔히 젊은 이들을 보고 '철이 없다'고들 이야기하지요. 그들은 현실의 냉혹함을 너무 모른다는 겁니다.
중학교, 고등학교 때, 학교 내에서는 주먹이 세고 싸움하려는데 강한 집념을 보이면 모두들 두려워하고, 말을 조심하고 슬금슬금 피하게 됩니다. 그 시절만 두고 보면 마치 이 사회에서 최고의 위치에 앉은 것 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학을 다니고 사회에 나가면, 주먹세다고 해서 남들이 두려워하거나 존경해 주지 않습니다.
그 대신을 말을 잘한다든지, 배운 것이 많다든지, 집안에 잘 산다든지 하는 것이 새로운 힘으로 등장됨을 알 수 있습니다. 개인적을 무술이 뛰어나서 일대일 싸움에서 남을 이기는 것은 마치 짐승들이 하는 천박한 짓거리처럼 간주됩니다. 태권도도 어릴 때 배우게 되지 커서 누가 배웁니까?
남 공부할 때 공부할 시기 다 놓치고 취미생활이나 하다가 막상 사회에서 지식과나 기능을 요구할 때 아무 것도 내 놓을 것이 없을 때는 마치 중학교 때 지지리도 싸움못해서 맨날 무시당하는 그런 학생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니다.
그런데 거룩한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런 기준조차도 어쩌구니 없이 무지몽매한 사고방식에 불과합니다. 이제 우리는 사선을 넘어섰다고 여기고 거기서 세상을 뒤돌아볼 수 있는 눈이 열리기를 원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참된 행복이란 끊어지지 않는 예수님의 사랑 뿐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자기 입장에 고집세우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세상을 근원적으로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