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26 : 16-19 (죽이심과 살아남)
사 26 : 16-19 (죽이심과 살아남)
이름 : 우리교회(IP:220.81.176.151)
본문 : 이사야 26장 16-19절
제목 : 죽이심과 살아남
일시 : 2006년 12월 13일
http://222.231.1.74/~woorich1/성경강해/이사야-2005/066강-사26장,16-19,(죽이심과,살아남)-isa061213.hwp
이근호
06-12-13 21:03
죽이심과 살리심
2006년 12월 13일 본문 말씀: 이사야 26:16-19
(사 26:16) 『여호와여 백성이 환난 중에 주를 앙모하였사오며 주의 징벌이 그들에게 임할 때에 그들이 간절히 주께 기도하였나이다』
(사 26:17) 『여호와여 잉태한 여인이 산기가 임박하여 구로하며 부르짖음 같이 우리가 주의 앞에 이러하니이다』
(사 26:18) 『우리가 잉태하고 고통하였을지라도 낳은 것은 바람 같아서 땅에 구원을 베풀지 못하였고 세계의 거민을 생산치 못하였나이다』
(사 26:19)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 놓으리로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늘 우리가 감히 예상하기 힘든 일을 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의 기대를 믿지 않고 포기했다는 뜻도 됩니다. 참된 믿음은 인간이 절망가운데 진짜 가짜가 구분됩니다. 참되게 믿는 자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나님께서는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하시는 일을 마치 ‘아침 이슬’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저녁 때까지도 바짝 말라있는 대지 위에 새벽이 되면 모든 장소에 반짝반짝 아침이슬이 맺어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죽은 대지라 할지라도 이슬의 생명을 출현을 막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 인간이 막을 수가 없고, 또한 우리 인간이 재현할 수도 없습니다. 마치 새벽마다 우리 인간들이 아침이슬을 만들어서 온 대지 위에 깔아 놓을 수 없듯이 말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이러한 개성과 특성과 성격을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과 공유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죄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로마서 14:23에 보면, 믿지 않는 것이 죄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의 행함이 다 믿음으로 행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들이 믿고자 하면 죄가 아니될 수 있겠네 라고 쉽게 정리하고 싶을 것입니다. 하지만 로마서에서의 믿음이란 로마서 4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나옵니다. 그 아브라함이라는 분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즉 아브라함과 같은 질의 믿음이 아니라 아예 믿음이라고 간주해주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 즉 이삭의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전에 이미 그는 이스마엘이라는 자식은 자신의 행함으로 생산해 놓은 상태입니다. 이로서 아브라함에게 있어 ‘믿음’이란 이스마엘의 가치를 거부하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곧 자신의 행함이 하나님일이 아님을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하나님의 약속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믿지를 않고 오히려 거부하는 자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정수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스스로 달성하시는 바가 곧 하나님의 약속임을 인정했습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 인간보고 약속을 이루라고 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가지고 자신의 약속을 이루시는 분임을 믿은 것입니다.
우리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죽이시는 것도 하나님의 약속 달성에 포함된 일이요 부활시키는 것도 하나님의 자기 약속 달성에 포함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이것이 믿어지는 것도 또한 하나님의 자기 약속 성취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행함을 거부하시는 겁니까? 고린도전서 15:22에 보면,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담이라는 우리 조상은 선악과를 따먹은 순간부터 이미 죽은 자입니다. 아담의 관점에서 보지 말고 하나님 관점에서 봐야 합니다.
하나님 관점에서 보게 되면, 선악과를 이미 따먹은 아담은 원래 하나님께서 의도했던 그 인간이 아닙니다. 그 인간이 아니라면 그것은 참 인간으로서 이미 죽은 존재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아담이 930년을 이 땅에서 살았다 하더라도 마지막은 흙이니 결국 그는 흙에 불과한 자입니다.
아담이 죽는 것은 죄 때문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죄가 있다면 누가 뭐래도 이미 죽은 자 맞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5:22에 보면, 아담 안에서 모든 인간이 죽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원리는 중요합니다. 아담이 선악과 때먹을 당시 저희들은 아직 이 땅에 태어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담 안에서 모든 인간을 죽이는 방향으로 아담을 규정짓고 말았습니다. 이 규정을 후대의 인간들이 아무리 거부해도 하나님께서 결정지은 해석 원리를 우리 힘으로 취소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죽은 자 맞습니다. 이 아담이 가진 언약 원리를 우리가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지 않습니다.
이것을 만약이 거부하면 자꾸만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과 일에 대해서 오해만 갖게 될 뿐입니다. 그 예가 요한복음 11장에 나옵니다. 마리아, 마르다, 나사로, 이렇게 세 식구가 오붓하게 살다가 갑자기 오빠인 나사로가 죽어갑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누가 뭐래도 분명히 오빠가 죽어가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살아있을 때 그를 살리기 위해 급히 예수님을 부르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일부러 시간을 지체해서 나사로가 완전히 죽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죽고 난 뒤에 마르다와 마리아를 찾아갑니다. 이것인 얼마나 인간들이 예수님이 하시는 취지를 모르고 엉뚱한 자기 개념들을 갖고 있는가를 폭로하기 위함입니다. 마르다는 이야기합니다. 이미 자기 오빠가 죽어버렸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안목은 다릅니다. 나사로는 여전히 살아있다는 겁니다. 전에도 살아있었고 지금도 살아있다는 겁니다. 여러분 누구의 말이 맞습니까? 이미 오빠 나사로는 장례식을 분명히 치르고, 무덤에까지 안장시킨 이후입니다. 그렇다면 이미 죽은 것 맞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나사로가 멀쩡하거나, 병석에 누워있을 때나 무덤 속에 있을 때나 그 어떤 때라도 안 죽고 살아있기는 동일하다는 겁니다. 이런 취지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다,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불러내니 죽은지 나흘이나 지나서, 썩는 냄새가 풍겨나도 멀쩡하게 무덤에서 걸어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진실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수시로 자기 백성을 관리하십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도 용광로 속에서 건져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만의 구원을 위하여 부활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살아나심은 사도행전 13:30에 보면,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심’입니다. 이 원리가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오는 원리, 즉 ‘예수 안에서 모든 자가 삶을 얻으리라’입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취소시킬 그 어떤 인간의 행위도 없습니다. 마치 아담의 범죄를 후대 사람인 우리가 막을 수 없듯이 우리 주님의 용서하심을 후대의 우리의 행위로 무효화시킬 수는 없는 법입니다. 이로서 우리는 성경 한 구절 한 구절 마다 우리의 믿음을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일괄적으로 예수님의 하실 일을 믿음으로서 주님의 관리대상에 해당됨이 확인되는 겁니다. 바로 이것을 믿어진다는 것이 부활의 영에 의해서 주어진 믿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사전에 물어보시지도 않고 부활하시기로 결정내리신 주님의 은덕을 잊지 않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