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주름]" 철학과 신학의 허상 시리즈-
[일반] [주름]' 철학과 신학의 허상 시리즈-
이름 : 이근호(IP:220.64.214.30)
[ 주름 ] 질 들뢰즈 저 이찬웅 역 문학과 지성사( 서울: 2004)
이 책은 명목적으로는 바로크 예술과 관련지어 라이프니츠의 철학을 분석한 책이다. 하지만 정작 저자가 전하고 싶은 바는, 현대 사람들에게도 난제로 간주되고 곤란한 질문으로 분류되는 의문점들을 감추지 않고 라이프니츠의 논리 안에서 전시하고 해결점을 제공해 보겠다는 것이다.
그 중의 몇 가지를 나열하면, ‘아담이 범죄했는데 왜 후대 사람들까지 그 벌칙에 동참해야 하느냐’하는 문제나, 또는 ‘영혼은 신체(물질)와 어떤 관련성을 갖는가’하는 문제나, ‘신이 자연을 창조할 때 어떤 식으로 창조했느냐’하는 문제나, ‘같은 인간들이 공통점을 지니고 교류가 가능하면서도 왜 각 개인은 따로 자기만의 고유함을 가져야만 하느냐’하는 문제나, ‘인간에게 있어 감각적인 것이 어디에서 끝나고 신앙적 지성이 어디에서 시작하는지’ 하는 문제나, ‘신의 지속적 창조를 과연 인간이라는 주체자가 행하는 의로운 행위로 환원시킬 수 있느냐’와 같은 문제가 과연 우리 인간 쪽에서 해결 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난제들의 해결책은 각기 따로 풀어낼 필요가 없는데 그 이유는 신의 창조 행위로 다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창조 행위가 바로 ‘주름과 차이성’이다. 신은 사건을 통해서 창조하신다. 이는 모든 존재물들은 그 안에 신의 창조적 사건들을 품고 있다. 따라서 피조물들은 그냥 가만있는 것이 아니라 부지런히 움직인다. 그 움직임의 양상이 ‘주름 접힘’과 ‘펼쳐짐’과 ‘말아 넣어짐’이다. 그 종(種)에게 부여된 전개의 정도까지만 펼치는 능력에 의해서 그 개체는 정의된다. 이것을 조형력이라고 한다. 즉 외부의 힘에 관계없이 스스로 펼쳐나갈 수 있는 힘이다.
이 힘을 라이프니츠는 ‘영혼’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있어 몸보다 영혼이 우선이다. 영혼이 몸을 만드는 것이다. 몸은 영혼이 그 안에 구현되어 있는 존재이다. 그런데 이 영혼은 개별적 영혼이다. 라이프니츠에 있어 ‘보편적 정신’이라는 가설은 거부된다. 생명체는 보편성이 아니라 편재적으로 있다. 이것은 일반적인 정신이나 생명 개념을 거부하고 특수하고 개체적인 것들의 충만으로 세계를 설명하고자 하는데서 비롯된다.
라이프니츠에 있어 ‘영혼’, 즉 ‘힘’이라는 주름으로 되어있기에 그 고유의 영혼은 고유의 ‘주름 펼쳐짐’을 통해서 구현된다. 이것은 그가 정신적 영혼관이 아니라 사물적 영혼관을 기초로 한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죽음의 상태에도 영혼은 자신이 있었던 바로 그곳에 있고, 신체의 부분이 아무리 줄어든다 하더라도 그 부분 안에 머물러 있다.
이 영혼관이 곧 라이프니츠에 있어 주체관이다. 이처럼 라이프니츠는 개체의 의미를 살리는 식으로 이해한다. 라이프니츠는 신이 우주를 창조할 때 단자(單子= 모나드)를 먼저 만들었다고 한다. 물질보다 이것이 먼저라고 한다. 질료를 빚어서 개체를 만든 것이 아니라 개체를 어떻게 만들 것인지 그 규칙성부터 먼저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말의 철학적 의미로 본다. 그리고 나서 질료를 만들어 그에 단자를 구현시켜 개체들을 만든 것으로 보고 있다. 플라톤의 경우, 형상의 세계에 데미우르고스가 따로 있고 데미우르고스가 형상을 본떠서 질료를 빚는다고 보고 있다. 그런데 기독교 전통에 속해 있는 라이프니츠의 경우, 형상은 신의 머리(오성) 속에 들어 있는 것이고 질료는 나중에 창조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무개라는 개체가 죽어서 해체되어도 그 아무개의 설계도는 남아 있는 것이다. 그 설계도의 규정성도 이미 아무개의 단자 안에 들어 있다. 단지 변화란 그 접혀있던 규정성이 펼쳐지고 있을 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사물의 ‘형상’이란 종의 층위에 위치한다면 라이프니츠의 형상은 개체의 층위에 있다. 라이프니츠가 이런 논리를 펴는 근저에는 바로 그 자신이 발명한 ‘무한소 미분론’ 때문이다. 이 세계의 기본 특징은 다채롭다는 것이다. 다채롭다는 것은 라이프니츠가 사물들간의 질적 차이를 부정하지 않기 때문이고 당연히 다채로워야 하는 것은 이 세계가 풍요로우면 풍요로울수록 신의 위대함을 표현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세계는 무한히 많은 영혼과 무한히 많은 시선들이 있다. 그 하나하나의 영혼과 시선 안에서 모든 세계가 포함되어 있다. 아담이 죄를 지은 세계는 오직 죄인 아담 안에서만 실존한다. 다른 한편, 신은 죄인 아담이 아니라, 아담이 죄를 지은 세계를 창조한다. 다른 말로 말해서, 세계는 주체 안에 있지만, 주체는 세계를 향해 있다.
신은 영혼들을 창조하기에 앞서 세계를 만든다. 왜냐하면 신은 자신이 영혼들에게 집어넣는 그 세계를 향해 영혼들을 창조하기 때문이다. 라이프니츠가 왜 이런 주장을 하느냐 하며는, 유한자의 무한한 열려 있음을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무한을 유한하게 표상하므로서’, 세계가 각 영혼(단자) 안에서 다시 시작될 가능성을 부여하게 된다. 주체가 세계를 향한 것이 되도록, 세계를 주체 안에 놓아야만 한다. 세계와 영혼의 주름을 구성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비틀린 기능이다.
바로크 문화란, 이런 내부적으로 닫혀있는 채 무한을 향한 상승을 표출하는 문화이다. 내부의 자율성과 외부의 독립성 사이의 분리다.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표현한 경향이다. 그럼에도 그 안에는 모든 세계의 성질이 다 포함되어 있다. ‘절대자가 머무는 작은 궤’를 구성한다. 이것은 곧 인간의 신체를 대변한다.
그 안에서 영원한 주기성이 작동한다. 신의 무한함이 신체 안에서 작렬하는 것이다. 그 무한함은 다른 무한함에 뒤지지 않는다. 이 무한함을 신은 창조적 사건으로 설명될 뿐이다. 각 단자가 온 세계를 표현하는 것처럼, 주어에 대해서 단 하나의 개념 이외에는 있을 수 없고, 그리고 주어-모나드들은 이제 세계를 표현하는 그들의 내적 방식에 의해서만 서로 구별될 것이다. 즉 유사한 주어는 없고 유사한 개체도 없다.
이것들은 모두 불가능성에 의해서 창조된 것이다. 불가능성이란 모순과는 달리 둘 다 불가능하다는 말이 아니라 단지 함께 가능하지 않다는 말이다. 즉 ‘아담이 죄를 짓다’와 ‘아담이 죄를 짓지 않다’가 모두 가능하다. 다만 함께 가능하지 않을 뿐이다. ‘아담이 죄를 짓다’도 가능하고, ‘아담이 죄를 짓지 않다’도 가능하다. 다만 둘이 함께 가능하지는 않다.
이러한 원리는 라이프니츠가 세계를 보는 중요한 원리가 된다. 하나님에게는 오늘날과 같은 이 세계 말고 다른 세계도 만들 가능성도 있지만 그런 여러 가능성 중에서 이 세계가 가장 최선의 세계이기 때문에 이렇게 만드신 것이다. 소위 ‘최적화(optimization)' 원칙을 사용하신 것이다.
라이프니츠에 있어 ‘힘’, 즉 영혼이란 이미 관계성을 함유한 개념이다. 절대 자립적 힘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고 힘이란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한 상태를 의미한다. 단자가 지닌 본질적 다른 우주와 거대한 망상 구조라는 관계를 지닌 힘을 발산한다. 그것이 공간이고 물체이다. 각 영혼은 세계와 그물처럼 얽혀있고 그런 의미에서 세계를 반영하고 있다. 이것을 실체의 입장에서 보면 마치 세계가 단자 속에 압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달리 말해서 실체를 먼저 상정하고 그것의 상호 작용을 물을 것이 아니라 상호 작용을 먼저 상정하고 그것이 ‘실체’를 어떻게 현상하는가에 대해 물어야 함을 뜻한다. 이것이 ‘상호 작용의 실체화’이다. 이 상호 작용이 어떻게 ‘실체’(물질, 정신)를 현상하는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인간 몸의 경우를 들면, 영혼과 육체의 관계에 있어 영혼이란 현실화된 것을 말하고, 신체란 실재화된 것을 말한다. 현실화란 늘 사건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뜻하고, 실제화란 사건화 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이 둘 사이가 상호작용을 하고 있는 것이 인간의 몸이다.
이로서 ‘단자는 창문이 없다’라는 것이 아니라 단자, 영혼, 개별적 창조 힘, 그 자체가 세계와 교류하는 창문인 것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 신성(神性)은 가능한 한 존재의 양을 최대한으로 창조하려 할 것이며(형이상학적 완성), 행동의 양을 최대한으로 창조하려 할 것이다.(도덕적 완성) 그러므로 창조의 순간에 신은 모든 가능성을 충족시킨 것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뭐든지 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경우를 일으키지 않고 유독 어떤 사건만 일으키시는 이유는, 그것은 전체 우주에 제일 적절하게 조화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라이프니츠는 ‘악’의 문제나 인간의 범죄나 자유의지 문제도 한꺼번에 해결한다. 즉 신은 가능한 한 최대한도로 서로 간에 조화를 이루는 실체들만 현실화한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것이다.
세상은 수많은 정신들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최선의 공화국이기도 하다. 그 안에서 정신들은 가능한 한 최대한의 행복과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 우리가 보기에 이 세상은 대단히 불완전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대안이 무엇인지 안다면 우리는 신에게 크게 감사드려야 할 것이다.
그에게 우주의 모든 것은 신에게 귀속된다.
하나이면서도 질적인 여럿이라는 두 개념이 어떻게 연결시킬 수 있을까? 바로 ‘주름’의 개념을 통해서이다. 여기서 단자를 하나하나를 주름들로 접혀 있는 존재들이기에 여러 질들을 통일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다른 존재들로 생각할 수 있고 관계 지울 수도 있다. 인간의 정신의 특징은 자기의식에 있다. 자기가 스스로의 내면을 응시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 우리 자신의 성질이 펼쳐진 것을 뜻한다.
그러면서도 인간이라는 존재는, 인간의 의식은 자체 충족적이지 않다. 그것은 항상 자신의 타자를 향한다는 것을 뜻이다. 이것은 흔히 ‘지향성(志向性)intensionalite’이라고 한다. 즉 최종적으로 신을 향한다. 신은 세계의 모든 것의 최종적인 목적인이다. 세계는 어디까지나 디자인된 존재이다. 신이 오성 속에서 수많은 세계들을 디자인했고 그 중 하나가 지금 이 세계로 구현된/현실화된 것이다.
세계란 이렇게 무한한 인연의 실타래로 엮여 있어 그 관계들은 우발적인 것들이지만 그에게 있어 우발이란 순수 우발이 아니라 신에 의한 선택이다. 때문에 모두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하나의 원천(=신)으로부터 수많은 강물들(계열들)이 흘러나오는 것과도 같다. 이러한 펼쳐짐이 각 개별자가 지닌 주름 안에 담겨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은 각자의 ‘인생 행로를 걸어간다.
죽는다는 것은 미세 지각으로 돌아다는 것이고 따라서 기관들이 없는 물질 속에 퍼져 있다는 것을 뜻할 뿐이다. 그래서 전적인 탄생이나 완전한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경우들은 영혼의 분리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탄생이라 부르는 것은 발생/펼쳐짐이자 생장일 뿐이며, 죽음이라 부르는 것은 접힘이자 쇠퇴일 뿐이다.
이성과 의지는 인간 주체가 자기 삶을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원동력이라고 볼 때. 의지라는 개념에는 힘이라는 개념이 암암리에 내포된다. 진정한 노동은 인간이 몸을 써서 세계를 변화시키고 그 변화를 통해서 스스로도 변화해 나가는 과정으로 본다. 어째든, 영혼은 스스로 노래하며, 이것이 자기-향유의 토대이다. 창조의 발산, 창조력의 광기, 원뿔이 넓은 밑면을 가질수록 높은 꼭지점을 지닌다는 것은 세상이 변화무쌍하고 아무리 다양성이 넘쳐나도 그 다양도가 커지면 커질수그것을 사유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오히려 단일성에 있음이 분명해진다는 논리이다.
(평) 언약이라는 것, 그리고 그 언약의 완성이 십자가라는 것을 빼놓고서 기독교를 설명하면 이 라이프니츠 이론 밖으로 벗어날 수 없다. 자아의 충족성과 신을 향한 그 완전의 발걸음을, 인간 속에서 작열하는 신의 창조 능력으로 설명하는 논리의 완벽함은 모든 기독교 신학자의 주장보다 월등하다.
십자가가 빠진 자리는, 자아의 절대성이 대신 차지하게 되고, 언약을 빼버리면 그 자리를, 신의 주권 개념과 예정개념과 선택개념이 그 자리에 차지하여 마치 절대 신앙의 표준처럼 행세하게 된다. 라이프니츠 철학 안에서는, 오늘날 신학자들이 간절히 염원하는 세상과의 접촉점 문제가 속시원하게 해결을 보게 된다.
특히 기독교 윤리의 절정이라는 이웃 사랑에 관한 방법론이라든지 그리스도 몸 안으로서 교회 내부의 결집과 단결 문제도 편하게 해결 본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신학과 철학이 오늘날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뭉개는 악마의 선봉 이론이라는 것이다. 마치 예수님을 십자가 못박아 죽이게 만들었던 바리새인과 군중들의 신학이 대세를 이룬 것처럼 오늘날 전 세계 교계에도 이런 신학이 죽지 않고 대세를 유지하고 있다.
위대하고, 고상하고, 사랑이 넘치고, 순결해보이고, 지고지순한 희생정신과 고난의 모습을 보이는 모든 신학들이 한결 같이 십자가의 원수로서 작용한다는 것을 알아채는 자들은 오직 십자가의 영을 받은 성령받은 자들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