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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안산 12월 8일 강의 (고린도후서 1장)강의고린도후서

안산 12월 8일 강의 (고린도후서 1장)

이름 : 우리교회(IP:122.47.57.66)

http://media.woorich.net/~woorich/study/ansan/ansan061208.hwp

관리자(IP:220.♡.176.150)

09-05-24 09:57

ansan061208

지난 시간에 요한복음을 다 했고, 이 시간부터는 고린도후서에 대해서 해 봅시다.

고린도후서 1장 1절에 보면,

(고후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라고 되어있거든요. 이것부터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이라고 일단 하면, 항상 뒤에 무엇을 염두해 두어야 해요. 뭘 염두해 두냐하면 ‘창조 하신 분’. 세상을 창조하신 분, 물론 나도 포함해서 여러분도 포함해서 창조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이라 할 때는 ‘창조하신 분’을 생각하면서 이 구약 전체, 구약 창세기 1장부터 구약 전체를 염두해 둔 ‘하나님’을 생각해야 됩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냐면, 보통 한국 사람들이 ‘하나님’ 하면, 구약성경을 생각 안하고 옛날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그 하나님 있잖아요, 성황당 짓고 고목에 빌고 그냥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신적인 것, 그것을 바로 연결시키는 경우가 있는데, 절대로 그러시면 안된다 이 말이죠. 하나님이라 할 때는 구약성경 전체, 이스라엘을 인도하시고 천지를 창조하신 그 하나님을 항상 염두해 두어야 해요. 그 하나님 말고 다른 하나님은 없습니다. 다른 하나님은 없어요.

지금 우리가 고린도후서를 (공부할 때), 성경이 있는데 그 도중에 고린도후서를 취급하기 때문에, (원래는) 창세기 1장부터 해서 이렇게 수평으로 고린도후서로 접근해 나아가야 할 텐데, 우리는 창세기를 다 안다 생각하니까 고린도후서로 바로 직접 뛰어들기 때문에... 여기 하나님이란 개념은 항상 창세기 전체, 이스라엘 역사 전체를 다 끌고 가셔서 (결국 하나님이란) 뜻이 무슨 뜻이냐 이렇게 만나야 됩니다.

예를 들면, 길을 가다가 엎어질 때 ‘어이쿠, 하나님 아버지!’ 이렇게 할 때,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는 기본적인 초월적인 하나님이 아니고, 실제적으로 구약성경을 가지고 이끄시고 실제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을 내리시고 그 약속한 대로 이루시는 자기의 뜻, 그 뜻을 그대로 실행에 옮기시는 하나님이다. 그래서 이 하나님은 중간에 취소가 없어요.

취소라든지, 일을 그만 안 하신다든지, 실패라든지, 중간에 휴식이라든지 이런 것도 없이, 창세전에서 창조 때부터 지금까지 일관적으로 계속 뜻이 지금 하나님으로부터 쏟아지고 있는 겁니다. 화초에 물을 주는데, 물을 주었다가 안 주었다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물을 주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을 계속해서 우리에게 주는 거예요. 물론 우리는 그 뜻에 대해 관심도 없어요.

그냥 애나 키우고 하지, 하나님이 줄줄줄 물 새듯이 주시는 그 뜻에는 관심도 없고, 그저 직장생활하고 차 몰고 다니고, 우리의 생업에 종사하고 그러는 거예요. 그러더라도 하나님의 이 뜻은 지금 우리가 이렇게 관심 없는 가운데서도 계속해서 똑같이 그 뜻이 한번도 취소하거나 실패하거나 중지하거나 포기하시지 않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뜻이 계속 주어지는 겁니다.

계속 주어지는데... 저는 그 생각할 때마다 기분이 약간 좋아지는데, 어떤 경우냐 하면 여러분, 좁은 길과 넒은 길 비유 아시죠? (여러분을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예수님께서 좁은 길과 넓은 길을 이야기했다는 말은 무엇이냐 하면, 좁은 길도 아니고 넓은 길도 아닌 제3의 길이 있을까요? 없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 모호한 것이 아니죠?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 그러면, 아~휴 모호하다고, 하나님의 뜻이 너무 많아서 어느 것을 잡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그러니까 아예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을 안 두기로 했다고 하거든요. 하나님의 뜻이 너무 크고 범위가 넓으니까 너무 많다는 이유 때문에 그만 하나님 생각을 하는 것 조차 버거워서 하나님 생각을 안 하고 싶은 거죠. 하나님 생각 안하면 뭐하냐. 그냥 내 생각만 하면서... 하루 종일, 일주일 내내, 한달 내내, 내 생각만 하는 거예요. 내 생각 만.

왜? 하나님의 뜻이 너무 잡히지가 않으니까... 너무 허망하니까... 그러면 우리는 배운 것은 있어서 ‘만사가 하나님 뜻이다’ 그 정도는 아는데, ‘만사가 하나님 뜻이다’라는게 너무 흐리멍텅 하잖아요 이게. 손에 안 잡히잖아요. 만사가 하나님 뜻이다 말이죠. 그러면 내가 이 물건을 내가 살까 말까 이것도 (하나님) 뜻이겠네, 안 사는 것도 하나님 뜻이고 사는 것도 하나님 뜻이고, 그러면 내가 맘대로 하는 것이 하나님 뜻이 되잖아요. 뭘 해도 하나님 뜻이 어긋나지 않는다면 나는 내 맘대로 살고... 하나님은 하나님 맘대로 하고... 그러면 잘 됐다, 둘 다 자기 맘대로 살면 그만이겠네.

그래놓고, 내 맘대로 살아 놓고 하나님 뜻대로 살았다 하기도 뭐하고,,, 양심에 좀 그르치고요. 뭔가 이렇게 하나님의 뜻이 흐릿해 보이는 데, 그것이 하나의 구체적으로 구현한다. (구현이라는 어려운 말이 나오는데) 하나님의 뜻이 이 지상에 한 초점으로 좀 모아지는, 모아져서 이렇게 딱 ‘비타골드500’이 손에 쥐어지듯이,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렇게 손에 잡히면 참 좋겠어요.

여기 저기 너무 허황되게 벌려 놓지 말고. 요것이 하나님 뜻이다. 애가 아픈데 병원에 갈까 아니면 약국에 약이나 사 먹을까... 주여 하나님 뜻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맨 날 내가 당황스러울 때는 묻잖아요. 그런데, 이거다! 하고 손에 잡혀버리면, 그런 고민도 안 해도 된다 말이죠.

예수님께서, 말씀 중에서... 제가 지금 좁은 길, 넓은 길 하는 것은 평소에 사람들이 (하나님 뜻을) 너무 모호해 하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게 모호한 것이 아닙니다, 라는 것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이 좁은길 넓은길 뿐만 아니라 모든 주의 뜻이 모호하지를 않아요. 모호하지를 않은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혼자 괜히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면 너무 넓기 때문에 차라리 모르고 지내는 것이 편하다, 이렇게 자기 합리화하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이천수가 골 넣고 기도하고, 송종국이 골 넣고 기도하고 축구선수 박주영이 골 넣고 기도할 때, 교회다니는 청년들은 그것에 호응을 해요. 아~ 주께서 한 골 또 넣어 주셨구나. 그런데 박주영이가 누가봐도 쉽게 차 넣을 수 있는 공을 골대를 맞춘다는지 못 찼을 때, 그 때 박주영이는 죄인되어 버리죠. 왜? 아까 골 넣을 때 기도했잖아요. 골 넣는 것이 뜻인데, 골 쉽게 넣을 수 있는 것을 못 넣었으니까 박주영이는 하나님의 뜻을 위배한 사람이 되죠.

맞지요? 그런데 평소에 박주영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삶이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위반하지 않을까 하고 조마조마하는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기도하라 하면 기도하기 싫고... 교회가라면 교회가기 싫으면서... 교회 안 가면 죄인되는데, 라는 생각은 또 갖고 있는 거예요. 이것도 저것도 아닌 거예요.

분명히 하라 하면, 하나님의 뜻인 줄은 알겠는데 맘대로 안 되네,,, 이러거든요. 하나님의 뜻은... 내 마음대로 될 수 있는 (하나님의) 뜻은 없습니다. 그래서 기본부터 잘 못 되었어요. 내 마음대로 되는 뜻은 내 뜻이지 하나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내가 안 해도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이 알아서 뜻대로 이루어집니다. 괜히 내가 뜻대로 이룬다고 설치지 마세요.

일도 안되는 것을 괜히 협조한다고 달려들지 말자는 겁니다. 저런 아이가 설거지 할 수 있겠습니까? 할 줄 모르면서 엄마가 설거지 한다면 자기도 설거지 한다고 달려드는 거예요. 일도 설거지도 못하고 그릇이나 깨 놓고 그거 치운다고 바쁘고. 특히 여자 애들 5,6살 되면 요리한다고 해놓고 소금 듬뿍 넣어가지고 비싼 재료해가지고 먹지도 못하고 음식 쓰레기 통에 넣고. 일 하지도 못하면서... 그런데 아이 입장에서는 내가 엄마 일을 안 도와주면 내가 양심에 가책이 되어서 도와줘야 한다는 거예요.

꼭 오늘날 우리들이 신앙생활하는 그 모습이 그 모습이예요. 본인보고 하나님 뜻대로 하라고 하면 하기 싫고 못한다고 하고, 그러면서 하나님 뜻대로 협조한다고 하면 엉망진창으로 다 만들어 놓고. 가만히 있는 것이 도와주는 건데. 가만히 있는게 도와주는 긴데.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 뜻대로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믿기만 해도, 세상에 그 것보다 더 큰 협조가 없어요. 세살 네 살 먹은 아이가 설거지 하려고 덤벼들지 말고, ‘엄마, 설거지는 엄마가 제일 잘해’ 이렇게 가만히 협조해 주는 것이 엄마를 도와주는 겁니다. 집사님 그렇지 않습니까? 애들이 있지만 애들이 도와준다면서 일 저지를 때가 많지요? 그저 엄마가 잘 해요, 그렇게 믿어주는 것을 뭐라고요? 그게 믿음 아닙니까! (제가 벌써 흥분하기 시작합니다)

믿음이 뭔데요 믿음이. 내가 하나님 뜻대로 안 한다고 미안해하는 것이 믿음입니까? 그건 아니예요. 그것은 건방짐이지 그게 무슨 믿음이예요. 믿음은 내가 나설 입장이 못 된단다는 것을 아는 거예요. 내가 구원받는 것도 천당가는 것도 내가 나설 입장이 못 된다는 겁니다. 왜 자꾸 자기가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해요, 왜 자꾸. 그릇이나 다 깨놓고 저질로 놓고, 또 자기 힘대로 안되니까 또 안 된다고 하나님께 원망하고.

다시 이야기할께요. 하나님께서는 자기 뜻을 누구에게 맡긴 적이 없어요. 뻔히 우리 실력을 너무 잘 아시기 때문에... 우리가 딴 짓하고 관심도 없고 우리가 하로 종일 24시간 내 생각만 할 때도 하나님의 뜻은 꾸준하게 하늘에서 물 뿌리듯이 계속 뿌려 주는 거예요.

어제 여기 비 왔었습니까? 조금 왔죠. 비 조금 올 때 누가 오라했습니까? 아니잖아죠. 강원도에 태풍 올 때, 사람들이 강원도 공무원에게 비난할 수는 있어요. ‘왜 제방을 안 쌓았나?’ 할 수 있지만, ‘왜 우리 동네에 태풍이 오게 했습니까? 면장님’. 이런 소리는 못하잖아요. 그죠? 사람에게 들이닥치는 사건은 주의 뜻대로 들이 닥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내가 잘 못 한 것이 있어서 이렇게 온다는 거예요. 이게 무슨 믿음이예요. 그게. 그동안 하나님하고 농담, 장난친 거지요. 그것이 하나님 뜻이 될 수가 없어요.

다시 할께요.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오라고 해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지금도 물뿌리듯이 머리와 어깨 위에 그냥 쏟아집니다. 강원도에 태풍 오듯이. 누가 태풍오라고 했어요? 데모했습니까? 그냥 오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은 밀려 옵니다. 저 끝에서 먹구름 몰려오듯이 몰려 와요. 밀려오고 우리는 그것에 대처할 수도 없어요. 밀려오고 대처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두 자로 뭐라고요? 이것이 믿음이잖아요.

대처할 수 없으면 어떻게 돼요. 수용하면 되지. 아니 뭐가 어려워요. 밀려옵니다. 대처할 수 없습니다. 그 다음에 영접합니다. 주의 뜻을 내 가정위에 내 인생에 주의 뜻을 영접합니다. 그것이 믿음이고 신앙생활 아닙니까. 뭐가 어려워요. 전혀 어려운 것 없잖아요.

아브라함이 자기가 자기 고향집을 떠나리라 했습니까? 아닙니다. 제가 강의 다시 해볼께요. 여기 고린도후서에 나오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라고 했습니까? 창세기에 나오는 하나님이죠. 창세기보니까 아브라함 나오고, 이삭 나오고, 야곱 나오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하나님과 아브라함, 하나님과 이삭, 하나님과 야곱 사이에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어떤 일들이 오고 갔는가, 그것을 파악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죠.

간단하잖아요. 아브라함이 자기 본토 아비집을 떠나려 했습니까? 아닙니다. 아닙니다. 자기는 떠날 맘이 없었어요. 그런데 찾아오니까 아브라함이 자기 집안 다 버리고 가족 몇 명만 달랑데리고 그곳을 떠나야 했죠.

이것을 적어보면, 1)밀려오다 2)대처할 수 없다 3)수용하자, 수용하면 그 다음부터 내 인생은 누구 인생 되죠? 내 인생은 내 인생이 안되죠. 주님의 사람이 되는 거죠. 그런데 불신자는 밀려오는 것도 모르고, 대처할 수도 있다는 것도 모르고, 수용 할 줄도 모르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는데, 뜻은 모르니까 지옥가는 것이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지옥가고 있다 말이죠.

아브라함이 자기 본토 아비 집에 그냥 있으려 해도 있을 수 없어요. 밀어 내 버립니다. .밀리는 거죠. 바닷가에 있는데 아무리 헤엄치고 싶어도 파도가 크게 오면 물결의 힘에 밀릴 수 밖에 없어요. 여러분들이 여러분 가정에 태어날 때 내가 이렇게 태어날 거라고 부모한테 견적 낸 적 있습니까? 부모님 내 눈에 쌍커플 해 주시고, 키 몇 센티 해 주시고, 내가 IQ 얼마되게 해주시고... 그렇게 견적낸 적 있습니까? 그렇게 협의해서 했습니까? 아니잖아요. 아니라 이 말이죠.

그냥 튀어나와 보니까 요 모양 요런 식으로 태어난 거예요.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는 얼마나 가난한지 가난에 대해서는 남에게 안 지는 분.(^^) 돈 많기로 남에게 안 지는 분이 아니고 가난하기로 남에게 절대 지지 않는 분. 또 하나, 성격은 좋은가? 성격 하나는 또 남한테 안 지는 분. 술은 어떤가요? 술고래. 놀음 여러 가지. 이게 우리가 견적 냈습니까? 그렇지 않잖아요. 그래도 우리는 그 아버지에게 순종하잖아요. 단지 당신이 있기 때문에 (내가)있다는 것 때문에 순종 할 수밖에 없잖아요.

이사야서에 보면, 나귀도 제 주인을 알고 소도 자기 외양간을 알건만 ,어떻게 이 놈의 백성들은 제 애비 모르느냐. 이렇게 말하거든요. 이 말은 무슨 뜻이냐면 애비를 알라는 뜻이 아니고 지금 알든지 모르든지 일은 벌어지고 있다는 거예요. 일은. 아브라함을 봐라 이삭을 봐라 이미 일은 개시가 된 겁니다. 우리가 거부하고 싶고, 눈 감고 안되요 난 안 봤다, 아무리 손으로 가려도 내 밖에 하나님은 계십니다.

내가 잊으려 잊으려해도 십자가는 이미 벌어진 사건이예요. 그 곳에서 피 흘린 것은 이미 피 흘린 것이고, 피 흘린 분이 사흘만에 부활 한 것은 내가 부인하고 싶더라도 부인될 수 없는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예요. 마치 이순신 장군이 죽었듯이 예수님이 부활한 것도 사실입니다. 이것은 그냥 지식으로 알라는 말이 아니고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키신 그 분께서 지금도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간에 지금도 지속적으로 지금 나를 떠밀고 있다는 거예요. 내 가슴팍을 밀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자기 본토 아비집을 떠났다, 에이구 아브라함에게만 해당되겠지... 그렇지 않습니다. 같은 믿음을 가진 우리가 지금 주님에게 떠밀리고 있어요. 본토 아비집을 떠났다는 말은 우리도 지금 고향이 안산인데 저 광주로 갔다, 그런 뜻이 아니고, 사람을(하나님의 백성을) 자기가 있고 싶은데 못 있게 한다는 겁니다. 내가 원하는 인생을 못 가게 한다는 겁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 내가 원하는 인생은 놀랍게도 좁은 길, 넓은 길 중에서 어느 쪽 길이겠어요? 넓은 길이기 때문에, 내가 멸망의 길로 가도록 우리 아버지께서 방치를 안 해요. 방치하면 그것은 아버지가 아닙니다. 방치 안하시기 때문에 아버지예요. 우리가 넓은 길로 가도록 방치 안하시기 때문에 주께서 우리를 날마다 말씀으로 인도하시는 거예요. 뭐, 한달에 한 번이지만.

우리는 가만히 있으면 넓은 길을 선호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인간치고 고생하는 것을 좋아하고, 어느 인간치고 친구가 하나 둘 떠나는 것을 누가 좋아합니까? 어떤 여자치고 결혼해놓고 신앙 때문에 남편과 이혼 갈라서고... 이런 것은 원래 의도하지도 않고 그러기도 싫죠. 차라리 남편이 갑자기 은혜 받아가지고 신앙생활 잘하고 협조해 주는 것을 원하지 교회가지 말라고 핍박하는 그런 남편을 누가 원하겠어요.

그러니까 지금까지 제가 이야기 한 것을 간단히 하면, 나는 넓은 길로 가고 싶은데,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밀어내는 데 어떤 식이냐? 넓은 길에서 좁은 길로, 좁은 길로... 좁은 길로 자꾸 밀어 내는데 그걸 내가 대처할 수 없고, 그럼 그걸 수용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 이 걸 두자로 뭐라 한다고요? 이것이 믿음이다.

믿음은 “내가 이만큼 훌륭했습니다”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이렇게 못났는데 하~ 그 분이 자꾸 나를 밀어 내내. 아~유 나를 못 살게 굴어, 나를. 나는 하나님께 삐지기도 잘하고 , 하나님께 두 번 다시 안 본다고 외면하기를 한두 번도 아니고, 하나님 욕한 것도 한두 번도 아닌데도, (베드로보세요 예수님을 저주했습니다) 그분께서 아~주 끈질기시네. 그 분이 끈질겨. 그 분이 나를 떠나지 않네. 그 분이 나를 놓칠 않네. 그냥 놔두질 않네.

하여튼 그 분 때문에 못 살겠어, 그만. 그러한 실감. 하나님이 나를 놓지 않는다는 그러한 실감성. 이것은 신학적인 용어 개념으로 표현이 안됩니다. 그걸 한 마디로 뭐냐? 믿음, 소망, 사랑이예요. 사랑입니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못 배기게 합니다. 그냥 사랑이죠. 사랑. 주께서 나를 사랑하는구나. 어떻게? 끝까지.

자 오랜만에 성경 한번 봅시다. 요한복음, 여러분들이 요한복음을 했다고 해서 제가 요한복음을 포기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 요한복음 했어도 다시 되풀이됩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

(요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세상에 자기 사람들이 있어요. 따로 있는데,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한다고 되어 있죠? 제가 강의 처음에 무어라 했습니까? 하나님의 뜻이 모호하다고요? 허황되다고요? 너무 많다고요?

간단하잖아요. 무엇입니까? 이렇게 자기 사람을 사랑하시되 어떻게 사랑한다? 끝까지 사랑한다. 심지어 우리가 버리고 도망칠지라도 끝까지 따라온다. 심지어 우리가 천리만리 (도망)가더라도 끝까지 따라온다. 그러니까 사랑해도, 사랑을 외면해도 끝까지 사랑하신다. 끝까지 사랑하시는 그 사랑조차 내가 안 믿으려 해도 끝까지 사랑하신다. 이것은 우리가 저항할 수 없잖아요.

이것이 뜻 아닙니까. 어려워요? 우리는 하나님을 포기했는데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신다. 그 사랑, 너한테 있느냐? 이레 묻지요. 그 사랑이 너에게 있느냐.

여기서는 고차원적인 신학적 용어도 없고 신학적 철학적 개념도 필요없고 그냥 느낀대로 마음에 필(feel) 닿는대로... 사랑이예요 사랑. “아~ 정말 주님이 저를 사랑하시는군요. 이쯤하면 저 같은 인간은 아예 포기하시죠. 저는 당체 하나님을 믿을 마음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저는 하나님의 말씀 이거 영 취미에 안 맞습니다. 그러니 저 같은 인간은 일찌감치 포기하세요.” 라고 했던 그 순간에도 “너는 포기해도 나는 포기 못한다”. “왜 그러십니까?”. “그게 내 뜻이다. 왜”.

그러면 “당신을 버리겠다는 내 뜻은?” “니 뜻은 아예 생각해 본적도 없다” 아예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생각하실 때 우리가 주님을 버린다 그 뜻도 하나님은 들은 척도 안 해요. “주님이여 제가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것도 역시 안들어요. “주여 제가 이제부터는 십일조를 내고 전도를 하고 기도하겠습니다” 그 것도 안들어요.

지난 수요일에 그런 설교를 했습니다만, 주님께서 얼마나 감사한지, 주께서 기도한 대로 응답안해 주시고 기도 한한 것만 응답하셔서 인도하시는 그 고마움. 사람이 자기가 아무리 챙겨도 기도할 때 중요한 것은 다 챙겨서 기도해요. 그런데 사람은 하나님이 아니라서 진짜 중요한 것을 다 빠뜨려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응답을 우리가 빠뜨린 것만 응답해가지고 그리고 응답받아 놓은 것을 보고 결국 그것이 하나님의 은총인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만약에 내가 응답될 것을 내가 사전에 기도해서 응답받았다면 그 응답은 은혜가 아니고 뭡니까? 내가 협조한 것이 되죠.

‘역시 역시 하나님은 내 기도를 내 기도 하나는 먹어준단말야‘ 하고 협조한 게 되지, ’이게 왠 은혜입니까!‘ 라는 말은 안나오게 되죠. 그죠. 역시 내가 잘 알아서 챙겼겼더니만 역시 주시는구먼. 그러니까 내가 요런 식으로 기도하면 또 응답하겠지... 이것은 은혜가 아니고, 100% 은혜가 아니고, 한 95%은혜고 5%는 자기가 협조한 것이 되잖아요.

주께서는 우리가 기도한 것 절대로 안 들어주고, 기도 안 한 것만 다 해가지고 응답하세요. 그렇게 해서 우리로 하여금 100% 은혜로 은혜로만 구원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리고 사람이 기도를 하는 것도 이렇게 가만히 분석해보면, 분석하기 위해서도 우리 목사님들 같은 경우 많이 공부해야 되는데, 분석해보면 어떤 기도를 해도 그 기도의 마지막 끝은 뭐냐 ‘그러니까 넓은 길로 한 번 가 보고 싶습니다’라는 것이 은연중에 욕망으로 그게 들어있어요.

어떤 기도든지 기도할 때 ‘좁을 길로 사서 가겠습니다’ 라는 기도는 안해요. 이제 머리는 이레 굴리죠. ‘주여, 좁은 길이 생명의 길이니 좁은 길로 가겠습니다’ 라고 말을 끄집어내지만, 설마 나를 고생시키겠나. ^^ 그런 되지도 않는 통밥을 굴리는데, 그거 안듣습니다. 안 듣고 어떻게해서든지 주님은 우리를 모든 것을 주님의 은혜로, 사랑으로 인도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 할 때, 좁은 길/넓은 길, 이 두가지로 정했다는 말은 인간이 뜻을(자 중요한 겁니다), 인간이 뜻을 정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정해진 뜻에 의해서 우리의 운명이 ‘내가 이런 운명에 속하는구나’라는 것을 결과적으로 파악케, 확인케 하는 방법입니다.

이 말이 좀 어려운데, 제가 말을 좀 어렵게 했는데, 무슨 뜻인지 이해하시겠습니까? 제가 예를 들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제가 선택하겠습니다’ 라는 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이렇게 하겠습니다 저렇게 하겠습니다’ 라는 것은 일체 안 들은 것으로 하시고, 하나님께서 먼저 뜻을 주시고 그 다음에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가 아니고 ‘너는 이 쪽 편을 선택하도록 선택받은 자다’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좁은 길, 넓은 길... 제3의 길은 없습니다. 좁은 길, 넓은 길 두 가지 길밖에 없죠. 이것을 누가 제시했습니까? 제가 제시했습니까? 여러분이 제시했습니까? 누가 제시했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제시한 거예요. 우리보고 물어보지도 않고. 예를들어 우리 같으면 좁은 길, 넓은 길 등등 몇 가지 길을 만들 겁니다. 만약 제가 토정비결 보는 사람이라면 좁은 길, 넓은 길 이렇게 2개 뿐만아니라 3개 4개 정하겠단 말이죠. 예를들면 (3번째) 좁은 길 말고 처음에 좁은 길에서 나중에 넓은 길이라든지, 4번째 처음에 넓은 길이고 나중에 좁은 길이라든지, 5번째 10년간 좁은 길 10년간 넓은 길이라든지, 이런 식으로해서 선택의 폭을 넓게 할 거란 말이죠. ‘골라 보라, 너의 선택에 의해 너의 운명이 결정된다’, 고 하겠는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의 융통성은 일체 인정하지 않으시고 뭐라 하시냐면 좁은 길, 넓은 길이라고 딱 정해 놓고, 이렇게 정한 것도 우리에게 묻지 않으시고 일방적으로 정해 놓고, 그 다음에 ‘멸망의 길은 넓은 길이고 영생의 길은 좁은 길이다’. 라고 하시는 거예요.

이것을 지킬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지킬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을 제시해요. 그러면 우리는 주심께서 선택하라 했는데, 주님께서 선택하라고 한 항목에 우리가 선택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제가 개고기 못 먹고 오리고기도 못 먹는 거예요. 곱창도 못 먹고 순대도 못 먹어요. 자 그런데 회식을 했습니다. 회장이 말합니다. ‘자 (먹을 것을) 골라보세요 4가지 중에 한가지입니다. 순대, 곱창, 오리고기, 개고기... 뭐 먹으렵니까?’ ‘나, 집에 갈랍니다.’ 4가지 다 해당이 안 된다 이 말이죠. 그래서 ‘난 해당되는 게 없는데...’ 하면, 회장이 ‘주는 대로 먹어라’ 이러거든요. 그러면 진작부터 주는 대로 먹어라 하든지...

기껏 한다는 말이, 뭘 선택했습니까? 해 놓고는 주인장이 ‘자 개고기로 통일!’. 지 마음대로 개고기로 통일해 버렸어요. 선택하라 해 놓고 개고기로 통일해 버렸어요. 이것은 처음부터 우리 인간은 아무리 하나님께서 옳은 길을 제시해도, 그 옳은 길을 선택한다 할지라도, 선택해 나갈 능력도 우리에게는 없음을 아시기 때문에, 옳은 길 뿐만 아니고 그 길을 갈 수 있는 능력까지 우리에게 이렇게 마구잡이로 밀려오도록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아 이거 너무 조용하니까 이상하다^^, 조용하니까 내가 뭘 잘 못 했나 ^^ 넓은 길 좁은 길에서 이미 선택은 규정되었습니다. 산상설교에서 이렇게 했죠. 산상설교 이렇게 한 것이 요한복음에서 뭐라 되어있죠? 요한복음에서 ‘끝가지 사랑’ 하죠. 그러면 끝까지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사랑을 해 주는 것이 아니고 좁은 길/넓은 길을 제시한 예수님이 자기 뜻을 이루시는데, 우리는 못 이루니까, 사랑으로 우리로 하여금 좁은 길로 가도록 인도해 주는데, 그것이 뭐냐? 사랑이란 말이죠.

이 사랑의 내용을 우리가 채우는 것이 아니고 좁은 길로 인도하시는, 해 주심, 그보다 더 큰 사랑이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봐요. 없잖아요. 이제 성경이 뚧힙니까? 성경 강의할 때마다 뚧힙니까? 강의 한 두 번 하는게 아닌데. 이제 성경 전체가 이게 두뇌를 통과하듯이 뭔가 뚧히죠. 아~ ‘주님의 뜻, 주님의 사랑’ 하는 게 우리가 만든 사랑, 우리가 만든 소망 믿음이 아니구나. 일방적으로 뜻을 제시해 놓고, 그 뜻만 이루어 나가는 그 것을 사랑이라고 하는구나.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사랑할 수도 없고, 주님을 믿을 수도 없고, 주님을 바라지도 않아요. 그런데도 우리는 구원받는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왜? 주의 뜻이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주님을 안 사랑하는데 주님이 날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구원될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세상에 그런 믿음이 어떻게 그런 믿음이 생겨 날 수 있겠어요. 참 이게 축복이 아니면 그런 믿음이 생겨날 수 없습니다.

정말 그것은 놀라운 믿음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이 이렇게 했어요. ‘믿음이란, 나를 믿지 않는 것을 믿음이다.’ 라고 했어요. 신앙생활하면서 제일 힘든 것이, 예수를 믿는 것은 힘들지 않아요, 예수 믿는 나를 안 믿어야 한다는 것이 힘들어요. 너무 빨리 했나요? 적어 봅시다. 신앙생활이 제일 힘든 것이 무엇이냐 하면 예수를 믿는 것이 힘든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믿는 나를 ale지 않는 것, 이것이 제일 힘들어요.

예수 믿는 나를 안 믿어야 예수 믿는 것이 되요. 예수 믿는 나를 믿으면 내가 믿음의 대상이 되요. 그래서 누가 나보고 ‘예수 믿습니까? ’ 할 때 나는 ‘주께서 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하실 겁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했어요. ‘주께서 아시나이다.’ 누가 얘기했어요? 베드로가 얘기했지요. 주께서 아시나이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께서 아시나이다.

자 한 번 외워봅시다.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온다고요? 첫 번째는 밀려오고, 두 번째는 우리가 대처할 수 없고, 대처할 수 없으니까 세 번째 그것을 그대로 수용하게 되고 네 번째를 보텐다면 이로서 우리는 나의 사람이 아니고 누구의 사람? 주님이 가지고 노시는 주님께서 뜻을 이루시는 도구의 주님의 사람이 됩니다.

이것을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해요. 새로운 피조물이 못 된 사람은 자기를 믿어요.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은 쳐들어 온 주님에 의해서 주님의 사람이, 주님의 뜻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 번지 점프 해봤습니까? 번지점프라는 것은 죽음에 대한 체험입니다.

좀 더 이야기해 보면, 밀려오고, 대처할 수 없고, 수용하고,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 했을 때, 그러면 5번째로 밀려온 하나님의 뜻이 기적들인데 이 기적들 중에서 최고의 기적이 뭘까요? 요나의 기적입니다. 요나의 기적이 뭡니까? 요나가 물고기에 죽었다가 사흘만에 살아나는 거지요. 그러면 최고의 기적이 뭡니까?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 최고의 기적은 요나의 기적밖에 없죠. 그러면 무슨 기적입니까? 십자가죠. 그 죠?

자 십자가를 여기 5번째에 넣어봅시다. 첫 번째 밀려온다, 대처할 수 없다, 수용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주의 사람이다. 이제 주의 사람이기 때문에 내 안에 무엇을 집어넣는다? 아까 이야기한 주님의 뜻, 뭡니까? 십자가. 십자가를 우리에게 집어넣어버립니다.

십자가를 집어넣어 버렸다는 것은 십자가가 예수님의 십자가로 머무는 것이 아니고 이제는 누구를 죽이는 십자가입니까? 나를 죽이는 십자가죠. 그것이 오늘 본문 고린도후서 1장 5절에 봅시다.

(고후 1: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넘치죠. 여러분 댐이 있는데 댐이 원래 잘 안 넘칩니다. 넘치면 밑에 주민들 위험하니까, 그런데 댐에 물이 넘쳐보세요. 야 이거 보통 문제가 아니죠. 댐을 왜 세웁니까? 댐 믿고 물이 안 넘치도록 하기 위해서 세우잖아요.

세상 사람들이 예수를 왜 믿어요? 모든 환란과 모든 고생은 예수님이 댐처럼 다 지켜주고 우리는 평안하게 살고 싶어 하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댐에 물이 넘쳐버리면 이 댐을 쌓아 놓은 의의와 취지가 없죠. 댐은 물이 안 넘치도록 쌓아 놓은 거니까. 그런데, 이것은 우리 생각이고, 주님께서는 예수님의 고난이 넘치도록, 물=예수님의 고난이죠. 예수님의 고난은 세자로 이야기 하면 뭐죠? 십자가죠.

십자가가 넘쳐서 이제 누구의 십자가? 나의 십자가로 쳐들어 오는 겁니다. 왜? 이 네 번째에 의해서. 다시합니다. 밀려온다, 대처할 수 없다, 수용할 수 밖에 없다, 그 다음에 네 번째 뭡니까? 주의 사람. 우리가 주의 사람이니까 내 속에 내 것은 빠지고 내 속에 무엇이 들어 옵니까? 주의 것이 들어오는데, 무엇이 들어오느냐?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셨는데 십자가 고난이 환란이 우리 속에 들어와 버린다 이 말이죠.

그러니 댐 밑에 있던 주민들은 ‘왜 우리는 날 벼락이냐, 우리는 예수 믿다가 파멸했다’ 할 때에, 자 한 번 보세요. 댐이 이렇게 안 넘어 올 때에는 ‘참 예수님 고마워 역시 예수님덕분에 이런 큰 축복이 있었구나’하고 평온하게 살죠. 돈도 되고 건강되고 인물되고 자식 새근새근 잠도 잘 자고 아무 문제없이 괜찮았거든요. 이럴 때 우리에게 위로가 뭡니까? 주님 덕분에 이 세상에서 내가 편안히 사는구나 하는 위로죠.

그 위로가 무슨 위로냐 하면 주님의 위로가 아니고 세상 것이 안 빼앗겼다는 것, 이 세상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다는 것에서 오는 세상적인 안도감이죠. 그런데 주님께서 이렇게 댐 밑에 고난이 우리에게 넘쳐버리면 이것이(세상것이) 다 깨지니까 이 때의 위로는 뭡니까? 5절 다시보면

(고후 1: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의 위로도 누구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지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핑계대면서 사실은 세상적인 돈 가지고 위로받던 그 시절을 우리에게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이제는 뭐냐하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위로받는 ‘그래 세상 끝내자 그래도 주님 계시니까, 스데반 집사님처럼 돌이 날아오는구나 그래 맞자, 여기 맞고 저기 맞고 다 얻어 맞고 죽자’ 그래도 위로 받는 것은 무엇 때문에 있다? 주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서 스데반 집사야 올라 오너라 하신 그리스도의 위로 때문에, ‘죽는다’는 그런 고난도 위로로서 거뜬히 넘길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위로는 어떤 경우에만 생기느냐 하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환란이 있어야만 비로소 발생되는 것이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관련이 없으면 절대로 발생될 수 없는 위로가 바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위로’입니다.

지금 목사님 아이들이 3명이잖아요. 애 셋이 얼마나 공부를 잘 하는지, 하나는 의사, 하나는 변호사, 하나는 행정고시 합격해서 고급 공무원... 셋이 다 (잘?) 되었을 때, 그 목사님 부부가 통곡하면서 ‘주여, 어서 여기를 떠나야 할 텐데. 애들이 저렇게 판사, 의사, 행정고시 패스가 되었을 때, 참 저들이 믿음이 생기겠느냐?’ 이렇게 통곡하는 부부 목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

그 거 인간적으로 불가능합니다. 큰 애 사고쳐서 교도소 벌써 3개월째, 둘째 애 귀엽다고 또 낳았더니 문제 생겨, 셋째 왕따 당해서 얻어 맞고 가출한 지 벌써 나흘 째 되었다, 이럴 때 뭡니까? 이럴 때.... 뭘 바라보겠어요. 주를 바라보지요. 이 이야기하니까 벌써 사모님 인상이 확 펴지네요.^^ 좁은 길이라니까요. 강의했잖아요. 좁은 길. 좁은 길.

사람들이 교회 왜 옵니까. 든든한 댐 믿고 오잖아요. 그런데 사실은 댐은 무엇을 위한 댐이다? 지금까지 내가 원하던 욕망, 그 욕망을 주께서 지켜달라고 오잖아요. 그런데 만약에 십자가... 그래서 사람들은 십자가를 잊어버리고,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해놓고 십자가는 이제 그만 끝이길 원해요. 예수 믿기 전까지만 십자가이고 예수 믿고 난 뒤에는 다 십자가 건너오지 말라는 거예요. 그 때부터는 이제 착하게 살면 복 받는다는 거예요. 착하게 살면 산 만큼 복 받고, 나쁘게 살면 복을 덜 받고.

이것을 원하는 겁니다. 이것은 이방종교, 악마들이 그렇게 하죠. 한국교회 전체가 그러니까. 교회 예배당에다 서울대 명문대 들어갔다고 붙여 놓는 거예요. 주님이 댐이 되어서 벌써 사법고시 몇 명이 합격되었다고.

그런데 사도바울을 보세요. 사도바울은 성령 받은 사람이라고 했죠. 사도바울은 마귀도 인정한 사람이라고 했죠.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안다고 했으니까. 그 사도바울이 이야기 하기를, 주님의 십자가가 넘쳐서 내게 임한 것은 이 사도바울 일행으로 하여금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게 하려 함이다. 그래서 로마서 8장에 보이지 않는 소망은 소망이 아닙니다., 이렇게 되어있죠.

(롬 8: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소망을 소망으로 삼으신다면, 그 소망으로 인하여 우리는 예수님을 싫어하게 되고 미워하게 됩니다. ‘왜 나의 이 소박한 소망마저 주께서 시비거십니까?’ ‘그러시려면 가세요. 난 이제 예수하고 안 논다’ ‘이런 욕심 없는 요정도 소망도 허락 안 해? 아~ 너무 심하다’ 할 정도로 티격태격 싸우게 되어 있어요.

자 그러면, 이 그리스도의 환란이 이렇게 들어와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위로받은 이런 경우를 우리가 요청한다고 올까요? 안 옵니다. 이것은 요청한다고 오는 것이 아니고 요청하든 안하든 간에 여기에서 반드시 오게 되어 있습니다. 하루에 2.5초. 24시간 중에서 2.5초. 이렇게 오게되어 있어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는 위로는 이렇게 짧아요. 어떤 사람은 한 달에 2.5초라는 사람도 있는데...^^ 이렇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이고 이 더러운 세상 떠나면 그만이지’ 이렇게 그게... 체념이 아니라 기쁨으로... 아~ 주님 계시는데 내가 왜 걱정해. 이것이 그냥 체념이요 허무주의가 아니라 정말 기다려 질 정도로 이렇게 반짝 떠 오를 때는 이것은 내 능력 말고 다른 능력이 나를 지금 완전히 주무르고 계시다는 뜻으로 보면 되요. 내가 나올 수 없는 놀라운 능력이 나를 지금 완전히 덮치고 있구나.

이번에 아시안 게임에서 승마하던 사람, 기수가 말을 타는 데, 그 장면을 내가 봤거든요, 기수가 먼저 떨어지고 그 위에 엄청난 무게의 말이 떨어져 덮쳐서 기수가 죽어버렸죠. 그것처럼 우리는 주님에 의해서 완전히 매일 박살나 버립니다. 찌그러진다고요, 아주 무거운 걸로.

그 걸 느끼는 순간이 잠시지만, ‘아 주님께서 나를 완전히 모든 것을 장악하고 계시구나.’ 내가 빠져나갈 수 없을 정도로... 내가 주님을 심하게 욕할지라도 욕한다고 해서 나를 놔주는게 아니고, 욕을 하든 뭐하든 간에 온 갖 욕 다해도 주께서는 나를 안 놔주는 거예요. 그 걸 느낄 때가 있어요. 그 것은 불신자 지옥 갈 사람에게는 절대로 못 느낍니다.

불신자를 반대입니다. 그저 자기에게 완벽, 철저해야 되고, 조금이라도 하자가 있으면 잘못 때문에 하나님의 저주와 징벌이 들어오기 때문에 자기만 손해이기 때문에 저주와 징벌이 안들어오게 하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해요.

그냥 펑퍼짐하게 살지 않습니다. 예민하게 살아요. 이것은 죄야, 죄 아니야, 이것은 죄야, 죄 아니야. ... 이렇게 하는데... 그것은 신자들도 평생 그렇게 살아요. 하지만 그런 것 하고 진짜 하나님하고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 때는, 불과 몇 초 사이에 ‘아~ 상관없구나. 사랑이구나. 내가 사랑을 놓치고 그 대신 다른 것, 행함으로 다가 섰구나. 이게 바로 죄구나’, 깨닫게 되는 순간이 성도에게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이제 곧 이해 되었죠.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사도 된 나 바울은 어떻게 한다고요? 댐이 넘쳐서 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넘쳐서 나에게 임하고, 그로 말미암아 사도바울은 어떻게 한다고요? 왜 이랬습니까? 가 아니라 ‘환란 가운데 그리스도의 주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는 그런 생활을 저희들은 하고 있습니다’, 라고 우리에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아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본토 아비집에서 떠나게 하시듯이 지금 이 고린도후서에서는 누구를 작용하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사도바울 일행을 지금 그런 식으로 이끌어 가고 있는 겁니다.

그 다음에 봅시다. 8절

(고후 1: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지금의 터키 지역입니다.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그 다음에 무슨 소망까지 했습니까?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참, 이 살 소망까지 끊어버리신 분이 누구라고요? 바로 밀려오는 하나님의 뜻이다 말이죠.

사람이 여러분들이 버스 탓는데 의자도 없고 붙들 것도 없는 버스를 상상해 보세요. 그런데 비포장 산길을 덜컹덜컹 달립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요. 서 있지를 못하고 일어섰다하면 자빠지고 일어섰다하면 엎어지고 아예 누워있는 것이 최고 좋겠지요. 이게 바로 이스라엘의 광야입니다.

광야의 특징은 잡을 게 없어요. 뭔가 잡을 게 없다고. 이 말처럼 살 소망이 없는 겁니다. 아까 처음 강의할 때,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 몰아넣으신 분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죠. 그래 하나님을 생각할 때는 뭘 생각하라? 뒤에 광야를 생각하라. 처음 강의할 때 하나님을 생각할 때는 우리 조상님들이 생각한 조물주로 생각하지 말고 전능하신, 자비로우신...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 구약의 역사를 실제로 이끄신 그 하나님이 동일한 뜻으로 우리에게 밀려오고 있다.

그러면 광야를 생각한다면 광야는 잡을 것이 없는 버스 속. 돌 밭에 덜컹이면 이리 자빠지고 저리 업어지고... 이러는 거예요. 그러니까 광야라는 것은 도무지 붙잡는 족족 다 삭제해 버려요. 물이다 하면 물 없고, 양식이다 하면 양식 안주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는데 그 인도하는 족족 물이 없는 곳으로 인도하고, 양식 없는 곳으로 인도하고. 이것은 애굽에서 살던 가락을 가지고는 도저히 버티지 못하는 거죠.

그걸 가지고 여기 고린도후서 1장 8절에서는 표현을 어떻게 했다고요? 살 소망까지 끊어지게. 누가 끊어지게 했습니까? 하나님이 끊게 했습니다. 왜 끊게 했습니까? 댐 안에 뭐가 있기 때문에? 십자가가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뭡니까? 예수님은 번지 점프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아버지 뜻에 자기 목숨을 그냥 던져 버리죠. 창공을 향하여 날은거죠. 번지 점프야 뒤에 밧줄이 있죠. 주님은 밧줄도 없어요. 주님 뜻대로 하옵소서 하고 붕 날라버린 거죠. 붕 날라보니까 죽은 지 사흘만에 부활했잖아요.

이게 붕 나는 걸 믿음이라 합니다. 우리 믿음으로 구원받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 가졌던 그 믿음을 우리에게 새로 공급받아야 우리는 그 믿음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내 믿음은요 나를 믿는 믿음이기 때문에 이것은 천국가는데 부도 수표라, 쫙쫙 찢어버립니다. 믿음 있습니다. 뮏쑵니다!. 에이 찢어버려라.

예수님이 주신 믿음이 있어야 하는데 예수님이 주신 믿음이라는 것이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함께 했던 그 관계, 예수님께서 지상에 살면서 아버지를 믿었던 그 믿음이 오게되면 우리는 예수님이 밧줄없이 창공에 날아간 것처럼 주의 뜻에 목숨걸고 바친 것처럼, 지금 사도바울에게도 살 소망을 끊어버렸다.

요한계시록 2장 10절에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계 2: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빅딜(big deal)이죠 ^^. 큰 거래입니다. 거래. 큰 거래, 엄청난 거래예요. 이것은 도박 중에도 이런 도박이 없습니다. 타짜도 이렇게 못합니다. 세상에 어디 자기 목숨 걸고 도박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자기 마누라 걸고는 하지만 자기 목숨 걸고 안한다. 마누라 걸고야 요즘 남자들 다 하죠. 안그래도 마누라 버리고 싶었는데. 잘 됐다^^ 마누라 걸고 자기 목숨까지 걸라고 하면 안 걸잖아요.

목숨 걸고 도박을 하고 있는 거예요.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 어느 누구도 자기 목숨 걸고 예수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런데 어떻게 한다? 밀려온다 - 주의 사랑으로 하여금 요한1서 주의 사랑을 안다면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바칠 수 있다. 우리 힘으로 안됩니다. 절대 안됩니다. 우리 힘으로 안 된다는 말은 우리 힘으로 안되면 어떻게 됩니까 묻지 마세요. 우리 힘으로 안되면 안되는 게지. 우리 힘으로 안되는데 어떻게 할까요 묻지 마세요. 주께서 하실 것입니다.

주께서 하실 거예요. 우리 힘으로 안됩니다. 어쨌든 우리 힘으로 안됩니다. 나중에 되거든 주께서 하셨다고 해야지 내 힘으로 했다고 하지 마세요. ‘주께서 하십니다‘를 알았기 때문에 했다고 하지 마세요. 그건 사기입니다. 주께서 하심을 안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냥 주께서 알아서 하셔요.

아, 이거는 어려운 말인데 쉽게 예를 들면, 교회에 갈 시간인데 농땡이 부려서 집에서 자고 있었다. 아니면 TV 연속극 보고 있었다. 재방송을 봤다. 근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재방송 보는 것도 보고 싶어서 보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하십니다. 그렇잖아요. 교회에 가는 것은 주께서 하시는 일이고 교회안가고 집에서 연속극 보는 것은 내 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말입니다.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되요. 그것도 주께서 하신 거예요.

그러면 뭐가 믿음이냐. 그러면 교회 가지 말고 연속극 보면 되겠네. 그건 누구나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면 뭘 못하느냐, 연속극 보는 것도 주께서 하신 일이라고 믿는 믿음은 이것은 아무나 믿는 게 아니예요. 아, 말을 너무 꼬아가지고 무슨 말인지... ^^

그런 믿음이 24시간 생기는 것이 아니고 진짜로 그렇게 느껴질 때가 있다니까요. 진짜로. 이론상 그렇게 이야기했지만, 이론이 아니고 실제로. 그러니까 교회 안가고 집에 있다고 해서 벌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시란 말입니다. 주께서 깨닫게 하시는 것, 주께서 모든 것을 인도하시는구나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때에는 교회 가고 싶은 때가 있어요. 교회 가고 싶어서 교회 가는 것, 자기 뜻입니다.^^ 주의 뜻이 아니예요. 그래서 교회 가보니까 자기는 자기가 가고 싶어서 교회 온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고 주께서 오게해서 오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죠. 그렇게 믿어진다는 거. 그게 놀라운 은혜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사람의 모든 것은 아침에 화장실에서 결정된다. 왜냐하면 아침에 변비다, 그러면 하루종일 기쁜 나쁘고, 은혜가 없어요, 그런데 변을 잘 봤다 그러면 하루종일 기분 좋은 겁니다. 굿 모닝하며 난리가 납니다. 결국은 인간이 산다는 것은 감정따라 기분따라 사는 것이지, 말은 주의 뜻 주의 뜻 하지만, 사실을 기분따라 사는 거예요.

애 보세요. 기분 좋으면 자는 거예요. 주의 뜻대로 해도 뭐 소용없어요. 자기가 기분 좋으면 자고 기분 나쁘면 우는 거예요. 여기가 어딘지 상관없어요. 그냥 울어 재끼는 거예요. 그리고 애가 어른이 되잖아요. 어른도 마찬가지예요. 어른도 어린이의 본성 그대로 있습니다. 프로이트라는 학자가 그런 이야기를 했죠. 사람은 자궁을 잊지 못해요. 왜 그러냐? 자궁은 포근하잖아요.

보온되지, 냉방되지, 먹을 거 다 주지. 욥기에 보세요. 차라리 이렇게 밖에 나와서 고생하느니 밖에 안나오고 안에 있었으면 좋았을 걸, 욥기에 나오는 이야기예요. 전도서에 나오는 이야기예요. 성경에. 주의 뜻이 무엇이냐? 넓습니까? 간단합니다. 주님의 보온을 받는 것이 , 주님의 사랑을 받은 것이, 이것이 주의 뜻입니다.

자궁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그 안에 빼도박도 못해요. 우리가 아무리 동으로 서로 미국으로 달아날 지라도 자궁 속에서 못 달아납니다.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야 되요. 엄마의 자리로. 너의 어머니는? 어디 있다? 너의 어머니는 하늘에 있다. 그러면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서 하늘에 가야합니까? 천만에 말씀. 하늘의 어머니께서 하늘에 있지, 지상에는 뭐가 있느냐, 어머니가 주신 약속이 있는 겁니다. 그게 약속의 자녀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놀라운 것은 아브라함이 무엇을 보여주었나하면 아브라함이 ‘내 자식 이삭은 절대로 내 힘으로 낳지 않았습니다’라는 말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의 이삭입니다. 아브라함이 무엇의 조상이죠? 믿음의 조상이죠. 믿음의 조상이 딴게 아니예요. 자기 믿음이 좋다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기 믿음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예요. 뭐냐하면 내 뜻이 아닌데 자식이 생겼다 라는 것을 증거 할때 그것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예수님 죽었다가, 죄를 위해 피흘리고 부활한 것 이것은 내 뜻이 아니야, 라는 것이 믿음이예요. 주의 뜻으로 죽었다가 부활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자기의 잘 잘못을 자기 속에서 끄집어 냈어요.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물론 끄집어내는 것이 우리는 24시간 주특기이지만 그거 하나님께서 안 봅니다.

이번에는 나쁜 것 억제하고 좋은 것 끄집어 내는 것 아예 보지도 않아요. 그걸 모색하는 행위는 우리도 한 번 넓은 길을 가보자 음흉한 속셈을 드러내는 겁니다.

살 소망까지 끊어진다는 것. 이거 우리가 지킵니까 못 지킵니까? 지킬려고 하지 마세요. 안 지켜도 되요. 주께서 댐 댐 넘어오면 물길이 지키게 하십니다. 살 소망 끊어지게 하십니다.

요새 주부들요 하루에서 서너번씩 콱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왜냐하면 결혼전에는 이레이레 하면 남편이 내 마음대로 되리라 생각했거든요. 나중에 한 10년 정도 지나면, 아니 몇 년만 지나도 남편이란 인간은 도무지 내 마음대로 될 자가 아니구나 라는 걸 알아요.

믿습니까? ^^ (아멘) ^^ . 이 남편이란 이 작자는 도대체 내 마음대로 되는게 아니고 날 이용할 뿐이지 자기 편한 대로만 살고 아쉬운 것 어려운 것 있으면 전부 나한테 미루고. 좋은 것 있으면 전부 지 잘란 척 다하고 생색 다 내고 전부다 자기는 하고 싶으대로 다하고 어렵다 싶으면 와가지고 징징대고 다 또 기붙고... 여기 반대로 생각하는 사람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인간 만들려고 붙잡으려 붙잡으려 해도 나중에 한 10년 지나면 아예 포기해 버려요. 포기하면 이제 나이 50 넘으면 지가 지 풀에 죽어가지고 이뻐해줘 하면서 기 들어오고. 그때까지는 진작 지 마음대로 다 하고. 차 열 번씩 바꾸고 자기 하고 싶은데로 다하고.

그러니까 아내가 가정을 위해서 충성하는 충성도를 남편은 도저히 이해를 안 해주는 거예요. 반이라도 이해를 안 해줘요. 아내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고생하고 마음 고생하고 하는지 도무지 이해를 못해줘요. 내가 니가? 다 이해하게. 우짜란 말이고. 나도 힘들다. 이런 소리나 하죠.

그러면 아내가 이래하죠. ‘그럼 부부가 뭔데? 서로 이해해 줘야지 그것도 이해 안 해 주면 그게 뭔 부부고?’ 하면, ‘나한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지 마라. 나는 그것밖에 안되는 인간이다’. 하죠. ^^ ‘그럼 책임 회피가?’ ‘책임회피라도 할 수 없다. 난 몸이 두개가 아니니까 나는 원래부터 그거 밖에 못하는 인간이다’.

‘결혼 전에는 그 이야기를 왜 안했느냐?’ ‘나도 그럴 줄은 몰랐지’. ^^ ‘나도 그런 인간인 줄 몰랐지’. ‘아이고 이야기 고만하자’. ‘자자’. ^^ 집안에 대화가 없어요. 그래서 이것이 ^^ 이럴 때 비록 집에 10억이 있고 애가 공부를 잘 해도 뭔가 내가 기대하는 것 하나 안되면 그다음에 뭐냐 살 소망을 잃어버립니다. 죽고 싶어요. 이게 주부 우울증입니다.

왜 처녀 때 몸매를 유지하지 않았으냐, 왜 중부지방(배살)에 지방이 끼었느냐 우울증에 걸려요. 내가 이런 소박한, 큰 욕심이 아니고, 작은 욕심인데 왜 내 뜻대로 안되느냐 허탈감 회의감 이게 우울증이 됩니다. 우울증이 뭐냐하면 잠재적인 자살 충동 아닙니까? 우울증은 잠재적이 자살 충동이예요.

죽기 적당한 것을 못 찾아서 못 죽었지... 죽기 정당한 것, 분위기 좋은 데를 못찾아서 못 죽었지. 왜냐하면 지금은 한강 물이 차가와서 못 들어가잖아요. 봄 되어야 따듯해 지고, 지금 얼음이 있어서 아프잖아요. 그래서 못 죽잖아요.

이런 충동 이게 뭐냐 살 소망이 없는 거예요. 불신자든 신자든 이게 생기는데... 놀랍게도 살 소망이 끊어질 때 그때 그리스도가 짠 하고 나타나요. 잠시 나타났다 사라져요. 이제 내가 너의 행위를 받지 않고 나의 십자가 행위로 너를 일방적으로 피로서 구원하는 이유를 아느냐?

너는 기껏 내가 아무리 사랑해봤자 죽겠습니다 하고 나자빠지는, 많은 사랑과 은혜를 줘 봤자 감사할 줄은 아예 모르고 맨날 하는 것이 하나님 이레 나오면 나 죽을랍니다 하고 이렇게 시위하고 반항하는 그런 행세밖에 할 줄 모르는게 우리예요.

그런데 거기에 누가 찾아와서 이제 너의 주제를 아는구나 했을때 그 관계를 믿음이라 합니다. 아 믿음은 철저하게 나의 본성을 까발리는구나. 그래서 뭐 이렇게 부족하니까 그냥 마음 맞추어서 사세요 하는 것은 불신자에게 하는 (결혼식) 주례고, 신자한테는 원래 마음 안 맞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소망을 그리스도에 두세요 주례합니다. ^^

자, 그 다음에 12절.

(고후 1:12)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써 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의 증거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밀려오듯이 너희들이 원치 않지만 내가 너희에게 찾아가는 겁니다. 고린도교회에 또 찾아가는 겁니다. 이게 뭐냐? 너희들이 초청한 게 아니고 사도바울 뒤에서 떠미는 거예요. 누가? 주님이. 누굴 만나라고?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만나라고. 떠미는 거예요.

제가 여기 안산에 오는 것도 떠미는 것 같아요. 주인 없는 집에서 뭐하는 고^^ 처음 안산 성경공부 하자 할 때 나는 한 세 번 갈까 했어요. 세 번까지는 해 주자 이랬어요. 하도 성의가 없는 것 같아서. 지금 세 번이 뭡니까 열 세번도 넘었어요.^^ 떠미는 것 같아요. 이게 하나님의 은혜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불신 세계에서는 아무리 직장생활하고 사회생활해도 이런 이야기를 옆에서 누가 해 주는 사람이 없어요. 심지어 교회에 가도 안해 줘요. 돈내라 예배당 짓게 돈내라 그 소리 밖에 안해요. 돈 안내면 저부 받는다. 우리교회 돈 안내서 저주받은 사람이 한 두명이 아니다. 매주 이야기하고. 돈 내고 복 받은 사람 많다. 하고.

돈 내나 안내나 그것도 아무 의미 없고, 지금 누가 여러분들을 떠미십니다라는 말을 누가 해주느냐 말이죠, 누가. 사도바울이 해 줘요. 사도바울이. 너희에게 다가감은 육체의 지혜대로 아니하고 통밥 굴리는 게 아니고 주의 은혜로 여러분을 만나고 있습니다, 하는 거예요.

그런데 만나는데 누가 방해하느냐? 나중에 나옵니다. 마귀가 못가도록 방해해요. 마귀가 방해할 만하죠. 이런 사도바울이 복음전해서 그들이 구원받으면 안되잖아요. 그래서 여기 19절 봅시다.

(고후 1:19)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이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님은 말만 하시는 분이 아니고 예 대로 실제로 일을 하셔서 지금 사도바울이 너희에게 편지를 보내고 있잖아. 이 편지를 내가 했다고 생각하지 말고 뒤에서 떠 미시는 분이 계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자기가 택한 백성을 기어이 건지시는데 어떤 지수(?)도 없고, 어떤 중지도 없고, 어떤 실패도 없고, 우리는 맨날 실패해도, 주님께서는 계속에서 우리에게 오직 주님께서 십자가의 대속의 용서하심으로 이미 너희는 구원되었어 우리에게 통보해 주시려고 그렇게 애를 쓰시는 거예요.

20절에 보면,
(고후 1:20)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히야 이 말씀 좋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지킵니까? 노(No). 우리가 실천합니까? 노(No). 그러면 우리 말고 누가 있어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완료가 되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는 적용 대상일 뿐이예요.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가 적용대상이 되니까 우리는 구원 ‘될 자’ 로서 적용되고, 주님은 우리를 ‘구원해야만 하는 자’로 적용되고. 아 이 말이 좀 어렵네요. 좀 쉽게 해 봅시다. 중요한데 그냥 못 지나가겠어요. 봅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실 때 여기 누가 있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 지실 때 자기 죄 때문에 지진 않았을 거예요. 왜? 자기는 죄가 없으니까.

그러면 누구 죄 때문에? '자신이 구원할 자'의 죄 때문에 십자가 지셨잖아요. 그러면 이 십자가에 죽을 때 누구와 함께 죽습니까? 갈라디아서 2장20절에 보면, 우리 구원 받은자, 하죠.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관심도 없고 도망치죠. 주님께서 도망치는 것을 붙잡을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뭐냐하면, 이 십자가가 예수님 혼자의 십자가가 아니고 우리와 대동(帶同)된, 데리고 다니시는 십자가이기 때문에 우리가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치지 못하는 거예요.

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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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