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고대 신학 1
02 고대 신학 1
이근호 2004-02-29 18:11:33, 조회 : 467, 추천 : 31
Ⅱ. 고대 신학
고대의 자연 개념은 사실 '정신을 지닌 물질', 또는 '물질을 입은 정신'이었다.
먼저 '물질파'에 대해 살펴보자. 이들은 자연적 우주 안에서 벌어지는 온갖 다양한 현상이 서로 마구 다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무엇인가 근원적이고 궁극적인 원소에서 비롯된 것임을 전제하고 그 본질을 캐들어가기 시작했다.
더욱이 이들은 삼라만상이 그렇게 드러나도록 한 근원이 종래의 신화에서 그려졌던 것처럼 초자연적인 위력이 아니라 바로 자연적 우주 자체 안에 산재되어 있는 자연물이라고 주장했다. 삼라만상의 근원을 추구함에 있어 신화적으로 전개되어 왔던 초자연주의적 세계관으로부터 자연계 자체 안에서 이를 규명하려는 이성적 접근으로의 전환이 최초로 개진되는 사상사적 사건이 드디어 벌어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특별히 주목해야 할 것은 물질파에 속하는 여러 사람들이 비록 각양각색의 주장을 제기했지만 다양한 삼라만상이 단일한 근원에서 비롯되었다는 인식을 공통적으로 지녔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그 구체적 주장의 타당성 여부를 떠나서 철학사적 의의를 지닌다.
탈레스Thales(B.C 600 경)는 다양한 삼라만상의 근원을 물이라는 대표적 자연물로 대담하게 제시했다.
모든 것을 있게 하는 영양분이나 사물의 씨앗이 축축하다는 점에 주목하여 물을 지목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추측이 있기는 하지만 사실 생물학적으로도 인간의 75%가 물이라 하니 그 당시 수준으로는 경이로운 제안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물이란 자연적 산재성을 가리키는 물리적 의미 뿐아니라 물이 가진 융합성과 용해성이라는 상반된 성질이 우주의 자연적 본성을 가리키는 탁월한 은유적 특성을 나타낸다는 점에 더 큰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er(B.C 611-547년 경)가 근원으로 지정한 물은 삼라만상의 다양성과 변화를 이루는 대립적 성질 중 하나에 불과하기 때문에 근원적으로 불충분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근원의 특정한 자연물로 한정되기보다 모든 한정적인 것들의 대립 이전에 이를 원초적으로 포괄할 수 있는 '무한정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생성과 변화에 의한 부정적인 무한성을 간파한 새로운 건재는 철학사적으로 볼 때 최초의 추상적 개념화라는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그런 '무한정자'가 d어디까지나 물질적 원인에 의미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이어 나타난 아낙시메네스Anaximanes(B.C 550년 경)는 '공기'라는 특정 자연물을 다시 상정함으로써 물보다 한정적이지 않는 성질의 제시했다. 더욱이 탈레스의 물과 달리 아낙시메네스의 공기는 농축되면 물이 되고 희박해지만 불도 될 수 있는 밀도의 변화가능성을 지닌 것으로서 그야말로 삼라만상의 대립적 변화를 포괄하는 단일한 자연물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탁원한 선택처럼 보인다.
결국 이렇게해서 세 사람으로 대표되는 밀레토스 학파는 물질의 영원성을 견지하면서도 그 배후의 절대적 시원을 달라 설정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유물론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물질과 정신을 확연히 분리하는 자연관을 토대로 하는 근세 이후의 시작에서 말하는 그런 유물론자들은 아니다. 다만 만물의 기원을 물질성에서 찾으려 했다는 점에서 고전적 물질론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밀레토스 학파의 작업은 자연현상들의 근원을 자연계 안에서 찾으려는 시도에 충실한 가운데 근원의 물질성을 공유함으로써 후대 유물론의 선조로 모셔졌다.
그렇지 않아도 이미 영혼불멸 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오르페우스교의 철학화에 관심을 갖고 있던 피타고라스와 그의 추종자들이 이런 물질론적 전개를 그냥 두고 보고 있지 않았다.
이들에게는 인간의 중요한 부분이 육체가 아니라 영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수(數)라는 근원적 단위개념을 설정하여 다양성을 설명하고자 함으로써 밀레토스 학파의 물질론에 대립되는 정신론을 전개했다.
이들은 수라는 형이상학적 은유를 통해 의도한 바는 우선 삼라만상의 다양성이 밀레토스 학파의 그것처럼 물질적 자연물로 환원될 수 없음을 분명히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삼라만상의 다양성과 변화는 수의 무한한 가감으로 표현될 수 있으면서도 동시에 수라는 추상적 단일성으로 그려지는 조화의 정신을 뿌리로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주장의 배경에는 외형적으로는 혼돈스러울 만큼 다양성을 지닌 삼라만상을 포괄하는 우주가 지고의 지성을 원형으로 하는 영혼의 제작물이어서 당연하게도 체계를 지니고 잇는 질서적인 것이라는 신념이 깔려 있었다. 다시 말하면 밀레토스 학파가 우주의 자연적 대립과 갈등을 주목했던 것과 달리 피타고라스Pythagoras(580-500 B.C) 학파는 우주의 질서적 조화를 강조함으로써 형이상학은 이미 그 태동기에 우주론 안에서 물질론의 갈등과 조화에 비중을 둔 정신론의 대결로 그 서막을 장식하고 있었다.
이렇게 울려 퍼진 형이상학의 서막은 그 우주론적 대립을 해소하고 보완하기 위해 근원의 정체적 본성의 물-심 여부를 넘어서 이의 형상적 본질을 탐구하는 존재론으로 이어졌다.
즉 근원이 물질이든 정신이든 그것을 이루고 있는 본질이 고정·영원·불변·부동·불가분·무차별하여 필연·무한하고 따라서 절대적인 , 아니면 유동·시간·가변·역동·차별적이어서 우연·유한하고 상대적인가라는, 또 하나의 대립이 이른바 '존재-생성'이라는 이름으로 전개되었다.
먼저 '존재를 모시려는 엘리아 학파의 수장인 파르메니데스Parmenides(B.C 500년 경)는 파타고라스의 학파의 일원으로 출발했지만 이 학파가 변화와 운동을 인정한다는 이유로 이와 결별하게 된다. 이 결별은 그의 '일자(一者)'개념으로 이어지는데, 일자란 '없음이 전혀 없이 참으로 있는 것'을 뜻한다.
그에 의하면 그 무엇인가 생성된다면 이는 존재에서 비롯된 것이나 사실상 생성이 아니라 이미 존재일 뿐이고 만일 비존재에서 생성된다는 그것은 무(無)일뿐이어서 역시 생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생성 및 이에 의한 변화의 실재성을 철저히 부정하고자 했다.
그럼에도 그가 그토록 소중히 모시는 일자가 피타고라스 학파의 관념론의 분위기로 오해되어서는 안될 만큼 감성적으로 물질적인 것으로 간주했다는 점이 주목을 요한다. 그런가 하면 다른 한편, 후대 플라톤Plato(B.C 427-347년 경)은 바로 파르메니데스의 이런 일자 개념에서 관념론의 싹을 발견했다는 것이 철학사적 평가이고 보면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를 유물론이나 유심론 중 어느 일방으로 흡수시킬 수 있는 것으로 보시는 힘들 것이다.
파르메니데스의 이 복합적 지론은 바로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라는 한마디로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 온다. 이 오묘한 격언은 앞서 논한 바와 같이 실재의 차원에서 없음을 부정함으로써 없음에 의해 가능케 되는 변화와 운동의 실재성을 부정하고 오로지 있음만을 확증하려는 것이었다.
물론 파르메니데스의 이 말이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이다'라는 단순한 동어반복과 전혀 다르다는 점은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겠다. 그렇다면 이것은 과연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
변화하는 현상들이란 '참으로 있는 것'으로부터 여전히 거리를 지닐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확언하고자 했을 뿐이다.
참이란 이처럼 고정적으로 영원하며 불변하다는 신념이 이들에게는 이렇게 존재론적으로 정착된 후 서구사상사는 실로 거대하고도 유구한 존재 예찬의 역사를 펼치게 된다.
우리가 관심 갖게 될 신 개념이 이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으며 이로부터 온갖 종교적·신학적 힌트들이 연출된다. 그런데 영원성과 불변성의 견지에서 그려진 '참'의 완전성이 인간으로 하여금 오히려 그 '참'에서 멀어지게 하는 왜곡을 자아낸다는 점이다.
이런 문제의 가능성을 간파한 헤라클레이토스Heraclius(B.C 540년 경)는, '똑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말도 대응한다. 즉 '있는 것이라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없고, 없다는 것이 있을 뿐이다'는 말이다.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안정되어 있지 않으며 아무 것도 머무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묘사하기 위한 형이상학적 은유로서 그는 '불'이라는 자연물을 지정했다. 여기서 불이란 우주론자들의 선택에 추가되는 또 하나의 변덕이라기보다는 대립자들 사이의 긴장과 투쟁을 회화적으로 포착해 낼 수 있는 탁월한 이미지라는데 더 깊은 뜻이 있다. 말하자면 불은 불 아닌 것을 태워 자신으로 만듦으로서 사는 생리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 착안해서 만물의 대립과 투쟁에 의한 생성소멸의 원리를 설명해 줄 수 있는 더할 나위 없는 표본이라는 것이다.
그가 불의 변화과정을 '상향의 길'과 '하향의 길'로 나누어 묘사하면서 결국 양자는 하나라는 데까지 이른 것은 이런 동기와 배경의 의한 것이다.
그럼에도 헤라클레이토스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만물의 변화무쌍함을 묘사하면서도 그런 변화를 변화로 겪어내고 읽어낼 기준으로서 '일자(一者)'를 설정했다.
보편이성 또는 만물에 내재하는 보편법칙을 뜻하는 '로고스'라는 일자는 이전 단계의 우주론에서 근원 탐구가 삼라만상의 다양성을 포괄하기에는 다소 한계를 지녔던 데 비해 변화의 상극적임 다양성과 안정을 아우르는 풍부한 단일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무한정자(無限定者)'를 논한 아낙시만드로스에게 있어 만물 안의 대립자들은 부정적인 것으로 보였으나 헤라클레이토스에 있어서는 대립자들의 긴장이 일자의 단일성을 위해 오히려 필수적인 것으로 보일 만큼 만물의 대립성을 긍정적으로 읽어내는 혜안을 지녔다.
바로 여기서, 즉 로고스가 내포하는 '대립의 일치'라는 일자 개념이 후에 신학적으로 해석되었다는 점에서 헤라클레이토스를 주목해야 할 이유가 발견된다.
더욱이 보편이성이라는 개념과 이에 대한 인간이성의 참여적 연관성을 강조한 그의 사상은 후대 스토아 학파의 형이상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기독교 신학의 사상적 원조라고 할 수 있다.
우주론과 존재론의 작업이 근원의 본성과 본질을 탐구하면서 모색한 결과 상충될 수밖에 없는 결론들에 당도하게 되었으되 그중 어느 것도 함부로 버릴 수 없으니 또 다른 차원의 기준에 설정하지 않는 한 모두 묶어 볼 밖에 다른 방도가 없다.
그래서 어느 것도 버릴 수 없는 결론들의 상충성을 극복하고 이를 종합할 수만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근원의 총체적 단일성을 여전히 만족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신념이 대두되었다. 하지만 이 종합은 다원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 구체적 결실이 원자론의 형태로 드러냈다.
먼저 엠페도클레스Empedocles(B.C 490-435년)는 문자 그대로 다원론적 종합의 전형을 보여 주었는데 이는 파르메니데스의 존재와 헤라클레이토스의 생성소멸을 결합시키는 데서 출발했다.
구체적으로 보면 근원적으로 독립적인 물·불·공기·흙이라는 네 개의 뿌리가 존재의 불변성을 확보하는 근거가 되면서 동시에 그 뿌리의 복수성과 다양성이 변화의 단초가 된다는 방식이다. 그러나 그의 종합이란 여기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이미 우주론과 존재론의 각 대립에서 물려받은 유산을 활용하는 지혜를 지녔기에 가위 종합의 선구자가 되었다. 밀레토스 학파가 근원이라는 이름으로 설정된 특정한 자연물로 만물의 변화를 설명하지 못했던 반면에 엠페도클레스는 그런 근원의 단일성과 만물의 다양성을 이어주는 자연의 과정을 운행하는 동인 또는 활성적 힘에 착안했다.
그에 의하면 바로 이런 힘에 의해 네 개의 뿌리가 서로 엉겨붙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하는데 이런 얽힘의 정도에 따라 삼라만상의 다양함이 비롯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엉겨붙게 하는 힘이 '사랑'이라면 흩어내는 힘이 '미움'이라고 할 것인바 그의 지론은 물리적이면서도 여전히 초자연적인 힘을 상정하는 신화에 의존함으로써 온전한 종합이라고 하기에는 아직도 거칠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 의도는 가상해도 전개는 투박함을 보다 못한 아낙사고라스 Anaxagoras(B.C
500-428)는 이런 선배의 이야기를 세련되게 다듬고자 했다. 우선 엠페도클레스와 마찬가지로 아낙사고라스도 존재의 불변성에 대한 신념에 입각하여 물질불멸론을 주장하면서 파괴 불가한 '씨앗'에서 비롯된 생성소멸의 변화를 이에 조화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아낙사고라스의 철학적 기여는 여기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불변적 물질입자에 대해 운동적 힘이 별로 주어진다는 엠페도클레스와 달리, '원초적 덩어리'에서 사물들을 형성시키는 힘을 설명하려고 시도했다.
그래서 '뿌리'를 거슬러 아예 '씨앗'을 추적하고 이 씨앗이 심겨 발아하고 성장하는 생리구조를 '이성적 정신'이라 하니 한결 멋있는 설명이 되었다.
그런데 그의 이런 진전은 파르메니데스에게서 던져진 존재와 생성의 양립불가라는 문제를 후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잠재태와 현실태의 대비를 통해서 해결 할 수 있는 중요한 징검다리로서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아낙사고라스에게서의 이런 진전은 자연철학을 특징으로 하는 고대 형이상에서 '정신', 또는 '마음'의 형이상학적 위상을 본격적으로 구축했다는 점에서 철학사적으로 지대한 의미를 지닌다.
그렇다면 '정신'이란 무엇인가?
그에 의하면 정신은, '무한하고 자율적이며, 어떤 것과도 섞이지 않은 채, 홀로 그 자체로 있으며, 모든 사물들 중에서 가장 미세하며 가장 순수하고, 그 밖의 모든 것들이 있는 곳에, 주변의 물체 더미 속에 있다'라고 하였다.
즉 말하자면 그에게는 정신은 물질들의 변화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 설정되는 도깨비 방망이 같은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위의 마지막 구절이 가리키는 바 정신의 '공간성'으로 인해 아낙사고라스가 말하는 정신은 여전히 물질적 원리라는 개념을 넘어서지 못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더 나아가 우리는 그에게서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인간의 독자적 자의식을 설명할 틀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러나 비록 정신의 공간성으로 인해 그런 정신적 원리와 이에 의한 운동하는 사물 사이의 차이가 모호해졌다고 하더라도 아낙사고라스의 정신도 이보다 앞선 헤라클레이토스의 로고스와 함께 형이상학적 추상화 과정의 주요한 길목에 자리잡고 있어서 신학적 의의를 지닌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어쨌든 이런 다원론적 진전은 급기야, '씨앗'과 '정신'의 종합적 단일체인 '원자'라는 개념에까지 이르게 되었으니 이에 레우키포스나 데모크리토스Democritus(B.C 460-360) 같은 원자론자들이 등장했다. 이런 원자론은 사실상 아낙사고라스보다 엠페도클레스의 사상을 다소 정교화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과정에서 주목할 것은 엠페도클레스가 도입했던, '사랑'과 '미움'이라는 신화적이고도 은유적인 힘들이 당대의 엄격한 기계론적 자연관에 비추어 난점이 있다는 점이었다. 이런 이유로 이제 원자는 더 쪼갤 수 없는 가장 작은 기본단위로서 물질과 정신, 존재와 생성을 한데 아우를 듯한 야심 찬 형이상학적인 뜻을 품은 근원 개념으로 모셔졌다.
그런데 여기서 원자에 대한 그들의 상세한 설명보다도 더욱 주목을 끄는 것은 이미 당대의 원자라는 개념이 적어도 근세 물리학이 상정하는 원자 개념에 상당히 근접할 만큼 탁월한 과학적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형이상학이라는 것이 마냥 구름 잡는 헛소리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탁월한 증거에 해당하기도 하거니와 형이하학에 대해서 지니는 지위를 확인하는 계기가 된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원자라는 개념도 근원의 순수단일성이라는 기준을 충족시키기에는 너무도 복합적이어서 말 그대로 종합이라는 구도의 산물일 뿐이었다. 비록 여기서 엠페도클레스의 신화적 '힘들'이나 아낙사고라스의 '정신'에 상응하는 개념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그 대안으로 제시된 바 원자가 스스로 움직인다는 애매한 종합은 형이상학적 근원탐구에 여전히 미흡한 것으로 보였다.
후에 '부동의 원동자'를 내세운 아리스토텔레스Arstotles(B.C 384-322)가 원자론에 대해 가한 비판도 이와 같은 맥락임은 물론이다. 결국 형이상학적 근원탐구가 이런 종합을 기틀로 하는 기계적 원자론에 머물러 만족할 수는 없었다.
그런 방식으로 긁어모을 근원이라면 거슬러 추구될 이유도 없거나와 굳이 근원이라고 할 것도 없겠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형이상학의 가능성 자체가 의심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는데 근원 탐구의 불가능성과 무의미성이 주장되기에 이르렀다.
삼라만상의 다양성을 넘어서는 보편적 단일성에 대한 신념으로 출발한 고대철학은 우주론의 태동 이후 존재론의 보완을 거치고 이를 종합함으로써 이제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 세계를 법칙이 지배하는 전체적 체계로서 보는 나름대로의 결론에 도달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주지하다시피 이 단계까지의 철학은 자연으로 일컬어지는 외부 세계에 대한 형이상학적 직관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비록 파르메니데스의 '일자'에서 관념론의 씨앗을 볼 수 있고 아낙사고라스의 '정신'에서 형이상학적 일신론의 서주(序奏)를 들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당대의 자연철학이 질을 양으로 설명하려는 후대 유물론적 기계론의 원자가 된 원자론으로 귀결되는 것은 불가피했다.
그런데 이제 그렇게 엮여져 왔던 근원탐구로서의 형이상학이 종합이라는 단계를 거치면서 비아냥의 대상이 되었다. 근원의 단일성에 대한 직관적 신념이 이와는 매우 어울리지 않는 종합이라는 어정쩡한 태협을 요구받게 되면서 근원탐구라는 과제의 궁색함이 드러나는 듯이 비쳐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는 어떤 것도 절대적 근원으로 상정될 수 없으니 모든 것이 상대적일 수 밖에 없다는 상대주의가 위세를 떨치게 되었고 이는 더 나아가 어떤 것도 확실히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적 회의주의로 이어졌다.
우선 프로타고라스Protagoras(B.C 480-410)는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고 갈파하면서 인간 밖에서는 어떤 기준도 설정될 수 없다는 급진적 상대주의를 선언했다. 이런 상대주의는 자연철학이 설정한 물질적 불변성이 가리키는 '절대성'에 대한 비판에서 연유되었음은 물론이다. 따라서 저마다의 진리관이 마구 정당화될 수도 있으며 무정부주의를 용인하다는 비난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전의 자연철학이 물질적 불변성에 대한 직관적 신념에서부터 연역적으로 삼라만상의 변화를 설명하려고 했다면 이와는 달리 이런 상대주의는 인간의 생활에 대한 경험적 관심에서 출발하는 귀납적 방식을 취했다는 점에서 사실상 철학에서의 새로운 흐름을 예고하는 신호탄으로서의 의미를 지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런 상대주의는 당대 관심의 초점인 자연에 대한 우주론·존재론적 접근의 한계를 드러내고 인간으로 관심을 돌리게 하는 인간학적 전환의 계기를 제시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바로 이런 전환은 델피 신전의 경구인 '너 자신을 알라!'를 다시금 외친 소크라테스Socrates(B.C 470-399)에게서 비롯된 인간철학의 서주였다는 점에서 철학사적 의의가 결코 적지 않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런 상대주의의 급진성은 자연철학이 제시했던 근원의 보편적 단일성이 가리키는 '확실성'을 의심하는 '회의주의'에 이르게 했다. 프로타고라스는 모든 것이 '참'일수도 있다고 주장한 반면에 고르기아스는Gorgias(B.C 450년 경) 어떤 것도 '참'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아무것이나 다 침이든 아무것도 참이 아니든 이로써 삼라만상의 뿌리를 캐들어간다는 형이상학은 그 절대성과 확실성 자체가 뿌리채 뒤흔들리는 와해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는 것만큼은 의심할 나위없이 확실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절대성과 확실성이 도전받는 형이상학적 난황은 그 이면에서 형이상학적 영웅이 필요했고 도한 이를 탄생시킬 여건으로 성숙해 갔다. 그리고 이런 필요성과 가능성이 한데 어우려져 상대주의적 비판으로부터 절대성을 정초하고 회의주의적 공격으로부터 확실성을 담보할 구도가 추구되었다.
그러나 '신은 창조자다'라는 종교적 명제와 같이 절대적이지만 확실하지 않은 것과, '2+2=4'라는 수학적 명제처럼 확실하지만 절대적이지 않은 것이 상정될 수 있을 만큼 절대성과 확실은 전적으로 동일한 것이 아닐뿐더러 이 양자를 묶어내는 것도 그 양항의 성질에서 추론될 수 있을 만큼 간단한 과제가 결코 아니었다.
바로 양자를 묶어낼 제3의 포괄적 범주가 요청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완전성'이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완전성은 절대성과 확실성 사이의 간격을 메움으로써 함께 엮는 개념으로 설정되었는데, 한마디로 '절대적이면서 확실하고 동시에 확실하면서 절대적인 것'을 가리켰다. 이것이 과연 인간이 그려내는 그림 안에서 떠올려질 수 있기나 하려마는 하여튼 이런 목표를 근거로 '지고의 완전자'를 설정했는데, 이를 일상적으로 이름하면 곧 '신(神)'이었다.
따라서 형이상학은 우주론과 존재론의 한계를 넘어 신론을 향하게 되었고 이제 신론은 근원이 삼라만상에 대해 지니는 주재적 원리로서의 지위를 다루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이로써 형이상학은 기존에 이루었던 우주론과 존재론의 종합에 신론이라는 포장을 씌움으로써, '우주-존재-신-론적 근원학'으로서의 모습을 띠게 되었다.
그런데 이제 형이상학적 집대성의 모습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우주론과 존재론의 종합에 대한 상대주의의 비판과 회의주의의 공격이 형이상학의 지평 위에 전개해 놓은 거대한 두 흐름 및 그 사이의 오묘한 얽힘이다.
우선 상대주의의 비판이 형이상학적 관심을 자연에서 인간으로 전환시킨 결정적 계기로서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그런 상대주의적 비판에 가세한 회의주의적 공격은 급기야 절대성과 확실성의 붕괴라는 형이상학적 위기를 초래함으로써 이를 해결하기 위한 구도로서 절대성과 확실성을 묶는 완전성의 존재인 신을 요청하도록 몰아갔다는 점 또한 동시에 진행된 주요한 흐름이다.
바로 여기서 우리의 주목을 요하는 것은 형이상학적 초점이 자연에서 인간으로 넘어오면서 신의 존재가 본격적으로 요구되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인간은 비로소 인간 자신에 대해 돌아보기 시작하면서 신을 떠올리게 된다는 너무도 당연하고도 자연스런 이치를 새삼스레 확인하게 된다.
신화시대에는 인간에 대한 이해가 신에 대한 의인화적 표상으로 나타났다면 이제 철학적 차원에서는 인간에 대한 관심이 신에 대한 형이상학적 추구를 촉발시켰다는 점에서 인간관과 신관 사이의 거부할 수 없는 관계를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런 관계는 향후 철학이 신학에 대해 지니는 의미와 영향을 논하는 데 있어 분석과 비판을 위한 결정적 도구가 된다. 어쨌든 이런 신-인 관계의 얽힘을 바탕으로 한 형이상학적 집대성은 앞서 논의한 것처럼 신론이 지니는 갈래인 '하나'와 '여럿'으로 대별되면서 전개되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