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고대 신학 3
04 고대 신학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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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고대 신학 3
이근호 2004-02-29 18:16:14, 조회 : 431, 추천 : 51
이처럼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설은 무엇보다도 다름에 의한 변화에 형이상학적 지위를 부여하려는 과감한 시도의 소산이다. 다시 말하면 변화한 같음이 다름을 싸안음으로써 양자가 얽혀 이루어내는 현상인데 이 현상이 형이상학적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것은 단순히 다름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같음과 얽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은 같음을 책임지는 현상은 다름에 의해 일어나는 변화의 궁극적 목적일 분 아니라 바로 그런 목적으로 지향시키는 동인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형상이 질료에 대해 동력인 된다고 할 때 그것은 곧 한 사물을 움직이는 힘이 반드시 외재적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뜻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 점은 그의 인간 이해에서 육체와 영혼의 관계를 질료와 형상의 그것에 대해 유비(類批)적으로 묘사했다는 사실에서도 그 의의를 확인할 수 있다. 더욱이 목적인으로서의 형상이 사물에 실체적으로 내재할 뿐 아니라 실체의 자기목적성 또는 유기성의 근간이 된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처럼 실체를 이루는 형상이 목적인 동시에 동력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는데 이런 결합은 당연하게도 목적의 궁극성과 동력의 원초성으로 거슬러올라가지 않으면 안되게 했다.
질료가 질료의 현실화의 목적이기도 하고 바로 그 현실화를 가능케 하는 동력이기도 한다 형상에 의해 이끌리는 것이라면, 그래서 질료성이 줄어들고 형상성이 늘어날수록 더 높은 존재론적 지위를 갖게 된다면, 이런 위계질서의 정점, 또는 끌어당김의 시원점으로서 모든 것을 다 현실화함으로써 질료를 조금도 지니지 않은 '순수형상', 즉 '있음 그 자체'라는 단계를 상정하지 않을 수 없겠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신론이 본격적으로 개진된다. 이런 질료형상설에 입각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신론은 당연하게도 현실화시켜할 가능태가 남아 있지 않은, 그야말로 '다 이루었다'는 순수현실태라는 개념으로 귀결되었다.
나아가 그 자체로는 현실화를 위한 어떤 움직임도 필요하지 않다는 점에서 '부동자(不動者)'인 동시에 가능태로서의 질료를 조금이라도 포함하는 아랫 것들을 그 자신이 방향으로 끌어올리는 힘의 원천이라는 의미에서 '원동자'여서 아예 순수현실태로서의 신은 '부동의 원동자'라는 질료형상론적 규정을 덧입는다.
여기서 부동이 신의 초월성을 포함하면서도 확실성을 담보하는 개념이라면, 원동자는 절대성을 포기하더라도 불완전한 삼라만상에 관계하는 성질인 내재성을 지칭하는 것이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은 가위 '초월적 내재'의 신이라 하겠다.
다시 말하면 부동의 원동로서의 신은 플라톤의 우주기원설을 배경으로 하는 삼신론의 요소들 중에서 원형적 형상과 제작자로서의 영혼이 결합된 실체적 연합의 산물이라하겠다. 그리고 이 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여럿 사람이 지배하는 것은 좋지 않다. 지배자는 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호메로스의 경구를 인용하면서 우주적 통일적 질서를 주관하는 원리가 하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서도 확인된다.
이와 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신과 후대 중세 신학의 대표적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Tomas von Aquinas(1224-1274)의 신론과는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는가?
토마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받아들인 것은 그것이 '유익'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진리'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이용하면서 동시에 아리스토텔레스가 해결하지 못한 형이상학의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다음과 같은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첫째, 그의 형이상학은 존재와 무(無)의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해답을 가지고 잇지 않고 그는 왜 무가 아니라 무엇이 있는지에 관한 세계의 영원성으로 설명하였지만 이는 적절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
둘째,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자가 무엇임과 있음의 결합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들을 존재자의 내재적 구성원리로 이해하지 않았다. 그는 존재자가 무엇인지는 이해하였으나 그것이 왜 있는지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않았다.
셋째,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존재자로서의 존재자의 궁극적인 원인들을 발견하고자 하였으나, 이를 완성하지 못했다. 그의 형이상학은 세계의 영원성을 전제로 하여 절대자를 변화의 절대원인으로 제시하였으나 존재자의 제1원인은 제시하지 않았다.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이 갖는 위의 문제점들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적 원리들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창조된 세계를 바라보는 신앙의 눈을 잃지 않음으로써 존재자의 제 1원리, 모든 존재자를 존재하게끔 만드는 존재 자체이며 최고순수현실인 신에게까지 도달한다.
그의 형이상학적 사고의 분기점은 존재자에 대한 이해로부터 시작된다. 인간 지성에게 인식되는 모든 개념들은 존재자를 통해서 설명되며, 지성에게 인식되는 모든 것이 존재자라는 것은 명백하다.
제일 먼저 알려지는 것으로서의 존재자는 모든 대상들을 가장 비규정적인 방식으로 파악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규정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 역시 존재자의 본성 외부의 있는 것일 수 없기 때문에 존재자의 가능성 안에 내포하고 있는 지식을 겨냥한다.
따라서 그가 설정한 과제는 인간 정신에 의해서 도달될 수 있는 한, 실재라는 존재자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다. 그는 실재가 연역될 수 있는 하나의 개념을 미리 전제하지는 않는다. 대신 실재하는 세계로부터 출발하여 그것의 존재가 무엇인가, 그것이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 그것이 실재하는 조건은 무엇인가 하는 것을 탐구하게 된다.
그에 의하면 형이상학의 궁극적 목적인 신에 대한 인식에로 향하고 있는 그는 인간이 자신의 이성만으로 신에 대한 완전한 인식에 도달 할 수 없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동시에 어거스틴Augustins(354-430)과는 달리 인간이 신앙의 빛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어느 정도 신에 대한 인식에 도달 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
인간 이성에 의한 신에 대한 인식은 지성의 직접적인 대상인 현존하는 물질적 사물들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시작된다. 말하자면, 유약한 존재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인식이 중재된다. 체험되는 모든 것은 결과로 파악되며, 수동성의 성격을 지니며, 자기 자신을 정당화 할 수 없다. 가능태, 즉 아직 현실화되지 않는 사물의 상태가 하나님을 중재하는 것이다.
하나의 사물이 참으로 간파되며, '실망적(失望的)'인 이 사물에 대한 체험이 이루어지게 되면, 하나님의 체험이 하나의 가능성으로 모습을 나타낼 수 있게 되는데 그것은 하나의 '부정(否定)'. 또는 '아직-아니'로 제시된다.
존재와 인식이 간단하게 동일화되지는 않지만, 존재와 사고의 법칙 사이에는 하나의 동일성이 존재한다. 법칙들은 서로 부합된다. 그 때문에 존재하는 것은 하나의 근거를 가져야만 한다는 우리 이성의 요청은 하나의 존재법칙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속성을 지닌 존재자에 대한 조정에 의해 하나님의 체험이 등장될 수 있다. 대상들과 교제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체험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어떤 것과의 혹은 어느 누구와의 관계나 만남 속에서 현존한다는 체험을 가질 수 있다.
이 신관 안에서는 모든 변화가, 시간과 역사가 논리적으로, 필연적으로, 주기적으로 사유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만사가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여 나가서, 하나님에게로 귀환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신을 목적인(目的因)으로만 알고 있는데 비해서(여기서 신은 쇠들을 잡아당기는 자석이나, 애인을 자기에게로 향하게 하는 사랑하는 사람과 같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나님을 작용인(作用因)으로도 생각한다.
'출발-귀환'의 도식은 그의 신론 구성에도 나타난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여 역사를 통해서 나아가 다시 하나님 안으로 귀환한다. 그러므로 모든 변화란 존재 자신인 하나님께는 소원(疎遠)한 부정적인 존재양식이다. 하나님은 역사를 알지 않고, 시간을 알지 않는다. 그는 항상 동일 한 분이다.
모든 변화의 기초는 존재와 본질의 분리이다. 인간이 만나게 되는 모든 사물에게서 인간이 '무엇'이라고 인식하는 본질이, 이들이 존재하고 있는 실존과는 실제로 구별된다는 사실이 변화의 근거이자 인간 역사의 근거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합성실체의 구성원리로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받아들인 질료형상 합성론을 전개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물질적인 사물에만 해당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모든 유한한 존재자에까지 적용되는 더 심오한 구성원리를 밝힌다.
모든 유한한 존재자는 가능태와 현실태의 합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물질적인 존재자는 단 한 번의 합성, 즉 형상 자체인 본질과 존재의 합성이 있을 분이지만, 물질적 사물들은 가능태와 현실태의 이중적인 합성이 있다.
먼저 본질에 있어서의 합성인 질료와 형상과의 합성이 있다. 그 다음으로는 이미 합성되어 있는 본질과 존재와의 합성이 있다. 이것은 존재자로 존재하게끔 만드는 존재 현실력이며 존재 에너지이다.
본질은 실체의 영역, 즉 무엇임의 영역에서는 제1 원리이다. 따라서 본질은 실체의 영역 이외의 다른 영역의 현실태의 원리인 존재에 의해서 현실화 되어야 한다.
본질에 의한 실체 영역의 완성은 그 본질을 현실태로 만드는 존재의 원리 없이는 불가능하며, 존재의 영역의 완성 역시 본질의 영역의 완성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를 근거로 그는 본질과 존재를 환원할 수 없는 두 원리로 규정한다.
우리가 이 세계에서 만나는 존재자는 모두 유한한 존재자이며 어떤 제한성이나 규정성을 지체 내에 내포한다. 따라서 유한한 존재자에 있어서는 존재와 구별되는 원리가 있어야 한다. 이런 원리를 본질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존재자가 어떤 것으로 말미암아, '무엇'이라고 불리울 수 있는 그것을 본질이라고 한다. 본질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존재의 어떤 결정적으로 국한 양태 안에 주어지는 바로 그것이다. 즉 존재자는 어떤 결정적으로 제한 존재내용(본질) 안에 있게 된다.
'이것이 무엇이냐?'라는 물음에 의해 드러나는 본질은, 어떤 것을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그것이게 하는 것으로서 확정짓는 규정성의 원리이자 제한의 원리이다. 본질은 정의(定議)에 의해 드러나며, 그런 한에서 사물의 종적 규정이다.
따라서 '무엇임'의 물음을 통해 정의로 표현되는 사물의 본질은 다수의 개별자에 공통적인 공통 본성으로서, 존재활동의 주체 자체가 아니라 그 주체를 특정 종에 속하게 하는 규정성의 원리이다.
따라서 본질이란 정의된 것이라고 생각되는 한에서의 실체이다. 질료적인 사물의 경우에는 본질이 질료와 형상으로 합성된 것을 지시한다. 예를 들면, 인간이 한편으로는 '이성적 동물'로 정의되고, 다른 한편으로 '육체 속의 정신'으로 정의될 지라도 인간의 본질은 하나 뿐이다.
그런데 본질과는 달리, 존재자를 있게끔 하는 것, 즉 존재자의 규정인 본질을 실존케 만드는 존재는 본질의 개념 속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존재는 개념화되거나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닌, '존재하는 활동으로서의 현실태'를 의미한다.
토마스는 실존의 여부와 상관없이 우리가 어떤 본질 개념을 생각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 본질 개념만으로 실존 여부를 알 수 없다. 그것이 실재성의 영역에서 존재하기 위서는 본질과는 다른 현실력이 필요하다.
본질이나 본체성의 개념에 속하지 않는 것은 항상 밖으로부터 오는 어떤 것이고. 그것은 본질과 합성된다. 왜냐하면 어떤 본질도 그 본질의 부분들 없이는 생각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각각의 본질이나 각각의 본체성은 그 본질(또는 본체성)의 존재에 대하여 알지 못해도 생각될 수 있다.
즉 나는 인간이 무엇이고 불사조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이 실재성의 영역에서 존재를 가지는가를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존재는 본질이나 본체성과는 다른 어떤 것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모든 유한한 존재자는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즉 존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존재자인 것이다. 말하자면 실체는 존재하고 있거나 존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존재라는 것이 그것에 의해서 실체가 하나의 존재자로 일컬어지고 있는 그것이다.
물질적인 존재자의 본질은 질료와 형상 뿐이다. 그러나 물질적인 실체나 비물질적인 실체를 현실적 존재이게 하는 것은 '존재'이며, 존재는 본질에 대해서 현실태가 가능태에 대해서 갖는 관계에 있다. 따라서 현실태와 가능태의 합성은 단순히 물질적인 존재자에서만 아니라 모든 유한한 존재자에서 발견된다.
존재자 안에서 형상이 정의된 것이라고 생각되는 한에서 실체임에 비해서, 존재는 그것에 의해서 본질 또는 실체가 있게 되는 현실태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존재를 존재의 원인인 신으로부터 유래한다는 의미에서 '밖에서부터 오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존재는 현실태이며 존재에 의해서 현실화되는 가능태와는 다르다. 신에게는 있어서만 본질과 존재가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신의 본질은 존재이기 때문에 신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신 이외의 다른 모든 것은 존재를 받아들이거나 그것에 참여하며, 받아들이는 그것은 받아들여지는 그것과 구별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우연적인 것은 단지 존재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을 '존재의 현실'로, '존재의 성취'로 직접 체험하지 않고, 창조된 존재자를 중재로 해서 '있다(be)'는 연계사 안에서 체험될 뿐이다.
이 '있다'는 인간이 모든 존재자에게 존재를 허용하는 바 존재의 관념이다. 그러나 이 존재관념이 하나님 자신은 아닌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자에게 해당되는 존재는 아니다. 다라서 그는 '하나님은 존재자의 존재'라고 주장하는 것보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자 위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체험된 모든 것이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사물들의 존재 역시 하나님이 아니다. 모든 하나님의 인식은 확실하게 '간접적'이다. 인간이 존재를 인식하는 한에서 그는 항상 '이것은 하나님이 아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여기 계시다!'고.
여기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창조'를 통해서 아무것도 더 이상 획득하지 않고, 아무 것도 잃어버리지 않는다.
전체 창조는 하나님을 지향하는 하나의 '초월적 관계'을 갖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耆은 창조과 실재적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고 단지 하나의 근거의 관계만을 가진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과 관계없이 존재한다.
만일 하나님의 존재가 우리 인간과의 관계라면 그는 어떠한 양식으로든 간에 인간에게 예속되어 있을 것이다. 시간과 역사와도 무엇인지 상관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있을 수 없다. 이 존재양식들은 결핍을 표출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처럼 그리고 전체 세계처럼 결핍존재가 아니다. 존재자들 안에서 긍정적으로 발견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실재로부터 무한하게 떨어져 있다, 하나님에게 세워져 있는 유일한 경계는 무(無)이다. 오로지 '무'만이 하나님에게 다가올 수 있다. 하나님은 존재 자체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 인식으로 체험될 수 없고 오로지 신앙으로만 접근이 가능한가? 그는 이 논증을 거부한다. 그에 따르면, 모든 신앙은 자연적 이해 가능성을 전제한다. 신앙의 성취는 체험의 한 영역을 가져야 한다. 이 이해의 영역이 없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은 부조리하다.
때문에 그는 은총이 본성을 전제한다라고 계속적으로 주장한다. 단지 신앙 안에서만 도달이 가능한 하나님이 아니며, 이런 주장은 체험될 수 없는 가설에 불과하다는 그는 보고 있다.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는 것은 인간이 진정한 하나님의 인식을 가질 때에만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 즉 신앙은 인간의 이해에 상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보다 조금 더 이후의 사람인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1274-1308) 에 있어 존재자의 구성 원리에 대해 토마스 아퀴나스와 의견을 달리한다.
토마스의 형이상학에서는 존재자의 두 구성원리 안에서 본질에 대한 존재의 우위가 명백하다. 존재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어떠한 본질도 현실적으로 실존할 수 없으며, 나아가 본질은 존재의 역동성에 의해 자신의 고유한 목적, 즉 본질의 충만한 완성을 향해 접근해가게 된다. 존재는 존재자 안에서 가장 형상적인 것이며, 다른 어떤 것보다 깊은 내부에 있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스코투스에게 있어서는 존재보다 본질이 우위에 놓인다. 스코투스에 따르면, 존재는 본질의 고유한 양상에 불과하다. 본질이 자신의 충만함을 취하게 되면 그것을 저절로 실존하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본질에 존재가 어떤 새로운 것을 덧붙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즉 존재는 본질이 자신의 완전한 규정 속에서 취해질 때 저절로 나타나는 본질의 한 양상일 뿐이다. 그런데 스코투스의 이론에 의하면, 즉 본질이 가능태의 상태에서 자신의 규정을 충실히 채우기만 하면 저절로 현실태가 되어 존재하게 된다면, 피조물이 인간의 지성 안에서 사고되는 것과 실재로 현존하는 것 사이의 구분이 모호해진다.
그 차이는 신의 창조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단지 본질의 충만함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 된다. 즉 피조물이 실재로 현존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있어서 신의 창조는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사물이 실재로 현존하느냐 아니면 단지 정신 속에 개념으로만 존재하느냐 여부는 신의 창조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그 사물의 본질의 충만성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물의 현존이 아니라 단지 그 본질을 창조한 것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코투스가 본질 우위에 나가는 것은 '개체야말로 가장 참되고 유일한 존재임'을 부각하기 위해서이다. 사물의 개체성에 관한 가치는 스코투스 철학을 통해서 그 원천적인 품위로 격상되고 회복된다.
존재란 단지 본질의 한 양상으로 파악한 스코투스의 존재론은, 수아레즈와 데카르트, 그리고 칸트를 거치면서 형이상학은 존재를 제외한 본질만의 학문으로 변질된다. 그리고 헤겔에 이르러 존재는 무로 환원되고 만다.
형이상학이 인식론과 다른 점은 그 대상을 바라보면서, '무엇인가?'만을 묻지 않고, '왜 있는가?'를 묻는다는 점이다. 그런데 본질 중심의 형이상학은 '왜 잇는가?'라는 존재에 대한 물음을, 존재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대체함으로서 존재를 찾지 못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존재는 결코 본질이 영역에서 찾아지지 않는다는 것이 존재론에 입각한 형이상학자들의 주장이다.
신학적으로 이 '왜?' 찾기 이전에 헬라철학에 의해서 존재론을 집대성한 인물이 있으니 바로 플로티노스Plotius(205-270)이다.
플라톤이 그러하였듯이, 플로티노스는 인간 '영혼'이 기억을 더듬어 추구해야하는 지적이며 영원히 존재하는 완전한 신체의 본 모습을 '삼위일체적 존재구조'안에서 드러내어주었다. 현실세계에서 경험하는 존재하는 것들의 근거를 보다 논리적으로 종합적으로 설명하려는 의도에서 이 삼위일체적인 개념을 계승하고 소개하고 있다.
이 삼위일체적 개념은 한마디로, 머무르고, 드러내며, 되돌아가는 궁극적인 신에의 존재구조를 특징짓는 개념이다. 다시 말해서 궁극적인 실체로서 모든 존재의 원천은 '변함 없이 머무르면서도 자신의 무한한 원천적 능력을 드러냄으로써 그때마다의 다양함을 선보이며 동시에 그러한 다양함은 의미 없이 사라져버리지 않고, 다시금 자신에게로 모아들이는 삼위일체적인 구조'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실현한다는 것이다.
'하나'를 그 중심에 두고, '정신'을 따라 반경을 그리며, 마침내 '영혼'이라는 원주를 통하여 하나의 구(球)를 이루는 전체적인 세계관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플로티노스는 여기에 대한 이해를 더하기 위해 '영원'개념을 활용하고 있다. '영원은 밖으로부터 첨가된 무엇이 거기에 자리하듯이 이해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영원한 오히려 그러한 순수 본질 안에서, 그 본질로부터 또 그 본질과 함께 파악되어야 옳다고 한다.
영원에 대해서 바르게 생각한다면, 그 '존재'로서의 영원함과 그 '본질'로서의 영원성이 하나로 이해되어야 할 것인 즉, 그 '존재'와 뒤늦게 정신적으로 파악되는 그 모든 것이, 혹은 존재근거로서의 실체가 우리에게 뒤늦게 드러내거나 우리의 추정을 통해 뒤늦게 파악되는 그의 다양한 상태들 모두가 영원의 전체성 안에서 이미 원천적으로 파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의미에서의 전체성은 실제적으로 미래에 언제가 모아지는 종합으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자체 안에 이미 하나도 결핍된 것이 없는 점에서의 근원적인 전체를 가리킨다 하겠다. 영혼불멸을 인지하는 자아인식은 '전체성에 대한 신적 인식'과 유대성을 갖는다.
인간의 육체는 공간적으로 연장선을 지닌 결합체이기에 그 때문에-결합된 유한자로 인간의 육체는 무한히 쪼개어질 수 있기 때문에-그 자신의 고유성을 따로 가지지 않는다. 인간의 육체는 분해되고 소멸되며 나아가 산산히 흩어져버릴 수 있다. 이러한 해체, 혹은 파괴는 한편 만일 영혼에 의해 온전한 통일성을 갖지 못한다면, 곧 영혼이 물질적인 부분들을 조합하고 질서 지우지 않는다면 반드시 벌어질 사태이다.
거기서 조합으로 생겨나는 무기체들이란 그때마다 물질과 형태라는 두 요소로 설명된다. 그런 무기체는 공간을 따라 연장되거나 더 작은 알갱이로 끝없이 쪼개질 수 있다.
참된 '하나됨'의 성격은 그러나 유기체에 나타나기에 무기체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이 무기체로서의 부분들, 혹은 물질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언제나 새로운 불안 속으로 몰아 세운다. 이 현상을 통해 인간에게 있어, 도대체 주된 것이 무엇이고, 본래적인 것이 무엇이며 자신의 고유성이 무엇인지를 되묻도록 이끈다.
플로티노스는 이렇게 캐묻고 따져나가는 실체를 '영혼'이라고 칭하고는 바로 그 영혼 곁에서 인간은 물질로서의 육체를 넘어서 자신의 본래적인 의미를 회복한다는 점에서 영혼의 우월성을 역설한다.
육체에 대한 영혼은 마치 물질재료에 대한 형상과도 같이 혹은 도구에 대한 예술가의 경우도 같은 우월성을 갖는다. 물질세계의 기본요소들, 불, 공기, 물, 흙 같은 것은 비영혼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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