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고대 신학 8
09 고대 신학 8
이근호 2004-02-29 18:22:58, 조회 : 398, 추천 : 82
말하자면 어거스틴은 신이 형상없는 제1질료를 무에서 창조한 것이 아니라 질료와 함께 형상을 함께 창조했다는 창조의 절대성을 주장한다. 이런 입장이 후에 스콜라 철학으로 이어진 것은 물론이지만 어거스틴은 우주의 기원에 관한 철학적 이설에 관심하기 보다 창조자로서의 신에 대한 피조물의 의존성을 강조하려는 신학적 동기에서 그렇게 주장했다.
어거스틴이 전개한 신과 세계의 관계가 이러하다면 그에게서 인간은 어떻게 이해되었는가?
플라톤에게서 영혼이 신적인 것에 근사하다는 표상과, 그래서 영혼이 선재(先在)한다는 표상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바로 이 시점에서 기독교 신학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들이 현저하게 부각되었다.
유스티누스는 트리포와의 대화에서 자기가 참된 철학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결국 어떻게 플라톤 학설에서 그 동기를 획득했는지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다.
그는 영혼이 신과 유사하다고 본 플라톤의 견해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영혼이 그 본질상 하나님과 근사하다면, 유스티누스가 해변의 모래밭에서 만난 늙은 현자의 생각의 물꼬를 터 주었던 것처럼, 영혼은 스스로에게서 이미 하나님에 대한 직관을 소유하는 게 틀림없다.
그러나 사실상 영혼은 하나님에게서 피조되었으며, 따라서 신적인 본질이 아니다. 또한 영혼은 하나님에 대한 직관을 성령에 의해서 선물로 받을 뿐이다. 이런 근거에서 유스티누스의 제자인 타티아누스는 영혼을 그 본성상 죽어야 할 존재로 간주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과 하나로 묶여 있는 불멸성을 은총의 선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스티누스와 타티아누스는 바로 이런 점에서 플라톤이 아니라 오히려 기독교적인 플라토니즘이 다른 사유 방식을, 즉 영지주의를 선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영지주의자들에 따르면, 특히 발렌티노스Valentinus of Rome(110?-170?)에 따라면, 프뉴마의 불꽃은 영혼의 본성에 속한다. 그는 물론 물질에 빠져든, '정신적인' 영혼과의 연결로부터 정회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영지주의 학설이 극단적으로 바울주의적인 성격을 갖는다는 것은 당연하다.
바울주의는 선택 사상을 일종의 인간론에 대한 기본적 규정이라는 존재론으로 해석함으로써, '육체를 따르는' 삶과 '영을 따르는' 삶을 대치시켰다. 따라서 두 종류의 인간이 즉 육에 속한 사람과 영에 속한 사람이 있다는 말이 된다.
오리겐은 인간을 두 영혼으로 구별하지 않고 단순히 육체적인 영혼과 영적인 영혼이라고 보았다. 즉 영지주의의 극단적인 바울주의를 반대하고 영혼의 단일성을 주장한 것이다. 플라톤과 달리 영혼이 몸에 얽매이게 되는 것은 선재적인 영혼의 죄로 인한 결과이지 프뉴마가 당해야만 하는 그 숙명이 아니라고 해석했다.
후대에 이르러서 영혼이 옮겨다닌다는 플라톤 학설만이 아니라 그 영혼의 선재성 표상도 역시 거부되었다. 그러나 기독교 신학자들이 신과의 동등성을 뜻하는 영혼의 영원성 학설을 거부했다고 해서 플라톤의 인간론을 전적으로 반대했다는 것을 결코 아니다.
이는 곧 영혼의 직접적인 신앙을 주장하는 유스티누스Justin Martyr(100-165)의 대안이 결국 프라토니즘이라는 사실을 뜻한다. 이것은 미래에 완성될 세계에서 성령을 통해 하나님을 직관할 수 있다는 것을 정의롭게 산 사람에게 주어진 값으로 보증된다는 명제이다.
이런 명제의 기초는 역시 '호모이오시스 테오'(하나님의 형상)라는 플라톤의 학설에 있다. 유스티누스에 따르면 하나님을 닮아갈 수 있는 능력은 인간 영혼의 본성에서 주어지는 게 아니라 은총으로 말미암는다.
즉 성령의 선물로 받게 되는 은총에 기인한다. 이런 사상은 유스티누스의 대화에서 다시금 플라톤 식으로 해석되었다. 즉, 조명은 이데아를 인식하기 위하여 애를 써야 한다는 플라톤의 생각에 근거해서 인식의 순간을 강조하는 것이다.
의미 세계에 있는 '예증'을 참작함으로써 이데아를 인식할 수 있도록 온갖 준비를 다 갖춘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는 결국 인식에 이르지 못한다. 오히려 이 통찰은 에로스부터 견인되어 참된 것을 모색하기 위해 이루어지는 그 상승이 마지막 순간에 아름다움에 대한 시야가 '갑자기' 그를 뛰어넘는 식으로 그에게 이루어진다.
인식 사건은 직관적이지 억지로 되는 게 아니다. 그래서 인식은 인간 이성의 본성을 통해서도 언제 어디서나 확실하게 영적인 시야를 열어주지 못하며, 뿐만 아니라 이것은 인간의 수고에 의한 결과도 아니다.
인식은 오히려 '갑자기' 주어지는 시야로서 사람에게 주어진다. 유스티누스는 이런 영적인 시야를 '거룩한 영'이라고 피력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150-215)는 기독교에서 참된 하나님을 인식 할 수 있게 만드는 이 조명 사건을 세례와 관련시켰다. 이것은 신비 언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배경에는 조명을 통해서 인식에 도달하려는 플라톤의 학설이 놓여 있다.
그리고 역으로 세례받을 때에 성령이 부여된다는 생각과 조명 표상의 만남은 믿는 자들에게 영이 은총으로 작용한다는 플라토니즘적 해석에 착상될 수 있었다. 오리겐도 역시 명시적으로 기독교 신인식론에서처럼 플라토니즘의 조명 학설은 신의 은총이 작용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인간 스스로에게서 발현하지 않는 그 무엇이라는 사실을 첨가했다.
기독교인들은 이 사상을 직접 플라톤에게서 가져올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요한복음에서 발견하였다.
오리겐은, 조명 사상이 은총 이해 일반에 대한 핵심 개념이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고전적인 방식으로 이러한 생각은 바로 어거스틴의 은총론에서 분명해진다.
어거스틴은 인식에 관한 플라톤 학설과 조명과 은총론 가운데서 조직적으로 상호 연계시켰다. 그는 이렇게해서 세례받은 자에게 성령이 활동함으로써 하나님의 은총이 인간에게 작용한다는 표상을 인간의 삶 전체를 이해하는 데까지 확대했다.
어거스틴은 모든 인식이 신적인 조명에 의존하다는 사실을 영혼이 진리 자체인 성령의 뭍음에서만 사물의 이데아를 인식한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이 이데아는 하나님의 영 안에서, 즉 하나님의 로고스 안에서 원형적(原型的)으로 종합되는 것이지 인간 영혼에 모사(模寫)적으로 각인된 것이 아니다고 보았다.
영혼이 받아들이는 인상으로부터, 영혼이 지각하는 대상으로부터 일종의 기억이 발생한다. 이 기억은 모사적으로, 그러나 잊혀진 채 영혼에 놓여 있는 영원한 진리에 대한 것이다. 영혼의 방향 전환이 이러한 회상이 사건에서 발생하게 될 때 조명은 신적인 진리의 빛을 통해서 일어난다.
회상, 회개, 하나님의 임재 같은 단어의 개념들은 어거스틴의 은총론이 갖고 있는 특징들을 보여 준다.
어거스틴은 모든 것을 창조한 하나님이 역시 '모든 인식을 불러모으는 영의 빛'이라는 점에서 플라톤주의와 일치한다. 그렇지만 그는 영혼의 선재적 상태를 기억한다는 점에서 플라톤의 조명 사상을 상기(想起)론과 구분한다.
어거스틴의 경우에는 이성으로서의 인간 영혼에 놓여 있는 무의식적인 깨달음을, 그리고 모든 경험에 앞서 있는 (선험적인) 이 깨달음을 각성시키는 개념이 이 상기론 자리에 등장한다.
이 각성은 하나님의 형상성으로 인해서 영혼과 조화된다. 다른 한편으로 플라톤의 이런 조명론은 어거스틴의 은총론과 연계됨으로써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인간 영혼 안에서 활동하신다는 사실과 대단히 깊숙이 관련되어 있다.
서구 중세기 신학은 이러한 어거스틴의 기본 사상을 단지 부분적으로만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13세기의 기독교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등장함으로써 순수하게 세속적인 인식론 모델을 통해서 자연적 인식의 영역이 진술되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어거스틴의 조명론은 은혜로운 인식의 영역에 한정되었다.
물론 인간은 육체와 영혼의 결합으로서 창조의 절정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어거스틴은 영혼을 육체를 지배하는 사명을 지닌 이성적 실체 또는 죽을 운명을 지닌 현세의 육체를 사용하는 이성적 실체라고 함으로써 플라톤의 형상설에 입각한 영혼관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즉 감각작용마저도 전체적 유기체의 활동이라기보다 신체를 도구로 사용하는 영혼의 활동이라고 간주할 만큼 어거스틴은 마니교의 유물론에서 벗어나면서 극단적 유심론의 입장으로 치달은 것으로 보인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피타고라스에서 본격적으로 철학화하기 시작한 영혼불멸성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까지 이어진다. 영혼은 비물질적이고 실제적이며 더욱이 생명의 원리라고 한다면 그런 영혼은 죽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영혼의 불멸성이란 무엇보다도 불멸의 형상을 파악할 능력을 의미한다는 것으로 새기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리고 이 점은 어거스틴이 영혼을 완전한 행복에 대한 욕망의 원천으로 간주한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그렇다면 이런 영혼은 어디서 오는가?
물론 영혼은 신에 의해 창조된다. 그런데 그 창조가 어느 순간에 어떤 과정을 거치는가에 따라 여러 가지 입장이 전개되었다.
영혼은 태초의 창조 전에 형상의 세계에 먼저 있었다는 선재설이 플라톤에 의해 주장된 후 오리겐이 이에 동조했는가 하면, 출생을 통해 육체와 새로이 결합되면 전이된다는 전이설이 질료형상론에 압권이요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지를 받았는데 터툴리안이나 니사의 그레고리가 이런 입장을 따랐으며, 이에 반해 클레멘트를 비롯한 초대 교부들 대부분은 영혼이 신에 의해 새롭게 창조된다는 창조설을 제시했다.
선재설은 창조의 무력성이라는 문제를 야기하여 교부들에게서 거부되었고, 전이설은 육체가 영혼을 이전시키는 주요 통로라는 점에서 유물론적 문제를 포함하는 것으로 꺼려졌으며, 창조설은 인간의 타락과 죄에 대해 창조자가 책임져야 하는 딜레마를 지니는 것이어서 어느 것도 영혼의 기원에 관한 만족할 만한 설명으로 평가되지 못했다.
어거스틴은 플라톤의 영향으로 선재설을 다루다가 창조설과 전이설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데로 관심을 옮겨갔다. 그런데 각자의 영혼이 따로 창조된다는 창조설은 원죄 문제를 설명하기 어려우므로 결국 아담의 영혼과 함께 모든 영혼이 창조했는데 부모를 통해 유전된다는 전이설로 기울어졌다.
그럼에도 이런 전이설은 영혼의 비물질성과 불멸성이라는 그의 기본 지론에 모순된다는 점이 지적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논리적 정합성을 결여하는 이론의 전개는 철학적 체계화를 목적하기 보다 신학적 변론을 위한 것이었다는 점을 한층 분명하게 드러낸다.
하여튼 그는 신의 초월성과 절대적 주권성을 강조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감으로써 고전신학의 전형인 은총주의의 효시를 이루었다는 것으로 평가된다.
어거스틴에서 집성된 교부철학은 사실상 초기 스콜라 철학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철학적 결실을 맺게 된다. 먼저 9세기에 걸출한 철학자 에리게나는 신플라톤주의와 어거스틴의 철학, 그리고 기독교 교리를 종합하려는 중세 최초의 위대한 체계를 수립했다는 철학사적 의의를 지닌다.
물론 이런 종합 안에는 신플라톤주의를 공유하는 니사의 그레고리나 위디오니우스의 영향으로 인해 신비주의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런 점은 에리게나의 대표작인 [자연구분론]에서 확인될 수 있다.
에리게나의 위치는 신앙을 전제하고 이성을 추구하는 구도의 본격적 완성자인 안셀무스를 예비하는 철학적 체계를 설정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신앙과 이성의 관계에서 신앙을 전제하고 이성을 추구하는 입장이 그 형이상학적 근거를 보편적 본질의 선재성에서 찾으려 하는 것은 당연하다. 전제되는 신앙이 절대성을 표방하기 위해서는 그 전제됨 자체가 무조건적이라고 주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신앙이라는 전제의 무조건성은 매개적 추론보다 즉각적 직관을 취할 것이니 이는 형이상학적 근거도 당연히 무조건적으로 설정되고 직관적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성에 앞서 전제되는 것이 신앙이라면 그렇게 전제된 신앙이 설정하는 보편적 본질이란 두말할 것 없이 신이며 따라서 신의 선재성이 출발점이 됨을 사필귀정이다.
이를 공식화해서 간명하게 서술하면, '보편자는 개별자에 앞서 본질로 존재한다'이다. 이것을 가지고 보편실재론이라고 한다. 이런 형이상학적 구도의 탁월한 예를 에리게나John Scottus Eriugena(810-880)의 [자연구분론]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에리게나에서 '자연'이란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 모두를 가리킴으로써 신과 같은 초자연 영역도 포함되는 총체적 실재를 일컫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의 '자연구분론'이란 실재에 대한 형이상학적 분류의 한 체계를 의미한다.
그에 의하면 자연은 다음과 같이 자연의 창조에 관한 능동과 수용, 긍정과 부정의 교차 배열에 의한 네 가지 경우의 수를 나열한 듯한 방식으로 분류된다.
첫째, 창조하면서 창조되지 않는 자연
둘째, 창조하면서 창조되는 자연
셋째, 창조하지 않으면서 창조되는 자연
넷째, 창조하지도 않고 창조되지도 않는 자연
한편 우주의 실재를 자연이라는 단일 개념으로 관통하는 일원론처럼 보인다는 점에서는 신플라톤주의의 잔재를 보이면서도, 다른 한편 분류된 항목들 사이의 서열이 설정되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신피타고라스주의적 위계론의 흔적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은 니콜라스 쿠자누스(15세기)에게서도 발견된다. 쿠자누스의 삼위일체적 사변에서는 일자의 동등성이 단일성 사상의 구성적인 순간이라 할 타자 안에 있는 자기를 인식함으로써 자기 자신 안에 부가되었다.
이런 사상은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의 형식을 표현하는 것으로서 동시의 신적인 단일성을 좀더 비슷하게 규정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즉 삼위일체성은 단일성에만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단일성을 규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문제에 대한 기독교의 통찰은 단일성 개념 안에서 구별된 순간에 삼위일체의 교의에 상응하는 동등성을 부각시킴으로써 신플라토이즘의 위계법을 벗어나게 된다.
보편 논쟁에 있어,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이 끼지 않을 수 없었다.
라틴 중세기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이 서로간에 대안적 입장을 대표하는 이들이라고 간주되었다.
이런 생각은 12세기의 '보편개념'의 본성에 대한 논의에서 확고해졌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식론이 알려진 뒤로 그것의 경험적 입장은 플라톤에서 영감을 받은 어거스틴의 조명이론과 대립적인 입장으로 파악되었다.
보편의 본성에 관해서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 사이에 개재된 차이점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의 특성(eidos)을 질료와 묶여 있으면서 사물의 실체를 구성하는 형상으로 간주했다.
그런데 플라톤은 사물의 특성이 의미세계를 극복하는, 초월하는, 사물에서 모사 된 이데아라고 생각했다. 중세기에는 이런 차이점이 아래와 같이 세 가지 대안 형식으로 일컬어졌다.
첫째, 실재 안에 있는 보편: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인데, 이에 따라면 개념은 인식될 대상 안에서 실현된다.
둘째, 실재 앞에 있는 보편: 이것은 원형인 이데아를 그것에서 모사 된 사물보다 우선하게 하는 플라톤의 입장이다.
여기에는 대상을 인식함으로써 얻어진 결과라 할 보편 개념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것이 곧 아래와 같은 세 번째 가능성이다.
셋째, 실재 뒤에 있는 보편: 이것은 소위 유명론에 대한 해석인데, 이에 따르면 보편개념은 nomina(이름) 즉, 사물의 실재에 있는 대상 없이 사람에 의해 형성된 사상이다.
이러한 구별은 이미 11, 12세기의 변증가들 가운데서 특히 아벨라르 같은 이들에게서 나타난다. 그리고 그들의 교육에서 기본으로 사용된 보에티우스의 주석서에 이르기까지 소급된다.
중세기의 학습 토론에서는 보편개념과 그것이 지각대상과 맺는 관계를 추상적으로 생각했는데, 이런 추상적 관점은 물론 플라톤의 입장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이 근원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에 토대를 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양측의 착상에 내재한 특수성을 추상화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두 사람의 경우에 공히 명백한 보편은 사물이 현실성 일반을 파악하는 계기로 간주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한 사람의 생각이 다른 한 사람의 생각과 마찬가지로 명백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플라톤의 경우에 이데아가 구체적인 소여(所與:자기에게 속한 것)를, 즉 끊임없이 자신의 당위 개념 뒤로 물러가서 자기의 이데아를 모방할 뿐인 이 소여성을 직관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당위 개념이라면,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에는, 한 사물의 종개념(eidos)은 원래부터 대자적(對自的)으로 아무 것도 아니다. 오히려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을 사유하는 규정이며, 그 사물의 형식요소라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달리 영혼의 본성을, 그리고 영혼이 물체적 세계와 맺는 관계를 새로운 시작으로 바라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이 선재 한다고 믿지 않았으며, 또한 이데아가 물체 없이 나타난다고 믿지 않았다.
그런데 플라톤은 이데아를 영혼이 물체 앞에 놓여 있는 상태라고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의 자기 운동이라는 플라톤의 입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가 모든 운동은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물체의 운동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비록 그의 운동개념이 질적인 변화를 포함하고 있지만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에 대한 글을 쓰면서, '영혼이 운동에 종속되는 일은 완전히 불가능하다 따라서 영혼의 자기 운동이라는 주장은 이미 그 토대를 잃었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도 역시 영혼을 물체가 운동하는 근원이다 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제 덧붙여 이르기를, 영혼 자신이 운동 안에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영혼은 육체와 연결되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육체는 생명체의 형상인데 말하자면 육체를 생물로 만드는 그것이다. 육체 자체만으로는 단지 생명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영혼은 일종의 생명인 생명체의 현실성이다.
플라톤은 영혼의 선재를 육체의 운동원리로 받아들였는데, 이 부분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을 그 영혼이 내재하고 있는 생명의 특성이 현실화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로써 영혼은 자연적인 것으로 고찰되는 위치에 자리하게 된다.
특히 생명의 본성에 대한 자연적 고찰에 정치된다고 볼 수 있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직 플라톤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있을 때 이미 이에 대해서 연구한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에 그는 생물의 발전과 성장을 묘사하는 한 쌍이 개념을 발견한 것 같다.
즉 가능성과 현실성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명체의 현실성인 영혼의 현존을 이런 육체의 '첫 완성태'라고 일컬었다. 이 육체의 '두 번째' 성취는 영혼을 통해서 활성화된 활동에서 이루어진다.
즉 실행은 생명이 의존되어 있는, 그리고 그 무엇인가에서 현실화될 목적을 구성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문제를 자기의 '형이상학'에서 가장 간결하게 처리했다. '활동이 목표이기 때문에 현실성은 활동이다. 그래서 현실성이라는 이름도 역시 활동을 파생시키며, 또한 완성태를 목표로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요약되어 있는 기본 구상은, 어떻게 소위 선 善(목표, 텔로스)이 아르케(원리)로, 모든 것을 연결하고 연관시키는 원리로 간주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여기에 대한 해결책은, 이데아와 감각적 사물 사이에 있는 대립을 포기함으로서 찾는다.
그는 형상(에이도스)의 정체성을 감각적 사물 자체의 현실성이라고 확인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연 탐구가로서 자기 스승의 이데아론에서 받아들인 결정적인 동기는 이데아가 사물의 생성과 과정을, 즉 운동을 설명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에 있다.
반면에 플라톤은 영혼의 도움으로 이 운동을 설명하려고 했다. 영혼이 물체를 움직인다고 말이다. 이러한 새로운 시각은 다음과 같은 결과를 낳았다. 사물을 초월하는 플라톤의 이데아는 감각적 사물, 즉 생명체의 '형상' 자체가 되었다고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생명체의 생성을 그 질료 안에서 형상이 현실화되는 것이라고 했다. 운동은 여기서 생성된다. '현실성을 하나되게 하는 생성이며, 전체가 하나 되게 하는 생성이다.' 이것이 가능성과 현실성의 목표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구체적인 리얼리티를 우시아(ousia)라고, 즉 존재자라고 일컬었다. 이것은 좀더 정확히 말하면 분명한 '그 무엇'이라고 보아야 하는데, 이것은 다른 것과 구별되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에 의해서 모든 다른 것이(질과 크기와 관계) 설명되는 그 어떤 것이다.
실체 개념을 규정하는 이 두 방식(존재와 속성)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서 구별되었다. 이 구별은 그러나 그에 의해서 계속적으로 추구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이 두 묘사(존재와 속성)가 자신의 형상을 통해서 규정된 구체적인 존재자들과 관련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체적인 존재자들(ousias)은 형상과 질료에서 구성되었다, 왜냐하면 형상은 질료 안에서 실현되기 때문이다. 질료는 나름대로 그 실현을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요인들로 인해서 한 사상(事象) 자체의 유기적인 생성이라고 규정된 운동 이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운동의 두 번째 형상을 알고 있었다.
요컨대 외부에서 작용한 강요된 운동인데, 이 운동은 질료의 미적인 형태와 비교될 수 있다. 외부에서 작용한 운동을 분석할 때는 네 '원인'이 구별되어야 하는데,
첫째는 운동을 일으키는 원인자인 예술가,
둘째는 예술가 앞에 어른거리는 형태의 목적,
셋째는 형상
마지막은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 형상이 각인시켜야 할 질료가 그것들이다.
유기적인 생성에서는 이와 달리 셋으로 구성된 첫 원인자(작용원인, 형상과 목표)가 형상과 동일한 형상을 조성한다. 이 형상은 물체를 운동하게 하는 원인자이기도 하다. 따라서 유기적으로 운동하는 본질의 형상과 동일시되는 그 영혼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 원리에 따라서 볼 때 형상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물체의 형상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이 스스로 운동한다는 플라톤의 명제를 거절함으로써 당연히 신적인 완성을 부동의 존재로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신성을 불변의 상태에서 자기 자신만을 직관하는 최고 이성으로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성보다 높은 그 어떤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이성의 고유한 부동성으로 인해서 이 신적인 이성은 모든 여타의 전체 코스모스(우주)를 움직인다. 사랑받는 자가 사랑하는 자를 움직여가듯이 끌어당긴다는 말이다.
이런 방식으로 최고의 신성은 우선 성좌(星座)를 움직이며, 이 성좌를 통해서 모든 존재와 사물을 움직인다. 이로서 플라톤이 말한 데미우르고스가 활동가 활동함으로써 코스모스가 생성된다는 설명은 표상될 수 없다.
일반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코스모스의 생성이라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결코 아니다. 최고의 신성은 코스모스의 운동의 원천일 뿐이다. 그리고 이 운동은 형상이 질료 가운데서 자신을 또렷이 주조해냄으로 물체 자체 안에서만 발생한다.
형상은 질료와 묶임으로서 형태를 얻게 되는데, 이러한 묶임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식론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런 철학의 한 부분이 기독교적 중세기인 13세기 초 관심을 끌면서 논의의 전면에 나서게 된다.
질료적 대상에서 실현된 형상들은 추상화를 통한 인식과정에서 지각 조정자와 해체되어야만 했다. 이것은 이성이 영혼 안에서 활동한 결과이다. 그러나 이 이성은 몸과 묶여 있는 영혼의 구성분자가 아니라 오히려 그 영혼과 나뉘어져 있다.
그것은 마치 빛처럼 외부에서 영혼으로 침투하여 작용하는 것이라고 표상할 수 있다.
정신(누스)은 영혼과 나누어져 있지만 활동하는 누스만은 죽지 않는다고 했다. 반면에 몸과 묶여 있는 영혼은 몸과 더불어 사라진다.
수동적인 누스의 몸도 역시 그렇다. 여기서 말하는 영혼은 지각 조성자에게서 해체된 형상들을 자기 자신에게 받아들이고 상호간에 연결시킨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의 불멸성을 거부함으로써 다시 한번 플라톤과 날카롭게 대립한다. 그러나 동시에 추상화를 통해서 사물의 형상을 이해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표상은, '조명'을 통해서 이데아를 인식하려는 플라톤의 견해와 밀접하게 연결된다는 점이 확실하다.
후대 고대 철학자들처럼 교부들도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 사이의 차이점을 뒷날 중세기에서 그랬던 것보다는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거스틴은 아리스토텔레스를 플라톤주의자로 상정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은 감각세계에서만 받아들여졌다. 영적인 세계와 특히 신성은 이 카테고리(범주)를 초월해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하나님을 최고의 단일성으로 보았고, 뿐만아니라 단일성 자체보다 더 탁월하게 보았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단일성은 아들이 아버지와 하나되고, 따라서 그 차이의 순간을 자기 내부에 포함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학이 하나님을 여전히 존재의 피안에서 사유해야 한다는 점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왜냐하면 출애굽기 3:14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존재자'로 계시하셨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클레멘트에게 이 존재는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었다. 중기 및 신플라토니즘 철학들은 이와 달리 플라톤의 '존재자의 피안'을 절대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했다. 특히 아리시토텔레스의 카테고리론을 어느 정도까지 적용시켜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에서 중요했다.
왜냐하면 존재자(우시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열 개 범주 중에서 우선적이고 근본적이 요소이기 때문이다. 여타의 모든 것이 이 존재자로부터 서술된다.
일자의 선을 존재의 피안에서 사유함으로써 카테고리를 감각 세계의 인식 안에 한정시켰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시아가 형상을 질료와 연결시키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그래서 형상이 질료에 묶이게 되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하나님도 실체의 범주에 속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플라톤주의자들은 이에 맞서 질료적 존재자에 대한 카테고리를 영적인 현실성에, 특히 최고의 하나님에게 적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기독교 신학도 역시 일반적으로 하나님은 비질료적이고, 비물질적이어서 모든 질료적 존재자들보다 탁월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서 오리겐은 하나님에 대해서 이따금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존재이지만 존재의 피안이다. 이는 흡사 하나님이 누스이지만 우리 이성의 피안에 있는 것과 같다.'
그렇지만 출애굽기 3장 14절을 하나님이 모세에게 자신을 계시한 것이라고 본 것처럼, 하나님이 존재 자체라는 사실을 근거로 해서 나지안즈 그레고리우스는 후에 하나님은 시공간적으로 유한한 만물과 달리 무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해명했다.
이것은 곧 그의 동생인 니사의 그레고리우스가 주장했듯이 신적인 본질의 고유한 차이점은 하나님의 무한성이라는 사실을 가리킨다.
기독교 신학이 이와 달리 인간 영혼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해 때문에 그것을 훨씬 잘 이해 할 수 있었다. 이미 호교론자 아테나고라스는 영혼과 몸의 상호 관련성을 기독교 부활신앙을 방어하는 인간론적 토대로 제시할 수 있었다.
인간은 성경의 창조기사에 따라서 몸과 영혼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영혼만으로는 완전한 인간이 아니다. 영혼만의 불멸성은 하나님이 인간을 영혼만으로 창조하지 않았듯이 참된 인간 구원이 아닐지도 모른다.
인간을 몸과 영혼의 단일성으로 본다는 것은 철학적으로 우선 영혼을 동물적인 육체의 형상으로 생각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과 유사하다. 이 영혼은 이 '형상'을 통해서 분리시킬 수 없는 단일성을 형성하는 것이다.
여기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영혼론과 대비해 본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 영혼이 육체의 실체적 형상이면서 동시에 그 자체 자립적 형상이라고 한다. 영혼의 그 자체 자립성은 인간 영혼의 질료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며. 따라서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오직 신에 의해 직접적으로 창조된 것이고, 불멸하고 영속적이다고 한다.
플라톤은, 하나의 실체 내에 형상의 다수성을 주장했으며, 이에 따라 인간은 식물의 영혼과 동물의 영혼, 그리고 지적 영혼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그는 또한 인간 영혼이 하나의 실체이며, 따라서 영혼과 육체의 결합은 우연적이고 부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했다.
그에게는 인간 영혼이 곧 인간이고 인간은 곧 자신의 영혼이다. 육체는 영혼을 위한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영혼과 육체의 결합은 영혼을 위한 것도 아니며 이들의 복합을 위한 것도 아니다.
영혼은 육체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며, 영혼이 육체와 결합하는 것은 사실상 영혼의 충만한 삶에 있어서 하나의 방해에 불과하다. 영혼은 육체를 '움직이는 자'일 뿐이다. 영혼과 육체의 관계는 선장과 배의 관계에 비유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의 경제성의 원리를 제시하며, 하나의 존재에는 오직 실체적 형상이 있다고, 따라서 한 생명체에는 오직 하나의 영혼이 있다고 했다. 높은 등급의 영혼은 하위 등급의 영혼에 속하는 모든 기능을 능력적으로 소유하며, 그에 더해서 자신의 고유한 기능을 지닌다.
그러므로 인간은 동물적 영혼의 모든 기능을 능력적으로 지니면서 동시에 그 자신의 고유한 기능을 지니는 하나의 지적 영혼을 지닌다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원리들에 의해 플라톤의 영혼-육체 이원론을 극복하려 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의 특성에 관한 많은 것, 예를 들어 영혼이 생명의 원리이며, 자기 운동의 원리이고, 공간적으로 제한되어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것 등을 플라톤으로부터 물려받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을 '가능적으로 생명을 지닌 유기체의 제1현실태이자 실체적 형상'이라고 정의한다. 인간의 단일성은 실체적인 것이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것이다. 영혼은- 혹시 인간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개별자의 죽음에서 살아남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저 장미의 영혼은 오직 저 장미의 영혼일 뿐이다. 개별적인 영혼은 하나의 종 내에서 혹은 그 종을 넘어서 혼합되거나 결합될 수없다. 저 장미가 죽으면 그 실체적 형상 역시 사라지며, 그것은 그 영혼 자체의 힘에 의해서건 다른 것에 의해서든 회복될 수 없다.
그러므로 한 생명체의 삶은 오직 다른 생명체의 삶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생명체는 오직 다른 생명체들로부터 비롯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가설은 정신과 인간 영혼의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하지 않는 한, 인간의 단일성을 확립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텍스트를 지성이 인간 영혼에 속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하며,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의도에 충실한 것이라고 확신한다. 토마스에게 있어 지성은 인간 영혼에 속하는 하나의 속성인 작용적 능력이다.
인간의 영혼이 단순히 육체의 실체적 형상만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지적 작용의 영성이다. 그 결과 인간 영혼은 식물의 영혼이나 동물의 영혼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육체의 실체적 형상이다.
토마스가 영혼의 자립성을 논증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모든 것은 존재인 만큼 현실성을 지니며 또한 행위한다. 존재한다는 것은 행위한다는 것이고 또한 행위를 위한 것이다.
행위는 존재를 따르며, 작용은 본질을 따른다. 그러므로 작용의 양태는 존재 양태에 상응한다. 그 자체로서 자립적인 존재는 그 자체로서 존재하며 그 자체로서 행위한다.
지적 작용은 본질적으로 질료에 의존하지 않는 작용이며, 영-육 복합의 작용이 아니라 영혼에서 유래되는 작용이다. 그러므로 지적 작용의 주체인 인간 영혼은 본질적으로 비물질적이며 자립적이다.
인간 영혼은 그 자체로서 자립적 형상 혹은 자립적 존재이다. 그러므로 인간 영혼은 육체의 형상임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그 자체로서 자립적인 형상 혹은 자립적인 존재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인간의 단일성은 가장 우선적이자 근본적인 진리로서, 의문시되거나 상대화될 어떤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 진리는 실체 이론과 실체적 형상 이론에 의해 굳건하게 확립된다.
인간의 단일성은 실체적 단일성이다. 그런데 인간 영혼의 자립성 또한 주장된다. 이와 같이 인간 영혼의 자립성이 주장된다면, 이 두 가지가 서로 화해될 수 있는 것인가?
이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영혼의 자립성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 자세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인간의 영혼에 관한 세 가지 문제가 고려된다. 이 세 물음이란 인간이 영혼이 온전한 실체인가 하는 것과 온전히 자립적인 존재인가 하는 것, 그리고 개별적 실체인가 하는 것이다.
자립적인 영혼은 분명히 그 자체로서 하나의 실체이다. 왜냐하면 자립성은 온전한 실체성을 전제하며, 실존에 대해 질서 지워짐을 명백히 표현하기 때문이다. 자립성은 실존의 현실성으로부터는 추상되되, 모든 속성들을 지닌 온전한 실체를 의미하는 추상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영혼은 육체의 실체적 형상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는 하나의 온전한 실체가 아니다. 왜냐하면 영혼은 인간 본질의 한 부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만약 영혼이 하나의 온전한 실체라면 인간의 실체적 단일성은 파괴될 것이다.
이 경우 영혼 자체만으로 인간이거나 아니면 영혼은 천사와 같이 하나의 영적 존재일 것이다. 그 자체로서 자립적인 영혼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존재이며 그 자체로서 존재한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실존 덕분에 존재한다. 그러나 그 자체로서 자립적인 영혼이 개별적 실체인 것은 아니다. 실존하는 개별적 실체인 것은 바로 인간이다.
만약 영혼이 개별적 실체라면, 인간의 실체적 단일성에 대한 문제는 제기되지도 않을 것이다. 이러한 난국에도 불구하고 인간 영혼이 그 자체로서 자립적 형상이라는 전제가 더 이상 음미도 되지 않는 않은 채 폐기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한가지는 명백하다.
인간 영혼이 천사들과 마찬가지로 그 종적 완전성을 모두 끌어안는 온전한 자립적 형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의 영혼이 그 자체로서 자립적 형상이며 그 자신의 실존에 의해 존재한다는 것은 참이지만, 동시에 그것이 육체의 실체적 형상이라는 것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참이다.
영혼의 이중적 역할의 문제에 있어서, 영혼은 하나의 동일한 영혼이라는 점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진리를 간과하는 것은 곧 질료에 대한 형상의 부여자라는 영혼의 본질을 부인하는 것이다. 살아있는 인간에게 영혼은 육체의 실체적 형상으로서 그 자체로서 자립적이다.
가능태는 항상 현실태를 위해 있으며, 질료는 형상을, 그리고 육체는 영혼을 위한 것이다. 인간의 영혼은 지적 능력과 감각적 능력을 지닌다. 이 능력들을 수행하기위해 영혼은 육체와의 결합을 요구한다. 영혼은 지적작용을 수행하며, 바로 그 때문에 오직 인간의 감각적 능력들이 수행될 수 있을 때에만 그 자체로서 자립적인 존재라고 말해질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영혼은 오직 지적인 능력이 작용할 경우에만 지성성과 자립성을 얻게 되는데, 이러한 지적 작용은 오직 감각능력이 작용될 때에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이미 자립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지적 영혼이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이 이미 자신의 지적 능력을 수행하고 있으며 그러한 자신의 지적 능력에 더해 감각적 능력을 지니는 영혼 따위를 생각할 수는 없다.
만약 그럴 경우 영혼은 아무런 손상이나 손실도 입지 않은 채 육체로부터 쉽사리 분리될 수 있을 것이다. 사실상 플라톤이 상상한 영혼도 바로 이러한 것이었다.
육체에 형상을 줌으로써 육체를 활성화하는 것이 바로 영혼의 존재이유다. 그 자체로서 자립적인 인간의 영혼 역시 예외가 될 수 없다. 하나의 존재에 그것의 존재성과 단일성을 부여하는 것은 그것의 실체적 형상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경우, 육체에 존재성과 단일성을 주는 것은 그 자체로서 자립적인 인간 영혼이다. 그 자체로서 자립적인 인간 영혼의 형상 부여행위가 있기 이전의 육체는 순수 가능태인 제1질료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제1질료의 가능성에 그 자체로서 자립적인 영혼이 형상을 부여함으로써 비로소 인간의 육체는 인간의 육체가 되며, 인간이 되고 또 인간적 존재방식을 지니게 된다. 육체와 인간의 형상성과 실존 전체가 바로 영혼의 형상부여 행위 덕분이다.
인간이 살아 있을 때, 인간의 자립적 영혼은 인간을 하나의 온전한 실체이자 개별적 실체이게 만드는 것이지, 그 자체가 하나의 온전한 실체이거나 개별적 실체는 아니다. 실체이자 존재의 주체인 것은 인간이지 영혼이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에서 살아남은 영혼은 하나의 실체이자 온전한 실체이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결코 존재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 영혼은 인간 본질의 한 부분이며, 영혼의 역할은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아니라 육체를 활성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 영혼은 절대적인 의미에서 온전한 실체는 아니다.
죽음 이전과 이후의 영혼의 위상과 관련해서, 존재의 이중 주체와 그에 상응하는 존재양태의 이중성은 매우 당혹스러운 형국을 띠고 드러난다. 그러나 이러한 당혹감은 죽음 이전과 이후에 존재하는 영혼의 동일한 영혼이라는 진리에 의해, 다시 말해서 영혼은 죽음 이전이나 이후 모두에서 동일한 본성을 유지한다는 진리에 의해, 그리고 또한 죽음 자체가 존재론적으로 비자연적인 사태이며, 따라서 죽음 이후에 영혼의 상황 역시 마찬가지로 비자연적으로 진리에 의해 어느 정도 설명될 수 있다.
영혼의 자립성은 인간 영혼이 신에 의해 직접 창조된 것이며, 불가멸적이고 불멸·영속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한다. 물질적 존재들이 다른 실체적 형상들은 질료에서 이끌어져 나온 것이다.
이들은 질료의 가능성에서 유래된 것이므로 이들의 현실성은 가능적이었던 것에서 현실로 된 것의 현실성이다. 그런데 인간의 영혼은 그 자체로서 질료로부터 독립적이므로, 질료에서 유래될 수 없다.
결과적으로 인간 영혼은 부모에게서 전해질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인간 영혼은 다른 영적 존재들에게서 유래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러기 위해서는 그 영적 존재들 안에 형상의 전이가 전제되기 때문이다.
인간 영혼은 창조되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그에 앞서 존재하는 아무런 가능성도 없이 오직 신에 의해 존재하게 된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오직 완전자이며 무한자인 신만이 창조할 수 있다.
사실상 신은 오직 자기 자신과 피조물들을 창조함으로써 존재하고 행위한다. 따라서 인간 영혼은 2차적 원인의 매개 없이 신에 의해 직접 창조된다. 인간 영혼은 육체의 실체적 형상이기 때문에 육체와 결합되지 않는 한, 자신의 본성적 완전성을 지닐 수 없다.
따라서 인간 영혼은 인간에 앞서 창조될 수 없다. 정확하게 어느 순간에 그것이 창조되는가는 논쟁의 여지가 있는 주제이다.
질료와 형상의 복합으로 이루어진 물질의 존재는 그 자체로서 소멸하며, 이와 함께 형상 우연적으로 소멸한다. 하지만 자립적 형상인 인간 영혼은 우연적으로도 소멸할 수 없다. 자립적인 형상에게는 실존이 그 자체로서 속하기 때문에, 그 자체만으로 볼 때에는 비존재에 대한 가능태를 지니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그 자체로서 소멸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의 입장에서는 다른 모든 피조물들과 마찬가지로 자립적 형상 역시 절멸될 수 있다. 신이 사물을 절멸한다는 것은 곧 그것에 대해 신이 아무런 관여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신에 의한 절멸은 이 세상 전체의 완전성과의 관련성 속에서 뿐 아니라 신의 무한한 지혜 및 섭리와의 연관성 속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모든 존재는 본성적으로 존재하기를 욕구하며, 지적 존재들은 영원히 존재하기를 욕구한다. 그런데 자연적 욕구는 허위일 수 없다.
죽음으로 인해 분리된 영혼의 존재성은 정확하게 어떠한 것인가? 유한자들의 존재성은 본질과 실존 그리고 작용에 있다. 모든 유한자들에게 있어서 본질과 실존은 구별되며, 따라서 본질과 작은 구별된다. 이들의 본질은 그들의 작용을 통해서 알려진다.
분리된 영혼의 경우, 우리는 그 작용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을 지니지 못한다. 그러나 모든 유한자들의 경우 지식을 지니기 위해서는 생득적이든 아니면 획득한 것이든 간에 가지상(可知象)들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또한 영혼의 지적 작용은 오직 감각상으로의 회귀에 의해서만 수행된다는 것을, 다시 말해서 추상 작용을 위해서는 감각상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분리된 영혼은 새로운 지식을 획득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분리된 영혼은 새로운 감각상으로부터의 추상을 요구하는 지식 이외의 모든 지식을 지닌다. 분리된 영혼은 자기 자신에 대한 습관적 지식을 지니며, 그의 수동지성 안에는 가지상들이 보존되어 있기 때문에 과거의 경험에 대한 기억을 유지하며 이미 소유한 학적 지식을 부분적으로 보유한다.
이에 더해서 분리된 영혼은 신과 영적 존재들의 영향 덕분에 지식을 지닐 수도 있다. 이들이 영향 하에 혼동된 방식으로나마 물질적 사물들을, 그리고 불완전한 방식으로나마 개별자들을 알 수도 있는 것이다.
복자들의 영혼은 다른 영혼들보다 더 많고 탁월한 지식을 소유할 수도 있다. 이러한 논의 안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분리된 영혼이 본성적인 상태가 아니라 비본성적인 상태, 즉 본성 이외의 상태라는 것을 분명하게 긍정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그는 인간 영혼에게 본성적으로 적절한 앎의 방식은 육체와의 결합 안에서 추상 작용에 의한 것이라는 점 역시 명백하게 긍정하고 있다.
분리된 영혼은 자신의 실존의 행위를 이전과 똑같이 수행하고 있다. 영혼은 자신의 존재성을 살아 있는 인간에게 부여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간직하고 있다. 죽음에서 인간 영혼은 인간에게 부여했던 존재성을, 즉 인간의 존재성을 되돌려 받는다.
죽음은 다름 아닌 바로 이 영혼 자신의 존재성을 회수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분리된 영혼은 인간에게서 자신의 존재성을 회수하기 이전의 존재성을 갖지 않았거나 그것을 인간에게서 되돌려 받음으로써만 갖는 것은 아니다.
인간 영혼은 죽음 이전이나 이후에 자신의 존재성을 항상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가지고 있다. 인간 영혼과 인간은 같은 존재성을 공유하는 것인데, 다만 그것이 동시에 인간의 것이며 그 영혼에서 유래되는 것이다.
따라서 분리된 영혼의 존재성과 실존의 원리는 자신의 고유한 것이다. 그리고 인간 영혼은 자신의 자립성 혹은 영성을 인간의 지적 기능을 바탕으로 획득한 것이 아니다. 인간의 지적 능력은 그 영혼의 영성에서 유래되며, 그것의 표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영혼 본래의 그 자체 자립성은 인간의 영혼으로서 수행하기 위한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 영혼의 그 자체 자립성 혹은 영성의 등급은 인간이라는 종의 모든 완전성을 현실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갖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 영혼은 항상 하나의 영혼일 뿐 인간 그 자체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인간 영혼은 바로 토마스 아퀴나스가 규정한 것처럼 그 자체로서 자립적인 영혼이며 동시에 하나의 실체적 형상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인간의 모든 존재성은 그 자체 자립적인 인간 영혼의 존재성에서 유래된다. 육체의 모든 존재성 역시 마찬가지이다. 엄밀히 말해서 인간의 육체와 영혼의 결합이 아니다.
자기 육체를 지닌 전체적인 인간은, 영적인 인간 영혼에 의해 제1 질료의 가능성의 현실화로 인한 것이다. 영적인 인간 영혼은 인간을 현실화함에 있어 자신의 전체적인 존재성을 소모하지 않는다.
인간 영혼의 자립성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을 인격으로 만들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이것의 궁극적 목적인 인간을 영적 존재로 만드는데 있다. 그리고 영적 존재인 인간이 절대적 선(善)과 만남으로써만 자기 충족을 이룰 수 있다.
중세시 신학자들에게 아리스토텔레스는 13세기 이래로 그야말로 유일한 '철학자'였다. 플라톤은 단지 그의 선구일 뿐이었다. 그의 사상은 당시의 논리적이고 경험론적인 호기심에 맞아떨어졌다고 보는 게 옳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은 물로 범주론과 해석학에 한정되기는 했지만 이미 11세기 이래로 스콜라 철학의 학습 영역에서 그 토대를 쌓았다. 이를 통해서 12세기 중반에 아라비아에서 라틴어로 번역되고 후반에 가서는 더 많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문헌이 알려지게 되었다.
13세기 중반 이후로 알베르투스의 시대가 되자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권위가 그의 전문분야에서 결정적으로 부각되었다. 더구나 중요한 것은 알베르투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주석을 통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점이다.
보편 논쟁을 통해서 인식론 안에 준비된 그 견해가 기독교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서 기초가 되었다. 어거스틴이 인식에 대해서 신학적인 진리의 빛을 통해 인간의 영이 결국 깨우치게 된다고 설명했는데, 이것은 프란체스코 수도회 신학자들을 통해서 13세기의 마지막 4반세기에 이르기까지 확증적으로 주장된 바다.
이런 설명에 맞서서 알베르투스와 토마스 아퀴나스는 개념적인 내용의 추상화를 통한 우리의 개념 형성이 지각 조성자들에게 발생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을 받아들였다.
여기서는 불가피하고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해석사에서 논리이 되었던 질문, 즉 활동적인 지성의 본성에 대한 질문이 부각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활동적인 지성은 그 활동을 통해서 (빛의 성질상) 지각 형성자로부터 개념적인 내용을 해체시킨다. 13세기 중반이 가까워오자 요한네스는 알렉산드로스와 같은 생각으로 활동적 지성을 하나님과 동일시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을 어거스틴의 조명이론과 연결시킬 수 있게 되었다.
알베르투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조명이론을 거부했다. 왜냐하면 그런 해석에 이하면 영혼이 육체와 더불어서 죽어버리기 때문이다. 개인의 영혼은 죽지 않는다는 기독교 신학의 가르침은 알베르투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활동적 지상이 인간 영혼의 요소라고 설명한 것에 대한 확실한 근거를 제공했다.
이와 반대로 시제르는 이미 1270년에 이런 생각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다르다고 이의를 제기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이 지성은 오히려 인간 영혼의 한 부분이라고 말이다.
알베르투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서 옹호된, 그리고 시제를 반대하는 문헌에서 지시된 이 생각이 아리스토텔레스 학설을 기독교적인 동시에 입각해서 변형시킨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여기에서 첫 번째로 인간 지성이 그 인식 행위의 활동적, 창조적 주제로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인간 이성의 창조적인 주체성이 근대적인 사상에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 그 착상은 알베르투스의 활동적 지성이라는 생각에 이해서 아리스토텔레스 학설이 기독교적으로 동기화된 그 변형에 근거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기독교가 수용하는 과정에서 투쟁할 수밖에 없었던 그 여타의 난제들 중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지고의 하나님을 단지 세계의 운동자일 뿐이지, 그 세계의 창조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사실이 가장 첨예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의 자기 운동을 문제삼았기 때문에 최고의 누스도 역시 부동자여야만 한다. 지고의 누스는 순수 활동이지만,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이라는 점에서만 그렇다.
그는 단지 목적 원인으로서의 인력(引力)을 통해서만 세계를 움직인다. 그리고 이것이 코스모스와 그 형태의 현존을 이미 전제한다. 기독교 신학은 이와 달리 하나님의 활동적인 창시자, 창조의 창시자로 피조물의 현존을 야기하는 원인으로 생각해야만 한다.
이 문제는 이미 13세기 초, 파리의 신학자로서 나중에 파리의 주교가 된 빌헬름에 의해서 전반적으로 명쾌하게 해명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창조자의 말씀을 전혀 몰랐으며, 또한 비존재자들을 존재하게 하는 그 분의 능력에 대한 말씀을 전혀 몰랐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