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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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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11-12세기 신학성경신학[신학]

11 11-12세기 신학

이름 : 관리자(IP:220.81.176.151)

11 11-12세기 신학
이근호 2004-02-29 18:25:13, 조회 : 440, 추천 : 81

11세기-12세기

합리주의: 켄터베리의 안셀무스 Anselm of Canterbury(1033-1109)

그는 하나님의 존재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과 삼위일체론까지 성경에 의존하지 않고 증명해 보려고 했다. 그의 논증은 하나로 집약시킬 수 있다.

즉 만일 사물들이 선함과 존재와 가치에 있어서 서로 정도가 다르다고 한다면, 이것들은 -선함, 존재, 가치- 눈에 보이는 사물들과는 별개일 것이며 그 이상의 어떤 것일 것이다. 존재를 예를 들어 볼 때 사물들은 존재에 참여함으로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사물들은 혼자 스스로 존립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 안에서 존립한다는 뜻이다. 바로 이 다른 것이 존재 그 자체이다. 존재 그 자체는 단 하나일 뿐이기 때문에 우리는 나아가서 이것이 지고의 존재 혹은 가장 높은 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안셀무스 자신까지도 이 논증에 만족하지 않았다. 너무 복잡해서 계속해서 몇 단계를 더 거쳐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보다 간단한 논증을 했는데 그것이 '존재론적 논증'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예를 들면, 어리석은 자까지도 마음 속에 '그것보다 더 큰 어떤 것을 생각 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어리석은 자가 이런 것이 있다는 사실을 들으면 그는 곧바로 그것을 이해 할 수 있고. 이것이 이해되어진다는 사실은 그것이 이미 그의 마음 속에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크다고 생각되어질 수 없는 것'은 오로지 마음 속에만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만일 이러한 존재가 마음 속에만 유일하게 있을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큰 실재 안에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것보다 더 크다고 생각 되어질 수 없는 것'은 동시에 '그것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된다.
'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불가능하다. 따라서 '그것보다 더 큰 어떤 것을 생각할 수 없는 것'은 마음과 실제로 존재한다.

안셀무스는 이상의 논증을 주장하면 이것보다 더 큰 어떤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존재를 창조주 하나님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교부들에 의해 권위가 부여된 객관적 진리로서의 교리를 받아들인다는 뜻으로서의 경험을 지식으로 전환시키는 사변적 사상을 본격적 형성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안셀무스의 합리주의는 속죄론에서 절정을 이른다. 그는 인간의 죄와 이에 대한 신의 징벌과 속죄의 관계를 법률적이고 계량적인 방식으로 설명한다.

인간의 죄가 신의 영예를 손상시켰는데 이를 만회하기 위해서는 형벌을 받든지 혹은 보상을 하든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형벌은 신과 인간의 관계를 파괴하므로 신은 보상의 길을 택했는데 그럼에도 인간은 여전히 보상조차 할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신 자신이 스스로 보상하기 위해 스스로 인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보상해야 할 자는 인간이며 보상할 수 있는 자는 신이기 때문에 신-인이 출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신-인의 무한한 고난과 희생을 통해서 비로소 인간의 죄과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의지주의: 피터 아벨라드 Peter Abelard(1079-1142)

실재에 대한 인간의 자기의식에 주목하는 주관적 극에 위치한 사람이다.

윤리적 판단의 내용인 선악의 구분은 행위에 대해서가 아니라 의지 또는 의도에 대해서라는 것이다. 인간의 죄성이라는 것도 감정이나 욕망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양심에 잇다는 것이다.

그가 의지의 주관성을 어느 정도로 강조했는가는 아담의 죄에 대한 해석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아담의 죄에 대해 우리가 의지로 동의한 것이 아니므로 아담의 죄가 곧 우리의 죄가 아니라 한다.

이처럼 의지의 주관성에 입각하여 원죄성을 재해석한 것은 심지어 그 교리를 위태롭게 한다는 지적을 받을 만큼 급진적이었다. 의지주의에 대한 그의 입장은 속죄론에서도 여전한데 이런 점에서 안셀무스와 쾌 대조적이다.

아벨라드는 그리스도가 마귀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서 오셨다는 전통적인 견해를 반대했으며, 또한 인간이 하나님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서 하나님이 오셨다는 견해도 거절하였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하나님의 사랑을 문자적으로, 그리고 사실적으로 가르치며 한 모멉을 보이기 위함이라는 이론을 전개했다. 이러한 모범은 너무 완전했기 때문에 인간들을 하나님에게로 이끄어 주며, 하나님은 여기에 대한 응답으로 고유한 사랑에 의해서 그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중보기도에 의해서 인간을 용서해 주신다.

안셀무스가 법률적이고 계량적인 방식의 보상논리에 입각해 있다면 아벨라드는 용서와 화해를 사랑의 행위라는 인격적 사건으로 보았다. 이로써 그는 의지의 자율성과 인격주의를 특성으로 하는 근세의 중요한 씨앗으로 간주되기까지 한다.

아벨라드는 개념론을 주장했는데, 그는 그의 스승인 샹뽀의 윌리엄과 로스켈른을 반대한 데서 형성되었다.

샹뽀의 윌리엄은 실재론의 기수였다, 윌리엄에 의하면, 보편은 개별자보다 앞에 존재하면서 개별자 하나하나에 완전하게 있다고했다. 이러한 견해는 두 가지의 어려움을 가져다 준다. 첫째로, 보편의 편재성에 대한 주장과 둘째로, 하나의 보편에 대해서 반대되는 것들을 위는 서술해야만 할 것이다.

예를 들면, '동물'이라는 개념은 합리적 동물인 사람에게는 합리적이지만 말(馬)의 경우는 비합리적일 뿐이다. 이러한 어려움과 여기에서 초래하느 또 다른 결과들을 피하기 n이해서 윌리엄은- 그의 제자 아벨라드가 정확하게 지적한 대로- 그의 본래적인 견해를 철회하고 동일한 유(類:genus)에 속하는 각종 개별자들의 실재(essence)는 서로 '다르지 않다고' 말할 수 있으나, 즉 유사하다고 할 수는 있으나 동일하지 않다고 새롭게 주장했다.

따라서 예를 들어 베드로와 요한은 서로 다르지만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설명하지만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하지는 못했다. 즉 만일 두 실재가 상호간에 공통적인 어떤 것을 다같이 가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유사하다고 설명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렇게 해서 여러 개별자 안에 공통적인 것이 어떻게 있겠는가 하는 본래적인 어려움으로 다시금 돌아가고 말았다.

아벨라드의 해결은 때때로 로스켈른의 해결과 동일하다는 말을 듣지만 이러한 방법과 아주 달랐다. 아벨라드는 보편이란' 이름의 의미'라고 했다.

그의 스승이었던 로스켈른은 이것은 '소리의 방출-혹은 바람'이라고 했다. 아벨라드는 로스켈른의 이론에 반대했다.

왜냐하면 로스켈른의 입장은 돌(石)이 아니라 말(馬)이라는 보편적 '동물'을 어떻게, 그리고 왜 서술할 수 있는가를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만일 보편이 단순한 소리에 불과하다면, 올바른 긍정 혹은 오류적인 긍정 같은 주장이 있을 수 없다고 했다.

보편은 참으로 소리에 불과하지만 의미있는 소리이다. 이것은 철학자들의 관심이 대상이 되는 의미이며, 이것에 얽힌 문제는 보편에는 의미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만으로 해결될 수 없다.

보편은 '사물'이 아니다고 인식할 때에 해결될 수 있다. 즉 보편은 오로지 추상적인 개념으로만 존재할 뿐이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보편은 형상이 질료 안에 있는 것과 유사한 양상으로 있다.

즉 질료에서 형상을 추상해 낼 수 있지만, 질료없이는 형상을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이와 비슷하게 보편은 개별자로부터 추상해 낼 수 있으나- 생각을 하기 위해서는 이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러나 보편은 구체적인 개별적 사물과 동떨어져서 생각될 수 없다.

이상이 아벨라드의 보편 개념이며, 우리는 이것을 '개념주의'라고 한다.

신비주의: 클레르보의 베르나르 Bernard of Clairvaux(1093-1153)

안셀무스가 신 존재의 개념적 객관성에 입각한 확실성을 주장한 것과 달리 아벨라드가 신 인식의 주관성을 강조했다고 할 때 이는 지성과 의지 사이의 대조로 읽힐 수 있다.

그런데 아벨라드처럼 주관성을 강조하면서도 의지보다 감정에 더 초점을 맞춤으로써 신비주의를 포방하는 또다른 입장이 나타났으니 바로 클레르보의 베르나르였다.

베르나르에 의하면 신앙 행위는 확실성을 갖춘 것이라기보다는 자유로운 모험과 인격적 경험에서 비로소 현실화된다. 따라서 그의 신비주의는 인간이 그의 유한성을 초월하여 궁극자와 연합하는 추상적 신비주의라기보다 인간이 인격적 정체성을 가지고 구원의 신에 들어가 그 일부가 되는 구체적 신비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마치 신약성경의 후반부를 장식한 바울의 '그리스도 안에'라고 표현한 바와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는데 예수님의 겸손과 비천에 참여함으로써 신적 실제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참여가 율법주의적 복종을 요구하는 도덕적 명령은 아니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율법주의가 깔고 있는 합리주의뿐 아니라 도덕주의의 토대인 의지주의까지도 극복하려는 노력이 이렇게 신비주의적으로 나타났다.

그런 신비주의적 경험은 베르나르에 의하면 숙고와 참여와 초월의 세 단계로 이루어진다. 숙고란 바깥으로부터의 직관으로서 객관적 인식을 가리키고, 참여는 지성소에로 들어감을 의미한다면, 초월에서는 자기를 잃지 않으면서 자기를 넘어선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릇 모든 종교가 자기를 넘어서기를 가르친다고 할 때, 신비주의는 이미 종교의 핵심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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