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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12 후기 13-14세기 1성경신학-

12 후기 13-14세기 1
이근호 2004-02-29 18:27:06, 조회 : 401, 추천 : 73
후기 13-14세기
지성과 감정의 대립, 그리고 그런 대립의 해소를 표방하면서 또다른 긴장을 일으키는 의지의 등장은 중세 후기에 3요소 사이의 분리를 더욱 첨예하게 고조시켰다.
어거스틴 전통을 계승한 보나벤투라Bonaventure(1231-1274)의 감정주의적 정서, 어거스틴 신학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결합하고자 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지성주의적 지표, 그리고 이에 대한 반동을 제기한 둔스 스코투수의 의지주의적 의향들은 중세 후기 3대 구도의 완성을 보여주는 좋은 예들이다.
이런 전통은 수도회라고 예외일 수 없었으니 프란치스코회가 의지와 감정을 함께 중히 여기는 어거스틴의 정서를 특징으로 한다면 토마스로 대표되는 도미니크회는 이에 속한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마저 지성 중시를 기본으로 했을 만큼 지성주의적 분위기에 지배되었다는 대조를 보여준다.
보나벤투라에 의하면 이성과 철학은 우선 이 세상의 경험 가능한 사물과 관련하여 추상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탐구하고 분석하고 종합한다. 이렇게 인간은 이성을 통하여 사물의 진리를 정확히 탐구하고 인식된 사물의 진리를 설득력 있게 표현하고 또 진리를 실생활에 실천하려 한다.
이렇게 사물에 대한 정밀한 탐구성이야말로 이성의 고유성이요 자율성이다. 이성은 생각하는 능력이기 때문에 신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탐구하고 논증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부분부터 이성의 위대성과 더불어 위험성이 함께 있게 된다.
보나벤투라에 의하면 신앙은 이성보다 오히려 한 단계 높은 빛이며, 이 상위의 빛에 의한 진리 인식 방법이다. 이성은 신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조심스러워야 한다. 왜냐하면 신은 인식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신앙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앙의 대상인 신은 계시의 방법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이는 이성의 추론 과정에 의한 결론이 아니다. 그것은 위로부터, 즉 신적 권위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신학의 출발점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성은 신 문제, 형이상학적 문제들에 대해서 신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이성이 이런 문제에 대해서 지나치게 주장한다든지 독단적으로 나아가려 할 때 나쁜 의미의 합리주의로 떨어진다.
보나벤투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 중에서 도저히 기독교 사상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들을 몇 가지 지적하면서 그것을 배척한다. 그는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를 존경하는 파리 대학 철학부를 겨냥하면서 다음과 오류적 주장들, 즉 신학에서 '분리된' 철학적 견해들을 비판한다.
-모형적 이데아론 부인
-하나님의 예지와 섭리부인
-세상의 영원성 주장
-지성의 단일성 주장
-저 세상에서의 영복과 영벌 부인
보나벤투라는 이성과 신앙의 조화 문제를 학문의 계층적 위계라는 관점에서 해결하려 한다.
학문들은 연쇄 고리처럼 위 아래로 연결되어 잇으면서 어떤 질서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학문에서 맨 아래에는 이성이 자리잡고 또 그에 의한 철학이 자라잡고, 그 위에는 신앙이 자리잡고, 또 그에 의한 신학이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계층적 위계 체제가 있어서 이성은 신앙 안에서 통합되고(통제)되고 제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다리' 구조라고 보면 좋은 것이다. 이성과 신앙의 관계가 그냥 평등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위계 질서를 이루기 때문에 수직적 구조라 불러도 좋다고 한다.
이성이 신앙 안에서 조정되고 통합되어야 인간은 하나님께로 여정을 계속 할 수 있다. 그것은 이성이 신앙의 도움없이 신 문제에 대해서 자기 길을 고집하면 결국 어둠에 빠지고, 그 자리에서 여정을 계속하지 않고 주저 앉게 된다. 이것은 이성이 원죄의 탓으로 오염되었기 때문이다.
보나벤투라는 이성과 신앙의 문제를 창조 신학의 관점에서 통합하려 한다. 그에 의하면 만물은 영원한 신적 이데아를 통해 창조되기 때문에 창조물 속에는 신의 모습이 피조물의 특성을 따라 더 강하게, 혹은 덜 강하게 각인되어 있다.
그에 의하면 만물이 창조주의 반영이요, 표현이요, 그림자요, 길이요, 발자취라고 한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바로 만물이 어떤 식이든지 영원히 변치 않는 신의 이데아를 분유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물은 창조의 목적대로, 즉 창조주 안에서 완성되게끔, 모두 신께로 돌아갈 운명을 받았다. 이렇게해서 창조는 완성에 도달한다.
인간도 하나님이 모상대로 창조된 이상, 인간은 하나님께 돌아가는 여정 중에 있다. 이성과 신앙은 이 여정 안에 통합되어 여정을 계속해야 한다. 이것은 보타벤투라의 조명론과 관계가 있다.
조명론에 의하면 신적 이데아가 인간 안에서 작용하여 이성을 밝게 비추어주고, 이것으로 이성은 사물을 인식한다는 것이다.
철학과 신학은 말씀의 '육화의 신학'에서 통합된다. 말씀의 육화의 신학이 이성과 신앙의 통합을 매개한다고 보았다. 즉 인간의 구원과 해방을 위해 인간이 되신 '말씀'은 모든 창조의 매개요 중심이기 때문에 인간도 '말씀' 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이제 중세 스콜라 신학방법론의 양대 산맥이라 할 수 있는 직접적 직관과 경험적 추론 사이의 대립으로 나타나는데 결국 '신에 관한 인간의 인식에서 신은 그 시작인가 아니면 반대로 그 끝인가?'하는 문제로 집약된다.
직접적 직관을 통한 신 인식을 모든 인식의 기점으로보는 입장은 신 인식뿐 아니라 모든 인식은 인식하는 것과 인식되는 것이 하나라는 전제에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런 일치는 오직 신적 빛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함으로써 인식을 신비적 동일화로 간주한다.
그러기에 이 입장은 초월적인 것에 대한 신비적 선험인식을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데서 출발한다. 말하자면 신 인식은 모든 인식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만 체토하耙테
다른 한 편, 경험적 추론 방식을 취하는 입장에서는 신은 제1 원인인만큼 그 자체에서는 우선적이지만 인간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인식될 수 없고 다만 신의 창조행위의 결과인 피조물에 대한 경험을 통해서, 그리고 이로부터 거술러서 신적 원리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즉 신 인식은 모든 인식이 종착점이라는 것이다.
감정과 지성의 이런 대립은 제 3의 길을 갈구하기도 했으니 이 틈을 놓칠 리 없는 예리한 사상가인 둔스 스코투스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입장을 취하면서도 토마스와는 달리 유한자와 무한자 사이의 메워질 수 없는 틈을 강조한 반명에, 프란치스코 전통이 말하는 구극적 원리에 대한 직접적 인식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그는 오직 계시의 길을 통해서만 그 틈을 잇는 다리를 놓을 수 있다고 갈파했다. 스코투스는 신의 절대적 힘과 이에 근거한 적극적 질서지음을 강조함으로써 구원을 신과 인간의 관계에서 당연히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보는 안셀무스와 대조적인 입장을 취한다.
유한과 무한의 간극에 대한 이런 강조는 유명론자 오캄에 이르러 더욱 증폭된다. 오캄은 신앙의 현실과 이성의 논리 사이의 차이를 논하면서 신에게 이르는 길을 성경의 권위에 복종하는 의지일 뿐, 어떤 지성적 설명이나 감정적 고조도 적절하지 않다는 주장을 통해 의지주의를 확고히한다.
물론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제 이성과 신앙 사이의 차이가 부닥되면서 종교적 영역과 세속적 영역이 점차 분리되었으며 근세를 추동시킨 과학에 의해 그런 분리는 더욱 확대되어 갔다는 점이다.
합리주의: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1224-1274)
이성을 토대로 신앙을 추구한다는 유형분류에 입각하여 굳이 합리주의로 간주되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에서 핵심은 역시는 자연과 은총의 적극적 연관성이라 하겠다.
그의 이런 입장은 한마디로 '은총론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완성한다'는 명제로 압축된다. 그리고 이 점에서 은총주의의 시조라 할 수 있는 어거스틴과 현격한 대조를 이룬다.
이런 대조는 교회사적으로도 나타났는데 토마스로 대표되는 가톨릭주의가 자연과 초자연의 형이상학적 이원론을 구축했다면 종교개혁을 통해 어거스틴적 은총주의를 더욱 발전시킨 프로테스탄트주의는 선악 구별의 윤리적 이원론을 형성시켰다.
어쨌든 토마스의 합리주의 또는 지성주의는 그의 섭리론에도 반영될 만큼 강력했는데 어거스틴에게서 물려받은 섭리관을 토마스는 지성적 필연성을 근간으로 독자적 결정론과 결부시킴으로써 결정주의적 섭리관을 도출시켰다는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의 섭리관은 무엇인가?
초기 교부철학자인 오리겐(185-254)는 인간의 선택적 행위에 대해서만큼은 신의 섭리의 직접적 적용을 배제했다. 그럼으로써 인간의 자유와 책임, 그에 따른 칭찬과 처벌이 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어거스틴(354-430)은 인간의 자유의지적 능력뿐만이 아니라 그러한 행위의 실현까지도 신의 의지 아래 있고 신에 의해 필연적으로 규정된다고 본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이 세계가 신에 의해 전적으로 지배되면서도 스토아적·필연적인 결정론에 빠지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대한 변증은 보에티우스(480-524)의 [철학의 위안]에서 지시된다. 이에 반해서 토마스 이후 몰리나(1535-1600)는 섭리적 규정의 필연성을 받아들이면서도 인간이 선택의 의지만큼은 신에 대해서까지도 독립적이어야만 자유가 성립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근대의 라이프니쯔는, 모든 사태가 그 자체로서는 신의 예정 조화에 따라 필연적으로 결정되어 있지만 우리에게는 우연적인 사태로 경험된다는 입장을 택한다.
그러나 토마스 아퀴나스는 어거스틴과 보에티우스의 방향에서 신의 전적인 지배 아래서도 필연적인 결정론에 빠지지 않고 이 세계가 어떻게 우연적이고 인간의 자유선택이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한 해명을 추구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이 세계의 목적적 질서에서 어떻게 제 1목적 안에서 모든 존재가 섭리적으로 규정되는가, 그리고 이러한 섭리가 왜 어떻게 제2원인자를 매개로 해서 실행되는가, 이러한 제2원인자의 본질에 따른 우연적이거나 필연적인 사태가 발생하는데, 특히 이러한 우연적인 결과는 제2원인자의 산물인 뿐인가 아니면 이러한 우연적 결과까지도 신의 섭리 아래 규정되는가, 만약 그렇다면 이러한 결과는 발생하도록 이미 결정지어져 있으므로 우연적이라고 할 수 없지 않은가, 또한 제2원인자의 완전성에 따른 자유선택으로서의 우연적인 결과 역시 섭리에 의해서 성립된다면 이미 섭리적 차원에서 결정지어지므로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의 의미가 상실되지 않는가 라는 물음들을 해명하고자 했다.
신은 궁극적인 목적으로서 자신 안에 한 목적을 위해 새롭게 규정되어질 어떤 것도 있을 수 없다. 즉 신은 순수현실태로서 새롭게 실현될 어떤 가능태도 지니지 않는다. 그러나 궁극적 목적인으로서의 신은 모든 존재의 목적과 그러한 각자의 존재의 목적 실현의 방법까지 규정한다.
보에티우스는, '섭리란 궁극적인 통치자로서 모든 존재를 규정하는 신적 지성 자체라'고 말하게 된다. 이렇게 신은 모든 존재의 자신들의 목적을 위한 실천적 방법을 규정하면서 동시에 궁극적인 한 목적을 위한 모든 실천적 방법에 대한 규정으로서 섭리를 가지고 있다.
어떠한 존재도 제1원인자로서의 신의 원인성이 미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어떤 존재로 신으로서의 궁극적인 목적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러한 섭리가 다음의 두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 신은 그의 지성 안에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모든 존재에 대한 범형을 자신의 지성 안에서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만물에 대한 직접적인 섭리를 가지고 있다.
둘째, 신의 섭리의 매개자들이 있다. 왜냐하면 신은 자기 힘이 결점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선의 풍부함으로 인하여 낮은 존재를 탁월한 존재에 의해서 통치하기 때문이다. 이 점은 왕이 집정관에게 자신의 권한을 양도하여 대리로 통치하게 하는 경우와 비교할 수 있다.
이 경우 집정관의 권위는 결국 왕에게 속하지만 왕 스스로 모든 지역을 직접적으로 관할 할 수 없는 힘의 결핍으로 인해 대리 통치는 불가피하다. 그리고 왕은 집정관들의 나름의 통치 계획과 실행을 남김없이 알 수 없다.
이에 반해 신에 의해 부여된 원인은 신적인 힘의 결여의 산물이 아니라 오히려 신의 풍부한 선성으로 인해 피조물에게 원인의 권위를 부여한다.
이러한 충만한 신격 사랑에 따른 매개자에 의해 통치가 실행되면서도 신이 섭리에 따라 실행을 위한 매개자들의 모든 과정이 낱낱이 직접적으로 규정된다.
제 2원인자의 의미는 무엇인가? 제 2원인자는 도구적 원인과 원리적 원인의 관계를 통해서 유비적으로 해명될 수 있다.
우선 도구적 원인은 자기 스스로 움직이지 못한다. 물론 다른 도구에 의해서 움직여질 수는 있지만 어떻든 앞선 도구를 움직이는 원인자는 역시 원리적 원인자이어야 한다.
이렇게 도구를 움직이는 원리적 원인자는 스스로 움직이는 자기 내적 본성에 따른 목적을 지닌 영혼을 가진 살아있는 존재이다.
이러한 원리적 원인자는 자기 성장과 실현, 자기 산출 그리고 자기 이외에 다른 존재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 내의 목적이 따른 활동을 할 수 있다.
물론 원리적 원인자가 자기 내적 목적에 따라 스스로 활동한다고 하더라도 순수현실태가 아닌 한에서 어떤 활동의 실현을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운동과 목적의 제1원인자인(神) 순수현실태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원리적 원인자는 세계 내의 다른 존재에 대해서 독립적으로 자기 목적적 활동을 한다.
과연 제 2원인자가 성립되어야 이유가 무엇인가?
먼저 만약에 어떤 2차적 원인자도 능동적이지 못하고 오직 신에 의해서만 작용한다면 결과들 사이의 어떠한 다양성도 이끌어 질 수 없다. 이런저런 결과된 존재들에 어떤 작용의 차이가 없다면 우리는 이러한 존재들을 구분할 길이 없다.
우리에게 서로 다르게 알려지는 작용 역시 피조물이 2차적 원인이 되어 작용한 것이 아니라 신의 직접적인 작용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신의 작용에 따른 어떤 결과들도 그 차이가 우리에게 알려질 수 없다.
어떠한 결과의 산출에 피조물들의 어떤 원인적인 작용이 없다면 원인에 관한 지식이 오직 공허하게 수반될 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제2원인자가 원인성을 가지는 궁극적인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제 1원인자의 완성에 따른 필연의 산물인가 아니면 신의 자유의지의 산물인가?
후자라고 할 때 임의적인 우연의 산물인가 아니면 신의 자기 목적에 따른 신적 지식과 계획에 따른 선택인가? 물론 신은 완전한 실현태이므로 자기 목적의 실현을 위해서 어떤 것도 필연적으로 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기 목적에 부합되는 어떤 존재나 세계를 우연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 이렇게 선택되는 세계 중에 불완전한 세계보다 더 완전한 세계가 신의 목적, 즉 선성에 부합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신은 최선으로 활동하므로 어떤 불완전성을 의미하는 양태들을 신의 활동에 적용할 수 없다.
제2원인자가 작용하기 위해서는 작용의 주체로서의 실체적 형상이 있어야 하며 또한 작용의 목적이 주어져야 한다. 이러한 실체적 형상과 목적이 제1원인자에 의해서 부여되고 보존된다.
또한 실체적 형상은 새로운 현실적인 작용에 대해서는 가능적인 능력이므로 그러한 가능성을 현실화시키는 제1작용자가 있어야 한다.
이점은 인간의 의지적 활동에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제1원인자에 의해서 추구할 수 있는 힘이 실체적 형상으로 부여되고 그러한 의지적 활동이 실행되며 그러한 의지의 대상인 선이 주어진다.
이렇게 제1원인자가 인간의 의지적 활동에 내적으로 작용되지 않고서는 어떠한 인간의 자유가 실현될 수 없다. 이러한 제1원인자의 작용은 의지의 내적 원리의 근거라는 점에서 외적인 조력이나 방해와는 다르다.
외적인 작용자는 인간의 자발성을 억압하거나 아니면 설득할 뿐이다. 이처럼 제1원인자만이 억압 없이 의지의 자발적인 활동을 가능하게 한다. 이렇게 신은 어떤 억압도 없이 인간의 의지적 활동을 가능케 한다는 것이다.
이 섭리관에 준해서 그의 윤리관이 펼쳐진다.
그의 윤리학은 실제론적·실존적 형이상학에 기초하는 형이상학적 윤리학이다. 따라서 그의 다른 철학 분야들과 같이 그의 윤리학은 그러한 형이상학의 원리들에 의해 지배된다.
모든 것은 원인을 가지므로 목적원인을 가진다. 마치 모든 철학적 문제들이 목적인에 비추어 다루어지는 것과 같다, 인간의 도덕성은 인간의 궁극적 목적과의 연관 하에서 고려된다. 그 결과 그의 윤리학은 행복론의 성격을 가지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관찰에 입각하여 모든 인간이 행복을 추구한다고 말한다. 이 명제는 분명히 경험론적 명제이다. 그는 행복이 그 자체로 지고의 선이며 총체적 선이라고 말한다.
인간이 행복을 위해 모든 선을 추구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모든 인간의 행위가 행복 일반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각각의 인간들에게 행복에 대한 서로 다르다. 어떤 사람들은 명예와 부, 권력, 우애 등을 추구한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단으로서의 선과 그 자체로서의 선들에 대한 평가와 함께 인간 본성의 구조 분석을 바탕으로 하여 인간의 기능들에 대한 평가도 하고 있다. 그는 수단으로서의 선과 그 자체로서의 선들에 대한 평가도 하고 있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 각자의 행복에 대한 추구를 관찬하는 것을 넘어서 인간의 본성, 즉 종적 본성에 따르는 객관적인 의미의 인간 행복 개념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이성적 동물이라는 인간에게 유일한 공통된 종적 행복과 객관적인 선의 등급이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인간이 행복을 추구한다는 경험적 사실에서 출발하여, 이를 통대로 형이상학적이며 인간학적인 행복 개념을 설정하고 모든 인간들이 그것을 추구한다는 당위성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경험적 관찰인 인간의 행복 추구하는 사실뿐만 아니라 그가 제시하는 그것에 대한 형이상학적·인간학적 근거마저 수용한다.
따라서 토마스에게도 인간 행위의 궁극적 목적과 기준은 이성적 동물로서의 인간에게 적합한 행복 개념이다. 즉 모든 행위자는 목적을 위해 행동한다. 생명체들은 자기 운동의 원리인 영혼을 가짐으로써 자발적으로 행동한다.
인간의 궁극적 목적인 행복 일반이다. 모든 인간은 본성에 따라 행복을 추구한다. 그러나 행복에 대한 이해는 모든 이에게 같지 않다. 이와 같은 인간의 행복 일반에 대한 추구는 인간의 의지가 선(善) 일반에 개방되어 있다는 인간학적 진리에 기초하기도 한다.
따라서 모든 인간의 도덕적 행위는 행복 일반을 궁극적 목적으로 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무엇을 행하든 자신의 자기완성과 자기충족, 즉 형이상학적 의미의 행복을 위해서 행한다. 결과적으로 그의 윤리학은 도덕성의 자기목적성을 함의하지만 또한 동시에 그것이 행복 추구를 위한 수단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그는 '인간의 행위'와 '인간적 행위'를 구분한다. 전자는 다른 동물들과 공유하는 행위로서 인간이 이성과 의지의 작용을 통해 주인이 되지 않는 행위를 말하고, 인간적 행위란 인간으로서 인간에게 적합한 행위로서 이성과 의지의 작용을 통해 인간이 주인되는 행위를 말한다.
인간적 행위는 곧 자발적 행위 혹은 자발성을 가지는 행위이다. 이것은 영혼론의 원리에 근원을 두고 있다. 인간은 본성에 의해 궁극적 목적에 대한 수간으로서 하나의 목적을 설정하며 그것을 이해하고 의도한다.
이 자발성은 식물과 동물의 것보다 더 완전하다.
인간 행위의 내적 원리들이란 그 행위들을 가능하게 하는 인간이 가진 기능들을 말한다. 그 기능들은 인간이 유한자로서 그리고 물질적이면서도 영적인 존재로서 가지는 원리들이다.
신은 창조자이다. 창조자로서의 신은 피조물을 기획, 통치, 주재 그리고 자신을 향해 목적짓는다. 신은 세계에 대한 철저히 내재적이면서 동시에 철저히 초월적이다. 모든 존재자들은 창조자인 신으로부터 유래되며 신에게 궁극적 목적인으로 복귀한다.
그런데 모든 존재자들은 각기 다른 본질을 지니고 있으며 이에 따라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신에게 복귀한다. 이와 같은 피조물로서의 인간의 신에게로 복귀 과정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적·철학적 윤리학의 근간을 이룬다.
다만 기독교 신학적 관점에서 고려 할 때 이러한 인간의 신에게로의 복귀는 은총에 의한 초자연적인 구원을 뜻한다.
그런데 신은 단순한 일자로서 완전히 자기동일적이다. 신은 실존 그 자체로서 가능적 원리인 본질을 가지지 않는다. 신의 본질은 곧 그의 실존이다. 따라서 신에게는 본질과 행위가 구분되지 않으므로 기능과 작용, 그리고 작용들 사이의 구분이 없다.
그런데 유한자는 본질과 실존의 복합물이다. 따라서 유한자의 경우 본질과 행위, 그리고 기능과 작용 그리고 작용들이 서로 구분된다. 그런데 이해 능력이 있는 곳에는 항상 그것에 대응하는 욕구 능력이 있다. 이에 따라 하나의 영적 존재는 이성과 그것을 동반하는 영적 욕구 능력인 의지의 복합물이라는 것이다.
인간 이성은 이론 이성과 실천이성으로 구분된다. 이론이성의 경우 전체가 올바르고 추리가 형식논리의 법칙을 준수한다면, 그것의 결론은 올바르다.
그러나 실천이성은 개별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에 다달을수록 선과 악의 구분이 더욱 모호해지는 것을 경험한다. 이성은 지식에 대한 자연적 욕구를 가지며, 의지는 선에 대한 자연적 욕구를 가진다.
그러한 자연적 욕구들은 작용의 증가에 따라 더욱 활발해진다. 이성의 지식을 확보하면 할수록 그것의 지식에 대한 욕구는 증가한다. 그런데 이성에 의한 지식의 확보는 의지의 욕구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한다.
의지의 대상에 대한 욕구는 이성의 그것에 대한 지식의 정도를 따르지 않는다. 그래서 의지는 완전히 이해되지 않는 대상을 맹렬히 추구할 수 있다. 이성은 자신이 이해하는 대상을 의지에게 추구의 대상으로 제시한다.
의지 자체는 가능적 기능으로서 선에 대한 욕구일 뿐, 이성의 이해없이는 어떤 것도 추구할 수 없다. 그래서 의지는 이성이 선으로 이해하고 제시하는 것을 추구한다.
행위자의 행위가 도덕적으로 선하거나 악한 것의 주관적 이유는 그가 양심의 명령에 복종하는가에 달려 있다. 그런데 이것은 그의 자유로운 선택의 문제이다. 자유로운 선택은 숙고 혹은 자발성의 과정을 거친다.
숙고는 이성, 의지 그리고 감각적 욕구 기능들의 공통된 작업이다. 자유로운 선택은 이성과 의지의 공통된 결단으로서 형상적으로는 이성의 것이지만 질료적으로는 의지의 것이다.
그런데 일상언어에서 우리는 의지가 도덕적 선을 거부한다고 말한다. 일상언어에 따라 말하자면 의지가 그것을 거부하는 이유는 주로 정념들의 영향력에서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이 육체를 가지지 않는다면 항상 도덕적으로 선할 것인가?
그리고 유한한 인간의 의지는 항상 도덕적으로 선한가? 그러나 육체를 가지지 않거나 의지로서만의 인간 행위자는 모두 추상일 뿐이다. 분명한 것은 유한한 의지가 그 자체로 필연적으로 선하지 않다는 것이다.
실제적으로 인간 의지에게 도덕적 선이나 악을 선택하게 하는 주요 요인은 감각적 욕구 기능에 기초하는 정념의 영향력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정념들을 통제하는 작업은 덕들의 몫이다.
다시 말해 이성과 의지는 덕에 힘입어 정념을 지배한다. 따라서 선한 행위를 행하기 위해서는 덕들이 필수적이다. 정념은 우선 감각적 욕구들의 작용에서 비롯되는 영혼의 변모이다. 라틴어의 passio라는 말은 수용함을 뜻하며, 가능태-현실태 원리에 기초한다. 현대 언어로는 그것이 정념을 의미한다.
어거스틴은 정념을 영혼의 운동이라 하며 키케로는 영혼의 혼란 혹은 변화라 한다. 인간과 동물은 공통적으로 정념을 모두 가지나, 그 정념들에는 질적인 차이가 있다.
정념이 행위의 도덕성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는 인간의 욕구 기능의 강한 작용들인 정념들을 전체적으로 억압하는가 아니면 그것들에 대한 합리적 조절과 지배를 시도하는가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후자를 선호한다.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유적 차이인 동물성 그 자체는 선한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도덕적으로 선한 것이 될 수 있다.
인간의 영혼은 철저히 영적이다. 그러나 그것이 질료의 가능태와 결합하여 인간이라는 하나의 실체를 이룬다. 그래서 인간 영혼은 인간이라는 생명체의 제일 현실태이며 실체적 형상으로서 인간의 총체성과 단일성을 보장한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육체가 어떠한 물리적 혹은 육체적 변화를 겪을 때 영혼은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 이해될 수 있다. 예컨대 육체가 큰 상처를 입을 때 인간은 의식을 상실할 수도 있는 것과 같이 영혼은 항상 간접적으로 육체적 변화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이와 같은 육체 내의 변화로 인한 영혼 내의 변화는 어떠한 도덕적 의미도 가지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이러한 수동적 정념들은 도덕적으로 중립적이다. 그러나 윤리학에서 고려되는 정념들은 '인간 영혼 안에서 발생한다'고 할 수 있는 것들이다. 다시 말해 이성에 의해 이해되고 의지에 의해 의도되는 정념들이다.
인간 영혼이 육체를 움직이는 이상 그러한 정념들은 단순한 감각적 욕구들에 따르는 정념들이 아니다. 인간 영혼은 대상에 대해 어떠한 것을 인식함에 따라 그것을 적극적으로, 즉 자발적으로 추구하거나 도피하려는 정념을 가진다. 따라서 그러한 영혼 안에서 발생하는 정념들은 도덕적 의의를 가진다.
행위의 도덕성은 여러 차원의 기준을 가진다. 그것의 궁극적 기준은 신의 지혜와 동일한 신의 세계에 대한 기회과 통치를 표현하는 영원법이다. 모든 도덕적 법들은 그것에 기초하며 그것에서 유래된다.
더 가까운 도덕의 기준은 영원법의 일부를 반영하는 자연법이다. 그리고 행위의 도덕성의 가장 가까운 기준은 올바른 이성으로서의 실천이성이다.
인간은 우연적이고 구체적인 상황에서 자신의 개별적 행위에 대해 결정을 할 때, 자신의 실천이성의 최종적 판단인 양심에 비추어 그 행위를 평가한다. 그러나 양심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도덕의 기준이 아니다.
유한한 영적 존재인 인간의 고유 속성은 자신이 자신에게 법이 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인간 이성이 도덕법의 궁극적인 원리일 수 없다. 인간 이성은 신성한 이성에서 유래되는 실재의 법칙에 의해 지배된다.
사변적으로 인간은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실재에 대한 판단을 할 때, 그는 존재의 객관적이며 보편적 진리에 상응해야 한다. 명령하는 것은 의지의 특권이 아니다.
의지가 자신이 욕구하는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행위를 명령할 때 의지는 이성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 그러한 이성의 규정 하에서만 의지의 행위가 법의 성격을 가진다. 결과적으로 법은 항상 이성에서 유래되는 명령이다.
법은 영원법과 비영원법으로 구분된다. 영원법은 세계를 통치하는 신성한 기획이다. 이 법은 신성한 이성 안에 있다. 비영원법은 자연법과 실정법으로 구분된다.
실정법은 인간적 실정법과 신성한 실정법으로 다시 구분된다. 인간적 실정법은 국제법과 시민법으로 나누어지며, 신성한 실정법은 모세 율법과 기독교법으로 나뉘어 지고 모세 율법은 다시 도덕법과 예절법과 재판법으로 나뉘어진다.
자연의 법칙은 신성한 법에 의해 지배된다. 인간적이거나 신성한 실정법은 자연의 법칙을 내포된 신성한 법에 대해 외적이다.
그런데 도덕법으로서의 자연법은 어떠한 의미에서 자연의 법칙에 내재적이다. 자연법이 '이성적 피조물 안에서 영원법의 참여'이다. 다시 말해 자연법은 인간이 이성적 동물인 이상 불완전한 방식으로 참여하는 영원법의 부분을 말한다.
주목할 것은 자연법은 인간 이성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인간 이성에 내재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칸트의 실천이성의 자율성 이론과 토마스가 말하는 인간 이성에 의해 이해되는 도덕법이 구분된다.
인간 이성 자체가 사물의 지침이 아니고 인간 이성 안에 심어진 원리들이 자연적 이성의 지배 하에서 인간에 의해 행해지는 모든 것들의 지침이며 기준이다. 그러나 인간 이성이 자연에 의해 행해지는 모든 것들의 기준이 아니다. 자연법은 물리적이거나 인간 본성의 필연성에 의한 행위가 아닌 자발적 행위만을 지배한다.
모든 도덕적 덕들은 자연법에 의해서 지시된다. 인간의 형상적 본성에 적합한 모든 행위는 덕스러운 행위이고 자연법에 적합한 것이다. 그러나 선한 행위들 모두가 도덕법에 의해 직접적으로 지시되는 것은 아니다.
자연법은 제 1과 제 2의 법칙들로 구분될 수 있다. 제 1법칙들은 보편적인 것들이다. 그리고 제 2의 법칙들은 제 1법칙들에게 유래되는 가까운 결론들이다. 자연법의 제 1법칙은 선을 행해야 하고 추구해야 하며 악은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지침은 그 자체로 자명하다. 그래서 이것은 증명될 수 없고, 또한 증명될 필요도 없다. 그 결과 이 법칙은 모든 인간에게 알려진다. 즉 정상적인 성숙한 인간은 이것을 이해한다.
이 법칙은 인간이 선천적으로 선과 악을 파악하는 이해력을 가졌다는 것과, 인간이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해야 한다는 당위에 대한 이해력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이 법칙은 이미 인간이 선천적으로 선과 악에 대한 이해를 가졌다는 것을 전제한다.
따라서 이 법칙은 인간이 본성에 의해 근본적으로 도덕적 존재하는 것을 드러낸다. 인간이 그 자체로 선하거나 악하지 않다. 그러나 인간은 선에 대한 경향성을 가지며 선을 행해야 하는 당위성을 가진다.
제 2의 자연법 법칙들은 항상 예외적인 사례를 허용하며 이들 법칙들은 첨가나 삭감의 방식에 의해 수정될 수도 있다.
올바른 이성이란 순수한 형식적 이성이 아니다. 올바른 이성은 구체적인 내용을 담보한다. 이것의 내용은 알려진 바로서의 세계의 모든 법칙성이다. 이 내용은 자연과 우주의 법칙만이 아니라 인간이 맺을 수 있는 모든 관계들에 대한 법칙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 자연 및 우주, 타인과 공동체, 역사와 문화 그리고 때로는 절대자와 가지는 관계들이 그것이다. 이 올바른 이성이 기초하는 세계의 질서 혹은 법칙 자체가 이성적 존재인 인간 행위의 기준일 수 없다. 따라서 인간 행위의 기준은 그러한 세계의 질서 및 법칙을 반영하는 이성이다.
모든 법과 같이 도덕법은 보편적 지침이다. 그런데 한 인간 행위는 개별적인 이유로 구체적이며 또한 자유로운 행위로서 필연적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우연적이고 상황 역시 반복되지 않는 것으로서 우연성을 지닌다.
실천이성은 도덕적 행위의 원리이며 그것의 질서지음의 원리이다. 따라서 보편적·도덕적 지식을 구체적 행위에게 적용하는 것은 행위자의 실천이성 몫이 된다. 개별적 행위자가 자신의 행위가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해야 하는 하는데, 이것은 그 자신만이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자신만이 자신의 의도, 자신의 선택의 동시, 그리고 구체적 상황을 알거나 자세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행위자 자신의 특수한 행위에 대한 판단은 자의적인 것일 수 없다.
마치 사변적 이성이 존재의 본질들과 그것들의 연관에 의해 지배되듯이, 실천 이성도 객관적인 올바름과 그릇됨에 의해 지배된다. 그러한 실천이성의 추리의 결론이 바로 양심의 내용이다. 양심이란 나의 실천이성의 최종적 판단이다.
그러나 양심은 실천이성의 보편적 기준의 하나의 행위에 대한 평가에 적용하는 것일 뿐 엄밀한 의미에서 도덕의 기준은 아니다. 도덕의 가까운 기준은 올바른 이성이다.
도덕적 행위자인 인간은 타자에 의해 그리고 물리적이 아닌 조건적인 필연성에 의해 선한 행위를 행하도록 구속된다. 다시 말해 그는 타자에 의해 도덕적인 필연성에 의해 실천이성의 명령을 수행함에 구속된다.
즉 그러한 명령을 수행할 의무를 가진다. 그를 구속하는 자는 궁극적으로 세계의 창조자이자 통치자인 신이다. 그래서 인간 행위자의 양심이 유일하거나 전체적인 도덕적 행위의 원천인 것은 아니다.
행위자는 엄밀한 의미에서 어떠한 행위를 행함에 자신을 구속할 수 없다. 그러나 칸트는 자신의 실천이성의 자발성을 도덕적 의무의 궁극적 원천으로 간주한다. 이것은 구속력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시 말해 칸트는 행위자가 자신의 본성의 법칙에 적합하게 행위하는 필연성과 의무를 수행하는 도덕적 필연성을 혼동하는 것이다.
자연적 필연성은 행위자의 내부에서 비롯되며, 도덕적 의무는 타자의 원인성에 의한 것이다. 도덕적 양심의 구속력의 궁극적 근거는 모든 인간을 통치하는 도덕적 질서의 주관자인 절대일 수 밖에 없다고 토마스는 말한다.
따라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도덕성은 궁극적으로는 기초를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신의 존재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도덕성이 성립되지 못하거나 인간의 행복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양심이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13세기 말에는, 요한네스 둔스 스코투스Johannes Dunc Scotus(1266-1308)라는 학자가 두각을 나타낸다. 그의 사상의 특색이란 바로 인간정신이 존재와 객관적 진리를 파악할 수 있다는 확신에 관한 것이다.
인간의 인식이 경험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스코투스는 아퀴나스와 일치하고 있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적인 프란치스코회의 전통인 하나님의 특별한 조명설을 버리고 아퀴나스처럼 아리스텔레스의 보편 추상론이 생득관념이나 하나님의 특별한 조명을 요청하지 않고도 인간인식의 기원을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인간정신은 개체들을 직접 또는 매개없이는 인식할 수 없다는 아퀴나스의 설을 그는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아퀴나스에 의하면, 인간의 지적 인식의 직접적 대상은, 개별화의 원리인 질료로부터 추상된 형상이며 그리고 보편개념을 통해서 인식되는 형상이다. 감각은 개체를 파악하지만, 정신은 그것을 표상이나 영상에서 나타내어지는 한해서 간접적으로만 파악하는데 불과하다. 개체 그 자체의 지적 직관이란 있을 수 없다.
스코투스는 이러한 견해를 거부하고, 정신은 개체자체에 원초적인 직관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만일 인간이 미리 개체에 대한 지적직관이 있지 않다면 어떻게 개체로부터 보편을 추상할 수 있겠는가하고 그는 반문한다. 만일 정신이 추상한다면, 정신이 미리 알고 있는 것으로부터 추상하는 것이므로, 따라서 추상작용은 개체에 대한 이러한 지적 직관을 전제하고 있다.
그리고 만일 정신 쪽에 이러한 직관이 없다고 한다면, 추상적인 보편개념이 지니는 객관적인 관계와 근거를 보증하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스코투스가 토마스주의와 전통적인 어거스틴주의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고 새롭게 제시한 해결책은 인간 이성의 올바른 목적에 관한 문제였다.
전통적인 어거스틴파의 조명론에 따라서 파리 출신 겐트의 헨리는, 인간 지성의 올바른 목적은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만일 참된 지식은 영원한 이데아가 인간의 지성에 현존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인간 지성의 올바른 목적은 참으로 하나님 자신이 된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아리스토텔레스-토마스 견해에 입각해서, 인간 지성의 올바른 목적은 물질적인 사물의 실재라고 할 수도 있다. 이상의 두 입장은 각각 어려운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래서 겐트의 헨리는 인간은 어느 정도 하나님에 대해서 직접적이며 직관적인 지식을 가질 수 있으며, 그와 같은 지식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실재 안에 있는 개별자, 물질적 대상을 충분히 묵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현상태에서 직접적이고 일차적인 하나님 지식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 해당되지는 않는다.
이와는 반대로, 먼저 물질적인 대상을 많이 파악해서 지식을 습득한 다음에 하나님을 알게 된다. 이상의 주장에 반대해서 토마스는 인간의 마음은 물질적인 대상을 넘어설 수 있음을 부정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어떻게 얻는가? 우리는 토마스가 했던 것처럼 쉽게 유추론으로 가기 쉽지만, 둔스 스코투스는 유추론에 불만을 품을 만한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스코투스는 이 주제에 대해서 인간의 지성이 가질 수 있는 일차적이며 올바른 대상은 존재라고 선언했다.
이미 '존재'가 그 본래의 모습으로 아무 조건 없이 사람에게 알려질 수 있다는 사실은, 바꾸어 말하면, '존재'는 모든 존재의 수식어를 단일의미적으로 자신의 수식어(보어)로 삼는다는 뜻이다.
보어(補語)란 주어와 서술어만으로는 뜻이 불완전한 경우, 그 서술어의 설명이 부족함을 보완하는 역할을 한다. 예를 들면, '물이 얼음이 되고'나 혹은 '그는 천재가 아니라'에서 ,'얼음이'나 '천재가'라는 단어는 '된다', '아니다'라는 서술어의 보어가 된다.
그러니까 '무엇이 ∼ 된다'에서 중간에 '존재하게' 라는 보어가 삽입되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무엇은 ∼아니다'에서 중간에 '존재가' 라는 보어가 삽입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주장으로 인하여 스코투스와 토마스주의는 충돌하게 되었으며-토마스주의에서는 '존재'는 하나님과 피조물을 유추적으로 수식한다고 주장했음- 이 두 학파의 계승자들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논쟁하게 되었다.
이 주장에 따르면, 모든 만물을-하나님과 피조물까지 포함해서- 그 본래의 모습대로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에 존재를 그 본연의 모습으로 연구하는 형이상학은 불가능하게 될 뿐이었다.
더욱이 유추도 존재의 통일성이 없으면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존재를 하나님과 피조물에 대한 유추적 보어로 삼는다면 존재 개념이 이중적이 된다는 결론에 이르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에게 적용되는 '존재'가 있고 다만 피조물에게 적용할 수 있는 '존재'가 있게 된다. 이어한 견해는 극복 할 수 없는 두 개의 어려운 문제를 일으킨다.
첫째는, 그것은 존재의 두 개념을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할 제 3의 개념을 필요하게 된다. 둘째, 토마스주의의 지식론을 인정하더라도 하나님에게 적용할 수 있는 존재라는 개념의 기원을 설명할 길이 없어진다.
왜냐하면 이 개념은 물질적인 사물을 통해서 알게 된 다른 존재로부터 유래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스코투스는 존재의 단일 의미의 보어론을 제창하게 되었으며, 이 이론이 그의 체계 내에서 특징을 이루게 되었다.
존재의 단일의미의 보어론은 스코투스의 신존재 증명론을 이해하는 근거가 된다. 여기서 스코투스는 전통적인 안셀무스적 그리고 프란시스적인 하나님의 존재의 자명성에도 만족하지 않았으며 또한 토마스의 5가지 방법론도 배격하였다.
스코투스는 하나님의 존재는 원리적으로는 자명하다고, 즉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하나님의 존재를 긍정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동의하였다.
그렇지만 실제적인 경우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는 증명되어야 옳다고 보았다. 더 나아가서 토마스가 제시한 증명은 형이상학적이기보다는, '물리적', 즉 필연적 존재인 하나님을 우연적 존재로부터 증명하려고 한다.
따라서 그와 같은 논증의 오류를 범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특히 이 두 경우의 존재 개념을 단일의미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유추적인 것을 본다면, 우연적인 '존재' 개념으로부터 필연적인 '존재' 개념으로 비약한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많은 위험을 내포하게 된다.
토마스의 논증은 물질적 존재의 구분에 근거해서, 즉 현실태와 가능태로 구분해서 순수 행동이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 논증은 존재를 우연적 존재의 확실성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엄격한 의미에서 필연적 존재란 있을 수 없게 된다.
스코투스는 하나님의 존재를 형이상학에 근거해서, 즉 존재 자체로부터 증명해 간다. 이 존재는 항상 단일의미적인 보어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이 존재는 피조물의 보어일 때나 하나님의 보어일 때에도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므로 존재 개념으로부터 출발한 하나님의 존재 증명과정은 토마스가 걸었던 길과 평행하게, 즉 우연적 존재로부터 필연적 존재를 증명하게 된다.
다만 스코투스는 물질적 존재들의 우연적 존재에 근거하지 않고 존재 그 자체에 대한 개념에 근거한다는 점에서 차이난다.
이렇게 해서 스코투스는 모든 존재에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일정한 특성이 있다고 정립했는데- 그는 이것을 단순한 것으로 전환될 수 있는 속성이라고 불렀다.-예를 들면 하나의 진실된, 선한, 아름다운 등을 지칭한다. 동시에 모든 존재에 적용할 수 있는 짝으로 된 개념을 말했는데- 융합될 수 없는 특성이라고 불렀다 - 필연적인 그리고 우연적인, 무한한 그리고 유한한, 창조적인 그리고 피조적인 것 등이다.
그리고 나서 그는 이러한 짝들 가운데 불완전한 개념을 적용할 수 있는 존재들로부터 출발해서 같은 짝 안에 남아 있는 또 다른 개념(완전한 개념)의 존재를 증명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볼 때 스코투스의 하나님의 존재증명은 안셀무스적인 존재론적 증명과 토마스주의의 논증을 결합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스코투스의 방법론도 구체적인 존재로부터 출발한다는 점에서 후천적(a posteriori) 논증이며, 이 점에서는 토마스와 일치한다. 그러나 존재하는 우연적 존재로부터 존재의 단일의미적 개념을 끌어 내서 논증의 참 출발점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우연적 존재로부터 출발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논증에 의해서 증명하는 하나님은 단순함, 불가변성, 전지성 등의 모든 전통적인 속성을 다 갖는다. 그렇지만 이러한 주장의 테두리 안에서 가장 격렬한 토론을 일으켰던 생각은 스코투스가 하나님의 의지- 소위 말하는 의지론인데 -를 강조한 점이다.
스코투스는 전적으로 어거스틴적인 전통에 입각해서 이성보다 의지의 우위성을 고수했다. 심지어 하나님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사람에 대해서까지 그렇게 주장했다. 하나님의 의지는-인간의 의지도 마찬가지- 행동을 유발하는 유일한 원인이다.
그렇다고 스코투스가 말하는 하나님은 마음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변덕스러운 하나님이라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단순하시므로 이성과 의지가 동일하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견해로 보면 하나님 안에서는 의지가 이성보다 우위에 있다고 해야 옳으며, 혹은 다른 말로 해서 사랑이 지식보다 우위에 있다고 말해야 옳다는 것이다.
스코투스에 따르면, 인간의 몸과 영의 복합체이다. 몸은 고유한 형상을 가지며 영혼은 사람의 형상이다. 어찌되었든 영혼은 몸으로부터 분리되어서도 살 수는 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
영혼 안에는 의지가 지성보다 우위에 있다. 이렇게해서 스코투스의 의지론은 인간 본성의 이해에까지 뻗혀 있음을 다시금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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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