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후기 13-14세기 2
13 후기 13-14세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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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후기 13-14세기 2
이근호 2004-02-29 18:28:12, 조회 : 388, 추천 : 69
14세기에는 윌리암 오컴William of Ockham(1300-1350)이 유명하다.
그의 학설에 따르면 감각은 곧 직관이기 때문에 감각적 인지의 증거란 감각에 속하는 것이다. 직관적 지식과 추론적 지식에 대한 스코투스주의자들의 구별이 오컴에 의해서 승계되었다.
그러나 오컴은 그것을 가지고 둔스 스코투스를 반박하였으며, 스스로의 고유한 방법으로 그것을 재해석했다.
자구적으로 말한다면 스코투스와 오컴의 감각에 관한 이해는 동일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동일한 종류의 형이상학적 실체를 적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성격은 판이하였다. 인식의 방법조차 같지 않았던 것이다.
스코투스주의자에 있어서 추상적 인식은 형이상학적으로 존재와 무관한 외형을 가지고 있는 공통본성 및 본질에 대한 이해를 의미한다. 그러나 본체의 존재가 인정되지 않는 오컴주의에 있어서는 추상적 인식이 존재로부터 배척된다. 추상적 인식은 있을 수 있는 감각적 지각의 정신적 감정들을 다루기 때문이다.
스코투스의 학설에서는 인식대상이 항상 인식작용에 선행하였다. 인식대상이 인식작용의 원인이었다. 그러나 오컴에 있어서는, 인식의 원인이 인식의 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식력 그 자체,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인식력의 근본인(根本因)에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입장을 취함으로써 오컴은 둔스 스코투스가 직관적 지식을 인식대상에 존재함으로써 야기되는 인식의 형태로 정의한 것은 그릇 된 것이었다는 결론을 정확하게 추론해내었다.
직관이나 추론은 그들의 대상 때문이 아니라 각각의 본성 때문이다. 이 사실의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 사물의 직관적 인식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물론 이것은 기적이다. 그러나 기적조차 자기 모순적인 결과를 가져 올 수는 없다.
신은 존재하지 않는 사물에 관한 직관을 참조할 수 있다. 왜냐하면 직관을 그것의 대상과는 무관한 인식의 종류이기 때문이다.
순수지성에서의 이 결론은 형이상학의 다른 예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 실제로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단일체이다. 단일체들의 세계에서는 보편적인 것이 존재할 수 없으며, 동시에 그것은 각가 다른 어떠한 것으로부터도 떨어져서 존재할 수 있는 완전히 분리된 개체들의 세계이다.
따라서 직관적 인식의 대상과 그것에 대한 직관적 인식 자체와는 별개이다. 신은 이들 가운데 어느 한 쪽의 파괴를 수반하지 않고도 파괴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인과관계에 대한 오컴주의자의 개념을 논의하는 데 있어, 직관과 직관의 대상을 두 개의 독립된 실체들로 보는 입장이 인간의 지식에 관해 미치는 직접적인 결과가 곧 비실존(非實存)에 대한 직관의 가능성을 정당화하여 주는 것이다.
오컴에게서 신의 전능성이 신학적 근거로 사용되고 있다. 신은 보이지 않는 색채의 상을 우리들 속에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개별자들이 절대적인 사물들이므로, 원인들 없이 존속하는 결과들과 물체 없는 형상들, 본체없는 속성들을 창조하는 신의 절대력과는 모순이 있을 리 없다. 그리고 피조물은 순전히 개별자들이므로 그들 간의 본성적으로 불가피한 인과률의 관계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오컴은 직관의 우위 또는 개체들의 직접적인 지각을 강조했다. 직관적으로 알아지지 않는다면, 어떠한 것도 그 자체가 자연본성적으로 알아지지 않는다.
직관적 인식은 그 자체가 보증되어 있다. 이것이 세계에 관한 모든 인식의 필연적인 경험이다. 어떤 것이 다른 것의 원인이라는 것은 논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으로만 확증 될 수 있을 뿐이다. 흔히 '보편'이라고 말되어지는 것은 개체들의 종류를 나타내는 기호인 대표적인 명사 또는 그저 이름에 불과하다. 이런 사상이 그를 유명론자 nominalist라고 불리게 한다.
그는 또 철학적인 영혼론에 있어서 전통적인 논증들에 의문을 지니고 있다. 엄밀한 철학적 논증이 문제되는 한에서, 영혼은 그 존재가 저절로 생성되지 않는다는 것은 증명될 수 없고, 그리고 영혼의 비물질성과 불멸성을 증명하기 위한 논증들로 결국 무의미한 논증이 되고 만다.
그리고 또 사람들의 행위를 칭찬하거나 비난하는 습관을 보고서, 비록 우리는 자유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지라도, 인간이 자유의지를 누리고 있다는 것은 증명될 수 없다. 의지는 이성이 제시하는 행위를 선택하거나 선택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체험을 통해서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자유에 대한 논증은 간단하게 얻어지지 않는다. 오컴은 논증 즉 필연적인 원리로부터의 필연적인 연역을 구성하는 것에 대해서 엄밀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개별적 형이상학적 논증을 논증이 아니라고 말할 때, 바로 이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는 하나님의 존재나 영혼의 불멸성을 의심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본래의 의미에서 하나님의 존재 즉 무한하고 전지전능하고 절대적으로 최고의 완전한 존재자로서의 하나님의 존재와 영혼의 불멸성을 모두 신앙에 의해서만 알아진다는 것이다.
예컨대 그는 하나님의 이데아에 관한 전통적인 어거스틴의 학설을 거부했다. 하나님의 이데아는 그에게 있어서 보편적인 모든 인간에게 해당되는 원형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에 의해서 알려진 한 개별적인 인간에게만 해당된다.
이러한 의미로 '하나님의 이데아'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전통적인 학설을 거부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오컴은 경험주의의 입장을 취하고 보편의 문제에 있어서 온갖 형식의 실재론을 싫어했던 것이다.
그가 보기에 또 문제가 되는 것은, 헬라의 형이상학을 그리스도 신학에 도입함으로써 신학자들은 마치 하나님이 그 창조활동에 있어서 창조의 이데아 또는 원형에 의해서 인도되고 지배되는 것처럼 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컴의 생각으로는, 그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유와 전능을 제한하거나 제약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13세기 신학자-철학자들의 헬라 형이상학은 기독교 신앙의 순수성을 더럽혔다고 그는 생각했다. 이러한 형이상학을 배제하는 것은 이국의 지배로부터 기독교 신학을 해방하는 일이다. 물론 전통적인 형이상학이 추방된다면, 당연한 결과로서 신학과 철학은 분리되고 말 것이다. 이러한 일이 드디어 오컴의 경우에서 생겨났던 것이다.
오컴의 신학상의 전제가 잘 나타나 있는 것은 그의 윤리학에서이다. 자유란 인격의 고유한 특징이며, 무한한 하나님의 자유는 하나님의 전능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인간에 있어서 의지는 도덕적 의무를 따르지만, 하나님 본인이 자기 의무를 따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인간이 따르지 않을 수 없는 도덕률을 부과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지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의지하셨다는 단지 그 이유만으로 선이 된다. 예컨대 불륜은 악이지만, 그것이 악이 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이 불륜을 명령했다고 한다면 불륜조차 칭찬받을 만한 선이 되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한다면, 심지어 하나님은 인간에게 명령하여 하나님을 미워하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오컴은 도덕적 의무를 약화시키거나 도덕률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자유와 전능을 들어높이고 하나님의 전능에 의한 논리적인 결과라고 생각한 것을 끄집어 내려는데 마음을 두고 있었다.
세계에 있어 필연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그것이 경험적으로 검증된다는 절대적인 필연성도 역시 성립하지 않는다. 만약 필연적인 인과관계를 기독교 신학에 도입한다면 이는 기독교사상을 손상시키는 이교철학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그는 일단 본질의 형이상학을 거부한 이상, 논증적이라고 생각된 것으로서의 실재학은 거의 명사, 전제, 정의 등이 지니고 있는 의미의 논증에 지나지 않는다. 말하자면 실재학은 온전히 개념적인 영역 안에 한정된다.
실재학에 있어서 삼단논법의 결론은 경험적으로 검증되겠지만, 그럴지라도 그 결론은 가끔 경험적으로 검증되는 것이지 절대적으로 검증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경험적인 검증이 가능한 사실명제는 절대적으로 확실치 않고 필연적이지도 않다.
그는 고대의 이성적 보편주의와 중세의 신비적 집단주의에 대항하여 존재하는 것의 개체성을 강조하는 유명론의 선구자인 오캄은 바로 그런 이유로 중세 후기뿐 아니라 근대적 사고의 효시로도 간주된다.
종래의 보편성은 '자연적으로 보편적인 것'이었지만 본성적으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용례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뜻하므로 사실상 관습적으로 보편적인 것일 뿐이라는 것이 유명론의 입장이다.
이런 유명론의 파장에서 신관념이라고 예외일 수 없었으니 이제 신도 삼라만상을 통합하고 주재하는 원리가 아니라 하나의 개체로 간주되었다.
당연하게도 종래의 형이상학을 뒤흔드는 다원론적 사고의 목소리가 꿈틀거리기 시작했고 합리주의적 구도에서의 신 관념은 점차로 빛을 바래 갔다. 말하자면 철석같이 붙어 있는 지성과 신 관념 사이에 균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바로 이 때문에 지성의 대안으로 의지가 등장했으며 이를 향한 길을 터 준 둔스 스코투스를 거쳐 유명론에서 의지주의는 더욱 밀도 있게 증폭되었다. 더 나아가 근세 초기 서방교회의 분리, 또는 종교개혁의 기치가 가톨릭주의의 기둥인 지성주의에 대항하는 의지주의였던 것도 이런 시대적 배경을 깔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이처럼 유명론은 근세를 추동하는 요인이 되었으니 먼저 유명론의 개체주의적 성향은 고전적 이성의 지위를 대신할 권위를 추구하는 움직임으로 이어졌으니 특히 오캄에게서는 성경에 대한 관심으로 나타났다. 성경의 번역과 대중적 보급이라는 종교개혁의 기치가 이미 이 시기에 싹트고 있었다.
니콜라스 쿠자누스 Nicolaus Cusanus(1401-1464)는 중세를 벗어나 근대로 들어서는 문턱에 서 있는 철학자이며 신학자이다. 그는 감성과 오성과 이성을 구분하여 칸트에 앞서서 칸트의 이론을 펼친 사람이다.
그에 의하면 우리의 지식은 무지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안다'는 것은 '모른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의 무지가 곧 우리의 지식이다. 그는 반대되는 것들의 일치를 노린다.
그의 신론은 신플라톤 계통에 따른다. 플로티노스 이후 프로크로스 Proklos에 이르러 신플라톤주의는 그 절정에 이른다.
프로크로스에 의하면, 일체의 것은 '원일자(原一者)' 속에 머물러 있는다. 그리하여 일체의 것이 원일자에게서 나와서(발출), 일체의 것은 이 원일자에게로 또다시 되돌아간다.
위디오니시우스 Ps. Dionysius은 긍정신학과 부정신학을 말하고 있는데, 우리가 감각적인 것을 떠나 높이 오를수록 말수가 적어진다. 그러나 우리가 정신을 넘어서서 더 높이 올라 어둠에까지 도달하면, 말 수가 적어지는 데 그치지 않고 아예 말이 없어진다고 했다.
따라서 위에서 내려오는 길이 긍정신학이며, 올라가는 실을 부정(否定)신학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신은 존재도 아니며 생명도 아니며 지혜도 아니라고 보았다. 여기서 플로크로스의 3중(重)개념이 모두 부정되고 있다.
신은 큰 것도 아니며 작은 것도 아니다. 신은 빛도 아니며 어둠도 아니다. 끝으로 신은 '하나'도 아니라고 했다. 이로서 위 디오니시우스는 '일성(一性)'과 '삼중개념을 모두 넘어서고 있다.
프로크로스와 위 디오니시우스를 잘 알고 있던 쿠자누스는 긍정신학과 부정신학을 전개하게 된다. 우선 긍정신학의 면면을 살펴 보면, 가장 큰 것, 그것이 신이라고 전제한다. 그리하여 가장 큰 것의 본성을 탐구해 나간다.
가장 큰 것이란 하나인 것과 서로 통한다. 그런데 만일 이 '하나임(一性)'이 모든 관련과 모든 한정을 벗어나 있다면, 그러한 '하나'는 어떤 것도 그에 대립해 있지 않은 절대적인 것이다. 그리하여 절대적으로 가장 큰 것은 모두인 것이며 하나인 것이다.
그리고 가장 큰 것에게는 어떤 것도 대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에게 가장 작은 것이 일치된다. 그리하여 그것은 모든 것 속에 있다고 보았다. 가장 큰 것에는 보다 더와 보다 덜이 끼여들 수 없는 그러한 일자이다. 따라서 신성은 무한한 일성이다.
단적으로 가장 큰 것인 이 하나는 그 외에 모든 유한하고 한정되어 있는 모든 것들의 원천이며 목표이다. 그리하여 가장 큰 것이 이 '하나'가 없다고 한다면, 아무 것도 존재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하나는 필연적으로 존재해야 한다. 따라서 가장 큰 것이며 하나인 신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일성'은 하나의 동일성을 낳는다. 그런데 일성으로부터 동일성의 탄생은 일성의 반복이다. 그것은 같은 본성의 다성화(多性化)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일성이 이성을 낳는 영원한 낳음이다. 일성으로부터 일성의 탄생이 유일회적 반복인 것처럼 발출 역시 일성과 동일성의 반복이다. 즉 일성과 동일성으로부터 하나의 결합이 발출하는 것이다.
쿠자누스에 의하면, 신학자들은 일성을 성부라하고 동일성을 성자라 하고 결합을 성령이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에 의하면 하나가 셋이며 셋이 하나이다. 그리하여 신은 하나이며 셋이다. 그리고 셋이며 하나이다.
그런데 일성 속에 있는 삼성(三性) 그리고 삼성 속에 있는 일성은 우리의 오성과 이성을 뛰어넘는 진리이다. 따라서 쿠자누스는 삼각형이라고 하는 하나의 수학적 상징을 가지고 이러한 진리를 간접적으로 설명해주고 있다.
하나의 삼각형은 세 변과 세 각을 가지고 있다. 이 중의 한 변을 택하여 그것을 무한히 확대시키면, 그 변은 하나의 무한한 선이 되어버린다. 그런데 삼각형은 그 본성상 세 변을 가지기 때문에, 이 때 다른 두 변 역시 각각 하나의 무한한 선이 되어 버린다. 이제 여기서 '하나'는 '셋'이다. 그리고 '셋(세 변)은 '하나(무한한 선)이다.
신의 고유한 명칭은 '하나이며 모두' 또는 더 낫게 표현해서 '모든 것을 하나로'이다. 그러나 어느 누가 무한한 일성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모든 것이 하나로 통일되어 있어서 다른 것이나 분리된 것이 전혀 없는 무한한 일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다시 말해서 그속에서는 '인간'이 '사자'와 다르지 않고 '하늘'이 '땅'과 다르지 않으면서도 그러면서도 각자는 바로 자기자신으로 있는 그러한 무한한 일성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여기서 부정신학이 필수적이다.
우리는 신을 말해 낼 수 없다. 왜냐하면 신은, 말해 낼 수 있는 모든 것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은 제거와 부정을 통해서 좀더 참되게 말해 낼 수 있다.
부정신학에 의하면, 신에게는 아버지(성부)도 아들(성자)도 성령도 없다. 무한성으로서의 무한성은 낳지도 낳음을 받지도 발출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정신학에 의하면 신은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파악될 수 없다. 왜냐하면 피조물은 그 자체로 어둠이어서 무한한 빛을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오랜 세월을 두고 생각하고 숙고한 끝에 신을 '다른 것이 아닌 것'이라고 '말해 낸다' 그리고 신에 대한 이러한 규정을 통해서 신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말하기와 부정적으로 말하기를 넘어선다.
그리하여 부정의 부정을 통해 긍정의 긍정을 가지고 신에 대해여 말하기 시작한다.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어떤 것을 알게 해주는가? 그것은 '정의(定義)'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정의를 규정하는 데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규정 즉 정의를 류개념과 종차를 통해서 규정하지 않고 플라톤처럼 한정을 통해서 규정한다.
즉 이것이며 다른 것이 아니다라고 규정한다. 그리하여 쿠자누스는 이제 정의를 일차적으로 '다른 것이 아닌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다른 것이 아닌 것 그것을 다른 것이 아닌 것은 다른 것이 아닌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이제 그는 신의 문제를 논리적으로 풀어나가고 있다.
첫째로 신은 다른 것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다른 것이 아닌 것은 다른 것이 아닌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다른 것이 아닌 것은 '하나'이다. 그리하여 다른 것이 아닌 것으로 정의되는 신은 하나이다.
둘째로 다른 것이 아닌 것, 그것은 다른 것을 통해서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통해서 정의될 뿐이다. 즉 다른 것이 아닌 것은 다른 것이 아닌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여기 이 정의 속에는 다른 것이 아닌 것, 다른 것이 아닌 것, 다른 것이 아닌 것 이라고 세 번씩이나 같은 말마디가 반복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다른 것이 아닌 것, 그것은 그 자체로 하나이며 셋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그리하여 신은 하나이며 셋이다.
셋째로 다른 것이 아닌 것,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고 여기서 드러나고있는 '다른 것', 그것은 쿠자누스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규정된다.
즉 '다른 것이란 다른 것 외 다른 것이 아니다.' 즉 하늘은 하늘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라는 말이다.
따라서 다른 것이 아닌 것, 그것은 실체도 아니도 일자도 아니고 존재자로 아니도 비-존재자도 아니고 심지어 무도 아니다. 일자는 다른 것이 아닌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일자 그것은 비일자 앞에서 하나의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존재자는 다른 것이 아닌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존재자, 그것은 비-존재자 앞에서 하나의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진자(眞者), 그리고 선(善者) 등도 역시 다른 것이 아닌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진자 그것은 비-진자 앞에서, 그리고 선자는 비-선자 앞에서 하나의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다른 것에 대한 쿠자누스의 정의를 또한 다르게 읽어 내는 것이 가능하다. 즉 다른 것이란 다른 것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다른 것이 아닌 것이다. 쿠자누스에 의하면, 신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 옳다.
즉 신은 비록 그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 할지라도 모든 것 속에 모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다. 그리하여 명칭이 없는 신을 우리는 모든 명칭으로 부르는 것이다. 그리고 무한자를 모든 것에로 한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무규정자를 모든 것에로 규정하는 것이다.
이처럼 쿠자누스의 신론은 '대립되는 것들의 일치'라는 사상을 통해서 헤겔이 말하는 정립, 반립, 그리고 종합이라는 변증법을 헤겔에 앞서서 작업해 내었다.
조르다노 부루노 Giordano Bruno(1548-1600)는 르네상스기의 마지막 철학자로서 근세를 예고한 자다. 그의 형의상학에는 고대의 다양한 명제뿐 아니다 스콜라 철학의 존리 정연한 제반 이론, 나아가 신플라톤주의의 틀 안에서 기독교 사상의 해명을 추구한 쿠자누스와 피치노의 '르네상스 플라톤 사상' 등이 융합되어 있다.
브루노는 그의 형이상학의 대상을 무한한 일자인 신에 의해 산출된 우주에 한정시켰다. 그 이유는 인간의 추리능력을 통하여 초월적인 신은 알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신은 무한한 실체로서 모든 것의 제1원리이며 제1원인이라고 간주하였다.
즉 신이 제 1원리라는 것은 전후·본성·지속·위계에 있어서 모든 것을 앞선다는 것이며 신이 제 1원인이라는 것은 만든 자와 만들어진 것이 구별되듯 그가 모든 것을 만든 능동인이라고 한다.
그러나 조작 작품을 보더라도 그 조각가의 실체는 알 수 없으며 단지 유사함을 근거로 그가 능동인이라고 아는 것과 같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신이 능동인이라는 사실 뿐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브루노는 형이상학의 과제란 무한한 실체인 신에 의해 만들어진 만물에 어떤 흔적이 남아있는지를 탐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렇다하여서 그가 초자연적인 빛에 의해 신을 관조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단지 이를 신학의 영역이라고 간주하였으며 철학자는 자연의 빛으로 신의 그림자, 모상 안에 있는 신성을 관조하는 것을 본연의 목표로 삼는다고 보았다.
이와같이 신학과 철학의 경계를 명확히 구분한 브루노가 탐구한 것은 만물에 내재해 있는 신이다. 그는 이 내재된 신을 해명하기 위하여, 원리이며 원인인 세계 영혼의 편재성을 강조하며, 기존의 형이상학적 개념들, 즉 형상·질료·실체 등의 개념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였다.
또한 절대적 통일성을 가진 신 안에서는 가능태와 현실태가 일치한다는 원리를 그의 실체 개념과 우주론에 수용함으로써 모든 것은 '실체에 따르면' 하나라는 통일성의 근거를 확보하였다.
나아가 그는 무한한 원인은 필연적으로 무한한 결과를 산출한다는 것을 전제로 초월적 신에게만 귀속시켰던 무한성을 우주에 전이시켰다. 이렇게 함으로써 브루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유한 우주론을 부정하며 지구중심설뿐만 아니라 태양중심설까지도 넘어서는 독창적인 무한 우주론을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무한한 신 안에서 반대되는 것들과 모순되는 것이 일치한다는 원리, 즉 대립의 일치의 원리를 적용하여 무한한 우주의 특성서을 제시할 수 있었다.
사실상 이 원리에 근거하여 브루노는 '우주에는 모든 것이 중심이고 어디에도 원주가 없다'고 한 것이다.
브루노의 형이상학에 의하면 신과 유한 실체란 세계 영혼과 질료가 결합된 '살아 있는 무한한 질료'다. 브루노는 이 실체가 세계 안에서 부단히 그의 얼굴만을 바꾸며 영속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이 세계에 죽음이란 현상은 없으며 오직 영원한 실체의 양태만이 부단히 변화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관에 의하면 무엇보다도 물리적 죽음을 전제하는 기독교 구원론은 무의미해지며 나아가 내세의 존재·육체의 부활·신의 심판 등에 관련된 일련의 기독교 교리들도 그 근거를 상실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상 브루노는 그의 형이상학을 통하여 얻게 되는 인간의 진정한 지복이란 쾌락에 대한 근심과 맹목적인 고통의 감정에서 해방되어 미래를 기대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현재에 있음을 기뻐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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