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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15 근대성경신학-

15 근대
이근호 2004-02-29 18:31:43, 조회 : 446, 추천 : 65
Ⅲ 근대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무한자는 무(無)규정성이라는 의미에서 질료적 속성을 갖는다. 이것은 모든 것을 포괄하는 전체(그러니까 신적인 것)가 아니라 크기를 완성하기 위한 질료일 뿐이다.
즉 가능성이 있는 전체이지 현실적인 전체가 아니다. 플라톤도 역시 이와 비슷하게 질료라는 전문 용어를 아직은 사용하지 않았지만 존재자의 생성이 무규정성에 대한 한계 설정의 기준에 달려 있다고 이미 생각했다.
무한자의 분명한 기준의 단일성과 관계되어 불분명하게 나타나는 다소(多少)의 이원성이다. 여기서 말하는 분명한 기준은 다(多)를 소로부터 구분 짓는 한계다. 플라톤은 이 기준이 설정되어 존재자가 나타난 것을 그가 하늘과 땅의 왕이라고 칭한 이성의 탓으로 돌렸다.
실제로 이것은 플라톤의 데미우르고스Demiurgos의 창조적 활동에 대한 서슬에 상응한다. 그러나 신성은 나름대로 무한자와 달리 확실성과 한계를 통해서 한정하는 원리로 그 특색을 드러내는 게 틀림없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학자들은 이에 대해서 다르게 생각했다. 아낙시만드로는 코스모스의 아르케(arche 근원)를 무진장한 저장품이라는 의미에서 한정이 없고 규정될 수 없다고 말했다. 이 무진장한 저장품에서 만물이 생산되며 또한 만물은 다른 자리를 만들기 위해서 다시 그곳으로 돌아간다.
아낙사고라스도 역시 신(神)적인 누스(이성)를 '전체적으로는 규정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신적인 근원의 확실성과 한계성이라는 명제는 이에 맞서 파르메니데스에게 소급되는데, 그는 존재를 '주변에 한정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다음 시대는 신적인 누스를 플라톤의 생각에 따라서 자기를 자기 안에 규정하는 자로,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가 가르쳤듯이, 그것이 한정될 수 없다고 해서 그것에 대한 인식이 끝날 수 없다는 이유에서만 인식될 수 있는 자로 보았다.
오리겐은 신적인 자기 인식을 위해서 여전히 하나님의 한계성과 그의 능력을 주장했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신관과의 관계 속에서 무한자에 대한 평가를 근본적으로 새롭게 변화시킨 최초의 인물이다.
신적인 본질의 무한성은 우리 인간의 인식이 하나님을 인식함으로써 끝날 수 없다는 사실의 토대가 되며, 또한 하나님의 본질이 우리에게 파악될 수 없다는 사실의 토대가 된다. 그레고리우스는 이것을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제1원인으로서 원인 없이 존재하지만, 아버지의 의해서 증명된, 즉 아버지에 의해서 야기된 아들은 완전한 의미에서 하나님과 동일한 신적인 본질일 수 없다는 아리우스의 논증을 격파하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하나님의 무한성은 하나님이 본질을 파악할 수 없다는 사실의 기초일 뿐만 아니라, 이제부터 하나님이 한정없는 완전성과 유일무이성의 특징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실제로 하나의 무한자보다 큰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하나가 아니라 다수의 속한 각각의 것들은 서로 상대를 한정시킨다.
근대 초기에 하나님에 대한 무한성이라는 사상은 세계로 전가되었다. 그리고 게오르그 칸토르의 집합론을 통해서 실제적인 무한한 것, 혹은 무한 개념이 수학적으로 도입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을 유일하게 실제적으로 무한하게 보는 사상은 데카르트를 통해서 철학적 신학의 토대가 새롭게 놓인 이래로 철학적 논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헤겔이 참으로 무한한 것에 대한 개념을 설명함으로써 그렇게 되었는데, 여기서 이 무한한 것은 그 앞에 아무런 대립을 찾아 볼 수 없는, 따라서 유한 한 것에 대한 고유한 대립으로 점차 생각되어야만 했던 것을 말한다.
르네상스 시대에서 바로크 시대로 넘어가면서 중요한 차이를 보이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르네상스 시대에는 무한이라는 것이 하나의 중심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우주는 무한하며, 따라서 지구는 중심이 아니라"라고 했던 브루노의 말은 이런 맥락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크 시대에 이르면 무한한 공간이 하나의 중심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이 나타난다. 데자르그(G. Desargue)의 기하학에 의하면 무한한 공간 내부에 그 공간을 통일시키는 하나의 점, 그것이 바로 데자르그가 마라하는 '무한원점'이요, 바로크의 투시법의 소실점이다.
그런데 바로크에 이르면, 그 점은 특권적인 주체가 서는 점이 된다. 대상을 관찰하고 그것에 대해 판단하는 주체이다. 그것은 세계의 모든 것에 대해서 인식하고 사고하는 중심이다.
근대적 시선의 체제의 모체가 되는 바로크적 시선의 체제에서 투시점은, 인간과 대상 간의 거리를 창출하면서, 동시에 대상 세계를 영유(領有)함으로써 그 거리를 제거할 수 있는 중심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대상 세계를 정확하게 포착하고 그것을 영유할 수 있는 특권적인 점이다. 따라서 대상 세계를 정확하게 포착하기 위해서는 바로 그 점으로 가야한다. 바로크는 움직이는 시점 각각이 가지는 고유의 의미를 인정하지만, 그것이 주관적인 것에 머물지 않으려면 결국 가장 잘 보이는 한 점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철학적 용어로 바꿔 말하면, 올바른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아무렇게나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할게 아니라, 주체가 되기 위한 자리, 이성의 지배를 받는 그 자리, 그래서 대상을 정확하고 과학적으로 포착하고 영유할 수 있는 그 유일한 중심점에 서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 대해 자기감시의 체제를 작동시켜야 한다는 말과 같다. 이를 통해서 올바른 주체관이 성립하는데 그것은 주체의 지점에 자신이 알아서 가야 한다는 뜻에서 진정한 '주체화'라고 부를 수 있다는 말이다.
데카르트Descartes(1596-1650)는 근대 철학의 출발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인물이다. 왜냐하면 데카르트는 그에 앞서 쿠자누스를 비롯해서 많이 이들이 시도했던 것처럼 형이상학에 새로운 토대를 놓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철학적 토대가 그 뒤를 이은 철학 발전에서 단초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그 누구보다도 칸트kant(1724-1804)와 그의 인식론적 주관주의 선구자였다. 수학적 박물학의 이상을 지향했던 데카르트의 자연철학은 '구성하는 사유의 주권에 대한 의식'에 기인한다. '사유하는 주관은 스스로 자유와 세계로부터 새로운 문화 질서를 건설한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서만 현실성과 진리의 확고한 거점을 발견하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자아로부터 세계를 다스리는 힘을 갖는다.'
데카르트에 대한 해석이 범한 오류는, '나는 생각하므로 존재한다'라는 명제에 관한 것이다. 이 명제는, '모든 것에 가장 우선적이고 확실한 인식'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제로 모든 다른 인식의 토대가 된다는 것은 아직 아니라고 했다.
데카르트는, 하나님의 인식이 모든 다른 개념을 형성하는 기초이며, 따라서 모든 다른 인식의 기초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우리의 내부에서 발견되는 무한자 관념이 모든 유한한 내용을, 또한 자기의 자아를 파악할 수 있게 하는 조건이라고 한다면 이로써 토대를 설정하는 기능이라는 점에서 사유하는 자아의 자기 확실성에 대한 두 번째 명제가 보다 고차원의 인식 토대로 지향될 것이다.
'나는 생각하므로 존재한다'는 명제는 무한자를 직관함으로써 신관의 토대를 세워보려는 여정의 초보일 뿐이다. 이 토대는 에고(Ego)의 초월적 토대이다.
어거스틴은 이미 사유하는 자아의 자기 확실성을 피력한 바 있는데, 이로 인해서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는 길이 트이게 된 셈이다. 그러나 이 길은 자아의 자기 이해만이 아니라 세계를 이해하는 데서도 실제적인 그 토대다.
고유한 자아를 포함해서 모든 유한자들은 무한자의 제한일 뿐이다. 데카르트는 무한자의 특징적 토대를 완전 개념을 통해서 제시한다. 왜냐하면 모든 제한적인 것들은 사실적 내용에 '더 많은' 것을 포함한 것보다 덜 완전하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무한자를 완전한 것과 연결시킴으로써 모든 다른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무한자에 대한 직관이 모든 다른 사물의 토대인 하나님에 대한 의식과 일치한다고 보았다.
'나는 생각하므로 존재한다'라는 코기토 숨(cogito sum)은 이미 어거스틴이 고대 회의주의의 주장, 즉 '내가 나를 기만함으로써 존재한다'에 맞서 제기한 논증을 짧은 양식으로 요약한 것이다.
데카르트 철학의 새로운 착상은 무한에 대한 직관이 고유한 자아를 포함한 모든 유한자에 대한 인식의 조건이라는 명제에 담겨 있으며, 또한 이것과 연결하여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새로운 논증에 놓여 있는데, 이 논증은 자아의 확실성이라는 어거스틴이 사상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그의 증명을 자아의 확실성이 아니라, 오히려 자아에 대한 의식에서 전제된 무한자 관념에 그 토대를 두고 있다. 그러나 자아의 확실성은 이에 대한 출발점이라도 하다.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논증은 모든 유한을 이해하는 조건인 무한자의 초월적 우선권으로부터 출발해서 무한과 완전의 일치에 이르는 길을 향해서만 발전해 나갈 수 있다.
데카르트는 자기가 신증명을 의도적으로 '감각 세계의 가시적인 질서나 혹은 활동적인 원인의 영속으로부터 세워나간 게 아니라'고 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증거가 그 어떤 감각적 사물의 대한 증거보다 거대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며, 따라 원인과 활동의 무제한적인 사슬을 파악할 수 없다는 점에서 여전히 ' 그 어떤 것의 제1이어야만 한다'는 사실이 증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데카르트는 원인의 줄에 제일자가 있어야만 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토미즘의 주장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이 원인의 줄을 무제한적으로 소급해 나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현존적 사물의 실존은 가능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무한자에 대한 입장을 부정해야 하기 때문이요 그렇게 되면 사물이 사물되게 하는 원인이 깨어져 버린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다섯 가지 신존재 증명 방식이 토대하고 있는 전제에 대한 회의는 이미 빌헬름 오컴 이래로 표명된 바 있다. 오컴은 원인의 줄로 무제한적으로 소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이런 원인의 탓으로 돌렸다.
이 원인이라는 것은 그 활동의 진작에서 벗어나서 그것이 존속하기 위해서는 불가결한 것들을 가리킨다.
오컴은 무제한적인 소급의 불가능성을 여전히 원인의 유지에 관련된 것으로 보고 이런 의미에서 세계 사물이 실존에 의한 신증명의 적합성을 긍정했다고 한다면, 데카르트는 위에서 인용되었듯이 원인의 줄로 무제한적으로 소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이 논증이 허용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언급한다. '그러므로 나는 그 어떤 원인 사슬에 의존되어 있는 현존을 내가 증명해 나가는 과업의 출발점으로 삼지 않겠다. 그것은 아무 것도 분명하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할 뿐이다'
데카르트는 세계로부터 시작하는 전통적 신 증명이 원인의 줄에 무제한적으로 소급될 수 없다는 사실에 의존적이기 때문에 유지될 수 없다고 보았다.
데카르트가 정확하게 본 것처럼 이미 오컴에 의해서 주장된 이 사실은 관성의 원리와 더불어서 운동에 대한 근대 자연과학적 이해의 기초에서 완전히 확실해졌다.
데카르트는, 인간의 정신 안에 있는 무한자 관념에 의한 신증명을 다루었다. 우리의 정신에 주어진 무한자 관념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하나님 역시 실제로 우리 외부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 의식의 초월적 토대인 무한자 관념은 우선 근원자와 인과율적 관계에서 신증명이 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경우에도 무한자의 직관으로부터 가장 완전한 것에 대한 사상으로의 이행은 증명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으로서의 무한자의 직관은 거의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가장 완전한 것에 대한 개념을 반대하는 의혹이 그 다음 시대에 거듭해서 제기되었다. 말하자면 이런 개념을 형성한다는 것은 일종의 투사에 의한 결과일 수 있으며, 자의적으로 우리의 영을 증명하자는 것이지 모든 영적인 행위의 필연적인 전제가 아니라는 의혹이다.
그래서 그 뒤로 계속해서 특별히 라이프니츠 같은 이들에게 보는 대로, 완전 사상에서 나온 존재론적 신증명은 우주론적 증명의 한 형식을 통해 보충되었다.
라이프니츠는 우주론적 논증을 다음과 같이 설계했다. 원인의 연속에서 무한정적 소급한다는 모호한 논증에 매달리지 않은 채, 세계의 우연성은 우연하지 않는 본질을 즉 자기 자신에게서 존재하는 본질을 직접적으로 전제한다고 말이다.
이런 원리의 사용은 필연적으로 제1원인을 받아들이게 하는데, 이것은 무한하기도 하고 완전하기도 한 그것이다. 그래서 라이프니츠의 경우에는 지고의 완전성이라는 사실이 다시 한 번 철학적 신론의 중심으로 돌아간다.
데카르트 철학의 추종자들은 즉시 그들의 역학적인 자연철학을 사용해서 성경을 해석하려고 결심했으며, 또한 성경을 새로운 자연과학 반대하는 각도에서 서술하는 것은 영감론에 영향을 받은 저술가들이 시간적으로 한정적인 세계 인식 안에 성령을 적용시키려는 노력이라고 해석했다.
데카르트의 견해에 따르면 창조된 모든 사물은 그 현존이라는 점에서, 그 뿐만 아니라 그 현존의 지속이라는 점에서도 역시 창조자의 전능에 완전히 의존적이다. 더욱 현존하는 매 순간에서도 역시 그렇다.
데카르트의 이러한 생각은 시간을 순간의 연속으로 본 원자론적 표상과 어울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신의 불변성 때문에 모든 사물을 자신이 창조했던 그것대로 정확하게 유지한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세계 창조 시의 상태를 보존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맡겨져 있는 그 많은 것들에게 결코 그 어떤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즉 자연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는 피조 된 사물과 작용을 향해 잇달아 소급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통한 사물의 유지는 그 사물의 각각의 상태에서 하나님에 의해 유지된다는 것을 뜻할 뿐이다. 데카르트의 관성의 원리는 바로 이것에 기인하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사물은 다른 것의 방해를 받지 않는 한 자기의 입장에서 개개의 상태를, 즉 운동의 상태나 고요의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천체의 운동에서 알 수 있듯이.
그러나 뉴턴은 이러한 데카르트 식의 세계상에 동의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연 사건의 운동 과정에 간섭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주장하기를, 하나님이 피조 된 세계를 움직이는 방식은 인간의 영혼이 몸을 움직이는 것과 같다는 유비를 예로 들었다.
하나님은 공간적으로 자기의 모든 피조물에게 현재한다. 이런 뉴턴은 공간을 하나님의 감각 중추라고 했다. 하나님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뉴턴의 기본 구도는 영혼과 육체의 상호 작용에 대한 질문에 답하는 것이었다.
데카르트는 오직 그분만이 홀로 독립적인 실체이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유일하신 하나님 이외에 피조적 실체를 두 가지로 구분했다. '육체적 실체'와 '정신 곧 사유적 실체'가 그것이다.
전자의 특징은 연장에 있으며, 후자의 특징은 연장이 아닌 사유에 있다. 데카르트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 안에서 이루어진 육체와 영혼이 결합은 외부적 연계의 성격만을 갖는다. 그리고 영혼이 실체로서 독자성을 갖는다는 것은 영혼이 불멸성 때문인데 이 불멸성은 분리되지 않는 영혼의 단순성에서 생긴다고 보았다.
연장의 사물과 사유의 사물이라는 두 실체의 이원론에서 어떻게 이들의 공동작용이 표상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 불가피하게 제기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데카르트에 따르면 잇달아 발생하는 직접적인 작용을 표상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1674년에 후대의 사상가 말르브랑슈는 설명하기를, 한 실체의 변화는 다른 실체가 이에 어울릴 수 있는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비록 이 양자 사이에 대립적인 작용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이 기초 구상은 '기회원인론'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보다 몇 년 앞서 스피노자는 실체의 단일성론을 통해서 이 문제의 다른 해결책을 발전시켰다. 두 실체는 공동작용이 가능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스피노자가 이 양자를 불가분의 속성으로, 즉 하나님의 속성으로 간주함으로써 극복되었다.
데카르트는, 사유와 연장을 하나님에게 의존되어 있지만 일종의 적응하는 리얼리티나 '실체'를 결정하는 속성으로 파악했다. 반면에 스피노자는 이 양자의 속성을 불가분의 실체, 즉 하나님의 속성으로 간주했다.
여기서부터 이제 사유나 연장에 해당되는 무한성만 이해되는 게 아니라 이 양자의 공속(共屬)이 이해된다. 왜냐하면 육체와 영혼에서는 분명히 두 측면과, 또한 똑같은 사안의 두 측면이 핵심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스피노자는 유한한 현상을 그저 간단히 무한한 하나님과 등치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 현상을 하나이며 무한한 실체의 유한한 '양식(Modi)'라고 간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철학은 범신론적이거나 혹은 무신론적인 철학이라는 모함을 숱하게 받았다.
그런데 사실을 후에 헤겔이 옳게 말했듯이 그의 철학은 오히려 무(無)우주론적인 철학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스피노자는 하나님의 존재와 논쟁을 벌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아니라 그 외에도 세계와 세계사물이 고유하고 독자적으로 존재한다는 주장과 논쟁을 벌였기 때문이다.
그의 견해는 피조물의 독자적 현존을 창조 행위의 내적인 목표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성경의 창조 신앙과 일치될 수는 없었다. 바로 이런 점이 스피노자와 데카르트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이다. 데카르트는 하나님 이외의 모든 현존을 신적인 전능이 우연한 산물로 간주했다.
스피노자 Spinoza(1632-1677)의 자연철학관은 이러하다.
실체화의 논리가 활동을 2차적인 것으로 보고 그것의 기반에서 활동하는 것을 실체로서 상정함으로써 주-객의 이분을 야기시키고 결국 그러한 이분 속에서 자연을 활동성이 없는 죽은 기계로 보아 단지 시공 속에 자기 위치를 차지하고 다른 것으로부터 구분되고 경계지어진 각각의 연장적 사물로 여기게 된 데 반해, 그러한 이분을 부정하는 철학의 논리는 우선 각각의 개체가 고정되고 불변적인 실체, 다른 개체와 구분되어 자기 경계를 지키는 그런 실체가 아님을 강조한다.
즉 자연은 자기 경계 안에서 폐쇄된 죽은 수동적 기계가 아니라 다른 자연물과의 유기적 상관 관계 안에서 생명력을 유지하는 살아 있는 유기체이다. 자연의 개체가 생성의 힘을 가질 또한 소멸의 힘도 함께 갖게 되므로 결국 유기체로 이해된 자연은 살아 있기에 비로소 죽을 수도 있는 철저한 유한성 안에서 이해된 자연이다.
이처럼 탈실체화된 자연은 유한한 개체로서 자기 존재 근거를 자기 자체가 아니라 다른 존재자 안에 지니며 궁극적으로는 그러한 유한한 개체 전체를 근거 지우는 무한자에 의거한 자연으로 이해된다.
즉 자연 안의 생성의 힘은 자연의 궁극적 내재 원인인 신의 자기 외화의 힘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개체를 탈실체화하고 그들의 존재를 유일 실체인 신을 통해 설명하는 스피노자에게 피조물(자연)과 창조자(신)는 실체적으로 분리되는 서로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은 실체인 신의 자기 전개로서 이해되며 따라서 '신=자연'이라는 결론에 도출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스피노자에게는 어떻게 개체가 탈실체적으로 이해되는가와 그 대신 유일한 실체로서 신이 주장되는가, 그 신의 속성은 무엇인가? 그리고 '신=자연'으로 표현되는 신과 개체간의 관계를 밝혀 본다.
인간 의식에 떠오르는 사고에 대해 그것의 기반에 정신으로서의 사고적 실체를 상정하고, 시공 안에 나타나는 사물의 연장성에 대해서는 물질로서의 연장(延長)적 실체를 상정하는 것이 데카르트의 실체 이원론이며 또한 일상적 논리에 따라 사고이기도 하다.
장미의 빨간색이 보일 때 인간은 그 색의 감각 밑에 '장미의 감각'의 실체를 전제한다. 감각되는 속성들이 변하여도 그 기반에서 속성들의 담지자로서 자기 동일적으로 남아 있는 개별적 실체 X를 전제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스피노자는 사고의 배후에 '나'라는 실체를 상정하거나 시공 안에 나타나는 연장적 속성들의 배후에 물질적 객관 실체를 상정하는 것을 비판한다.
변화하는 속성들 배후에 불변하는 X로서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며 개체로서 존속하는 그런 개체적 실체는 없다. 사고성이나 연장성은 무수한 개별 실체의 근거 위에 존재하여 각각의 개체에 소속되는 개체 고유의 속성이 아니다.
왜냐하면 한 개체의 사고가 다른 개체의 사고와 관계하고, 한 개체의 연장이 다른 개체의 연장과 관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체화의 논리에 따라 관계의 근거로서 실체를 상정할 경우에도 그러한 개체간의 관계를 고려한다면 궁극적으로 각 개체가 실체일 수는 없으며 오히려 관계 맺고 있는 모든 개체를 포괄하는 전체의 기반에 오직 하나의 실체만이 있을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사고와 연장은 각 개별적 실체에 근거한 속성이 아니라 오히려 개체적 차별을 넘어선 전체인 유일자의 실체에 속하는 속성이 되며, 우리가 흔히 개별 실체로 여기는 정신 또는 사물은 사실 실체성을 갖는 개체가 아니라 오히려 유일자의 속성이 전개되어 나타난 결과의 모습과 양태일 뿐이다.
즉 개체는 사고, 연장의 속성에 대해 그 기반이 되는 실체가 아니라 반대로 그 속성이 드러나 결과인 양태일 뿐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나에게 떠오르는 사고는 사고자, 즉 정신으로서 실체인 내가 존재함으로써 주체가 되어 일으킨 사고가 아니다. 오히려 사고는 나를 넘어서는 유일자의 속성이며 그런 사고를 받아들이는 정신으로서의 나는 유일자의 실체에 근거해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이처럼 개체가 자기 실체성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은 그것이 변화하는 속성들 너머에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는 고정적인 것으로서 다른 것과 분리되고 경계되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개체는 다른 개체들과 독립된 자기 충족적인 실체가 아니다. 그러므로 스피노자가 데카르트와 달리 개체가 실체임을 부정하고 오직 전체를 포괄하는 유일자 곧 신만이 실체라고 주장하므로써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개체의 유한성이다.
우리는 이 유한성을 우선 개체들의 상호 의존성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개체들 전체의 유일자에의 의존성으로 볼 수 있다.
개체는 그 본질뿐 아니라 그 존재에 있어서도 다른 것에 의해 규정된다. 이처럼 개체가 그 스스로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아닌 것을 통해서 비로소 자가 자신이 된다는 것은 개체가 고정되고 자기 충족적인 것으로서 다른 개체와 무관하게 경계지어진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개체는 다른 개체에 의해 단절되고 폐쇄된 것이 아니라 상호 작용 관계에 있으며 각 개체는 그 상호 작용 안에서 비로소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의 본질인 정신이 정신으로 되기 위해서는 다른 정신과의 상호 작용을 필요로 하며, 인간의 신체인 유기체도 자기 자신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그것 아닌, 즉 다른 유기체를 필요로 하며 결국에는 그 자신도 그것 아닌 것으로 용해되어 버리고 만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개체간의 상호 연관성은 사고나 유기체에서 뿐만 아니라 자연 전반에 걸친 특징이다. 즉 무기체로 분류되는 사물들도 그 각각만으로는 존립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불도 그것이 타오를 빈 공간이 없이 덮어 버리면 더 이상 타지 못하고 꺼져 버리며, 물도 그것이 흘러내릴 빈 터전이 없이 막아 버리면 더 이상 자연적 물이 되지 못하고 썩어 버린다.
자연물로 만들어 놓은 도구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하나의 그릇도 무언가를 담을 수 있는 빈 공간이 없으면 더 이상 그릇이 아니며, 집도 벽 사이의 빈 공간이 없으며 더 이상 집이 아니다.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본질적으로 그것이 그것이기 위해서 그것이 아닌 다른 것을 필요로 하며, 그것이 그것일 수 있는 근거가 그것 아닌 다른 것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체는 고정적이고 경계지어진 실체가 아니라 다른 개체들과의 유기적 관계 안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호 관계 안의 개체는 고정되어 활동이 없는 수동적 물질성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것으로부터 이끌어 내는 생동성을 지닌 유기체적 생명력을 그 본질로 한다. 고정적 기계가 생명이 없기에 죽을 수도 없다면 생명을 갖는 유기체적 존재는 그 삶의 종말인 죽음 또한 가진다. 즉 유기체적 자연인 개체는 결국 자신을 자신이 아닌 다른 것에 내어주는 철저한 유한한 존재이다.
이와 같이 개체가 탈실체화된 존재로 이해될 때 자연은 고정적이고 수동적인 기계론적 자연관에서 벗어나 그 안에 삶과 죽음의 활동성을 지닌 유기체적 자연으로 이해된다. 한마디로 말해 개체는 그 본질 및 존재 근거를 자기 자체 내에 지니고 있는 실체가 아니라, 자기가 아닌 것과의 관계 안에서 그것으로 생성되고 소멸되는 유기체적 존재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탈실체화된 개체는 그 궁극적 기반을 어디에 두는가?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존재 근거를 타자 안에서 갖는가? 모든 존재는 다 타자로부터 부여된 존재인가? 그들 존재를 내어 주는 궁극적 존재는 없는가? 개체를 유기체이게끔 하는 그 생성의 힘은 궁극적으로 어디에서 연유하는가? 자연 전체에 작용하는 생동성은 무엇에 근거한 것인가?
그것은 내재적 이념으로서의 신이다.
개체는 스스로 자기 존재 근거를 자신 안에 지니지 못한다는 점에서 실체가 아니다. 그렇다고 모든 존재가 다 자기 원인을 다른 것을 통해 부여받는 것으로 무한 소급될 수는 없다. 만약 그렇다면 그 궁극적인 존재 부여자는 누구인가?
개체가 기계적으로 죽은 물질이 아니라 생명력을 지닌 유기체적 자연이라면 그 힘의 근원은 무엇인가? 다시 말해 개체를 탈실체화하는 것이 그 개체가 궁극적 실재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면, 이제 남겨지는 물음은 궁극적 실재는 무엇인가, 실체는 무엇인가하는 물음이다.
스피노자는 이처럼 개체를 탈실체화함과 동시에 각 개체의 근거로서 자기 존재 근거를 그 자체 내에 지닌 자기 원인적 존재를 되묻는다. 즉 우리에게 개체로서 나타나는 정신이나 사물과는 달리 더 이상 다른 것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가 아니라 '그 자체 내에 자기 존재 근거를 가지는 자기 원인적 존재', '그 자체 내에 존재하고 그 자체에 의해 파악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물으며, 그것을 실체하고 규정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이러한 자기 원인적 존재, 관계의 근거에 있는 실체는 오직 하나일 뿐이다. 왜냐하면 세계가 전체로서 서로 관계 맺고 있으므로 둘 이상의 실체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둘 이상의 실체가 있다면 그들은 서로 관계 맺지 못하고 따라서 세계는 분리된 둘 이상의 세계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현상과 일치하지 않는다. 하나의 세계로 서로 연관지어져 있는 이 세계에 그것의 기반이 되는 실체는 오직 하나만 있을 뿐이다.
그러면서도 이 유일 실체는 모든 개체의 존재 근거로서 무한자이어야 한다. 무한하다는 것은 한계가 없다는 것이다. 즉 그 한계 밖의 영역에 다른 무엇이 있을 수 있는 그런 한계가 없는 것으로, 다시 말해 모든 것이 그 무한자의 한계 안에 있음으로써 그 한계가 없어지는 것이다.
결국 무한자는 유한자를 그 자신 안에 포괄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의 무한자가 된다. 그러므로 무한 실체는 실체가 아닌 개체들과 구분되면서도 전적으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그들 개체 존재의 내재적 원인이며, 또한 개체로서의 자연은 무한 실체의 한계 안에 있으면서 그것으로부터 존재를 부여받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상관 관계 안의 다양하고 유한한 개체들의 궁극 원인으로서 그들 전체를 근거짓는 실체, 무한자로서의 유일한 이 실체를 스피노자는 전통에 따라 '신'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유일하고 무한한 신이 어떻게 다양하고 유한한 개체의 원인이 되는가? 무한자인 신이 어떻게 개체를 자신 안에 지니게 되는가? 신 안의 존재자인 개별자들이 어떻게 신으로부터 존재를 부여받는가? 이것을 밝히기 위해 우선 해명되어야 하는 것은 신 자체에 있어서의 구분이다.
즉 무한적 전체인 실체로서의 신 자신과 신의 활동을 통해 신의 양상으로 나타난 것으로서 신의 구분이다. 다시 말해 자신의 본질을 시간성을 초월하여 전체로서 지니는 영원한 실체로서의 신과 그 신의 본질이 시간적으로 전개될 때 그 전개된 현상 안의 내재인으로서의 시간적 활동의 신과의 부분이다.
우리는 이러한 구분을 시작과 끝이 이미 다 한꺼번에 담겨 있는 영화의 필름과 그 필름이 영사막에 시간적으로 전개되는 영화를 구분하는 것과도 비교해 볼 수 있다. 막에 전개되는 전체 시간을 존재하는 모든 시간이라고 본다면 그것의 원형인 필름은 전체 시간을 영원의 형태로 담고 있는 것이다.
시간성은 그 영원으로부터의 전개이며, 자막에 나타나는 다양한 현상은 그 영원한 전체의 시간적 전개에 지나지 않는다. 자막에 나타나는 모든 현상적 개체 중에 필름 속에 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 우리에게 자연으로 주어지는 모든 개체 존재 중에 영원한 실체로서의 신 안에 포함되지 않는 것은 없다. 그러나 다시 강조되어야 할 것은 필름과 영화가 따로 있지 않다는 것이다. 바로 그 필름이 돌아가는 것이 곧 영화이다.
바로 신이 자신을 전개하는 것이 곧 자연 현상이다. 즉 영화 밖에 필름이 따로 존재하지 않듯이 자연 밖에 신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신의 존재는 곧 신의 활동이다.
그러면 이러한 신의 활동에서 드러나는 신의 속성은 무엇인가? 사유 실체와 연장 실체라는 개체적 실체를 부정하며 그들 개체의 존재를 유일 실체인 신의 존재를 통해 설명하는 스피노자에게 있어 사유와 연장은 그 유일 실체인 신의 본질적 속성으로 해명된다.
즉 사유와 연장은 각각의 다른 실체의 속성이 아니라 하나의 실체가 가진 두 속성으로 이해된다. 이와 같은 이해는 정신과 물질을 구분되는 두 실체로 보는 데카르트적 실체 이원론에 대한 비판으로 스피노자 동일 철학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즉 사유체와 연장체는 존재론적으로 보면 하나이다. 사유와 연장은 그 하나의 실체가 파악될 수 있는 방식상의 상이성으로 인한 하나의 실체의 두 측면일 뿐이다. 이처럼 사유와 연장을 별개의 존재물의 각각의 속성이 아니라 하나의 실체가 가진 두 측면이라고 보는 입장이 함축하는 형이상학적 의미는 무엇인가?
이는 연장적 실체, 순수 물질, 순수 질료의 부정이다. 사유성이 전혀 배제된 순수 물질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신의 말씀(사유)으로부터 세계(물질 현상) 창조설이 의미하듯이, 신의 사유 이전의 연장적 질료란 없으며 사유를 벗어난 물질도 없다. 시공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자연은 신의 사유를 통해 만들어진 것으로 비록 우리에게 비사유적으로 여겨지는 연장적 사물일지라도 그것 역시 신의 사유의 이면인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체 내에 사유와 연장이라는 두 측면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는 마치 하나의 텍스트를 놓고 그것을 흰 종이 위의 검은 점들이라는 물리적 현상으로 고찰할 수도 있고, 그것을 넘어서서 의미에 따라 관념적 현상으로 고찰 할 수도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누가 꽃 한송이를 건네 줄 때 우리는 그것을 물리적인 자연 현상으로 보지 않는다. 거기에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인간의 정신에 의해 수반된 행위이므로 그 배후의 의미를 찾게 된다. 마찬가지로 자연 자체는 신의 사유의 이면이다. 그러므로 자연에는 정신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나의 사유를 떠나 그 자체 수동적인 연장적 사물로서만 여겨지는 이 바깥 세계에 대해서도 그것이 연장적이면서 동시에 사유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 세계는 우리가 그것을 대상화시켜서 보면 즉 그 대상을 보는 주관과 분리시켜 그 주관의 관념을 제외시키고 본다면 또한 의식 세계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 그것이 영화임을 잊고 그 세계에 몰두해 있으면 내가 있는 세계는 거기에 펼쳐진 영화 세계의 연장 세계이다. 자막에 펼쳐진 세계는 길이 있고 집이 있고 나무가 있는 시공적 세계인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영화 안의 연장적 세계는 궁극적으로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영화를 보는 자의 의식 안에 펼쳐진 관념 세계, 사유 세계일 뿐이다. 연장 세계란 연장적으로 사유된 세계인 것이다. 그러므로 두 세계는 결코 각기 분리되어 있는 두 실체의 세계가 아니다. 사유와 연장이 한 세계의 각 부분인 것이 아니라 세계의 모든 부분이 다 사고와 연장의 양측면을 가지는 것이다.
신과 개체와의 관계란 곧 신과 자연과의 관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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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683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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