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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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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초기 관념론성경신학-

17 초기 관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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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초기 관념론
이근호 2004-02-29 18:35:39, 조회 : 383, 추천 : 67

초기 관념론

19세기 전반 반세기는 철학적으로 볼 때 독일 관념론의 시대였다. 관념론의 시작은 19세기에 돌입하기 이전 10년과 세기 전환 이후의 몇 년간까지로 보아야 한다. 이 시기에 바로 초기 관념론이 태동했다.

이런 국면을 결정적으로 이끌어 낸 것은 피히테Fichte(1762-1814)의 철학의 발전이었다. 그 이외에도 셸링Schlling(1775-1854)과 헤겔G.W.Friedrich Hegel(1770-1831)도 역시 이에 가세했다. 또한 슐라이어마허Schleirmacher(1768-1834)의 종교 강의, 그리고 그가 자신의 철학적 윤리와 변증법에 걸맞는 입장으로 전환한 것 등이 이런 흐름에 합세했다.

피히테는 오랫동안 칸트의 생각과 자신의 생각이 같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지식학에서 우리 경험 의식의 구조에 대한 칸트의 분석을 자아 의식의 토대로부터 빈틈없이 체계적인 서술 형식 안에서 새롭게 기초를 놓아보려고 했다.

여기서 핵심적인 문제는 소위 칸트 방식으로부터의 전환이었다. 이 방식은 판단하는 오성의 행위를 그 마지막 전제(선험적 조건들)에 대한 방향성에 입각해서 분석한 것이었으며, 결국은 자아 의식(선험적 통각)을 경험 의식의 기반으로 간주한 것이기도 했다.

피히테에 따르면 판단하는 인간 정신의 모든 사안에는 자아의 '행위'가 기초하고 있다. 인간은 이런 행위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확인한다. 이 경우에 자아는 '행위 하는 자이며, 또한 이 행위의 산물이기도' 하다.

자아가 자기로 알고 있는 자기 자신이 주관으로서의 자기 자신의 산물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자아는 자기를 인식하는 한도 안에서 그 정도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아는 자기 자신 안으로 '물러서는 것'이라 할 수 있는 자의식은, 이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대상에서 찾게 되는데, 그 자의식은 사행(事行) 자체이며, 자아로서의 활동 자체이다.

자아를 사행으로 해석함으로써 자아가 구별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비(非)자아가 자아의 산물로 이해될 수 있다. 자의식과 외부에 존재하는 의식은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 자의식은 외부에 존재하는 의식의 토대다.

대립적인 조정(措定)의 가능성은 의식의 일치성을 전제한다. 여기서 조정이란, 어떤 존재를 긍정하고 그 내용을 규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자아를 전제한다. 역으로 자아의 자기 조정이라는 일은 자아 외부의 존재가 자아에게 연유하게 만드는 그 어떤 다른 것이 없는 한 불가능하다.

이렇게 조정된 비자아는 우선 철저하게 비어 있다. 그 무엇이 아니라 아무 것도 아니다. 비자아로서의 자아가 대립적이라는 점이 알려짐으로써 바로 그것을 통해서 제한되어 있다는 점이, 또한 유한하다는 점이 분명하게 된다.

그리고 우선, '이제는 자아와 비자아라는 이 양자에 대해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것들은 그 무엇이다'고.

'내가 분명히 이렇게 조정(措定)한다면 나는 한정된 자일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나는 이런 직관에 의해서 유한하기 때문이다'

피히테는 이런 세 번째 명제를 통해서 순수 자아의식을 반성하는 과정에서 주관과 객관으로 분리된 의식의 차원에 도달했다. 이 의식은 칸트의 이성 비판에서 묘사된 것처럼 지각의식의 토대를 조성한다.

유한한 자아가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은 감정의 방식에서만 우선적이고 직접적으로 지각된다. 그리고 무엇의 활동으로부터 나오는 근원적인 감정을 계속해서 설명하려는 것은 칸트주의자의 독단론인데, 그것은 물자체에 대한 신앙 안에서 전개되는 독단론이다.

실제로는 이와 반대의 상태이다. 감정은 직관을 통해서 연장(延長)된 질료를 얻어내는데, 감정의 단순 주관성은 사유를 통해서 자신의 근본이 아니라 이 질료에게 이관되며, 또한 단지 이런 종합을 통해서 객관이 출현한다.

의식의 대상으로부터 구별된, 그리고 그 대상에 연관된 유한한 자아는 근원적인 자아 직관의 절대 자아와 구별되며, 그 절대 자아와 대해 있다. 그러나 유한한 자아와 대상에 대한 전체의 대립 관계는 절대 자아로부터 발생한다는 게 확실하다.

자아의 조정과 첫 비자아의 조정은 피히테가 여러 번에 걸쳐서 강조했던 것처럼 이론적으로 이끌어 낼 수 없다. 이것들의 토대는 우리가 도덕률을 요청함으로써 경험하게 되는 '자기 활동과 자유' 안에 있다.

즉 '나는 순수 자아에 대한 나의 사유에서 나타나야만 한다. 바로 그것을 절대적인 자기 활동으로 생각해야만 한다. 즉 사물을 통해서 규정된 것으로서가 아니라 사물을 규정하는 것으로 생각해야만 한다'고 그는 말했다.

피히테는 칸트와는 달리 경험 의식을 자기 안에 근거한 것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자아로 시작했기 때문에 자기 의식의 일체 대한 질문을 매우 중요한 관심의 대사으로 삼았다.

칸트는 자아 의식을 경험 의식과의 관련 가운데서 자기에 대한 반성으로, 또는 모든 경험을 동반하는 것으로 묘사했다고 해서 자기 의식의 구성에 대한 질문을 자아와 자기 자신이라는 이중성에서 답변한 것이 아니었다.

앎의 주체인 자아와 객체인 자아 사이의 차이가 여기서 늘 전제되었다. 자아가 모든 경험의 단일한 토대여야만 한다면, 그것은 당연히 자기 자신의 단일한 토대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이 기능은 피히테가 말하는 사행(事行)으로서의 자아 개념을 성취시켰다.

즉 '나는 행위를 통해서만 나 자신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나는 자유롭기 때문이다. 개개의 행위는 바로 자아개념이다.'

물론 사행 사상을 통해서 자신에 대한 자아의 반성적 지식이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피히테는 이 지식이 자아와 나눌 일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자아를 사행으로 해석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자아의 앎을 기만한다. 그런 앎으로 돌아가지 않은 채 말이다.'라고 했다.

이로서 피히테는, 자아의 자기 직관을 '자신을 정립하는 자로 정립하는 것'이라고 일컬었다.
피히테는 자기 직관을 가리켜 '자유로운 빛을 포착하는 눈'이라고 표현했다. 피히테는 이미 이러한 새로운 사상적 기획을 끝내면서 이성 안에 있는 하나님의 보다 숭고한 능력을 고양시키는 것에 대해 언급했다.

그 능력은 곧 '감각 세계의 영원한 창조력'인데, 하나님의 능력을 고양시키는 자는 이 능력 안에서, '하나님 안에 있는 자기와 세계를 직관한다. ' 그래서 피히테는 그 뒤로 자기 의식을 바로 하나님이 자기 선언이라고 해석했다.

자아의 절대적인, 내적인, 생동적인 발생사는 한 원리를 전제하고 있다고 했다. 이는 곧 하나님의 빛을 가리키는데 이 빛으로부터 자아는 빛이 되고 또한 이 빛으로부터 이제 하나님이 계시와 언설인 빛이 현상적으로 견인된다고 했다.

존재의 언설(言說)과 계시라는 의미에서 의식을 존재의 현존이라고 언급했다. 이 경우에 핵심 문제는 인간 의식이었다. 즉 의식은, 혹은 우리 자신은 하나님의 현존 자체이며, 또한 그 현존과 온전히 하나를 이룬다.

바로 이런 존재에 자리를 잡게 되면, 또한 이를 통해서 의식이 된다. 왜냐하면 그의 고유한, 혹은 신적인 참된 존재는 그에게는 세계가 되기 때문이다. 이런 의식으로 하나님의 생명이 세계로 변형되었는데, 그 변형은 무한한 형태를 반성함으로써 갈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바로 그 하나님의 빛은 자기 자신을 통해서 이러한 파괴로부터 다시금 종합하고 자신과 일치시킬 수 있다. 또한 즉자적인 것으로, 하나님의 현존과 계시로 나타날 수 있다.

피히테의 경우에 칸트와는 달리 이론적 철학과 실천적 철학이 분리되지 않는다. 원칙적으로 그에게 실천 철학과 이론 철학은 하나다. 왜냐하면 이 양자는 이성의 '자기입법'이나 이성의 자유에 관계되면, 또한 사행(事行)인 자기 완성에서 이루어지는 자아의 자기조정(調停)과 관계되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 자아의식의 근원은 궁극적으로 도덕적인 근원이다. 이 근원은 도덕률에서 나타나는데, 이를 통해서 '단지 근원에만 토대하고 있는 절대적인 행위'가 자아를 요구하게 된다. 여기에 자기 활동과 자유에 대한 직관이 근거하고 있다.

의지는 활동하는 자이며, 또한 이성세계의 살아 있는 자이다. 이는 흡사 운동이 활동하는 자이며 감각세계의 살아 있는 자인 것과 같다고 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렇다. 하나님은 영원한 큰 강의 원천이다. 생명과 능력과 행위, 즉 근원적인 생명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원천이다. 그분의 생명으로부터, 무한한 자로부터 흘러나온다.

왜냐하면 생명은 그분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교적인 눈만이 참된 아름다움의 나라를 본다.

하나님의 의지를 도덕률의 내용에 대한 근원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생각하면 타율이 되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의지가 우리 안에 있는 도덕률의 실존을 야기하는 원인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도덕률은 하나님의 본질에서 지고한 형태를 갖춘다. 따라서 그 도덕률의 내용은 하나님의 의지에 의존적이지 않고 오히려 우리 안에 있는 그의 실존에 해당되는 경우 일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연세계의 원인이며, 또한 우리에게 속한 고유한 현존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피히테는 칸트처럼 하나님이 현존을 지선 개념에 토대에서 설명했다.

우리의 도덕적 운명에 대한 증명이 곧 신앙으로 묘사되었다. 이로서 우리 생명에 새로운 질서가 등장했다. 세계는 우리에게 이제 우리가 감당해야 할 의무의 의미심장한 질료가 된 것이다.

말하자면 리얼리티에 대한 신앙이 이런 질서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요구되는 그 강요가 계시라고 불릴 수 있다. 이를테면 '이것이 참된 신앙이다. 왜냐하면 이런 도덕적 질서가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신성이기 때문이다'고 그는 말했다. 이로써 결국 피히테의 계시 비판과 달리 신관은 도덕의식 안으로 축소되고 말았다.

'모든 생동적이고 활동적인 도덕 질서가 하나님인 셈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어떤 다른 하나님이 필요하지도 않고 그 어떤 다른 하나님을 생각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라고 그는 말한다.

이제 도덕적인 질서와 자연 질서의 근원인 하나님에 대해서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성 안에는 모든 도덕적인 세계 질서로부터 파생되는 그 어떤 토대도 없으며, 또한 토대에 근거했다는 추론 덕분으로 어떤 특별한 본질을 그 원인으로 받아들여야 토대도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개념이 특별한 실체로서는 불가능하며 오히려 모순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뒷날 피히테가 해명했던 것처럼 칸트의 기본명제에 따라서 변형되어야 하는 실체 개념이 공간적이며 물질적인 사물에 적용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피히테에 따르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표상 한다는 것은 자가당착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이 표상은 하나님의 무한성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즉 인격성과 의식이라는 것은 제한과 유한성을 전제하지 않고는 절대로 생각할 수 없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본질은 이런 술어가 첨부됨으로써 우리들에게 유한자가 되며, 우리 같은 이들에게 본질이 된다. 그리고 우리들은 우리들이 원했듯이 아무도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사유가 여러 번 반복되었을 뿐이다 고 말한다.

이런 언급은 기독교의 하나님의 이해가 인간의 투사라는 점을 비판한 것이다. 사실상 이런 비판은 스피노자가 객관적인 지식을 통해서 기독교 중세기의 하나님에 대한 표상을 비판한 것으로 소급된다.

왜냐하면 이 비판이 지식학이라는 피히테의 첫 기본 명제를 둘러싼 주변 요소들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자아의 자기 조정 명제가 분쇄된 것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자아의 토대가 다시 다른 자아가, 즉 절대 자아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종류가 되어야 한다는 통찰과 연관된다.

무신론 논쟁 본문에서는 인간이 운명에서 직접 다루어진 것처럼, 피히테는 우리 안에 있는 실천 이성의 도덕적 의욕을 생각했다. 반면에 뒷날 기획한 지식학에서는 우리에게 작용하는 빛에 대해서 언급했다.

이것은 1806년 이래로 여전히 하나님이 존재에 대한 스피노자의 생각에 훨씬 근접해 있었던 것인데, 여기서 이 존재의 계시는 우리의 의식을 말한다.

피히테는 1789년 전통적 하나님 표상을 비판함으로써 교육적 요설을 잠재워 보려고 했다. 이로써 기꺼이 의를 행하는 참된 종교가 고양될 것이다. 이렇게 입장을 명확히 천명함으로써 도덕성을 위해서 특수하고 종교적인 것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그의 주장이 극단적으로 배척받았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자아의 주관성을 위한 신적인 토대를 위해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은 또 다시 주관이나 자아로 간주될 수 없다고 말이다. 이로써 그는 자아의 자리 매김을 순환적인 것으로 제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무신론의 논쟁에서 피히테 자신에 의해서 단순히 제기된 전통의 유신론적 하나님의 표상인 신앙동형동성론을 피할 수도 있었다.

여기서 순환적이라는 말은 다른 자아와 절대 자아의 대립이 순환한다는 것인데, 이 절대 자아는 절대와 구별된 구성적 토대를 필요로 한다.

중기 관념론의 가장 중요한 두 사상가는 셸링과 헤겔이다. 이들은 프랑스 혁명과 새로운 비판 철학에 매료되었다. 그들은 이것이야말로 자유를 위한 신기원의 공속(公贖)적인 징표로 생각하고 환영해 마지않았다.

여기서 이들은 튀빙겐의 교의학자인 슈토르가 자신의 초자연주의 신학을 철학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서 칸트를 이용한 그 방식에서 벗어난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들은 슈토르와는 반대로 이성의 자율이라는 칸트의 사상을 확고하게 견지해 나갔으며, 따라서 슈토르이 논증에 놓인 토대를 허물기 위해서 칸트이 공준론(公準論)에 은폐되어 있는 행복주의를 포기해 버릴 준비가 되었다.

셸링은 말하기를,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이성의 법칙을 보편적으로 정당화하려는 목료로서 지상에서 발생한 정치적 혁명을 포함한다고 했다. 1795년 셸링의 저서 '철학의 원리와 자아에 대해서'가 출판되었다.

이 작품은 피히테의 정신에 입각해서 집필한 것으로서, 모든 것을 배타적으로 작용하는 절대적 자아의 대립성을 대상과의 관계를 통해서 규정된 경험적 자아의 자유와 자발성의 토대라고 주장했다.

피히테는 그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자아의 지식을 위해서 지성적인 직관 개념을 사용했다. 그런데 이런 표현은 경험적 자아가 자기의 자아성을 반성하는 표현 뒤로 숨어있다.

셸링에 의하면, 절대자아는 모든 존재와 모든 리얼리티를 포함하며 또한 스피노자의 생각처럼 유일한 실체인데 셸링은 이것을 아주 명백하게 자기 논리의 증거로 삼았다. 셸링에게 피히테의 자아 철학은 칸트의 비판철학을 완성시킨 것만 아니라 스피노자주의를 완성시킨 것이기도 했다.

이것은 이미 피히테가 주장했던 바와 같이 지적인 직관에서 이루어진 셸링의 자아성이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다양성을 극복함으로써 절대자아와 동일해져야 한다는 요청을 받고 있다.

이런 법칙은 도덕률의 유한한 자아에 대한 것이지만, 반면에 자연법은 모든 리얼리티를 포함하고 있는 절대적 자아에 대한 것이라고 한다.

피히테의 자아철학에 대한 스피노자의 해석은 도덕적 의욕에 상존하는 무조건적인 원리를 향해 방향을 잡는 것과 연결되어 있는데, 이것은 그런 고찰에 잘 드러나 있다. 그런데 이 원리라는 것은 유한한 자아에 발견할 수 있으며, 또한 자연철학의 단초가 될 수도 있다.

1798년에 셸링의 주장이 요점은, 자아가 아니라 절대 관념, 혹은 절대 지식의 관념이었는데, 절대 지식은 절대 관념과 절대 실체의 일치(무차별)를 뜻한다. 이러한 절대는 일종의 영원한 인식 행위이다.

이 인식은 질료와 형상이며, 즉 그 안에서 영원한 방식으로 스스로 실재가 되며 형상이 되는 생산함이다. 즉 왜 인간은 세상을 보면서 질료와 형상으로 보게 되는가의 근거를 밝히려는 것이다.

인간은 동시적으로 영원한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삼는 한에서 형상으로서의 본질이나, 혹은 주관으로 용해된다. 따라서 이것은 이중 운동이다. 즉 절대는 영원한 인식 행위를 통해서 특별한 것으로 확대되는데,

이것은 자신의 무한성을 완전하게 무한자 안에서 공상함으로써 이 특별한 것을 자기 내부로 받아들이기 위한 일이다.

즉 인간은 자기 쪽에서 신에게 다가가려는 사다리를 제작하는데 있어 질료의 감각성, 곧 대상체와 형상의 추상성, 곧 대상과 분리된 자아성을 구분 지어놓고 결합시키는 것을 통해서 그 자체 안에 신을 향한 추동적 지향성을 담으려고 한다.

철학의 체계 안에 있는 선험철학과 자연철학의 이중성은 이런 두 운동의 두 견해에 상응한다. 셸링은 두 철학적 입장의 일치를 가리켜 절대 관념론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그는 피히테의 철학을 이렇게 비판했다.

이 절대 관념은 관념과 실재의 모든 일치를 일종의 특수성으로서의 주관 의식에 한정시키는 것으로 만족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 일치의 절대성을 이미 절대 안에 현실화되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무한한 자연의 대상으로 즉 절대적인 요청이 되게 하는 것으로 만족한다는 것이다.

셸링이 절대를 2년 앞서 피히테와 관련해서 구성적 토대인 경험적 자아 안에서 직관적으로 파악되는 자아로, 즉 무한하거나 절대적인 자아로(의식과 인격성이 없는 자유행위로) 생각했다면, 이 자아는 모든 리얼리티를 자기 자신에게 정립하는 것인데 1797년에서는 자아가 단지 한 측면이라는 점을 인식했다는 말이다.

그가 볼 때 자연은 자아에 대해서 독립적으로 맞서 있다. 그러나 양자는 절대지(知) 안에서 일치되었다. 셸링은 정신이 자연 안에서 본연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함으로써 자연과의 연관에서 발생하는 유한한 자아의 기원과 자연만을 근원적으로 피히테의 지식학이라는 틀 안에 정위시키려고 했다. 외부도 절대라는 말이다.

스피노자의 사상적 체계는 이와 달리, 일종의 창조적 상상력을 대담하게 기획한 첫 시도였다. 자기 의식의 심연으로 떨어지는 대신에 또한 거기서 벗어나서 우리 안에 있는 두 세계, 즉 관념적인 세계와 실재적인 세계의 기원을 관망하는 대신에 스피노자는 자기 자신을 뛰어넘어 버렸다. 그리고 동시에 그는 우리 외부에 있는 무한자 관념에서 길을 잃어버렸다고 셸링은 말한다.

바로 이런 착상을 통해서 자연을 독립적인 것으로 간주할 준비가 갖추어지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무의식으로부터 의식에 이르는 객관적 과정이 제시된다.

1801년에 셸링은 스피노자의 사상에 훨씬 가깝게 다가갔다. 그 때의 사상적 발전이 이루어진 것을 보면, 자연과 의식의 토대인 절대가 이제는 더 이상 자아가 아니라 이성이라는 그 특색을 나타냈다.

이 이성은 주관과 객관의 총체적 무차별이라고 생각되어야만 하는 그것이다. 절대 이성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려면, 피히테에게 반드시 필요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경험적 자아로부터 절대 자아사상으로의 고양이 사유하는 이를 통해서 추상화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이성의 외부에는 아무 것도 없으며, 그 안에는 모든 것이 있다' 이것이 바로 셸링의 스피노자주의이며, 본질적으로 절대적 동일성 인식인 이성의 스피노자이다.

이를 통해서 형상은 주관적으로, 그리고 객관으로서 정립된다. 전체성이라 할 절대 동일성은 우주다. 바로 이 우주에서 절대 이성은 독자적으로 자기에게 집중하고 지양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인식하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절대적 토대는 우선 신성이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셸링에게는 이제 전체로서의 역사는 계속되는, 점차적으로 스스로 노출되는 계시다. 그리고 그 계시의 마지막에 하나님도 역시 존재하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이것은 자기 자신에게 무조건적인 지식관념에 기인한다. 이런 관념은 곧 대상과 완전한 일치를 말한다. 따라서 참된 관념은 홀로, 그리고 그 어떤 중재 없이 참된 실재다. 그리고 각각이 외부에는 그 어떤 다른 것이 있을 수 없다.

이러한 근원 지식은 근원적으로 절대 안에 거주한다. 그러나 우리의 지식은 개개의 영원한 지식의 모사(模寫)여야만 하며 또한 모사가 되어야만 한다. 그에게는 자연이 그 우주의 다른 현상과 다름없다.

이 경우에 실재의 영역에서는 유한자가 통치하며, 관념의 영역에서는 무한자가 통치한다. 소위 관념이 자신의 본질을 실재로서의 형상 안에서 이루고, 그리고 이로써 유한하게 되는 동안에 우리의 지식에서 그 모사를 발견해야만 할 근원 지식은 형상의 유한성을 다시 본질로 용해시킨다. 이를 통해서 이 형상들은 서로 묶인 채 절대의 무한성 안에 놓이게 된다.

셸링의 이러한 구상은 1801-1803년 사이에 예나에서 셀링과 매우 긴밀한 관계를 가졌던 헤겔에게 기본적인 토대를 제공했으며, 다른 방식이지만 슐라이어마허의 철학적 변증법에도 그런 토대를 제공했다.

실재는 이중적인 어두운 힘으로 나타난다. 그 힘은 정신을 통해서 억제될 필요가 있다. 이 두 측면은 하나님에게서 발생된다. 그러나 실재는 하나님 안에 있는 본성으로부터 발생한다.

즉 하나님 안에 있을 뿐이지 하나님 자체는 아닌 그것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관념적 원리가 있으며 사랑의 의도 있다. 이를 통해서 말이 본성적으로 구사된다.

그리고 여기서 따라오는 계시는 행위와 실행이다. 기초의 의지와 정신이 하나님 안에서 불가분리인 반면에 피조물 안에서는 나누일 수 있다. 그리고 악의 가능성도 이 안에 토대하고 있다.

셸링은 인간적 자유의 본질을 다루고 있는 이 저서에서 기독교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정립했다. 자유를 통한 세계의 창조적 근원이라는 그의 사상이 여기서 정점에 달했다.

그가 이 작품을 여전히 확실하게 종결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 안에 있는 본성을 더불어서 창조하는 근원이라고 생각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셸링이 모든 것을 절대 개념과 (이것은 자아나 이성을 가리키는데) 연관시킨 것을 두고, 이런 변화되는 국면에서 왜 다른 유한한 것이 절대로부터 발생할 수 있는가에 대한 답변될 수 있었다.

절대로부터 파생하는 것을 가리켜 철학이 핵심 논저이라고 말했는데, 실제로 무한으로부터 유한으로 전이시킬 수 있는 체계는 없다. 철학은 단지 역으로 유한으로부터 무한으로 넘어갈 수 있을 뿐이다 고 했다. 왜냐하면 무한을 향한 경향이 유한의 특색이며 무한에서 길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그런 노력이 유한의 특색이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자유를 이런 전이의 토대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모든 이들은 '하나님이 자기의 외부에 있는 존재들을 자기 본성의 맹목적인 필연성으로 창조한 게 아니라, 오히려 최고의 자발성으로 창조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전히 선험적 관념론의 체계에서는 절대 자유가 절대 필연성과 동일시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행위는 절대적으로 자유롭다고 생각되는 게 틀림없다. .

또한 하나님의 본성이 갖고 있는 이렇게 단순한 필연성으로부터는 '그 어떤 피조물도 가능하지 않을지 모른다'는 사실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셸링의 후기 철학에서 기초를 이루고 있는 이러한 명제를 통해서 그가 초기에 따르던 스피노자주의에서 확실하게 갈라선 후에 다른 길을 찾았는데, 이것은 그가 젊은 시절의 친구인 헤겔과 1801-1803년 사이에 예나에서 함께 지낼 때 발견했던 그 길이었다.

헤겔은 자기보다 다섯 살이나 더 어린 셸링과 함께 그가 철학으로 방향을 바꾸기 전까지 신학적 주제로 씨름했다.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출판되지 않는 소위(1800년까지) 젊은 시절의 저작들은 전반적으로 신학적인 주제였다.

그러나 정치적 관점과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그를 셸링과 묶어주는 질문에서 출발하는 주제들이었는데, 이런 질문은 칸트와 피히테에 의해서 토대가 잡힌 관념론이 자유를 어떻게 현실화할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이제 그에게는 신학적 관심과 정치적 관심의 관계에 대한 질문이 파생되었다. 이 질문은 1800년에 무르익은 헤겔의 사상 체계를 이해하는 데 기본적으로 중요하다. 이러한 기초 사상이 이미 초기 저작을 통해서 준비되었다고 해서 그의 초기 사상을 이해하는 데만 중요하다는 뜻은 아니다.

종교적 주제와 정치적 주제는 헤겔이 젊었을 때 집필한 작품에서 밀접하게 연관되었다. 따라서 사회 문제도 역시 궁극적으로 종교 문제로 나타났다. 이러한 조짐은 '민족종교와 기독교'의 관계를 다룬 첫 초기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대단한 신념으로 나타나고 발산되는 민족종교는 자유에 밀착해 있는 것이다.' 민족종교의 과업은 도덕적인 효과를 진작시키는 데 있으며, 그래서 국가는 종교에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

왜냐하면 객관적 종교를 주관화하는 것이 즉 인간의 신념과 마음속에서 길을 발견하게 하는 것이 곧 국가가 감당해야 할 막중한 업무라는 사실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헤겔에 따르면 근대 세계는 기독교 교리와 인간이 사회적 삶이 분리되었기 때문에 이런 국가의 과업과 대립적인 특색을 보이고 있다.

초기 시절의 헤겔은 인간이 공동생활을 하면서 추구해야 할 도덕성을 강화시키기 위해서 부분적으로 칸트의 종교적 문헌에 기대어 종교를 단순히 수단으로 생각했다. 그렇지만 헤겔은 1796년 이후 칸트와 피히테가 시도한, 즉 기독교를 도덕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비판하는 인물이 되었다.

이제 참된 종교는, 즉 예수님이 선포한 사랑은 도덕과 대립적인 자리에 들어선 것이다. 휄더린은 이 즈음에 이미 피히테의 자아철학과 비판적인 논쟁을 벌렸다.

휄더린은 대상에 대한 의식을 자기의식에서 이끌어내는 피히테를 반대하고, 주관을 객관의 관계에서만 생각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절대적 자아 개념이 불합리하다고 보았다. 더구나 주관과 객관은 이미 자아 의식 안에서 서로간에 제한적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휄더린에게는 양자를 포괄하는 현실성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었다. 휄더린은 주관성과 객관성의 일치를 가리켜 '존재'와 '생명'이라고 불렀으며, 이런 근원적인 일치는 생명이나 그 반성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진행됨으로써 상실된 것인데 사랑으로 다시 회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헤겔은 휄더린 사상의 영향과 그 사랑의 전망을 통해서 1798년에 다시 한번 예수님이 역사를 해석해보기로 마음을 정했다. 여기서 유대의 율법과 예수님이 대립은 앞서 나온 작품과는 다르게 해석되었다.

여기서 헤겔은 칸트가 말하는 도덕성과 합법성의 대립을 예수님의 역사를 해석하는 데 적용시켰다. 예수님은 칸트가 말하는 도덕률의 자율적 도덕성을 선포함으로써 유대교의 외면적 합법성을 맞서 보려고 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헤겔에 따르면 유대인의 신념은 외면적 순종에 한정되었다. 예수님은 이와 달리 종교와 덕을 도덕성으로 고양시켜 보려고 했다는 것이다. 또한 도덕의 본질이 들어 있는 그 도덕성의 자유를 다시 회복시켜보려고 했다.

그러나 1798년 헤겔은, '기독교 정신과 그 운명'이라는 저서에서 칸트의 도덕철학을 근대가 분열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고 간주했다. 더욱이 칸트의 도덕철학은 이 분열을 통해서, 즉 당위와 존재의 대립을 통해서 그 특색을 드러냈다.

헤겔에 따르면, 이런 대립이 유대인의 율법 종교를 지배하고 있다고 한다. 이 대립의 특징을 이제는 더 이상 순종의 외형으로 보면 안되고 오히려 당위와 존재의 내적 구조에서 일어난 특징으로 보아야 한다.

헤겔은 종교의 참된 의미를 이제 더 이상 도덕성에서가 아니라 분리된 것의 통일에서 찾았다. 주관과 객관을 통일시키려는 요구는 즉 인간 정신이 최고 정신을 통일시키려는 요구는 종교에 대한 충동이다 고 보았다.

그리스도를 세계와 함께 하는 하나님의 속죄자라고 믿는 것이 기독교의 요체다. 민족의 삶 전체에 대한 관심으로 인해서 헤겔은 당시 그에게 일종의 화두와 같았던 속죄 사상을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1794년에 그는 이 속죄를 여전히 손해배상의 차원에서 이해했다. 즉 낯선 이의 공로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책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다. 그는 속죄를 아직은 갈라진 이를 통일시키는 사랑의 표현으로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속죄가 종료를 도덕적으로 해석하는 것과 대립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5년 후에야 비로소 변화가 일어났다. 예수님은 더 이상 도덕성의 법률고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그런 도덕적인 실증성에 대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대항하도록 했다.

예수님은 '율법이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는 생각에 근거해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예단하는 것을'을 반대했다. 즉 사랑은 판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헤겔은 유대인의 율법을 역사적으로 우연한 세력일 뿐만이 아니라 철학적으로 훨씬 일반적인 사태를 표현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유대인들의 율법이 자연법의 명령과 일치했다는 한도 내에서 헤겔은 전통적인 관찰 방식을 따랐다.

헤겔은 이성의 도덕률에서, 또한 율법의 역사적 형태에서 그것이 구별되기 때문에 갈라지게 된 오성의 모습을 보았다. 반면에 헤겔은 사랑에 대한 생각이 이런 갈라짐을 뛰어넘어 생명이 일치로 갱신시킨다고 생각했다.

즉 사랑 안에는 많은 특수한 것과 갈라진 것이 총체가 아닌 전체가 포함되어 있다. 왜냐하면 사랑 안에는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사랑 안에도 갈라진 것이 있지만 더 이상 갈라진 것으로 남아있지는 않다. 일치를 이룬다는 말이다.

그리고 살아 있는 자는 살아있음을 느낀다. 사랑을 통해서 인간은 다른 이 안에서 자신을 재발견했다. 그 사랑의 기쁨은 다른 이들의 생명과 혼합되며, 그것을 인정한다. 사랑이 곧 오성의 분리의 극복하는 것이라는 사상은 생명의 일치를 제시하는 것으로서 후기 헤겔의 사변 개념을 꽃피우게 하는 맹아였다.

사랑은 무언가 이성과 유비적이다. 그런 한도 내에서 사랑은 다른 사람 안에서 발견되거나 또는 자신을 망각하기보다는 자기 실존 밖으로 나타나고 동시에 다른 것 안에서 살아있으며 민감하게 반응하며 또한 활동적이다. 이는 흡사 보편타당한 법칙인 이성이 모든 이성적인 본질 내에서 자신을 다시 예지계(界)의 동료 시민으로 인식하는 것과 같다.

이 개념은 분명히 갈라진 자의 일치를 말하며, 여기서 개개의 운명이 다른 이들과 연관되어 그들과 함께 하게 된다. 헤겔은 '기독교 정신과 그 운명'이라는 글에서 개념 철학과 여전히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여기서는 아직 사랑이 오성을 합법성과 더불어서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지양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이 합법성과 오성이 사랑과 대립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랑은 단지 객관과 법칙적인 상존적 힘에 직면해서 무력한 모습을 보이는 주관적인 신념처럼 보인다. 따라서 예수님은 현실성에서 파산되어야 했다.

그리고 관념성 안에서만, 즉 종교적 신앙의 관념적인 세계 안에서만 이러한 파산이 극복되었다는 것이다. 요컨대 예수님이 부활과 승천에 대한 초기 기독교의 신앙 안에서만 말이다.

예수님의 실존은 세계와의 분리였다. 또한 세계로부터 하늘을 향한 도피였다고 그는 말한다. 헤겔의 판단에 의하면 기독교인들에게도 역시 이러한 모순이 신앙과 삶의 현실 사이에서 여전히 모순으로 작용한다.

헤겔은 기독교의 본질에 토대하고 있는 기독교와 민족종교 대립이라는 표상을 아직도 극복하지 못했다. 헤겔의 길은 이제 사랑에 대한 생각을 통해서 단순히 주관 표상을 극복하는 길목으로 접어들었다.

또한 그는 이 객관적 세계를 사랑에서 지시된 생명의 단일성 안으로 견인해보려고 했다. 이것은 우선 종교 개념의 확장을 통해서 일어났다. 이런 확장은 슐라이어마허의 종교강연에서 영향 받은 것 같은데, 어쨌든지 이런 확장은 1800년 헤겔의 사상적 체계의 단편에서 중심 테마였다.

여기서 종교는 이미 2년 전에 언급했던 바와 같이 더 이상 삶의 현실성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삶의 일치는 종교에서 으뜸의 자리에 속한다.

종교는 헤겔이 체계 단편에서 최초로 '고양(高揚)'개념으로 정의되었다. 즉 유한한 생명으로부터 무한한 생명에 이르기까지 고양되는 것이 곧 종교다. 인간이 전체 정신인 무한 생명을, 인간 자신이 제한받는 존재이기 때문에 자기 외부에 놓아둔다면, 또한 생동적인 것으로 올라가고 그와 최고로 밀접한 일치를 이룬다면 그는 하나님을 열망하게 된다.

여기서 헤겔은 일년 전에 슐라이어마허가 종교에 대한 강연에서 그랬던 것처럼 무한자를 생명의 총체성에서 발견하려고 했지, 유한자의 피안에서 발견하려고 하지 않았다.

모든 유한하게 제한된 것과 개별적인 것에서 구별된, 그러나 모든 유한한 것들을 포괄하는 생명의 총체성은 헤겔의 경우 '정신'이라고 불렀다. 즉 정신은 특수한 것들과 대립하고 있는 법칙의 추상적인 보편성과 달리 구체적인 보편이다.

이 보편은 모든 특별한 것을 포괄하는 것으로서 생명의 총체성과 같다. 바꿔 말하면 다음과 같다. '정신은 생동적인 수다(數多)성과 일치하면서 생동적이게 하는 법칙이다. 종교는 생명의 무한 총체성으로 인간을 고양시키는 것이다. 이 고양개념은 절대 사상으로의 고양이라는 뜻에서 이미 피히테와 셸링에게서도 발견된다.

이 총체성은 구별되는 것들을(유한자) 함께 아우르는 것을 말한다. 이 경우에 1800년 헤겔의 사상적 체계에서 보면, 이러한 무한한 총체성을 파악하는 일은 종교에서 이루어진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철학이 대상이라는 말은 아니다. 철학적 반상은 모든 유한자 안에서만 유한성을 드러내 보여야만 한다.

약간의 세월이 흐른 다음에, 그러니까 피히테와 셸링의 철학 체계의 다른 점이 처음으로 인쇄되어 나왔을 때, 헤겔은 무한한 전체를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이 철학에게 있다고 피력했다. 직관을 통해서 말이다.

직관 개념은 피히테와 셸링이 말하는 의미에서 지적인 직관을, 또한 슐라이어마허가 '종교에 대한 강연'에서 사용한 개념을 생각나게 한다. 이런 점에서 헤겔은 직관이 구체적인 대상에 연관되어 있는 것에 비해서, 즉 자신의 다양한 전면을 공동으로 바라보는 것에 비해서 슐라이마허의 언어 사용에 훨씬 가깝게 자리하고 있다.

그렇지만 종교는 슐라이어마허의 생각과 달리 이미 하위의 자리로 돌아가게 된다. 즉 종교적 직관은 객관적 진리를 갖지 못한다. 이와 달리 철학적 직관은 모든 반대를 자기 자신 안에서 지양함으로써 보편 타당한 것으로 제시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일은 철학이 반성적 작업을 펼쳐나감으로써 일어난다. 이 반성은 모든 유한한 것들과 규정된 것들의 조건을 그 대립적으로 살펴보는 것이다. 이성적이라는 것은 즉 사변적으로 이해된 차별성의 일치는 그 이성적인 것의 분명한 내용에 따라서, 즉 분명히 대립된 것의 모순으로부터 연역되어야만 한다.

여기서 이 대립의 종합은 이성적인 것을 말한다. 왜냐하면 이 이율배반적인 것을 가득 채우고 유지하는 직관만이 요구될 수 있기 때문이다. 뒷날 헤겔이 '개념'이라고 일컬은 철학적 직관은 반성의 도움으로 그 철학적 직관의 필연성이 드러날 수 있고, 또한 철학적 직관이 반성은 통해 대립되었던 것들의 일치로 제시될 수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 종교적 직관과 구별된다.

주목해야 할 사실은 이러한 직관의 대상이 이제는 더 이상 단순하게 생명의 총체성이 아니라 (셸링의 생각과 같이) 오히려 절대라는 것이다. 더욱이 헤겔은 철학의 과업을 '총체성의 재생산'으로 규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제한의 총체성'을 총체성에서 단순히 '현상'으로 등장하는 절대와 구별했다. 헤겔은 절대 개념을 셸링에서 물려받았지만 절대의 직관을 반성과 연결시킴으로써, 즉 모순을 숨기지 않고 드러냄으로써 자기 친구와의 차별성을 유지했다.

이 모순의 종합적인 일치는 '직관'을 통해서 이해되고 표현되는 것이다. 헤겔의 생각에 따르면 셸링은 이와 달리 모순에 대해서는 공허할 수밖에 없는 최고 직관으로 비약한다. 왜냐하면 이 최고 직관은 반성을 통해 구별된 것의 일치를 위해서 아무런 내용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분명히 셸링에게도 절대는 무언가에 대한 구체적인 부정(否定)이며, 무차별이다. 즉 최고의 대립은 이미 추상의 최고 차원에서 등장한다. 그리고 절대의 통일성은 이 대립과의 관계에서 명시적으로 '무차별'로 묘사된다.

헤겔이 몇 년 후 '정신현상학'(1807년)의 머리말에서 조소했듯이, 셸링이 말하는 아무런 차이가 없는 통일성의 절대라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젖소를 보고 검다고 말하는 밤이다.'

프리드리히 다니엘 에른스트 슐라이어마허(1768-1834)는 특별한 방식으로 독일 관념론 역사에 속한 인물이다. 즉 그는 관념론 철학의 발전에 나름대로 독특하게 기여한 유일한 신학자였다.

'종교에 대해서, 종교를 경멸하는 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지성인들을 향한 강연'이라는 책을 통해서 셸링과 특별히 헤겔의 주목을 끌었으며, 또한 1789년 이래로 점차적으로 셸링의 동일철학이 가리키고 있는 기본 구상에서 영향을 받았다.

이 동일철학은 슐라이어마허의 '변증법' 및 철학적 윤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몹시 높았다. 슐라이어마허에게 피히테나 셸링 사상보다 훨씬 중요했던 것은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야코비의 직접적인 리얼리티 의식이라는 명제였다.

이런 의식에서 대상과 자기 의식이 근원적으로 일치하며, 또한 유한과 무한 의식도 역시 이 의식에서 일치된다. 이러한 직접적인 리얼리티 의식을 전제함으로써 슐라이어마허는 칸트의 인식 비판이나 셸링에 의한 체계 구성을 결정적으로 제한할 수 있었다.

슐라이어마허는 '종교에 대해'라는 작품에서 종교는 본질적으로 인간 실존에 속한다는 사실을 말하려고 했다. 그는 이 문제를 해명하면서, 인간의 측면에서 형성되고 제시되는 그 진실성'에 관심을 기울였다.

논증의 기반은 모든 면에서 육성되는 인간의 총체성 관념이다. 이 관념은 슐라이어마허의 교육 사상을 규정했으며, 종교의 인간론적 장소에 대한 질문이 야기되었다. 슐라이어마허에 따르면, 인간의 지식과 행위에 병치되어 있는, 특별한 '고유한 정서적 영역'이 종교다.

지식과 행위에 종속되지 않는 종교의 독자성에 대한 요구는 바로 이것에 기인한다. 이 종교적 독자성은 이성의 자연적 하나님 인식이라는 의미에서 형이상학의 토대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또한 칸트나 피히테의 경우처럼 도덕에 대한 첨가물도 아니다.

이런 명제는 슐라이어마허의 많은 독자들에 의해서 무언가 해방감으로 받아들여졌다. 또한 이 명제는 종교 개념에 대한 새로운 규정의 철학적 작용이 슐라이어마허에 의해서 제한 받게 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가장 중요한 토대를 포함하고 있다.

슐라이어마허가 종교는 형이상학에 의존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래도 종교의 인간론적 기반과 대상에 대한 슐라이어마허의 규정은 한편으로는 스피노자의 영향으로 인해서, 다른 한편으로는 직접적인 리얼리티 의식이라는 야코비의 명제로 인해서 제한받는다.

여기서 인간은 이미 종교적 성향이라는 의미에서 무한자와 관련된다. 종교의 대상은 초자연적인 것이나 지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 즉 유한자의 총체성이 일차적이다. 무한자가 그 유한자에 현재 하는 한에서 말이다.

그러나 슐라이어마허는 우주의 직관이라는 차원을 자연법칙에서 작용하는 무시무시함에서 볼 수 있는대로 외면적으로 나타난 자연과 구분했다. 이 자연 법칙은 생명체에 이르기까지, 또한 자연의 존재와 그 내적인 생명 안에 있는, 그리고 그 역사적 생성 안에 있는 인류에게 이르기까지 지배력을 행사한다. 모든 종교는 인류 외부와 위에 있는 그 무엇으로부터의 이러한 예감을 추구한다. 즉 자연법칙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무한자는 유한자의 피안이 아니라 그 안에 현재 한다. 즉 모든 유한자는 무한자에게서 분리되어 나와야만 하는 자기 한계를 규정함으로써만 존속할 수 있다. 종교는 이러한 사태를 의식하는 것이다.

종교는 모든 개인들을 전체의 한 부분으로, 모든 제한된 것을 무한자의 서술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이런 진술로 인해서 우주, 전체, 무한자라는 표현이 명백하게 등가적이라는 사실이 충분하게 설명될 수 있다.

더구나 전체는 한 부분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확인해준다. 이런 부분들은 이 부분들이 분리되어 나와야 할 전체를 통해서 정의된다. 따라서 모든 유한자는 무한자와 전체의 서술이다.

그리고 이러한 서술로서 유한자는 다시 한 번, 이러한 한계 안에서 무한하다. 슐라이어마허가 생각하는 우주는 단순히 자연 세계와 일치되는 게 아니다. 스피노자와 피히테를 통해서,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셸링을 통해서 받았다.

개인주의 사상에서 중요한 이러한 관점은 라이프니쯔의 단자론으로 소급된다. 라이프니쯔에 따르면 각각의 단자는 자기 장소에서 자기의 질서를 통해서 전체 우주 내지는 신적인 지식을 반사시킨다.

셸링은 이미 1797년 자신의 저서 '자연철학의 관념'에서 모든 관념과 단자는 이렇게 절대적으로 특별한 것이라고 언급함으로써 라이프니쯔의 이런 생각을 다시 받아들인다. 하지만 슐라이어마허는 라이프니츠와는 달리 창문없는 단자론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의 생각에 따르면 개인은 경험을 통해서 교육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

지적이고 실천적인 사람의 일상 의식에는 모든 유한한 것들이 조건들이 무한자와 전체를 통해서 은폐되어 있다.

왜냐하면 이 조건은 유한한 사물과 그 관계만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조건이 영향이 이미 어린아이들이 종교적 성향을 질식시키고 있다. 따라서 우주와 우리와의 거래가 필요하다.

그래야 개체로서의 우리와 유한자는 무한자를 직관하게 된다. 모든 직관을 직관되는 자가 직관하는 자에게 끼치는 영향으로부터, 또한 직관되는 자의 근원적이고 독립적인 거래로부터 발생한다.

이 거래는 직관하는 자에 의해서 그 본성에 따라 받아들여지고, 종합되고, 납득된다. 이경우에 모든 직관은 감정과 연결된다. 왜냐하면 경험된 작용이 우리의 내적인 의식을 변화시킨다는 사실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슐라이어마허에 의하면 우주의 직관과 감정이 종교의 본질을 생산해내는데, 이것은 우주가 우리와 벌이는 '거래'의 결과다. 여기서 우리는 무한자가 유한자 안에 현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슐라이어마허의 경우에 종교의 하나님 표상은 이러한 우주와의 거래에 연관된다. 이 표상은 종교의 본질 일반에 대해서 근본적인 게 아니라, 우주와의 거래를 단지 '자유로운 본질 형식 안에서 생각' 할 수 있는 바로 그런 사람의 경우에 형성된다.

어떤 사람이 우주를 직관함으로써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 아니가 하는 문제는 그가 보는 판타지의 방향에 달려 있다. 즉 이런 닉관에서 자유 의식이 우주와 벌리는 거래의 토대로서, 또는 일반적인 인과관계의 오성사상으로서 기준이 될 수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 있다는 말이다.

어쨌든지 슐라이어마허의 신관은 우주와 인간 사이의 교감 기능에 한정적이다. 세계 안의 모든 사건을 하나님의 행위로 표상하는 이것이 종교다. 이 표상에서 무한한 전체와 이 사건의 관계가 설명된다.

그러나 세계를 초월해 있는 하나님의 존재를 심사숙고하는 것은 형이상학에서는 선용될 뿐이지 종교에서는 그저 공허한 신화론에 불과하다고 그는 말한다.

슐라이어마허가 직관과 감정 개념을 칸트, 피히테, 셸링과 상관관계 속에서 사용하고 있긴 하지만 이들 철학자들의 언어사용과는 유별나게 상이하다.

칸트 같은 이들의 경우에 직관은 그 직관의 대상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을 통해서 야기된다. 그러나 슐라이어마허에 따르면 이런 종교적인 직관에서는 이런 대상이 무한자다. 바로 여기에 무한자와 절대를 향해 기울어진 셸링의 지적인 직관과 비슷한 점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슐라이어마허에게서처럼 무한자 의식을 통해서 중재되지 않는다. 즉 유한 안에 있는 무한을 직관함으로써, 유한의 구성적 토대로서 중재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직관과 감정의 공속(共屬)에 대한 슐라이어마허의 설명은 다시 한번 피히테가 1794년에 지시한 지식학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피히테는 대칭적인 직관과 감정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우선 감정 안에 있는 비(非)자아는 자아의 근원적인 행위를 억제하는 것으로 경험되며, 이 억제는 직관을 통해서 억제를 야기한 대상으로 되돌아간다.

피히테는 이로써 물자체에 대한 칸트의 추론이 경험적 리얼리티 의식을 묘사하기 위해 너무 앞질러버린 것이라는 점을 증명해 보려고 했다. 반면에 슐라이어마허는 실재적으로 우리에게 미치는 대상의 영향이, 감정이나 직관의 생성에 책임이 있다고 보았다.

그렇지만 슐라이어마허에게도 역시 야코비가 (그리고 흄이) 말하려는 의미에서 직접적인 리얼리티 의식은 본질적으로 감정이었다. 그러나 '강연'의 종교론에서 볼 때, 직관과 조우하는 감정은 우리의 내적 의식이 발동되으로써 일어난 근본 감정의 제한이었다.

이 근본 감정의 제한은 대상의 영향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것이다. 물론 뒷날 슐라이어마허이 사상이 발전해 나가면서 감정 개념은 야코비의 영향을 받아서 '직접적인 자기 의식'이 되어서, 종교이론의 핵심에 자리했다.

몇몇 진술에서는 피히테의 견해에 동감한다는 내용이 등장하기도 했다. 즉 우리가 하나님 표상에 의존적이라는 감정을 '방기'해 두고 있다는 관점에서 신앙론을 설명하면서 말이다. 이 하나님의 표상은 우리 의존성의 근원적인 자리이다.

직접적인 자기의식을 의존감정으로 설명하고 있는 신앙론은 분명히 피히테가 감정을 자아행위의 억제에 대한 지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자기 의식과 감각적인 대상 의식이 공존하고 있다는 설명은 곧 슐라이어마허의 사상이 경험론적인 방향으로 전개된다는 사실을 뜻한다.

슐라이어마허는 의식의 철학적 반성에 의한 결과를 이용해서 1799년에 종교의식을 설명했다. 그런데 종교는 지식과, 또한 행위와 완전히 구별되어야만 한다. 이 중에 한 가지는 종교의 독립 보장이 종교적 직관과 감정의 내용에만 관계된다는 전제하에서 또 하나의 다른 것과 일치될 수 있다.

슐라이어마허에 따르면 이 내용은 순전히 개인적인 것이다. 이로서 철학적 비판을 자극한 문제가 불거지게 된다.

헤겔은 종교와 철학이 관계에 대해서, 그는 종교가 자신을 고양시켜 나가야 할 무한한 생명을 철학과는 달리 종교에만 해당되는 것으로 간주했다. 왜냐하면 철학은 반성함으로써 대립의 영역으로 움직여 가는 반면에 종교에서는 그 대립이 지양되기 때문이다.

슐라이어마허는 최고지 개념을 그 토대로 삼았다는 점에서 셸링과 견해를 같이했다. 그러나 이런 최고지(知)에 의해서 이제 그 밑에 자리하게 될 지식의 자리가 규정되어야 했다. 여기서는 지식과 존재가 서로간에 상관적인 관계를 형성할 뿐이다.

슐라이어마허의 경우에는 이 문제가 셸링과 다르다. 최고지는 그것과 동일한 최고 존재를 간단하게 표현한 것으로서 우리 의식에서 직접적으로 나타나게 아니다 오히려 다른 지식의 내적인 토대와 그 원천으로 나타난다고 했다.

슐라이어마허는 관념과 실재 사이의 절대적인 무차별점을 직접 지성적으로 직관해야 한다는 셸링의 주장에 대해서 침묵으로 일관했다. 셸링에 따르면, 이 무차별점이 바로 철학의 원리이다.

슐라이어마허에 따르면 이와 달리 '물적 존재와 정신적 존재 사이의 대립이, 자연과 이성 사아의 대립이 지식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관념과 실재의 근본 대립에 상응한다. 따라서 지식의 목표는 자연과 이성이 완전히 관철되고 일치를 이루는 것'이다고 했다.

이에 상응하는 주요 학문은 단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자연학이며 다른 하나는 이성학이다. 자연이 이성이 되려면 물리학이 필요하며, 이성을 통해서 자연이 관철되려면 윤리가 필요하다. 이 윤리는 단순한 당위가 인간 이성이 실제로 자연에서 활동하는 것을 그 대상으로 하며 따라서 역사학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지식학에서 이론적인 철학의 자리는 어디인가? 이론적인 철학은 '세계 지혜'의 관념에서 윤리적 지식과 물리적 지식의 구체적이고 상반적인 '관철'로부터 눈을 돌려 '변증법'이라는 형태만을 주목했다.

슐라이어마허는 이 변증법을 '최고지의 내용이 빠져버린 모사(模寫)라고 일컬었는데, 이것은 양자 안에서 서로 다른 것만큼의 진리일 뿐이다는 것이다. 즉 윤리학과 물리학이 차이만큼 말이다.

1804년 슐라이어마허는 셸링을 비판을 다음과 같이 제기했다. '대상의 무차별점이 과연 실재 학문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왜냐하면 모든 유한한 지식은 '갈라짐과 분리'의 영역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셸링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신학은 슐라이어마허에 의해서 절대적이고 신적인 본질에 직접 중재되는 학문이 아니라 이해되었다. 이것은 무차별점을 객관적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슐라이어마허에게서 이런 '변증법'은 다른 관념론적 체계 내에서 절대 학문이라는 자리에 등장했다. 모든 유한한 존재의 토대인 절대는 이론 학문의 대상이 아니라 실증적 종교에서 구체적인 형태를 획득한 것처럼 종교적 의식(意識)이 대상이다.

따라서 지식은 가장 보편적이며 모든 것을 포괄하는 대립의 지양으로, 즉 관념과 실재 사이에서 벌어지는 대립의 지양으로 진술된다.

관념과 실재 사이에 있는 가장 첨예한 대립에 상응하는 것은 주관적 측면에서 볼 때 우선적으로 감각과 오성의 차별이며 또한 오성의 내부에서는 판단과 개념의 차별이며, 개념의 측면에서 볼 때는 특수와 보편 사이의 차별이다.

앎 안에 있는 의식의 대립을 극복하기 위한 최상의 조건은 이러한 대립을 피안적으로 전재하는 토대다. 따라서 그것을 하나로 묶어주는 '초월적인' 토대다. 이러한 단일성의 토대는 앎을 향한 모든 노력의 토대이며, 따라서 모든 논쟁의 피안에 자리하게 된다.

모든 앎은 슐라이어마허에 이해서 '종교적'이라고 불려진 '절대와 최고에 대한 의식'에 기초하고 있다. 이런 앎을 우리는 모든 개체들이 소급해 돌아가야만 할 토대로 알고 있다. 셸링과는 반대로 슐라이어마허는 우리가 우리의 사유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지식과 사고가 존재의 이런 초월적 토대를 적당하게 규정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사유는 늘 이미 앞서 논쟁이 벌어진 상대적인 대립과 연결되어 있는게 틀림없기 때문이다. 근원이 최고 개념에 해당되는 존재로, 또한 모든 현상에 작용하는 능력으로 생각된다면, 이것은 한편으로 능력과 현상의 상관설 때문에 근원을 무조건적인 것으로 생각할 수 없는 범신론이 될 것이다.

존재의 일치를 바라보는 관점은 무엇인가를 판단할 때, 사유규정에 상응하는 것인데, 이 관점 역시 무한자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운명과 섭리를 상호 대립적으로 표상할 뿐이다. 이러한 모든 양식들이 '대립 영역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로는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앎 대신에 의욕으로부터 칸트와 일치할 수 있는 토대를 놓아보려고 하더라도 별로 좋아지지 않을 것이다. 모든 앎의 '초월적 토대'가 사유의 그 어떤 양식에서도 적합하게 표현될 수 없다면, 인간의 자기 의식에서 이 토대에 상응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즉 감정의 직접적인 자기 신뢰 안에서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이 감정은 의식의 모든 기능과 대립을 뛰어넘는 것인데 여기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제한되며, 규정된다'. 따라서 우리 안에 있는 초월적 토대를 대표하는 감정은 의존감정이며, 이로써 종교적으로 규정된다.

그러나 종교의식은 초월적 토대를 결코 순수하게 지시하지 않고, 오히려 대상적으로 규정된 의식과의 연결에서만 제시한다. 직접적인 자기 의식과의 혼합은 결과적으로 종교 의식 안에서 초월적 토대의 인간화를 달성한다.

따라서 초월적 토대와 근사한 사유의 양식들은 감정 안에 현재하는 초월적 토대를 보충하는 것으로서 그 상징적 가치가 있다.

슐라이어마허가 사유를 통해서 얻어지는 초월적 토대의 구체성에 대해서 논쟁을 제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초월적 토대에 근거한 '앎'을 주장했다. 여기서 관권이 되는 문제는 초월적 반성의 결과이며, 무조건적인 것에 대한 질문 형식이다.

사유에 대한 슐라이어마허의 설명은 이 양자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 그의 설명은 실제로 오성개념과 판단에 통한 감각인상에 대한 작용만이 주제화하기 때문이다. 슐라이어마허에 의해서 주장된 '사유의 한계'는 우선적으로 오성에 대한 사유에서 파생되는 한계다.

무조건적인 것을 목표로 하는 이성개념은 이미 칸트가 말하는 의미에서 이러한 오성 사유와 구별되어야만 했다. 슐라이어마허 가 초월적 토대에 대한 생각으로 오성적 사유의 영역을 뛰어넘어 버렸지만, 그래도 그는 모든 사유를 이런 조건이나 대립과 연결시켜 놓았다.

슐라이어마허의 사유와 헤겔의 사유가 다르다는 사실의 토대는 바로 이런 점에 있다. 왜냐하면 헤겔에 따르면 오성 개념의 본질은 반성을 통한 대립을 자기 자신 안에서 통일시키며 또한 동일성과 비동일성의 동일성을 명확히 한다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이 연결이 생명을 생산한다고 보았다. 절대를 표현하는 양식으로 등장된다.

헤겔은 1807년 '정신 현상학' 서문에서 이 동일성 문제를 독단론적인 회의가 아니라 방법론적 회의하고 묘사했다. 그것은 곧 현상적인 의식의 전체 주변을 지향하고 있는 회의주의이다. 더구나 이 양자의 배경에는 철학적 사유의 예술론이 감당해야 할 과업이 있는데, 이 예술론은 절대와의 관계에서 유한성의 형식을 제시하는 것으로서 학문적 회의주의와 별로 다를 게 하나도 없다.

슐라이어마허의 변증법에도 예술론이 나오는데 이 변증법에서 설명되는 예술론은 오성 사상의 일방성을 그 대립적인 면에서 확립하며, 또한 그 일방성을 그 대립적인 것과 결합시키거나 그저 대립적으로 관철시켜 나갈 뿐이다.

헤겔의 정신 현상학은 예술론이 아니라 의식(意識)학인데, 이 의식학은 진리를 향하려는 생각과 사실적인 내용 사이의 대립을 늘 새롭게 반성함으로써 자기를 이해해 보려는 길이다.

따라서 의식의 자명성을 새롭게 형태화할 때 대립이 그에 앞서 발생되는데, 이 대립을 지양하기 위한 방법의 매 단계마다 슐라이어마허와의 차이가 드러난다. 자기의 진리를 드러 내려고 의도한다는 점에서 그런 차이가 드러난다는 말이다.

슐라이어마허와 헤겔은 양자 모두 셸링과 달리 절대의 '직접적인 직관'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식의 기능과 내용을 반성하는 것에 몰두했다. 물론 바로 이런 일에 대해서 진리와 작용하는 것과의 관계에서 말이다.

슐라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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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683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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