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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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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중기 관념론성경신학-

19 중기 관념론
이근호 2004-02-29 18:36:53, 조회 : 405, 추천 : 68
그러나 하이데거는 딜타이에 의해 규정된 생의 표현으로서의 비판과 방법에 대한 해석학적 정당성의 문제를 무시해 버렸다.
하이데거가 무전제적 출발점을 전(前)이해적인 방식으로 대체할 때, 니체, 프로이드, 마르크스는 '전이해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비판적인 물음을 제시하고 있었다.
신학적 해석학의 영역에서 에벨링Gerhard Ebeling(1912-)은 해석의 중심 문제가 말씀사건에 동반하는 이해론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말씀 사건의 이해는 언어 자체에 관한 이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통한 이해'가 중요하게 부각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언어와 사유는 상호적이다. 왜냐하면 언어경험은 언어에 대한 사유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언어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 안에서 움직인다.
언어 안에 있는 존재로서 인간은 언어가 우리에게 드러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언어에 대한 진정한 경험을 통해 인간은 변형된다.
계몽주의 철학의 의미의 경험은 주체가 대상을 만나고 그것을 알게 될 때 발생한다고 말해 왔다. 니체는 언어를 통해 인간적 세계를 창조하는 예술가로서 인간을 고양시켰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언어를 인간의 존재를 넘어서서, 객관적이지도, 주관적이지도 않은 신비와의 만남을 향해 열어놓는다. 물론 하이데거는 '세계 내의 삶'을 넘어서 있는 본질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하이데거의 언어의 문제는 이제 그의 제자인 가다머Hans-Georg Gadamer(1900-2002)를 통해 해석학적으로 정초된다. 딜타이를 추종하면서 가다머는 해석학을 철학적 문제로 취급한다.
세계에 대한 인간의 경험에 주목하면서 그는 칸트의 질문, 즉 이해는 어떻게 가능한가를 다시 제기한다. 니체와 하이데거를 추종하면서 가다머는 근대의 해석학이 합리성에 집착하는 것을 비판한다.
특별한 관점이나 방법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무시간적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더욱이 이러한 진리는 과학적 절차를 통해 발견되기를 기다리지도 않는다. 슐라이어마허가 말하는 해석자가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과거를 실제 있었던 대로 발견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더욱이 딜타이가 내린 결론, 즉 해석자가 전체 역사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것 역시 잘못된다.
주체는 계속해서 세계 내의 의미를 발견하는 근거가 아니다. 왜냐하면 세계는 하나의 참된 의미를 갖는다기보다는 다양한 의미들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객관주의를 회피하면서 가다머는 그렇다고 해서 니체와 같은 관점주의적 상대주의에 동의하지도 않는다. 객관주의와 관점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가다머는 하이데거의 '세계 내 존재' 개념에 주목하다.
인간실존은 세계 안에 존재하며 역사적이다. 세계 안에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역사적 컨테스트를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세계의 각각 다른 장소들에 존재하기 때문에 세계에 대한 다른 해석과 관점들을 발견시켜 나간다.
역사는 우리를 포용하고 있는 끊임없는 과정이다. 그러나 이것은 상대주의로 끝나야 하는가? 서로 경쟁적인 해석들의 소용돌이 속에서 공동의 실제는 전통이며 언어이다. 이 공동의 차원을 근거로 우리는 '지평들의 융합'을 경험할 수 있다.
지평융합을 근거로 의미는 텍스트와 해석자 사이에 벌어지는 대화, 즉 '해석학적 대화'를 통해 나타난다. 대화의 목표는 저자의 지평과 해석자의 지평을 교차시키는 데 있다.
텍스트의 의미는 저자의 의도나 독자의 이해에 제한되지 않는다. 텍스트에는 하나의 의미만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해석이 정확하다고 말할 수 없다. 세계의 대한 우리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언어적 관계다.
의미는 세계 내에 내재해 있는 것도 아니며, 데카르트적 자아가 발견하기를 기다리지도 않는다. 오히려 의미는 해석자가 세계라는 텍스트와 대화를 시작할 때 발생한다. 끊임없는 해석학적 대화는 해석자와 세계 사이의 지평들을 융합하는 수많은 경험들을 낳게 한다.
가다머는 여기서 한 결음 더 나아가 텍스트와의 대화란 주체적으로 독자가 주도권을 쥐는 사건이 아니라, 독자가 텍스트에 참여하는 게임으로 본다. 게임하는 사람은 게임을 끌어들이는 것은 게임 자체다.
우리가 언어의 게임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게임이 우리에게 말을 건다. 가다머의 해석학을 통해 이제 언어 철학의 문제는 포스트모던 사유에 깊은 관련을 갖는다.
특히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게임에 중요한 통찰을 열어 놓았다. 그것은 다름없는 언어란 사회적으로 구조된다는 생각이었다. 그의 의하면 개별적인 언어사용은 게임 하는 것과 비슷하다.
언어를 사용하기 위해 게임에 연관된 규칙과 용어들의 중요성을 알 필요가 있다.
개별적인 언어사용은 서로 다른 언어게임을 사용함으로써, 언어의 외부에 존재하는 객관적 실제성에 대한 이념을 포기하게 된다. 비트겐슈타인은 진리와 실제가 상응하는 것을 거부한다.
언어의 의미는 언어가 쓰여지는 상황에 즉 언어게임에 의존된다. 문장들은 그러므로 컨텍스트 만큼이나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논리적으로 볼 때 진리에 대한 궁극적 진리는 언급될 수 없다.
말이 쓰여지는 상황 안에서만 참되다는 진술이 산출될 수 있다. 언어를 게임으로 특징짓는 것은 언어란 개인적인 의미를 갖는다는 생각에 비판을 가한다. 언어는 개인적인 현상이 아니라 개인이 세계에 대한 진리를 표현할 때 나타난다. 이러한 관찰은 포스트모던 언어이론의 기반을 이룬다.
신학 쪽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이란 이해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이해를 열어주고 매개시킨다. 그러므로 말씀이 사건화 되는 곳에서 이해가 가능해진다. 해석학은 말씀과 관계함으로써 사회적 현실과 관계된다.
그리고 이 현실은 말씀을 통해서 이해된다. 여기서 우리는 슐라이어마허 이후 신학적 해석학에서 잊혀져 온 해석학의 '사회적 기반'을 에벨링의 시도를 통해 얻게 된다.
해석학이 하이데거에 의해 칸트 이후 주객도식의 형이상학적 이원론의 극복이라는 과제를 가지고 시작되었을 때, 블트만R. Bultmann(1884-1976)은 특히 이 개념을 자신의 실존주의 신학에 유용화하면서 핵심적인 의미를 갖게 했다.
또한 하이데거의 인간 현존재 분석은 성경이 말하는 죄와 죽음 아래 서 있는 인간에 대한 기술과 상응한다. '나의 실존의 비본래성에서부터 어떻게 본래성을 향해 결단할 것인가?' 하는 불트만의 물음은 하이데거의 현존재 해석에 대한 신학의 반향이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인간 실존이해에 가장 적합한 개념을 불트만에세 제공한다. 실존철학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인간의 비본래성을 깨우치게 하며 여기서부터 자기실존을 책임 있게 결단함으로써 그의 본래성에 이르도록 요구한다.
불트만은 해석학의 문제에서 인간 실존의 전이해는 해석학의 필수불가결한 요소임을 밝힌다. 본문에 대한 질문은 인간존재의 잠정적인 이해, 다시 말해 실존이해에 의해 유도되며, 이러한 전이해와 여기에 동반되는 질문 없는 본문은 침묵할 수밖에 없다.
실증주의적 역사주의와는 달리 실존론적 해석한은 역사를 실존의 역사성에서 파악하는 점에서 주객도식 관계의 이원론적 세계관을 극복한다.
역사의 원천 속에는 인간실존의 결단과 자유로운 가능성들이 표현되어 있다. 결국 역사 중심 테마는 인간실존의 가능성으로 파악되며 여기서 우리는 포이에르바하의 종교비판-'신학의 비밀은 인간학'-이나 인간의 전이해에 정치 사회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이데올로기(종교)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하나님의 인간성'이나 또는 '인간의 인간성'이 아니라 불트만에게는 인간의 '실존적인 역사성'이 그의 해석학의 중심으로 등장한다. 바르트는 불트만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인간의 문제가 함께 설정되어 있음을 본다.
바르트 K. Barth는(1886-1968) 후기 '교회 교의학'의 화해론에서 '로마서 주석'에서 나타나는 해석학과 사회분석의 통합 개념인 하나님의 혁명론을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의 현실 안에서 더 깊이 있게 해석학적으로 독해한다.
바르트 자신이 1956년 강연에서 시인하듯이 자신의 초기적 관심을 붙들고 있던 전적 타자로서의 하나님은 너무 지나치게 절대화됐고, 추상화되었으며, 그의 하나님 이해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보다는 철학의 초월적 하나님에 좀더 근접하지 않았는지 우려한다.
이 하나님의 신성을 말하는 것은 그의 인간성을 말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인간성을 말하는 것은 기독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과 인간 관계의 화해론적 회복은 하나님은 인간의 '자리바꿈'에서 발생한다. 고린도후서 5:18-21에 의해 이러한 자리바꿈은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받아들였으며, 죄인과 완전한 연대를 이루었다는 데 근거한다.
자리바꿈의 또 다른 측면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담당했다는 의미에서 이제 인간은 하나님과 의로운 관계에 놓여졌다는 데 근거한다. 인간의 세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게 방향 전환되었다.
바르트는 이러한 자리바꿈의 역동성과 하나님과 인간, 세계와의 파트너쉽의 관계를 세 가지 주제 아래서 다루어 나간다. 첫째, 종으로서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둘째, 주님으로서 종이신 예수 그리스도, 셋째, 참된 증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그것이다.
종이 되신 그리스도에 관한 신학적 언급에서 인간의 죄악 된 세상에 나갔던 하나님의 여정을 설명하기 위해 탕자의 비유를 은유로 사용한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를 위해 순종의 길을 취했다. 이 순종의 길은 신약성경의 표현을 빌어, '자기를 비우심', '종이 되심', '겸허하심', 십자가에 달리심', '고난' 등으로 표현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수납은 스스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서 있는 죄인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르트에 따르면 이것은 '그리스도의 신성'이다.
그리스도의 신성은 아들의 순종이며, 겸허를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전히 주권적인 하나님으로 계신다. 이런 관점에서 바르트는 '성부 수난설'로 인용할 수 있는 케노시스 기독론(신성 포기 이론)을 승인하지 않는다.
바르트의 표현을 빌면 하나님은 스스로 대항하여 존재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바르트에게 미친 루터의 십자가 신학을 만나게 된다.
인간의 죄를 담당한 하나님의 겸허를 다루는 데 비해 주님으로서 종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화해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모델이라면 그는 또한 화해된 인간에 대한 모델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인간성'과 더불어 '인간의 인간성'이 매우 역동적으로 다루어진다.
하나님과 인간의 계약의 갱신과 회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낮아지심과 인간의 고양됨이라는 '자리바꿈'에서 가능하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인성과 신성의 역동적 연합은 칼케돈 신조에서 드러나는 알렉산드리아 신학의 과도함에 대해 자기방어를 한다.
이 연합은 모든 인간의 본질과 모든 인간성에 영향을 미친다. 그런가 하면 안디옥 학파의 신학에 대항하여 바르트는 인간 본질의 어떠한 요소도 이러한 연합에서 배제되거나 영향을 벗어날 수가 없다고 밝힌다.
인간성의 고양은 인간성의 파괴는 변경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심지어 우리와 같이 되었다는 점에서도 여전히 우리와는 다른 차원을 지적한다.
여기서 바르트는 기독론적인 인성과 인간학적인 신성을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역동적인 사랑의 행동으로 파악하기를 원한다.
그의 관심은 하나님의 인간성과 인간의 인간성의 문제를 사회적으로 연관지음으로써 그의 신학의 성격을 사회비판적인 해석학으로 전개해 간다.
지금까지의 해석학의 내용적 사실에 관한 '이해방식'을 중요 과제로 삼았다면, 바르트의 관심은 자유주의 신학과 문화 개신교와는 달리 '신학의 내용적 사실'로 되돌아가길 원했다.
다시 말해 역사나 심리학과는 구분되는 신학의 특수한 것을 바르트가 말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신학의 사실적 내용이나 사실성에 관한 논쟁은 역시 역사 해석학적 프로그램을 전제할 수 밖에 없다.
칼 바르트는 사회적 상황을 향한 말씀과 내용을 향한 말씀으로 구분 짓고 신학의 실존은 모든 정치 사회적 상황에 필연적으로 연관되어 있으며, 이 연관성을 신학의 사실적 내용에 해석학적으로 매개하려고 했다.
다시 말해 성경적 진술은 일차적으로 성경적인 상황과의 주석적으로 취급되지만,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성경과 우리의 시간적 간격을 뛰어넘는' 해석학적 매개와 실천을 통해 시대적 상황을 위한 말씀으로 동시에 피악 되어야 한다.
여기서 바르트는 신학의 사실적 내용, 예를 들어 계시와 같은 개념은 단순히 객관적이며 무시간적으로 주어진 형이상학과는 상관없는 것임을 밝힌다.
신학의 사회사적인 실존 속에서 바르트는 모든 교회학적 진술들- 예컨대 신론, 기독론. 교회론 등 -을 역사, 사회적인 것으로 파악했고 동시에 교회에 위임된 실천적인 과제로 이해했다. 이런 관점에서 바르트는 해석학적 신학에 필수불가결한 실존개념을 포기하지 않는다. 신학의 정치사회적 실존을 통해 바르트는 하이데거- 불트만의 개인주의적 실존론적 신학과는 다른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인간성 문제'를 해석학적으로 해명함으로써 그의 교의학적 진술들을 히틀러에 대한 저항과 정치해방의 운동에 연관지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바르트의 해석학적 관심은 불트만과는 달리 그의 초점은 인간의 정치 사회적 조건에 맞춘다. 이 조건은 사회, 역사, 문화, 종교적인 총체적 인간의 삶의 자리를 의미한다.
인간의 본성에는 거룩한 것을 단순한 객체로 고정시키고 우상으로 변조해 버리는 악의 경향, 즉 신화론적인 경향이 있다. 틸리히P. Tillich(1886-1965)의 언어로 언급한다면 이러한 경향은 종교의 성례적 차원의 타락을 말하는데, 이 차원이 마술적인 것으로 전락해 버릴 때 이에 대한 비판으로 신본주의적 윤리-예언자적 운동이 발생하게 된다.
틸리히(1886-1965)에게 있어서는 신학이 전통적 기독교 교리와 현세계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성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신학의 기능은 세속 철학에 의하여 제기된 인간의 본질과 운명에 대한 질문들에 대답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 초점은 인간의 궁극적 관심사이어야 한다. 이 말은 신학은 신학이 인간과 그의 환경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해 세속 세계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된다 는 뜻이고, 세속적 자기 이해에서 야기된 궁극적 질문을 설명함에 있어서 전통적 교리를 현대적 용어로 풀이해야 된다는 것이다.
틸리히는 신학이 이성보다도 높은 지식의 원이 된다는 것을 부인하였다. 그는 또한 카톨릭이 주장하는 대로 계시는 특수한 타입의 교리적 지식이라는 것도 부인했다.
틸리히의 체계에서는 계시도 초자연적 근원에서 받은 진술된 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즉 계시는 어떤 사상이 아니고 어떤 사건을 말한다.
계시에는 객관적인 면과 주관적인 면이 있다. 객관적으로 계시는 하나의 표징사건, 즉 하나님의 신비적 실재를 가르치는 하나의 사건이다. 주관적으로 계시는 매혹적이면서 경외의 감정을 일깨워 주는 하나의 사건이다.
사람이 계시의 경험에 맞부딪치게 될 때 황홀경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 무아의 경지에서는 보통 주체와 대상의 분간을 초월하게 된다.
계시에서 얻은 지식은 우리의 세계나 역사나 또 자신에 대하여 이미 알고 있는 지식에 아무 것도 더 보태지는 않는다고 틸리히는 주장한다. 계시는 사실상의 보도를 나누어주는 것이 아니라, 계시가 하는 일은 하나님의 신비적 임재와 능력을 우리에게 깨우쳐 알게 한다.
그래서 과학적으로 역사적으로 맞는 이치와 계시 사이에 상충이 있을 수 없는 것은 그 둘의 내용이 다르기 때문이다.
틸리히의 신관은 그가 왜 전통적 신학의 용어를 포기하려 결심했는가를 잘 예증한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성경적 용어를 사용하는 대신 그는 '존재의 심연', 즉 끝없이 깊은 것으로 설명한다. 때로 틸리히는 '존재의 자체'로서 하나님을 설명한다.
사도 바울이 아테네 사람들에게 한 설교 가운데서 말했듯이 하나님은 그 안에서 우리가 생하고, 동하고, 우리의 존재를 소유하게 하는 분이다.
틸리히의 신관을 독일의 자연 신비주의에 바탕하고 있다. 하나님은 보통 이성을 통해서는 알 수 없으나 우리 안에 계시고 또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다.
하나님은 무제약적 존재이시며 다른 것에서 분리되지 않고, 모든 존재하는 사물과 인간의 원천이요 근거다. 그러므로 틸리히는 하나님이 하나의 인격이라는 것을 부인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한정하기 때문이다.
또 그는 존재라는 말의 보통 의미에서는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부인한다. 왜냐하면 존재한다는 것은 그의 실재를 조건 지어놓기 때문이다. 그의 견해를 전통적 정통주의의 개념과 대조하여 틸리히는 '하나님 위에 계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였다.
틸리히는 인생의 목표를 인간의 본성이 실존적 초월을 거쳐서 본질화를 완성하는 과정으로 해석한다. 여기서 그는 기독론을 제시한다.
그리스도는 '새존재(New Being)'의 지참자이시다. 존재는 하나님의 말하는 것이므로 새 존재는 신의 능력과 임재가 차원 높이 현현된 것을 뜻한다. 신적 인간의 성취를 입증하는 것이다.
틸리히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죄인을 대신하여 고난을 받는 희생의 제물이나 대속물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어떻게 인간의 본성이 성취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 것이다. 바울이 기록한 대로 그리스도는 제2의 아담이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첫째로는 전적 자기 희생의 생애로서 역사상 모든 치유 과정의 표준을 세웠다. 둘째는, 그의 생애는 인간 자신들의 삶에 있어서 실존적 소원을 극복하기 위하여 그와 연합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능력을 부여한다.
틸리히가 종교를 세 가지 차원으로 조성된다는 것으로 보았다. 즉 성례전적 기반, 신비적, 예언자적 차원이 그것이다. 구체적인 정신의 종교의 차원에서 신율적 요소가 발생한다-를 그의 문화해석학의 중요한 방법으로 고려한다면 바르트는 초기의 신화와 우상을 만들어 가는 인간의 사회 문화적 이데올르기에 대한 비판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바르트에게 의미 있는 것은 살아있는 것을 죽어버린 객체로 만들어 버리는 악마적인 경향을 폭로하고, 그 비판을 통해 새로운 의미로 회복시키는데 있다.
이 과제를 위해 의심의 대가들이었던 니체, 포이에르바하, 마르크스의 해석학의 사회적 차원과, 이미 실존의 전이해에 영향을 주는 신화론적인 이데올르기에 주목하게 된다.
불트만의 실존론적 해석학은 바르트에 의해서 사회, 역사적 지평으로 수정되고 확대된다. 하나님은 만유 안에 계시며 인간존재의 총체성에 관심 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존재는 현실을 새롭게 조명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세계에 속한 모든 것들을 변혁하신다.
하나님의 존재는 개인의 내적 종교성에 대한 단순한 갱신이 아니라 현실세계의 변혁을 의미한다. 정치, 문화, 자연은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변혁의 대상이 되며, 동시에 화해의 대상이 된다.
이것은 바르트가 표현하려는 사회에 대한 신율적 차원이다. 적어도 인간은 하나님을 떠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인간을 버리지 않는다.
베르그송Bergson(1859-1941)은 생명을 철학적으로 이해해보고자 애를 썼다. 생명 현상에 대한 심리학적인 전말과 육체적인 전망을 통합하고 이로써 진화를 이해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해보자는 것이었다. 그는 이런 노력을 통해서 리얼리티 일반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발전시켰으며. 이로써 화이트헤드Whitehead(1861-1947)의 업적에서 정점에 도달한 과정 철학의 출발점이 되었다.
여기서 베르그송은 인간의 자기 경험에서, 특히 시간 경험에서 생명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입구를 발견했다. 이런 점에서 그의 철학은 자연철학에 대한 인간학적 단초의 확대라고 설명될 수 있다.
화이트헤드의 경우도 이와 비슷했다. 이들의 인간학적 출발점을 통해서 이들의 과정 철학적 형태는 자연철학의 다른 형식들과 구별되었다.
베르그송은 처음부터 허버트 스펜서Spencer(1820-1903)의 진화철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그는 '이 체계에서는 시간이 아무 의미가 없었다'는 사실을 느끼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는 스스로 이렇게 물었다. '인간이란 사실은 사물의 가장 내적인 것이 미결정적이라는 점을 증명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리고 시간은 바로 이런 불확정 자체가 아닌가?'
베르그송은 의식의 직접적인 소여성에 대해 연구한 이 첫 책에서 인식을 위해서는 분석적 오성 이외에 혹은 그 이전에 직관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직관 형식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시간 내에 있는 실제적인 것의 단일성이다.
우리 지각의 단일성만이 아니라 생생한 리얼리티 자체도 주어진다. 지속이라는 형식을 갖고 있는데, 그 지속은 변화와 대립되어 있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부단히 변화하며, 이로 인해서 확실히 새로운 것을 생산해내는 것을 말한다.
베르그송의 생각에 따르면 시간의 연속은 영속적인 상태의 변화로 이해되어야지 고립된 순간의 연속으로 이해되면 안 된다. 그것보다 우리는 시간을 계속해서 흘러가는 강물로, 과거의 돌진으로 경험한다.
과거는 미래를 갉아먹고, 돌진함으로써 팽창한다. 기억은 바로 우리의 생명 역사가 걸어온 이러한 축적이 저장하는 장소다. 분명히 우리는 우리가 걸어온 전체 여정을 확실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우리의 생각은 기억된 것을 선택적으로만, 그리고 보관된 것을 기억함으로써만 작동될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무의식적일지라도 우리의 기원, 의욕, 행위, 그리고 우리를 앞서 몰아가는 경향 가운데서 우리에게 현재 한다.
이 경우에 '경향'이라는 표현은 어떤 목표 지향성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광속의 형식으로 전개되는 폭발력을 가리킨다. 이는 곧 변화와 새로움을 향해서 돌진하는 생명의 충동이다. 그 어떤 구체적 목표도 없이 말이다.
새로움은 역으로 과거와의 단절로 등장하는 게 아니라 그 과거의 변화로 등장한다. 이러한 변화로서의 새로움이 과거와의 관계를 통해서 부분적으로 명확해질 수 있을 뿐이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관찰한 바와 같이 부단한 생성의 형태에서 이루어지는 지속이 우주의 참된 본성이 말하고자 하는 특징이다. 오성 사상은 분명히 지속적인 생성을 등한히 다루며, 다만 외부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객관적 사실을 근거로 해서 상태의 변화만을 주목할 뿐이다.
현실성을 바르게 이해하면 사물과 상태의 전후 맥락에 연결되어 있는 생성의 자리를 확보할 수 있게 된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이런 경향은 우리의 지성이 실제적인 목표를 다룬다는 사실과 연계되어 있다.
인식은 우리로 하여금 외계를 향해서 행동할 수 있게 하며, 또한 앞서 발견된 상태를 변화시킬 수 있게 하는 게 분명하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부단한 생성을 지각 할 수 없게 된다. 그 대신에 우리는 상태와 이러한 상태의 규칙적인 반복을 확인할 수 있을 길을 모색한다.
지성을 이렇게 구성하는 질서는 공간 안에 있는 상태와 사물의 질서이며, 기하학적 질서다. 이 질서는 모든 연역의 기초가 되며, 또한 경험지식에서 야기된 모든 법칙성의 기초가 된다. 이 양자는 '시간은 셀 수 없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왜냐하면 사건은 매순간 동일한 규칙을 따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르그송에 따르면 이러한 자연 이해는 인공적인 구조이며, 실제로 계속적인 생성의 성격을 띤 현실성을 추상적으로 제시하는 것인데, 이것은 줄곧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발생시킨다.
한 장의 사진을 촬영하듯이 상태의 단순한 연속은 그 어떤 운동도 일으키지 않는다. 우선 관찰자는 여기서 상(像)의 연속을 연관된 것으로 경험하게 하는 시간 의식을 통해서 그곳에서 운동을 일으킨다.
그러나 실제로는 연속적인 생성은 근원적인 것이며, 분리된 상태의 연속적인 상이다. 이것은 추상적인 산물과는 다른 것이다. 물론 창조적인 생성 이외에도 생명의 형태가 진행되고 있다. 이 진행은 생명의 창조력이 무기력해지는 곳에서 일어난다.
자발성, 에너지, 그리고 자유가 상승하는 방향으로 생명이 진화된다는 것은 엔트로피 법칙을 통해서 묘사된 우주론적 과정의 방향과 대립해 있다. 후자가 균일한 열의 상태(즉 열의 정기) 가운데서 결국 에너지의 흐름을 하부로 균등히 하는 반면에, 생명의 진화는 에너지의 축적을 통해서 상부로 진행된다.
복합성을 증가시키고 자유를 성장시키는 쪽으로 말이다. 베르그송에게 생명의 진화는 무기적(無機的) 과정의 경향이 전환되는 것이다. 이런 무기적 과정이 이에 해당되는 무게를 유인하게 된다면 생명은 그 경사를 타고 다시 올라가려는 노력을 가울일 것이다.
생명의 진화는 물질의 본질을 나타내는 엔트로피가 쇠퇴하는 경향과 반대 방향으로 운동하는데, 이 운동의 상은 많은 사상가들에게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 생명 과정이 엔트로피 아래에 놓여 있지 않은 것 같다는 오해가 일어났다.
오늘날 유기물에서 복합성이 증가가 환경 가운에서 이루어지는 엔트로피의 축소를 통해서 균일화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생명과정은 환경의 잠재성을 통해서 유지된다.
베르그송에게는 사건의 부단한 새로움은 이미 시간 경험을 통해서 주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우연에 대한 견해를 반대하는 주된 이유는, 이런 개념이 정적(靜的)으로 굳어진 형식에 대한 표상을 보충하는 것으로 작동했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나 생성의 진행에 등장하는 새로움을 어떻게 보다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가 하는 실제적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생성의 연속성을 손상시키지 않고 그 생성에서 발생하는 형태들을 구별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담겨 있다.
즉 베르그송도 역시 주장했듯이 그저 단순히 공간적인 오성의 착각 안으로 축소될 수 없는 구별이 관건이라는 말이다.
새뮤얼 알렉산더와 화이트헤드는 바로 이런 점에서 베르그송을 극복했다. 화이트헤드의 경우에 베르그송은 고전 물리학을 통한 자연과정의 공간화를 올바르게 반대했다는 점에서 중요했다.
화이트헤드는 자연을 생성의 과정으로 보는 베르그송의 고찰에 대해서 동의했다. 비록 화이트헤드가 다층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시간 개념이 아니라 과정의 의미에 더 큰 강조점을 두고 있었지만 말이다.
알렉산더나 화이트헤드 양자 모두 자연과정 가운데서 연속적이지 않는 것의 계기를 베르그송보다는 훨씬 강조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그럼으로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사건은 분리에서 연결로 나아가며, 이럴 경우에 새로움이 발생한다. 연속성은 리얼리티를 확인해주는 첫 번째 요소가 아니라 다수와 연결됨으로서 인하여 발생하는 결과다.
새뮤얼 알렉산더(1859-1938)는 이미 비연속적인 소여가 상위(上位)라고 주장한 바 있는데 공교롭게도 시간 개념과의 관계에서 그렇게 주장했다. 알렉산더는 시간을 대자(對自)적인 의미에서 비연속적인 순간의 연속으로 간주했다. 여기서 이 순간이라는 것은 우선 공간이 비여 있기 때문에 대자적으로 결코 그 어떤 연속체를 만들지 못한다.
그런데 시간은 차이를 가져오고 공간에 참여할 수 있으며, 또한 공간을 통해서 자기 입장에서 연속적인 진행이라는 성격을 얻는다. 왜냐하면 모든 시간적 계기는 상이한 장소에 공동적으로 나타날 수 있으며, 역으로 잇달아 발생하는 상이한 시간적 계기는 같은 장소에서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베르그송은 시간의 공간화를 오성의 작업이라고 판단했으며, 더 나아가서 전통적인 실체 형이상하의 오류에 책임이 있다고 했는데, 알렉산더에 따르면 이 시간의 공간화는 시간 자체의 본질에 속한다.
알렉산더가 말하는 의미에서 시간적 계기의 연속적인 계승은 화이트헤드(1861-1947)의 경우에 비연속적으로 등장하는 생기(events)의 연속이라는 표상과 일치한다. 이 경우에 뒤에 등장하는 사건들은 앞서 등장했던, 그리고 그렇게 발생했던 지속을 반복한다.
화이트헤드는 시간의 연속과 구별되는 사건의 공간성을 어떤 분명한 모형(pattern)의 지속으로 돌렸다. 화이트헤드는 베르그송과 마찬가지로 공간에 비해서 시간이 상위라는 점을 확신했으며, 공간성을 생기(生起)의 연속에서 실현된 모형, 혹은 영원한 대상의 귀결이라고 간주했다.
이는 곧 생기에서 실현된 것으로서 그 모형을 형성하는 색, 소리, 향, 기하학적 형식들을 말한다. 다른 한편으로 화이트헤드는 시간 진행의 연속성을 베르그송과는 달리 근원적인 현상이 아니라 끌어낼 수 있는 현상이라고 보았다.
이런 현상은 생기의 연속적인 과정에서 모형이 반복하고 변화는 것에 기초하는 것을 말한다. 화이트헤드의 생각에 따르면 자연사건을 비연속적인 생기의 결과라고 보는 견해는 양자론(量子論)을 통해서 알려진 바인데 여기서 말하는 생기는 그 형식의 반복과 변화를 통해서 진동의 인상을 야기한다.
자연과정은 생기의 연속에서 일어나는 반복과 변화의 연결을 통해서 어떤 창조적인 진보라는 성경을 획득한다. 이것은 베르그송이 말하는 창조적 진화에 해당된다. 화이트헤드는 자신의 개인적인 모습의 변이를 베르그송보다는 좀더 분명하게 이러한 생성의 특징을 연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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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684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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