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1206 부산강의-칼 바르트 녹취
20051206 부산강의-칼 바르트 녹취
이름 : 한윤범(IP:61.73.49.207)
20051206 부산강의-칼 바르트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 유명한 칼 바르트에 대해서 그리고 폴 틸리히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칼 바르트가 화를 내고 있지요. 아주 성을 내고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종교가 문화가 복음이 문화 활동이 되고 말았단 겁니다. 복음이 문화활동이 될 수밖에 없었던 그 당시 이유가 뭐냐 하면, 성경에 비추어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고, 과학적인 이성을 통해서 성경마저 분석하겠다. 이렇게 나오니까 그것은 곧 모든 인간 마음속에 성경이 다 들어있다고 보는 겁니다.
이러한 경우가 심지어 아브라함 카이퍼도 이런 사고방식이 있어요. 아브라함 카이퍼가 이 사람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있는 사람인데, 네덜란드가 자유주의로 변했을 때 이분은, 아브라함 카이퍼 같은 이 사람의 주의는 신칼빈주의라고 하는데, 아브라함 카이퍼의 신칼빈주의의 주장에 보면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성경은 이제 참고도서 밖에 안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도마’라는 그런 단어가 있다면, 도마라는 단어는 사전에 있기 때문에 있는 겁니까, 아니면 도마라는 단어가 있기 때문에 그게 사전에 들어가는 겁니까? 우리 한글사전에. 도마가 있지요. 뭐 문, 광, 이러한 단어들이 우리 속에 있는데 그걸 모으면 한글사전이 되지요.
이건 결국 뭐냐 하면, 사전이라 하는 것은 우리 마음속에 들어 있는 걸 확인할 뿐이죠. 그렇다고 사전 버리자. 사전 찢어버리자. 사전 밟아라. 그럴 필요 없다 이 말이죠. 사람이 세상의 모든 걸 알 수 없잖아요. 제 말 잘 들어보세요.
사람이 인간이 세상의 모든 걸 알 수는 없지요. 알 수는 없을 때 우리가 한국 사람이지만 한국말 제대로 압니까? 모르잖아요. 다 알 수는 없잖아요. 그때 뭘 참고합니까? 한글사전을 참고하면 들어있지요. 성경책이라 하는 것은 성경의 내용이 이미 우리 속에 다 들어있는 거라는 거예요. 그리고 다 들어있으니까 성경 필요 없다가 아니라, 이거는 이제 극단적인 자유주의 쪽으로 나가지만. 그래도 우리가 세상사는 지혜는 알아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러면 성경이 우리보다 똑똑하지요. 똑똑하다는 그런 의미에서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가 된다 이 말입니다.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데 범위 쪽으로 우리가 좀 좁고 인생도 짧고, 성경은 범위 쪽으로 넓은 것뿐이죠.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이미 성경이 다 알고 있는 거죠. 그래서 사전 비유를 잘 이해하시겠습니까? 이렇게 이해되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 속에 없는 걸 성경 속에 있는 건 아니다 이 말이죠.
그렇게 되니까 아쉬울 때만 성경 보면 되는 거예요. 인생의 방향이 뭐냐? 머리 꼬인다 싶을 때 성경 보면 되는 거예요. 아쉬울 때만. 제직회 2/3냐, 과반수 할 거냐? 이거는 성경 찾을 필요 없는 거예요. 뭔가 아쉬울 때만 성경 찾아보면 된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벌써 이러한 사고방식이 쭉 내려왔을 때 그때 칼 바르트는 분노와 화가 나는 겁니다.
특히 칼 바르트 이 시대는 항상 역사가 진보되고, 진보되고 발전되고 발전된다. 이렇게 되는 거죠. 여기서 한 마디 드린다면, 역사가 발전된다 할 때 역사를 끌고 가는 그 주체자가 누가 되느냐 하면, 우리 인간이 되지요. 인간이 역사를 발전시킨다면 결국은 주체자의, 주체자, 인간이죠. 주체자의 심성 내부에서도 계속해서 발전되고 발전되겠지요. 왜냐하면 역사를 주체하는 건 인간이니까. 역사가 발전한다 하는 것은 우리 심성이 지식적이라든지 도덕적이라는 것도 옛날보다는 향상되어 점점 더 증가되어 간다는 겁니다. 역사의 주체니까.
그렇다면 성경에서 이 땅 위에 천국이 임한다는 것은 그거는 천국을 임하게 하는 주체자가 인간이라면 인간 속에 이미 천국이 임하소서가 아니라, 이미 임했다고 보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 속에 천국이 임했기 때문에 역사 인류와 역사와 모든 자연세계가 천국으로 임하게 된다는 그런 명령이 수립이 되고 명령이 성립이 된다는 겁니다.
될 능력도 없는 애 보고 하라 하면, 이건 소용이 없잖아요. 정박아 보고 로켓 만들어라, 컴퓨터대회 나가라 하는 것이 말이 안 되듯이 이미 갖고 있는 능력이 있다는 전제하에 뭔가 천국을 만들어라. 라고 했다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를 복음을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전부다 일리가 있는 거예요. 아이고, 쉽다, 쉽다. 납득이 된다. 참 호소력 있네. 그 뭐 어려울 것 없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이미 하나님께서는 우리 것 다 주고 바깥에 새로 주어지는 게 아니고, 있는 것 잘만 활용하면 얼마든지 자기 인생과 자기 능력껏 발휘될 수 있다 보는 거예요.
특히 아브라함 카이퍼 같은 경우에 이런 소리 했습니다. 잘 들어보세요. 기적은 외부에서 오는 게 아니라 했습니다. 아브라함 카이퍼가. 아브라함 카이퍼가 그런 소리 했다면 못 믿기겠지만 칼빈주의라면서. 기적은 외부에서 온 것이 아니고, 기적은 내부에서 주신 능력만 발휘하면 얼마든지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예수님 당시에 기적이 일어났지요. 제자들은 믿음이 없어서 못 할 뿐이지, 믿음만 있으면 그거 똑같이 해낼 수 있다는 겁니다. 다만 제자들은 믿음이 없어서 믿음이 약해서 그걸 못했는데 이제는 우리는 믿음이 하면 그 초대교회 또는 초대교회나 예수님 당시의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겁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아까 이야기한 성경에 있는 것은 참고로 보라는 거고, 이미 우리 속에는 성경에서 이룰 걸 이미 우리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잘하나 못하나 방향이 올바르냐, 그것만 비교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지, 그 능력은 우리에게 있다고 이렇게 주장하는 거예요. 이게 아브라함 카이퍼의 문화주의, 문화철학입니다.
자, 여기서 좀더 어렵게 한번 해봅시다. 뭐가 어렵냐 하면, 왜 그러한, ‘그러한’이 아니고 그 따위죠. 왜 그 따위 사고방식을 갖게 되었느냐? 그러니까 결국 이게 뭐가 되느냐 하면, 하나님께 기도할 때 현재 내 속에 있는 잠재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 달라. 그런 기도 밖에 없는 거예요. 현재 내 갖고 있는 잠재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자극 주셔서 이미 갖고 있는 내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신에게 기도하는 겁니다.
수능 앞두고 학부모들이 애들 위해서 기도할 때에 하나님, 뭐 모르는 것 알게 해달라고 그렇게 욕심내지 않습니다. 아는 거나 그냥 실수 안하고 그때그때 생각나서 잘 답안 적고 어려운 것은 못하도록 그렇게 하면 그 정도로 만족합니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럼 더 이상 외부에서의 도움은 뚝이에요. 외부의 도움이 필요치 않아요. 이것은 바로 이러한 아브라함 카이퍼나 그 당시의 이러한 사고방식은 뭐냐 하면, 현재 있는 것은 선한 것이라고 본 겁니다.
그런데 쟈크 엘룰은 [뒤틀려진 기독교]에 보면 놀라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선이라고 이야기하는 그것 자체가 이걸 가지고 악이라고 보는 겁니다. 하나님의 선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만 선이지, 인간 속에 품어 있는 것은 그게 선이 됐든 자유가 됐든 뭐, 착한 게 됐든 아름다운 게 됐던 전부다 악이라고 보는 거예요. 쟈크 엘룰은.
인간은 기독교가 도덕주의를 도입할 때부터 기독교가 기독교가 아닌데 복음이 복음이 아니었는데 왜냐하면,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우리가 이상적으로 알고 있는 선을 선으로부터 모든 것을 이야기를 시작하는 그 자체가 이게 바로 근본적으로 악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아브라함 카이퍼나 이런 사람들은 도무지 쟈크 엘룰이, 쟈크 엘룰은 뒤에 사람이니까 그때 안 만났겠지만, 쟈크 엘룰의 이러한 사고방식을 도무지 이해 못할 거예요.
어떻게 예수 믿고 주님의 의로운 것이 우리가 의롭게 되었고, 우린 의의 종인데 의의 종이라면 의를 행할 수 있다는 가능이 있다는 이야기인데, 그래서 의를 발휘했는데 어떻게 악이 되느냐? 그들은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 말이죠.
그 원인은 바로 성경을 신조로 만들었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 거예요. 성경을 신조로 만들면 성경은 버리게 되어있습니다. 성경을 신조로 만들어버리면, 김신조, 그런 신조가 아니고. 성경을 신조로 만들어버리면 성경은 버리고 신조 지키게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신조라 하는 것은 그 공동체에서 결의한 사항이거든요. 그래서 지적으로 수용만 하면 우리 편이 되는 거예요. 어떤 교회에서 신조 만들어버리면 거기 대해서 교인들이 지적으로 동의만 해줘버리면 그 사람이 영적으로 거듭났는지 그거는 알 길이 없으니 그건 놔두고 지적으로 예, 인정합니다. 동의합니다. 하면 그건 완벽한 교회가 되는 거예요.
지적으로 동의가 되어서 그 공동체의 조직원이 돼버리면 구성원이 돼버리면 그 다음에 그 조직에 들어가는 사람은 구성원의 만장일치내지는 2/3 내지는 과반수 1/2만 동의 되면 이 사람도 거기에 구성원이 되잖아요.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직접 동의해서 생긴 이 사람들의 결정이 그 다음에 온 사람들의 뭘 거치냐? 그 사람이 신자냐, 신자 아니냐를 결정짓는 하나의 기준으로 또 작용하는 거예요.
일단 흥분하기 시작하지요. 칼 바르트만 화나는 게 아닙니다.
여기서 아브라함 카이퍼가 왜 이따위 사고방식을 갖게 되었느냐? 왜 문화철학이란 게 튀어 나오느냐? 그것은 바로 성경에서 신조로 만들었기 때문에 더 이상 성경에서 뽑아낼 건 없다고 본 겁니다. 더 이상 성경에 대해서 우리가 모르는 게 없다고 보는 거예요. 이제 성경은 툴툴 털어서 뽑아 낼 거 다 뽑아낸 거예요. 신조 안에 다 들어있는 거예요.
그것도 그냥 신조입니까? 유명한 웨스트민스터 신조 아닙니까? 신조 안에 다 들어있다는 거예요. 성경 안에 더 나올 게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느 놈이든 신조 치지 말라는 겁니다. 왜? 성경 안에서 다 뽑아냈기 때문에. 성경 가지고 신조 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어떤 집에 이사를 할 때 트럭이 있잖아요. 트럭이 있다면 이삿짐을 다 트럭에다 옮겼습니다. 다 옮겼단 말이죠. 짐꾼 보고 다 옮겼나? 예. 아저씨, 다 옮겼습니다. 출발해도 되지? 출발해도 됩니다. 내가 한번 들어가 볼까? 들어갈 것 없습니다. 왜? 내가 다 옮겼다니까요. 그래도 들어가 봐야지. 들어갈 것 없다니까요. 내가 다 옮겼다니까.
도대체 뭐가 인간들로 하여금 성경에 관한 것을 적당하게 만듭니까? 도대체 뭐가 적당하게 만듭니까? 이게 아주 또 교만한 거예요. 성경을 신조로 다 옮겨 놓으면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이유가 뭐냐 하면, 이 신조로 획득한 것이 인간의 내부 속에 들어오지요. 그러면 자기는 뭐가 됩니까? 의인되는 거예요. 똑똑한 사람 되는 거예요. 성경을 다 아는 지혜자가 되는 겁니다.
만약에 자기가 지혜자로 자처하면서 성경 다시 돌아간다는 말은, 이것은 나는 지혜자가 아니고, 아직 모자라고 나는 부족하고 나는 죄인입니다. 그런 고백한다는 것 밖에 안 되거든요. 미흡하다. 미흡하기 때문에 또 얻을 것이라고 돌아가는 식이 된다 이 말이죠. 그래서 나는 미흡하지 않다. 라고 돼버리면 다시 성경을 버리든지, 미흡하면 성경 찾든지 둘 중에 해야 됩니다.
그런데 만약에 어떤 미흡이 드러나 버리면 신조가 문제가 돼요. 신조가 엉터리 신조가 되는 거예요. 이 신조를 또 고쳐야 되는 문제가 있어요. 신조를 고쳐버리면 어떤 문제가 있느냐 하면, 옛날 유럽의 모든 국가들은 젊은 국가들은 그걸 ‘영토국가’라 하는데, 이게 들뢰즈 철학에 나오는데 나중에 그런 이야기할 기회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영토국가, 원국가, 원시국가에서 영토국가로 돌아가는데. 이 국가, 근대국가, 요새 말로 쉽게 말하면 현대국가죠. 현대, 근대국가에 있어서 특히 유럽에 있어서 근대국가는 신조 바탕 위에 공동체로 만들어진 국가입니다.
만약에 이 신조가 엉터리다, 신조가 문제 있다 하면, 현재 우리나라가 신의 의해서 신의 놀라운 인도하심에 의해서 세워진 나라가 아니라고 스스로 자가가 자기 눈을 찌르는 식이 된다고. 이게.
옛날에 신조라 하는 것이 참고로 여러분 들어놓으시기 바랍니다. 옛날에 유럽의 봉건사회에서 근대국가, 영토국가로 넘어올 때는 그 영주나 왕의 종교와 동일한 종교가 아니면 거기에서 죽든지 아프든지 해야 됩니다. 쫓겨나든지. 쫓겨나는 게 아니고 죽지요. 죽이지요. 법적인 보호를 받지 못합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왜 나라 세우는데 종교 다르다고 핍박하느냐? 왜 그러느냐 하면, 그전에 그들이 당했기 때문에 그래요. 그전에 누가 당했느냐? 게르만족, 그리고 그전에 라틴족이 천주교한테 그렇게 당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로마제국에 있어서 로마제국의 황제에 의해서 지배받는 그 전통이 근세에 와도 그게 사라지지 않았어요.
그런데 황제라는 게 뭐로 바뀌었느냐 하면, 교황으로 바뀌었다고 보면 되거든요. 영적으로. 황제는 신의 아들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황도 신의 종이 되는 겁니다. 신의 종에게 대든다? 이건 죽으려고 환장한 거예요.
그래서 교회사에 보면 어떤 사람을 파문하는 게 아니고, 한 지역을 다 파문에 버려요. 특히 후스파 있었던 지금의 체코슬로바키아 땅은 한 지역을 다 파문해서 한 지역 전체가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러면 그 동네 가서 물건 마음대로 훔쳐 와도, 왜 내 물건 훔쳐 가느냐? 할 말 없어요. 어디 까부느냐? 하면 빼앗아가도 보호를 못 받습니다.
어떤 한 지역이 저주 받는다 하면, 그 지역은 점점 더 인구가 떠나겠죠. 예를 들어서 루마니아 같은 드라큐라 백작. 요샌 관광객으로 돈 벌지만. 음산한 분위기. 반 헬싱. 그런 동네에 만약에 교황청에서 저 동네, 이렇게 하면 그 집안 대대로 저주 받는 거예요. 뭘 해도 저주가 생기기 때문에 감히 상종을 안 하겠지요. 그럼 자연적으로 폭삭 망해 음침한 나라가 된다 이 말이죠. 그 정도로 무서운 것입니다. 여론이.
지금처럼 개인이 자기 종교를 선택하는 것은 나폴레옹 시대에 1789년 프랑스 혁명. 나폴레옹이 완전히 깡패입니다. 왕건이보다 더한 놈이에요. 나폴레옹 시대에 천주교, 기독교 재산 다 빼앗아버렸습니다. 이게 어디, 지금이 과학 시대인데 무슨 천주교고? 지금 왕의 시대가 중요하지. 황우석 박사가 중요하지, 그게 뭐 중요해. 과학이 모든 걸 점령하고 진보인데, 힘의 논리인데. 종교, 다 빼앗아 가버려요.
신부들, 수도원들 많이 빼앗아가서 그래서 그 사람들 못 견뎌서 미국의 남부로 가서 그래서 남부에 천주교가 많아요. 처음에 남부에 천주교가 3%도 안 됐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프랑스 혁명 이후에 미국에서 천주교가 굉장히 큰 교파가 되고 말았어요. 13%인가? 지금도 큰 교파 됐고요. 그 사람들이 캐나다 많이 갔고. 미국 남쪽에 많이 갔고. 캐나다 가서 현재 캐나다는 거의 개신교, 천주교 반반이라고 보면 되거든요.
그래서 이거는 뭐냐 하면, 하나의 신조 나라기 때문에 그 시민 전체가 같은 교리의 신조에 동의하지 않으면 그거는 죽습니다. 칼빈이 육십 몇 명인가 죽였잖아요. 자기가 재판해서 죽였어요. 이건 뭐냐 하면, 그게 그대로 배운 거예요. 전에 천주교 교황 복종하지 않으면 죽인거와 똑같이 그대로 배운 거예요. 신에게 복종할래, 안 할래? 이거에요.
십자가 운동이라 하는 것이 처음에 1차, 2차 때는 십자가 운동이 이슬람교 상대였습니다. 나중에 7차, 8차 십자가 운동은 뭐냐 하면, 이단 잡는 것. 마녀 잡기. 마녀 사냥이라고 하지요.
남자의 취미 가운데 최고 엔돌핀이 나오는 취미가 뭐냐? 사냥입니다. 그래서 사냥보다 더 멋있는 것, 이거는 죽이는 것 아닙니까? 계속 죽이는 거예요. 군인들이 전쟁할 때 전쟁이 아닙니다. 게임입니다. 그것보다 더 멋있는 게임이 없어요. 전쟁을 한번 겪어 보면, 전쟁터에 갔다 온 사람은 근질근질해서 사회 적응이 안돼요. 왜? 누굴 죽이는 맛이 있어야 되니까. 죽이고 싶어서 환장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신조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마치 우리나라 헌법에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만약에 우리나라 헌법에 문제가 있으면, 지금 여기서 김정일 찬양해도 헌법 자체에 문제가 있으면 김정일 고무 찬양한 것을 재판할 수 있는 권한이 우리한테 없는 거죠. 왜? 헌법 가지고 해야 되는데 헌법 자체에 문제가 있으니까.
그러니까 이거는 헌법에 뭐가 문제가 있든 없든 간에 절대화시키지 않으면 안돼요. 그런데 그 절대화가 성경 절대화가 아니고, 바로 신조 절대화에요. 그래서 이 신조를 가지고 더 이상 성경에서 볼 게 없어요. 나올 게 없어요. 신조 자체를 알았다 말이죠. 신조 자체를 알았으니까 이거는 자기는 뭐냐 하면, 하나님의 종이 되는 거죠. 전 국민이 다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국가 대 국가 전쟁하면 유럽은 재미있어요. 서로 기도한다고. 우리 전쟁에 이기게 해달라고. 축구할 때도 그렇게 서로 기도한다고. 우리나라가 참된 나라. 서로 기도해요. 자기 자신이 문제점이 없으니까 이제 남은 것은 뭐냐 하면, 이 신조의 확대만 남아있죠. 성경의 복음의 확산, 확대가 아니고, 신조의 확대, 교리의 확산에 있단 말이에요. 그리고 그걸 전하는 주체에 아무 문제가 없는 거예요.
이런 입장에서 뭘 하느냐 하면, 이 신조 자체에 대해서 과학적 인식, 합리적 인식이 이걸 다 폭발시켜 놨어요. 유럽에서. 유럽의 18세기부터 시작해서 휴먼, 존 로크, 홀랜드,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이거는 신조 자체를 공격한 것이 아니고, 성경 자체를 부수고, 그 다음에 성경 부셔지니까 신조가 이게 소용없는 것이고.
여기에 신조를 날려 보내는데 한 몫 한 것이 누구냐 하면, 놀랍게도 경건주의입니다. 스패너, 프랑크, 진젠도르프. 삼종세트에요. 경건주의 삼종세트. 특히 진젠도르프 백작에 의해서 제일 번성했는데. 스패너, 나사 빼는 거. 프랑크슈타인, 프랑크, 진젠도르프, 이 세 사람. 그 진젠드로프에 의해서 모라비안교가 나오고, 모라비안 영향 받은 게 웨슬레 나오는데.
이 경건주의가 뭘 포기했느냐 하면, 신조를 포기해버렸어요. 그래서 대표적인 사람이 벵겔이란 사람입니다. 신학교 때 이 사람 이름을 들은 적도 있을 거예요. 신학교 때 조금은 공부했던 사람은. 벵겔.
이 경건주의에서 벵겔이 뭘 수용하느냐 하면, 소위 성경비평학을 수용하면서, 왜? 너무나 과학적이니까 너무나 합리적이니까. 하면서 그러니까 성경 부수니까 뭐도 부셔져요? 신조 날아가 버리죠. 그러면 교회가 존재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존재하기 위해서는 뭐냐 하면, 경건하면 된다는 겁니다. 경건이 우선이지, 신조나 성경이 우선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게 한국교회에 기존에 대해서 불만을 가진 사람 중에서 많이, 지금도 이런 쪽으로 많이 추구하면서 교회에 안 나옵니다. 교회에 대해서 반박합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이 돼야지 교회해서 아나? 이런 식이죠. 하나님의 성도답게 삶을 보여 줘야지 교회 와서 뭐 할 건대. 라는 쪽으로 경건주의 쪽 경향이 있단 말이죠.
이러니까 개혁주의가 이거는 양면으로 공격 받아요. 한 쪽은 뭐냐 하면, 슐라이어마허 쪽의 경건주의, 인간의 감정, 경건성. 그런 것 쪽에서 공격을 받고. 또 하나는 뭐냐 하면, 합리주의에서 성경 자체가 이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 말이죠. 성경 자체가 무슨 소용 있는 게 아니라 성경이 소용이 있지요. 아까 사전이라 했으니까. 성경 자체는 옛날의 구닥다리, 옛날 사람들의 자연을 해석하는 하나의 해석관점을 집대성한 모아놓은 것뿐이다 말이죠.
특히 스피노자 같은 경우에는 뭐냐 하면, 스피노자가 최초에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모세 오경은 모세 지었나? 그러면 죽고 난 뒤의 이야기는 그거는 어떻게 적었지? 스피노자가 얼마나 똑똑한지, 스피노자가 하는 말이 율법, 하나님의 법, 그거 우리 마음속에 다 들어있는데 뭐. 자연이 신이지, 이거는 율법이라는 것은 자연 신 중에서 하나야. 이렇게 본거다 말이죠.
거기에 용기를 내서 그 뒤에 뭐가 있느냐 하면, 여러 가지 있는데 특히 피히테라는 사람도 있는데. 벨하우젠이라는 유명한 사람, 4문서설. 모세 오경은 네 개의 문서로 되어 있다. J, D, P, E라 해서. 그 뒤에 나오는 폰 라드, 신앙고백. 궁켈, 모빙겔이라 하는 양식학파. 그 사람들의 삶의 정황 속에서 그 사람들이 갖고 있는 어떤 문학적인 특정한 양식이기 때문에 양식적으로써 해석을 해야 된다. 거기에 동의하는 사람이 총신의 김지찬 교수부터 해서 전부다 그러죠.
그거는 구약 쪽이고. 신약 쪽에 오면 스트라우스, 라이마르스, 이런 사람들. 부세트 이런 사람들. 브래드. 다죠 뭐. 유명하다는 사람 다입니다. 슈바이쳐, C.H.다드, 하르낙, 니켈, 전부 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결국 성경이라 하는 것은 짜깁기다. 특히 불트만 같은 경우에는 여러 가지의 특정한 양식들이 있다. 그냥 모아 놓은 거다. 잡것, 잡 글들, 잘못 말하면 큰일 납니다. 잡것들이 아니고, 잡 글들을 그냥 한데로 이렇게 뭉쳐 놓은 거죠.
왜 뭉쳐 놓느냐 하면, 통치자가 신앙적으로 백성들을 완전히 세뇌주기 위해서 이데올로기로 통치, 지배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 뭉쳐놓은 거예요. 그래 최종적인 현재 마소라 사본은 에스라 시대 때 완성되었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 전승 가운데 대표적인 전승 간의 충돌이 뭐냐 하면, 바로 열두 지파 공동체. 안티오크 이론이 뭐냐 하면, 처음 나올 때 우리는 열두 지파 형성되어 나왔다는 그 전승과 그렇지 않다 처음부터 다윗은 선택되게 되어 있다. 이 두 가지 차이가 계속 이어집니다. 또 나중에 나오는 게 뭐냐 하면, 제사장이 아직도 유효하다. 아니다. 묵시적이다. 예언적 계열과 제사장 계열. 이런 글들이 막 있다는 겁니다.
엘로힘은 E문서고, 야훼는 J문서인데 E문서는 또 나눠져요. 나중에 P로 나눠져요. E1, E2로 나눠지죠. 그래서 배재민 교수가 풀하고 가위만 있으면 된다네. 째서 오려붙이면 구약된다. 이렇게 본 겁니다.
그리고 부세트라 하는 사람은 어떻게 이야기했느냐 하면, 예수님 당시에는 예수님을 인자로 보고, 제자들을 나타내는 주로 보고 사도 바울에서 영으로 봤어요. 그러니까 이것은 영으로 봤다는 것은 이런 것을 주라 하는 것은 기존의 로마의 주 개념과 기독교의 주로 봤다. 이것은 뭐냐 하면,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서 자기 신조를 전파하기 위해서 이런 새로운 헬라 철학과 융합해서 그렇게 했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특히 리츨 같은 경우에는 뭐냐 하면, 리츨의 제자 하르낙 같은 경우에는 교회사 전부다 헬라 철학이 다 묻어 있는 거예요. 그걸 다 뜯어내자는 거예요. 뜯어내고 남는 게 뭐냐? 남는 것은 바로 산상설교 밖에 없다고 보는 거예요. 모든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학파, 모든 뜯어내고 남는 것은 산상설교 밖에 없으니까 이것은 뭐냐? 지상천국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 천년왕국도 같이 또 지상 천년왕국이 이루어진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이렇게 볼 때 이렇게 되니까 아까 아브라함 카이퍼 쪽은 뭐냐 하면, 이렇게 나간 겁니다. 그래, 그래. 좋다, 좋다. 하지만 아브라함 카이퍼가 자유주의, 너희들 원하는 게 뭐냐? 지상천국이죠. 그래, 그래. 칼빈도 지상천국 이야기했어. 라고 나옵니다.
다시 이야기 할게요. 신조를 건드려서 성경을 깨부수고 신조를 건드려서 다 부셔버리고. 하여튼 자유주의는 무조건 예수님 죄 지어서 피 흘리고, 이거 안 믿어요. 왜냐하면 그건 비도덕적이니까. 어떻게 인간이 자기가 진 짐은 자기가 책임지면 되지, 왜 남이 짐 지냔 말이죠. 쓸데없이 왜 그런 짓 하냔 말이죠. 십자가 올라가고. 비도덕적인 것은 다 제거해 버리고, 산상설교 남는다니까. 십자가의 이야기 그런 불합리한 이야기 다 치우고, 어린양이 대신해 죽는다. 이건 옛날의 신화적인 제사제도에 나오는 건데 지금은 그런 건 필요 없다.
그러니까 아브라함 카이퍼가 왜 중요하느냐 하면 고신 측 개혁주의 주류가 아브라함 카이퍼에서 나왔기 때문에 따지는 겁니다. 지상천국을 이루자하니까 그래, 지상천국도 이미 칼빈주의에 있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그게 바로 일반은총이라는 거예요.
아브라함 카이퍼가 오기까지는 칼빈은 맨 날 그냥 칼빈은 하나님의 영광과 성경 말씀대로 살아서 영광 돌리는 이것 밖에 없는 건 줄 알지만, 사실은 칼빈 안에 일반은총론이 있는데 그걸 그동안 삭히고 계발 안 했다는 거예요. 심지어 아브라함 카이퍼는 정치꾼이었고 그 사람 수상까지 한 사람이지요. 쫓겨났지만.
아브라함 카이퍼가 일반은총을 주장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칼 바르트가 등장하기 이전에 교회가 있을 이유가 없었거든요. 심지어 그 당시에는 생시몽, 프리에, 이러한 로버트 오웬 같은 사람이 나타나서 사회주의 운동이 벌어졌습니다. 사회주의 운동은 뭐냐 하면, 청교도에 의하면 사람이 가난하고 괴로운 것은 죄악 되기 때문에 신의 징벌을 받아서 가난하다고 보는데,
로버트 오웬이나 프리에, 생시몽 이 사람들은 뭐냐 하면, 사회적인 구조가 구조를 바꾸면 가난한 사람도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본 거예요. 로버트 오웬 같은 사람은 실제로 공장을 운영해서 월급은 더 많이 주고 작업시간은 줄여서 그들로 하여금 행복하게 살게 만들었다 말이죠.
그런데 기존의 그것은 뭐냐 하면, 칼빈주의를 옹호하기 때문에 이놈들, 너거 못 살아야 돼. 어디 게으른 것들. 나는 자본가가 돈 벌기 위해서 얼마나 공부하고 얼마나 내가 그동안 절약했는데. 이건 술만 쳐 먹고 도박하고. 그러니까 못 살지. 너거는 월급 적게 받아. 하니까 점점 더 사회에서 분리가 되는 거예요.
로버트 오웬이나 쁘리에, 생시몽이나 부르동 이런 사람들은 뭐냐 하면, 성경, 예수 찾지 않더라도 인간 속에 나와 있는 착한 사랑으로 양심으로 얼마든지 이웃사랑만 되면 이 세상이 좋은 세상 되는데 이 신조, 교회 뭐가 필요하냐 말이죠. 실제로 운동하는데 사회운동, 시민운동이 더 효과 있지, 교회가 무슨 운동하느냐? 거기서 예비군 운동하나. 요가합니까? 교회의 위기라. 교회에 사람들이 오질 않는 거예요.
미국에 1620년경에 필그램이라 합니까? 청교도들이 박해받아서 제임스 1세인가 그때 박해 받아서 왔어요. 제임스라는 사람은 킹 제임스 번역할 때 인정한 사람. 그때 올 때는 거의 100% 전부다 신자였지요. 막상 개척하면서 힘드니까 50년이 안 지나서 10%도 안 되었어요. 이것이 1760년경에 조나단 에드워드, 화이트 필드 부흥 운동하니까 이게 좀 올라갔다가 그 다음에 다윈의 진화론 나오고 난 뒤에 완전히 교회고 뭐고 안 나오게 되었어요.
그러다가 1800년 말 경에 소위 유명한 무디, 찰스 피니, 그 다음에 워필드, 이런 또 부흥운동이 있는데. 이 부흥운동 때문에 생긴 게 뭐냐? 오늘날 안식일부터 해서 이게 바로 세대주의, 세대주의가 여기 나와요. 골치 아픕니다. 오순절, 옆구리들이 나와요. 박태선이 밑에 그렇게 많고. 구원파 권신찬 밑에 박옥수부터 계파가 쭉 나오고, 워치만 니 계통의 계파가 쫙 나오듯이.
이런 부흥 운동한다는 것이 좋은 게 아니에요. 부흥운동하면 이미 이단들은 새끼를 깠다고 보면 돼요. 왜냐하면 그때 부흥할 때 그때에 사람들이 몰린 것을 그걸 늘 염두에 두고 나도 한번 뜰 수 있다는 그게 환상처럼 들어오기 때문에.
참, ( )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고스톱 쳐도 세 사람 치다 하나 빠져버리면 치기 싫듯이, 교인들도 한 명 빠져버리면 목회하기 싫습니다. 워낙 없으니까 빠지는 게 적을 수도 있지만. 이빨 빠지듯이 빠져버리면 정말 맥이 탁 풀리죠. 토요일 열심히 기도하고 야, 내일 또 히트 치겠네. 하고 와보면 바람 빠지듯 전부다 빠져버리는데 준비한 것도 화딱지 나서 덜어내고. 그러니까 어떻게 부흥이 됐다 이 말은 그게 하나의 모델이 되고 표적이 돼버려요. 거기서 문제가 생기는 거예요.
하여튼 어느 순간도 인간은 예수님은 안 봐. 예수님의 십자가도 안 보고, 예수님도 생각 안 해요. 부천개혁교회 이야기 안 하던가요. 하여튼 목회자들이 스데반 집사를 보질 안는다고. 스데반 집사나 사도 바울을 보지 않고 맨 날 큰 교회. 언 놈은 병신이가 저렇게 큰 교회 못하나. 나도 할 수 있다. 맨 날 할 수 있다는 거예요. 큰 교회, 큰 교회. 스데반 집사 어떻게 죽었는가 생각 안 하고. 그런데 정낙원 목사님 권면하면서 죽는 이야기 너무해서 완전히 장례식 온 거 같아.
어느 시대든 간에 이런 문화, 카이퍼는 일반은총을 이야기하면서 아담이 왜 즉시로 안 죽는가? 분명히 죽는다 했는데 왜 안 죽는가? 일반은총 때문에 쫓겨나서 비록 땀을 흘렸지만 거기서 땅이나 얻어먹었는데 이 땅 얻어먹는 걸 일반은총으로 본 겁니다.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 하나님은 절대로 하나님의 뜻은 회복에 있지, 이거 잘 보세요. 회복에 있지 멸망에 있지 않다고 본 거예요. 이게 아브라함 카이퍼의 주장이에요. 자꾸 회복한다는 거죠. 회복하기 위해서 끈을 만들어낸다는 거예요. 일반은총으로.
그런데 여러분 잘 아셔야 돼요. 아담이 즉시로 죽으리라 해놓고는 안 죽은 이유는, 죽음의 그 개념이 더 예수 그리스도와 닿아져야 죽음이라는 게 비로소 밝혀져요. 목숨 끊는 게 죽음이 아닙니다. 너가 정녕 죽으리라. 하는 죽음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까지 닿아져야 율법이 오고 그게 저주란 개념하고 닿아져야 알 수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아담이 쫓겨나서 거기서 사는 것은 일반은총이 아니고, 뭐냐 하면, 약속을 위한 무슨 약속? 창세기 3장 15절. 약속에 의한 하나님의 대결적인 질서에요. 질서라니까. 창조질서에요. 일반은총이라면 일반은총이라고 이야기할 것도 없이 창세기 1장 1절부터 전부다 그게 하나님의 질서였습니다. 은총이라는 말은 어떤 때 쓰느냐 하면, 인간이 있어서 인간이 그 은총을 받아먹는 대상이 될 때 은총이라는 말을 쓰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이 있기 전부터 첫날부터 둘째 날 전부다 뭐냐? 이거는 창조질서입니다. 창조질서는 주를 위해서 있는 것이 인간을 위해서 있는 게 아닙니다. 일반은총이란 말을 쓸 수가 없어요. 그리고 모든 만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있는 것이지, 우리 회복하라고 있는 게 아닙니다.
만약에 회복하라고 있을 것 같으면 뭐가 문제냐 하면, 창세기 3장 24절, 이게 문제가 돼요. 생명나무 가는 길을 막을 필요가 없습니다. 아브라함 카이퍼처럼 되려면 막지 말고, 문 열어놓고 나중에 인간 되거든 찾아오너라. 내 탕자 같이 받아줄게. 하는 식으로 문을 가는 길을 끊으면 안 됩니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말하기를 예수 믿어도 일반은총이 필요한 것은, 일반은총이 있어야 예수 믿는 사람이 차츰차츰 우리 내부에서 죄가 제거될 수 있다. 차츰차츰 제거된다는 겁니다. 뭐로? 일반은총이 있어서. 일반은총으로 차츰차츰 제거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특별은총은 언제 필요하냐? 특별은총은 처음 믿을 때 필요하고 나머지는 일반은총이 있어서 차츰차츰 나아져야 된다. 이것은 뭐냐 하면, 양심이나 이런 것처럼 일반은총으로 다 집어넣었기 때문에 예수 믿고 난 뒤에 낙후된 양심이 약간의 세련된 양심으로 달라져야 되지 않겠느냐 하는 그런 의도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 아브라함 카이퍼가 이런 주장을 합니까? 그거는 그 당시에 교회라는 게 칼빈주의가 그렇게 쓰레기 같은 게 아니고, 아직도 유효합니다. 라는 것을 대외적으로 알려주기 선전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 아브라함 카이퍼 시대에는 이 수 외에는 다른 수가 없어요. 왜? 교회에 안 나오니까. 손님이 없으니까.
전에 수련회 때 그렇게 했지 않습니까? 오늘날 교회가 객장이라. 여러분 증권회사에 낮에 한번 가보세요. 앞에 전광판 있고 노인네들 쭉 객장에 앉아 있죠. 앉아서 쳐다보기만 하죠. 오늘날 교회가 앞에 목사 설교 쇼하고 객장이라. 빨리 끝내고 밥이나 줘. 점심이나 먹고 갈란다. 아침 안 먹고 왔다. 전부 이렇게 하고 앉아 있는 기라. 객장이라, 객장. 하나의 공연장이에요 공연장.
로이드 존스의 [목사와 설교]란 책에 나오지요. 완전히 목사들이 쇼한다고. 그 책이 참 좋아요. 그 [목사와 설교]란 책이 너무너무 좋아요. 요새 쇼를 해, 쇼를 해. 심지어 예배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 사람은 놀랍게도 여흥.
여흥인데 이게 바로 아브라함 카이퍼는 이게 뭐냐? 문화활동이에요. 문화활동 쪽에 집어넣고 자유주의는, 기독교는 문화활동이라고 이야기하고, 아브라함 카이퍼는 문화활동인데 이것도 일반은총이니까 해야 된다고 본 거예요. 그 시대에 동의를 안 하면 왕따 당하고 그거는 교회가 곧 요단강 건너갈 노인네들만 모여서 푼돈이나 받아서 유지가 안돼. 가스값도 안 나옵니다.
여기에 바로 진짜 정의의 사나이. 도저히 참다 참다 못 참은 이 사람 신학박사도 아니에요. 목회자입니다. 그것도 시골교회에서. 목회자가 로마서 강의하면서 들고일어난 겁니다. 인간, 처음부터 인간과 하나님은 떨어졌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떨어진 상태에서 인간들이 만들어낸 모든 하나님은 다 가짜다. 다 가짜며 우상이다. 모든 것은 우상이라는 겁니다. 인간에게 뭐가? 선이 있고 악이 있다? 인간은 오직 죄만 나온다. 죄 외엔 나올 게 없어요. 아무것도 안 나와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칼 바르트는 말하기를 예수님이 십자가 지신 것은, 예수님만 저주 받은 게 아니고, 예수 안에서 모든 인간이, 너는 저주받았음. 이라는 최종적인 선언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아무리 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바깥으로 나갈 수가 없다는 것을 칼 바르트는 이야기하는 겁니다. 어떤 경우에도.
그러면 사람들이 가만있겠습니까? 칼 바르트가 이렇게 주장하게 된 그 원인이 뭐냐? 여러 가지 원인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여러 가지 원인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1차 대전을 통해서 발전, 발전을 추구하던 그 인간들이 얼마나 잔인하고, 뭐 악마는 없고 이제는 지상천국을 이룬다고요? 악마는 인간이죠. 인간이 악마였어요. 인간이 악마기 때문에 그 악마가 악마 없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인간이 악마기 때문에. 이걸 1차대전에서 수백만에서 수천만이 죽었잖아요. 그리고 히틀러 등장하죠.
칼 바르트 1차 대전 때 미국으로 도망갔죠. 어디로 도망갔죠? 스위스로 갔나? 하여튼 어디로 피신했는지 모르지만. 유대인이니까. 그리고 기존에 있는 모든 천주교, 특히 천주교와 모든 개신교들은 히틀러 앞에 다 굴복했죠.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나라, 천국, 의로운 정의 그거 다 변명이었습니다. 진짜 본색은 교회 밥 먹고 살아야 돼. 교회가 존속해야 된다는 사실, 교회라는 사업체의 유지,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여러분 이 공식 꼭 알아 놓으세요. 교회 쳐다보면 반드시 성경을 차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반드시 그래요. 성경을 관심 있으면 교회는 관심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교회 관심 있으면 절대로 성경에 관심 없어요. 교회 관심 두면.
성경에 관심을 제대로 두려면 자기 사는 것을 포기할 때만 성경 관심 둘 수 있습니다. 사는 것 포기 안 하고 성경 관심 두는 그럴 리가 없어요. 자기가 사는 것 관심 있으면 교회 관심 두죠. 성경은 죽음과 만나고, 교회는 자기 삶과 만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고맙게도 그런 무려 유태인 500만을 죽인 히틀러를 하나님께서 배양하셔서 결국 교회나 히틀러가 한 같은 악마고 바다에서 온 짐승인 것을 요한계시록의 정경을 그대로 면면히 다 보여 준 것입니다. 아아, 거짓 선지자들이구나.
거기에 대해서 칼 바르트는 뭐냐 하면, 인간에게서 나올 것은 죄 밖에 없다. 그러면 칼 바르트, 니는 어떻게 구원받느냐 하니까 거기서 나온 게 뭐냐? 말씀 사건. 말씀은 하나의 사건이기 때문에 우리가 소유할 수가 없는 거예요. 소유하면 사건이 아니에요. 이건 내 것이 되지요. 사건은 외부에서 터져야 돼요. 말씀 사건에 의해서 터져야 되죠.
여기서 우리는 칼 바르트가 코넬리우스 밴틸이라는 박아론 교수에 의하면 쌍권총 찬 광야의 사나이에 의해서 칼 바르트나, 이런 소위 신정통주의, 브루너라는 사람도 세속주의 하비 콕스도 코넬리우스 밴틸에 의해서 전부다 쓰러졌다 이렇게 하는데. 코넬리우스 밴틸, 여러분 들어본 적 있습니까? 총신 때 박아론 교수한테 안 배웠어요? 그 사람 추종자인데. 이 사람 칼 바르트 비판한 책 쭉 있지요.
코넬리우스 밴틸은 개혁주의자지 복음을 아는 사람이 아니에요. 복음이 아니고, 개혁주의 주장한 사람인데 그 사람에 의하면 칼 바르트는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로 믿지를 않는다는 거예요. 다만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가 된다고 본 겁니다. 칼 바르트는 성경을 사건으로 보고 성경책으로 보고 이렇게 구분시켰다고 본 거예요. 성경을 말씀으로 봐요. 말씀이 글로 써 있으면 성경이 되고.
왜 그 당시에 그렇게 했느냐 하면, 성경 자체의 내부에 보면 성경이 없을 때가 있었어요. 율법이라는 것이 안 받을 때 있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보수주의에서 본다면 욥이었고, 욥도 사실은 옛날 사람이지만 하여튼 욥이었고, 아브라함이었고, 그전에 노아 당시에 셈과 함과 야벳이었고, 그리고 아담과 하와, 가인 이런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지금 성경이 없었잖아. 이렇게 나옵니다. 이 성경이 없잖아.
그러니까 성경이 없었다는 건 뭐냐? 계시가 먼저 있고 나중에 나온 게 성경이라는 겁니다. 여기에 동의한 사람이 누구냐? 유명한 헤르만 바빙크. 그걸 전파한 사람은 차영배 교수. 계시가 성경보다 더 범위가 크다는 거죠. 이러한 주의는 역시 네덜란드 개혁주의 쪽에서 많이 나와요.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성경이 계시보다 더 커요?
이게 바로 또 이야기해야 돼요. 왜 성경이 계시보다 더 크다는 아이디어가 왜 나오느냐 하면, 자꾸 사람들이 신조를 벗어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왜? 신조 벗어나면 지금은 신조 벗어나도 경찰에 잡히지 않지만 무슨 소리 듣느냐 하면, 이단 소리 듣거든요.
325년에 니케아신조 나오고, 451년에 칼케돈신조 나와요. 그래서 칼케돈신조는 뭐냐 하면, 기독론에 대해서 완전한 거고, 니케아신조는 삼위일체에 대해서 신론에 대해서 완전히 굳혀 놨다고. 그러니까 325년 니케아신조와 451년 칼케돈신조.
칼케돈이라는 지역은 잘 안나온다 했지요. 지도에. 왜 안 나오느냐 하면, 이게 콘스탄티노플 도시 안에 같이 되어있으니까. 옛날에는 분리 되어 있는데 같이 되어 있으니까. 지금은 이스탄불로 편입되어 있어요. 오늘날 칼케돈 백 날 찾아도 안 나와요. 거기 맞은편에 있거든요. 지금은 도시가 합병되어서 그래요. 이건 참고로 아시고. 나, 그거 찾느라고 애 먹었어요. 칼케돈신조. 나중에 찾아보니까 그래 나와요.
지금 모든 것은 그러니까 뭐냐 하면, 어떻게 신학해도 이단 되면 신학교에서 교수가 교수 일을 못 하죠.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주장하면 찾아보고 니케아, 칼케돈 펴 놓고 이단이냐, 이단 아니냐 그거만 살피고 있거든요. 그러나 생각해 보세요. 칼케돈신조나 니케아신조, 삼위일체에서 이단 안 될 놈, 아무도 없습니다. 이게 삼지창이기 때문에 이거 피하면 창 두 개 날아오고 이쪽에 칼 두 개가 날아와요.
칼케돈신조가 뭐냐 하면, 예수님은 단성이 아니고, 양성이라는 겁니다. 참 하나님이고, 참 인간이라는 거예요. 참 하나님이고 참 인간인데, 말은 좋다만은 어떤 인간도 이 두 칼날을 피할 수 없어요. 뭐 주장하면 그거는 참 인간을 부정하고, 그거는 참 신을 부정하는 거고. 이렇게 하니까.
그래서 이걸 바빙크나, 아브라함 카이퍼나 항상 머리 속에 어떠냐 하면, 어떤 신학을 정립할 때는 절대로 니케아신조와 칼케돈신조를 벗어나면 안돼. 이것이 완전히 꿈속에도 그래요. 그러니까 성경이 뭘 말하는 것보다도 신조를 연구해서 신조에서 뭐 더 나올 게 있으면 그 다음 나와서 주장하고 하는 거예요. 주장을 꼭 그렇게 해요. 왜냐하면 심사할 때 신조 한번 봅시다. 뭐 걸릴 게 없나? 이렇게 나올 게 분명하기 때문에. 자기 신학하면서 자기 부인이 안 된 사람이에요. 성경 앞에서 자기 부인이 안 돼요.
그러나 성경에 보세요.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말씀이 날마다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자기를 부수고 새로 세우고, 부수고 새로 세우고, 말씀이 우리 안에 역사하잖아요. 성경 말씀이. 신조가 역사하는 게 아닙니다. 웨스트민스터가 우리 마음에 역사하면 그건 진짜 합동 측 이단이에요. 신조가 역사하면 안 됩니다. 그건 옛날 귀신이 역사는 거예요. 그거는 지적 동의만 있으면 다 되는 거예요. 예, 예. 맞네. 맞는 말이네. 지적 동의가 아닙니다. 경건주의도 아니에요.
내가 압니다. 말씀이 내 속에서 역사해야 그게 신앙인이고, 그게 성도입니다. 말씀이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는 말씀이 역사는 거예요. 말씀이 역사할 때는 반드시 뭐냐? 말씀이 역사할 때는 주의 이름으로 인하여 말씀이 성취되기 때문에 주의 이름은 그냥 일하는 게 아니고, 꼭 나의 이름을 조져버려요. 정낙원 목사님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나를 너무 죽인다니까. 주의 이름은 그렇게 등장하는 것이 아니고, 나의 이름을 밟으면서 등장하는 게 주의 이름입니다.
어제까지 가졌던 은혜 버리게 합니다. 오늘 새로운 은혜 새로 주셔요. 두 달 전의 은혜 버리게 하십니다. 새로 주신다니까. 그러니까 설교할 때 토요일 날 설교하는 거 그거 포기하고 그때 그 순간에 주신 것 같고 해야 된다니까. 그러면서 토요일 거 생각 안 할 수 없지요.
칼 바르트가 하나님의 말씀 사건할 때 저처럼 이러한 것은 아니지만 비슷하게 말씀 사건으로 신앙이 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칼 바르트를 공격하기를 뭐냐? 그걸 가지고 실존론적 신학자라 이런 공격을 받았어요. 왜냐하면 그전에 하이데거가 있었거든요.
하이데거가 바로 존재에서 현존재에 사건을 보내서 현존재 되게 한다. 이렇게 했어요. 이게 참 어려운데. 현존재 밑에 존재가 있는 게 아니고, 존재는 없어요. 없는데 현존재를 존재케 하는 존재 사건이 존재에요. 현존재 밑에 존재있다 하는 것은 그전에 이미 형이상학에서 다 나왔던 이야기고. 인간이 현재 있게 된 것은 존재가 있을 것이다. 이것은 말이 존재지, 사실 신이 있다는 것과 똑같거든요. 하이데거는 그런 주장이 아니고, 존재는 없는데 존재케 하는 그것이 존재라는 거예요. 여러분 내 말이 어렵지만 차타고 가다가 생각해 보세요.
존재가 따로 있고 현존재 있으면, 존재에서 현존재 나오게 되면 이게 계층이 생긴다고. 존재가 있고 또 현존재 돼버리면 계층이 생기잖아요. 계층이 생기면 이건 하급이고. 이거는 일반 유신론하고 똑같아져버려요.
폴 틸리히가 신을 이야기할 때 뭐라고 하느냐? 신은 없다고 본 겁니다. 인간이 만든 신은 가짜고, 진짜 신은 하나님 위에 하나님이라 했어요. 이게 하이데거 사상하고 똑같은 거예요. 하나님 위에 하나님. 이걸 가지고 존재의 근거라 했어요. 모든 존재의 근거라 했습니다.
그래서 폴 틸리히의 주장은 뭐냐 하면, 어떤 것을 거부하지 말고 이야기해 봐라. 왜? 니 존재, 내 존재, 다 신이 함께 있는데 왜 이야기가 안 통할 리가 뭐 있느냐? 원불교, 불교, 뭐 샤머니즘, 뭐라고 이야기해도 다 통하게 되어 있다 이 말이죠. 그런데 뭐 칼 바르트, 그 사람은 뭐가 우리는 죄인이며 오직 복음으로만 받았습니다. 예수님만 됐어요. 그런 소리하면 안 되지. 하고 폴 틸리히는 칼 바르트를 까버렸어요.
어떻게 기독교에만 신이 역사하고 다른 종교에는 신이 역사 안 한다 이렇게 할 수 있느냐? 물론 기독교에만 뚜렷하게 분명하게 그리스도를 알지만 은총을 죄의 용서가 있지만 그렇지만 희미하게도 다른 종교에도 다 존재의 기반에는 뭐가 있습니까? 신이 있었기에 신이 있다면 그 존재의 기반과 대화가 통하면, 대화함으로써 뭐? 대화함으로써 기독교 자체도 뭔가 모르는 게 있고, 부족한 게 있으면 그걸 채우면 될 것 아니냐? 라는 게 폴 틸리히의 상 관관계적 신학이라는 겁니다. 이 사람은 유명한 신학교, 하버드의 교수한 사람이에요.
그 사람은 중세 때까지는 타율적인 인간들이었다면 근세 이후에는 자율적인 인간의 이성을 도덕을 옹호하는 인간의 양심을 믿고 자기 이성을 믿는 과학적 지식을 믿는 자율적이라는 겁니다. 이 양쪽 다 존재케 하는 신의 뜻은 아니다. 뭐냐? 신율적이에요. 그 사람, 폴 틸리히는 신율적 삶을 살아야 된다.
신율적 삶이 뭐냐 하면, 새삼스럽게 착한 게 아니고, 자기 존재 기반에 눈 돌리는 것이다. 가만있어도 이미 신에 의해서 살아갑니다. 이건 아까 아브라함 카이퍼와 똑같지요. 가만있어도 뭡니까? 일반은총이에요. 아브라함 카이퍼도 일반은총이 있는 이유는 죄를 억제하기 위해서 있다. 일반은총이 없었더라면 죄가 확산되었기 때문에 일반은총이 있어야 죄가 억제된다. 이것은 여러분 신학교 때 너무너무 잘 배웠을 겁니다. 진리처럼.
그런데 일반은총이 있어야 죄가 억제된다 하는 개념에서 잘못된 것은 바로 죄의 개념이 잘못되었어요. 십자가가 왜 생겼습니까? 바로 지금 아브라함 카이퍼 같은 그런 섞어빠진 사고방식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죽었잖아요. 그건 가짜 아닙니까? 이단이라는 뜻이거든요. 누가 좋아해요? 마귀가 좋아할 거예요.
사도 바울이 언제 문화 활동했습니까? 언제 쓰레기 치우자고 운동을 했습니까? 쌀값 인상해달라고 언제 운동했습니까?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알기를 원한다 했는데 나는 세상에 대해서 죽었다고 했는데 십자가로 말미암아. 언제 문화 운동했어요? 진짜 모르는가?
얼마 전에 어떤 분이 저한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걸 내가 전해 들었는데. 기존의 목사님들이나 흔히 전에 같은 생각하다가 간 사람들 있잖아요. 말은 녹음되기 때문에 말은 못하겠습니만 여러분 다 알지요. 간 사람들이 꼭 필요 없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 사람 주장은. 왜 필요 없는 게 아니냐 하면, 그 사람들 도표는 이렇습니다.
일반대중, 심지어 이단 같은 한국교회 목사, 그 다음에 아까 그 사람들, 그것보다 좀 낫다는 그 사람들, 그 다음에 이근호 목사.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 사람들이 왜 필요 하느냐 하면, 이근호 목사한테 오려면 이 사람들 다 필요하다. 이거는 되게 날 대단하다고 높이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게 아니고, 자기는 여기 있다는 거예요. 여기 있으니까 이 존재를 인정해 달라는 거예요. 바로 이 전체가 뭐냐 하면, 성경에 관심이 없는 거예요. 이 사고방식 자체가.
이근호가 역사하는 게 아닙니다. 살아계신 말씀이 예수님 십자가 복음이 역사해야 되는데 관심이 뭐에 있느냐 하면, 이 도표가 역사하는 거예요. 참, 내가 죽어야지, 일찍 죽든지 해야지, 도저히 이래가지고는.
칼 바르트는 왜 말씀 사건하느냐 하면, 기존의 모든 성경해석, 그러니까 워낙 여러분 그걸 이해해야 돼요. 여러분들이 비평학 보면 반박할 여지가 없습니다. 왜 주기도문이 두 개입니까? 왜 주기도문이 두 개인데? 예수님이 말했다면 당신, 보수주의 말대로 예수님이 본 대로 예수님이 들은 대로 적었다면 왜 주기도문이 두 개냐 말이죠.
또 예수님 본대로 제자들이 들었다면 왜 오병이어 네 군데 다 나오는데 네 군데 다 틀리느냐? 그것은 본대로 적은 게 아니고, 자기가 해석한대로 적은 거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그런데 해석한대로 적은 건데 해석한 것도 사복음서가 동일하게 다 틀리는데 같은 게 왜 있느냐?
이거는 사복음서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바이스에 의하면 두 개의 문서가 있다. Q문서와 마가복음 이걸 기초로 해서 사복음서가 나왔다 보는 거예요. 그리고 나올 때 이 Q문서의 신학이 따로 있고 이 신학이 따로 있고 이 신학 따로 있는 거예요.
바우르라는 헤겔학파 사람에 의하면 정반합에 의해서 처음에는 팔레스틴 기독교가 있다가 거기에 반대하는 것이 안디옥이 있다가 나중에 그걸 극복한 것이 뭐냐? 바로 사도 바울의 그러한 복음이 나왔다. 십자가 복음이. 십자가 복음은 정반합에서 나온 것이다. 이거 하고 이거 하고 틀리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야기한 복음과 사도 바울이 하는 복음이 다르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게 아까 출발할 때부터 주장했고, C.H.다드도 주장했고 다 주장한 거예요. 그렇게 할 때 어디 그런 게 있나? 하면 따져볼까? 따져보니까 할 말이 없네. 이 사람들이 학자들입니다. 합리주의이라 하는데. 합리주의로 따져 들어가면 성경 전체가 무지무지한 질문들이 나오는데. 심지어 어떤 사람이 이런 이야기했어요. 성경에서 맞는 게 하나도 없다.
그러니까 거기에 대해서 칼 바르트가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 됐다. 주장할 수가 없는 거예요. 자기도 공부할 만큼 공부했기 때문에. 그럼 뭘 해야 됩니까? 묵시적인 사건으로 달려들 수밖에 없어요. 이렇게 생각한 전체를 뭐로 보느냐 하면, 십자가 앞에서 이런 사고방식, 이렇게 자유주의 비평 전체를 저주 받을 수밖에 없는 근거로 칼 바르트는 봐 버립니다.
그러면 이것 말고 다른 수가 있나? 다른 수는 없다고 본 거예요, 다른 수가 없는데 어떻게 구원받느냐? 칼 바르트는 말하기를 모든 인간은 저주받을 수밖에 없는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데서 부활시킴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고난으로 구원될 사람은 구원된다는 이게 칼 바르트의 주장입니다.
어떤 인간도 저주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성경을 새로 봐도 소용없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게 인간의 한계니까 인간은 터전이니까 거기서 갇혀있으니까 못 벗어나죠. 만약에 살려주신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 보고 살려주지, 우리보고 살려주진 않는다는 것이 칼 바르트의 주장입니다. 이러면 저하고 비슷하죠.
그런데 문제가 뭐가 문제냐 하면, 이게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성부와 성자 사이에서 하나님께선 예수님만 상대하죠. 그건 영원 전부터 언약이 있으니까. 칼 바르트는 계약이 있으니까. 하나님의 택하신 자라.
이게 칼 바르트는 마태복음 3장에 세례 요한한테 세례 받을 때 택하신 아들이라. 하나님은 택하신 자에요. 하나님의 택하신 자가 칼 바르트에 의하면 언제 있었느냐 하면, 바로 어디 있느냐 하면, 구약에 있어요. 구약 이스라엘에 다 들어와요. 이스라엘은 아까 이야기했듯이 율법 종교, 저주받기로 되어있으니까. 저주받는 거예요. 이스라엘의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게 규정당합니다.
그러니까 제 의견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이 예수님 안에서 완성이 되었다고 보는데, 칼 바르트는 그렇게 보지 않고, 이스라엘의 율법을 예수님의 사랑으로써 사버렸다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이제 별 볼일 없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존재할 이유는 없다는 거예요. 이제는 이스라엘 말고 모든 인간이 동등한 입장에 있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존재가 하나님의 언약 완성에 있어서 이제는 별 소용 가치가 활용 가치가 이제는 없다고 본 겁니다. 졸지 마세요. 제일 마지막 중요한 건데 조금만 참으세요. 활용가치가 없는 거예요.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위해서 죽었으니까. 따라서 그런 예수님을 살려 둔 것은 이스라엘이냐, 아니냐는 이제는 끝났고, 모든 담은 헐어 버렸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서 사랑을 베풀고 구원을 베푼 거예요. 그러면 이건 뭐냐? 만민구원설. 모든 사람은 사람이라면 다 구원받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다 저주받아야 되고 예수님 안에서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은 예수님 밖에 선택하지 않았어요. ( ) 예수님만 선택했어요. 왜냐하면 새삼스럽게 예수님만 선택해 버리면 이거는 만인. 예수님이 선택할 권한이 없기 때문에. 왜냐하면 예수님을 선택하는 것은 성부 하나님이지, 예수님이 아니니까. 그리고 난 뒤에 그 고난을 받은 예수님께서 자기가 원하는 자를 선택한다 할 때는 자기가 원하는 자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받은 권한을 선택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누구를 저주하라고 누구를 지옥에서 빼라고 할 것 없이 그 사랑을 그냥 퍼뜨릴 뿐이고.
어떤 사람이 구원받는가 거기에 대해선 칼 바르트는 나는 모르겠다. 다 구원받느냐? 나는 잘 모르겠다. 다만 예수님께서 선택할 때는 그냥 사랑만 선택한다 그뿐이지, 이미 저주는 자기가 십자가 죽을 때 저주를 감당했기 때문에 특별히 누굴 선택한다는 것은 그거는 있을 수 없다 이렇게 본 겁니다.
그런데 저는 이렇게 보지 않고, 저와 차이점이 뭐냐 하면, 이스라엘의 존재 기능이 선택된 기능이 예수님께서 완성했다, 예수님 안에 들어왔다고 보는 겁니다. 들어오게 되면 예수님 안에서 뭐가 있느냐 하면, 이스라엘 선택기능이 계속 살아있어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예수님이 바로 주님이고, 주라 하는 것은 구약 때 언약을 이룬 여호와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래요. 여호와 하나님이 무슨 뜻이냐 하면, 언약을 이루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이 이스라엘을 선택했던 참 이스라엘이 신약에 와서 새로운 개념으로 나오는데 이게 근거가 어디 있느냐 하면, 요한계시록 7장인가 5장에 보면 열두 지파만이 십사만 사천 나오잖아요. 전부다 열두 지파의 아들에 근거해서 줬잖아요. 마찬가지로 오직 옛날에 이스라엘만 구원되듯이 참 이스라엘만 구원된다는 것이 제 주장입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의가 저주, 예수님은 저주와 사랑을 보여주거든요. 십자가. 이 저주를 보여주기 위해서 나머지는 반드시 지옥으로 가야만 하는 거예요.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의를 위해서. 그래서 저 같은 경우에는 십자가 공로만 남지요.
그래서 천국에는 영원토록 천국 복락을 하면서 주님의 공로를 찬양할 것이고, 지옥에서는 십자가를 찬양하면서 그들은 지옥에서 주님의 주되심을 인정하게 될 것이고, 그래서 지옥과 천국에서 다같이 영광 받고.
아브라함 카이퍼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악마에 속한 자와 예수 믿지 않는 자는 절대로 하나님 영광이 안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바로 골로새서 1장에 어긋나요. 모든 만물을 주를 인정하게 되어 있어요. 심지어 저의 [지옥의 하나님]도 있지만 애굽에 있는 사람들도 열 가지 재앙에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 되심을 비로소 공경하게 되는 거예요. 아브라함 카이퍼는 그 대목을 몰라요.
자,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에서 모든 사람이 저주받았기에 이제 아버지가 보내신 자 주께 보낸 자만 내게로 온다는 그 말씀도 상처가 되어서 우리가 예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고 보니 모든 것이 주님의 공로요 우리 공로가 아닌 것을 다른 사람에게 예수님 십자가와 주님을 자랑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아니, 그 차이를 알겠습니까? 뭐, 나 혼자 고함만 꽥꽥 질렀고.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