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사랑과 착함
돈 사랑과 착함
어지간한 사람은 너나 나 할 것 없이 착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그리고 그 동안 이만큼이라도 정되게 살아온 것도 자신의 성실함과 착함에 대한 하늘의 보상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돈 밝히면서도 착함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더나아가서, 살고자 하면서도 착함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는 착함을 후차적인 문제로 돌려놓지 않고서는 도저히 돈을 벌 수 없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필히 자신의 노동의 대가를 '이익'이라는 명목으로 회수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자기에게 돌아 올 몫이 제대로 돌아오지 아니하면 타인이 그 몫을 무노동 방식으로 강탈해 가는 식이 된다. 따라서 자신의 노동량만큼은 반드시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애쓰는 것이 경제 정의에 합당하다. 그런데 그 되돌려 받는 과정이 결코 수월하고 투명하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마치 투쟁하듯이 자기 몫을 제 때에 챙기지 아니하면 온전한 대가를 소유할 수 없고 혹은 남의 것도 대량으로 유입될 수가 있다. 이렇게 되면 의도적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도적질 한 셈이 된다. 물건값이 과도하게 깎는 것이 남의 정당한 희생을 무모하게 점유한 것이 된다. 현 경제 구조에서 자기 노동의 가치가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 아는 자는 없다. 그저 그 때마다 상대방과의 치열한 몫 나누기 다툼에서 밀리지 않는 고집과 힘의 결과로서 자기에게 돌아온 이익이 자기 노동의 가치로 수용할 뿐이다. 더구나 현대의 세계 경제는 계획 잡힌 대로 생산하는 계획 경제가 아니다. 누구든지 경쟁적으로 대량 생산을 할 자유가 주어져 있다. 그러다 보니 엄청난 물자와 자본의 허비가 발생된다. 숱한 노동력과 돈이 투입되어서 만들어 낸 가치 있는 공산품이나 농산물들이 전혀 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쓰레기와 똑같이 취급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소비되지 않는 가치가 가치가 아니며 돈으로 다시 환원되지 않는 노력은 아무리 땀을 흘려도 비생산적 활동에 지나지 않는다. 즉 노력의 대가가 늘 유동적이다 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 상황과 무관하게 자기의 노동의 대가만큼은 필히 찾고야 말겠다는 일념은 누구에게도 다 갖고 있다. 결사적으로 자기 희생의 아픔만큼은 보상받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이 본성들이 날카롭게 곳곳에서 충돌된다. 자기가 살기 위해 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바로 옆집에 사는 이웃 사정을 배려해 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우선 자기부터 노동의 대가를 강탈당한 피해자 입장에 놓여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옆집이 사정이 자기보다 더 억울하게 당한 경우가 아니하고서는 도와 줄 마음이 들지 않고 도리어 사정이 더 나은 자로부터 도움 받기를 은연중에 고대하게 된다. 이처럼 현대 사회에서 살아가는 자들은 모두 자기를 착하다고 보고 그리고 피해자의 일부라고 짐작한다. 사업을 해도 자기만을 살고자 해서 사업한 것이 아니라 한 식구 같은 직원들과 그 가족을 살리기 위해서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착하디 착한 자기 품성에 비해서 그 노고의 열매가 제대로 돌아오지 않는 것에 현실을 놓고 인간들은 수시로 하늘을 원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살고자 하는 욕심과 탐욕이 착한 마음으로 정당화 된 것이다. 마음을 낮추며 작고 약하게 살겠다는 품성을 싫어하는 한, 인간은 자기 노동의 대가 안에 자기 노력의 의로움과 정당함의 대가까지 돈으로 되찾겠다는 과도한 평가를 포기하지 않는다. 인간은 스스로를 극대화하는데서 삶의 행복과 만족을 찾고자 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생각은 경제활동에서 제일 경계해야 될 사고 방식으로 간주되고 있다. 타인의 구매욕을 자극해서 분발시키지 않으면 아예 경제 활동을 하지 말아야 될 처지에 와 있다. 쓸데없는 것을 쓸모 있는 것으로 인식의 변화를 주지 못하는 상품은 쓰레기로 화할 뿐이다. 따라서 흔히 말하는 자기 노동의 대가는 곧 자기 탐욕의 대가를 뜻한다. 일하지 않는데도 대가가 주어지는 세계를 이런 경제인들은 제일 싫어한다. 그러나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살후 3:10)는 말씀은, 타인에게 짐지우지 말라는 뜻이지 자기 자신을 높이 평가하며 살라는 말씀은 아니다. 일,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