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마 8:23-28 (풍랑 속의 예수님)
Re..마 8:23-28 (풍랑 속의 예수님)
이름 : 이근호(IP:)
풍랑 속의 예수님
2003년 6월 8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8:23-28
8:23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좇았더니
8:24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는 주무시는지라
8:25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가로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8: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8:27 그 사람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더라
우리 인간은 뭔가에 갇혀 있고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은 우리 인간이 일하시는 것과는 너무나 다른 수준에 계십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택한 백성 구출 작전'입니다. 이 구출 작전의 상세한 진행과정을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은 그동안 세상적 사고방식으로 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보기에 자꾸만 예상치도 못할 일들이 발생되기 마련입니다. 우리 사람들이 살아가는 취지는, '내 것 내가 지키기'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에는 예상치도 못한 일이 자꾸 벌어지면 우리는 곧장 위기를 느낍니다. "이러면 죽는데 ..., 모든 것이 허무하게 끝나는데..."하면서 말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일부로 자기 성도에게 이런 위기를 조성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지만 '택한 백성 구출 작전'이 정상적으로 진척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13;48에 보면,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오직 하나입니다. 세상 곳곳에 숨어 박혀있는 자기 백성을 이 악의 세계에서 뽑아내는데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이 내 것이라고 여기는 그 사고방식이 무너져야 합니다. 어떻게 무너뜨립니까? 이 점을 보여주기 위하여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과 예수님이 등장하십니다.
제자들은 환란 가운데 그들이 어떤 식으로 대처할 수 밖에 없는 가를 확실하게 보여줍니다. 즉 평소에 예수님을 어떤 식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는가를 적실하게 보여주게 됩니다. 환란이 없다면 그런 속사정은 본인도 모르게 될 것입니다. 인간은 두 가지의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는 물리적인 한계입니다. 절벽에서 떨어지면 죽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어깨에는 날개가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환란이 오면 그런 한계성 때문에 어쩔 줄을 모릅니다. 인간에게 또다른 한계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심리적인 한계입니다. 남들이 욕을 하게 되면 순간적으로 사람이 폭력적인 행동을 하게 됩니다. 상대에서 아무런 물리적 공격을 하지 않았는데도 말입니다.
이처럼 나약한 인간에게는 항상 환란이라는 것이 쉴새없이 닥치게 됩니다. 흔히 하나님과 함께 하면 바깥이 아무리 환란이 들끓어도 자기가 있는 곳까지는 오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이것은 잘못된 믿음입니다. 그것은 환란이 아니라 그저 상상 속의 환란일 뿐입니다.
성도에게 왜 환란이 있어야 할까요? 로마서 5:3-4에 보면,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줄 앎이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환란이 없으면 결국에는 엉뚱한 것을 소망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인내와 연단이 빠지만 당연히 소망하지 말아야 할 것을 소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소망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참으로 '택한 성도 구출 작전이 성공하려면 환란을 주셔서 그 환란을 통해 인내와 연단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제대로 된 소망을 갖게 됩니다. 사람이란 큰 기쁨이 일을 앞에 두고 있으면 마음이 설레게 되어 있고 반대로 고통스러운 일이 있다면 그냥 도피해 버리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제대로 소망다운 것을 큰 기쁨으로 고대해야 합니다. 소망의 나라에 대한 설레임이 있다면 지금의 고통을 마냥 외면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코스가 성도가 자신을 제대로 파악하는 과정입니다. 환란 사건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환란이란 사람마다 다 틀리고 환경 따라 다 다르게 마련입니다.
부잣집의 환란과 가난한 집의 환란이 서로 다릅니다. 하지만 환란이라는 점에 동일한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자에게 인내와 연단을 가져오게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성도의 길을 한꺼번에 묶어서 보여주는 사건이 일어났으니 바로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제자들과 예수님이 함께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가 난데없이 풍랑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파도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타고 있는 배를 덮쳤습니다. 과연 제자들이 이 풍랑과 싸워이길 수 있을까요? 그리고 풍랑이 제자들인 줄 알아채고 그 앞에서 갑자가 고요해졌습니까?
흔히들 본인들이 예수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어떤 위험한 상황도 기적처럼 자기만 쏙 빼놓고 못알아본 것처럼 그냥 건너뛰기를 고대하게 됩니다. 이럴 때 인간들은 평소에 자신들이 자신있게 내세울 수 있는 선한 일들을 끄집어내게 됩니다.
"오 신이시여, 저는 평소에 이러이러한 착한 일을 해 왔습니다. 그런 일들을 기억하사 이 어려움을 그냥 지나쳐가도록 해주옵소서"라고 빌 것입니다. 인간을 탐구하는 중에 가장 신기한 일은, 약간의 여러움이 닥쳐도 사람들은 신을 찾는다는 겁니다.
그리고 영화 제작에 들어갈 때나, 공장을 새로 지어 가동에 들어갈 때나 심지어, 지구 상공에 인공위성을 쏘아올릴 때는 사람들은 고사를 지낸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무엇 때문에 고사를 지내는 겁니까? 그것은 재난이란 여전히 인간들이 감당하기 힘들다는 점을 미리 인정해서 신으로부터 동정을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일종의 겸손입니다.
그렇다면 평소에 교회다니는 교인들은 어떠합니까? 주일 예배가 그 주간에 대한 고사지내기 수준이 아닙니까? 예수님과 함께 하므로 말미암아 사전에 그 어떠한 재앙도 근처에 오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기대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여러분 풍랑은 여지없이 여러분의 가정과 사업체와 신체와 심지어 교회에 덮칠 것입니다. 마땅히 덮쳐야 합니다.
이런 환란과 재앙이 있어야지만 천국이 얼마나 대단한 나라에 속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천국은 그냥 시시한 나라가 아닙니다. 차라리 우리의 목숨보다 더 귀중한 나라입니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가야될 나라입니다.
환란이 오고 어려움이 오면 올수록 천국의 가치는 더높아집니다. 고사를 지내 재앙이 빗겨가기를 고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재앙이 찾아드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제자들이 배 위에서 우왕좌왕 하는 사이에도 예수님은 배 밑에서 주무시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만은 항상 천국에 계시기 때문에 호들갑 떨 필요가 없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자 이제 예수님은 자신의 천국의 위력 안으로 제자들을 들여보냅니다. 그리고 바다를 꾸짖으니 바다가 도로 잠잠해졌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한 마디 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인간은 본성상 죽음을 두려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인간이 아니라 신이든지 아니면 천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두려워했다는 것을 가지고 나무라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제자와 다른 사람들의 차이점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자신의 결단력을 시험하는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바로 아는 그 믿음 말입니다.
풍랑이 잠잠해지고 자기에게 위험요소가 사라졌을 때, 제자들은 예수님을 다음과 같이 평가합니다.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방금 전까지 그들은 분명히 예수님을 필요로 했고 그래서 그들은 잠자는 예수님을 강하게 깨웠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때까지 제자들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이해했단 말입니까? 사람의 신앙 생활이라는 것이 이러한 변화와 변화의 연속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맹목적으로 다급해서 신을 부를 때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 혹은 예수님의 누구신가에 전혀 관심두지 않고 그저 119 소방수 부르는 식으로 일단 불러놓고 봅니다. 자기 일 처리해 달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막무가내 식의 믿음 안에는 여전히 자기 본성이 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인간을 변화시킵니다. 어떤 식으로 말입니까? 이제는 정신을 차리고 상대를 제대로 알려고 합니다. "예수님, 당신은 진정 어떠한 분이십니까?"라고 묻게 됩니다.
자기 존재를 예수님을 향하여 열어제쳐 보이는 겁니다. 이러한 변화는 자신에 대해 무능하기 짝이 없는 한계에 실감하는 것과 병행해서 일어나게 됩니다. 신에게 무엇을 요청해야 할 것인가 하고 고르는 입장이 아니라 "나는 아예 예수님에게 무엇을 요청한 자격도 못되는 존재이구나"를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에 대한 관심이요 사랑의 시작입니다. 보세요, 환란이 예수님에 대한 관심을 발생시키지 않았습니까! 바로 이런 식으로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택한 자는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구출되어야 합니다. 환란 속에서 자기 것 지키기에만 연연하지 마시고 자신의 환란이 다른 택한 성도에게 예수님을 소개하는 계기가 된다고 여긴다면 그 환란 가운데서도 새삼스럽게 예수님이 허락하신 환란의 의미를 알게 될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것이 덮쳐오고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다 할지라도 천국이 되시는 예수님과 함께 있음을 든든하게 생각하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