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결국 자기에게로 귀환
인간 구원을 위한 신학의 구조Ⅰ. 결국 자기에게로 귀환 인간은 스스로 자기를 지킨다. 자기 존재에 대한 포기란 없다. 성경을 보더라도 자기 존재를 변명하는 선이해(先理解)를 갖고 다가선다. 자기가 자기를 살려내려고 한다. 여기서 자기 사랑을 정당화하는 신학이 나온다. 그러나 진정 성경이 인간의 이름을 위한 책인가 아니면 주의 이름을 위한 책인가? 인간은 파편적이고 분산된 이미지들을 결합시켜 수시로 주체를 형성해 나간다. 인간의 주체는 마치 스크린과 같아서 위에 지속적으로 그림들이 투영되고, 그 위에 덧칠되고, 반복해서 말소되고 다시 표현되는 각가지 환상들이 아른거린다. 아이가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을 통해 아이는 비로소 자기 몸의 전체상을 지각하는 것처럼 파편화된 몸을 하나의 전체(통일성)로 인식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자아'를 규정한다. 그러나 이러한 통일성은 자기가 아닌, 자기 바깥의 모습을 통해 얻은 것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연이어 주체가 자꾸만 분리됨을 느낀다. 새로운 타자를 대하는 순간 자아는 지금까지의 자아를 새로 구성되는 자아에 자리를 내어주게 된다. 즉 자아는 그 자신이 아닌 타자의 자리에서 확인된다. 다시 말해 자아는 타자가 나에 대해 말하고 나에게 바라는 바를 곧 내 자신으로 확인(동일시)함으로써, 그리고 타자가 나에게 상징적 질서 속에 배정해준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일정한 자기 동일성을 획득한다. 자아는 먼저 자기의 내재성에 머물러 있다가 비로소 자아가 자아로서 형성된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타자를 통해서 비로소 자아가 자아로서 형성된다는 것이다. 자아를 자아로서 구성하는 것은 곧 타자의 요구이며 타자가 나의 욕망을 부축이고, 일으키고, 나의 욕망에 일정한 내용을 부여한다. 법이라는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으로! 이로서 의식된 자아는 타자와의 동일시를 통해 만들어진 상징적인 산물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러한 자아상마저 아무리 해도 그 막 너머까지는 도달하지 못한다. 자신이 어떻게 볼 수 있는 막 너머의 세계가 있다. 그것은 외부와의 의사소통으로도 속성 수정이 불가능한 영역이다. 그곳은 '아담 안'에서 구성된 보편적 인간성이 자리잡고 있는 영역이다. 인간으로서 근본 한계 설정을 담당하고 있는 구역이다. 마치 사울이 본의 아니게 악신이 들려 다윗을 공격해야만 하듯이 이유 없이 무조건으로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하나님에 대해 불쾌감을 갖고 대적하고 싶은 품성에 들 끊고 있는 구역이다. 스스로 절대 자유를 누리는 신이 되고 싶은 영역이라서 신마저 귀찮아하고 거부하고 공격하는 싶은 속성을 드러내게 된다. 악마가 죽음을 가지고 인간에게 위협을 가하는 곳이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히 2:14-15)바로 주님의 이름이 인간의 근원을 노리고 공격하시는 곳이다. 바로 십자가 사건은 인간을 공격하기 위해 근거로 삼기 위해 보편적 인간성을 담보로 잡은 채 혈육(육신)에 하나님의 아드님께서 합류하신 일이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그리고 구약의 모든 말씀도 그 십자가를 위하여 전진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주의 이름'에 거역하는 것이 어떤 사태를 일으키는지 실제 심판으로 분명히 보여주셨다. "그가 또 큰 소리로 내 귀에 외쳐 가라사대 이 성읍을 관할하는 자들로 각기 살륙하는 기계를 손에 들고 나아오게 하라 하시더라 내가 본즉 여섯 사람이 북향한 윗문 길로 좇아오는데 각 사람의 손에 살륙하는 기계를 잡았고 그 중에 한 사람은 가는 베옷을 입고 허리에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찼더라 그들이 들어 와서 놋 제단 곁에 서더라 그룹에 머물러 있던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올라 성전 문지방에 이르더니 여호와께서 그 가는 베옷을 입고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찬 사람을 불러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하라 하시고 나의 듣는데 또 그 남은 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그 뒤를 좇아 성읍 중에 순행하며 아껴 보지도 말며 긍휼을 베풀지도 말고 쳐서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 아이와 부녀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말라 내 성소에서 시작할찌니라 하시매 그들이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들로부터 시작하더라 그가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성전을 더럽혀 시체로 모든 뜰에 채우라 너희는 나가라 하시매 그들이 나가서 성읍 중에서 치더라 그들이 칠 때에 내가 홀로 있는지라 엎드리어 부르짖어 가로되 오호라 주 여호와여 예루살렘을 향하여 분노를 쏟으시오니 이스라엘 남은 자를 모두 멸하려 하시나이까"(겔 9:1-8)왜 하나님은 이 세상을 진노로 심판하시는 것일까? 그것은 애초부터 하나님의 만드신 세상이 아니라 멸망당하기 위해 임시적으로 유지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오직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공개된 바 있다. 십자가 사건으로 인하여 이 세상은 더 이상 지탱한 모든 이유는 박탈당한 상태이다. 하나님 입장에서 '어두움'을 건져낼 하등의 이유가 없다. 이 세상이 과연 어두움인지 아니면 약간이나마 빛의 흔적이 남아 있는지 하는 것은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그 증거가 확실히 확보되어졌고, 또한 성령님을 통해서 여지없이 전파된 사실이다. '주의 이름'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이 세상에 가득 차 있다. 물론 배후에는 악마의 활동이 있다. 이로서 같은 성경을 놓고서도 그 주제가 십자가냐 아니면 존재냐를 가려야 될 판이다. 이미 십자가가 터진 마당에서도 인간들은 자신의 죽음을 신의 심판으로 간주하지 않고 어떻게든 자력으로 죽음에서 삶으로 전환시키려는 본능이 극을 달한다. 그 방법으로 나온 것이 자기 존재를 아예 신의 무한한 속성의 감싸고 있는 형태로 보자는 인식이다. 신이 자신에게 허락한 무한한 요소를 자신이 품고 있다는 것이다. 그 무한의 요소를 중심으로 외부의 모든 우주의 속성을 거기다가 연결시켜 그 연결이 끊어지지 않게 무한대로 이어져 가면 결국에는 이 우주를 가득 채우는 신의 속성과 항시 교류가 가능하다는 아이디어다. 자기가 품고 있는 그 무한의 속성을 인간들은 자기 영혼이라고 본다. 영혼의 자리를 신의 자리로 선언해 버리는 것이다. 즉 자신은 신이 허락해서 존재하는 존재자라는 것이다. 신이 머물 수밖에 없는 그 영혼의 자리로부터 구원을 위한 작업을 개시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부정해도 신에 대한 의식과 무한에 대한 염원을 양산하고 있는 그 영혼의 자리만큼은 신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다. 즉 만약 신이 있다면 신은 스스로의 선한 뜻에 의해 인간 내부에 심어놓은 신적 속성을 스스로 파기하는 모순된 행위를 하실 리가 없다는 것이다. 즉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존재의 의의를 거부하는 것은 신도 용납하지 않을 일이라는 확고성만이 인간의 살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 보이는 길이라는 것이다.그 영혼의 자리를 확대하여 신의 은총 아래서 자신의 유한성을 극복하고 신의 무한성과 접촉하는 구원의 연결 고리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런 신학은 '주의 이름'의 살해소식인 십자가 사건을 피해 가는 셈이 된다. 사실 십자가의 의미는 인간들의 이렇듯 집요한 자기 구원의지와 관련지어서 발생된다. 십자가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이 어떤 식으로 자신을 구원하려는 가를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