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유한자에서 방출되는 무한
3. 유한자에서 방출되는 무한인간도 하나님의 모상(模像)대로 창조된 이상, 인간은 하나님께 돌아가는 여정 중에 있다. 이성과 신앙은 이 여정 안에 통합되어 여정을 계속해야 한다. 활동적인 이성은 곧 인간 영혼을 구성하는 한 부분이라고 보는 이러한 견해를 통해서 육체로 존재하는 인간의 개인적 영혼이 불멸하는 것으로 증명되었다. 이러한 변역의 결과로 인해 서 인식 과정에서 '영혼의 활동성'이라는 새로운 시각이 등장했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이 창조적 행위에 상응한다는 생각에서 발생했다. 이로써 이제 인식 과정에서 인간의 영적인 주관성이 근대사상의 중심부에 자리하게 되었다. 사물에게 이미 주어진 진리와 인간적 경험과의 조화는 인식을 이미 주어진 진리로 해석함으로써 고대 인식론에서 확증된 것으로서 인간 영이 바로 창조적이라는 점에서 세계의 신적인 근원과 맺게 된 동질성을 통해서 그 토대가 잡혔다. 물론 신학적 전제가 떨어져나가 버리면 창조적인 인간 영의 활동이 어떻게 실제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 틀림없이 모호해지고 만다. 여기서 말하는 창조적 인간 영이 활동은 인간에게 의존적이지 않는 사물을 그 존재의 특성에서 파악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하나님의 사랑을 문자적으로, 그리고 사실적으로 가르치며 한 모범을 보이기 위함이다. 이러한 모범은 너무 완전했기 때문에 인간들을 하나님에게로 이끌어 주며, 하나님은 여기에 대한 응답으로 고유한 사랑에 의해서 그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중보기도에 의해서 인간을 용서해 주신다. 신앙 행위는 확실성을 갖춘 것이라기보다는 자유로운 모험과 인격적 경험에서 비로소 현실화된다. 인간의 선택적 행위에 대해서만큼은 신의 섭리의 직접적 적용을 배제된다. 그럼으로써 인간의 자유와 책임, 그에 따른 칭찬과 처벌이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인간이 신의 전적인 지배 아래서도 필연적인 결정론에 빠지지 않고 이 세계가 어떻게 우연적이고 인간의 자유선택이 어떻게 가능한가?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이 세계의 목적적 질서에서 어떻게 제 1목적 안에서 모든 존재가 섭리적으로 규정되는가, 그리고 이러한 섭리가 왜 어떻게 제2원인자를 매개로 해서 실행되는가, 이러한 제2원인자의 본질에 따른 우연적이거나 필연적인 사태가 발생하는데, 특히 이러한 우연적인 결과는 제2원인자의 산물인 뿐인가 아니면 이러한 우연적 결과까지도 신의 섭리 아래 규정되는가, 만약 그렇다면 이러한 결과는 발생하도록 이미 결정지어져 있으므로 우연적이라고 할 수 없지 않은가, 또한 제2원인자의 완전성에 따른 자유선택으로서의 우연적인 결과 역시 섭리에 의해서 성립된다면 이미 섭리적 차원에서 결정지어지므로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의 의미가 상실되지 않는가 라는 물음들을 해명되어야 한다. 신은 궁극적인 목적으로서 자신 안에 한 목적을 위해 새롭게 규정되어질 어떤 것도 있을 수 없다. 궁극적 목적으로서의 신은 모든 존재의 목적과 그러한 각자의 존재의 목적 실현의 방법까지 규정한다. 섭리란 궁극적인 통치자로서 모든 존재를 규정하는 신적 지성 자체이다. 이렇게 신은 모든 존재의 자신들의 목적을 위한 실천적 방법을 규정하면서 동시에 궁극적인 한 목적을 위한 모든 실천적 방법에 대한 규정으로서 섭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어떠한 존재도 신의 원인성이 미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어떤 존재로 신으로서의 궁극적인 목적에서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섭리는 다음의 두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 신은 그의 지성 안에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모든 존재에 대한 범형을 자신의 지성 안에서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만물에 대한 직접적인 섭리를 가지고 있다. 둘째, 신의 섭리의 매개자들이 있다. 왜냐하면 신은 자기 힘이 결점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선의 풍부함으로 인하여 낮은 존재를 탁월한 존재에 의해서 통치하기 때문이다. 이 점은 왕이 집정관에게 자신의 권한을 양도하여 대리로 통치하게 하는 경우와 비교할 수 있다. 이 경우 집정관의 권위는 결국 왕에게 속하지만 왕 스스로 모든 지역을 직접적으로 관할 할 수 없는 힘의 결핍으로 인해 대리 통치는 불가피하다. 그리고 왕은 집정관들의 나름의 통치 계획과 실행을 남김없이 알 수 없다. 이에 반해 신에 의해 부여된 원인은 신적인 힘의 결여의 산물이 아니라 오히려 신의 풍부한 선성(善性)으로 인해 피조물에게 원인의 권위를 부여한다. 이러한 충만한 신격 사랑에 따른 매개자에 의해 통치가 실행되면서도 신이 섭리에 따라 실행을 위한 매개자들의 모든 과정이 낱낱이 직접적으로 규정된다. 그렇다면 섭리에 있어 인간은 행함은 무엇인가? 인간은 원리적인 원인자이다. 원리적 원인자는 스스로 움직이는 자기 내적 본성에 따른 목적을 지닌 영혼을 가진 살아있는 존재이다. 이러한 원리적 원인자는 자기 성장과 실현, 자기 산출 그리고 자기 이외에 다른 존재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 내의 목적이 따른 활동을 할 수 있다. 물론 원리적 원인자가 자기 내적 목적에 따라 스스로 활동한다고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운동과 목적인 신에게 의존하게 된다. 그러나 원리적 원인자는 세계 내의 다른 존재에 대해서 독립적으로 자기 목적작인 활동을 한다. 과연 제 2원인자가 성립되어야 이유가 무엇인가? 그겻은 다양성 때문이다. 만약에 어떤 2차적 원인자도 능동적이지 못하고 오직 신에 의해서만 작용한다면 결과들 사이의 어떠한 다양성도 이끌어 질 수 없다. 이런저런 결과된 존재들에 어떤 작용의 차이가 없다면 우리는 이러한 존재들을 구분할 길이 없다. 우리에게 서로 다르게 알려지는 작용 역시 피조물이 2차적 원인이 되어 작용한 것이 아니라 신의 직접적인 작용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신의 작용에 따른 어떤 결과들도 그 차이가 인간에게 알려질 수 없다. 어떠한 결과의 산출에 피조물들의 어떤 원인적인 작용이 없다면 원인에 관한 지식이 오직 공허하게 수반될 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제2원인자가 원인성을 가지는 궁극적인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제 1원인자의 완성에 따른 필연의 산물인가 아니면 신의 자유의지의 산물인가? 후자라고 할 때 임의적인 우연의 산물인가 아니면 신의 자기 목적에 따른 신적 지식과 계획에 따른 선택인가? 물론 신은 완전한 실현자이므로 자기 목적의 실현을 위해서 어떤 것도 필연적으로 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기 목적에 부합되는 어떤 존재나 세계를 우연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 이렇게 선택되는 세계 중에 불완전한 세계보다 더 완전한 세계가 신의 목적, 즉 지극한 선함에 부합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신은 최선으로 활동하므로 어떤 불완전성을 의미하는 양태들을 신의 활동에 적용할 수 없다. 제2원인자가 작용하기 위해서는 작용의 주체로서의 실체적 형상이 있어야 하며 또한 작용의 목적이 주어져야 한다. 이러한 실체적 형상과 목적이 신에 의해서 부여되고 보존된다. 또한 실체적 형상은 새로운 현실적인 작용에 대해서는 가능적인 능력이므로 그러한 가능성을 현실화시키는 제1작용자가 있어야 한다. 이점은 인간의 의지적 활동에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제1원인자인 신에 의해서 추구할 수 있는 힘이 실체적 형상으로 부여되고 그러한 의지적 활동이 실행되며 그러한 의지의 대상인 선이 주어진다. 이렇게 제1원인자가 인간의 의지적 활동에 내적으로 작용되지 않고서는 어떠한 인간의 자유가 실현될 수 없다. 이러한 제1원인자의 작용은 의지의 내적 원리의 근거라는 점에서 외적인 조력이나 방해와는 다르다. 외적인 작용자는 인간의 자발성을 억압하거나 아니면 설득할 뿐이다. 이처럼 제1원인자만이 억압 없이 의지의 자발적인 활동을 가능하게 한다. 이렇게 신은 어떤 억압도 없이 인간의 의지적 활동을 가능케 한다는 것이다. 이 섭리관에 준해서 윤리관이 나오게 된다. 모든 것은 원인을 가지므로 목적원인을 가진다. 마치 모든 철학적 문제들이 목적인에 비추어 다루어지는 것과 같다, 인간의 도덕성은 인간의 궁극적 목적과의 연관 하에서 고려된다. 그 결과 윤리학은 곧 행복론이다. 모든 인간이 행복을 추구한다. 이 명제는 분명히 경험론적 명제이다. 그는 행복이 그 자체로 지고의 선이며 총체적 선이다. 인간이 행복을 위해 모든 선을 추구한다. 이것이 모든 인간의 행위가 행복 일반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각각의 인간들에게 행복에 대한 서로 다르다. 어떤 사람들은 명예와 부, 권력, 우애 등을 추구한다. 또한 모든 행위자는 목적을 위해 행동한다. 생명체들은 자기 운동의 원리인 영혼을 가짐으로써 자발적으로 행동한다. 이와 같은 인간의 행복 일반에 대한 추구는 인간의 의지가 선(善) 일반에 개방되어 있다는 인간학적 진리에 기초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무엇을 행하든 자신의 자기완성과 자기충족, 즉 형이상학적 의미의 행복을 위해서 행한다. 결과적으로 윤리학은 도덕성의 자기목적성을 함의하지만 또한 동시에 그것이 행복 추구를 위한 수단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인간의 행위'와 '인간적 행위'는 구분되어야 한다. 전자는 다른 동물들과 공유하는 행위로서 인간이 이성과 의지의 작용을 통해 주인이 되지 않는 행위를 말하고, 인간적 행위란 인간으로서 인간에게 적합한 행위로서 이성과 의지의 작용을 통해 인간이 주인 되는 행위를 말한다. 인간적 행위는 곧 자발적 행위 혹은 자발성을 가지는 행위이다. 이것은 영혼론의 원리에 근원을 두고 있다. 인간은 본성에 의해 궁극적 목적에 대한 수간으로서 하나의 목적을 설정하며 그것을 이해하고 의도한다. 이 자발성은 식물과 동물의 것보다 더 완전하다. 인간 행위의 내적 원리들이란 그 행위들을 가능하게 하는 인간이 가진 기능들을 말한다. 그 기능들은 인간이 유한자로서 그리고 물질적이면서도 영적인 존재로서 가지는 원리들이다. 신은 창조자이다. 창조자로서의 신은 피조물을 기획, 통치, 주재 그리고 자신을 향해 목적 짓는다. 신은 세계에 대한 철저히 내재적이면서 동시에 철저히 초월적이다. 모든 존재자들은 창조자인 신으로부터 유래되며 신에게 궁극적 목적으로 복귀한다. 그런데 모든 존재자들은 각기 다른 본질을 지니고 있으며 이에 따라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신에게 복귀한다. 이와 같은 피조물로서의 인간의 신에게로 복귀 과정이 신학적·철학적 윤리학의 근간을 이룬다. 그런데 신은 단순한 일자로서 완전히 자기동일적이다. 신에게는 본질과 행위가 구분되지 않으므로 기능과 작용, 그리고 작용들 사이의 구분이 없다. 그런데 유한자는 본질과 실존의 복합물이다. 따라서 유한자의 경우 본질과 행위, 그리고 기능과 작용 그리고 작용들이 서로 구분된다. 그런데 이해 능력이 있는 곳에는 항상 그것에 대응하는 욕구 능력이 있다. 이에 따라 하나의 영적 존재는 이성과 그것을 동반하는 영적 욕구 능력인 의지의 복합물이라는 것이다. 인간 이성은 이론 이성과 실천이성으로 구분된다. 이론이성의 경우 전체가 올바르고 추리가 형식논리의 법칙을 준수한다면, 그것의 결론은 올바르다.그러나 실천이성은 개별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에 다다를수록 선과 악의 구분이 더욱 모호해지는 것을 경험한다. 이성은 지식에 대한 자연적 욕구를 가지며, 의지는 선에 대한 자연적 욕구를 가진다. 그러한 자연적 욕구들은 작용의 증가에 따라 더욱 활발해진다. 이성의 지식을 확보하면 할수록 그것의 지식에 대한 욕구는 증가한다. 그런데 이성에 의한 지식의 확보는 의지의 욕구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한다. 의지의 대상에 대한 욕구는 이성의 그것에 대한 지식의 정도를 따르지 않는다. 그래서 의지는 완전히 이해되지 않는 대상을 맹렬히 추구할 수 있다. 이성은 자신이 이해하는 대상을 의지에게 추구의 대상으로 제시한다. 의지 자체는 가능적 기능으로서 선에 대한 욕구일 뿐, 이성의 이해 없이는 어떤 것도 추구할 수 없다. 그래서 의지는 이성이 선으로 이해하고 제시하는 것을 추구한다. 행위자의 행위가 도덕적으로 선하거나 악한 것의 주관적 이유는 그가 양심의 명령에 복종하는가에 달려 있다. 그런데 이것은 그의 자유로운 선택의 문제이다. 자유로운 선택은 숙고 혹은 자발성의 과정을 거친다. 숙고는 이성, 의지 그리고 감각적 욕구 기능들의 공통된 작업이다. 자유로운 선택은 이성과 의지의 공통된 결단으로서 형상적으로는 이성의 것이지만 실체적으로 의지력과 관련 있다,그런데 일상언어에서 우리는 의지가 도덕적 선을 거부한다고 말한다. 일상언어에 따라 말하자면 의지가 그것을 거부하는 이유는 주로 열정들의 영향력에서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이 육체를 가지지 않는다면 항상 도덕적으로 선할 것인가? 그리고 유한한 인간의 의지는 항상 도덕적으로 선한가? 그러나 육체를 가지지 않거나 의지로서 만의 인간 행위자는 모두 추상일 뿐이다. 분명한 것은 유한한 의지가 그 자체로 필연적으로 선하지 않다는 것이다. 실제적으로 인간 의지에게 도덕적 선이나 악을 선택하게 하는 주요 요인은 감각적 욕구 기능에 기초하는 열정의 영향력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열정들을 통제하는 작업은 덕들의 몫이다. 다시 말해 이성과 의지는 덕에 힘입어 열정을 지배한다. 따라서 선한 행위를 행하기 위해서는 덕들이 필수적이다. 열정은 우선 감각적 욕구들의 작용에서 비롯되는 영혼의 변모이다. 라틴어의 passio라는 말은 수용함을 뜻하며, 가능태-현실태 원리에 기초한다. 현대 언어로는 그것이 열정을 의미한다. 열정은 영혼의 운동이며 인간과 동물은 공통적으로 열정을 모두 가지나, 그 열정들에는 질적인 차이가 있다. 열정이 행위의 도덕성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는 인간의 욕구 기능의 강한 작용들인 열정들을 전체적으로 억압하는가 아니면 그것들에 대한 합리적 조절과 지배를 시도하는 가이다.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유적 차이인 동물성 그 자체는 선한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도덕적으로 선한 것이 될 수 있다. 인간의 영혼은 철저히 영적이다. 그러나 그것이 신체의 가능성과 결합하여 인간이라는 하나의 실체를 이룬다. 그래서 인간 영혼은 인간이라는 생명체의 현실적 모습이며 실체적 형상으로서 인간의 총체성과 단일성을 보장한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육체가 어떠한 물리적 혹은 육체적 변화를 겪을 때 영혼은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 이해될 수 있다. 예컨대 육체가 큰 상처를 입을 때 인간은 의식을 상실할 수도 있는 것과 같이 영혼은 항상 간접적으로 육체적 변화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이와 같은 육체 내의 변화로 인한 영혼 내의 변화는 어떠한 도덕적 의미도 가지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이러한 수동적 열정들은 도덕적으로 중립적이다. 그러나 윤리학에서 고려되는 정념들은 '인간 영혼 안에서 발생한다'고 할 수 있는 것들이다. 다시 말해 이성에 의해 이해되고 의지에 의해 의도되는 열정들이다. 인간 영혼이 육체를 움직이는 이상 그러한 열정들은 단순한 감각적 욕구들에 따르는 열정들이 아니다. 인간 영혼은 대상에 대해 어떠한 것을 인식함에 따라 그것을 적극적으로, 즉 자발적으로 추구하거나 도피하려는 열정을 가진다. 따라서 그러한 영혼 안에서 발생하는 열정들은 도덕적 의의를 가진다. 행위의 도덕성은 여러 차원의 기준을 부른다. 그것의 궁극적 기준은 신의 지혜와 동일한 신의 세계에 대한 기획과 통치를 표현하는 영원법이다. 모든 도덕적 법들은 그것에 기초하며 그것에서 유래된다. 더 가까운 도덕의 기준은 영원법의 일부를 반영하는 자연법이다. 그리고 행위의 도덕성의 가장 가까운 기준은 올바른 이성으로서의 실천이성이다. 인간은 우연적이고 구체적인 상황에서 자신의 개별적 행위에 대해 결정을 할 때, 자신의 실천이성의 최종적 판단인 양심에 비추어 그 행위를 평가한다. 그러나 양심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도덕의 기준이 아니다. 유한한 영적 존재인 인간의 고유 속성은 자신이 자신에게 법이 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인간 이성이 도덕법의 궁극적인 원리일 수 없다. 인간 이성은 신성한 이성에서 유래되는 실재의 법칙에 의해 지배된다. 사변적으로 인간은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실재에 대한 판단을 할 때, 그는 존재의 객관적이며 보편적 진리에 상응해야 한다. 명령하는 것은 의지의 특권이 아니다. 의지가 자신이 욕구 하는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행위를 명령할 때 의지는 이성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 그러한 이성의 규정 하에서만 의지의 행위가 법의 성격을 가진다. 결과적으로 법은 항상 이성에서 유래되는 명령이다. 법은 영원법과 비영원법으로 구분된다. 영원법은 세계를 통치하는 신성한 기획이다. 이 법은 신성한 이성 안에 있다. 비영원법은 자연법과 실정법으로 구분된다. 실정법은 인간적 실정법과 신성한 실정법으로 다시 구분된다. 인간적 실정법은 국제법과 시민법으로 나누어지며, 신성한 실정법은 모세 율법과 교회법으로 나뉘어 지고 모세 율법은 다시 도덕법과 예절법과 재판법으로 나뉘어진다. 자연의 법칙은 신성한 법에 의해 지배된다. 인간적이거나 신성한 실정법은 자연의 법칙을 내포된 신성한 법에 대해 외적이다. 그런데 도덕법으로서의 자연법은 어떠한 의미에서 자연의 법칙에 내재적이다. 자연법이 '이성적 피조물 안에서 영원법의 참여'이다. 다시 말해 자연법은 인간이 이성적 동물인 이상 불완전한 방식으로 참여하는 영원법의 부분을 말한다. 주목할 것은 자연법은 인간 이성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인간 이성에 내재한다는 것이다.인간 이성 자체가 사물의 지침이 아니고 인간 이성 안에 심어진 원리들이 자연적 이성의 지배 하에서 인간에 의해 행해지는 모든 것들의 지침이며 기준이다. 그러나 인간 이성이 자연에 의해 행해지는 모든 것들의 기준이 아니다. 자연법은 물리적이거나 인간 본성의 필연성에 의한 행위가 아닌 자발적 행위만을 지배한다. 모든 도덕적 덕들은 자연법에 의해서 지시된다. 인간의 형상적 본성에 적합한 모든 행위는 덕스러운 행위이고 자연법에 적합한 것이다. 그러나 선한 행위들 모두가 도덕법에 의해 직접적으로 지시되는 것은 아니다. 자연법은 보편적인 것들이다. 자연법은 선을 행해야 하고 추구해야 하며 악은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지침은 그 자체로 자명하다. 그래서 이것은 증명될 수 없고, 또한 증명될 필요도 없다. 그 결과 이 법칙은 모든 인간에게 알려진다. 즉 정상적인 성숙한 인간은 이것을 이해한다. 이 법칙은 인간이 선천적으로 선과 악을 파악하는 이해력을 가졌다는 것과, 인간이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해야 한다는 당위에 대한 이해력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이 법칙은 이미 인간이 선천적으로 선과 악에 대한 이해를 가졌다는 것을 전제한다. 따라서 이 법칙은 인간이 본성에 의해 근본적으로 도덕적 존재하는 것을 드러낸다. 인간이 그 자체로 선하거나 악하지 않다. 그러나 인간은 선에 대한 경향성을 가지며 선을 행해야 하는 당위성을 가진다. 물론 때로는 자연법 법칙들은 항상 예외적인 사례를 허용하며 이들 법칙들은 첨가나 삭감의 방식에 의해 수정될 수도 있다.올바른 이성이란 순수한 형식적 이성이 아니다. 올바른 이성은 구체적인 내용을 담보한다. 이것의 내용은 알려진 바로서의 세계의 모든 법칙성이다. 이 내용은 자연과 우주의 법칙만이 아니라 인간이 맺을 수 있는 모든 관계들에 대한 법칙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 자연 및 우주, 타인과 공동체, 역사와 문화 그리고 때로는 절대자와 가지는 관계들이 그것이다. 이 올바른 이성이 기초하는 세계의 질서 혹은 법칙 자체가 이성적 존재인 인간 행위의 기준일 수 없다. 따라서 인간 행위의 기준은 그러한 세계의 질서 및 법칙을 반영하는 이성이다. 모든 법과 같이 도덕법은 보편적 지침이다. 그런데 한 인간 행위는 개별적인 이유로 구체적이며 또한 자유로운 행위로서 필연적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우연적이고 상황 역시 반복되지 않는 것으로서 우연성을 지닌다. 실천이성은 도덕적 행위의 원리이며 그것의 질서지음의 원리이다. 따라서 보편적·도덕적 지식을 구체적 행위에게 적용하는 것은 행위자의 실천이성 몫이 된다. 개별적 행위자가 자신의 행위가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해야 하는 하는데, 이것은 그 자신만이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자신만이 자신의 의도, 자신의 선택의 동시, 그리고 구체적 상황을 알거나 자세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행위자 자신의 특수한 행위에 대한 판단은 자의적인 것일 수 없다. 마치 사변적 이성이 존재의 본질들과 그것들의 연관에 의해 지배되듯이, 실천 이성도 객관적인 올바름과 그릇됨에 의해 지배된다. 그러한 실천이성의 추리의 결론이 바로 양심의 내용이다. 양심이란 나의 실천이성의 최종적 판단이다. 그러나 양심은 실천이성의 보편적 기준의 하나의 행위에 대한 평가에 적용하는 것일 뿐 엄밀한 의미에서 도덕의 기준은 아니다. 도덕의 가까운 기준은 올바른 이성이다. 도덕적 행위자인 인간은 타자에 의해 그리고 물리적이 아닌 조건적인 필연성에 의해 선한 행위를 행하도록 구속된다. 다시 말해 그는 타자에 의해 도덕적인 필연성에 의해 실천이성의 명령을 수행함에 구속된다. 즉 그러한 명령을 수행할 의무를 가진다. 그를 구속하는 자는 궁극적으로 세계의 창조자이자 통치자인 신이다. 그래서 인간 행위자의 양심이 유일하거나 전체적인 도덕적 행위의 원천인 것은 아니다. 행위자는 엄밀한 의미에서 어떠한 행위를 행함에 자신을 구속할 수 없다. 자연적 필연성은 행위자의 내부에서 비롯되며, 도덕적 의무는 타자의 원인성에 의한 것이다. 도덕적 양심의 구속력의 궁극적 근거는 모든 인간을 통치하는 도덕적 질서의 주관자인 절대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도덕성은 궁극적으로는 기초를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신의 존재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도덕성이 성립되지 못하거나 인간의 행복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양심이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간이 무한과 관련된 생산자로서 행세하게 되면 이 생산의 주체는 객체와의 격차나 간격을 해소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하여 생산된 객체를 계속 자기 안으로 귀속시키고 싶어한다. 정신은 그 자유로운 사유적 운동으로 자연을 해석하고 통일한다. 존재란 결국 주체와 객체의 결합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신을 객체로 삼는 것과 같은 결과를 낳는다. 신을 믿는다는 것은 결국 인간이 신을 경로로 해서 원래의 출발 자리인 자기에게로 신과 함께 귀환하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자아의 의식은 그 주체성을 그 어떤 경우라도 포기하게 만들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