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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Ⅲ. 인간을 위한 신학의 한계- 1. 죽음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법성경신학-

Ⅲ. 인간을 위한 신학의 한계1. 죽음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법 이런 와중에서 신의 규범은 어떻게 되는가? 초월적 주체로서 신은 세계에 형식을 제공한다. 그 형식 안에서 세계는 신의 규범에 묶인다. 그런데 그 규범이 문자로 되어 있기에 과연 문자와 실재 사물이 일치되는 식으로 인간들이 읽어낼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생겨난다. 인간은 의사소통의 차원에서 문자를 대하게 된다.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송신자가 수신자에게 메시지를 보내야 하며, 메시지가 효과적으로 전달되기 위해서는 그 메시지가 지시하는 맥락이 있어야 된다. 그리고 그 맥락이 수신자에 의해서 파악되어야만 송신자의 의도가 전달될 수 있다. 메시지는 누구나 알 수 있는 공통된 코드를 통해서 전달되어야 하며, 마지막으로 메시지는 송신자와 수신자 사이에 커뮤니케이션을 이루어질 만 한 물리적·심리적 접촉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코드화에 예술적 감성이 가미되면 작품 과정은 이렇게 된다. 작가→창작과정→작품→해석과정→독자 이 작품 과정을 거꾸로 하면 비평 과정이 된다. 독자→해석원칙→작품→창작과정 탐색→작가 탐색이렇게 되니 작가와 독자의 만남은 작자가 지니고 있는 자기 목적성 안에서 우연한 만남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에는 자아가 타인을 통해 자아를 재확인하는 과정에 불과하다. 자기에게 의미가 되돌아가면서 그 의미성을 강화시켜 는 결과를 낳는다. 메를로 퐁티에 의하면, 지각의 주체는 '사유'가 아니라 '신체성'에 있다. 나의 신체에 의해서만 나의 사물이 존재한다. 이러한 신체의 능동성에 의해서만 주관이 형성된다. 인간의 신체라는 것은 단순히 물질 세계의 한 부분이 아니라 이 주관에 의해서 세계의 모든 것을 흡수해 낼 수 있다. 육체라는 물성화된 인간은 육체를 통해서 외부의 환경과 접하고 비로소 자기를 파악하고자 하는 의식을 갖는다. 따라서 세계는 인간의 신체 안에 들어와 있으면서도 동시에 인간의 신체는 세계의 일부로서 교류가 된다.세계를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이 결국 자기 자신에게로 그 원인 규명이 돌아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세계 해석은 곧 해석자 자신을 해석하는 작업이다. 그런데 신의 진리성이 문자로 전달되면 인간들은 그 문자를 해독하는 과정에서 신의 사법적 권위에 저촉을 받게되고 판결을 받게 된다. 살기 위하여 문자를 보다가 죽는 수가 생긴다.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후 3:6)모세가 시내산에 가지고 온 말씀은 자신이 쓴 글이 아니다. 그 글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엄위하심을 함유하고 있고 또한 능력으로 행사되고 있다. 참으로 거룩하지 않는 자라면 그 말씀이 발휘하는 거룩으로 인해 저주를 받아 사망하게 되어 있다. 그 말씀은 거룩한 차원 만에서 통용되는 문자이다. 그래서 거룩을 이겨내지 못한 존재는 아예 그 말씀의 세계에 산 채로 들어설 수 없다. "너는 백성을 위하여 사면으로 지경을 정하고 이르기를 너희는 삼가 산에 오르거나 그 지경을 범하지 말찌니 산을 범하는 자는 정녕 죽임을 당할 것이라 손을 그에게 댐이 없이 그런 자는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하거나 살에 쐬어 죽임을 당하리니 짐승이나 사람을 무론하고 살지 못하리라 나팔을 길게 불거든 산 앞에 이를 것이니라 하라"(출 19:12-13) 하나님께서 모세만 불러 올리신다. 이로서 모세는 거룩이 제공하는 삶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40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으면서도 살 수 있었던 것은 그 세계가 오직 거룩으로만 살 수 있는 말씀의 세계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이것을 고린도 후서 3:17에서는 '영의 세계'라고 말한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영은 주가 아니다. 그러나 주는 영이 될 수 있다. 영으로 계신 주님으로 인해 이 거룩한 영광에 참예할 수 있는 혜택을 부여받는 자들이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모세처럼. 그러나 모세가 그 거룩한 세계에서 벗어나 이 인간 세계에 나타났을 때, 백성들은 경악했다. 그들은 모세 얼굴에서 방출되고 있는 거룩한 광채를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런 수준에 두고 논하고 있다. 문자로 보고자 하는 자는 그 문자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면서 죽지 않고 사는 수는, 주의 영 안에 놓여있는 경우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의 취지는, 인간은 자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해독해 낼 입장이 못된다는 것이다. 모세가 가지고 온 말씀으로 인해 모세와 백성들 사이에 현격한 단절이 성립되는 것처럼, 주의 영 안에 거하는 자와 육신에 거하는 자에게는 현격한 단절이 성립된다. 결국 모세가 얼굴에 수건을 쓰고서야 모세는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백성들 속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수건이 여전히 모든 사람의 마음을 덮고 있다. 따라서 진정한 복음의 광채를 쬐일 수 없다. 오직 그리스도의 영 안에 들어올 때만 벗겨진다. 이것이 바로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이 속된 세계에 대한 심판적 자질이다.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은, 십자가 사건이 기록된 그 대목만이 원어적으로 주해한다고 해서 뜻이 풀어지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 격리되어 있음을 드러내는 사인이기 때문이다. 왜 성경을 보고자 하느냐, 무엇을 얻기 위해서 성경을 보고자 하느냐 에 대한 그 의도성까지 십자가 앞에서 정죄 당해야만 하는 입장에 놓인 것이 인간들이다. 개인적인 언어활동은 이미 그 사회의 기호 체계의 틀을 벗어날 수 없는 관습화된 문화적 사실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십자가 중심의 계시성은 인류가 뿜어내는 모든 의도를 근원적으로 정죄하시면서 다가오신다. 철저하게 비밀스럽다. 성령이 아니면 아무도 십자가의 의미를 모른다. 심지어 그 십자가 처형 현장에 있었던 자도 십자가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6-10) 모르는 정도가 아니라 도리어 미련하고 어리석다는 이유로 배척하게 마련이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3-24) 이로서 인간은 육적인 성향을 더 이상 은밀하게 감출 수가 없이 다 드러나게 되어있다. 이런 방식으로 십자가 폭탄은 계속 투하된다. 성경 전부가 그 밑에 십자가 폭탄을 감추어두었다가 이 종말에 성령께서는 말씀을 앞장세우시면서 그 배후에 두고 있는 십자가 폭탄을 남김없이 인간 세계에 다 쏟아 붙는다. 십자가 능력과 은혜로만 될 일은 인간들은 집요하게 행함으로 성취하려는 성향을 도무지 멈출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롬 11:6)이것이 하나님께서 벼르고 벼른 언약적 차원에서의 심판성이다. 십자가의 심판이 곧 은혜로 느껴지는 사람은 이사야 같은 영적 체험을 가진 자들뿐이다. "이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4-5) 사도 바울도 같은 고백을 한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언약에 의하면 반드시 심판이 이루어져야 한다. 언약 안에서 축복과 저주가 함께 담겨있다. 여호수아 8:33-35절에 보면, "온 이스라엘과 그 장로들과 유사들과 재판장들과 본토인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레위 사람 제사장들 앞에서 궤의 좌우에 서되 절반은 그리심산 앞에, 절반은 에발산 앞에 섰으니 이는 이왕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하라고 명한대로 함이라 그 후에 여호수아가 무릇 율법책에 기록된대로 축복과 저주하는 율법의 모든 말씀을 낭독하였으니 모세의 명한 것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온 회중과 여인과 아이와 그들 중에 동거하는 객들 앞에 낭독하지 아니한 말이 하나도 없었더라"라고 되어 있다. 하나님의 언약에는 축복과 저주, 모두를 포함하고 이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이룰 때 축복만 이루는 것이 아니라 저주도 반드시 이루어내게 되어 있다. 이처럼 하나님의 관심은 언약 완성과 그 내용에 있지 결코 개인에 대한 구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들은 언약 완성을 위해 동원된 존재에 불과하다. 이 언약완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언약궤가 가진 위력을 온 우주에 퍼지게 하는데 있다. 언약궤 위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머무는 곳이다. '주의 이름'이 온 우주에 퍼지는 일만이 진정 하나님께서 영광이 되는 길이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9-11)그렇다면 이 오직 하나 뿐인 이 언약궤는 축복산과 저주산 가운데 어느 쪽을 자신의 자리로 정돈시키는가? 여호수아 8:30절에 보면, 에발산, 즉 저주산이다. "때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에발산에 한 단을 쌓았으니" 즉 하나님의 언약은 저주 편에서 일을 시작하는 것이다. 축복이란 저주가 저주답게 하는 와중에서 형성된다. 그 어느 누구도 자기 자격으로 축복을 요청할 입장이 못된다. 축복이란 오직 저주 속에는 움직이는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만 피어난다. 즉 언약에는 들어있지 않고서는 축복도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을 산 채로 들어가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언약궤에는, 언약은 인간의 이름으로 인해 저지르진 죄가 인간을 향하여 분노의 저주를 퍼붓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약궤에는 인간의 이름으로 억울하게 죽은 '하나님의 이름'만이 담긴다. 그 이름은 항상 인간의 이름의 횡포를 아울러 온 우주에 알려주고 있다. '희생당한 하나님의 이름'이 되는 것이다. 마치 야곱에 의해 공격받은 천사의 심정으로서.(창 32:25) 따라서 그 '주의 이름'으로 인해 언약궤가 가는 곳마다 인간의 이름들은 죽어야 한다. 언약을 인도하시는 '주의 이름'은 오로지 그 언약 안에서만 살 자들을 찾아서 구원하는 능력이 함유하고 있는 것은 오직 '용서'로서만 가능하다. 즉 저주 없는 구원이란 없다는 이야기다. 이 저주를 위해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동원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2-13) 그래서 십자가의 심판성과 저주성과 무관한 성경 말씀은 어느 한 곳도 없다. 모든 말씀의 그 바탕에는 십자가의 취지와 연관되어 있다. 성령께서 영적으로 성경을 해석 할 때에 십자가의 복음을 전달되지 않고 누락시키는 식으로 성경을 해석하지 않는다. 이처럼 모든 성경 말씀은 반드시 십자가를 경과해서 도출해야 하는데 그것은 구원과 무관한 성경 해석이 인간으로부터 반드시 나온다는 점을 밝혀져야 구원은 인간들의 성경 이해력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에서만 나오는 능력으로만 가능함이 분명해지기 때문이다.십자가를 거치지 않는 해석은 환상을 낳는다. 십자가란 인간에 의해서 '메시야 밀침', 혹은 '자빠뜨림', 혹은 '제거' 해야만 했었다는 동기성을 함유하고 있기에, 십자가를 거치지 않겠다는 것은 자신의 해석력 속에 들어있는 메시야에 대한 적대성을 고려하지 않는 채 해석을 내놓겠다는 말이다. 이렇게 되면, 모든 인간이 원초적으로 '아담 안'에 속하지만 그 사람만큼은 '아담 안'에 속한 적이 없는 셈이 된다. 그런데 '아담 안'에 속한 적도 없는 자는 결코 '그리스도 안'에 속할 수 없게 되어있다. 왜냐하면 구원이란 옛 언약 안에서 폭발하는 새 언약의 위력이기 때문이다. 즉 구원이란 '아담 안'에 있는 자에게 대해서 새 언약적 능력이 작렬해서 얻어진 결과이다. 따라서 '아담 안'에 놓여있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은 전혀 구원의 능력에 접촉한 적이 없는 자가 된다. 이처럼 자기 속에 있는 본래적인 '메시야 공격성'을 인정하지 않는 상태에서 해석을 내놓겠다는 것은 죄악으로 지배받는 '아담 안'의 속성을 유감 없이 발휘한 해석이 나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새 언약 시대에서는 비현실적 규정받는 환상이 된다. 이 환상은 인간들의 원초적 이해력의 증폭으로 야기된 결과물에 해당된다.따라서 새 언약 안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성경 해석은, 성경 구절 하나 하나에 대해서 자신의 존재 구원 위주로 움직이는 비(非)십자가적이고 비복음적인 발상을 병행해서 도출시키면서 동시에 그것이 인간 배후를 장악하고 있는 악마의 사주에 의해서 제안된 성경 해석임을 십자가의 의(義)로 정죄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게 된다. 즉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이 얼마나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는 식으로 구원을 달성해 보려고 모든 변화와 동기에 대해서 성령께서는 오직 십자가로만 대응하면서 거룩한 전쟁을 벌리게 된다. 이런 사정 안에 놓여 있기에 인간들은 신의 함축된 판결성을 제대로 읽어낼 수가 없다. 인간은 자아의식은 자신을 판결 받을 대상으로 간주하지 않고 모든 판결로부터 무관한 입장에 있거나 자체적인 자체력이나 반성으로서 충분하게 해소된다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으로 잘할께요. 그러한 죄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늘 조심하고 최선을 다하며 살께요" 이것으로 문제 끝이다. 과연 인간은 자기 죄를 미리 방지할 수 있을까? 죄를 방지하려면 선을 무기로 삼아 악을 이겨야 하는데 자체적으로 선을 결집한다는 것 자체가 자아를 새로운 집착성에 묶이게 된다. 그런데 이것이 절대선을 가장한 악이다. 즉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자아 내부에서 죄가 다른 모습으로 뭉쳐서 몰려다닐 뿐이었다. 악은 그 선에게 잠시 주도권을 내어주는 대신 대가를 요구하게 된다. 그것은 선의 영역 안에 악의 영역을 일부를 점유하겠다는 것이다. 선은 악의 이 타협안을 받아들이면서 자체적으로 마모가 일어난다. 선의 일부가 악으로 뜯겨 나가는 것이다. 선이 악에서 다소 양보를 해주는 것이다. 이러다 보면 점차 선과 악은 평준화된다. 어느 것이 선이지 어느 것이 악인지 결국 구분 짓기 곤란하다. 만약 양보를 하지 않고 절대선으로 밀어붙이려고 한다면 절대선의 위상을 자체적으로 확정시키야 하는데 절대선이란 맞은 편에 절대악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한 도저히 알 수 없게 되어있다. 악을 공격하고 싶을 때 선이 본색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절대선에 비견할 만한 절대악이 드러내지 않는 상태에서는 일단 자신의 모든 의식과 행위를 절대선이라고 결집을 해야한다. 이것이 바로 자기에게로 집중된 집착이다. 이러한 현상은 애초부터 있지도 않는 절대선을 악을 재료로 삼아 '집착'이라는 형태로 대처하므로서 더 이상 자신을 악인으로 규정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결과이다.이렇게 되면 신이 외곽에 머물고 그저 곁눈질하는 참고 사항일 뿐이다. 신이 주셨다는 서술적인 문구나 명령적인 문구에서 신적 심판성을 누락한 채 절대적인 선이 되어버린 자신이 자신을 심판하고 정돈하게 된다. 자연적으로 신의 말씀은 부차적이고 우연적이고 임시적이고 산발적인 선입견을 가지고 접촉하게 되는데 이것이 인간의 은유적 해석성이다. 인간의 언어 행위는 은유로서 움직이고 본문 위에 헤엄쳐 다닌다. 마치 금속에서의 자유 전자처럼 실재와 결코 합치되지 않는 상태에서 근접할 수 있는 은유들만 들이대면서 세상 구조를 해석해 나가는 것이다. 이처럼 언어의 규칙과 구조로서는 은유의 의미가 제대로 포착되지 않는다는 것이 참으로 답답한 일이다. 은유는 언어 규칙을 초월하는 그 무엇이 있는 것이다. 문제는 진리가 이 은유적으로 움직이는 언어에 담겨져 옮겨지고 선포된다는 점이다. 이렇게 되면 의미와 진리성이 같이 구현되지 않는 현상이 빈번하다. 하나의 기호가 의미를 지니는 동시에 거짓 일 수 있기 때문이다. 언어의 기준과 참의 기준을 일률적으로 정립해 낼 수 있을까? 결국 사람이 실존성이 여기에 개입되지 아니하면 안 된다. 사람을 위한 의미요, 사람을 위한 진리일 때 비로소 그 언어행위는 가치가 있다고 일방적으로 밀고 나가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진리의 문제를 경험에서 찾는 반면에, 의미의 문제는 선험적으로 처리한다. 언어란 단순히 소리나는 가장 원자적 요소인 음소의 의미를 집합적으로 모집했다고 의미가 파악되는 것이 아니다. 의미란 음소의 변별성과 배제성에서 비롯된다. 음소의 근본적 현상은 대조의 현상이다. 언어 자체에는 오직 차이성만 있고 아무런 규정항이 없다. 차이성이 동일성을 나중에 배태한다. 동일성은 근본적이기보다는 파생적인 어떤 것이다. 차이성이 더 근원적이라는 말이다. 이처럼 음소 분석은 원자론으로는 소용이 없고 전체론적으로 봐야 한다. 체계와 동떨어져 개별적으로 놓여 있는 음소는 그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없다. 전체 체제를 전제로 해야한다. 행위나 발언의 의미는 직접적으로 실증이 가능한 어떤 것이라기보다는 하나의 특정한 표현의 선택에 의해 배제되는 모든 대안적 가능성에 의존하는 어떤 것이다. 물리적으로 구별될 없는 행위나 발언은 다른 체계에서는 다른 의미를 가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선천적으로 색을 본 적도 없는 장님이 그가 비록 색을 인지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실수 없이 색에 관한 낱말들의 용법을 배울 수 있다. 만약 경험주의적 설명에 따르면 그는 결코 색에 관한 낱말들의 의미를 알 수 없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님들은 사물을 볼 수 있는 정상인과 똑같은 방식으로 의미론적 대조 체계를 익히고 있다. 따라서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현재 구성된 추상적 대조들의 체계이지, 그 표현이 언제, 어떻게 사용되어 왔는지에 관한 세세한 역사가 아니다. 부호가 전달하는 정보가 의미를 갖는가, 혹은 갖지 않는가 여부는 그 부호가 어떤 역사를 갖고 있는가 또 그 부호가 실제적으로 사용된 적이 있는가의 여부와는 상관없다. 이것은 인간들이 자의로 규칙을 조정하고 만들어 내는 것이지, 규칙이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과 통한다. 그 어떠한 행위 방식도 규칙에 의해서 결정될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행위 방식이 그 규칙과 일치하는 것으로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지내온 것이 관습과 관행이요 문화이다. 남자가 넥타이를 매고 여자가 치마를 입는 것은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건 없건 관습이 실행하는 규칙을 낳았다는 증거이다. 언어 역시 이와 마찬가지이다. 지적 세계는, 지적 세계가 물질적 세계를 본뜸으로써 만들어질 필요가 없다는 깨달음으로 출현하는 것이다. 물질적 세계는 사물들로 구성되고, 그 사물들이 서로 관계를 맺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적 세계는 임의적인 관계의 조합들로 구성되고 그 관계들이 연계되어 사물들을 규정하는 것이다. 의미와 무의미를 구분하고 진리와 비진리를 구분 지으면서 관습과 관행의 구조를 역사 안에서 계속 엮기도 하고 솎아내기도 하는 인간 자체를 직접 공략해서 검색해 봐야 한다. 도대체 인간은 무엇이며 어디서부터 시작해서 어디로 소멸되는가? 아담 안에 있는 인간들에게 물어봐서는 안 된다. 같은 처지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아담 안 있지 않고 아담 밖에 있으면서 아담 안으로 들어온 분에게 물어봐야 한다. 그 분의 일생에서 무슨 의미 있는 진리적인 사태가 벌어졌는지를. 십자가는 우리에게 죽음을 보여주며, 떼려야 뗄 수 없는 삶의 죽임으로서 죽음의 의미를 생각하게 만든다. 신은 자신의 아들을 죽임으로써 부활을 약속한다. 이는 만물이 텅 빈 공간인 죽음을 축으로 끝없이 순환한다는 말이다. 우주의 주인은 죽음을 잉태한 신이었다. 십자가에서 죽음을 절대 주인으로 끌어들여 속죄와 부활의 주체를 제시한 사람이 다름 아닌 헤겔이다. 데카르트는 인간은 사유하는 주체로 정립했고, 칸트는 사유의 주체와 실천의 주체를 분리하여 경험보다 선험적 직관을 우위에 놓았다. 헤겔은, 칸트의 주체는 타인을 방문한 사회적 주체가 아니기에 개인적인 자유 의지에 머무를 뿐 진정한 보편 주체에 이르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인생에서 진짜 주인은 누구인가?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신은 누구인가? 실존적 측면에서 봐서 아무리 노력해도 거역하지 못하는 단 하나의 절대 주인은 죽음이다. 삶을 한 순간에 지워버리는 두려운 부정성을 고려하지 않고서 복음은 보편성에 이르지 못한다. 헤겔이 알았던 것은 죽음이 삶의 주인이라는 사실이다. 신은 스스로 '인간이 되어' 십자가에 매달려 죽음으로써 죄의 값을 지불했다고 말한다. 이로서 진정한 주체의 탄생은 인간 스스로 주인이 아니라 하인이 되어 주인인 죽음을 받아들이고 그 죽음과 함께 부활의 주님도 같이 받아들이게 된 새로 태어난 주체로 다시 태어나는 데 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4-17) 이것이 십자가가 암시하는 죽음과 부활의 의미이다.죽음이 어떻게 삶에 내재화되는가? 실재 세계의 원형은 죽음이다. 그것이 삶 속에 들어와 있으니 주체는 삶과 죽음의 상호 접촉에 의해 연결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주체의 죽음을 요구하고 가중하는 타자와 그 죽음을 안고 살아가는 주체와 서로 연결되어 있으니 이 주체는 분열된 주체가 될 수밖에 없다. 주체는 원래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다. 이 이기적 상태에서 대상을 받아들이게 되는데 여기서 형성되는 것이 상징 질서계이다. 주체는 언어로 짜여진 상징 질서를 받아들이면서 죽음의 전부를 다 받아들이지 못하고 항상 여분의 그늘이 지게 된다. 이렇게 해서 인생이란 지연된 죽음의 삶이 된다. 욕망의 주체는 살고자 애쓰지만 그래도 계속 죽음의 강도가 더욱 세다. 삶이란 죽음을 부풀려놓은 욕망의 대상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상징의 질서 속에서 늘 환상을 꾼다. 분열된 주체가 늘 욕망의 대상을 찾아보는 모습이다. 꿈을 잠시도 꾸지 아니하며 살아갈 수는 없다. 그런데 실재계는 그 환상에 늘 구멍을 뻥 뚫어놓는다. 이로서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완벽하게 다 채우지 못한 채 삶을 끌고 간다. 신체가 주체를 끌고 가는 최종 목적은 부서져서 죽는 것이다. 삶은 죽음을 우회해서 천천히 가고 있다. 이렇게 천천히 지연시키면서 즐기면서 죽음을 잊도록 조치하는 것이 상징 질서계에서 통용되는 잉여 쾌락이다. 여기서 쾌락의 원형은 파괴적 향유로서 법으로 위장하게 된다. 즉 법을 의도적으로 요청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법이 강화되면 향유도 같이 증가한다. 법을 지킨다는 것은 즐거움의 일종이다. 법을 강화하면 그 법의 준수를 위한 폭력도 강화된다. 법은 텅 빈 기표이다. 원인 모를 힘이다.칸트는 지고의 선(善)에 도달하는 도덕적 규율과 법을 순수 이성에다 호소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왜냐하면 시간과 공간, 인간을 둘러싼 환경이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주관적이고 잠정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늘 주변의 삶의 환경 탓으로 돌린 가능성이 농후하며 무슨 판단을 할 때에도 최고의 선과 악을 놓고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늘 덜 나쁨과 최악 사이에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 그는 이 인식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방책을 모색한다. 이것이 칸트의 바로 실천이성이다. 순수 이성이 물(物) 자체를 포착하지 못하고 '지고의 선(the Supreame Good)에 닿을 수 없다는 인간은 어디서 도덕적인 행위를 기대할 수 있는가 인간이 동물과 다르기 위해서 마련되는 도덕적인 규율과 법은 어디에 근거해야 하는가 종교는 어디에 위치해야 하는가?인간이 동물이나 자연과 같으면서도 그것을 초월하는 뭔가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기존의 경험론을 극복하기 위해 칸트가 끄집어낸 숙제였다. 인간에게는 뭔가 고귀한 것이 있을 것이다. 칸트는 인간의 감동을 맑고 선하게 만드는 '미(the Beauty)의 역할과 그것과 차원이 다른 숭고함의 영역을 대비함으로서 순수한 이성과 실천이성의 틈새를 종합하는 비판이성의 기능을 제시한다. 칸트의 미학에는 어떤 목적이 있다. 보는 이를 즐겁게 만들고 마음을 순화시키는 기능이 있다. 그러나 그 감흥은 증오나 폭력적인 방향으로 악용하거나 선동하는 기능이 아니라 평화롭게 가라앉히는 기능이다. 그러므로 미는 목적 없이 목적을 가지고 아름다움이란 선을 지향한다. 이것과 다른 감동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장엄이다. 장엄함은 수학적인 설명이 가능하지 않다. 예를 들어 화산이 폭발하고 지진으로 땅이 흔들이고 폭풍우에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광경을 보면 장엄을 느낀다. 왜 인간은 자연의 파괴를 보면 마음이 고양되는가? 이것이 인간과 자연이 다른 점이다. 자연의 파괴적인 힘은 인간이 그것을 보며 느끼는 숭고함보다 하위에 있다. 인간에게는 파괴와 증오를 숭고함으로 고양시키는 능력이 있다. 이것이 환상의 힘이며 칸트는 이 심미적 이성을 보았다. 그래서는 단순한 이해와 숭고함을 느끼는 이성으로 두 영역으로 나누기도 한다. 초월적인 이성은 인간을 지고의 선과 일치시키는 못해도 인간이 지고의 선에 가까이 가게 할 수는 있다. 도덕은 이해보다 높은 차원의 이성인 직관에 의지하여 세워지고 지켜진다. 그리고 미는 개인적인 감동과 보편적 도덕을 조화시키는 윤리적 이성이다. 칸트에게 있어 순수이성이란 쾌와 불쾌의 감동이 인간의 의지를 결정하므로 인간 의지의 객관적 재현은 가능하지 않고 우발성만이 인간 의지를 지배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처럼 순수하게 경험에 반응하는 이성은 물 자체를 포학하지 못하고 항상 상상한다. 그러면서도 칸트는 경험보다 우위에 있는 보편 선의 영역을 제시하는데 이것은 대상이나 실천 행동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행위의 형식(form)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일관성 있게 보편법 형식을 따르는 것이 도덕적 당위이다. 행위의 형식이란 감동이라는 내용을 억압하는 지고의 선이다. 감동을 지우고 그 자체를 메우는 보편 법의 형식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인간의 분열된 주체가 자리잡고 있고 상징 질서계이다. 그렇다면 지고의 선이란 인간의 상상을 억압하는 텅 빈 기표가 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언제나 법을 염두에 두고 살아간다. 그리고 법을 지킨다. 그렇지 않으면 주체자로서의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의 신체성은 그 신체로 실천하는 대목에서 오히려 없는 욕망을 만들어 내게 된다. 법은 욕망은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법에 의해서 여분의 욕망이 새로 발생한다. 이처럼 욕망이란 타자의 욕망으로서 욕망의 경계 넘기에 법이 같이 합세하고 있는 것이다. 욕망이 늘어나면 법의 범주로 같이 늘어난다. 욕망은 그 욕망을 거세하고 금지하기 위해 새로운 법을 부르게 되고, 그 법은 새롭게 없는 욕망을 계속 생산하게 된다. 죄가 새로운 선을 탄생시키고 곧장 그 선을 죄악된 것으로 물들게 해 버린다. 아무리 지고의 선에 가까이 가보고자 해도 실재계에서 주어지는 텅 빈 죽음의 힘은 절대선을 더욱 더 멀리 떼 놓아 버리는 것이다. 어느 정도 선을 따라 붙였다고 생각하는 순간, 자기 신체를 지탱하는 욕망은 여분의 쾌락대로 움직이기에 분열된 주체는 또 다른 법을 동원시켜 땜질을 하고자 한다. 변명과 핑계 대는 것을 허락해 달라는 것이다. 대상과 하나가 되기 위한 자기 수련과정이다. 하지만 행위자의 행위는 그저 뭔가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행위 후에 행위 전에 다르게 되는 것에 만족하려 한다. 즉 주체는 그 행위로 뭔가를 달성하는 자가 아니라 행위를 통해 뭔가를 새롭게 겪는 자이다. 이런 행위를 통해 지난날의 주체상은 계속 지워져 버린다. 그리고 새로 경험한 행위 속에서 자아를 수시로 정비하려고 한다. 이것이 인간의 상징 질서계 속의 모습이다. 이처럼 죽음의 무의식이 살고자 몸부림치는 의식 세계를 자꾸만 삼키면서 진격한다. 이것이 인생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인간은 환상 속에서 대상을 본다. 신체를 둘러싸고 행동으로 움직이게 하는 것은 끝까지 환상이다. 인간은 신으로부터 파괴당할지언정 결코 신에게 패배할 마음은 없다, 따라 붙일 때까지 따라 붙는다. 무한한 절대성과 자신과 기어이 간격을 좁히고 싶어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자유의지를 신의 절대의지와 동일하게 다루고 싶어한다. 자신이 불완전함을 지우고 완전함에 이르기 위해 자신의 의지를 사용한다. 그 자유의지의 끝에는 자신의 환상이 낳은 신이 대기해 있다. 그런데 그 신은 그 신을 만든 창조자인 그 인간처럼 분열된 주체를 갖고 있다. 지옥을 만들어놓고서도 그 지옥을 스스로 부정해버리고 지옥의 스산한 징후로부터 인간과 더불어 멀리 도피행각을 벌리는 그런 신이다. 욕망을 일으키는 대상으로 작동하는 것이 바로 실 재계의 여분이라면 그 여분은 아무리해도 다 제거할 수 없다. 이것이 적개심이 된다. 그런데 도리어 이 적대심이 사람의 삶을 이끄는 동력이기도 하다. 삶의 충동은 누군가를 미워할 때 생긴다. 복수할 일이 남아 있을 때는 자살하고 싶은 마음이 싹 가신다. 자기 민족에 대한 애국심은 타민족에 대한 지독한 배태의식을 낳는다. 경쟁자가 있는 이상 인간은 자기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인간들은 신은 경쟁의 파트너로 최종 삼는다. 공격 목표이다. 죽음 속에 던져진 이상 당연히 발생되는 악의 징후이다. 왜냐하면 죄의 값은 처음부터 사망이었기 때문이다.(롬 6:23) 이로서 인간은 하나님의 원수임이 확인된다.(롬 5:10) 이 적대감은 거룩한 말씀의 가르침으로 제거되거나 녹아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타종교를 향한 정복욕으로 옮아 갈 뿐이다. 파괴적 충동이 사라지면 본인도 살 의욕이 상실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간은 인간의 주체를 욕망으로 삼켜버리는 유령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다. 이 종교 욕구를 하이데거는 '존재'라고 표현하고 있다. 즉 인간은 무의식의 간섭에 의해서 자기가 자기 마음대로가 아닌 다른 것을 상상하므로 써 이미지를 발산하는데, 이 발산된 이미지가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이며 또한 종교 형태로 발산된다는 것이다.예를 들면, '신앙한다' 또는 '신앙 있다' 하는 것조차 인간의 배후에 자기를 닮은 존재에 의해서 주도되는 형태에 불과하다. 성경 적으로 말해서 '아담 안'에 존재하는 방식이다.(롬 5:14) 하이데거는 존재성을 더 탐구하여 말하기를 '자아'와 '세계'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것이 '존재'라는 것이다. 자아를 제대로 파악하자면 존재가 존재하는 방식을 알아야 한다. 여기서 '존재'와 '자아' 사이에 균열과 구분이 생긴다. 자기라는 신체성과 지기가 신체로 되어 있음을 파악하게 하는 과정을 통해서 '자아'는 늘 '존재'와 결합되고 싶어한다. 하지만 늘 실패하고 만다. 존재는 자아의 주관이 파악하려는 그 객관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그래도 자아는 이미 존재 위에 있기에 끊임없이 존재를 해석하고 이해하려고 한다. 여기에 시간적 요소를 가미해 보자. 그러면 비로소 존재와 자아의 실체가 밝혀지는데 시간이 지나면 자아라는 존재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것은 존재 위에 자아가 기초해 있기에 가능한 사태이다. 자아가 존재와 일치되어 영원성을 보장받으려고 애쓰는 가운데서도 끊임없이 존재로부터 자꾸만 미끄러지는 이유는 시간적으로 자아는 늘 존재를 소유하려고 하는데 그 소유된 존재는 이미 죽음과 결부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죽음이란 곧 존재의 소멸을 뜻한다. 존재의 무(無)이다. 이것은 자아의 죽음이며 자아가 무가 되는 현상을 두고 말한다. 무에 청초한 자아는 무적 속성을 지닌 존재를 표현하는 증거물이다. 그래서 자아와 존재는 일치되지 못하고 늘 미끄러져 내려오는 것이다. 이해하려고 애써도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자기 자신이다. 다만 존재만이 존재로만 홀로 영원할 것이다. 하지만 자아는 늘 불안만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불멸자로 만들어 놓고 늘 그 존재 위에서 불멸한 것을 희망한다. 이러한 희망은 상상력으로 도출된다. 이 상상력으로 자아 불멸의 이미지를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희망과 절망의 이미지요, 불멸과 소멸 사이의 이미지요, 높음과 낮음의 이미지요. 선과 악을 대립시키는 이미지요, 안정과 불안정의 이미지요, 천상과 지상의 이미지요, 성스러움과 속됨의 이미지요, 가벼움과 무거움의 이미지요, 신과 인간의 이미지요, 차가움과 따뜻함의 이미지요, 생명과 죽음의 이미지 등 모두 두 개씩 배타적 개념이 쌍을 이루는 이미지로 최종 귀착된다. 이것은 실존과 존재의 대립을 극복하기 위한 이미지들이다. 이 대립은 '은폐'하므로 서 존재로 지향된 은유적 몸부림을 보인다. 은유는 이처럼 우연을 필연적으로 잠시 머물게 한다. 가스통 바슐라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체와 대상 사이에 우선 순위가 바뀌게 되는데 앞 단계에 있어서는 우선 대상이 있고 그 다음 뒤이어 그 대상 속에 상상력이 화육된다. 그런데 그 다음 관계에 있어서는 우선 상상력이 있고 그 다음 그것이 대상을 창조하여 거기에 화육함으로써 외계에 나타난다"이러한 이성적 인식 방법은 곧 '자기에 의한 통치 방식'을 가지고 눈 밖에 펼쳐진 전 세계를 통치하려는 욕구의 발현이다. 세계 정복의 기초점이 되면서도 동시에 세계를 넘어서는 극복점이 되는 발판으로 자기 이성을 사용하다 보니 여기에 '이성의 횡포'가 있다. 즉 멈추지 않는 범주의 확대가 계속 요구되는 것이다. 보다 더 큰 범주 안에 보다 더 큰 테두리 안에 세계를 자꾸만 담아내려고 한다. 이 구조의 확대를 끌어줄 새로운 틀로 도입되는 것이 '시간 개념' 곧 역사 범주의 영원성이다. 약간 지연되더라도 모순되고 대립되는 모든 것도 영원한 어떤 한 시간점에서 해결이 지어지지 않겠느냐고 희망을 품어보는 것이다. 개방적 역사 외부의 구조를 역사 내부 구조로 변형시켜 추진력을 얻어내려 하는 것이다. 우연을 역사 안에서 필연으로 묶어내고. 허구는 역사의 우연적인 사건들이 뒤엉킴과 마주침으로 자연적으로 차이점이 해소되리라 믿어보고 싶은 것이다. 과연 인간의 시간 의식이 구원의 방편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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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687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3,992 성경 요 19장 17-22 (유대인의 왕)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06-12-04
3,991 강의 요19:23-30(다 이루었다)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06-12-04
3,990 성경 요19:23-30(다 이루었다)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06-12-04
3,989 강의 요 19장 31-37 (십자가에 대한 예언)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06-12-04
3,988 성경 요 19장 31-37 (십자가에 대한 예언)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06-12-04
3,987 강의 요19:38-42(예수님의 장례)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06-12-04
3,986 성경 요19:38-42(예수님의 장례)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06-12-04
3,985 강의 요 20장 1-10 (부활)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06-12-04
3,984 성경 요 20장 1-10 (부활)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06-12-04
3,983 강의 요20:11-18(너희의 하나님)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06-12-04
3,982 성경 요20:11-18(너희의 하나님)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06-12-04
3,981 강의 요20:19-23(부활과 성령님)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06-12-04
3,980 성경 요20:19-23(부활과 성령님)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06-12-04
3,979 강의 요 20:24-29(도마의 믿음)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06-12-04
3,978 성경 요 20:24-29(도마의 믿음)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06-12-04
3,977 성경신학 I. 결국 자기에게로 귀환 - 최고관리자 06-12-04
3,976 성경신학 I. 결국 자기에게로 귀환 [신학] 최고관리자 06-12-04
3,975 성경신학 Ⅱ. 무한을 향한 인간들의 자기 확장 - 1. 무한이 유한자에 이르게 되는 과정 - 최고관리자 06-12-04
3,974 성경신학 Ⅱ. 무한을 향한 인간들의 자기 확장 - 1. 무한이 유한자에 이르게 되는 과정 - 최고관리자 06-12-04
3,973 성경신학 2. 무한이 유한자에 머무르는 양상 창세기 최고관리자 06-12-04
3,972 성경신학 2. 무한이 유한자에 머무르는 양상 창세기 최고관리자 06-12-04
3,971 성경신학 3. 유한자에서 방출되는 무한 - 최고관리자 06-12-04
열람 ➜ 성경신학 Ⅲ. 인간을 위한 신학의 한계- 1. 죽음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법 - 최고관리자 06-12-04
3,969 성경신학 Ⅲ. 인간을 위한 신학의 한계- 1. 죽음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법 미가 최고관리자 06-12-04
3,968 성경신학 2. 시간의식 조작을 통한 구원 시도 - 최고관리자 06-12-04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