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시간의식 조작을 통한 구원 시도
2. 시간의식 조작을 통한 구원 시도시간이란, 인간이 현재를 버티는 힘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현재의 힘으로 과거를 기억해 내는 것이지 과거의 힘으로 과거를 기억해 내는 것이 아니다. 즉 인간 영혼에 의한 '자기 확장' 시도로서 등장되는 의식이 시간 의식이다. 따라서 자기가 죽는다면 시간도 끝난다. 단지 자신이 살아 있을 동안에 자기 죽음 이후까지 세계를 확장시켜서 죽어 가는 자기 자신에게 영원한 의미를 덧입힐 수 있는 사전 작업을 미리 해놓은 것이다. 이것이 역사의식이다. 역사란 언제는 회고적으로 서술 할 뿐, 일어나는 일을 서술하지는 못한다. 인간은 '역사'라는 이름의 구원의 방주를 만들어놓고서 자기 생명을 거기에 위탁한 채 안심하고 숨을 거두고자 한다. 이처럼 마음속에 들어있는 영혼의 확장을 밖으로 끄집어내어 그동안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자아를 찾기 위함이다. 이것이 '역사 만들기'이다. 그러니 '허구'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 허구는 나름대로 이야기를 낳는다. 즉 역사란 아예 없고 역사 이야기만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허구적 서술이 어떤 시간요소를 차용하여 자기 구원을 위한 이야기를 꾸며내는가? 의미를 공유하기 위해서 인간들은 연속성, 즉 '시간성'을 도입했다. 시간을 어떻게 규모 있게 농축시키고 확대시키느냐에 따라 역사 안에서 설득력 있는 의미를 갖게 했다. 간단한 예로 시계의 소리를 들어본다. 시계가 어떤 소리를 내느냐고 묻는다면 대부분이 한결같이 '똑딱' 소리를 낸다고 대답할 것이다. 이 의성어는 시계로 하여금 인간의 언어를 말하고 있는 것처럼 나타내는 허구적 표현이다. '똑-딱'에는 두 가지의 허구성 차이를 부여된 언어가 등장하는데 물론 그렇게 하는 것도 인간 자신이다. 앞 뒤 소리가 달리 들린다는 것이다. 틀리다는 것이다. '똑'이 '딱'과 서로 틀린 글자를 사용하듯이 말이다. 이렇게 두 가지 다른 소리로 들리게 다룰 수 있다는 것은 '똑'과 '딱' 사이가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연결된 채 흐르고 있는 중립적 시간 의식을 상정할 경우뿐이다. 이것을 '지속'이라고 부른다면 이 지속이 시간 체계로서 간주될 때만 처음과 끝소리가 감지될 수 있다. 이 점은 '똑-딱'처럼 동일하게 반복되는 리듬 구조를 청취하는 피실험자가 그 구조 내에 간격은 정확하게 재생할 수 있지만, 리듬군 단위 사이, 즉 '딱',과 '똑' 사이의 간격은 그것이 일정한 경우에도 자동적으로 파악하지 못한다는 실험 결과가 나와 있다. 똑과 딱 사이의 구별은 단순히 음성적 차이에 기인하고 있는 아니다는 이야기이다. 음성적 차이에만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면 더 근원적인 것은 무엇인가? 인간은 대상을 받아들이면서 공간적ㆍ시간적 인식으로서 형태를 조성하고 리듬을 타는 듯한 환각에 사로잡힌다. 두 번째 소리를 '딱'이라고 구별해 부른다는 사실은 첫 번째 '딱'을 '똑'으로 염두에 둔 상태에서 시간적 구조를 즉흥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똑',과 '딱' 사이의 간격을 의미 있는 지속으로 채운다. 이 시계의 '똑-딱'을 우리는 시계가 나타내는 플롯(줄거리 구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 플롯은 시간에 형식을 부여함으로써 시간을 인간화시킨 구성물의 한 모델이 된다. 시간은 이처럼 인간화된 모습으로 등장한다. 거시적 플롯에 따라 종말론을 이해할 때도 이 가장 기본적인 '똑-딱'의 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똑'은 초라한 기원이라면 '딱'은 그 초라함과 같은 양으로 상응하는 미약한 최후이다. 그런데 줄거리 구성이 '똑-딱'보다 훨씬 복잡할 때는 어떻게 되는가? 가령 1000페이지의 소설을 가정해 보자. 그것은 분명 이른바 우리의 '시간적 지평' 범위 내에 있지 않으므로 경험을 체계화하여 존속시키기 위해서는 훨씬 많은 허구적 장치가 필요하게 될 것이다. 그 장치들은 근본적으로 두 가지 관계된 소리 중 두 번째의 '딱'과 같은 종류이겠지만, 분명히 보다 더 효과적이고 정교할 것을 요구받게 된다. 이 장치들은 '똑'과 '딱' 사이의 간격이 도중에 사라지려는 성향을 물리쳐야 한다. 그리고 '똑'에 이어지는 간격 내에서 '딱'이 이어지리라는 생생한 기대와 함께 '딱'이 아무리 늦게 올지라도 그 안에 발생하는 각가지 일들은 '딱'이 확실히 뒤따를 것인 양 발생한다는 의식과 관계성을 치밀하게 유지시켜야 한다. 그러한 모든 플롯(구성)은 결말이 모든 지속에 부여해줄 어떤 의미를 전제하고 또 필요로 한다. 달리 표현하자면. 그 간격에서 단순한 시간성, '딱-똑' 사이의 공허감, 즉 인간적 흥미와는 무관한 연속성들은 제거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 간격은 하나의 의미 있는 시각(때), 즉 시작과 종말 사이에 위치한 카이로스(kairos)가 된다. 그것은 심리학자들이 다루는 것보다 훨씬 큰 규모에서 그들이 '시간적 통합'이라고 부르며 현재에 대한 지각과 과거에 대한 기억, 미래에의 기대를 하나의 공통된 구성에 의해 함께 묶는 방식이다. 이 구성에 의해서 단순히 연속적이라고 간주된 것이 이제는 과거가 과거로서, 미래로서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된다. '크로노스(chronos)'이었던 것이 '카이로스'(의미 있는 특정한 한 때)가 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둘은 구별되나? 보통 신약 성경 사도행전 1:7에서 나타난 용어의 구분에서 어떤 아이디어를 얻으려한다. "크로노스(때)와 카이로스(시)는 아버지께서 자기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 알 바 아니요" 이 구절에 나오는 시간에 관한 두 표현에 대해 오스카 쿨만의 '그리스도의 시간'은 강력하게 두 구별을 극으로 몰아가고 있다. 즉 크로노스가 시간의 경과를 의미한다면 카이로스는 정해진 시간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의도적으로 이 의미에 차별을 두고 특히 지정된 시점인 카이로스을 가지고 친히 '구속사의 체제' 형성에 나셨다는 것이다.(살전 5;1/마 26:18/요 7:6/벧전 1:5) 틸리히는 '카이로스'를 특별하게 사용하지만, 기본적으로 '위기의 순간'이란 의미로, 또는 모호하게 '시간의 운명'이란 의미로 쓴다. 어떤 경우든지 그는 그 말을 '삶의 기반이 발 밑에서 흔들리는' 시대인 현대 특유의 삶의 의식과 강력히 결부시키고 있다. 그런 견해는 현대인의 철학적 탐구에서 줄곧 되풀이되는데, 그 한 예가 야스퍼스의 '한계 상황'으로서, 이것은 죽음, 고통, 죄악 등의 개인적 위기에 관한 것이지만 그것을 역사적으로 결정짓는 자료들과는 관련된다. 반면에 쿨만은 '카이로스'와 '크로노스'를 전통적, 성서적 의미로 쓰고자 한다. 즉 '크로노스'는 '흘러가는 시간' 또는 '기다리는 시간' - 묵시록에 의하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시간이고 카이로스는 의미가 충만한, 즉 종말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의미로 차 있는 구원의 시점이며 구원의 때이다. 아주 극단적인 구별이다. 그리스도는 과거를 새로 이해하게 만들었으며, 새롭게 완성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종말로 인해 모든 것이 바뀌고 종말과 관련된 과거에서 초시간적 의의를 갖는 역사적 시점들, 곧 '카이로이'가 생겨난다. 그러한 신적인 플롯(줄거리)은 종말과 관계되는 카이로이의 패턴이다. 희랍인들뿐만 아니라 히브리인들도 이러한 대립항을 결하고 있다는 것이다. 히브리인에게는 크로노스에 해당되는 단어가 없었고 따라서 '다음에서 다음으로 지겹게 이어질 뿐인' 시간과 '카이로스'와 같은 집약된 시간 사이의 대조가 없었다는 것이다.현대인의 시대의식(현대인은 여러 시대aiones가 겹쳐진 가운데 살고 있다는 의식이 강하다)과 다른 성격의 시간들 사이의 현대적 구별, 즉 신의 시간(kairos)의 도래, 신의 시간의 완성(kairos-마가복음 1장 15절). 여러 시기의 징조(마태복음 16:2-3) 등을 흘러가는 시간인 '크로노스'와 대립되는 것으로서 보는 구별에 기초가 잡힌 것은 신약 성서에서였다. 여기에서는 완성의 관념이 필수적인바, 카이로스는 과거를 변화시키고, 구약성서의 예표와 예언의 타당성을 확인시키고, 종말뿐만 아니라 인류의 태초의 기원과의 일치도 시도한다. 그러므로 '크로노스-카이로스'의 구분은 현대의 일부 신학자들의 예표론적 관심과 상관성이 깊으며, 예표들의 매력은 궁극적으로, 한가운데 처한 자신의 위치를 지각하고 시작과 종말을 조화시키는 의미 있는 시점들을 소망하는 인간에게 어떠한 도움을 주느냐로 설명되어져야 한다. 그러나 제임스 바 교수 같은 자는 모두 성서의 언어를 잘못 해석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크로노스-카이로스의 구별은 사실 신약성서의 언어에는 없는 것이다. 마가복음 1:15에는 "때가 찼고"라고 되어 있지만, 갈라디아서 4:4에 '때가 참'이라고 번역된 문구는 'pleroma tou chronou'이다. 사도행전 1:7과 데살로니가 전서 5:1에서는 hoi chronoi kai hoi kairoi라고 씌어 있듯이, 두 용어는 변별되어 있지 않고 흠정역은 이 구절을 '때와 기한'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또한 구약성서도 앞서 언급한 학자들이 지적하는 것보다는 흘러가는 시간에 훨씬 큰 관심을 보여준다고 바 교수는 말하고 있다. 신약성서에서 카이로스와 크로노스는 대조될 때도 있지만 때로는 서로 바꿔 쓸 수가 있다. 아마도 카이로스의 의미는 '결정적인 시간'에 가까운 것 같고 크로노스는 보다 양적인 의미이다. 그러나 바 교수에 의하면 성경에서 '카이로스 개념'을 얻을 수 없으며 비록 카이로이를 '결정적인 시점들'로 이해한다할지라도 그 뜻이 성경에서만 고정된 의미로 사용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오스카 쿨만은 그의 저서, '구원의 역사'를 통해서 역설하기를 예수님마저 '旣存'(이미)과 '未存'(아직) 사이에서 긴장을 나타내는 종말론을 펼치시면서 구속사의 존재를 인정하셨다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존재를 말하기보다는 하나님의 활동을 보여주는데 주력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자체는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변함이 없으시지만 하나님의 활동성으로 볼 때 '미완'의 부분이 미래에 남아 있고 이것을 한 줄로 이어 보면 분명 구원의 역사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식으로 주님의 활동을 보게 되면 아직 미래에 펼칠 하나님의 활동에 대해서는 그 내용을 현재로서는 알 수 없는 것이 된다. 이점에 대해서 그도 인정했다. 오스카 쿨만이 내세우는 구속사 이론에 의하면 이미와 아직 아니는 병렬적인 위치에 놓일 수 있는 성질의 것이고 그것도 일직선을 이룬다고 한다. 또한 그의 또 다른 저서, '그리스도와 시간'에서는 그는 초대 기독교도의 신앙과 사상은 공간적인 장소로서 이 세상이나 저 세상(혹은 차안이나 피안)을 대립시키는 데서 출발하지 않고, 오히려 이미와 지금 또는 그 때라고 하는 시간 구별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공간적인 것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모두 시간의 과정에 완전히 속해 있어 근본적인 것은 공간적인 대립이 아니라 시간의 구별이다 는 것이다. 영원이라는 것도 또한 시간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무한정한 시간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이 과연 오스카 쿨만과 같이 시간을 공간적인 구원관과 대립되는 것으로 이해했느냐 하는 점이다. 예수님은 인간의 의식을 공유하고 계신 분이시고 모든 말씀도 이 틀 안에서 이루어진다. 인간의 시간 의식 구조는 본능적으로 공간적 그림을 구성하며 이해하게 되어 있는데 시간을 흐르는 강물처럼 일직선적 도상(圖上)으로 생각하는 것도 이미 공간적 사고의 연장이다. 그런데 오스카 쿨만은 이 직선적 시간인식을 가지고 모든 입체적 공간적 의식 형태를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즉 시간 의식 이전에 공간 의식이 우선되어 있다는 말인데, 공간이란 실은 점들의 집합이고, 시간은 공간의 부정(否定)이며, 공간은 점의 부정이기에, 시간은 점의 부정에 대한 부정이다. 바꿔 말해 점성적인 속성이 곧 시간이다 는 것으로 귀결된다. 이렇게 되면 시간이란 점으로 나타나는 '지금'의 연속이 되어 버린다. 그런데 뱀이 스스로 자기 꼬리를 먹어 들어가서 결국 자기 모습을 사라지게 할 수 있을까? 이런 일은 불합리하다. 그런데 인간의 합리는 자기 모습이 결코 살아지지 않는 한도에서는 합리이다. 시간관도 이 바탕 위에서 출발하고 있다. 사람들에게 있어 주님이 불합리하게 보이는 것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아들이라는 존재성에 있었지 결코 '이미', '아직'이라는 시간관 조작과 관련된 것이 아니었다.(요 10:33) 시간을 일직선상으로 그려놓으면 이미란 아직을 직선 상에서 후차 지점에 두고 있지 않는 경우를 뜻하고, 아직 아니는 이미를 일직선상 앞에 두지 않았을 때나 성립한다. 수학에서 직선이란 점들의 순차적 계열에 따른다. 따라서 아직, 아직, …의 이어짐으로 표현된 일직선뿐이든지 아니면 이미 라는 한 점으로 직선을 마감해야 해야 된다.그렇다고 해서 일직선 위에 묵시 세계라는 명목으로 직사각형과 같은 면적이 있는 도형을 얹어 그릴 수는 없다. 왜냐하면 묵시는 시간과 점으로만 표현 할 수 있지 면적이 있는 공간으로 표현하면 묵시란, 기껏 '많은 시간들의 연속'이라는 개념으로 왜곡되어 정의(定議)도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오스카 쿨만의 이와 같은 무리수는 예수님의 말씀하시는 말씀의 완성을 곡해했기 때문이다. 즉 '이미'와 '아직 아니' 사이에 긴장이 있다고 했는데, 시간 자체가 긴장을 갖는다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질을 느끼는 주체자들이 갖는 긴장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의 긴장감이나 사도나 초대 교회 성도들의 긴장감은 '아직 아니'라는 시간상 미착성(未着性)으로 인해 아직도 손도 못된 미해결 문제의 존속으로 인해 야기된 긴장이 아니라 '이미'를 읽어내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이 어두움의 세계의 속성으로 긴장했고 또 고난을 받았다. 오스카 쿨만처럼 그저 다가오는 시간에다 모든 고민거리를 위탁해서 넘겨버리는 식으로 해결 지우려한 것이 아니라 말씀이 이미 완성되었기에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대내외적이고 심적인 악의 유혹과 공격에 시달려야 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그들은 구원의 '아직 아니'로 보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기 중심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긴장이 아니라 기쁨 가운데 있었다. 성령이 주는 기쁨이다.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4-7) 이 본문에 볼 것 같으면, 주님이 지키겠다는 데 더 이상 아직 아니가 무의미하다. 주님이 아니 지켜 주겠다는 것인가? 성도들은 예수님이 모든 활동을 하시던 이미 말씀이 성취된 가운데서의 활동임을 믿었다. 따라서 그들은 지구가 아직 파장을 맞이하고 있지 않고 시간적으로 끄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고 해서 아직 구원이 덜 되어서 뭔가 주님께서 일을 더 하시고 있다는 식으로 이해하지 않았다. 그저 착수 만하고 마감은 아직도 되지 않은 미완성적 구원관은 예수님이나 사도에게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사고이다. 실제가 현상으로 드러날 때, 그 현상은 실제적 차원의 내용에 의해서 평가받지 다른 범주적 평가를 허용할 수 없다. 이미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은 '이미'의 담긴 내용대로 '이미'의 고유 가치만을 드러내 줄뿐이다. 예수님의 이미는 '아직'과 대비되는 '이미'가 아니라 '이미'의 성과 자체가 아직도 시간 의식에 기대를 거는 그 '이미'를 공박하는 기능을 수행하자고 나타난 '이미'다. 오스카 쿨만 교수의 구속사 이론의 치명적인 결함은, 예수 그리스도 중심성을 절대적 시간에 예속된 예수 그리스도 중심성에 인식하고 있다는데 있다. 즉 그리스도 중심성에서 십자가 사건이 터진 것이 아니라 구속사 선상의 한 시점에 국한되는 사건으로서의 십자가 사건이 다른 시간의 사건들과 차별되게 대조된다는 시점에 놓여 있다는 시점에 있다는 것 인해 비로소 그리스도 중심성이 확인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중심성에서 나오는 십자가 사건이 아니라 그 십자가 사건이 전 구속사의 중심점 작용을 했다는 것에 준해서만 그리스도 중심성을 인정하려고 한다. 이렇게 되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그리스도 중심성에서 유발되는 일들이 아니라 일단 십자가 사건이라는 역사의 '중심점 만들기'를 위한 것이 되고 만다. 그리스도 중심을 보여주자고 일어난 십자가 사건이 역사의 중심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변모되고 만 것이다. 세상 만사가 그리스도 중심이라는 것은 옳다. 하지만 그리스도 중심을 '시간의 중심' 혹은 '구속사의 중심'으로 옮겨 놓을 수 합당한 사유의 연결 고리가 제시될 수 있는가? '시간의 중심'이라는 것이 과연 개념적으로 도저히 성립될 수 없는 표현이다. 오스카 쿨만의 주장대로 구속사가 영원에서 영원까지 흘러간다면서 어찌 중심이라는 것이 따로 규정될 수 있단 말인가? 단절된 막대기 같으면 무게의 중심점이나 길이 중심점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수학의 수직선과 같은 것에 중심점이라는 개념은 있을 수 없으며단지 한 지점에 의해서 두 개의 직선으로 분리해 나가는 분절점은 상정 할 수 있다. 따라서 오스카 쿨만 교수가 십자가 사건을 구속사의 중심으로 주장하려면 구속사가 한 개가 아니라 두 번째로 새로 시작하는 또 다른 구속의 역사라고 주장해야 한다. 이런 견해에 부합되는 학자가 볼프하르트 판넨베르그이다. 이 학자가 주장하는 바는, 하나님의 약속은 스스로를 넘어서 더 나아가는 성취를 지시하여 첫 성취 자체가 다시 약속이 된다는 것이다. 구약에서 먼저 번 선지자가 이야기한 것이 문자대로 후대에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후기 선지자의 시대에 성취된 역사는 그 예언을 추월해서 미래의 내용이 더 추가적으로 함유된 성취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이 원리는 신약 시대에 있어서도 동일하기에 예수님의 부활도 미래의 것이 선취(先取)되어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이다. 궁극적 목적을 향해서 무작정 '약속-성취'의 속성만을 보이는 역사가 아니라 최종적 계시가 예수님에게는 먼저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부활만큼은 비추월성을 지닌다. 그렇다고 해서 미래의 모든 계시가 전부 우리에게 다 알려지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신성에 대한 인간의 인식은 모든 사건이 완결된 후에 라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최종 통치에 마주 향해 가는 아직도 열린 미래가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그리스도의 사건은 역사 안에서 아직 미완결이며 잠정적이다 고 보고 있다. 이처럼 판넨베르그가 말하는 종말이란, 세상 종결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선취성 안에서 새롭게 미래로 출발하면서 또 하나의 최종 성취를 기다리는 보편사이다. 하지만 이러한 분절점 설정은 같은 구속사 선상에 놓여 있는 다른 사건들에 의해서는 자체적으로 결정될 수 없고 또 결정되었음을 증명할 길도 없다. 구속사가 되었든 보편사가 되었든 그리스도의 사역과 그 의미에 대해 역사를 정립하는 방법으로는 온전히 받아낼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역사나 사건 자체에서 계시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된 계시를 배척하는 속성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하늘에서 오신 의인이 나타나야 한다. 십자가 사건은, 인간들이 인식 근거로 여기는 구속사 위주의 사건이 아니라 다른 세계에 계신 분에 의한 말씀 성취 차원의 사건임을 뜻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 인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요 8:23-24) 즉 현재 인간들이 아무리 역사를 끌고 다녀봤자 죄 가운데 죽는 세계 안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는 구속사 자체를 완성시켜 건지기 위함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이 그리스도 중심으로 다 이루었다는데 다른 차원의 선포이다. 예수님은 때를 성취하신 분이 아니라 말씀을 성취하신 분이다. 단지 실시하신 특정 때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특정 때를 기다리시기는 했지만 그 특정 때를 위해서 오신 분은 아니라 말씀의 성취를 위해 오셨다. 이처럼 오스카 쿨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나 존재 보다 구속사라는 시간적 요소를 절대적 계시의 대용으로 삼고자 했다. 이는 유대교적인 히브리인의 사고의 틀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본질에 접근하려는 시도로 볼 수밖에 없다. 흔히 고대 문화에는 두 대조적인 인식 사유가 있었다는 것이다. 히브리적 사유와 그리스(헬라)적 사유가 그것인데 그 중에서 하나님께서 특별히 한 쪽 사유, 즉 히브리적 사유를 계시 전달에 적합하다고 여겨 사용하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히브리적 사유 쪽을 분석해 보면 하나님의 본래의 취지가 보다 확연해 진다는 것이다. 토를라이프 보만 교수는 그의 저서, '히브리적 사유와 그리스적 사유의 비교'에서 히브리 사유적 시간관의 특징은, 궁극적인 목적을 지향하는데 있다고 했다. 과연 이러한 인식론이 계시 이해에 도움이 되었을까 아니면 장애가 되었을까? 성경을 통해서 직접 확인해 볼 수 있다.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가라사대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마 22:41-46) 바리새인들의 말씀 해석은 시간의 흐름에 준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의 틀은 예수님 앞에서 무용지물이었다. 궁극적 목적을 지향하는 역사 인식이 도리어 메시야 앞에서 좌초된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은 인간의 모든 것을 죄라고 규정짓고 부정해 버리시기 때문이다. 그것이 히브리적 사유든 아니면 헬라적 사유든 상관없이 말이다.인간의 시간 관념 속에는 카이로스와 크로노스 외에도 아이온(시대)과 플레로마(특정한 질의 때의 충만) 같은 것들도 있다. 물론 이런 용어들의 사용은 일종의 그 시대의 용어 사용에 있어 서로들 언어 규칙에 존중하겠다는 의식이 깔려 있다. 이런 게임은 단순히 즐기기 위함이 아니라 모호한 문화적 현상들을 보아 합리적으로 분명하게 하기 위한 것도 있고 물리적 시간성과 조화를 위한 목적도 있다. 그렇게 해서 얻고자 하는 것은 미래 시대에 대해서 확신 있는 내용으로 확장시켜 채우자는 데 있다. 인간은 생래적으로 미래를 지향한다. 아무리 지금 형편이 엉망이라 할지라도 구원 될 미래를 내다보는데 소홀히 하지 않는다.따라서 의미의 충만과 완성의 때, 즉 '플레로마'를 요청한다. 성경이나 신학이 아니더라도 모든 역사관이 이런 성향을 담고 있다. 플롯(줄거리)에 의해서 과거 및 중간의 시점과 연결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미래에 대한 인간들의 물릴 줄 모르는 관심 탓이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똑-딱'이라는 시간성으로 이어지는 인간성이 동일한 인간성을 유지시켜 주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과연 과거의 그 인간과 현재의 그 인간과 미래의 그 인간이 그 어떤 변화를 보이지 않고 모든 면에 있어 연속적인 동일인으로 유지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구속사는 신학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모든 인류의 문학과 문화가 자생적으로 배태해 오고 있다. 작품에 담겨있는 구속사는 구원 사건의 실제적 재현이 아니라, 이야기거리가 수시로 첨부되어가서 구성된 구속사라는 이름의 시나리오이다. 이렇게 되면 이러한 구속사가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주님에 의한 실제적 구원 사건을 대단히 모호하고 낯선 일로 생각하고 주류 밖으로 추방해 버린다. 자신들이 만든 구속사의 가치는, 구원 사건의 실제적 발휘가 아니라 구원 사건에 관해 그 의미성을 수집하여 거기에다 자기 구원을 대비시켜 그 진위를 확인해 보자는 데 있다. 그런데 이 작업으로 인해 지금도 바람같이 일하시는 성령의 구원을 배척하고 핍박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허구란 문학에서 이단아적인 사고가 아니라 필수적이다. 허상의 세계는 조작되기를 요청하고 그렇게 해서 당대의 민중들에게 그들을 지배하는 신화라는 허구성에서 되레 변화를 촉구하는 각성의 계기를 제공해 준다. 만약 허구의 이러한 반발이 없다면 인간들의 옛날 신화로 자꾸만 후퇴하기 때문에 허구야말로 현재를 현재의 의미로 이해케 하고 미래로 향한 개방의 발판을 닦아주는 현재가 되도록 해준다. 문학에서의 허구란, 이처럼 시간과 시간의 간격에다 인간의 존귀함과 영원함을 집어넣어 주는 역할을 한다. 동반해서 시간도 의미 있는 것으로 사용케 한다. 혼돈에 대해 사람들은어떤 식으로도 방치해 두는 법은 없다. 인간들은 혼돈을 겁내며 그것을 필연성 속으로 집어넣어 버리려 하다. 이것은 인간 스스로가 독립성을 지니지 못하고 자꾸만 시간의 노예가 되려고 근성 때문에 발생된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지 시간이 아니다. 만약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시간 자체를 기다린다고 한다면 기독교 교리에서 말하는, "이제 믿을 것은 주의 재림밖에 없다"라는 표현은 문학에서의 "이제 믿을 것은 허구성밖에 없다"로 표현 안에 포괄적으로 담긴 셈이다. 앞으로의 세계는, 현재의 세계와 대비되면서 존재 확인이 안 되는 가상의 세계라는 의미에서 그런 '허구'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다. 그 허구의 세계에 대해서 인간들이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으면서도 그래도 뭔가 이 지금의 세계를 도와주고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허구의 세계에서는 아무리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라는 허구적 표현과 시간의 틀을 경과하지 아니하면 안 된다. 이를 위반하면 신화로 분류되어 과거의 패러다임(인식 체제)라고 핍박을 받게 된다. 성경을 문학적으로, 문예적으로 해석을 시도하겠다는 의도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실제와 현실을 그 어떤 경우에도 언어의 상징적 기능이 동원되어 '현 시대의 문학'으로 나타내 보자는 것이다. 언어 범주가 인간의 사고 범주를 다 수용할 수 없지만 그래도 언어 범주를 입장에서 서서 보면 수용이 다 되지 않다는 명백한 증거가 없는 한 완전히 수용한 것으로 간주해도 무방하다는 약조가 사회적으로 형성될 수가 있다. 기호 체제의 본질은 '나타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게임의 규약'이다. 놀이를 하는 어떠한 사람도 놀이 그 자체보다 더 위대해 질 수는 없는 법이다. 게임 안에서의 진리란, 그 게임의 규칙 밖으로 나가지 않겠다는 조건을 받아들여 자기 완결적으로 조작해 낸 것이기에, 다양한 경우들을 통해 절대조건을 대리하는 분산된 조건과 의미만을 제공할 뿐이다. 즉 변별성만이 의미를 생성한다는 뜻이다. 이 사실은 인간이 자기 사회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에 마찬가지이다. 이 사회를 변별적 구조를 통해서 잡아내려고 한다. 구속사는 이 작업의 일부이다. 문학을 이루는 개인의 상상력은 사실에 있어 그 사회 구성원으로 갖는 체험의 일부이다. 따라서 작가의 상상력 안에는 자신의 속해 있는 그 사회의 성질을 함유하고 있기에 타인과 공감하고 공유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고자 작품 활동을 한다. 접쳐진 사회 구조가 작자의 예리한 해석력으로 인해 펼쳐지고 그 틈 사이에 숨어 있어 의미가 비로소 만개 한다. 작가는 자신의 상상력을 사건이라고 간주하고 그 사건의 다발을 텍스트화시켜서 자체적으로 독립적 존재임을 외부에 알리고, 그 독립된 텍스트가 문학(문예)의 옷을 걸치고 나타나서 자기 시대가 요구하고 확인하고 싶은 진리치를 예술적 유혹으로 포장하여 타인과 대화에 나서는 것이다. 자기에게서 일어난 사건을 타인과 더불어 공유된 시간이기를 기대한다. 세계는, 우연은 제거되고 영원한 반복성만이 규칙으로 자리잡기 때문이다. 이것이 언어 소통에 준한 인간 사회의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관을 신학자들은 놓치지 않고 계시를 정의(定議)하는 아이디어로 삼는다. 그리스도의 화해 메시지를 바탕으로 해서 그 위에 인간 사회를 놓으면 개인주의적 계시관과 더 이상 계시를 두고 주도권 싸움을 벌릴 필요도 없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우리'라는 호칭으로 교류가 되는 하나님의 계시 자리가 얻어진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인간에게 화해의 손길을 뻗친 이상 '그'분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너'로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나'들은 '우리' 안에서 언제나 '너'이신 분 앞에서 '너'인 채 만나게 된다. 이로서 계시는 '그' 분과 개인적인 '나'의 만남이 아니라 '우리'라는 동일성이 갖추어진 상황 안에서 서로의 얼굴을 마주 대하면서 찾아드는 질문과 대답의 장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필연적으로 '교회'라는 단체에서 시행되는 모든 교육적, 훈계적 사역은 반성과 참된 회개를 유발하는 중재적 사역으로서 계시적 차원에서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즉 인간들이 각자 개인적인 '나만 관심 두고 '나' 그 자체를 본질성을 삼고 존재하는데서 벗어나서, 자발적으로 자기를 부인하시고 우리 안으로 들어오신 '너' 되시는 분을 뵙기 위해서라도 동일한 부정성이 각자에게도 유발될 필요가 있는데 이 중재적 계시 활동이 지금도 교회에서 수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로서 교회의 존재함, 그 자체는 계시의 일부로 편입되면서 교회 역사도 나름대로 계시로 대우받는다. 즉 자기 교회 위주의 신의 계시사(啓示史), 신의 구속사도 따로 편성되어 계시의 일부로서 인정받고자 하는 것이다. 사도행전은 28장으로 멈춰지는 것이 아니라 29장, 30장, 31장… 계속 되면서 하나 하나가 신의 계시로 편입되면 계속 미완성으로 남는다는 것이다. 인류는 이처럼 교회 존재를 구심점으로 늘 하나님과 함께 있으며 하나님은 인간을 '우리' 안으로 이끄시며 그 안에서 남을 위한 '너'가 되도록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미 있는 교회를 도저히 부정하지 못한다고 장담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계시라는 것이 성경이라는 텍스트에 국한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고 역사가 곧 계시가 되고 성경은 이 계시활동의 일부로 편입된다. 이로서 성경은 역사의 대상물로서 풀이 가능한 내용이 되었다는 주장을 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의 쓰여짐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보편적 인식을 염두에 두고 의사 소통하기 위하여 제시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인간의 물음은 끝없이 이어지게 되어 있고, 물음의 영원성은 보편성에 대한 희망을 피력한 것이다. 즉 인간이 만들어내는 절대성이라는 계시인식은, 이미 없어져 버리고 사라져 버리는 것들까지 보편적 관념들을 동원시켜 붙잡아 묶어둔 모음집이다. 그래야 지만 '나'에게서 한없이 터져 나오는 물음 자체가 의미가 있는 것이 되고 이로 인하여 '나' 자체에 대한 가치가 확보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이 되었든 그 어떤 절대 사물의 관한 과학적 원리가 되었든 종국에는 '나'의 절대적 가치를 능가하는 가치는 '나' 자체에서 물음으로 도출될 수 없는 법이다. '나'를 중심으로 한 산발적인 게임에 늘 파묻혀 사는 것이 인간이다. 여기서 '인간 행함의 보금자리'가 장만된다. 즉 나의 행함도 계시가 될 수 있다는 발상이 뜬다.